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지만, ‘고전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한 가지. 너무 유명해서, 여러 버전으로 접해서 내가 이미 그 작품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거다. 그 착각 속에는 고전을 많이 읽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도 있다. 고백하지만, 나는 정말 고전 거의 안 읽었다. 이상하게 상 받은 작품들 재미가 없다고 느끼는 것처럼, 고전이 재미가 없더라는 거다. 물론 모든 고전이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이니, 그저 그 작품이 내 마음에 쏙 들어오거나 아니거나, 뭐 그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그렇게 고전을 두고 몇 가지 고민을 하던 차에 새롭게 만나는 고전의 버전이 일러스트였다. 그리하여 이번에 읽게 된 제인제인 에어를 현대판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주인공 제인은 사랑하는 부모님을 잃고, 이모의 집에서 길러진다. 평소 왕래가 없던 이모 집에서 살아야 하는 어린 여자아이의 인생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객식구 한 명이 늘었지만, 아무도 관심 두는 이가 없다. 이모의 집은 분위기가 살벌하다. 폭력적이고 매일 싸운다. 제인은 이 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만 지내자고 혼자 마음먹는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아야 했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그렇게 제인은 부모님이 바다에 나갔던 것처럼 뱃일을 한다. 어느 정도 돈이 모였을 때 제인은 뉴욕으로 떠난다. 아마 그 집 식구들 누구도 제인이 떠나는 것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티격태격에 바쁜 나머지 제인이 그 집에서 살았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제인은 뉴욕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작은 방을 구한다. 그러면서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일자리를 또 구해야 했는데, 용모단정한 이를 뽑는다고 해서 간 일자리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가라는 대로 갔더니 저택이었고, 집주인 이름은 로체스터. ㅋㅋㅋ 제인이 할 일은 로체스터의 딸 아델을 돌보는 유모였던 것. 유모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는 말에 생각했다. , 고된 직업이겠군. 진상 고객의 요구를 들어주기 힘들었으니, 가장 오래 버틴 유모가 일주일이겠지. 바로 뒤돌아서서 나갈 줄 알았던 제인은 아델과 친해지고 싶어한다. ? 사실 제인은 어릴 적 혼자 지내며 외로웠던 시절을 아델에게서 다시 본 거였다. 엄마가 없이 아빠와 살지만, 아빠는 바빠서 아델을 볼 시간도 없는 게 현실. 제인이 지금 아델을 보는 게 동정은 아니겠지만, 안쓰러운 어린 시절을 지내는 건 맞지. 어쨌든 제인은 아델과 친해지고, 점점 아델을 보러 가는 일이 즐겁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마주친 아델의 아빠, 로체스터!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빠는 사업 때문에 바빠서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아델의 상황을 아는 제인은 이때다 싶어 로체스터에게 아델의 상황을 말한다. 아이가 유치원에서도 혼자 지낸다고, 친구가 없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한다고, 학습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로체스터는 과외 선생을 들이라고 했던가? , 뭐든 돈으로 해결하면 되는 거였군. 하지만 우리의 제인은 그렇게 놔두지 않았지. 로체스터에게 유치원의 상담에 참여하라고, 아델을 좀 더 잘 돌보라는 조언을 건넨다. 그러다가 점점, 제인은 심장이 없는 듯 살아가는 로체스터에게 반하고, 로체스터 역시 제인에게 마음이 가는데...


원작에서도 아이가 있었던가? 그게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런데 반전같이 존재했던 비밀의 방은 이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아무도 들어가면 안 돼, 큰일 난다, 누구라도 그 방에 접근하려고 하는 순간 저택에서 쫓겨난다고. 제인은 이 약속을 잘 지키지만, 설마 아델의 아빠에게 마음에 뺏길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저택은 어디든 수상한 기운이 풍기고, 로체스터를 바라보는 마음을 자꾸만 심쿵하다. 이상하게 원작보다 뭔가 더 스릴 있고 더 로맨틱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밤에 계단을 오르던 그 남자는 누구일지, 로체스터가 강렬하게 제인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뭔지. , 이거 정말 사랑인가요? ?


줄거리는 거의 비슷하고, 배경이 현대로 바뀐 것만 좀 다른 듯하다. 제인이 당당하게 혼자서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마지막까지 로체스터와 관계가 더 진전되는지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 죽을뻔한 위기를 같이 탈출했으니, 사랑하는 마음에 전우애 비슷한 것까지 더해지지 않았을까? 중간에서 아델이 또 중재자 역할도 잘할 것 같고. 이 정도면 훈훈한 마무리 되시겠다. 읽으면서도 계속 쏠리는 이 소설의 장르는 역시 고전이라기보다는 로맨스 소설 아닌감? 근데 왜 열린 결말처럼 보여줬는지 모르겠군. 둘이 다시 만나서 잘 먹고 잘살았다, 이것까지 확인사살 해주면 안 되는 법칙이라고 있는 건지 뭔지. 문장 말고 그림이 보여 주는 장면들이 확실히 더 설레긴 하다. 막 뽀뽀하는 이런 장면도 넣어주고 말이야.


몇 년 전 언젠가,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키다리 아저씨를 읽은 적이 있다. 이미 내용도 알고 여러 가지 버전으로 눈을 호강하면서 봤던 작품인데, 이거 느낌이 다르다. 문장으로 장면을 그려가면서 읽는 그 느낌이 더 말캉하다고 해야 하나. 주디가 저비스 씨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밀당 잘하라고 중얼거렸다. 일상을 너무 오픈하는 거 아니냐고 주디를 구박하면서 읽었다니까. 나중에 저비스 씨가 키다리 아저씨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싶어서 혼자 안절부절.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이미 눈치챘는데, 주디만 몰라. 저비스 씨가 키다리 아저씨라니까!!! 뒹굴뒹굴하면서 읽다가 발차기를 여러 번, 혼자 얼마나 흥분을 했던지. 읽으면서 주디랑 저비스 씨 때문에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다. 주디가 너무 순진하게 보여서, 저비스 씨가 빨리 정체를 밝히지 않아서 말이야. 처음 뭣 모르고 펼쳤을 땐 동화를 읽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점점 빠져들면서 이 소설의 장르를 확인했다지. 로맨스 소설이지 뭐야. 홍홍. 아무래도 내 고전(?) 취향은 이런 건가 보다. 읽고 보니 말랑말랑해지는 거? ^^ , 주인공에게 너무 이입하지 말아야 하는데, 읽다 보면 그게 잘 안 됨. 이제 막 변신펼쳤는데, 이 작품은 또 어떠려나. 기대 반 설렘 반. 뭔가 묵직한 여운까지 한꺼번에 와닿았으면 좋겠네.


두 작품 모두 어린 여자아이가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 주면서도, 당당한 삶 속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세 역시 당당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험난한 성장 과정이었어도, 고아 소녀였어도, 불우한 어린 시절이 있었어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면서 자기 삶을 완성해가고 있었다는 것. 제인 에어의 원작이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면서, 여성의 삶이 남자의 보호 아래 있어야 안정적이라는 것과 그래서 결혼까지 닿아야 완성된 인생이라고 믿었을 때라고 하니, 현대판으로 각색된 제인에서는 로체스터의 보호나 선택이 아닌 제인 자신의 커리어와 당당함으로 인생을 완성해간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외면당한 자기 화풍이 인정받고 전시회까지 하는 것으로 그녀의 자리가 굳어진다. 그리고 사랑도 더 탄탄하게 이뤄가리라고 믿는다. 그게 인생이지.


