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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천재가 된 홍 대리 - 딱 6개월 만에 중국어로 대화하는 법 천재가 된 홍대리
문정아 지음 / 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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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어느 고릿적 시절이냐고 하겠지만...) 정말이지 한때는 영어만 할 줄 알면 안 될 게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어도 띄어쓰기 맞춤법 다 틀리고 사용하는데, 하물며 외국어를 할 줄 안다는 건, 게다가 만국의 공통어라는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도 영어 하나면 대부분 통한다고 믿던 시절. (아~ 옛날이여~!)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세상의 흐름이 바뀌면서 영어는 더 특별한 외국어가 아닌 게 되었다. 당연히 습득해야 할 언어가 되었고, 그 이외의 언어들이 외국어 세상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일등이 중국어가 아닐까 싶다. 넓은 대륙에 알맞게 중국어의 쓰임새도 한없이 넓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목적으로 접근하든지 외국어든 습득해야만 하거나 배워두면 여러모로 유용한 인생템이 되었다. 아무리 번역 앱이 쉽게 사용될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알고 내 입으로 말하는 것과 같을 수가 있을까. 홍 대리 역시 업무상 시작한 중국어였지만, 자기 입으로 자유롭게 말하는 중국어에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일의 능률까지 오르게 된다. 당연하다. 억지로 시작해야만 했던 업무의 연장으로 여기던 것을 능동적으로 먼저 더 배우고 싶어지고야 말았으니, 이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였던 말이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6개월 만에 중국어를 마스터해야 하는 목표를 세우고 덤빈 홍 대리의 활약기가 펼쳐진다. (우리 홍 대리는 못하는 게 없다. 뭘 시도해도 매번 성공한단 말이지. 흐흐~) 이번에는 업무상 중국어를 배워야 했다. 아무리 빨리 배울 수 있다고 해도 1년이란 시간을 예상했으나, 상사의 막무가내 기간 지정으로 6개월이라는 시간을 얻었다. 어떻게 해서든 6개월 안에 중국어를 구사해야 한다. 흔하게 들리던 '니 하오~'밖에 몰랐던 입이 어디 그렇게 금방 열리겠는가. 중국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죽어라고 중국어 공부를 하는데 왜 홍 대리의 중국어는 늘지 않는 걸까? 게다가 해도 해도 공부의 능률은 오르지 않고, 그러다 보니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중국어 공부 슬럼프까지 오기도 한다. 어쩌면 좋을까.

 

홍 대리의 구세주 '중국어 엄마' 문정아의 등장은 중국어의 모든 것에 접근하게 한다. 특히 아무리 해도 늘지 않고 지루하기만 한 외국어 공부의 효과적인 학습법을 제시한다. 문정아식 중국어로 '가장 쉽고 재미있는 중국어'로 대할 수 있게 한다. 아기가 맨 처음 말을 배울 때 엄마의 말을 자주 듣고 익숙해지며 결국 엄마의 말을 따라 하는 수준까지 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어 역시 아기의 말 배우기에 비유하며 똑같은 순서를 밟는 방식으로 공부의 길을 열어준다. '언어=반복'이라는 공식을 세우며, 반복해서 듣고 말하는 것만이 외국어 공부의 가장 기본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또한, 저자는 우리는 중국어를 배우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자 문화권이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로 쓰는 번체자와 중국이 쉽게 쓰려고 하는 간체자가 다르다는 것 정도만 기억하면, 중국어는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중국어와 한국어는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많고, 중국어는 매우 단순하며, 중국은 우리나라와 같은 한자 문화권'(53페이지)이라는 이점이 있다는 것.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으니, 이제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으로 중국어를 공부하는 일만 남은 거 아니겠나?

 

