초저녁의 졸림을 이기려고 눈을 부릅뜨면서, 저녁 일일 드라마의 오늘 분량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엄마 얼굴을 보고 있다. 웃음이 난다. 졸리면 그냥 주무시지, 기어코 본방 사수하겠다면서 주인공의 복수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계신다. 일상의 낙이 매일 저녁 방송하는 TV 드라마를 보시는 건데, 그게 그렇게 웃기다. 마치 그걸 보지 않으면 하루를 마무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인지... 옆에서 조용히 앉아 이 책을 읽고 있다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봤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을까 하고.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갖고 싶었다는데,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은지 계속 생각하고 있다.

 

 

제목만 들으면 무슨 스릴러인가 싶겠지만, 유골의 주인이 엄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놀라움과 궁금증이 먼저 생길 거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어야 이런 말이 가능할까. 혹시 경험해본 사람은 조금 알까? 막 화장터에서 나온 유골을 담은 유골함을 손에 들면 따뜻하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적당한 온도다. 온돌방에 앉아 있는 느낌으로 따뜻하다. 만약 내 엄마의 유골이 그런 느낌이라면, 한 번쯤 그 유골함을 꽉 안고 싶어질 것 같다. 엄마를 안는 기분으로,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저자의 저 말을 듣고 나니 궁금해졌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어야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고. 눈동자가 떨릴 정도로 엽기적인 말로 들리지만, 엄마를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다는 의미를 알게 된다면,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문장 그 자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순간의 마음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지만, 이 강렬한 감정이 부르는 아픔을 알 것 같아서다. 사랑하는 엄마의 부재, 더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 한 번쯤은 상상해 보고 싶지 않은가? 상상과 현실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겠지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감정을 알기에는 상상만 한 게 없으니.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수시로, 계속 상상한다. 내 엄마와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지를.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죽음을 볼 때마다, 그 죽음의 대상이 엄마가 될 때를 생각해 본 적이 많다. 특히 언젠가부터 엄마의 병원행이 잦아질 때마다 생각은 극단적인 쪽으로 기운다. 작가 자신이 20대에 겪은 혈액 질환 때문에 엄마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기에, 그 이후로도 엄마의 존재는 남달랐을 것 같다. 저자의 엄마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아들을 사랑하고, 한없는 애정과 격려를 보내며 아들의 삶을 응원했다. 그런 엄마가 암이라니, 더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말기 선고를 받고 나니 이제 엄마의 병을 고치기보다는 엄마의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해드려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저자와 애인은 엄마의 병간호를 하고, 긴 시간 엄마를 돌보면서 지쳐갈 때쯤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 글은 저자가 의사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해 두던 것이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어떤 순간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그 기록을 읽는 것에서 그만이겠지만, 그 대상이 엄마라면, 부모라면 의미가 달라진다. 더는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아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개를 끄덕이면 슬픔에 공감하는 이들, 참 많을 것 같다.

 

늘 함께일 거로 생각했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질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떠나간 이를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게 고통일지 기쁨일지 모르겠다, 아직은. 주변 많은 이의 죽음을 애도했고, 지금도 가까운 이의 백혈병 투병을 지켜보고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만, 아직은 그 슬픔을 100% 공감할 그릇을 갖지 못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아니었기에, 그저 누군가의 죽음 때문인 이별을 모르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그때마다 상상의 시간은 길어진다.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아마 그들도 이런 마음이겠지 하는 심정을 이해 하고자, 언제가 내가 마주할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며 가슴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평소 엄마와 얘기하면서도 엄마의 죽음을 빼놓지는 않는다. 작년 말에는 엄마가 죽으면 가고 싶다는 봉안당에 미리 다녀왔다. 조건이 맞으면 좋은 자리에 계약해놓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엄마의 종교를 바꿔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 포기했다. 외삼촌(엄마의 오빠)이 계셔서 더 마음이 가는 곳이었는데,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엄마가 종교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곳으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얘기한다. 그곳에서 쉴 주인공인 엄마와 함께 말이다.