혹시라도 나처럼, 고전 읽어보고 싶은데 선뜻 덤빌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비슷한 분위기로 들려오는 여러 버전을 접해도 좋다고 말하고 싶네그려. 활자로 빽빽한 이야기가 부담스럽다면, 일러스트나 동화 같은 이야기로 먼저 만나도 충분히 즐겁다. 뭐든, 읽는 게 먼저 아니겠음둥? 읽고 보니 재밌다. 그리고 더 재밌어질 이야기들이 기다려지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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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06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왠지 저 키스씬은 캔디가 생각난다는.... 분위기 캔디와 테리우스의 키스씬과 분위기 너무 비슷합니다. 그러고보면 제인에어도 결국 캔디장르라는 생각이 드네요. ^^

구단씨 2022-01-11 15:18   좋아요 0 | URL
꺄아악~ 캔디와 테리우스.
이야기의 분위기가 약간 비슷하죠? 캔디형 주인공. ^^

다락방 2022-01-06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키스씬 때문에 보고싶네요 ㅋㅋㅋㅋㅋ

구단씨 2022-01-11 15:18   좋아요 0 | URL
까르르르르~
그림 스타일이 좀 투박(?)한 느낌이 있는데, 로맨스드라마 보는 느낌이 강합니다. ^^
 


 

엄마를 생각하면 정말 지독하게 슬픈 기억 몇 가지가 있다. 그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 한 가지.


어느 날 집으로 최후 독촉장 같은 게 날라왔다. 뭔가 하고 펼쳐보니 가압류 통지서였나 보다. (그땐 어려서 그 서류의 정확한 이름이 뭔지 기억나지 않는다) 흔히 아는 그거, 빨간 딱지 붙이러 오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엄마는 왜 이런 게 우리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는데, 아뿔싸. 남에게 보증 서주는 게 취미였던 아버지가 엄마에게 의논도 없이 동네 후배의 사업에 보증인이 되었던 거다. 뭐 가진 게 있어야 털릴 거라도 있지. 낡고 허름한 집 한 채가 전부였던 우리에게 이 무슨 날벼락인지. 엄마는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고, 그래도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어린 막냇동생을 둘러업고 여기저기 알아보러 다녔다. 당시 세무 관련 일을 잘 알았던 이모부에게 의논했고, 결과는 어찌어찌 집은 엄마의 명의로 변경했고, 돈을 빌린 후배는 간신히 사업 관련 채무를 정리한 듯했다. 그것도 꽤 오랜 시일이 걸려서 말이다.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얼마 안 되는 값어치의 집이지만, 이것마저 없다면 갈 곳도 없는데 온 식구가 길바닥에 나앉으라는 것이냐 하던 엄마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또 다른 이의 빚보증을 서주었고, 그때마다 우리는 간을 졸이며 그 순간을 건너갔다. 항상 일을 터트린 사람은 아버지였는데, 언제나 그 일을 마무리하는 건 엄마의 몫이었다. , 엄마 속이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기억 속 엄마는 항상 사는 일에 억척이었다. 아마 대부분 엄마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뭐 하나 넉넉하지 않은 생활을 꾸려나가려면 억척스럽고 드세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 어릴 때 뭣 모르고, 나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았다. 남들과 싸워도 지지 않으려는 엄마의 태도는 용감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곳에서도,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던 엄마의 모습이 때로는 뻔뻔해 보였지만,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꽤 든든하게 느꼈더랬다. 어려서 그랬다고 말하기에는 참 말도 안 되는 이유였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엄마의 그런 세월이 안쓰럽기만 하다. 살아오느라 참 힘들었구나, 고생 많이 하셨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번도 여유로웠던 형편인 적이 없었으니까.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의 어린 자식들은 다 커서 더는 엄마의 돌봄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 정도. 하지만 이 말도 모순이다. 엄마의 자식인 우리 남매들은 여전히 엄마를 부르며 엄마의 손길이 닿아야 하는 일을 부탁하곤 하니까.


사실 엄마에 관한 정말 잔인한 기억 하나가 있는데, 그건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하겠다. 엄마와 나만 아는, 우리가 함께 욕하는 그 일을 두고두고 반복하지만, 그건 엄마와 나만 기억하는 일로 묻어두어야겠지. 엄마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고, 엄마의 바깥 활동의 즐거움을 끊어버린 그 일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의 표지를 보면서 잊고 싶은 그 일이 생각났다. 세상 모든 엄마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고 하면 과장일까. 누구나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면서 사는 건 아니겠지만, 머리끄덩이만 잡지 않았지 그런 자세로 살아가는 건 비슷하지 않을까. 작품 속 엄마는 빚만 남기고 살면서 행복한 적 없던 남편과 이혼하고 용역업체에 소속되어 건물 청소 일을 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생계를 위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나날 속에서 노조를 만들기도 한다. 노조를 만들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부당한 대우는 더 심해졌다. 일은 고되고 힘들지만, 엄마는 친구들과 자주 만나고 춤을 배우면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린다. 오래된 애인도 있다. 그 애인 때문에 덜 외롭고 울고 웃고 하지만, 항상 헤어지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놈의 정이 뭔지 쉽게 헤어지지도 못한다. 집에는 서른 넘은 아들이 음악을 한다며 엄마와 함께 산다. 그 집에 애인까지 드나들며 서로의 인생을 꾸려가는데, 이게 참 묘하다. 친구들과 술 마시고 춤추러 다니고, 또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소장과 반장의 부당함에 입을 모아 욕하고, 애인은 또 다른 여자를 만나는데도 너만 한 여자 없다고 말하며 엄마 옆에 붙어 있다. 아들은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건 또 엄마의 인생이니 서로의 삶을 존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도 이제 지쳤다. 인제 그만 혼자 지내고 싶다. 아들에게 독립하라며 집에서 내보낸다. 애인과는 헤어진다. 혼자가 된 엄마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


아, 이런 결말을 기대한 건 아닌데, 암튼, 엄마 이야기의 결말은 조금 더 이어진다. 상당히 팍팍한 삶을 겪어온 엄마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멋있어 보인다. 자기 일 열심히 하고, 건강하게 자식 잘 키웠고, 애인과 외로움도 나누면서 돈도 나누고, 친구들 만나서 신나게 놀기도 하는 일상을 가진 사람. 너무 멋진 것 같다. 여전히 엄마의 삶은 팍팍하기도 하고, 돈이 궁하기도 하다. 노후 준비도 못 한 채로 살아가는 날들이 불안하다. 애인과 싸우기도 하고, 친구와 절교하기도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사는 데 그런 일도 생길 수 있는 거지 뭐. 보통 어머니를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과 억척스러운 날들을 살아온 것이 뭐가 얼마나 다른 건지 모르겠다. 이 모자(작가가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쓴 이야기란다. 50% 정도 비슷하다고)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많이 착각하고 살아온 건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어쩌면 내가 아는 엄마는 10%도 되지 않는 거 아닐까? 보여주고 말로 하는 것 말고, 가슴에 담아둔 많은 이야기와 생각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들더라. 엄마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엄마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부분도 있다. 그런 생각마저 뭔가 어긋난 느낌이다. ‘엄마가 아니라 부모의 역할이었을 뿐이었던 건 아닐까. 가끔은 엄마의 신세 한탄 같은 푸념을 듣고 있다 보면, 엄마 인생이 참 쓸쓸하다는 생각에 한참 머문다. 왜 엄마의 시간은 이렇게 채워져야만 했을까.