크게는, 달달 외우면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입과 귀가 뜨이는 '소리 학습법'의 효과를 증명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문법을 모르거나 한자를 외우지 않아도 말문이 터지게 하는 중국어 회화를 몸소 보여준다. 문법이나 암기가 아니라 '말하기'부터 시작하라고 한다. (앞에서 말한 아기가 엄마를 보고 말을 배우듯) 중국어는 단순하다고 언급한 것처럼, 간단한 문장에 단어만 바꾸면서 '패턴'을 반복하여 연습한다. 여기서 또 한 번 반복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저절로 단어와 수식어를 붙이면서 문장이 '확장'되어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중국어의 범위는 점점 더 넓어진다. '외우기'가 아닌, 반복된 말하기와 문장 패턴과 확장의 연습으로 저절로 입이 트이게 되는 거다. 거기에 짬짬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공부하는 습관은 중국어 마스터로 가는 지름길이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습관으로 만드는 게 외국어 공부에 가장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기존의 학습 방법이나 알고 있던 노하우를 과감하게 버리고 문정아가 들려주는 방식으로 중국어 마스터에 뛰어들어보자. 이론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전으로 활용 가능한 언어 구사할 수 있는 방식이어서인지 귀가 솔깃하다. 이대로라면 중국어의 ㅈ도 몰랐던 나도 무조건 덤벼볼 수 있을 것만 같다. 학습이나 업무상의 목적이 아니라, 외국 여행의 목적이 아니라, 그냥 한번 시도해보고 싶은 막연한 생각을 하는 독자라도 어려움 없이 펼쳐 들고 중국어에 빠져들 수 있을 것만 같다. 말로 트이기 시작하는 것과 반복이라는 기본 지침만 잊지 않는다면, '이까짓' 중국어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 저자가 온갖 고충을 겪어가며 배운 경험으로 제시한 방법이니, 무조건 믿고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 홍 대리도 이렇게 해내지 않았는가!

 

그동안 중국어 공부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거나, 한참 중국어 공부하다가 능률이 오르지 않아 매번 그 슬럼프를 건너가지 못했거나, 외국어 공부는 한없이 지루해서 하기 싫다거나 하는 사람. 여기 '재밌게' 중국어 공부하는 방법이 펼쳐져 있으니 한 번 들어와 보시라~ 당신을 중국어 능통자로 만들어 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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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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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똑같이 살아가는 것 같지만, 또 그 안을 들여다보는 모두 다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닮은꼴을 찾는다. 비슷한 일상에, 비슷한 일들에, 비슷한 농도로 아프기를. 그래서 그 아픔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기를. 동시에 비슷한 위로로 알지 못하는 서로를 보듬는다. 보통 그런 순간에 전해지는 모든 감각을 위로라고 불러도 좋다면, 이덕무는 그의 문장으로 위로를 건넨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잠깐 본 광경으로 떠오른 생각들을 말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오래된 신조처럼 그의 가슴에 새긴 말들을 꺼낸다. 별것 아니었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는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운 생각과 다짐을 전하는 것뿐인데, 그가 전하는 문장들에 온도가 있었다. 때로는 차갑게, 때로는 뜨겁게. 냉정하게 판단하게도 하고, 따뜻하게 토닥이는 듯하기도 했다. 듣고 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삶의 연륜 같은 말들, 살아오면서 저절로 배우는 세상을 보는 시선 같은 것들. 가르치려 들지 않고 말하는데도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스며들게 되는 문장들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듯 일기처럼 써 내려간 문장들에 그가 가진 시선을 읽는다. 처음 이덕무에 관해 떠올렸던 것은 '책'이었다. 이덕무라는 이름과 책은 동의어로 생각할 만큼, 그가 읽어온 책이 그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얕은 지식으로 그를 판단했던 듯하다. 그는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글을 쓰는 일도 함께했던 것을,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에 관한 많은 말을 뒤로하고, 딱 이 책만 읽어도 그가 어떤 성정을 가졌는지, 그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한지 바로 알 수 있다.

 

말똥구리와 여의주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35페이지)

틀린 게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시선에서 다양성과 존중을 동시에 본다. 모두 똑같다. 같은 자리에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필요 없는 물건으로 비칠지라도, 그 물건을 가진 이에게는 필요한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니 그렇게 품고 있는 거겠지. 타인이 보는 나의 무언가도 같을 것이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다짐하려 했던 것을 그가 전하니 새삼스럽다. 누구나 비슷하구나, 같은 생각으로 사람을 보려 애쓰는구나 하는 공감을 본다. 다름과 틀림을 다시 한번 새기는 순간이다. 모두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라는 말로 들리는 듯하다.