 

저자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저자의 아버지는 뜻밖에 담담해 보였다. 아내의 죽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마는,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는 표정으로 아내를 보내는 모습이 의연했다. 그런 아버지가 술이 늘고, 집안이 지저분해질 정도로 치우지 않고, 일상이 흐트러져 있었다. 겉으로는 자식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진심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슬픔은 누구나 똑같은 거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저자 형의 모습도 비슷했다.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고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던 저자에게 시선이 쏠리곤 했는데, 정작 그 주변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이런저런 정리를 하면서, 남겨진 이들이 감당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 보였는데, 그 이면의 표정을 미처 다 읽지 못했던 거다. 가족을 잃고 슬프지 않은 사람 없고, 엄마의 돌봄에 감사하지 않은 자식 없다. 그러니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은 생애 가장 큰 슬픔일 것이다.

 

 

엄마를 보내고 난 후의 이야기들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발견하는 엄마의 메모들, 엄마가 가꾸던 정원이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빈자리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남겨진 이들은 또다시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한 번씩 떠오르는 기억들을 마주해야 하고, 울고 웃으면서 그 시간을 추억해야 한다. 엄마의 강요로 남겨두었던 정자를 꺼내 아이를 낳게 되면서 또 한 번 엄마의 고마움을 느끼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저마다의 의미를 쌓아간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말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더라도, 마음이 알고 느끼는 것들을 그렇게 적립하는 시간이었다.

 

몇 십 년을 엄마가 해주시는 밥 먹고 살다가, 이제는 조금씩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엄마가 지금보다 덜 늙었을 때 따로 살아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요즘이다. 언젠가 혼자서 지낼 엄마를 생각하니, 작년보다 한 살 더 나이 드신 엄마가 부쩍 더 늙어 보이는 건 왜일까. 같이 살 집을 알아보자고 해도 싫다고 하시고, 따로 살 집을 알아본다고 하니까 투덜투덜 서운해하시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을 부리는 엄마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복잡한 요즘이다. 같이 살자니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봐 싫어하시는 것인지, 따로 살자니 갑자기 혼자 지내는 일상이 겁이 나는 것인지. (사실 나도 많이 무서운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겁이 많아지고, 본인 스스로 결정하는 것보다 자식에게 물어보고 의지하는 모습이 늘어간다. 한때는 이 집의 가장이었던 당신. 이제는 본인이 돌봄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는 게 슬프면서도 안도하는 걸 볼 때마다,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힘듦을 겪었을지 새삼 알겠더라. 그래서 엄마의 지금 변덕을 다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홀가분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서성이는 엄마, 당신의 두려움과 떨림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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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작품을 잘 읽지 않았다는 것을 이렇게 확인한다. 이 책으로 처음 만난 '양 사나이'는 하루키의 초기 작품부터 등장하는 캐릭터라고 한다. 조금은 특이한 캐릭터가 분명하다. 언제부터 생각해서 세상에 내놓은, 왜 '양 사나이'라는 인물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루키의 작품 곳곳에서 보이는 인물이라고 하니 하루키와 상당한 인연을 만들어낸 인물임은 틀림없다. 게다가 이번에는 이우일의 일러스트와 함께라고 하니,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는지 알 수 있다.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날을 배경으로 양 사나이의 일화를 만들어낸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막상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그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양 사나이의 이야기 하나가 탄생했고, 동화 같은 이야기에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할지어다.

 

양 사나이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 양 사나이 협회에서 선택받은, 성 양 어르신 승천일을 기념하며 음악을 작곡할 대상으로 선정된 것. 크리스마스에 맞춰 음악을 내놓으면 되는 것을 여름에 의뢰를 받았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양 사나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음악을 만들 수가 없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크리스마스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슬럼프인가? 모르겠다. 우연히 만난 양 박사의 말로는 저주가 걸렸다고 하는데, 저주에 걸렸다면 그 저주는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이야기는 저주에 걸렸다고 여긴 양 사나이가 양 박사의 말대로 시작한 여정에서 출발한다. 크리스마스 날 오전(새벽 아니고?)1시 16분에 성 양 어르신이 빠진 구덩이에 빠지면 되는데, 그걸 양 사나이가 직접 파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건 뭐냐? 무슨 세트 지어서 재연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저주를 풀 방법이라니 안 할 수도 없고, 참... 그렇게 열심히 판 구덩이로 들어가기만 하면 저주가 간단히 풀릴 줄 알았는데, 인생사 어디서나 밖의 변수는 있는 법.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서 양 사나이의 저주 풀기 계획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데... 이거 어떻게 잘 풀리기는 하겠어? 내가 다 걱정이구먼.

