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 드는 것일 테다.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63페이지)

 

지인의 아버지는 희귀백혈병으로 투병 중이시다. 아들과 50% 확률로 맞는 골수를 이식받았고, 곧 좋아질 거로 여겼지만 문제가 생겨 다시 입원하셨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곧 좋아지기를 기다린다고 했지만, 만에 하나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가족들이 모여서 의논도 하고, 앞으로의 일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나의 남동생의 장인어른과 여동생의 시아버지는 위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주변 사람들의 암 소식은 너무 흔하게 들려왔다. 병명 자체만으로도 공포가 생기는 병이 암이 아닐까. 언젠가부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익숙한 병이 되어버렸고, 혹시나 우리도 암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병원을 찾고 검사를 받는 일이 낯설지 않다. 아마 두 가지가 겹치니 그 공포는 배가 되는 것일 테다. , 병원. 특히 암은 죽음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있는 병도 아니다. 암에 걸렸다고 다 죽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암은 죽음에 가까이 있는 병이기는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암과 함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암 전문 의사로 항암치료를 해오면서, 그가 만난 암 환자와 가족들을 보면서 느낀 것들을 기록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될까.

 

2019년 전체 사망자의 27.5%가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국인이 사망하는 장소의 77.1%는 병원이라고 한다. 그만큼 암과 병원은 우리 삶과 가깝다. 암 환자들의 마지막 모습은 어떨까. 저자는 18년 차 종양내과 의사로 일하면서 많은 암 환자를 만났다. 완치가 아니라 생명 연장의 목적으로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와 가족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궁금했다. 나는 의료진이었던 적이 없으니, 언제나 환자 본인과 가족의 자리에서 보게 될 터이다. 그러니 같은 상황 같은 죽음을 두고 저자와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으로 의료진의 시선을 알 기회가 생긴 셈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삶과 죽음의 순간이 생생하다. 암을 앞에 두고 대응하는 방식은 너무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아마도 그건 살아온 세월과 삶의 방식, 환경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의사이면서 한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마주한 저자의 기록은, 저자는 물론이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이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지금까지 만나온 많은 환자의 선택을 지켜보며, 그들이 채워온 삶과 병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그의 삶의 태도에 하나를 더한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그들의 시간이 담담하면서도 위태롭게 들리기도 했다. 그건 내가 경험한 삶과 죽음의 모습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마주할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면 아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남과 죽음을 한 번씩은 겪으니까, 내가 태어나는 순간을 누군가가 지켜봤다면 내가 죽는 순간도 누군가는 지켜볼 테니까 말이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죽음이 된다는 것. 그걸 생각하면 죽음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삶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간단하게만 생각할 수는 없을 듯하다.

 

저자가 마주한 환자와의 실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다양한 상황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엿보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했다. 죽음의 순간을 두고 동생에게 2억 원을 갚으라고 하는 남자, 평생 술과 도박으로 가족을 돌보지 않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 딸에게는 다행인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 사연, 암 투병 이후의 시간을 감사하며 긍정의 힘을 뿜어대는 환자, 시한부 삶을 맞이한 여자와 결혼을 이루는 남자의 사랑, 사후 뇌 기증을 신청하고 떠난 사람, 남편이 완치되길 바라면서 서울과 부산을 오가던 부부, 이혼했지만 각자 암 투병 중인 부모를 돌보며 일터와 병원을 바삐 오가는 아들, 암과 치매를 동시에 앓는 80대 아버지는 모시는 예순을 바라보는 딸,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이뤄가며 남은 시간을 채우는 노인 환자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라는 말을 듣고 그 시간을 채워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삶을 채우고 있지만 결국은 죽음으로 향해 가는 그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는 각자의 몫인 듯하다. 반드시 죽음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주 그 숙제를 떠올린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얼마나 의미 있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물음. 그 물음과 답은 자기가 만들어가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이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어가든 죽음에 다다르며 그 결과 또한 자기가 받아들여야 한다. 모르지 않은 일인데도, 왜 자꾸만 그 답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삶이 되어가는지, 언제나 어렵다. 의미 있게 살아가는 일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안다는 것은 행운일까 아닐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오늘과 남겨진 시간을 생각한 적이 있다. 만약 나의 목숨이 시한부라면, 시한부라는 사실을 아는 게 좋을까 모르고 지내다가 죽는 게 좋을까 하는 질문을 떠올린다. 나는 언제나 전자의 선택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나는 남은 시간을 잘 정리하면서 내 마지막을 준비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말기 암 환자라도 그럴 것 같다. 하염없이 병상에 누워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보다, 나와 내 주변의 것을 조금씩 정리하고 마음을 나누면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싶다고. 저자의 말처럼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는 끝을 맞이하는 것보다, 슬프지만 끝을 알게 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보낼 오늘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종착역으로 가는 환자의 곁에는 같이 그 길을 걷는 가족이 있고, 그들은 곧 한 사람의 끝을 함께하면서 조금이라도 덜 아쉽고 행복하게 걸어갈 수 있게 노력한다. 마음을 다하려고 애쓰며 헤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저자가 환자와 그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읽은 이야기는 끝이 없다. 저마다의 선택과 결과 앞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하나의 인생이, 한 가족의 삶이 변해가는 장면을 눈에 담는다. 그러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생각한다. 모르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된다. 누군가의 부모이고 자식이고 배우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그 많은 이야기 속에서 계속 묻는다. 우리의 남은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평범한 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누구보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일,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인 몫의 남은 삶을 평소처럼 살아내는 일.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37페이지)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환자의 암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3장과 4장에서는 의사로 살아가는 일과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시간과 싸우며 환자를 보는 병원의 환경, 마지막에 다다른 환자의 연명치료가 정말 필요한 것인가 하는 고민을 담았다. 암 투병 이후 완치된 젊은 환자의 미래도 같이 걱정한다. 병을 앓았다는 이유로 취업에서 실패하고, 현실은 언제나 살아가야 하는 냉정함을 뿜어대는데 생존의 위협에 또 시달리는 고통이 뒤따르는 암 투병 이후의 시간을 처음 알았다. 다시 건강해졌으니 다행이고 좋은 결과라고만 여겼지, 현실에서 암이 공격하는 또 다른 일상이 있었다는 게 무서웠다. 몸의 건강만 되찾았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던 거다. 의사의 자리에서 겪는 많은 고충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환자나 보호자는 의료진이 처한 현실을 다 알지 못한다. 의료진 역시 마찬가지로 환자와 보호자의 고통을 다 알지 못한다.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일까, 다 알지 못하는 그 마음 때문에 때로는 오해하고 서운해한다. 내 자리에서 보이는 것만 두고 생각하고 말하고 싸우고 운다. 의료진이 환자를 대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들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기에도 벅찬 상황이 있더라는 것. 그러다가 비로소 환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보이는 것들을 감싸 안는다. 자기가 환자가 되어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진료하던 환자의 시선과 마음이 보이는 거다. 역지사지라고 해야 하나. 누군가 아프게 되는 건 싫지만, 나는 의료진이 이렇게 서로 다른 상황을 알아가는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연명치료에 관한 부분이었다. 연명치료를 선택하는 게 최선이기만 한 걸까? 환자의 남은 삶이 연명치료로 행복해질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건수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나도 경험했다. 아버지가 처음 응급실에 실려 가고 수술대 위에 되었을 때, 시간이 지나고 다시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병원에 한 번 드나들 때마다 온갖 서류에 서명하고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때마다 나도 연명의료계획서에 사인을 했다. 처음에는 이 서류에 어떻게 뭐라고 서명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고민이 많았는데, 그 처음 서명을 위해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위급한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그 연명치료를 수락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그 목숨의 주인은 환자 본인이지만, 환자가 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보호자와 가족들은 어떤 선택이든 결정을 해야만 하는 어려운 위치에 선다. 의식을 잃은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순간까지 심폐소생술을 하는 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묻는 저자의 말에, 우리 가족의 판단이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안도가 생긴다. 어쩌면 또 다른 순간에 우리는 같은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렵지만, 저자가 말하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하는 질문에 같은 무게로 고민하게 될 것 같다. 살아 있으나 죽음보다 못한 상태인, 존엄과 멀어지고 있는 환자의 마지막을 위한 결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일. 몇 번을 생각해도 어렵기만 한 주제를 두고 참 많은 생각과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듯하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쉽다. 입으로 도덕을 외치고 윤리를 말하는 일도 참 쉽다. 똥 치우며 병수발하고 비용 부담하긴 어려워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만 있을 뿐 인간다움을 완전히 잃는다면 그때에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혹 당신이 그런 상황이 된다면, 혹은 인지 기능 없이 단순히 숨만 쉬는 상태가 된다면 그런 상태로 몇 년 더 사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될까?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254~255페이지)