 

이기는 것을 좋아하면 천적을 만난다

편의에 안주하는 사람은 큰 고비를 만나면 어찌할 줄을 모른다. 자신이 해오던 대로만 하는 사람은 큰 기회가 와도 붙들지 못한다. 임시방편으로 그때그때를 넘기는 사람은 큰 근심거리를 만나게 마련이다. 남에게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큰 적수를 만나게 된다. 일의 형세가 그렇다. (145페이지)

넓고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일까? 오래된 것이 좋지만 그 오래된 것에만 머물지 말라고, 변화하는 것들에 시선을 주면서 세상을 보라는 것만 같다. 세상을 아우르는 순리를 받아들이면서도 패배를 용납하는 일을 배제하지 말라고. 한껏 욕심부리면서 살아야 놓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을 잠시 접어보게 한다. 길게, 멀리 보는 삶을 앞에 두어야 하는 걸까, 고민해보기도 한다. 적당히 취하고 버리면서, 가볍지는 않지만 짓눌리지 않을 만큼의 무게감을 장착하고 살아가라는 듯이. 이렇게 사는 방식이 말처럼 쉬운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어렵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고상한 사람과 속된 사람

고상한 사람이 속된 사람을 대하면 졸음이 온다. 속된 사람이 고상한 사람을 대해도 졸음이 온다. 서로 맞지 않아 융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속된 사람은 비루해 조는 것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찌 고상한 사람이 조는가? 그 마음이 좁기 때문이다. 만약 진실로 고상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졸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용납하기 때문이다. (178페이지)

 

가난의 품격

최상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다. 그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 최하등의 사람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해 감추거나 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호소하다가 가난에 짓눌려 끝내 가난의 노예가 되고 만다. 또한 최하등보다 못난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 간다. (243페이지)

 

굉장히 솔직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온다. 앞서 말했듯이, 마치 그가 차분하게 적어 내려간 일처럼 들리는 이유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써진 게 아니라, 오롯이 그의 시선에 들어온 세상 풍광을 그저 떠오르는 생각 그대로 하는 말들.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이 그의 시선에 머문 것만 같다.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에 웃기도 하고, 뜻대로 되지 않은 일들에 속이 상하기도 하는, 웃음과 눈물이 나는 그런 일상에 놓인 우리들이다. 그런 일상에 온갖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차분하게 적은 그의 문장이 편안하다. 꾸미지 않고 말한다. 그가 살아온 평범한 일상 속에 우리 삶이 그대로 묻어있어서일까. 보통인 우리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시선으로 붙잡는다. 하루하루 살면서 보이는 모든 것이 그의 붓끝에 그대로 묻어 있던 거다. 책만 읽는, 그의 눈은 오직 책 속의 활자에만 머물러 있을 것 같았는데, 그는 어떻게 이런 시선을 풀어낼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이덕무의 이 소품을 엮은 한정주가 알려준다.

 

이덕무는 저잣거리에서 기이한 말이나 특이한 소문을 듣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기록했다고 한다. 항상 종이와 붓과 먹을 품고 다니면서 신분고하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묻고 듣고 말하며 얻은 세상의 온갖 지식 정보를 글로 옮겨 적었다. 또한 유학과 성리학의 거대한 담론에서 벗어나 사소한 일상사와 개인적 관심사를 중시한 새로운 글쓰기의 본보기로 삼았다. (103페이지)

 

그러니 박물학자라는 그의 별칭이 이해가 된다. 그는 앉아서 머릿속 생각만을 전하는 게 아니었다. 세상을 보고, 세상 속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옮긴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사람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봤다. 평범하게, 비슷하게 사는 우리네 모습을 본 거였다. 그러니 오랜 시간을 거슬러 그가 하는 말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 일상의 온도가 그대로 전해질 수밖에 없다.

 

고전연구가 한정주가 이덕무의 소품문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를 엮은 글이다. 어렵지 않은 이덕무의 문장들에 한정주의 느낌 있는 시선이 더해졌다. 일상 속에 있어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담긴 따스함을 놓치지 않은 글이다. 놓치지 않기 위해 문장으로 만들어낸 이덕무의 일상이 빛나는 듯하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고... 보이는 그대로, 감정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진짜 행복한 순간이라는 듯이, 그게 우리 일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소박한 문장들이었다.

