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산책하듯 떠나는 여행서.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다.

나 혼자 가야 여행, 나 혼자 백제 여행, 나 혼자 경주 여행. 이번에 개정판 출간으로 <나 혼자 백제 여행>을 읽고, 경주 여행까지 읽고 있다. 역사 여행을 이렇게 다녀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추천한다.


이 책 때문은 아니지만, 백제문화역사지구 여행을 계획했었다. 내가 사는 곳과 가까워서 부담 없이 다녀오기로 했었다. 7월 첫 주에 2~3일 예정으로 돌아보기로 하고 숙소를 알아보기도 했다. 평일이면 좀 저렴하게 갈 수도 있겠군. 하지만 웬일. 비가 이렇게 빨리, 아주 많이 올 줄 몰랐다. 이 지역의 재래시장이, 큰 도로의 사거리 곳곳이 물에 잠겼다. 게으름에 숙소 예약까지 한 건 아니어서 다행인 걸까. 일정은 다시 8월 첫 주로 변경되었다. 비 때문에 미뤄지기는 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미뤄진 게 더 나은 듯하다. 딱히 백제문화역사지구를 돌아보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계획 없이 움직이는 것보다 저자의 코스대로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 책을 펼치고 나처럼 놀란 사람 분명 있을 텐데? 백제의 흔적이 서울에도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내가 둘러보려고 했던 곳도 부여, 공주, 익산 정도였다. 그러니 뜬금없이 서울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산책하듯 모이는 공원에서, 주택가 근처에서 백제 유물이 자리하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지. 풍납 백제문화공원과 풍납토성, 한성백제박물관, 방이동과 석촌동의 고분까지, 어떻게 서울의 곳곳에 이런 흔적이 남을 수 있을까? 특히 석촌동의 고분은 내가 몇 번이나 무심코 지나쳤던 곳에 있었다니. , 도대체 뭘 보고 다닌 거니?


저자가 너무 편하게 얘기해서 그런지, 마치 이 여정이 마음 크게 먹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그냥 슬리퍼 신고 나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나선 길 같다. 그렇다고 이 여행의 의미가 가벼운 건 아니다. 그만큼 역사 여행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조언으로 들린다. 크게 계획하고 떠나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이번에 부여를 시작으로 돌아보고 싶던 마음도 비슷하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사는 이곳에 백제문화유적이 자꾸 나오고 있고, 유명한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세월을 가끔 지켜본 시민으로 학교 수업에서나 들어왔던 백제문화역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역사에 무지했고, 달달 외우면서 시험 보기에 바빴던 시간은 지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변에 역사를 주제로 함께 여행할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런 목적의 여행 계획은 오롯이 내가 주관해야 했다. 별것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어서 미루고 미루기만 했으니 민망하다.


역사 여행이 일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저자는 선뜻 나선 그 길에서 동선을 확인하고 봐야 할 것을 보면서 나름 체계적인 여행을 하고 있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 흐름에 자기만의 여행을 그려보기도 한다.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역사적 사실과 검증된 것으로 파악하면 될 테지만, 그 역사의 흐름에 같이 하는 문화의 흔적도 놓치지 않는다. 자료로 확인한 것이 바탕이 되면서, 저자가 직접 보고 확인한 것이 더해져 역사의 비워진 틈에 그의 지식을 채워 넣는다. 박물관 마니아라는 저자의 수식어에 맞게, 철저하게 자료 조사를 하면서도 박물관에서 얻은 정보로 지식을 더한다. 무엇보다 관심이 없었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할 일이겠지.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에 남긴 건축물 중 거의 유일무이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은 것이다. 아 아니, 고분도 건축으로 포함한다면 유일무이는 아니겠구나. 부여 역시 능산리 고분이라는 왕릉이 있으니까. 음 여하튼 그만큼 역사적 가치도 상당하다 하겠다. (나 혼자 백제 여행, 190페이지)


백제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듯한 설명에 흐름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리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백제는 신문물 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듯하다. 특히 중국의 문화를 백제의 분위기에 맞게 변화하여 발전시켰다. 삼국(혹은 가야까지)으로 잘 지내기도 했지만, 전쟁도 겪어야 했다. 신라와 손을 잡아 고구려에 대항했으면서도 신라의 힘에 무너지기도 했던 백제는 이제 역사 속에 있다. 그 세월 동안 백제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문화 교류를 했다. 특히 일본의 문화 곳곳에 백제의 흔적이 있는 걸 보면 백제의 기술이 일본으로 흘러갔다는 게 증명되기도 한다. 백제의 건축 양식은 불교를 도입하면서 더 활성화된 느낌이다. 절을 짓고 탑을 쌓고. 왕의 능을 만들면서 그 기술을 뽐내는 듯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을 보면 그 시대의 기술을 그대로 눈에 담게 된다. 목탑으로 시작하여 석탑으로 변화하는 과정, 그 우아한 능, 절까지. 통일신라는 물론이고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데... , 정말 지나가면서 자주 보던 것도 너무 가볍게 봤던가 보다. 내 나라의 역사를 조금 더 관심 두고 살펴볼 것을, 후회하는 순간이다.


여행서는 많고 다양하지만, 이 책이 좀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아마도 저자의 여행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마치 동네 마실 나가듯 아침 먹고 나와서 버스를 타고, 박물관이나 유적지로 간다. 물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만이 정할 수 있는 동선일 테다. 그런 경지에 이르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 이 역사 여행을 다녀봐야 하는 걸까. 이 책에 담긴 저자의 백제 여행은 서울 잠실의 버스를 타면서 시작된다. 그 여행은 부여와 공주, 익산까지 이어져 백제 문화 여행의 완성판을 이룬다. 마음 끌리는 대로, 백제 유물 유적의 가치는 놓치지 않고, 발걸음은 가볍지만 마음은 진지하게 걷는다. 백제 유물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가치, 보이는 것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까지 알아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혹시라도 배경지식이 얕아서 주저하는 이가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고? 나보다 더 배경지식이 없는 이가 있을까? 그런 나도 백제 문화 유적 여행을 계획할 정도면 이 여행은 전혀 어려울 게 없다는 거다.