내가 모르던 시절의 엄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웃기기도 하고 눈물 나기도 하는데, 같이 나이 들어가는 지금, 이제 그런 이야기는 우리의 공통 주제가 되기도 한다. 가끔 어떤 책을 읽으면 유독 엄마 생각이 많이 나서, 그 책의 후기에 나도 모르게 엄마 이야기가 주절주절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제 내가 그럴 나이가 된 건지 어떤 건지, 엄마의 지난 세월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돼버리고야 마는... 작가는 엄마의 연애를 중심으로 엄마의 인생을 그렸지만, 나는 엄마의 고된 시간만 자꾸 생각난다. 오늘도 엄마를 모시고 병원 투어를 했는데, 젊은 엄마의 씩씩함과 열정은 어느새 사그라들어버렸다는 걸 새삼 느낀다. 시우 작가의 쑥부쟁이속 엄마의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 언제나 인내만을 필요로 했던 삶을 곱씹으며, 고단한 시간을 억척스럽게 버텨온 것도 모자라 아직도 자식을 더 보살피지 못한 안타까움을 안고 산다. 쑥부쟁이속 엄마는 딸의 이혼 소식에 어떻게든 말리고 싶어 한다.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사는 고단함을 알기 때문에. 다 그렇게 산다고, 아이들 때문에 산다고 조금 참으라고. 하지만 딸의 이혼 결정은 또 다른 길을 연다. 딸은 이제야 숨 쉬는 것 같다고, 살 것 같다고 이혼 결정을 담백하게 받아들인다. 반면 엄마는 딸이 자기 삶을 따라오는 것 같아서 불안하고 미안하다.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삶, 그나마 큰딸이 있어서 의지가 되고 든든했던 건데, 이제 그 큰딸에게 엄마는 해줄 게 없다. 그저 마음만 아플 뿐.


뭘 그렇게 잘못하며 살아왔다고, 자식들한테 다 퍼주기만 하는 인생을 기꺼이 받아들었더냐. 오늘도 몸과 마음이 쪼그라드는 우리 엄마는 가난밖에 물려주지 못했다며 미안해하고, 이제는 나이 든 몸을 자식한테 기대느라 미안함이 곱절이 되었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만큼 해줬으면 됐지 뭘 더 해주겠다고. (뭔가 더 주면 받기는 하겠다만. ^^) 어찌 보면 아직도 이해할 게 더 많이 남은 사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엄마들의 아들은 진즉에 엄마의 삶을 이해하며 받아들였기에 엄마의 애인을 인정했고, 쑥부쟁이의 엄마는 오랜 세월 키우고 지켜봤던 딸을 이제 좀 알 것 같다. 그 딸은 또 엄마가 조용히 적어둔 시를 들춰냄으로써 엄마의 시간을 읽는다. 그렇게 또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말고,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게 뭘까. 나이 들어갈수록, 한 해 한 해 서로의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쉬운 게 아니라 어려워지는 이 아이러니는 또 뭐고. 에휴.


눈이 오는 것도 아닌데 주변이 어두컴컴 흐려진다. 엄마가 이제 힘들다고 김장 안 하신다고 했는데, 엄마가 담근 김장김치 묵은지로 만든 김치찜에 막걸리 한잔하고 싶다. 아쉬운 대로 오늘은 치킨에 캔맥주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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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2-15 1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마들>이란 책 존재도 몰랐는데 덕분에 알게 되어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리뷰 읽을 때는 소설이겠거니 했는데 마지막 링크를 타고 가보니 그래픽노블이네요. 엄마 는 이상하게 그냥 엄마 라고 부르기만 해도 코끝이 찡해져서 어쩌면 저 그래픽 노블 읽다가도 울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읽어볼래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구단씨 님.

구단씨 2021-12-17 14:44   좋아요 0 | URL
작가가 엄마의 연애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기에 유쾌하고 재밌어요. ^^
근데 또 그 엄마 인생의 바탕에는 고생과 서글픔이 깔려 있어서 그런지 웃기만 할 수는 없더라고요.

쎄인트saint 2021-12-16 15: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1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그레이스 2021-12-16 15:37   좋아요 1 | URL
저도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12-17 14:47   좋아요 0 | URL
세인트님,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일년동안 좋은 글, 좋은 책 이야기 잘 듣고 보관함에 많이 넣었어요. ^^
즐거운 시간 감사한데 서재의 달인까지 되어서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이하라 2021-12-16 15: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연말 되세요.^^

구단씨 2021-12-17 14: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thkang1001 2021-12-16 15: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021 서재의 달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12-17 14: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일년동안 좋은 책이야기 잘 듣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mini74 2021-12-16 15: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제목도 내용도 넘 슬퍼서 읽기만 하고 댓글 못 단 글이네요 ㅠㅠ

구단씨 2021-12-17 14:5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책은 유쾌하게 잘 흘러갑니다. 재밌어요. 엄마의 인생이... ^^ 그래도 엄마는 언제나 힘드셨겠지만요.

감사합니다.
미니74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

서니데이 2021-12-16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과 좋은 하루 되세요.^^

구단씨 2021-12-17 14: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12-16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의 21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1-12-17 14: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1-12-16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021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12-17 15: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

러블리땡 2021-12-17 0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1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 좋은 밤 되세요~

구단씨 2021-12-17 15:0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님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

희선 2021-12-17 0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면 좋을 텐데... 구단 님도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걱정이 많겠습니다 덜 아프시기를 바랍니다 구단 님은 어머님 여러 가지를 아시네요 저는 더 몰라요

구단 님 서재 달인 축하합니다 2021년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구단씨 2021-12-17 15:04   좋아요 3 | URL
그래도 잘 모르겠죠. 아마 더 많은 세월을 같이 해도 다 알기는 어려울 듯해요.

감사합니다.
희선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thkang1001 2021-12-17 14: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021 서재의 달인!‘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22년도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이 모두 잘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구단씨 2021-12-17 15:0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정신없이 지냈던 2년이 이렇게 흘러가네요.
제발 별일 없이, 무사히 한해가 마무리 되기를 바랍니다.

thkang1001 2021-12-17 16: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감사합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드실텐데, 오늘 일기예보를 들으니, 내일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0도 가까이까지 떨어질 것 같다고 합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scott 2022-01-07 17: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추카 !✌관왕 ^^

구단씨 2022-01-11 15:00   좋아요 1 | URL
우앙~ 감사합니다. 놀랐어요. ^^

mini74 2022-01-07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지무지 감축드리옵니다 *^^*

구단씨 2022-01-11 15:01   좋아요 1 | URL
좋은 책 읽고 즐거운 소식까지 들으니 더 기뻐요~ ^^

새파랑 2022-01-07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과 당선을 동시에~!!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2-01-11 15:01   좋아요 0 | URL
연말연초 좋은 소식에 즐겁네요.

이하라 2022-01-07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새해 기쁜 주말되세요^^

구단씨 2022-01-11 15:02   좋아요 0 | URL
한파가 또 온답니다. 바람이 벌써 차갑네요.
건강 유의하시고 편한 날들 지내세요.

그레이스 2022-01-07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2-01-11 15: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얄라알라 2022-01-07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 아니었다면 놓치고 울고 갈뻔했네요

겨울이라 더욱 그런지, 어머니 아버지 엄마 아빠 어무이 아부지 이야기가 더욱 더 뜨겁게 들립니다.

구단씨님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2-01-11 15:03   좋아요 1 | URL
엄마가 요즘 많이 편찮으셔서 그런지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아요.
좋은 책 공유하게 되어 기쁩니다.