 

예정에 없던 모험인지 여행인지 모를 일들은 양 사나이의 저주를 풀기는커녕, 뭔가 자꾸 모호하고 이상한 곳으로 흐르기만 한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인물과 사연들은 상상 속의 이야기로 거듭나고, 느리고 어수룩하게 보이는 양 사나이는 특이하게 등장하는 여러 인물에게 사기당하는 캐릭터처럼 엉뚱하고 순박한 느낌에, 결국에는 그들의 진심이 나쁘지 않다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면 '아하~!' 하는 감탄사와 함께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바다까마귀 부인, 208 209 쌍둥이 소녀, 오른 꼬불탱이 왼 꼬불탱이(처음에 나는 이들을 꽈배기라고 불렀다는...), 양 박사와 성 양 어르신, 그리고 그 저주가 시작된 구멍 뚫린 도넛까지. 어느 것 하나 특이하고 개성 없는 것이 없어서인지, 읽는 재미와 함께 보는 재미까지 더해진 책이다.

 

사실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양 사나이를 비롯한 그동안 그의 작품에서 보였던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또 한 편의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하는 과정을 보는 게 즐거웠다. 상상력과 더해진 크리스마스라는 즐거운 시간을 어떻게 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짜잔~ 서프라이즈~!' 뭐 이런 느낌? ^^ 단순한 이야기로 머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우일의 그림과 어우러져 완성된 이야기는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것처럼 흥미롭고 재미있다. 우연히 마주한 인생의 저주와 그 저주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양 사나이의 노력이 눈물겹지만, 결말에서 마주한 즐거움은 그 노력의 끝에서만 만날 수 있는 웃음이리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즐기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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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밥상에 오른 음식은 제육볶음이다. 어제 마트에서 할인 가격으로 사 온 부드러운 돼지고기에, 온갖 야채를 듬뿍 넣어 얼큰하고 달달하게 볶은 게 내 입맛에 딱 맞는다. 고기보다는 야채를 먼저 집어 먹고 있는데, 엄마가 슬쩍 고기를 집어 나 있는 쪽으로 놓는다. 같이 먹자는 의미다. 어제 같이 사 온 밤맛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눠 마시면서,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많이 먹게 된다면서 투덜투덜. 그래도 젓가락질을 멈추지는 않는다. 맛있으니까. ^^

 

일상의 많은 날에서 종종 엄마와 이런 시간을 보낸다. 가끔은 집 앞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한 그릇씩 먹고 오거나, 영화 <겨울왕국>을 보자는 엄마의 말에 더빙판을 예매하거나(엄마는 자막 읽기 힘들다면서 한국 영화나 애니메이션 더빙을 선택한다), 저녁 하기가 귀찮다면서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씩 입에 물고 걸어오거나, 집 근처 기찻길 주변을 돌면서 운동이라고 우기거나... 생각해보면 너무 소소하다. 엄마가 자식에게 바라는 건 참 많을 테지만, 사실 나는 엄마의 기대에 맞는 결과를 내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게 언제나 미안하면서도 너무 익숙하다. 엄마니까, 엄마는 자식의 부족한 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줘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언제나 지켜보면서 또 기다려줄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또 그렇게 믿어왔다.

 

 