 

의사가 들려주고 있지만, 의사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안에 우리가 언제나 함께 참여한 대화이자 기록이다. 우리는 인간이고 언제 어디서든 질병과 마주할 수 있다. 질병이나 병원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기도 하다. 동생이 아파서 1월의 절반을 서울에서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이제는 엄마가 아프셔서 병원 생활을 이어간다. 지금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로 여긴 적이 없다. 언젠가 그럴지도 모를, 나이 들어가는 부모의 건강을 염려하기는 했지만, 뜻밖의 일 앞에서 이렇게 당황하고 걱정하면서 병원을 전전할 줄 몰랐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읽다 보니, 저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가깝게 다가온다. 의사는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존재이고, 병원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머무는 곳이 되었다. 내가 환자가 될 수도, 보호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은 언제든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러니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남의 일이 아닌 게 되더라는 깨달음은 저절로 따라온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하면서, 언젠가 나와 가족에게 찾아올 죽음의 순간도 항상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낯설지 않은 경험담에 많이 공감하면서, 삶과 죽음을 겪어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숙제이자 의무라고 말하는 문장들에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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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2-10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그림이, 잎사귀처럼 보였다가 살아 움직이고 싶어했던 잠자리 날개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아름다운 글 잘 읽고 갑니다.

scott 2021-02-10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페이퍼는 문장마다 읽고 음미하고 새겨둘 구절이 많아서 이페이퍼는 아끼면서 읽을겁니다. 구단님 설 연휴 가족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노예제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상관없었다.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 싶은 책은 모조리 읽었다. 심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까지 읽었다. 다 읽지는 못했다. 부드러운 사랑의 유대로 이어진 행복한 유색인들이라는 각색만은 참아낼 수 없었다. (킨 221페이지)


시간여행이란 화두를 떠올리면 참 낭만적인데, 이 소설이 보여주는 시간여행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설레지도 않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불안하다. 두근거리면서 상상하는 즐거움은 저기 밀어두고, 혹시나 그 시간에서 내가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앞선다. 즐거운 여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이 소설처럼 한번 시간여행을 할 때마다 공포에 떨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976년의 LA. 작가이지만 가난한 흑인 여성 다나는 일하면서 백인 남자 케빈을 만나고 결혼한다. 흑인과 백인의 구분이나 차별이 없어진 시대였지만, 둘은 주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여전히 그들끼리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했고, 같이 살기로 하면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고 짐을 풀기 시작한다. 그때, 다나는 현기증을 느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1815년 미국 메릴랜드의 어느 숲속이었다. 붉은 머리의 백인 소년 루퍼스가 물에 빠져 있었고, 다나는 살려달라는 루퍼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시대로 간 것이다. 어떻게 된 건지? 어쨌든 다나는 눈앞의 소년을 살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이 상황을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본 케빈을 제외하고는.