서니데이 2022-01-07 2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구단씨 2022-01-11 15:03   좋아요 2 | URL
주말 잘 지내셨나요? ^^
밖의 바람이 차가워져서 목도리 감싸고 나왔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thkang1001 2022-01-07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구단씨 2022-01-11 15:0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평안한 날들 지내세요.

러블리땡 2022-01-08 0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축하드립니다 ^^ 2관왕 멋져용

구단씨 2022-01-11 15:04   좋아요 2 | URL
기뻐요~! ^^ 책 사고 싶네요.
 


"병이 났다고요? 그럼 빨리 사직서를 제출하세요. 그러면 실업 급여는 받을 수 있도록 권고사직으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사직서를 내지 않으면 무단결근으로 해고하게 되며 이 경우 실업 급여를 못 받게 됩니다."

황대리의 이야기는 간단했지만 명료했다. 경비는 아프지 말든지, 아프면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대학병원에 입원한 직원에게 이튿날 전화로 해고 통보라니. 결근 사유가 질병임을 할면서도 무단결근으로 해곤하다는 것은 억지였다. 아파트 경비원을 할 때도 병이 날 경우, 국공립 병원의 진단서를 첨부하면 한 달의 기간에 한해 무급 휴가가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적어도 취업규칙상으로는 그랬다. (임계장이야기 244페이지)


가끔 집으로 가져오는 음식 중 일부를 아파트 경비 초소에 가져다드린 적이 있다. 시골에서 가져온 단감 몇 개, 비타민 음료, 여름에 집으로 들어오다가 사 온 냉커피. 일상에서 소소하게,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려니 싶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 선뜻 보이게 되는 호의다. 그런데 그렇게 한 번씩 보이는 호의에도 경비 아저씨는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신다. 나이가 지긋하신, 조금 젊으신 분은 어쩌면 나에게 나이 차 있는 큰 오빠 정도로 보이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인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오히려 인사받는 내가 민망할 때가 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실까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경비분들의 고충이 이해되기도 한다.


저자는 젊은 날 회사에 소속되어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외국 파견을 나가기도 하면서 한국에서 혼자 가정을 책임지는 아내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사업을 하면서 가진 것 모두를 잃기도 했다. 취업하려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지만, 회신을 주는 곳은 없었다. 스스로 눈높이를 좀 낮춰야겠다고 마음먹고 끝까지 매달린 경비 업무 일을 따내게 되었다. 경비 교육을 받기 위한 십만 원 남짓의 돈이 없어서 친구에게 빌렸다. 그렇게 얻은 일터였다. 쉽게 물러날 곳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남들에게 경비 일을 한다고 일부러 말하지는 않지만, 그는 자기 일을 고마워하며 책임을 다한다. 그런 그에게 아파트 경비 일은, 크지 않은 금액이지만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감사한 일이기도 하면서, 스스로 아파트 시설물이라고 주문을 외우며 자존감에 상처받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경험이 낯설지 않은 건, 이미 비일비재하게 접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전 입주민 대표에게 아는 척하지 않았다고 경비를 주시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도대체 전 입주민 대표의 존재는 뭐란 말입니까?!), 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입주민들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 날벼락을 맞기도 하는(왜 음식물 쓰레기를 일반 쓰레기 속에 몰래 숨겨 버리시는 건가요?!), 밤에 몰래 쓰레기장에 내다 버린 보라색 여행용 가방의 주인을 찾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쓰레기 수거 비용 3천 원 아껴서 부자 되시려고요?!), 입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뿌려진 왕소금을 이물질이라고 부르며 치워달라고 경비를 부르는 일에 허탈해한다.


경비원과 입주민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나면 어느 편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입주자의 승리다. 경비원과 트러블이 있다고 입주자가 이사를 나가는 경우는 없다. 나가는 쪽은 언제나 경비원이다. 말이라도 잘못 덧붙였다가는 그 자리에서 계약 만료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계약이 끝나는 1~2개월 후에는 무조건 연장 없이 계약 만료, 즉 해고다. 정규직이 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의 설움이겠다.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64페이지)


굳이 아파트가 아니어도 이런 진상들을 마주하는 일은 흔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러면 안 되는데 입주민이라고 갑질 행태로 사람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사람,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계급으로 나누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나는 가방끈의 길이로 상식을 생각하진 않는다. 이렇게 비매너에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이들이 무식하다고 보인다. 아파트 경비에게 신경 쓰고 대우해주라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이분들이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일하는,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가는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며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왜 그걸 자주 잊고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하찮게 여기느냔 말이다. 혹시 지금 외제차를 타고 비싼 아파트에 산다고 당신이 그 아파트의 경비와 다른 삶으로 인생 마무리할 거로 장담할 수 있을까?


저자가 3년여의 세월을 아파트 경비로 일하면서 틈틈이 적은 메모 같은 글을 책으로 엮어낸 글이다. 그도 인생 살아오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시쳇말로 잘 나가던 때도 있었고 실패도 겪었다. 그런데도 사람을 위아래로 나눠서 보지 않았다. 그의 아파트 경비 경험은 세상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그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에 많은 생각에 잠겼으리라. 본인도 아파트에 실거주하면서 입주민과 경비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다움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그의 행동 곳곳에서 보인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 세상에는 내가 다 모르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 많구나. 사람이 이렇게 잔인하고 마음이 작을 수가 있을까 싶어 안타깝기까지 했다. 경비 초소에서 졸고 있는 그를 지적하며 마치 내가 좋은 사람이니까 이런 것도 말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걸렸으면 너는 끝이야.’라는 뉘앙스로 훈계하는 입주민 때문일까. 그는 스스로 투명인간이라 표현하며, 경비원 복장을 하는 순간 자기 안의 모든 감정을 버린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입주민이 부당하게 대우해도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뒤돌아서야 하는 자세로 일한다.


도대체 입주민들이 아파트에서 자기 업무를 하는 경비노동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기에 이런 이야기하는 걸까. 스스로 아파트의 움직이는 시설물로 주문을 걸면서 하루를 사는 기분이 어떤 건지, 이 책을 읽고서야 조금 알게 됐다. 작가 장강명이 이 책을 추천하면서 했던 말, 이 글을 읽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30년 넘게 아파트에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경비노동자의 삶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장강명의 추천사에 공감한다. 혹시라도 내가 하는 한 마디가 그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내가 귀찮아서 제대로 하지 않은 일에 그들의 노동이 증가하게 되는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 아파트였다. 오늘도 분리수거에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다고 투덜대면서 들어왔던 것을 급히 반성한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누군가의 일은 더 늘어나고, 그들의 자존감에 상처가 되는 일을 만든다. 물론 아파트에 사는 사람 모두가 진상 입주민은 아니다. 그 안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 근무 위치가 변한 것을 알고 안부를 묻는 입주민도 있다. 사람 온기를 넣어주는 이들이 훨씬 많겠지만, 일부 입주민 때문에 받은 상처는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이 건넨 온기를 넘어설 때가 많을 거다.


나락에 떨어져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고 알지 못했던 타인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특히 그 거울 앞에 선 나의 모습 또한 눈에 들어온다. 몸이 낮아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의 눈높이가 움직인다. 나의 한심함을 뼈저리게 통감하면서 지금 나의 처지가 나의 선생이 되었음을 느낀다.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130페이지)


이분들의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 건, 아마도 내 주변에 아파트나 건물 경비 일을 하시는 분을 종종 봐서 그럴 거다. 대부분 아파트 경비 일을 하시며, 꼬박 24시간을 근무하고 24시간을 쉰다. 퇴근하고 지친 몸을 뉘면 피곤해도 쉽게 잠이 오지 않고, 혹시라도 개인적인 볼일을 하루가 빠듯하다. 남들은 하루 일하고 하루 쉬니까 좋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루를 쉰다고 해서 그 하루가 느긋하게 흐르는 것도 아니다. 가족과 얼굴도 보고 소박한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도 있는 시간. 한 개인의 노동 기록이지만, 누구나 비슷하게 품고 사는 하루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하루를 들여다보는 일에 누구라도 선뜻 동참해주었으면 싶다. 그 작은 경비 초소에서의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지, 언젠가의 내가, 내 가족이, 내 지인이 그 자리에서 보낼 하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감해주기를.