그게 언제까지일까? 내가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엄마가 언제나 나를 지켜봐 주고, 엄마가 우리 형제들 보면서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우리가 사는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아는데도, 자꾸만 착각하게 된다. 현재 상황에 핑계를 대고 안주하면서 기다려주는 시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꾸만 미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어떤 순간이 다가오고 후회를 하겠지. 그때는 이미 늦을 테지만, 어리석은 나는 또 그걸 모르고 계속 지금만 보고 있겠지... 우와노 소라의 소설에서 단편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328번 남았습니다」를 읽으면서, 어리석은 자식의 모습을 또 한 번 보게 됐다. 아마도, 어쩌면 나도 가즈키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가즈키의 열 살 생일날, 눈앞에 이상한 숫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어머니의 요리를 먹을 때마다 하나씩 줄어들었다. 이상하다. 다른 때는 아닌데,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먹을 때만 숫자가 줄었다. 가즈키는 숫자가 0이 되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눈앞의 그 숫자는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먹을 때만 줄어드니까, 언젠가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이 그 숫자를 다 채우게 된다면 더는 어머니의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계속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다. 어머니가 안 계시게 되는 상황이 올 거고, 더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지 못하게 된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가즈키는 결심했다. 더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더는 눈앞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게 하기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엄마가 해주는 밥을 안 먹어? 엄마가 얼마나 서운해 하시겠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언제까지 먹을 수 있다고 그러는 거야?!’ 한집에 살면서 서로 다른 상차림으로 밥을 먹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번거롭기도 하지만, 그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가 없다. 가즈키는 아예 집에서 밥을 먹지 않거나 밖에서 사먹곤 했다. 그러다가 집을 떠나서 대학에 진학하고, 취직을 하고서도 집밥을 절대 먹지 않았다. 숫자는 328에서 줄어들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다짐이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가즈키에게는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이렇게 할 거라고 다짐하면서도, 가까운 곳에서 맡아지는 엄마의 집밥 냄새를 이겨내야만 했다. 그리웠다. 엄마의 집밥도, 엄마의 표정과 따뜻한 말도. 하지만 본가에 갈 수는 없었다. 갈 때마다 음식을 먹이고 싶은 엄마의 간절함을 알기 때문이다.

 

소설은 의외의 결말로 후회와 눈물을 만든다. 설마 그런 상황이었을 줄이야. 왜 한 번도 그런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결말은 잔인했다. 가즈키에게 땅을 치고 후회할 상황을 만들어버린 작가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왜 우리는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를 아프게 하는지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소중한 것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영원하지 않은 시간을 조금 더 아껴두고 싶은 마음을 후회하게 하는 거다.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은 안 되니까’가 아니라, ‘형편이 곤란하니까’가 아니라. 오직 지금만이 가능한 것을 눈앞에서 확인한 기분이다. 자꾸만 미루다가는, 조금 더 있다가 할 거라는 핑계가 더는 통하지 않은 거였다. 가슴이 알싸했다. 식상하지만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새기게 한다. 가즈키의 선택의 결과는 후회였지만, 후회 그 후의 일상은 다시 소중함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엄마, 집으로 갈 테니까…… 뭐라도 좀 만들어줘.”

“뭐라도, 라니……. 언제?”

“지금 당장.”

“지금 당장!? 뭐, 뭘 먹고 싶은데?”

“뭐든지 좋아.”

“…… 그래서, 뭘 먹고 싶니, 가즈키?”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328번 남았습니다 - 42~43페이지)

 

이상한 카운트다운을 마주하게 된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비슷한 선택으로 비슷한 상황을 만든다.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벅차서 일상의 소중함 따위는 잊고 지낸 지 오래일 사람들에게, 세상 모든 일에 있을 그 끝을 상상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푸근한 냄새를 풍기는 엄마의 집밥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뭉클했다. 만약 우리 인생에서 무언가가 남은 횟수가 보인다면, 그게 엄마에 관한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너무 잘 알고 있는 답마저 당황해서 제대로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런 감정적인 이야기에 찬물을 끼얹듯 보다 현실적인 엄마의 이야기를 하는 게 케스터 슐렌츠의 『엄마, 조금만 천천히 늙어줄래?』이다. 갑자기 쓰러진 엄마 때문에 형제들의 일상은 변한다. 엄마를 모실 병원, 비용을 처리할 보험, 치료 후 돌봐드려야 하는 요양원 등을 거치는 길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거기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엄마의 변덕과 괴팍한 성격은 덤으로 감당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게 엄마라는 걸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항상 우리를 돌봐주는 엄마였는데, 언제 엄마가 우리가 돌봐드려야 하는 대상이 된 거지? 그게 언제였든, 현실은 현실이다. 저자와 형제들에게는 엄마를 돌봐야 하는 현실만이 남아있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나를 돌봐주고 내 삶의 기둥이었던 엄마가, 이제는 내가 돌봐드려야 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 때문에 이미 어느 정도 경험하긴 했지만, 저자가 겪은 시간을 적나라하게 들려주는 이 글을 마주하니까 막연하게 생각하는 그 순간이 생생해진다. 언젠가 엄마가 거동이 불편해지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상이 힘들어지고, 병원에 드나들고 요양원에 머물러야 할 시간이 많아진다면, 나는 그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저자 역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을 마주하면서 당황한다.