처음 다나가 루퍼스를 구하러 가서 1800년대에 머물렀던 시간은 불과 몇 분이었다. 그 시간이 현재에서는 단 몇 초였다고 케빈은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시간 여행. 루퍼스는 조금 더 자란 소년이었고, 불을 낼 뻔한 상태에서 다나를 불렀던 것. 그렇게 몇 번씩 다나는 루퍼스가 죽을 위험에 처할 때마다 불려온다. 시간을 거슬러 1800년대로 말이다. 흑인 여성 다나가 루퍼스의 시대에 적응할 수 없던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미국의 남부,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시대였다. 농장주들은 돈으로 노예를 매매했고, 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소유물로 여기며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를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주는 용도로 이용하는 도구로만 대했다. 여전히 인종의 벽은 높았지만, 현재의 미국 사회에서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이루어낸 다나가 어떻게 루퍼스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다나는 한 가지를 염두에 두고 루퍼스의 부름이 올 때마다 1800년대로 돌아간다. 다나의 조상이 루퍼스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시간을 잘 건너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루퍼스의 성장을 돕는다.


부유한 백인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라는 루퍼스는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궁금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다나의 시간 여행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흑인 여성 다나를 노예가 아닌 친구로 대하려고 했다. 물론 자기 기분 내킬 때만. 아니길 바랐지만, 루퍼스는 무자비한 아버지를 닮은 면도 있었다. 갖고 싶은 것에 모든 것을 걸을 수 있는 남자가 되어갔다. 어릴 적부터 마음에 두었던 흑인 앨리스를 사랑했고, 폭력과 잔인한 행동으로 결국 앨리스를 옆에 둔다. 어쩌면 루퍼스가 다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잔인한 농장주로 자랐을지도 모르지. 루퍼스는 앨리스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그 자신은 아버지와 조금은 다른 너그러운 백인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는지도. 그는 다나 역시 친구라고 여기며 자기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애정을 쏟는다. 앨리스와는 다른 의미로 다나를 사랑하지만, 상대의 마음이나 간절함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시간 여행 소설이지만, 왜 시간적 배경을 1800년대로 정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면서 작가에 대해 찾아보니, 이 소설은 작가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생한 장면을 상상하게 했다. 1800년대는 노예제도가 가장 혹독했던 시대라고 한다. 그 중심으로 흑인 여성 다나를 보내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거다. 1900년대의 엘리트 여성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갑자기 책에서나 봤던 위험한 시간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게 보일지. 작가의 삶을 이루기 위해 일용직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열정이, 1800년대에서는 위험에 처한 상황일 뿐이다. 흑인 노예가 그것도 여성이 글을 쓰고 읽을 줄 알고, 아는 게 많고 때로는 건방져 보이기까지 한다면 어떨까. 고용주에게는 골치 아픈, 노예들 틈에 두면 위험한 노예일 뿐이다. 소설 속 다나는 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던 현실을 담은 인물이기도 하다. 1960년대는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이 꽃을 피우던 시가라고 한다. 노예로 살았던 선조들에게 격분하면서 부모 세대를 원망하고 저주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도 있다. 그들은 부모 세대가 버텨온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거 아니겠는가. 사는 것처럼 살지 못했지만, 때로는 의지를 불태우다가 죽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주어 방식으로 삶을 이어왔으며 투쟁을 계속해왔던 거다.


나는 그날 책을 한 권 훔쳐 나이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케빈과 내가 이 시대에 수월하게 끼어들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정말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쇼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였다. 집에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과 비슷한 척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형편없는 배우였다. 우리는 실제로 역할 속에 녹아든 적이 없었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킨 184~185페이지)


이해하지 못하는 시절에 관해 함부로 판단하고 욕할 수 없음을 다나는 보여줬다. 처음 그녀가 흑인 노예가 있던 곳으로 시간 여행을 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었을 거다. 자유와 의지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있기에 당연한 거였는데, 그 시절의 흑인은 노예로 살아가면서 그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당연했다. 설마, 그들의 가슴 속에서도 노예의 삶이 당연하다고만 여겼을까? 아니면, 그들 나름대로 버티는 삶을 이어가면서 피 끓는 투쟁을 멈추지 못했을 거로 생각한다. 다나는 루퍼스와 대화하고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읽어주면서 여느 노예와 다른 일상을 보낸다. 그녀가 다른 시대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녀를 자기와 다른 존재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다나 역시 스스로 자기가 그곳에서 노예로 있는 흑인들과 다르다고 여기지는 않았을까? 그녀가 현재를 살면서 배웠던 지식과 당연한 것들이 그녀를 당당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한번 두 번 채찍질을 당하면서 얻은 건 공포였다. 두려움 앞에서 의지를 꺾고 수긍하는 자세였다. 루퍼스의 말을 어긴 벌로 밭으로 나가서 일하고 쓰러졌던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배운 것은 현실에 수긍하는 법이었다. 권력을 가진 이의 말을 어기면 이렇게 매질을 당하고, 힘든 일을 해야 하고, 언제 돌아갈지 모를 상황에 절망하며 쓰러지는 일. 이게 그녀가 배운 현실과의 타협이면서 권력자의 통제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으며, 노예 시대의 폭력에 길드는 모습이었다. 조금씩 다나의 태도가 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두려웠다. 그녀는 현대로, 처음 왔던 모습 그대로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현재를 아우르는 여러 가지가 시간 여행을 하는 다나의 이야기 속에 있다. 아니라고 할 수 없게 지금도 여전히 보이는 인종 차별과 폭력, 노예라고 직접 부르지는 않아도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힘에 고통받는 사람들, 여성이기에 이중적으로 가해지는 인종차별과 성폭력 등 인간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문제들이 1800년대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물론 이 소설은 단순히 그런 배경뿐만 아니라, 작가가 다나에게 반영한 애증이라는 인간 감정도 눈여겨 볼만 하다. 다나는 루퍼스가 살려달라고 할 때마다 시간을 초월해 그에게 간다. 그 소년을 위기에서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와 다른 백인 남자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조상이 될 사람이기도 하기에 말이다. 그러면서도 루퍼스를 지켜볼 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점점 그의 아버지와 닮아가면서 노예를 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증오한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이해하면서도 그녀에게까지 위험을 가할 때마다 그를 증오하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현재로 돌아와서 안도하면서도 루퍼스와 있던 곳을 집으로 여길 정도로 그리워하고 안도하기도 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 애증의 감정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냈을지 생각하면...