현실적인 경비 업무 교과서가 아닐까 싶다. 좀 더 깊고 무겁게 얘기해도 되겠지만, 이 책은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이론에만 머물지 않은, 실전 경험담이 그대로 담겼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말보다 더 적나라하게 다가올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임계장 이야기중간착취의 지옥도와 같이 읽어도 좋겠다.










#나는아파트경비원입니다 #최훈 #정미소출판사 #에세이 #임계장이야기 #중간착취의지옥도

#경비원 #경비노동자 #계약직 #갑과을 #경비업무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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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1-11-22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ㅠ 임계장이야기 펑펑 울면서 읽었네요. 이번 책도 임계장이야기에서 들었던 입주민 진상 부리는 문제는 여전하네요.ㅠ경비노동자들이 일보다는 사람들한테 더 치이는 것 같아요.맘 아파요.

구단씨 2021-11-22 22:01   좋아요 4 | URL

제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런 주제의 책 많을 것 같아요.
최근에 이 주제의 책을 몇권 읽었는데, 진짜 힘들었어요. 인간이 왜 그럴까 싶었네요.
좀 더 무거운 내용도 있긴 한데, 그보다는 이 내용 자체가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scott 2021-12-09 16: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코로나 무섭게 확진자 급증 중 ㅠ.ㅠ
건강 잘 챙기세요

구단씨 2021-12-09 22:33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여기도 확진자 급증입니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mini74 2021-12-09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1-12-09 22:3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주말 지나면 추워진다네요!! 건강 챙기셔요.

그레이스 2021-12-09 16: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12-09 22:3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책 많은데 다 읽을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

독서괭 2021-12-09 16: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임계장 이야기는 읽었는데,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라는 책도 있군요. 문득 오늘 경비원분들께 귤이라도 좀 갖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구단씨 2021-12-09 22:35   좋아요 3 | URL
좋은 생각이십니다. ^^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 일에 서로의 관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새파랑 2021-12-09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당선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12-09 22:3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독서 목록에 항상 부러움이... ^^
차곡차곡 보관함에 넣고 있어요.

이하라 2021-12-09 18: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1-12-09 22:3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추워져서 자꾸 방안에 있게 되네요. 책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

서니데이 2021-12-09 2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1-12-09 22:3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페이퍼 속에 항상 책 한권씩 있어서 책 소개 받는 기분이 들어요. ^^
 

 

추석 연휴 동안 넷플릭스 드라마 DP를 몰아서 봤다. 드라마가 궁금했는데 원작도 보고 싶었고, 마음과는 다르게 원작을 먼저 볼 기회는 없었다. 결국, 드라마를 잠깐 봐야지 했다가 시즌1을 한꺼번에 다 보게 되었다. 그동안 부드러운 이미지로 굳혀 있던 배우 정해인이 이런 역할도 하는구나 싶어서 살짝 놀란 것도 잠시, 군대에서의 탈영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싶어서 더 놀라고야 말았다. 주변 사람들 통해서 군대 이야기는 종종 들어왔으나, 그 실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나는 그저 이야기로 듣고 말았을 뿐이고,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보다가 갑자기 큰 조카가 생각이 났다.


내 주변에 가장 최근에 군대를 다녀온 이는 큰조카였다. 제대한 지 2~3년쯤 된 것 같다. 인천의 어느 섬에서 군 생활을 했고, ,.이었다. 헌병이라고 하니 가장 먼저 각 잡힌 제복이 생각났고,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궁금했다. 훈련도 받고, 짜인 일정대로 야간에 근무하기도 한다면서,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 다 일어나서 식사하고 낮 훈련받는 시간에도 늦잠을 자기도 한다더라. 모두가 똑같이 찍어낸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한 가지 형태로만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헌병은 또 그런 생활을 하는구나 싶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사실 군대 가혹행위 같은 거 없냐고 물었지만 괜찮다는 대답만 들었다. 한 가지 힘든 점은 섬에 있다 보니 날씨에 따라 배가 오고 가지 않을 때도 있다 보니, 보급품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을 때도 있고 휴가를 제날짜에 나오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무엇보다 우리가 면회 한번 가려고 계획하다가 알게 된 사실은, 배를 타고 들어갔다가 숙박까지 하고 나와야 하는데 교통비며 숙박비가 장난 아니어서 포기했다는 것 정도.


너무 막연하게, 너무 무난한 것만 생각했나 보다. 오래전에 친구나 학교 선배들에게 들은 군대 얘기는 때로는 잔인하면서도 어이없었고,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게 많았다. 그때로부터 거의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 큰 조카가 군대에 갔으니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따로 들은 말도 없기에 요즘 군대 괜찮구나 하는, 나 혼자만의 착각을 키워왔던가 보다. 이 만화 때문에 탈영병 잡는 군인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탈영병이 많았다는 것도, 탈영의 이유가 다양한 듯하면서도 다양하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다. 군대가 바뀐다고 기대하지만, 바뀌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군대에서 DP였다던 작가의 경험에 근거했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창작물이지만 실화를 그대로 옮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만 짙어졌다.


드라마와 원작은 비슷하다. 주인공 안준호의 배경, 입대 후 일어나는 위치 변화, 탈영병 찾으러 다니면서 마주하게 된 에피소드가 약간 앞뒤로 섞인 것 등. 서로 다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섞인 거 말고는 거의 비슷하다. 부대 안에서 훈련받고 헌병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다른 부대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지만, DP도 나름 고충이 많다. 마치 형사가 범인 추적하듯 온갖 수단과 두뇌를 총동원해서 탈영병을 쫓아야 하고, 받아온 활동비 내에서 외부 생활을 해결해야 한다. 어떤 DP들은 사비로 충당하면서 활동한다고 하지만 상병 안준호에게 사비라는 건 없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지긋지긋해서 도피하듯 들어간 곳이 군대였으니, 그에게는 휴가도 반갑지 않은 일이다. 술에 절어 사는 아버지, 아버지의 폭력에 길든 엄마, 두 동생은 현실에 안주하듯 피해가듯 살아가는 날들이었다. 그가 기를 쓰고 탈영병을 찾으러 다니면서 느끼는 온갖 감정이 만화의 한 컷마다, 대사 하나마다 그대로 전해진다.


아무 문제가 없는 부대에서 탈영병이,

그것도 유서를 쓴 탈영병이 생겼다는 건,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는 거죠.

문제가 보이지 않았거나,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DP 개의 날2, 24페이지)


아마도 연고 없는 곳에서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외로울 것이다. 그리고 그리울 것이다.