 

 

케스터 슐렌츠가 엄마를 돌보며 작성한 이 책은 엄마를 떠올리면서 감성적이 되기 쉽고, 부모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에 따라오는 일상이 변화를 현실적으로 제시한다. 감상에 빠져 허우적대기에 앞서 현실에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을 언급한다. 우리가 비켜갈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갑자기 닥친다면 더 당황하겠지만, 언젠가는 닥칠 거라고 생각하면서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던 거다. 혹시나 아프게 되면 병원에 모셔야 할 상황, 그때 간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퇴원 후 돌봄은 어느 시설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후로도 계속되는 돌봄 상황에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 복지제도가 한국보다 잘 되어있다는 독일에서도 이런 경우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국가가 해주는 것보다 개인이 준비하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대부분이었던 거다. (물론 다 같은 경우는 아니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저자의 엄마는 잘 치료 받고 적당한 요양시설을 선택해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과정을 보고 있자니 적나라한 현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서 웃프더라. 이미 겪어본 일이라 그런지 저 마음이 쓰이는 것도 있었고 말이다.

 

한국과 독일은 아주 다를 줄 알았다. 각자 독립된 생활을 일찍 시작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간섭보다는 독립된 인격의 관계로 유지되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노년의 부모를 걱정하고 어느 부분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건 비슷했다. 부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형제들이 모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논한다. 각자 역할 분담을 하면서 같이 처리해야 할 문제인 거다. 저자는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일이나 요양 시설을 알아보거나 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저자의 남동생은 경제 관련 처리와 계산하는 일을 담당했다.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저자의 누나는 엄마와의 정신적인 교감을 이루려 노력했다. 이상하게도, 엄마가 아프니 형제들이 모이거나 얘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 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우리 아버지 편찮으셔서 병원에 드나들고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면서 겪은 것과 너무 똑같았다. 우리도 그랬다. 문제가 터지니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고,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남동생이나 여동생과 통화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집안의 우환이 생기는 건 걱정이지만, 이런 일이 생기니 형제들 사이에 관계는 조금 가까워진 것 같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참나...

 

흔히 부모가 나이 들어간다는 서글픔을 언급하면, 더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고,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말한다. ‘더 늦기 전에...’라는 이유로 감정적인 부분의 해결을 먼저 생각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른 의미로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을 준비하게 했다. 옮긴이의 말처럼, 노부모에 관한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하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됐다. 노부모를 돌보는 일은 때로 가혹하고 냉정한 현실이라는 것. 노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은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게다가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마치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24시간 곁에서 돌봐야 하고, 실제로는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다. 그러다가 요양병원을 찾게 되는데, 그렇다고 요양병원이 최고의 답은 아니다. 자식이 있는데 요양 시설에 모셔도 되는지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비용도 발생한다. 그래서 노부모를 돌본다는 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감정적인 것보다, 조금은 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늙고 거동이 힘들어지면, 그때는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현실적이고 금전적인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어야 한다.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혼자 남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대책보다는 걱정만 앞선다. 어느 정도 예상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닥친 엄마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겁부터 난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노부모에게 일어나는 문제와 그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적인 부딪힘이 그대로 들려왔다. 각자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해결 방법은 다를지 모르지만, 저자의 경험담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내가 이미 경험해서 그런지 공감된 부분이 많다.

 