처음에는 그저 상상과 판타지로 만날 자세를 가졌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다나가 시공간을 초월한 순간들이 무엇을 바꿔놓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게 됐다. 그때의 노예제도가 다나의 등장으로 얼마나 다른 길을 걸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루퍼스가 있던 와일린 가의 흑인 노예들은 다나의 존재로 자기 의지와 자유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바라본다. 현실의 불안과 불평등에 고민하고 투쟁할 자극이 되는 존재. 한 세기를 거슬렀던 다나의 시간 여행은, 여행 그 이상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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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1-06 0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여행은 보편의 관점에서 봤을 때 노예제라는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제도인가를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잘 보여주는것 같았어요. 저도 이 책 참 좋아하는데 구단씨님 리뷰 읽으니 더 좋아지네요. 😁

구단씨 2021-01-06 01:45   좋아요 1 | URL
오랫동안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어요.
읽기를 잘 한 것 같아요. 너무 좋네요. ^^

psyche 2021-01-06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어요.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가 어찌나 생생했던지 책을 읽은 날 악몽에 시달렸다는...

구단씨 2021-01-09 20:40   좋아요 0 | URL
진짜 생생했어요. 만약 그 상황에 있는 사람이 나라면? 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 읽게 되더라고요.

scott 2021-02-10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나의 시간여행은 21세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1-02-19 21: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어느 한 시대에, 시간에 머물러 있는 소설은 아닌 것 같아요.
 

일주일에 한두 번쯤 엄마 집에 간다. 엄마가 해주신 밥을 먹고 싶기도 하지만, 혼자 지낼 엄마가 같이 밥 먹어줄 사람이 필요하진 않을까 싶은 나의 오버이기도 하다. 근데 정말로 엄마는 누군가 오니까 그대로 챙겨놓고 밥을 먹는다고 하시더라. 나도 마찬가지. 집에서 혼자 밥 먹어야 할 상황이 되면 그냥 굶거나 대충 한두 가지 꺼내놓고 먹거나. 누가 보면 참 부실하다고 할 테지만, 저절로 그렇게 된다. 먹는 것만 부실해지면 다행인데, 점점 일상이 귀찮아지고 정리를 미루면서 하나둘씩 뭔가 쌓여간다. 건강을 챙기겠다면서 사다놓은 운동기구가 옷걸이나 빨랫줄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그때그때 정리하지 않으면 자꾸 미뤄지고 쌓여가고, 집에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좁아져가고, 어느 순간 쳐다보기만 해도 막막하고 한숨이 나올 테지. 집 밖으로 나가는 물건보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물건이 더 많아지면 이건 뭐, 최악이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집 안으로 들어오는 물건이 점점 많아진다면,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근데 사실, 우리가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잖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선뜻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고, 아끼는 거 버리는 거 망설여지고, 이거 버리기 아까운데 싶어서 들었다 놨다 하면서 추억에 잠기기도 하는... 그러니까 이런 거 아닐까. 공간만 있다면 내가 아끼고 소중한 것을 다 품에 안고 살고 싶다는 바람. 하지만 우리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살아야 하고, 비우는 것 없이 계속 들여오기면 한다면 정말 숨이 막혀서 죽을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자, 그럼 정리가 답이다. 공간이 들어올수록 답답함은 사라지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좋아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아끼는 것들을 버릴 수 없어서 갖고 있기만 할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눈에 두고 보면서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언뜻 보면 저자도 그저 공간을 정리해주는 전문가인 것 같지만, 저자의 책을 읽다 보면 그동안 정리정돈이나 살림 노하우를 담아놓은 책과 다른 점이 있다. 그 공간의 사람을 읽고 위로한다는 거다. 왜 정리가 필요한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면서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지 읽는 능력. 저자에게는 그게 있다.


많은 분이 집을, 그리고 지나간 세월을 정리하고 싶어 하지만 부끄럽고 확신이 없어서 주저하거나 망설이곤 합니다. 집 정리는 다이어트와 비슷합니다. 한번 다이어트에 성공해본 사람은 이후에 다시 쪘다 빠졌다는 반복하더라도, 살이 빠졌을 때의 느낌을 알기 때문에 다시 성공할 확률이 높고 성공한 상태를 유지하기도 쉽습니다. 지금 당장은 좀 부끄럽더라도 작심하고 다 덜어내고 정리해보면, 또 살면서 짐이 늘고 어수선해지겠지만 언제든 좋았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좋았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직접 경험해보고 느껴본 사람만 가능한 일이죠.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 141~142페이지)


다른 매체나 방송에서 보고 저자가 이 일을 꽤 오래 했을 거로 여겼다. 어디선가 들으니 저자가 이 일을 시작한 건 3년여. 3년 만에 이런 이슈를 만들 수 있는지 의아했지만, 생각해보면 사람의 마음을 읽은 결과일 테다. 누구나 가슴 속에 품은 바람을 알아채고, 그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일이 반응을 일으키는 건 당연하다. 가끔 TV에서 저장강박증에 걸린 사람을 보고, 일명 쓰레기집이라고 불리는 그곳을 보면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누가 봐도 쓰레기인데 뭐가 그리 귀중하다고 저걸 쌓아두고 살까 싶어서 말이다. 그들을 인터뷰하고 어렵게 속내를 듣고 보면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인간의 마음에 비워진 공간을 그렇게 물건으로 채우고 싶었던 거라고. 그걸 끌어안고 있어야 허한 마음 조금이라도 채워질 거로 믿었던 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집이라는 공간 안으로 무언가를 자꾸 끌어들이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마음일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감정이 물건으로 다 채워질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비워내고 정리하는 게 마음을 치유하는 답이 된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저자는 그렇게 읽어낸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는 법을 찾아냈고,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이는 정리 이상의 결과를 안겨주었다.