 

별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생활 속 잡감을 거리낌 없이 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일상의 미학이다. 일상은 그냥 두면 지나가 버리는 순간에 불과하지만, 글로 옮겨 담으며 색다른 의미와 가치로 영원히 남게 된다. 이덕무는 추운 겨울 날, 늦은 밤에서 이른 새벽까지 불평과 화평 사이를 오간 잡감의 조각들을 이 글에 묘사했다. 이러한 잡감이 하루 이틀의 일이겠는가? 아마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밤 동안 자신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오고 갔으리라. 어디 이덕무만 그러했겠는가? 아마도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비슷한 심정과 감정의 기복을 겪었으리라. 그렇다면 이덕무와 그들의 차이는 단지 자신의 잡감을 글로 옮겨 묘사한 사람과 그것을 시간의 흐름에 그냥 보내 버린 사람의 차이일 뿐이다. (27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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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세트

 

 

 

 

 

 

 

 

 

 

 

 

 

히가시노 게이고 연애의 행방

 

 

 

 

 

 

 

 

한글자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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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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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75페이지)

 

십 년쯤 전엔가,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배려가 많아진다는 거였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타인을 향한 마음이 점점 열리는 걸 이야기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남들을 보는 눈도 더 넓어야겠고, 마음을 열어놓는 것도 더 크게 해야겠지, 라고 생각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나. 아니면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라고 어딘가에서 읽어서였나. 그런 생각으로 동의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려고 했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한 말에 한마디 더 붙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친구가 하려던 말을 내가 끝까지 듣고 다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또 다른 의미의 공감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배운 '배려'의 기준이 변해가는 게 자연스러워서, 그 변화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몸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때 우리는 친구가 꺼낸 말을 시작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참 했다. 살면서 나 먼저 위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지내며 공유하고 공감하는 게 필요하지만, 나를 우선하는 마음이 더 커지고 내가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세가 세워지고 있더라고. 아프고 슬프고 기쁜 일들의 주체가 내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나만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고. 결론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면서 언제나 내가 우선이 되는 인생이어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때의 기억을 꺼내 이제 와 생각해보니 참 살벌하게 들린다. 그런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솔직히 말하면 점점 더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라서 그런지, 명확한 답을 꺼낼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의 답을 향해가는 쏠림이 있었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이해보다는, 내가 느끼는 감정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진다는 걸 알아서일까. 이 소설의 시작과 동시에 들려오는 윤재의 상태에서, 나는 그게 큰 문제인가 하는 의문을 먼저 가졌다. 다른 사람과 느끼는 게 다르다는 것, 그게 우리 사는 세상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분명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세상인 건 맞지만, 그들의 감정을 모른다고 해서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닐 테니. 나이를 먹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겪으면서 그 냉정함이 더 심해지고 있었는데, 며칠 전 김정숙 여사의 행동을 보고 이 소설의 의도와 결말이 향하는 지점과 닮았음을 알았다. 평범한 아줌마 차림의 영부인이 이삿짐을 싸다 말고 나와서 60대 여성 민원인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에서,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라면이라고 먹고 가라며 데리고 올라가는 모습에서 우리가 살면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게 공감 능력이라는 것을... 그 민원인이 하는 말을 들어주는 것 말고 영부인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런데도 다 듣고 있더라. 영부인은, 잘은 모르지만 민원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것과 끼니를 거른 민원인에게 내놓은 라면 하나가 전부였다. 그 민원인도 안다, 영부인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래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면서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겠다고 했다더라.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 누군가의 상황과 감정을 공감하는 것. 다른 사람과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라는 걸 전제했을 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하는 게 있을까? 윤재에게는 그게 없었다.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윤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몬드'라고 불리는 편도체가 작아서,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게 어렵다. 반복된 학습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의 감정을 알 수 없다. 공포, 무서움, 분노, 애정, 호감, 등 사람들이 내보이는 그 어떤 감정 앞에서도 윤재는 침착하다. 웃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느끼지 못하는 감정 앞에 표정이 바뀌지도 않는다. 그런 윤재의 상태에 엄마는 절망한다. 하지만 윤재의 삶을 위해 같이 노력한다.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고, 사람들이 보이는 보편적인 감정이나 태도를 알려주면서, 그때마다 윤재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익히게 한다. 사실 이런 일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인데, 이걸 알지 못하는 윤재는 반복된 학습이 아니면 알 수 없다니. 그것도 다 아는 게 아니다. 그런 상황이나 반응을 이해해서도 아니다. 엄마와 할머니가 그렇다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는 동안 많이 힘들 테니까 배워둬야 한다고 해서 하는 것뿐이지, 윤재가 이해해서 터득한 자세는 아니다.

 

이 소설을 계속 읽을수록, 윤재보다는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를 떠올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람의 죽음이 나이순으로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보통 나이순으로 죽는다고 생각하면 엄마와 할머니가 죽은 다음에 살아갈 윤재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걸 걱정하는 엄마와 할머니의 표정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없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들. 그래서 더 많이 알려주고 싶고, 더 많이 느끼게 해주고 싶은 간절함이 소설의 곳곳에서 느껴진다. 엄마와 할머니가 참 많이 아프겠구나, 하고 느끼던 그때 비극은 시작된다. 윤재의 열여섯 번째 생일날, 크리스마스이브, 끔찍한 사고로 엄마와 할머니는 윤재의 앞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곤이'가 나타났다.