아버지의 죽음, 엄마의 유방암, 엄마의 늙음. 이 모든 일을 계기로 나는 나의 늙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이제 58세다.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 이렇다 할 불만이 없다. 나 역시 중년의 위기를 겪었지만 잘 이겨냈고, 26년째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건강하고 멋진 아들이 둘이나 있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직업도 만족스럽다. 뭘 더 바라겠는가. 글쎄, 나는 무엇을 더 바랄까?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모든 것이 지금처럼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 사진과 지금 거울 속 나를 비교해보면, 시간의 톱니 자국이 확연히 보인다. 주름진 거친 얼굴과 축 처진 눈 밑 지방이 정말 내 것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 (엄마, 조금만 천천히 늙어줄래? - 203페이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부모의 늙음을 외면하지 말고 조금 더 현실적인 상황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부모의 늙음과 병듦은 점점 비극적인 상황으로 흘러가겠지만, 그렇다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이 책을 통해 그 모든 상황을 한 번씩 시뮬레이션해 보고 언젠가 닥칠지 모를 순간을 준비할 수 있기를,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잘 해결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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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5 0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0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5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0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외출하고 집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옷을 갈아입고, 벗은 옷은 털어서 걸어놓거나 세탁기에 넣고, 손과 발을 씻는다. 그 후로 바로 샤워를 하거나 다른 일을 먼저 하고 씻거나 하는 약간의 순서 차이만 있다. 들어와서 손을 씻는 행위는 개인이 지켜야 하는 기본 위생 중의 하나이며, 어렵지 않게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다. 세균이 우리 몸에 침투하지 않게 위해 방어할 수 있는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세균 감염의 무서움은 이미 여러 가지 사례로 경험했다. 과거 세계사 속에서 활약하던 페스트 같은 거 말이다. 위험한 병이기에 전염을 막을 한계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깨끗한 환경에서 살았다면 그 전염 확률을 낮췄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사람과 사람에게 옮겨 다니면서 그 힘을 발휘하는 세균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개인이 지켜야 할 기본 위생의 중요성 또한 잘 안다.

 

병을 옮기는 세균이 사람 몸에 침범했을 때 증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을 '무증상 보균자'라고 부르는데, 이 책 <위험한 요리사 메리>에서 말하는 메리 맬런이 그러하다. 아일랜드 태생의 메리는 요리사다. 뉴욕의 상류층 가정에서 일했다. 우연인지 뭔지, 메리가 일하던 집의 사람들에게 단체 장티푸스 증상이 나타났다. 당시의 질병을 조사하던 사람들은 그 집의 환경을 보고 장티푸스 발병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병이 가까이 올 수 없을 정도의 깨끗한 환경이었다. 그렇게 원인을 찾지 못한 장티푸스 사건이 희미해질 무렵, 조사관 조지 소퍼는 요리사 메리가 무증상 보균자일 것으로 의심한다. 집안의 거의 모든 사람이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생활한 메리만 장티푸스에 걸리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다. 하지만 메리는 소퍼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는 장티푸스에 걸린 적이 없다며 건강하다고 조사관들에게 저항했다. 소퍼의 말을 확실하게 증명하려면 메리에 관한 더 많은 자료 수집이 필요했다. 그렇게 더 많은 조사를 하고 그동안 메리가 일했던 집들을 역으로 추적한 결과, 메리가 일했던 모든 집에서 장티푸스가 생겼고 그들 중에서는 죽은 사람도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소퍼의 말이 사실이 된 순간이다.

 

메리의 흔적을 따라다니는 장티푸스. 위험하고 전염이 되는 이 질병을 어떻게 치료하고 단속해야 하는가? 사실 치료 방법을 찾아내고 환자를 돌봐야 하는 건 의학의 문제다. 중요한 건 무증상 보균자인 메리를 대하는 보건 당국과 사람들의 방식이다. 메리는 자기가 병을 옮기지 않는다면서 보건 당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움직이는 보건 당국은 장티푸스 제공자 메리를 체포하고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메리의 대소변과 혈액을 채취하여 검사해보니 그녀는 장티푸스 보균자였다. 메리가 요리사로 일하던 190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에서는 장티푸스로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고 한다. 장티푸스에 관한 공포로 벌벌 떨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그녀는 두려운 대상이었을 터, 언론에서도 그녀를 '인간 장티푸스균'이라고 부르며 선정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얼마 후에는 메리의 실명까지 공개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누군가 학회에서 그녀의 사건을 '장티푸스 메리'라고 부르면서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보건 당국은 전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메리를 단속해야 했고, 메리는 자신의 자유를 억압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유를 외칠 수 없이 보건 당국의 강제 집행으로 병원에 감금되듯 입원했고, 섬에 있던 병원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한쪽에서는 장티푸스를 퍼지게 하는 그녀의 감금 같은 입원을 당연하다고 여겼고, 한쪽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그녀에게 주어진 인권을 강탈당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불행은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했고, 누구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공중 보건이냐,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냐 하는 문제는 금방 해결할 수 없었다.