정리의 시작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구를 위한 집인지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정리의 방향은 정해진다. 과감하게 잘 비우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숨기지 말고 그대로 드러내는 거다. 물건을 분류하고, 내가 생활하기 편한 동선으로 꾸린다. 전문가의 조언이나 타인의 고정관념 같은 건 버려도 좋다. 내가 좋은 게 가장 좋은 거 아닌가. 의미 없는 물건이 나열된 공간을 재배치하고 효율성과 안락함을 높여야 한다. 공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내 마음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된다면 행복할 테니. 무조건 새로운 가구나 정리할 상자를 사는 게 아니라, 정리하는 방식을 찾는 게 우선이다. 어쨌든 가구도 상자도 공간을 차지하는 건 마찬가지이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물건은 집의 가장 큰 공간에 혹은 좋아하는 공간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집도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책은 무조건 서재에, 와인은 반드시 주방에만 두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 집은 머물고 싶은 곳이 됩니다.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 25~26페이지)


이런 집에 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 혼자 산다면, 거실에 TV나 소파가 아니라 심플한 책장을 두고 싶다고, 주방에 식탁을 두고 식사를 하거나 책을 읽고 싶은 공간으로, 방에는 꼭 침대 하나만 두어야겠다고. 물론 나 혼자 사는 공간을 생각했을 때 말이다. ^^ 다른 가족 구성원과 함께 산다면 집은 나만의 공간은 아니므로 서로가 원하고 바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각자 필요한 공간을 생각하고 의논하면서, 이 집은 어떤 공간으로 구성하고 만들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 저자가 이 일을 하면서 단순히 공간 배치를 하거나 비우고 정리해주는 게 아니었다. 의뢰인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다. 무엇을 정리하고 싶은지, 어떤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하는 여러 가지 사연과 생각을 듣는다. 의뢰인의 마음을 충분히 읽고 공간의 구성을 계획한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현재 상황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가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 아빠의 방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을 때 놀랐는데, 차근차근 설명을 듣다 보니 이해가 된다. 아직 어린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보통 아이는 엄마(부모)와 같이 자는 경우가 많고, 바로 옆에서 돌봐줘야 하니 항상 같이 있는 시간이 많다. 늦게 퇴근하고 들어와 자는 아이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안방을 드나드는 것보다, 조금은 편히 쉬고 잘 수 있는 현관에 가까운 방을 아빠의 쉼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좋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배치는 의뢰인에게 호응이 좋았다고 하니, 말하지 않아도 아는 저자의 능력이 대단하다.


무조건 버리는 게 정리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움의 매력을 어필하는 듯하지만, 비움도 나름 이유가 있어야 한다. 내가 가장 소중하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걸 버릴 필요는 없다. 그 양이 많다고 해도 정리만 잘하면 그 집에 머물 이유가 충분하다. 정리하고 싶은 카테고리의 물건을 다 꺼내어 놓고, 우선순위를 매긴 다음 버리거나 남겨두거나 정한다. 그러고 나면 한곳에 모아두고 정리하는 게 남는다. 베이킹하는 의뢰인의 예를 들어줄 때는 놀라웠다.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던 베이킹 도구들이 다른 가족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는데, 의뢰인이 포기할 수 없었던 베이킹을 더 즐겁게 하게 만든 정리는 기적 같았다. 방 하나에다 집안 곳곳에 방치되었던 베이킹 도구들을 모아놓았다. 듣고 보면 이렇게 간단한데, 우리는 왜 그 방법을 몰라서 자꾸 어수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인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불편한 것을 그냥 참고 살거나 불편한 줄 모르고 산다고 한다. 일일이 기억할 수 없지만, 나에게도 그런 생활의 단면이 있을 것이다. 가구나 물건도 조금만 바꾸면 굉장히 편리해지는데, 그걸 모르고 살거나 알면서도 그냥 두고 살았던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고 한다. 오른손잡이 아이의 책상에는, 연필꽂이와 책꽂이는 오른쪽에 스탠드는 왼쪽에 있는 게 효율적이다. 옷장이나 행거에 옷을 걸을 때도 방향에 맞추어 걸어놓는 게 옷이 덜 상하고 관리하기 쉽다. 물건을 잘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치와 사용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 집이라는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 우리가 편히 지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비우기이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추억은 잘 정리해서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야 가치가 있다. 아무리 소중해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그건 추억도 뭣도 아닌 게 된다.


각 챕터 마지막에 정리나 청소 팁을 알려주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미 알던 것도 있지만, 관심 없어서 그냥 방치하듯 내버려 두었던 것도 저자의 팁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옷방의 공간을 나누어 옷의 종류별로 보관하고, 잘 보이게 걸어서 보관해야 찾기 쉽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운색의 옷을 걸어두고, 액세서리 종류는 형태를 유지해서 보관하라고 한다. (이 부분 읽고 옷장 구석에 던져두었던 가방이 생각나서 신문지를 막 접어서 넣어두었다는 건 안 비밀. ㅠㅠ) 린스나 설탕으로 욕실 물때는 벗기고, 건식 화장실의 습기는 구석에 소금을 조금 놓아두면 되고, 수도꼭지 청소는 과일로 닦아주면 깨끗해진단다. 욕실 구석에 생긴 곰팡이는 소독용 알코올을 헝겊 봉에 묻혀서 닦으면 해결된다니, 가끔 욕실 청소할 때 힘으로만 벗기려고 했던 것을 반성하고 반영해봐야겠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꼭 입주 청소도 내가 할 수 있을 듯한, 무모한 자신감이 든다. 비싸게 돈 주고 했는데 만족감도 못 느꼈던 입주 청소 맡긴 때가 생각난다. 자신 있게 청소하고 돌아가신 사장님께 입금하고 나중에 보니, 여기저기 거슬리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던. 이 정도면 그냥 내가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더랬다. 물론 전문가라고 하니 내가 모르는 노하우로 내가 할 수 없는 곳까지 열심히 청소해주셨겠지만,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는 소비자이다 보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더라.