석탑 중 오른편에 위치한 동탑은 1994, 사라진 동탑의 터에 새 돌을 자르고 올려 마치 새 것처럼 복원한 것이다. 반면 왼편의 서탑은 백제 때부터 오랜 세월 이어오던 석탑이다. 특히 서탑은 2001년부터 해체를 시작하여 2009, 탑의 뿌리인 심주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였고 2018년 여름부터 완전히 복원되어 다시금 공개되었다. 그런 차이가 있음에도 어느덧 동탑도 연차를 꽤 먹어서 그런지 이제는 이곳과 어울리는 맛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다만 돌을 기계로 너무 새것처럼 갈아서 여전히 가까이서 보면 정이 들지 않는다. 그냥 적당한 거리를 두고 , 본래 저런 모양이었구나!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나 혼자 백제 여행, 224페이지)


2015년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더 관심이 생긴 건 사실이다. 가끔 미륵사지 석탑, 무왕의 묘라고 불리던 쌍릉, 왕궁리 석탑 등을 보러 가곤 했다. 내가 사는 도시에 있다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 오랜 세월 보호하듯 이어져 온 손길이 무엇인지 보고 싶기도 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어느 날 가림막이 쳐지고 복원의 세월을 거쳐 거의 20년 만에 다시 시민들의 눈으로 들어왔다. 우연히 지나다 본 쌍릉은 한참 발굴 작업 중이어서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었다. 왕궁리 석탑은 서늘한 가을날 행사 갔다가 봤다. 뭐든 의도하고 간 건 아니다. 그런데 가까이에 이런 곳이 있는데도 일부러 가지 않으면 평생 한 번도 못 가본 곳이 될 터였다. 거기에 우리가 겉핥기식으로 알아 왔던 백제의 이야기를 조금은 진지하게 다시 찾아보고 싶어졌다. 패배국이라는 오명 말고, 백제 문화가 세계에 끼친 영향을 돌아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많은 것이 사라졌고 그래서 더욱 상상력에 의존하여 그 시대를 알아가야 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더 깊게 파고들어야 하는 역사가 아닐까 싶다.


저자가 이 책을 왜 썼는지 알 것 같다. 말 그대로 일상이 고고학. 역사 여행이 일상이 되는 순간을 만나고 싶은 거다. 조금은 더 알고 그 유물과 유적지를 만난다면 여행의 의미는 더 깊어지리라. 다르게 보인다는 게 뭔지 확실히 알게 될 것 같다. 백제 유적 유물에 관한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백제의 역사를 같이 배우면서 여행하는 시간이었다.


저자의 팁에 따르면, 한성백제여행과 공주 부여 익산으로 떠나는 12일 코스가 있다. 한성백제 여행은 정말 하루에 다 다녀볼 수 있을 듯하다. (월드타워 근처에 언니 집이 있어서 그렇게 다녔던 길이건만, 이곳을 모르고 화려한 타워의 불빛만 보고 다녔네, 그려) 그리고 내가 계획했던 부여 공주 익산 백제문화역사 여행은 반대의 코스로 시작하려고 한다. 이곳에서 부여와 공주까지 가는 시간은 자차로 30~40분 정도 소요된다. 그래서 공주 먼저, 그리고 부여(미안, 사실은 아울렛이 첫 번째 목적지였어. ㅠㅠ), 부여에서 1, 그리고 이곳 익산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코스를 장식하고 귀가. 이 책이 굉장한 여행 안내서가 된다는 걸 이미 확인했으니, 안심하고 이 책 한 권 들고 떠나야겠다. 비가 빨리 멈추기를.


#일상이고고학 #나혼자백제여행 #나혼자가야여행 #나혼자경주여행

#황윤 #책읽는고양이 #역사여행 #부여 #공주 #익산 #백제 #삼국시대

#여행 #역사 ##책추천 #일상이고고학시리즈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8-06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8월의 무더위 건강 잘 챙기세요 ^ㅅ^

구단씨 2021-08-17 02: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녁 바람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요. ^^

그레이스 2021-08-0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구단씨 2021-08-17 02: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환절기가 서서히 오는 듯합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

초딩 2021-08-06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페이퍼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08-17 02: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월요일 같은 화요일 즐겁게 시작하세요. ^^

이하라 2021-08-06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08-17 02: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책, 좋은 이야기 잘 보고 있습니다. ^^

서니데이 2021-08-06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08-17 02:11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덩달아 새로운 아이스크림 찾아서 먹는 재미에 빠졌어요. ^^

희선 2021-08-07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 님 축하합니다 일상에서 역사를 알려는 거 좋을 듯합니다 경주에 사는 사람은 그런 거 하기 쉬울 것 같은데... 경주만 말하는 건 아니군요 백제 여행인데... 백제 여행을 서울에서 시작한다니 신기합니다


희선

구단씨 2021-08-17 02:11   좋아요 1 | URL
이 시리즈가 점점 넓은 곳 이야기로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혹시 점빵이라는 단어를 아시는지? 어렸을 적에 아빠가 점빵에 가서 뭘 좀 사 오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기억하는 걸 보면 아마 자주 들었던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구멍가게 관련된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이 나서 초록창에 찾아보니 이런 의미를 말해준다. ‘전방(廛房).(명사)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가게.(같은 말), 전포(廛舖).(비슷한 말), 점방(店房, 가게로 쓰는 방)’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마 점방을 센 발음으로 하다가 점빵이라고 불리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실제로 가게를 운영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가게가 일터였고 집이었다.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살림하곤 했다. 먹고 자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숙제도 하면서. 취미 삼아 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지는 공간이었을 테다. 책을 읽다가 새삼 알게 된 사실은 구멍가게를 운영한 대부분이 여성이었다니, 농사가 생업이던 시절에 부족한 수입을 채우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르겠고, 농사를 지을 수 없던 형편에 구멍가게라도 해야만 했을 테고, 어쩌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시도해볼 만한 생계수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경 작가의 책을 보면서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하곤 했다. 어느 시골길에서 마주칠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 구멍가게는 버스정류장이 되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작은 포장마차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해소해주면서 군것질 천국이었고,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나의 성장기에도 다르지 않을 그곳이 있었다.


집에서 나오면 바로 골목이 있고, 그 골목은 조금 걸어가면 차가 다니는 큰길, 그 큰길 모퉁이 자리했던 00상회. 뛰어가면 5초도 걸리지 않을 그곳에 드나드는 게 즐거움이었다. 과자, 아이스바(그땐 하드라고 불렀지), 음료수, 각종 반찬거리. 요즘의 마트와 편의점의 기원이라고 해도 되겠다. 아이스바 하나에 50원을 내고 사 먹은 기억도 있다(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 나이가 참... ㅠㅠ). 지금이야 먹을거리가 다양해졌고, 그 다양한 먹거리를 접할 기회도 많지만, 어디 그 시절이야 그랬을까. 그냥 슈퍼마켓 운영하는 친구의 집이 부러웠고, 부모가 삼거리에서 짜장면집 하는 자식들이 부러웠다. 막연하게 생각했지. ‘, 쟤네들은 매일매일 가게에 있는,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니까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가난이 만든 바람이 아니었을까.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든 환상 같은 거 말이다. 지나고 보면 그땐 그랬지하는 라떼를 마시는 기분이지만, 그래도 생각할수록 가끔은 그리운 시절이다. 가난의 기억만 뺀다면 다시 돌아가도 좋은 시간.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20~23페이지>