 

메리는 섬에 있는 병원에서 3년을 갇혀 살았다. 전국에 본명과 사진도 공개되었다. 그녀는 자유를 위해 보건 당국과 서약을 한다. 요리사 일을 그만둘 것과 그녀의 거취를 항상 보건 당국에 보고할 것. 그렇게 3년 만에 섬에서 나온 메리는 그녀의 천직인 요리사 말고 다른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보건 당국에 주기적으로 보고하면서 검사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메리가 보건 당국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갔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는 보건 당국에 주기적으로 보고하는 것도 멈췄고 자취를 감추기까지 했다. 보건 당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병원에서 단체로 발생한 장티푸스 때문에 또 한 번 그녀의 인생은 감금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었던 메리는 가명으로 다시 요리사 일을 시작했고, 그녀가 일했던 병원의 사람들이 단체로 장티푸스에 걸렸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섬에 있는 병원에 수감된 메리는 23년 동안, 그녀가 죽을 때까지 섬에서 나오지 못했다.

 

1900년대 초반의 의학은 그 전보다 훨씬 발전했고, 현대 의학이라고 불러도 좋은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의학이 질병이나 의학에 관해 지금보다는 무지했던 시대였을 것이다. 메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가 장티푸스 보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사 결과와 그녀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그녀가 장티푸스 보균자라는 것이 증명되니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그녀가 무증상 보균자라는 이유로 평생 섬에 갇힌 채로 살아가야 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그녀가 공중의 보건을 이유로 격리당해야 할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신상 정보가 만천하에 공개될 이유도 없었다. 실제로 메리 이후에 드러난 무증상 보균자들은 자유를 억압당하지도 않았고, 병원에 감금되지도 않았다. 메리처럼 수십 명의 장티푸스를 일으킨 건강한 남자 보균자들은 보호관찰 처분으로 그만이었다. 그들의 신상정보가 신문에 나지도 않았다. 메리가 '최초의 여자 무증상 보균자'였다는 이유로 그녀의 인생이 다른 이들에 의해 이렇게 파괴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그녀에게 '장티푸스 메리'라고, 마녀라고 불렀다. 언론이 씌운 마녀 이미지와 공포에 한 사람의 인생이 본인의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망가졌다. 타인에 의해 불행한 삶을 이어가며 죽음을 맞이했다.

 

저자는 단순하게 장티푸스 무증상 보균자였던 메리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전염병의 공포를 말하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전염병의 보균자였던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의학과 인권 중에서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문제를 꺼내놓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메리는 모두가 자기를 몰래 훔쳐보는 구경거리였다고 말했다. 보건 당국의 조사관 조지 소퍼는 그녀를 살아있는 배양관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아마도 질병의 관리와 개인의 인권이 마주하는 감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할지도 모른다.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전히 의학이냐 인권이냐 하는 문제의 답을 꺼내놓을 수가 없다. 질병의 공포를 없애주는(유배시키는) 것을 찬성하면서도, 한 개인의 삶이 공중 보건에 의해 처참히 무너져야 하는지 묻는다면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메리의 인생을 힘들게 했던 이들, 조사관 조지 소퍼와 조지핀 베이커 박사의 활약도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이었다. 메리를 생각하면 그녀의 인생이 무너지는 순간을 만든 이들 중 한 사람일 테지만, 공중 보건의 발전과 전염병의 치료에 업적을 쌓은 이들이었다고 생각하면 현대 의학을 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이니까 말이다.

 

'장티푸스 메리'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간 게 누구였는지 무엇이었는지 계속 물으면서도, 공중 보건과 개인의 인권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그대로 보여주는 메리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비극 뒤에서 배경처럼 자리한 여러 가지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회적 약자인 메리에게 씌워진 굴레는 여기저기서 손을 뻗어 합세하고 만들어낸 거다. 전염병에 관한 공포와 하층 계급에 대한 혐오, 거기에 인간이 빚어내는 온갖 반감까지 맞물려 일으킨 재앙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의 무지와 혐오에서 비롯된 이 비극은, 조용히 숨어 있다가 언제 어디서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런 일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메리의 이야기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격리된 병원에서조차 자기 일을 찾아서 했고, 억압된 자유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그녀의 노력은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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