읽으면서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을 둘러보게 되고, 그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공간을 유심히 보게 된다. 저 공간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나는 어떻게 공간을 이용하고 있는지 자문하곤 한다. 저자는 실제로 많은 사람이 공간을 너무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정관념 때문에 불편을 불편인 줄 모른 채 살고 있다고. 주방에서 밥을 먹고, 거실에서 TV를 보고, 방에서 잠을 자고, 방 하나를 창고로 만드는 일반적인 이야기들이 새롭게 들려온다.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많다. 가족이 함께 산다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TV만 보면서 모여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 손에 휴대폰을 들고 한 공간에 있기도 한다. 주방에서 서류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걸 보면, 주방과 서재가 같은 공간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책에 냄새 배려나?) 그래도 나는 내가 주방에 있는 시간이 많다면 주방 가까이에 책장 하나 두고 싶기도 하더라. 저자의 말대로라면, 공간에 제대로 된 역할을 부여하고, 쓰는 사람의 성향과 상황을 고려하면서 만든 집이야말로 필요하고 편안한 곳이 아닐까. 고정관념을 버리고 무심코 따라 하지 않으면, 인생은 나에게 맞춰 편하게 간다고 말이다.


코로나 때문인지 사람들이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집 밖은 위험하니까) 그러다 보니 집은 더 중요해졌다. 단순한 먹고 씻고 자는 것을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집밖에서 했던 거의 모든 것을 집안에서 해야 하는 곳이 된 거다. 공간과 인생은 거의 같은 것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저자의 많은 사람이 공간 정리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저자의 말처럼, 나 역시도 정리의 순간 개운함과 기분전환을 느낄 때가 많다. 가장 흔하게는 일부러 손빨래하면서 깨끗해지는 옷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하고, 한 번씩 책장의 책을 다 꺼내어 정리하기도 한다. 특히 책을 정리할 때면 내 책장에 이런 책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소장해야 할 책과 내보내도 되는 책을 구분해서 책장을 비워둔다. 그럼 또 다른 책들이 찾아와 그 공간을 채우겠지만, 또다시 비움의 시간을 만들면 되니까 괜찮다. 한 번씩 책장 정리하면서 책장의 비워진 공간을 보면 가슴이 뚫린다. 책장 하나 정리했다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지거나 정리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일상이 정리되는 시원함과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사실 안 쓰는 물건을 비우는 것만 잘해도 집은 충분히 훤해집니다.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수납공간 바깥으로 삐져나온 물건들이 집을 계속해서 좁아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대체로 수납공간 안에 들어가 있던 물건들 중에 버릴 물건이 많습니다. 안쪽에 쌓여 있어서 있는 줄도 몰랐던 물건을 모두 처리하고 나면 바깥에 나와 있던 물건을 품목별로 정리해서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물론, 살다 보면 새로운 물건들이 계속해서 들어올 것입니다. 그때마다 미루지 말고 꾸준히 정리한 후, 3달이 지나도 필요가 없다면 그때 놀고 있던 큰 가구들을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드립니다 183페이지)


큰 게 아니었다. 아주 작은 변화, 원래 있던 가구의 재배치나, 방치되어 있던 물건의 제자리를 찾아주거나,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물건으로 건네지거나 하는 변화가 물건과 사람에게 새 인생을 만들어주는 순간을 만났다.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하고 마지막 집 정리를 하던 의뢰인이 집 정리 과정을 지켜보면서 변했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정리가 뭐라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준 걸까 싶지만, 그 작은 변화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일을 해낸 거다. 이게 기적이 아니면 뭐가 기적이란 말인가. 누군가는 그냥 평범한 주부가 하는 일이라고 가볍게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나 스스로 정리하지 못해서 점점 쌓아지는 것들을 경험했기에, 저자의 일이 결코 쉽거나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안다. 겉으로 보이는 변화 너머에 가슴을 울리는 시간을 만드는 '금손'이다. 조금만 따라 해도 일상이 바뀌고 표정이 변하고 인생이 달라질 것을, 이제는 안다. 저자가, 물건을 비우면 공간이 보이고, 공간이 보이면 비로소 사람이 보인다고 말하는 의미를 눈으로 확인했다. 일의 경험으로, 매체에서 마주한 의뢰인들의 표정으로 말이다.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공간의 의미와 정리 때문에 행복해진 그들의 표정에서 행복이 저절로 읽힌다.


비움을 시작으로 마음을 보듬는 일이 이렇게 이루어진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작은 시작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평소에 꾸준히 정리하는 습관과 일상의 불편함을 눈여겨봐야겠다. 가끔 나를 돌아보고 싶을 때, 뭔가 꽉 찬 마음을 확인하고 싶을 때 한 번씩 우리의 공간을 채운 것들을 비워보는 건 어떤지? 정리는 이렇게 우리 인생을 새로 만들 힘을 주기도 하니까.



저녁이 되니 하나둘 집에 불이 켜진다.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인생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의 집이 궁금해졌다. 얼마나 비우고 얼마나 쌓아두고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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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5 0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어제 트리 하그루 놓고 갔는데 아침에 눈떠보니 사라졌으용 ㅜ.ㅜ
다시 그려 놓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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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rry ☆ Christm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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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메리 크리스마스^.~

구단씨 2020-12-29 13:31   좋아요 1 | URL
인사가 늦었습니다. ㅠㅠ
크리스마스 즐겁게 잘 지내셨나요?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우울해지는 일년이 아니었나 싶어요.
이제 남은 며칠 무사히 잘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연말 보내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 챙기시고, 그래도 해피하게 2020년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

scott 2021-01-09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페이퍼 읽고 감동 받았는데
이달의 당선작으로!
추카~추카~
강추위 주말 따숩고 평안하게 보내세요.^.^

구단씨 2021-01-17 21: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다시 추위가 찾아오고 오늘밤 여기는 폭설 예보가 있어요.
건강 유의하시고 겨울 즐겁게 지내세요~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274페이지)