이 책 세 권을 함께 읽으면서 처음 구멍가게를 바라보던 환상은 점점 현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경 작가의 책이 구멍가게의 추억과 즐거움을 소환하는 거였다면, 박혜진 심우장 작가의 구멍가게 이야기는 조금은 서늘한 현재의 풍경이 같이 담겼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이들의 속내와 사연들. 그들의 이야기 속 세월의 흔적으로 우리 현대사의 한 흐름을 본다. 어떤 물건은 저절로 기억하면서 오랜 역사를 이어왔고, 우리가 쓰는 말의 어원을 뜻밖의 곳에서 찾기도 했다. 많은 이가 먹고 살기 위해 구멍가게를 운영했고, 그마저도 운영이 쉬웠던 건 아니다. 이제는 변해가는 세상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 변화의 속도는 또 얼마나 빠른지. 구멍가게는 동네 슈퍼마켓으로 변하기도 하면서, 이제는 대형 마트나 편의점으로 그 모습을 바꿨다. 요즘에 가끔 지나가다 보면, 시골 마을 안쪽 구석에도 편의점이 있더라. 얼마나 놀랐던지. 어느새 구멍가게는 몇십 년의 세월을 건너와 편의점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멍가게였던 때와는 완전 다른 분위기로 말이다. 내가 아무리 변하지 않기를 바라더라도 꿋꿋하게 그 변화는 계속되면서 우리의 일상을 파고든다.


<구멍가게 이야기 33페이지>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156~157페이지>


이상하게도 이 책들에 삽입된 사진과 그림을 보면서 뭔가 공통점을 느끼지 않았나? 바로 보이는 어떤 것들이 있더라. 구멍가게 옆의 우체통과 공중전화, 가게 문 앞이나 가게 앞 커다란 나무 그늘에 놓인 평상, 대부분 동네 어귀에 자리하면서 버스정류장의 역할을 했던 곳. 나에게도 즐거운 기억은 아니지만, 외상의 경험까지. 10대의 조카들에게 물으면 그게 뭐냐고 반문할만한 것들이 작가가 전하는 세월 속에 있었다. 지금 공중전화나 우체통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말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사용할 수 있게 어느 거리 어느 자리쯤에 있는 공중전화. 이제는 우체국 앞에나 있는 빨간 우체통. 동네 슈퍼나 구멍가게가 사라져가고 있으니 그 앞에 자리했던 장판 깔린 평상을 더는 볼 수 없다. 편의점의 파라솔이 예쁘게 자리하고 있지. 분명 우리 생활은 편해졌고 불필요한 시간 단축하며 살아갈 방법은 많아졌지만, 세월 속에 자리한 어떤 느낌은 사라져갔다. 계속 사라질 것이다. 조급한 일상에 쉬어가는 느낌으로, 때로는 아날로그레트로를 찾곤 하겠지만, 그것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겠지.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갈 사람들이기에, 지나간 그 시간에 많은 부분 할애하며 살아가기에는 그 불안과 조급증은 심해질지도 모르니까.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에 같은 시대를 읽게 하는 책들이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로 위기를 느끼기도 하고, 추억하는 것들로 그리움을 쌓기도 한다. 이미경 작가의 글이 자라던 시절의 모습을 그리고 추억을 새기고 싶은 동화를 생각한다면, 박혜진 심우장 작가의 글은 쇠락해가는 골목의 현실과 생존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동시에 두 이야기 모두 사람 사는 냄새를 맡게 한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된다. 작가들이 직접 그곳에 가서 보고 들은 것들은, 그리고 쓰고 찍어낸 것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살아가는 이야기,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가 공간의 깊이를 더한다. 거기에 우리의 시간이 더해져 추억이라는 것을 불러내기에 이르곤 하지. 그 추억이 꼭 좋은 것만 담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립고 애틋하고 그렇더라. 나이 먹어가는 느낌이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암튼, 읽다 보면 기분 묘해진다.


숨어있는 듯이 시골 마을의 구석에 자리한 구멍가게들은, 소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남겼다. 작가들 역시 하루 이틀이 아닌 오랜 세월 찾아다녔던 구멍가게들을 소개하면서 감성에만 푹 빠져들지 않게 삶의 치열함을 불러온다. 심심풀이가 아닌, 시골에 살면서도 농사를 생업으로 할 수 없는 이들이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수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외상을 주고도 돈을 못 받거나,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는 이들도 상대해야 하는 극한 직업. 그러니 구멍가게는 추억이나 감성에만 젖어있을 수 없는 모습도 갖고 있던 것이다. 약국이나 식당에서 팔던 담배가 이제는 구멍가게에서 살 수 있게 되고, 라면을 팔면서 가게 수입도 올렸지만 라면의 전성기를 함께 이뤄냈다고. 가게의 지붕 모양을 보고 건축의 변화도 가늠한다니. 구멍가게가 단순한 가게 이상의 존재로 남았다.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떤 구멍가게의 날들 164~165페이지>


건축은 시대를 반영한다. 내가 말하는 건축은 그 시대에 살았던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집과 공간이다. 과거의 터전이 낡고 오래되었다고 스스로의 터를 죄의식 없이 갈아엎고 부순다면 진짜 사라지는 것은 우리의 과거요, 추억이요, 고향이요, 자아일 수 있다. 반세기동안 근대화와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낡고 오래된 옛것을 우리의 삶에서 지우고 감추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전보다 따뜻하고 배부른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도 많다. 무분별한 개발보다는 복원과 보존으로 우리 삶의 근본과 맥락을 찾아야 할 때다. 더 늦기 전에.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164페이지)


무슨 박물관에 전시된 역사의 한 장면처럼, 구멍가게도 그 역사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 찌그러진 막걸릿잔에 이야기가 배었고, 출입문 문턱이 닳은 만큼 사람들의 시간이 녹았다. 동네 택배 업체가 되고, 돈이 오고 가는 거래소가 되고, 어른들의 놀이 공간도 되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시골 마을의 구심점이 되어 그 역할이 다양했다고 하니, 그런 공간이 점점 사라져서 거의 볼 수 없게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다양해지는 삶만큼 각자의 인생이 우선이 되는, 타인과의 교류 시간을 갖는 것보다 나를 위한 시간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굳이 한 공간에 모이지 않아도 가능한 교류의 방식이 얼마나 다양해졌던가.