지나온 모든 과거가 그리워지는

밤들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DP 개의 날1, 40페이지)


작가의 모습을 많이 닮은 듯한 안준호는, 처음에 내무반 생활이 고달프고 싫었던 차에 DP 제안을 받은 게 반가웠다. 하지만 탈영병을 쫓으면서 점점 그 반가움은 괴로움으로 변했다. 자신이 속한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그 부조리에 나서지 못하거나 나서고 불행해지는 이들을 본다. 그러면서 알게 된다. 그들이 왜 탈영할 수밖에 없었는지. 읽다 보면 가장 많이 들려오고, 가장 많이 궁금한 게 바로 탈영의 이유다. 실제로 1년간 몇 명의 탈영병이 발생하는지 일반인들은 모르겠지. 나 역시도 마찬가지. 나와 관련 없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아무도 본 적 없는 얘기였으니까 말이다. 이 만화를 보다 보니, 탈영의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었지만, 결국 한 가지로 모였다. 군대 내 가혹행위, 이해하기 어려운 꼬투리 잡기, 인격 모독과 언어폭력까지 더해지면, 가혹행위는 군대 내 거의 모든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이없게 시작된 탈영에는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휴가 나와서 복귀하려고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끊었는데, 어라 시간이 많이 남네 근처에서 게임이라고 한판 하고 오면 시간이 딱 맞겠군, 신나게 게임 한판 하고 났는데 미치겠네 버스가 떠나버렸어, 에라 모르겠다 영창밖에 더 가겠냐 게임이나 더 해야지. 술을 한잔 마시다 보니 기분도 좋고 한잔 들어가니 더 마시고 싶고, 마시다 보니 귀대할 시간이 지나버렸네, 어쩌나 하고 걱정하다가 들어가서 된통 깨지느니 찜질방에서 잠이나 더 잘란다. 이게 탈영의 이유라고? 진짜야? 웃음이 나다 못해 어린아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하긴 잠깐의 실수로 두려움은 커지고,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피하고 싶은 건 누구나 비슷하게 가지는 공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군번줄 차고 찜질방에서 자다가 잡히고, 어디 피시방에서 로그인했다가 잡히고. 설마 완전 탈영을 꿈꿨을까 싶으면서도 너무 어이없이 잡히는 것도 참 웃음뿐이로다.



문제는 다른 탈영에 있다. 그 무게가 한없이 무거워서 탈영이라고 벌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야 마는 이유. 작가의 말처럼, 누군가 탈영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던 것뿐이라는. 이 작품은 탈영해야만 했던 탈영병과 그 탈영병을 쫓는 DP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탈영병을 찾아다니면서 탈영의 이유를 찾는 과정이면서도, 끝도 없고 변화도 없을 현실에 또 다른 탈영병은 계속 생길 거라는 절망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도대체 왜, 탈영을 부르는 가혹행위는 계속되는가. 심심해서? 짜증이 나서? 단체 생활에서 자기 위주의 태도는 별의별 폭력을 만든다. 구타와 언어폭력은 기본이다. 코를 곤다고 방독면을 씌우고 그 안에 물을 부어버린다. 벌레를 잡아서 계속 먹인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버티고 버티다가 탈영이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매번 확인할 때마다, DP 역시 상관의 지시를 따르면서도 선임병의 폭력을 겪을 때마다, 안준호는 회의를 느낀다. 탈영병을 붙잡아 탈영의 이유를 확인하고 가혹행위 가해자들을 처벌해도, 누군가는 다시 탈영한다. 뭐가 변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날들 속에서, 군인이면서 군인 같지 않은 군대 생활에 안준호는 군인과 민간인 그 사이에서 서성인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작가의 후기부터 읽었다. 무슨 마음으로 이 책을 썼을까 싶어서. 이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펼쳤는데,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말에 이야기의 생생함은 더 깊게 들어왔다. 한컷 한컷,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내가 잘 몰랐던 곳, 경험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제대로 듣지 못할 내용을 마주하고 무서웠다. 인간 세상에서 이보다 더한 일도 많이 있겠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방관자들만 득실대는 걸까.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군대에 보낸 자식이 죽어 나와 절규하던 어느 어머니의 말처럼, 군대가 사람이 죽어도 되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그 호소가 안준호에게도 닿은 것일까. 성과를 앞세우며 탈영병 체포에 집중하던 그는, 그가 쫓는 시간만큼 탈영병의 고통에 공감하고 현실에 분노한다. 온갖 기술을 총동원해서 어떻게잡을지 고민하던 그는 탈영병을 잡아야 하는지 묻는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탈영을 한다고 생각하다가, ‘탈영하지 않고는 제정신으로 살 수 없다라는 결론을 얻는다.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쏟아지는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표현은 이 책의 매력이자 현실을 담은 힘일 것이다.


드라마를 순식간에 다 보고, 이 책을 몇 시간 동안 다 읽고 나니, 각 잡힌 제복에 영화 같은 장면을 생각하며 큰 조카를 대입해서 상상했던 순간들이 무너졌다. 어쩌면 그 아이가 겪었을지도 모를 시간에,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공포였을 감정에, 별일 없이 잘 있다가 나왔다고 안심시키는 목소리가 자꾸 겹친다. 여럿이 모여 있을 때 농담처럼 꺼낼 주제가 아니라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다고, 상명하복 시스템의 문제를 다시 꺼내야만 했다. 큰 조카가 군대 생활할 때 작은 조카들이 모이면 어떻게 하면 군대에 안 갈 수 있는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곤 했다.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벌써 군대를 피하고 싶은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자발적으로 원해서 입대하고 싶은 이는 드물 것이라는 확인. 남동생이 입대할 때가 거의 이십 년 전인데, 그때 엄마가 남동생 입대하고 들어와서 벽 보고 누워서 한참을 울었는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을 곳이 군대일 거라는 생각에, 도대체 군대의 존재는 무엇일까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군대가 바뀐다구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있잖아요.

제가 쓰는 수통 밑에 1953이라고 새겨져 있어요.

육이오 때 쓰던 거예요.

하하하-

수통도 안 바뀌는데 무슨... (DP 개의 날4, 22페이지)












#DP #DP개의날 #김보통 #만화 #군대 #탈영병잡는군인 #군무이탈체포조

##드라마원작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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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키의 법정의 수화 통역시리즈를 읽으면서 우리 신체의 일부(혹은 아주 많이)가 불편해지는 상황을 자주 생각했다. 반년 전에 다리 시술을 받은 엄마는 아직도 편하지 않다고 하면서 살짝 절면서 걷는다. 통증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런 엄마의 일상이 변했다. 외출을 꺼린다. 본인이 불편하고, 그러다 보니 같이 다니는 사람이 자기를 챙기느라 불편해질 것을 느껴서 웬만한 일에는 잘 나가지 않는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불편함이 외출을 못 하게 하니 이제는 마음까지 우울해졌다. 갑자기 닥친 불편함이 이 정도인데, 오랜 세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이들의 세상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첫 번째 이야기 데프 보이스의 시작이다. 구직 활동을 하던 아라이 나오토는 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그렇게도 싫어했던 수화로 새 직업을 찾는다. 그는 농인 부모 밑에서 자란 코다(CODA : Children Of Deaf Adult) 이다. 부모와 형은 농인이었고, 그는 청인으로 살았다. 농인 부모에게 태어난 청인 아이의 삶이 쉽지는 않았다. 자라면서 힘들었던 기억은 뒤로하고 그는 이제 침묵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너무 익숙하게 봐왔던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의 시선에 새로운 건 없었다. 은행 업무를 돕기도 하면서 누군가의 일상에 스며들던 그때, ‘해마의 집현재 이사장이 공원에서 살해당했다. 범인을 찾지 못했지만, 어느 농인이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그런데 이 사건 뭔가 이상하다. 17년 전에도 해마의 집이사장이 살해당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그 아들이다. 혹시 이 부자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같은 상황, 같은 방식으로 살해를? 농인을 위한 해마의 집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던 것일까.