 

곤이의 등장으로 윤재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되면서 계속 읽게 되는데, 소설을 잘 이끌었다는 생각이 든다. 윤재와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곤이였다.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있다가 이제야 가족에게 돌아온 아이, 그나마 엄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와의 적응이 필요한 아이, 험한 말과 행동으로 자기 주변에 벽을 치는 아이. 그런 곤이와 윤재의 조합은 아이러니하지만, 그게 오히려 윤재의 모습을 더 궁금하게 한다.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다가가는 아이들로 비치지만,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특히 타인의 감정이나 태도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아이인 윤재가 겪어가는 마음의 변화가 기대되는 거다. 이유는 다르지만 두 아이는 세상 속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그런 아이들이 계속 세상의 한구석에서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건지, 세상에 섞이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방법을 같이 찾아보게 하고 있더라. 그 변화를 인지할 무렵 찾아온 또 한 명의 아이 도라. 도라의 등장은 열여섯 소년이 그 나이의 소년으로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담담하게 하는 말들 속에서 머리로 배운 태도의 학습이 아닌 마음이 하는 소리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불을 끄고 책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겐 풍경처럼 익숙한 냄새였다. 그런데 거기 무언가 다른 게 실려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탁, 하고 작은 불씨가 켜졌다. 행간을 알고 싶었다. 작가들이 써 놓은 글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206페이지)

 

사는 동안 공감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하는, '평범'과 '특별'이 공존한다는 것도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저절로 공감한다. 각자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으로 눈물이 흐르고, 기쁨의 순간에 웃으면서 손을 맞잡는 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그게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공부하듯 반복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두렵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처음부터 몰랐던 일인데, 자라면서 사람들과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태도이자 감정인데, 그게 불가능하다? 요즘에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보다는, 모른다는 것보다는, 굳이 자기 삶의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일이 잦아지는 듯하다. 나부터도 그렇고. 나의 상황, 나의 감정이 앞설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아주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어떤 순간이 닥치면 나는 또 나 먼저 생각하고 결정할 테니까. 그러면서도 타인과의 공감이 살면서 아주 많이 필요한 일이라는 건 변함없다. 그런 공감 능력을 점점 잃으면서 사는 게 지금의 우리가 아닐까 하는 문제를 보여주고 싶은 게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작가의 의도야 작가만이 알겠지만...)

 

사는데 필요한 우선이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오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감정이 없이 사는 건 안 될 것 같다. 공감이 없는 타인과 삶은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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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9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의 계이름 - 말이 닿지 못한 감정에 관하여
이음 지음, 이규태 그림 / 쌤앤파커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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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감정을 조금씩 떼어 섞고, 주무르고, 이리저리 포개 보아야 그나마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은 난해한 감정이었다. 말로 어떤 장면이 충분히 해석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119페이지)

 

'말'에 대해 생각한다. 머릿속에서 생각하지만 멈춰있는 게 아니라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 그렇게 쏟아낸 말은 공감을 이루기도 하지만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는 걸, 항상 그 말이 어떤 사건의 단초가 되기도 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게 말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부터 그 말은 점점 줄어들었고, 타인을 이해하는 말은 더 아끼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의 높이와 상대가 하는 말의 높이가 다르다는 걸을 알게 되면, 말의 아낌은 더 많아진다.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도 다르게 나오는 말들이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서였다. 그러니 말이라는 건, 그냥 최소한의 의사소통 수단이 되곤 했다. 상대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적당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그래서였을까. 말이 줄면서 동시에 표현도 줄어들더라는 이상한 결과를 얻었다. 어쩌면 이상한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른다. 말이 줄어드는데, 표현이 늘어날 수가 없지 않은가. 이 책의 부제가 더욱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말이 닿지 못한 감정에 관하여'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걸 쏟아내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읽기 시작했다.

 

때로는 의도와 상관없이 내뱉은 어떤 말들이 누군가를 난처하고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그로 인해 말로 빚을 질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나는 그날의 감정을, 살면서 한두 번쯤 의무적으로 마주해야 할 과제쯤으로 생각한다.