<구멍가게 이야기 252페이지>


실제로 마을을 답사하며 담아낸 이야기에 구멍가게 고유의 역할을 듣는다. 구멍가게가 구판장, 00상회, 슈퍼마켓, 마트, 편의점이 되어가는 흐름도 읽는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존의 방식을 이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마을의 중심이 되어 머물 거로 여겼던 구멍가게는, 어느 날 다시 찾아가니 사라져버린 곳도 많았다고 한다. 굳이 작가의 말이 아니어도 그 사라짐의 순간은 우리가 자주 본다. 내가 자란 곳에서만 해도, 집 앞의 슈퍼마켓은 사라져 빈 가게가 되었다. 정육점은 폐점했고, 노인이 운영하던 약국도 사라졌다. 이 약국은 의료분업이 되면서 동네 어르신들의 경로당 역할을 했었는데, 주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다른 이가 다른 가게를 운영한다. 생각해보니 거의 다 사라져가는 것들뿐이네. 아쉽고 그립다. 필요한 게 있으면 아무 때나 가면 되는 편의점도 가까이 있고, 대형 마트에서 카트 한가득 장을 보고 오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그 자리에 머물기 바라는 것들이 사라질 때면 그 빈자리가 가슴에 생긴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건, 남아 있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정작 그 장소를 이용할 생각을 자주 하지 않는다는 거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꾸 깨끗하고 편한 것만 찾아다니곤 했지. 하아...


구멍가게의 과거와 현재는 이제 어떤 미래로 흘러갈지 궁금하다. 그 미래의 시간에 우리는 또 어떤 기억을 소환하며 오늘을 추억하게 될까. 어떤 모습을 마주하더라도 미래에 기억할 오늘의 시간이 씁쓸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속되는 삶에서 고단한 시간에 위로가 되는 기억으로 남아주기를 여전히 바라고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우리 옆에 있는 것들을 더 들여다보게 된다. 이것들이 나중에 어떻게 남아 있을까 궁금하면서도, 소소하지만 의미 있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아름답게 빛바래져 가기를.












 


댓글(24)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6-01 12: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구멍가게의 기능들이 사라지고, 이제는 편의점들만 있어서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드네요. 점점 삭막해지는 거 같은 ~~ 그래도 이렇게 글로 보니까 좋네요^^

구단씨 2021-06-01 13:57   좋아요 5 | URL
얼마전에 시골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자리에서 편의점 불빛이 반짝반짝...
구멍가게나 동네 슈퍼마켓이 사라져가는 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오다니. 세상이 이렇게 변해가는 걸 새삼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붕붕툐툐 2021-06-01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골 가다 저런 점방을 만나면 완전 반갑더라구요~ 이제 진짜 몇 안 남았겠죠? 아쉽..ㅠㅠ

구단씨 2021-06-08 22:47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거의 다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저부터도 저런 가게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선뜻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주저하게 되더라고요.

scott 2021-07-07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추카!
요책들 찜했놨는데
7월의 땡튜로~*

새파랑 2021-07-07 16:43   좋아요 2 | URL
멋진 구멍가게 이야기~! 구단님 축하드려요~😄

그레이스 2021-07-07 1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구멍가게 이름이...^^

구단씨 2021-07-09 22:35   좋아요 1 | URL
제 연식이 나오는 건가요? ^^
어릴 적에 어른들에게서 많이 듣던 단어였어요. 단어의 어감이 세서 그런가 기억에 남네요.

서니데이 2021-07-07 16: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07-09 22:3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더운 주말인데, 즐겁게 지내세요.

초딩 2021-07-07 2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07-09 22:3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7-08 0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07-09 22:3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모나리자 2021-07-08 1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구단님~^_^

구단씨 2021-07-09 23:01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책 많이 만나고 싶어요. ^^

thkang1001 2021-07-08 14: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7월도 좋은 시간 되세요!

구단씨 2021-07-09 23:0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더운 주말인데요. 편한 날 만드시길 바랍니다. ^^

황후화 2021-07-08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대박~~ 축하드려요 ~~

구단씨 2021-07-09 23:0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얄라알라 2021-07-21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이네요.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07-24 11: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지금도 가끔 시골길 가다 보면, 지금은 볼 수 없는 장소들 만나면 너무 반가워요. ^^

맘속풍경 2021-07-2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골길 삼거리 앞 구멍가게의 마루에서의 여유로움이 문득 그립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그리운 점빵..
글 감사합니다~

구단씨 2021-07-24 11:29   좋아요 0 | URL
정말 그 가게 앞의 평상이 언제나 있었어요. 거기 앉아서 땀도 식히고, 어르신들 술도 한잔씩 하시고... ^^
그립네요.
 


서미애 작가의 잘 자요 엄마를 분명 처음 출간될 때(초판 노블마인 출간) 읽었던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번에 출간된 작가의 최근작을 읽기 전에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펼쳐 들었다. 다 읽고 나니 이 책의 후속을 기다리는 독자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 후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서는 이 소설을 다 읽었다고, 모든 것이 후련해졌다고 말할 수 없었다.


희대의 연쇄살인범으로 사형수가 된 이병도는 그 어떤 인터뷰나 만남도 거절했다. 가끔 그가 만나는 국선변호인이 전부였다. 그런 그가 범죄 심리학자 선경을 만나자고 한다. 두 사람 사이의 접점은 없었기에 오히려 당황한 건 선경이다. 그가 왜 나를? 막상 만난 이병도는 그의 심리나 범죄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빙빙 돌려가면서 선경을 관찰하고, 맥락 없는 이야기만 꺼내면서 선경을 제압했다. 그는 왜 선경을 만나자고 했을까? 한편 선경은 갑자기 남편의 아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선경의 남편은 이혼남으로, 전처가 돌보던 딸이 한 명 있다. 알고 보니 아이의 엄마를 1년 전에 죽었고, 아이의 외조부모가 아이를 돌보고 있었던 것. 설상가상 아이가 살던 곳에 불이 났다. 외조부모 모두 사망한 상태로 아이를 돌볼 사람은 아빠밖에 없었고, 남편은 선경의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키우기로 한다.


, 나는 정말 이때부터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이 들더라. 불이 났는데, 게다가 자기를 돌봐주던 외조부모까지 사망한 상태인데, 아이는 너무 침착했다. 거기에 이병도는 갑자기 선경을 만나자고 하고. 아이와 이병도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사형수의 입에서 나올 진실을 기대하면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생활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병도를 만나는 일은 선경의 일이었고, 남편의 아이 하영과 같이 지내는 일은 그녀의 사생활이었다. 차분히 준비하고 질문을 추리고 이병도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그의 심리를 파악하는 일은 이성적인 업무로 보고 싶었다. 반면에 하영과 같이 지내는 일은 모든 것에 감정이 실리는, 누구라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새엄마가 되는 일이었다.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면서도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이병도를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그는 알 듯 모를듯한 말을 하면서 여지를 남겼다. 조금 더 이야기해보면 그의 여죄를 밝힐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했건만, 그는 여전히 선경을 흔들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그가 꺼내지 못한 어떤 진심을 본다. 그가 왜 잔인한 살인마가 되었는지, 그는 무슨 마음으로 여자들을 만났는지, 그 만남이 죽음으로 끝나야 하는 이유를 선경은 찾고 싶었다.