글쎄, 버티는 삶이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겠다. 근데 정의하기 어려운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면 참 모순이기도 하겠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틈틈이 찾아오는 절망의 순간을, 버티지 않으면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는가. 절망의 근원을 찾아내 원망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뿐일까? 하지만 그렇게 원망한다고 해서 또 무엇이 달라질까. 갈팡질팡, 힘들다가 괜찮다가 하는 마음을 다스릴 방법이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예민해지고, 신경이 곤두서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날카로워지는 건 싫고. 그러니까. 신경질이나 짜증, 찡그린 얼굴이 내 모습이 되어가는 게 싫은데, 그게 쉽게 변할 수도 없는 방식 같아서 화가 나는 일 반복된다. 지금 이 상황을 대하는 자세가 변하면 될 것 같은데, 그건 또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은 건 아니다. 책으로 출간한 몇 권, 그 안에서도 몇 문장을 읽으며 방송에서 보는 그의 이미지와 말투가 그대로 옮겨간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이 책을 보고 드는 생각.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또 어려운데, 글의 분위기가 변한 느낌이다. 그 변화가 싫거나 이상하지는 않다. 오히려 삶의 어떤 순간을 건너온 그가 세상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진 게 보여서 흥미로웠다. 어쩌면 그가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 게 더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항상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절대 그의 생각을 바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은 그의 모든 것이고, 그걸 부정하려면 차라리 부러져버리겠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던 시간. 이미 다 알겠지만, 그는 생사를 오가는 큰 시련을 겪었다. 힘들다는 항암 치료까지 마치고 건강해졌다. 어느 날 방송에서 다시 본 그는 변해있었다. 그와 결벽증은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먼지 한 톨 용서할 수 없는 그의 자세가 너무 익숙했는데, 그는 이제 조금 흐트러진 상태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말투도 그대로고 문장도 그대로인데, 어딘지 모르게 그가 변했다는 건 그냥 느껴진다.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마치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시간을 걷는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꺼낸다. 차분하게 말한다. 간절하고 친근하게.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서 배우 브래드 피트는 태양계 경계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절대적인 고독 앞에 혼자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다는 걸 깨닫고 지구로 귀환한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간단한 걸 우주 끝까지 가서야 알 수 있냐며 조소한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데는 늘 큰 비용이 든다. 무려 암에 걸리고서야 그걸 알았냐고. 그러게 말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109페이지)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웃음이 나고 용기가 되는 말인 줄 처음 알았다. 입버릇처럼 죽겠다고 말하고, 미칠 것 같다고 머리카락 쥐어뜯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처럼 망했다는 말도 저절로 나올 것이다. 그런데 망하려면 아직 멀었단다. 그래, 아직 망하지도 않았고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었다. 첫 장은 그의 투병 경험을 말하고 이후 달라진 그의 시선을 들려준다. 나는 그가 언제나 당당하게 말하고 아무런 불편함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항상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방송에서 그런 이미지로 보일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심지어 그가 잘못했다고 해도 말로 싸우면 그를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이미지는 그가 살아온 방식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아온 시간을 뒤로하고 혼자였던 시간을 후회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삶의 방식을 이제는 다르게 보려고 애쓴다.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왔기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안쓰러움을 느껴도 될지 모르겠다. 그 시간과 그 방식을 통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오늘을 사는 또 다른 이에게 말한다. 절망에 빠지거나 도움을 기대할 곳 없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고민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장을 쓰는 그의 마음이 문장에서 그대로 읽힌다. 그만의 방식으로, 달라진 그의 시선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다. 사람들의 고민과 절망을 들을 때마다 그가 찾은 해법을 들려준다. 불행을 인정하는 것. 삶에 언제나 공생하는 불행이란 녀석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절망과 고통을 무너뜨리는 것일 테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불행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에서 우리가 버티고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희망도 있다고, 우리 삶이 언젠가 빛을 낼 그 순간을 기다리고 기원하며 살아가는 날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이 귓가에 남는다.


불행한 일을 겪으면 사람의 머릿속은 그렇게 된다. 그리고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져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보며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살고 싶다는 농담, 54페이지)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 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60페이지)


두 번째 장과 세 번째 장은 그동안 그가 그동안 만나왔던 영화나 책, 시사적인 뉴스들을 가져와 삶의 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괜찮다고 말하는 의미를 전하고,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인간의 삶을 강조한다.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불행을 탓하는 일이 얼마나 인생을 안타깝게 만들고야 마는지 보여준다. 닉슨 대통령의 몰락, 천재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를 몰락시킨 연인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것처럼 불행과 피해의식은 우리 삶을 또 다른 불행으로 밀어 넣는다. 비단 이렇게 영화 주인공이나 과거의 인물들에 빗대지 않아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겪는 불행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그 불행의 원인을 찾아내 원망도 하고 싶은 게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또 다른 후회뿐이라는 것을. 그의 말처럼, 우리가 불행한 일들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 반복되는 절망과 괴로움,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게 불행을 원망하는 거로 생각하기 쉽다. 내 불행의 화살이 향할 곳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 불행의 화살을 쏘기만 하면서 살 텐가. 불행의 생각에서 멀어지는 것만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를 바라보는 객관성을 키우는 게 불행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도 말한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도 그 바닥에서 올라와 역작을 남긴 니체의 이야기를 하면서, 불행을 직시하고 객관화하면 이 위기 극복의 실마리를 찾는다고 조언한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자기 객관화로 불행을 다스린다면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과거의 불행을 발판 삼아 현재의 건강한 삶이 유지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다 알 수도 없지만, 살아가야만 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가는 인생을 만들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들린다. 불행이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우리 삶을 짓누르는 무게 따위 느끼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각자의 불행은 너무 다양하고, 그 불행을 해결할 방법은 본인만 안다.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버티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아프기 전과 후의 내가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지 조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로 써서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달라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나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항암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서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살고 싶다는 농담, 217페이지)


오늘도 버티는 삶인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그의 위로가 담백하다. 섣부른 오지랖이나 조언이 아니라, 그 불행을 건너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로 들린다. 살기로 한 이들이 충분히 닮아도 좋을 삶의 자세가 그의 문장 안에 담겨 있다. 그의 문장에 담긴 따뜻함이 더 빛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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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와 혼란을 동시에 맛보여준 소설이 아닐까 싶다. 작가 조영주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작가의 작품을 직접 완독까지 한 경우는 없었다. 언제나 그 입소문의 진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까 싶어 궁금하기만 하던 차에 이 작품 『혐오자살』을 만났다. 뭔가 잔뜩 긴장하면서 읽기도 했다. 무엇보다 동명이인의 등장과 사건이 시간을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아서 기억하면서 읽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읽어가면서, 점점 결말에 다다르면서 느껴지는 그 사건의 진실 앞에서 만족감을 만났다.