변변치 않은 말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고른 말이, 못내 미안할 때가. 그렇게 말을 고르더라도 별 소용이 없어서, 말이 모자라다고 생각될 때가. 그런 때가 우리에게 몇 번쯤 있었다. (34페이지)

 

뭐라고 해야 할까.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막상 그 느낌을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다고, 그런 순간을 건너와서 상대와 더 애틋해졌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해나 공감 같은 걸 넘어서서, 말이 전하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다고 말해야 했다. 그가 골목 어귀에서 만난 사람들, 힘들어서 말이 사라질 것만 같은 노동의 현장에서도 이루어지는 말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뤄놓은 현재의 삶에 녹아든 흔적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그렇게 내놓고 담아가는 말들을 그는 부딪치면서 들었다. 말이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눈으로 마주하고 감정으로 들었던 거다. 늘 말의 뒤에서 의도와 다르게 읽히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을 겪는다. 그런 말이 전하는 외로움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게 위로였고, 공감이었다.

 

나는, 내 위로가 누군가의 슬픔을 기피하려는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슬픔은 늘 일인칭이었다. 누가 대신하여 아파준다는 말은 실행력이 없었다. 누가 먹어준다거나 들어줄 순 있어도, 아파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슬픔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말들이 필요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성을 다해 주물을 매만져야 보기 좋은 형상이 나오듯, 대상에게 깊이 물이 들어야 구체화될 수 있다. (243페이지)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이 책도 읽으려고 해서 읽은 게 아니었다. 그저 우연처럼, 실수처럼 내 손에 들어온 책이었다. 그러니 기대도 없었던 건 당연하다. 그렇게 펼친 책에서, 오히려 일부러 골라 읽었던 책보다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장들 속에서 작가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 부분을 읽다가 작가가 남자라는 걸 알았다. 사실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떤 선입견에 작가가 여자일 거로 생각하고 계속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다.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그 아픔에 내 말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순간이 생겨날 뿐이다. 완전한 치유가 아니라, 그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거다. 그건 우리가 말을 '주고받는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다. 우리가 겪는 슬픔은 늘 우리의 몫이기에, 작가의 말처럼 '슬픔은 늘 일인칭'이기에 누가 대신 아파해주고 이해해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 불가능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한계를 넘어갈 도구가 필요했다. 내 안의 말이 가 닿아야만 했다. 상대의 슬픔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이어야 했다. '뽈'을 차러 가서도 외로운 아버지, 손끝에서 완성되는 옷에 감춰둔 어머니의 자존심, 평생 이어온 이발소를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손자의 머리를 잘라주던 할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다며 두부를 팔던 남자. 말은 분명 우리 마음을 전하고 표현하는 수단인데도, 그게 다 전해지지 못하는 미완성으로 남을 때가 많다는 걸 말하려는 걸까. 말이 다 들려주지 못하는 감정들에 다가가기 위한 우리의 몸짓을 이렇게 보여주려는 걸까.

 

말들은 수시로 내게 찾아와 버려지거나 읽혔다. 그건 어머니의 삶이 내 삶에 보내는 안부 같은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문득, 내가 누군가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 삶이 한 삶을 품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철을 넘기면서 동시에 말도 넘어온 것과 다름없었다. (202페이지)

 

여전히 밤은 어려웠고, 잠 못 들게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해명하는 말들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건 말이 쉬워지는 것이라고, 다룰 수 있는 말의 가짓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소통은 말로 이뤄지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아픔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에는 단순히 ‘말’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종의 ‘경험’이 필요했다. 대개 말은 누군가에게서 흘러나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들어가고, 그건 한 삶이 다른 한 삶에게 보내는 우편 같은 거니까. 말의 종착지는 결국 누군가의 삶이고, 하여 자신의 범위 내에서 이해 가능할 뿐이라고. (192~193페이지)

 

저마다 가진 말의 높이를 계이름으로 말하며, 그 말의 표현으로 감정을 읽는다. 너무 높아서, 너무 낮아서 닿지 못한 말들 때문에 우리는 외롭고, 아프고, 상처받고, 오해한다. 너무 가벼워서 상대에게 가 닿지 못하고 날아가 버린 말들에 더 외로워지곤 한다. 일상처럼, 습관처럼 주고받는 말에서 우리가 마주한 감정은 상대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사연을 표현하지 못하고, 안부를 묻기 어렵고, 이해가 버거웠던 순간들을 마주할 때 필요한 건 말이었다. 온몸으로 읽어야 하는 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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