수많은 퍼즐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이루듯, 연쇄살인범들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모여서 완성되는 존재입니다. 유전적 기질, 성격, 성장 환경, 지금 현재의 상태, 심리적인 상황 같은 여러 조각들이 한자리에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죠. 햇빛을 렌즈로 모아 작은 한 점을 계속 쬐이면 종이가 불타기 시작하는 것처럼, 연쇄살인범도 어느 한 가지의 여건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렇게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한군데로 집중되면서 그게 발화점이 되어 범행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잘 자요 엄마, 53페이지)


선경의 시선으로 범죄의 심리를 쫓게 되는데, 그 시선을 따라가면서 보게 되는 건 살인마가 태어나는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다. 굳이 이 소설이 아니더라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접하는 많은, 잔인한 범죄의 가해자를 볼 때마다 궁금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공포와 두려움에서부터, 도대체 왜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 싶은 호기심과 원망스러운 마음까지. 소설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이 보인다. 어쩌면 우리도 이미 알고 있던 답. 이병도와 면담하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심리와 하영의 일상을 지켜보면서 알게 되는 것들과 맞춰지는 어떤 그림 말이다. 이병도와 하영, 둘은 너무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그래서 인간이 갖는 잔인함의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고 선경은 믿었다. 나도 믿고 싶다. 인간이기에 변화 가능한 모든 것에 심성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을 이렇게 하나씩 거둬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잔인함은 우리가 갖고 싶은 바람의 목록에 들어있지 않다.


솔직히 몇 페이지 넘기면서 상황은 다 보이는데도 페이지 넘김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일말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설마 하는 그대로 진행되지 않기를, 그래도 인간의 선함이 더 빛을 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해서다. 하영이 문득 꺼낸 그 말, “아줌마, 내가 비밀 한 가지 말해줄까요?”라는 어린아이의 호기심 넘치는 문장이 아니다. 섬뜩하다. 즐기는 듯한 그 시선, 타인의 고통과 공포를 바라보는 무심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아서. 그래서 더 궁금하다. 악의 근원은 어디인가 하는 물음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비밀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든, 아무리 깊게 묻어두어도 비밀은 기어코 모습을 드러내고 잔인한 미소를 짓는다.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 303페이지)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작가의 전작 잘 자요 엄마를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궁금했을 일. 열한 살 하영이의 마지막 표정을 기억한다면, 이야기가 그렇게 끝이 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지 뻔해서 말이다. 열한 살 아이답지 않게 표정도 생각도 모를 지경이던 하영이가 새엄마인 선경에게 우유 한 잔을 건네며 인사하던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많은 독자가 작가에게 물었을 것이다. 이게 끝인가요? 하영이는 어떻게 자랐나요? 사이코패스는 태어나는 건가요, 만들어지는 건가요? 한 권의 책에 그 모든 이야기를 담았음에도 여전히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던 독자에게 그 후의 이야기는 필요했다.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여전히 우리는 악의 힘에 휘둘려야 하는지, 악한 인간이라도 갱생의 여지는 없는 건지.


강릉의 어느 중학교 학생 유리. 가출을 결심하고 엄마의 돈까지 훔쳐서 집을 나왔다. 버스를 기다리던 유리에게 계속 전화와 문자가 수신된다. 유리는 받지 않았다.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무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다짐도 오래가지 않았다. 유리는 다가오는 아이들의 폭력에 목숨을 잃는다.


열한 살 하영이는 열여섯 살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통보하듯 말한다. 이사를 하겠다고, 선경이 아이를 가졌다고. 5년 동안 이 아이가, 이 가정이 어떻게 지냈을까 궁금했는데, 위태로우면서도 별일은 없었나 보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기는 하다. 하영은 아빠의 말에 분노하고 저녁 식탁을 엎는다. 왜 자기에게 의논하지 않느냐고, 일방적 통보가 화가 났다. 막상 이사하고 난 후, 새로운 환경이 하영에게 만들어준 것은 호기심과 차분함이었다. 서울에서와는 다르게 이 환경에 적응하느라 예전의 분위기는 잠시 잊은 듯하다. 그래도 여전했다. 하영은 날카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버리지 못했고, 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가방 하나로 또 다른 사건을 추적한다. 그곳은 강릉이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해야 할 사람은 하영 한 명이 아니었다. 선경도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이끌고 잘 지내야 했다. 하영과 새로운 학교에도 가봐야 했다. 다행히 하영은 자기 일은 알아서 잘하는 아이라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지만, 하영의 존재 자체가 선경을 불안하게 하는 건 여전했다. 거기에 남편은 이사도 갑자기 결정하더니 새로운 곳에서도 자기 시간을 우선으로 여기며 산다. 이곳의 일상은 평온했다. 먹고 자고, 글을 쓰고, 가끔 산책하고. 고요하고 평온한데 뭔가 숨어 있는 기분이다. 선경은 그 불안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채로 지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자기가 놓친 것들을 찾아낸다. 하영 역시 무료한 일상에 재미를 찾은 듯 그곳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한다.


이 책을 읽기도 전에 두려웠다. 나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편이라, 하영의 심성이 열한 살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로 여겼다. 맞다. 하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섬세하고 영악해졌다고 해야 하나? 어른의 시선이나 말 따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의 생각대로 산다. 그러니 5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이 가족의 위태로움은 더 짙어졌을 것이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하영의 일은 하영 혼자만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읽다 보면 은근한 두려움이 자꾸 쌓인다. 뭔가 자꾸 비밀이 쌓여가는 이 가족이 언제쯤 그 비밀을 드러내며 폭발할까 궁금할 정도였다. 그렇지 않은가. 비밀이 있다는 걸 아는데, 그 비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데, 드러나지 않은 채로 자꾸 그 비밀을 더 감추기 위한 일이 벌어지는 걸 이대로 볼 수만은 없으니. 전작의 마지막 사건으로 이 가족은 더 거리가 생겼다. 하영과 선경 사이의 비밀, 하영과 아빠 사이의 비밀, 선경과 남편 사이의 비밀. 모든 비밀은 차곡차곡 쌓이면서 거대한 벽이 된다. 그러니 이 가족이 회복될 거라는 기대는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장하는 하영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기대하는 이유는, 인간의 선함을 믿고 싶어서다. 여전히 하영은 보는 사람이 불안하게 하는 요소를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지만, 하영의 기억에서도 지워진 시간을 찾아냄으로써 자기 근원을 찾아가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게 기억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괴로워하다가도 무심코 잊고 있던 시간. 악인이 되었음에도 악을 벌하고 싶은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싶어 어렵지만, 참고 견디다가 억울하게 죽은 목숨을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었던 거다. 누구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비밀과 권력이 방해하더라도 기어코 그 마음을 부숴버릴 수 있는 상태에 이른다. (, 이럴 때 정말 드라마 <모범택시>라도 부르고 싶다. 은수, 미나, 지훈, 성호 같은 애들 다 혼내주게.) 정말 어떻게 자라나고 있을지 몰라서 두렵고 기대되는 장면이었다. 때로는 악이 넘쳐서 무섭고, 이상하게 기대어 올 때는 다정해서 손잡고 싶고, 딱 그 나이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서 평범해 보이기도 하는, 하영은 알쏭달쏭 그 마음을 알고 싶어서 계속 바라보게 되는 인물이다.