읽으면서 순간순간 그의 지나온 삶을 떠올리게 되는데, 우리가 너무 쉽게 말했던 정상의 의미를 생각했다. 부모와 형은 들리지 않는 사람,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듣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정체성의 혼란이 전해졌다. 밖에서는 농인의 가족이라고 시선을 받고, 집안에서는 그보다 형을 더 챙기는 부모님에게 서운하고. 그가 듣고 말할 수 있으니 걱정을 덜었다고, 오히려 형이 살아갈 인생을 더 걱정하던 부모님의 태도를 그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부모님의 걱정을 모를 것도 아주 아니지만, 평범한 아이였던 그가 받은 상처는 누가 돌봐줄 수 있을까. 그러니 그가 밥벌이를 위해 농인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는 걸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 점점 더 보이는 그들의 상처와 고충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는 이제 그의 업무 이상의 것에 다가간다. 그들이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진실의 장면을 찾아다닌다. 농인의 가족으로 살면서 청인이었던, 농인의 세계를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의 시간에 새로운 세계를 쌓는다. 그가 살아간 진짜 세상을 이제야 열었다.


처음 나오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드는 생각은 외면하고 싶었던 삶에 다가간 기분이 어떨까, 였다. 그가 택한 직업으로 그동안 보려고 하지 않았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가 점점 미궁에 빠진 사건에 관심을 두고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에 접근하면서 느끼는 것들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의 삶이 점점 변해가는, 그 변화의 의미와 깊이가 앞으로의 그의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줄지 기대되는 마음. 나오토를 앞세워 그동안 우리가 살면서 안 들리는 척, 모르는 척했던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읽는 이의 시선 역시 변하게 된다. 나오토가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그래서 법 아래에서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 그들의 침묵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다. (데프 보이스, 318페이지)



이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 용의 귀를 너에게는 통역 수화를 하게 된 아라이 나오토의 2년 후를 이야기한다. 여전히 그는 통역 수화를 하고 있으며, 지금은 애인 미유키, 미와와 한집에서 살고 있다.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인 그의 정체성을 확립해가고 있고,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 여전히 법정에 선 농인을 대변하며 법정 통역도 하고 있지만, 혼란의 순간은 찾아온다. 그의 마음에 무슨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걸까.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농인이 강도 사건의 피의자가 되어 기소된 사건, 농인이 농인에게 사기 치고 기소된 사건, 어느 주택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미와의 같은 반 친구에게 찾아온 선택적 함묵증까지.


농인이라고 해서 말을 아주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농인의 말이 청인의 말과 똑같이 들리는 것도 아니다. 피의자로 기소된 농인을 만난 나오토는 그가 말을 못 하는 농인이라고 하지만, 그가 내는 소리는 누군가에게 말이라고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의 경험상, 그의 어머니가 큰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고 목소리를 낸 기억을 꺼낸다. 농인이 사용하는 말은, 말일까 소리일까. 이 사건을 들으면서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들에게 언어가 어떤 역할인지 새삼 생각하게 되고, 농인을 위한 교육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많은 이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농인 사기 사건의 피의자가 통역을 동반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즈모리의 부탁을 받은 나오토는 피의자 진술 자리에 참석한다. 수화가 다 똑같은 거로 여겼는데, 수화도 소리를 내 하는 말처럼 거친 언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피의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나오토의 역할이 이 사건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미와는 같은 반 친구 에이치가 등교하지 않는 일을 알게 되고 나오토에게 도움을 청한다. 에이치는 점점 말을 하지 않게 되고,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어린 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동시에 이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말이 얼마나 신뢰성을 가지며 법정 증거가 될 수 있는지 되물으면서, 정신적 질환을 앓는 아이가 하는 말의 깊이를 생각한다. 우연히 살인사건의 목격자가 된 소년은 점점 더 깊이 자기 방으로 숨어든다. 나오토와 미와, 루미 씨는 소년이 방 밖으로 나오기를 바라면서 마음을 어루만진다. 소년의 특성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대화라는 것을 증명하며, 이들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과 마음으로 대화하는 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한다. 특히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함묵증(緘默症)이 있는 에이치에게 수화를 알려주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준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바보 취급할 때 반드시 그 신체적 특징을 모방한다. 뇌성마비를 앓는 사람, 하지에 장애가 있는 사람,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 그 동작과 표정을 과장스럽게 흉내 내는 것이다. 농인의 경우는 수화가 그 대상이 된다. 아라이의 어린 시절에는 원숭이 흉내를 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농인의 빠른 손동작이나 때때로 발성하는 목소리가 원숭이와 비슷하다고 여겼다. 얼굴까지 원숭이의 흉내를 내며 바보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까운 곳까지 와서 노골적으로. 어차피 저들은 모른다며.

모를 리 없다. (용의 귀를 너에게, 173페이지)


이번 책에서는 장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특히 정육학을 부르짖으며 장애가 있는 아이가 부모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겨났다는 이상한 논리를 사람들이 제법 신뢰했다는 것. 심지어 법으로 지정까지 하면서 부모의 책임을 설파하고, 장애를 가진 이들을 더 고립시키려는 나쁜 의도로까지 보였다. 전작에서 문제가 많았던 해마의 집이 폐쇄되었기에, 더 나은 농인 교육 시설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다. 새로운 시설을 만들기 위해 기부를 받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더 위기에 빠질 것 같았는데 많은 이의 노력으로 다행히 무마됐지만 끝난 건 아니다. 이들에게는 아직 새로운 농인 교육 시설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숙제로 남았다.


전작에서부터 등장하는 농인 교육 시설 해마의 집이름이 궁금했는데, 이번 책에서 그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용은 뿔로 소리를 감지하기 때문에 귀가 필요 없고, 쓸모가 없어진 귀는 바다로 떨어져 해마가 되었다는 이야기. ‘()’이라는 글자는 그래서 용의 귀가 된다. 이렇게 또 한 가지 배워간다.



<장애인 차별 해소법이 생기고, 장애인 고용 촉진법으로 합리적 배려는 법적 의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이런 일은 끊이지 않습니다.>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244페이지)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더 이어질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이 책이 이 시리즈의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오토는 미유키와 결혼하고 미와까지 새로운 가족으로 살아가던 중 딸 히토미가 태어난다. 혹시나 아이가 태어나면 귀가 들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던 나오토는, 미유키를 만나고 함께 살면서 그 걱정은 뒤로하기로 한다. 만약 농인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건 또 그대로 살아갈 방향을 잡으면 되니까. 이 모든 변화는 미유키를 만나면서였다. 그리고 그가 수화 통역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겪고 느끼는 게 많아져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환경도, 생각도.