자고 일어난 명지는 어젯밤의 일이 기억난다. 명지는 어젯밤에 남자 친구 김준혁을 죽였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기가 김준혁을 죽였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남자 친구가 죽은 현자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을뿐더러, 모두 그가 자살했다고 말한다. 현재 그가 처한 신체를 비관해서 스스로 죽었을 거라고, 그런 일이 흔한 세상이니 자살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14년 동안 김준혁을 만나온 명지는 그가 왜 자살해야 하는지 믿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죽인 게 아니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 죽은 사람은 잊고 새로운 김준혁과 잘 만나다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죽은 김준혁과 현재 살아있는 김준혁. 두 명의 김준혁은 명지의 인생을 채운 남자다. 한 명은 명지의 청춘을 채운 남자, 한 명은 명지의 첫사랑이자 최근 재회한 남자. 소설은 이 두 명의 김준혁을 등장시키고, 또 김준혁이 죽은 날을 중심으로 그 전과 후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죽은 김준혁은 살던 집을 두고 허름한 동네의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한다. 집을 중개했던 김 사장은 그의 형편에 딱 맞는 아파트를 소개해주고, 그 집에서 돈을 낭비하지 않게 충고 아닌 충고로 생활방식까지 정해준다. 하지만 그는 이사 온 첫날부터 그 집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옆집에도 이상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위층 아래층 심한 층간소음에 돌아버릴 지경이다. 부동산 김 사장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경비실 정 이사에게도 말해보지만, 매번 그만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 그를 경계하고, 그를 볼 때마다 놀란다. 마치 소인국에 들어간 거인처럼, 다들 그를 멀리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본다. 이제 그는 더는 이곳에서 살 수가 없다. 일도 그만두고, 면접 보는 것마다 탈락이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이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할 것만 같다. 안 되겠다. 마지막으로 명지를 한번 만나야겠다.


그랬다. 남자 친구 김준혁이 마지막으로 한번 명지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날, 명지는 그를 만났고 그가 죽었다. 소설은 명지의 착각 아닌 착각을 시작으로 김준혁의 죽음을 차근차근 파헤친다. 사건 8개월 전의 죽은 김준혁의 시간부터, 사건 일주일 전의 백명지의 시간과 사건 한 달 전의 형사 김나영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채워진다. 잘 짜인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도 들고, 누구도 모르는 자기만의 시선을 엿보는 재미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모를 각자의 사정과 인생이 하나씩 들려올 때마다 한숨이 쉬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며, 왜 내가 원하고 좋아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보여주기 좋은 모습이어야만 하는 것인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또한 이런 생의 진리 아닌 진리 같은 시선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무섭기도 하다. 어쨌든 이 소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나 자신과 다른 시선으로 나를 보면서 인간 혐오를 쌓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혐오의 이유를 마주했을 때 분노하고 흥분하면서도 어쩌면 우리는 이런 혐오의 감정을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지 묻고 싶어진다. 나는 정말로, 단 한 번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혐오를 가져본 적이 없는지를.


남자 친구 김준혁의 장례식이 끝나고 명지는 그가 살던 집에 가서 유품을 정리한다. 방문 목적은 유품 정리라고 하지만, 그녀 스스로 김준혁의 살인자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기에 이 찝찝한 감정을 털어내고 싶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의 집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떨어져 죽었다는 발코니에서조차 그의 지문이 없었다. 그는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었다는데, 어떻게 죽었기에 아무런 흔적이 없느냔 말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명지의 초조함은 커져만 가고, 그 와중에 형사 김나영이 이 사건의 수상함을 감지하고 파고들기 시작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동명이인에, 시간을 앞뒤로 왔다 갔다 했는지 궁금해도 재밌는 소설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뭔가 하나씩 더 드러나면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범인의 실체에 다가가는가 싶으면 뭔가 이상한 낌새에 범인을 단정할 수 없게 된다. 죽은 이들과 죽은 이들에게 남겨진 메시지 '이 나라를 떠나'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어서 끝까지 읽기 전까지는 그 확인을 마칠 수 없다. 등장인물들 또한 본명과 함께 그들의 별명으로 같이 나오는데, 아마 이 부분에서 이미 복선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미스터 블랙으로 불리던 김준혁, 죽은 김준혁의 친구 레드, 백설 공주로 불리던 백명지, 처음부터 계속 등장했던 난민이라는 신분. 언뜻 보면 이 단어들의 공통점을 금방 찾지 못할 것 같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인간의 묘한 심리가 가슴을 파고든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불행과 고통과 힘듦을 타인에게서 찾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없으면 금방 해결되고 괜찮아질 것 같은... 작은 편견으로 시작했던 거부의 감정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쌓여 금방 무너지지 않는 혐오로 자리 잡는다. 한마디로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 가지는 그 묘하고 두려운 감정의 적나라한 민낯을 그대로 비추는 작가의 방식이 흥미롭다. 그래서 추리소설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조각을 맞춰가는 재미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혐오가 얼마나 뿌리 깊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는지 차근차근 보여주면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혐오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그 혐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묻기도 한다. 그러면서 작가의 전작들에 등장한 형사 김나영 시리즈의 한 권으로 채워 넣는다. 추리소설의 재미와 메시지를 동시에 품고, 아직 형사 김나영의 다른 활약을 못 만난 독자가 있다면 당장에 확인하고 싶게 한다. 전작 『붉은 소파』와 『반전은 없다』와 같이 읽는다면 더 즐거울 것 같다. 작가의 말처럼, 두 작품 사이에 위치한 이 이야기의 여운을 더 느끼고 싶다면 세 작품 같이 만나는 시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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