아마도 전작과 이 작품을 다 읽은 독자라면 좀 서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전작의 강렬함에 이번 작품 출간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을 테니, 그 기대감이 오를 대로 올랐을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읽는다면, 이 작품은 조금 김이 빠진 것 같다. 화재 사건과 동물 학대, 살인 등 전작에서 보여줬던 거에 비하면 이 작품의 분위기는 좀 선하다. 학교 폭력과 살인, 가스라이팅, 폭행 등 다양한 악이 등장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인간에 대한 이해로 비친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를 부르는 일들 앞에서 어떤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험난하면서도 제대로 맞춰지는 퍼즐 같았다. 그렇지. 인간이 악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선함을 갖고 있기에 인간이라는 기대가 사라지지 않게 만든다. ‘하영 연대기는 그렇게 이뤄지는 과정을 지나고 있다. 악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악해지지 않을 노력. 그 악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찾아가는 시도. 그 악을 뿌리 뽑아야 하는 임무. 그래서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못한다.


전작 개정판을 읽으면서 보니 이 이야기는 총 3부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처음 한 작품으로 끝내려는 작가의 마음과는 다르게 쇄도하는 독자의 요청에 2(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에는 하영의 청소년기 모습을, 3부에서 성인이 되는 하영의 모습까지 담는다고 한다. 이 작품을 읽고 나니 마지막 작품이 더 기대될 수밖에 없다. 읽으면서 미심쩍었던, 그 악의 근원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너무 궁금해서 말이다. 비밀이 더는 비밀로 남지 않을 시리즈의 결말을 기대한다. 아쉽게도 3부까지 기다려야 그 마지막을 볼 수 있다니 갈증은 좀 나겠다.



조심스럽게 덧붙이자면 , 서미애 작가의 작품 모두 재밌게 읽힌다. 장편은 장편대로, 단편은 단편대로 흥미롭다. 장편은 종이책으로 읽고, 단편은 전자책으로 자투리 시간에 읽곤 했는데 충분히 흥미로웠다. 한국 추리소설에 관심 가지고 호감이 생기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작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1-06-0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행복한 금요일 밤 되세요~

구단씨 2021-06-08 22: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더운 날들 시작인데, 조금이라도 시원한 날들 지내시길요. ^^

서니데이 2021-06-04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06-08 22:4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항상 일상의 좋은 이야기, 신간 도서 잘 보고 있습니다.

꼬마요정 2021-06-0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용!!

구단씨 2021-06-08 22: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더워지는 계절 건강 조심하세요.

새파랑 2021-06-04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구단씨 2021-06-08 22:5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언제나 아아가 땡기는 날들입니다. ^^

이하라 2021-06-0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06-08 22: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
 


단순한 생각이 좋다는 게 무엇인지 이 책 읽고 다시 새겼다. 자기 임무에 충실한... 이 책은 분량도 적고 가방에도 쏙 들어가서 휴대하기 좋지만, 또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는 무게감이 있기도 하다. 이 분야를 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혹은 작가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면 좋은 지침서가 되기도 하겠다. 무엇보다 독자에게도 만족스러운 책이 아닐까 한다. 나는 진짜, 궁금했거든. ^^


독자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한다는 온라인 서점 엠디. 나는 진짜 단순하게 생각했다. 작가는 글을 쓰고, 출판사는 그 글을 책으로 만들고, 서점은 그 책을 판다. 이렇게 생각하면 단순한 과정으로 보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거. 글을 쓰는 것도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일 테다. 출판사가 책을 만드는 일도 참으로 복잡한 과정이 있었다. 서점에서 책을 파는 일 역시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홈쇼핑의 뒷이야기를 들으면서 엠디의 고단한 업무를 본 적이 있는데, 서점의 엠디도 마찬가지였다. 출간된 책만 파는 게 아니었다. 물론 기본 중의 기본은 책을 파는 일이겠지만, 독자가 책을 주문하고 서점에서 판매하는 단순 과정이 아니었다는 거다. 특히 요즘에는 책파는 게 아닌 곳이 바로 온라인 서점 아니었던가.


엠디. 그들의 업무도 다양했다. 특히 오전 8시에 업무를 시작한다고 해서 놀라기도 했다. 누구나 비슷하게 9시에 일을 시작하는 게 당연한 거로 알았기에, 온라인 서점의 고객센터도 9시부터 전화 연결이 되었기에 말이다. (문의 사항 있으면 시계 보면서 전화기에 번호 누르고 9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게 습관이 되었음. 시간 잘못 맞추면 상담 연결 바로 안 되어서 화가 나기도 했기에) 그런데 8시에 업무를 시작한단다. 고객이 주문한 책과 재고 확인은 물론 출판사 발주까지 마무리해야 오전이 끝난다. 이들의 일은 대부분 전화 통화로 이루어지고 만나야 할 사람, 해결해야 할 회의도 많다.


, 무슨 책 파는 일이 이렇게 복잡한가 싶었다. 거기에 요즘에는 서점에서 책만 파는 게 아니지 않은가?! 굿즈를 샀더니 책이 따라왔다는 말, 낯설지 않다. , 나 정말 이런 얘기 굳이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한때 온라인 서점에서 주는 컵에 미쳐서 책을 정말 많이 샀다. 읽고 싶어서? 아니, 컵 받고 싶어서. 근데 받고 보니 또 아까워서 컵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상자 포장 그대로 아껴두고 쌓아두고 있던 게 10년이 넘었고, 엄마가 맨날 내다 버리라고 하실 때마다 이 귀한 것을 왜 버리라고 하느냐며 싸우고, 근데 또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애물단지 아니겠나. 그랬다. 나는 이 컵들을 바라보고 모셔두기만 했다. 그러다가 엄마랑 싸우기를 몇 년. 이번에 이사하면서 그 컵을 죄다 가지고 와서 잘 쓰고 있다. 맞다. 컵은 무언가를 따라 마시면서 사용해야 그 의미가 있다. 그렇게 나는 10년도 훨씬 넘은 컵을 이제야 사용하고 있다. 아직도 튼튼하다. 아마도 깨질 때까지 사용하게 되지 않을까?