이 책에는 4가지 이야기가 연작소설처럼 이어진다. 모두 농인의 등장이고, 청인 세계에서 농인으로 살아가는 불편함과 고통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 이야기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에서는 의료 시설 이용 중 들리지 않고, 말하지 못해서 겪는 슬픔이 표현된다. 농인 부부가 임신으로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면서, 정확한 의료 정보는 소통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이 부부에게는 불행이 닥친다. 진료받는데 필담만으로 모든 궁금증이 해소될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것을 말할 수도 없었다. 의료 전문 통역도 아니었기에 전문적인 정보를 주고받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예를 들면 좌약<앉다>,<>이라고 통역해서 잘못 이해한 농인이 약을 앉아서 먹으려 한 일은 통역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이다. 이런 일들을 청인이 들으면 설마 좌약을 먹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농인의 이해 부족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사람들리는 사람사이에 예전부터 자리하고 있는 정보의 격차를 유념하지 않으면 자칫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지도 모른다. 아라이는 항상 이러한 우려를 품고 있었다.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47~48페이지)


농인이 아니어도 어렵기만 한 병원 진료가, 농인에게 더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그런데도 농인이 더 세상 속에 스며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른 방향의 활동을 보여주는 이가 있다. 쿨 사일런트에서는 청인 부모에게 태어난 농인인 젊은 청년이 나오토에게 통역을 부탁하면서 농인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어려움을 보여준다. 독화도 발음도 좋은 청년. 제대로 된 수화를 배우려고 나오토와 친해지지만, 그의 연예계 관계자는 청년에게 다른 것을 요구한다. ‘쿨한수화란 무엇일까. 그들에게 농인의 수화는 언어라는 생각이 없는 걸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손짓,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듯한 신기함, 쟁점이 될만한 소재로만 여기는 건 아니었을까? 정작 그 수화를 사용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만큼, 청인들이 바라보는 농인의 세상은 너무 단편적이었다. 그 단편적인 마음을 증명하듯 보여주는 게 법정의 웅성거림이다.


회사에 취직한 농인 여성이, 근무 조건을 지켜주지 않는 회사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 의뢰가 들어온다. 쉽지 않은 재판이 될 것이고, 의뢰인이 받을 상처가 걱정되기도 했다. 일할 때 수화 통역을 지원해주겠다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필담 역시 상대가 귀찮아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점점 회사에서 외면당하는 의뢰인의 마음이 저절로 읽혔다.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자기의 고충이 다른 이에게 전달되지 않음이 상처가 된다. 그러다 보니 의뢰인 역시 회사 일에 적극적이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모든 내용과 공지가 전달되지 않았다. 재판 중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들은 말한다. 알고 있는 줄 알았다고, 이 정도는 들리는 줄 알았다고, 본인이 싫어서 안 하는 줄 알았다고. 그들이 알게 모르게 외면했기에 의뢰인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그들에게 섞이지 못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소리가 들리는 청인중심 사회에서 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요된 불편함은 비단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생명에 관해서만큼은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재해시 송출되는 긴급방송이나 사고시 교통기관의 안내 방송도 그들에게는 가 닿지 않는다. ‘그 지진당시 많은 장애인의 피난이 늦어지고 지원을 못 받는 현실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는데, 그중 들리지 않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재무선 방송을 듣지 못할 뿐 아니라 피난 생활 중에 커뮤니케이션도 충분하지 못하여 고생했다고 들었다. 큰 재해만이 아니다. 앞서 말한 휴대전화의 표현을 빌려 갈라파고스상태에 놓은 상황이 여전히 그들 일상 속에 만연한 것은 아닐까.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41페이지)


조용한 남자사건에서는 수화 역시 사투리처럼 그 지역 특유의 언어로 자리 잡는 경우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망 사건 해결과 동시에 새로운 언어를 향한 나오토의 열정도 의아했지만, 이즈모리가 그 열정과 타인의 일에 직접 나서는 모습이 따뜻했다.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 하는 일이 그냥 신체의 불편함 정도가 아니었다. 농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의료, 복지, 노동 현장의 거대한 장벽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것과 같다. 이 장벽은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너무 선명하게 우리 앞에 보이는 게 아이러니다. 나오토에게 태어난 딸 히토미 역시 청각장애가 있다. 농인 가정에서 청인으로 살아온 그가, 이제는 청인 부모에게 태어난 청각장애 아이를 키운다. 전혀 새로운 방향에서 농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배울 것이다. 그가 겪어오고, 지금도 배워가는 중이다. 전혀 쉽지 않을 일이 그에게 닥쳐왔다. 하지만 과거의 그가 힘들었던 때와 다를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그의 옆에 미유키와 미와, 센터의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혼자서 그 모든 상황을 감당하던 때와는 다르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그 역시 스스로 느끼고 있을 테지. 그의 걱정과 고민을 함께 나눌 이들이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고 든든한지.


읽다가 정말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미유키가 딸 히토미의 청각장애를 알고 고군분투하다가, 이제 인공와우 수술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고민하던 장면이다. 수술만이 이 상황에서 제일 나은 선택으로 알았던 미유키의 마음이 변하는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나 역시 당연하게 인공와우 수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들릴 수 있게, 시간이 지나서 후회하지 않게 하려면 그것만이 답이라고. 하지만 청인으로 살면서 청각장애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전문가의 시선을 알게 된 후 그녀는 딸에게 속삭인다. ‘있는 그대로의 너로 괜찮다는 말이 그렇게 포근하게 들릴 수 없었다. 아마 그녀 마음에 큰 변화가 있었겠지. 혹시 들리지 않는 아이가 태어날까 봐 주저하던 나오토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들리지 않으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자신만만했던 그녀가, 막상 들리지 않는 아이가 태어나니 감당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을 터.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들리게 노력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전혀 들리지 않는 삶을 조금은 알고 있었으니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그러기에 미유키의 선택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보인다. 그런데도 따뜻하게만 들렸던 그 한 마디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먼저 보고 느껴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며 서로 섞이고 이해해야 한다고. 그렇다고 서로를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 그것도 안다. 하지만 나오토의 시선이 변하는 걸 계속 지켜보면서 농인의 세계를 알아가는 게 마냥 어려운 일은 아니며, 필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겠다. 이 시리즈가 많이 읽혀서 우리가 다른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더 넓은 시야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데프보이스 #용의귀를너에게 #통곡은들리지않는다 #마루야마마사키

#법정의수화통역사 #수화 #통역

##책추천 #황금가지 #추리소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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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8-25 0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데프 보이스 일드로 먼저 보고 나서 원작 까지 읽어 봤습니다
법정 수화 통역 이야기도 생소 했지만 일상 생활은 물론 의료 복지 일반 교통 이용 하는 것도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

이들을 위해 우리 사회의 거대한 장벽이 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시리즈가 이렇게 많이 나온거 구단님때문에 알게 되었네요 ^ㅅ^

구단씨 2021-08-25 00:58   좋아요 2 | URL
저는 데프 보이스를 좀 늦게 알았어요. ^^ 최근작 읽으려고 하다가 시리즈 마지막 책인 걸 알고 처음부터 찾아서 읽어봤네요.
진짜 일반적인 생활 거의 모든 게 어려울 거라는 걸 이렇게 듣고 알게 되었어요. 막연하게 생각만 하던 것과 너무 달라서 놀랐습니다.

희선 2021-08-29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도 나왔군요 본래는 한권만 쓰려다가 한권 더 썼다고 하던데, 다음 이야기도 있군요 아라이 나오토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다니...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를 낳을까봐 처음에는 아이도 낳지 않았는데, 많이 달라졌네요 세상은 장애인이 살기에 힘듭니다 생각한다고는 하지만 아직 멀지 않았나 싶어요 더 생각하고 도움이 주면 좋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21-08-31 19:53   좋아요 1 | URL
네. 첫번째 이야기 끝의 작가의 말에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두번째 세번째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도움과 작가의 노력으로 출간되었던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변화와 나아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한 농인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더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

희선 2021-09-02 00:17   좋아요 0 | URL
얼마전에 라디오 방송을 들으니 <코다>라는 영화 이야기를 하더군요 예전에 그 영화 말한 적 있는 것 같은데 했더니, 코다는 프랑스 영화 <미라클벨리에>를 미국에서 리메이크한 거였어요 부모님이 듣지 못하는 것과 딸이 가운데서 다른 사람한테 말하는 것은 같지만, 조금 다르기도 하답니다 <코다>는 음악 용어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 영화 이야기 들으니 이 책이 생각났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