처음부터 엠디의 업무가 이런 건 아니었을 거다. 온라인 서점이 처음 생기면서 편집자라는 이름으로 일을 시작했다는 저자.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 그 당시에 엠디로 일하는 건 지금보다 입사 구멍이 좀 넓었던 것 같다. 이력서와 도서 리뷰 몇 편으로 심사했다고 한다. 온라인 서점의 시작은 독자인 나에게도 눈이 확 뜨이는 판매점이었다. 시골에 살면서 서점 찾기도 어렵고, 서점에서 모든 책을 다 파는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할인해서 판매해주는 곳이니 얼마나 좋았던가. 무료배송이 할인해주는 책을 파는 곳이 생겼다는 건 책이 있어야 하는 이들에게 단비 같았을 거다. 그런 시장에서 책을 판매하는 이들의 업무가 점점 확장되었던 건 온라인 서점의 역할이 달라지면서부터다. 그리고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온라인 서점과 독자 역시 마음 자세를 바꾸어야 했다. 일정 부분 이상의 할인은 금지되었고, 우리가 목숨 걸고 사수하고 싶었던 공짜 굿즈도 이제는 돈을 지급해야만 내 것이 된다. 경품의 규모도 같이 변했으니, , 슬프고 슬픈 일이다.


무엇보다 온라인 서점의 메인 화면에 보이는 책 추천 카테고리. 나도 한 번씩 클릭해보고 들어가 보는 곳이다. 새로 나온 책, 오늘의 책, 베스트셀러, 거기에 로그인까지 한 상태라면 개인 맞춤형 추천까지 해주는(아마도 이건 AI?) 정도이니 어느 정도는 만족스럽다. (이 맞춤형 추천이 100% 내 취향은 아님) 암튼, 이렇게 주기적으로 바뀌는 화면을 만드는 이도 엠디라고 한다. 이런 것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나는 엠디의 업무를 간단히 여겼다. 말 그대로, 책을 팔기 위해 뭐든 다 하는 사람이 되어 그 공간에 파묻힌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출판사 편집자를 만나고, 새로 나온 책을 읽고, 책을 팔기 위한 전략에 빠져든다. 굿즈를 위한 시장조사와 회의를 하거나, 신간의 매출을 위해 추천 리뷰도 작성해야 한다. 책을 많이 팔기 위한 온갖 이벤트 기획 역시 엠디의 몫이다. 수많은 책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그들의 일이기도 하지만, 눈곱만큼이라도 책이 좋아서 뛰어든 곳일지도 모르지만, 그들 역시 경쟁이라는 시장 원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엠디의 많은 역할을 내가 다 적지는 못하겠다. 너무 많아. 많아도 너무 많아. 누군들, 자기 일이 단순하거나 쉽지는 않을 테다. 그런데 온라인 서점 엠디의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아서, 그저 책이 좋다고 읽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은 감히 엄두를 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단해 보였다. 그래도 좋으니까 하는 거겠지? 그들의 업무 중에서 나는 이게 정말 궁금했는데, 그 많은 책을 다 읽고 소개하는 걸까 싶었다. 비록 소개하지는 못하더라도 많은 책을 접해야 그들의 안목도 넓어지고 세상에 이런 책이 있다는 걸 알아야 책을 걸러내는 역할도 할 것인데, 도대체 그 많은 책을 언제 읽느냐 하는 거였다. 그 비밀은 정말 간단했다. 저자가 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에 맞게 책을 골라서 소개해주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책을 실제 출간된 책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내가 지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책을 꾸며내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면 된다. (아하. 끄덕끄덕) 세상의 책을 다 읽을 수는 없고, 부득이하게 읽지 않은 책(읽다가 만 책)을 이야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이 방법도 꽤 유용하다. (나도 이런 적 있음. ㅠㅠ)


어쩌면 남녀노소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세상과 소통하는 이 시대에, 종이책을 팔고 있다는 것만큼 아날로그적인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의 서점은 웹 속에 존재하지만, 이 모니터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한다. 비록 우리와 고객과의 만남은 온라인에서 이뤄지지만, 책을 통해 이뤄지는 행복과 경험은 분명 우리에게도 도달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일은 실재하는 사람이 만나는 일이다. (책 파는 법 169페이지)


읽다가 보면 엠디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사실 그 영역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지금 그들이 하는 일도 어쩌면 내일 달라질지도 모른다. 내일 또 책 시장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변화하는 시장에 맞게 엠디도 독자도 변화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소개 글의 한 문장처럼, 엠디의 하루가 고달플수록 독자의 만족도는 올라간다. 엠디와 독자가 서로 눈에 보이는 존재는 아니지만, 온라인 서점이라는 공간에서 서로의 역할은 분명히 있다. 책을 팔고 책을 사는 위치에서 서로가 원하는 걸 위해, 만족하기 위해 존재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온라인 서점을 이용했다. 아마 온라인 서점의 시작과 거의 같은 시기에 나도 온라인 서점 이용자가 되었을 거다. 내 기억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이용자로 온라인 서점을 겪어온 나의 시간과 온라인 서점 엠디로 살아온 저자의 시간이 비슷할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온라인 서점의 변화를 똑같이 보아왔으리라. 그 변화 속에서 만족한 것도 있고 불편한 것도 있다. 그래도 매 순간 독자가 요구하는 것을 새기고 반영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저자의 글로 보인다. 물론 그 노력은 책을 팔기 위한 궁극적인 임무와 목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대상인 독자의 만족도를 위한 일이라는 것도 맞다. ‘내돈내산의 만족을 위한 독자의 요구는 아마도 계속되겠지. 그렇기에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도 엠디의 일이겠지. 고단하고 힘들겠지만, 책을 매개로 한 당신과 나 사이의 만족도를 위해 계속 애써주기를. (미안합니다. 역시 저도 책을 돈 주고 사는 사람이기에, ‘내돈내산책의 만족을 항상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독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부디 책 읽는 것을 부담스러운 활동으로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거다. 사람들은 책 좀 봐야 하는데하는 말을 습관처럼 하고 책을 읽으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도 심심찮게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서 정작 책에 대한 기억은 방학 내내 추천도서 목록을 읽고 독후감 몇 편을 써냈던 선에 멈추어 있다면 어찌 독서가 행복할 수 있을까? 어찌 독서에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책을 읽는 것은 의무나 책임이 아니라 아무 부담 없이, 그저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 이 생각은 서점에서 일하기 전이나 일하고 있는 지금이나 변함없다. (책 파는 법 73페이지)


책을 가까이하면서도 다 알지 못했던 하나의 세상을 본 것 같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다 알지 못한다. 병원에 수없이 드나들면서도 의료진의 입장을 다 알 수 없던 것처럼, 책으로 엮인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전에 읽었던 출판 관련 이야기도 흥미로웠는데, 일상이 된 온라인 서점 속 엠디의 세상도 재밌다. 일로 보면 그저 자기 밥벌이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독자로 살면서 책을 파는 공간의 이야기도 즐거웠다. 이런 이야기, 우리가 직접 부딪히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자주 듣고 싶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4-15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엠디가 일하는 범위가 엄청 넓군요. 굿즈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ㅎㅎ 리뷰를 보니 책을 좋아하더라도 그게 직업이 된다면 그렇게 즐겁지 않을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ㅜㅜ

구단씨 2021-04-17 22:18   좋아요 1 | URL
네. ^^
저는 굿즈만 담당하는 담당자가 따로 있는 줄 알았어요. 독립된 부서로 굿즈를 목적으로 일하는... ^^
근데 참 도서 엠디가 많은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초딩 2021-05-08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행복한 주말 되세요~

서니데이 2021-05-08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1-05-09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즐거운 날 되세요~
 



여행을 즐기지 않았다. 짐을 꾸리는 일부터 낯선 곳에서 고생하던 시간이 별로라면서, 그런데도 시간이 된다면 어딘가로 움직이는 마음이 참 모순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귀찮다고 여기는 내가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싶었던 순간이 작년 내내 계속이었다. 코로나로 변한 일상이, 처음에는 좀 견딜 수 있다고 여기던 마음이 점점 힘들어졌다. 움직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여행하고 싶어도 불가능해진 현실 앞에서 당황했다. 우울하고 슬펐다.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던 일상이,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도 된다면서 미루기만 했던 일들이 불가능해지니 코로나 이전의 날들이 감사했다. 별일 없이 지내던 일상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커피 한 잔의 소소한 행복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 날들이었다. 거기에 마스다 미리의 작품은 그 소소한 날들이 어떤 것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의 오늘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오늘의 인생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스쳐 보낸 일상의 단편들을 그려낸다. 어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웃지 않는 페이지가 없었다.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 당황해서 소리 내지 못하고 나오는 웃음. 그래, 우리 이런 맛에 웃으면서 살아왔었지 싶은 이야기에 혼자 적어놓은 일기를 보는 기분이었다. 인생의 하루하루가 이렇게 모여서 삶이 완성되는구나 싶을 정도로 평온한 날들의, 평범한 날의 소박한 기록이었다. 너무 특별해서 기억하고 자랑하고 싶은 날이 아니라, 너무 평범해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순간들을 사진 찍어놓는 듯하다. 사실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날보다 어떤 사건이나 특별한 날이 더 잘 기억나는 건 맞다. 그러면서도 그 특별함 속에 자리한 평범한 날들이 잊히지도 않는다. 가끔 그렇게 별일 없는 날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는 걸 보면, 역시 인생을 채우는 시간 속에서 평범한 일상의 기억이 더 애틋하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가 이렇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듣다 보면 우리의 일상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하는 것. 작가가 부리는 마법일지도.


<오늘의 인생2, 138페이지>

 

오늘의 인생 2는 그 마법의 연장선에 있다. 여전한 날들의 평범함, 그 평범함 속에서 우리가 무심코 찾아내는 삶의 기쁨인 기록이다. 거기에 작년 한 해 우리가 고통스럽게 견디던 코로나의 일상이 담겼다. 이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던 날들일 것이다. 마스크가 필수품이 되고, 식당이나 커피점에 앉아서 먹지 못 하는 일이 생기는, 매일 브리핑하는 확진자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우고, 내 옆을 지나가는 누군가를 피해야 하는 공포까지.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을 지낸다. 하루하루 식사를 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날들을 이어간다. 평범하지 않은 날들 속에서 평범함을 살아간다. 작가의 일상을 또 한 번 마주하면서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세계가 이렇게 변하게 되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로 우리는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본다.

 

특이하면서도 그럴 수 있음을 공감한다. 겨울날의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드라이를 켜고 머리카락을 데우는(?) 일이라니. ^^ 이런 부지런함이 있을까 싶어 웃음부터 났는데, 차가웠던 머리카락이 따뜻해지면 기분이 좋다는 말에 격한 끄덕임을 보냈다. 그럴 수 있다. 차가움보다는 따뜻함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손끝에 닿는 그 느낌이 그대로 마음이 전해져온다고 생각하면, 겨울 아침의 드라이하기는 충분히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작가가 보여주는 그 간결한 선의 그림이, 많은 생각보다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그대로 담아내면 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길을 걷다가 멈춰서서 어딘가를 바라보는 작가는 우리이기도 하다. 많은 일에 지친 것 같다며 차 한잔 간절하지만 아무 가게에도 들어가기 싫은 마음을 품은 모습은 낯설지 않다. 주택가 어느 골목에서 나는 저녁밥 냄새에서 그리움을 찾기도 한다. 삶의 곳곳에서 묻어나는 이야기가 있는 그대로 다가와서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가끔 감추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은가. 아닌 척, 괜찮은 척,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안 듣는 척하면서, 일상의 사소함에 관심 없이 살아가고 싶어지는 마음. 어쩌면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세계에 속하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을 버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안도를 전한다. 작가가 전하는 일상의 가장 큰 힘은 공감일 것이다.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하루하루가 이렇게 충만할 수도 있구나 싶은 감동일지도 모른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어야지 하면서 향하는 걸음이 가볍고, 차 한잔에 수다 떠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고, 전철에서 아빠의 어깨에 기대어 자는 아들의 모습에 언젠가 기억할 오늘을 상상하고, 꽃가루를 피해 도쿄를 떠난 여행지에서의 만족감 같은 일이 일상을 반짝이게 한다.


<오늘의 인생2, 64페이지>

 

어쩌면 지나간 오늘은 붙잡을 수 없는, 지나간 하루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자기보다 어린 학생들을 마주하면서 종종 그들이 가진 젊음과 가능성을 언급한다. 그 나이여서 아름다운, 그 나이가 지나면 알게 될 순간들을 말하기도 한다. 사실 언제나 그렇다. 이상하게도 인생의 많은 일은 지나고 아는 경우가 많더라. 그래서 때로는 후회가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나간 날들을 떠올리며 애틋해지기도 한다.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는 세월이지만, 계속 이어지는 인생이기에 오늘의 인생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내일의 나를 기대하면서 사는 날들일지도.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어간다.

 

휴일을 보내면서 꼬박 집 정리를 하고, 길가의 고양이에 시선을 빼앗기고, 갓 구워나온 빵 냄새에 정신을 못 차리고 주문하는, 기분 전환 삼아 빨간 지갑을 사러 갔다가 그냥 나오고, 헬스장에서 영상을 보며 운동하고, 여행길에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접어두는, 아무리 봐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는 작가의 이야기이기에 그 소박한 한 마디에 마음이 향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다짐하는 작가의 바람으로 시작하는 이 책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불안을 안고 산다. 마음대로 만날 수 없고, 어디로든 떠나는 것도 망설일 수밖에 없는 날들이다. 그런 오늘의 인생이 감사하다. 언젠가 마주할 내일, 오늘의 인생을 기억하며 애틋함에 수다의 주제로 오를지 모른다. 그때의 우리는 이랬다고, 그때의 불안은 정말 힘들었다고, 그래도 살아온 오늘이기에 소중하다고 말하면서. 울고 웃으면서 채워진 오늘의 인생이라고 말이다.

 

 

소심하게 덧붙이자면,

작가가 책 속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책들의 제목을 메모하는 즐거움도 컸다는 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