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누가 듣는가 - 제1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이동효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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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그 순간.

책을 읽다 보면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별것 아닌 내용에 갑자기 울컥해지거나, 위로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에 눈에 들어온 문장 하나로 감동이 쏟아지거나,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싶을 때 배꼽 잡게 하는 허무맹랑한 제스처에 깔깔대거나... 우리 일상에 그런 순간을 만들어주는 게 많이 있겠지만, 책과 비슷한 분위기로 다가오는 게 노래라고 생각한다. 내 기분에 맞춰, 상황에 어울리게 스리슬쩍 다가와 버리는 순간. 보통 이런 순간을 타이밍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 타이밍은 참 절묘하다. 진짜 별로라고 생각했던 책이나 노래가 그렇게 다가오면 당황스럽잖아. 진짜 듣기 싫은 노래였는데, 갑자기 좋아지는 그런 거, 적응하기 좀 그렇잖아. 아이러니하게도, 그 타이밍이란 건 대부분 이런 경우가 많았다. 어느 순간, 정말이지 그 찰나에 꽂혀버리는 것. 오래전 얘긴데, 진짜 별로라고 생각했던 선배가 듣고 있던 노래 한 곡에 반해 그 선배를 좋아하게 된 적도 있다. '어? 이 노래 너도 좋아해?' 하는 괜한 공감의 이유를 찾아낸 게 보물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제 와 기억해보면 그냥 웃을 일, 어렸을 적 얘기지만 그 의미는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 뭐든, 타이밍이 중요한 거였어.

 

왜 하필 지금 이런 노래가 나오는 것일까? 흘러나오는 저 노래야말로 그녀의 본질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문득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삶의 고비 고비마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노래, 의미심장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모든 우연은 신이 흘린 편지래요, 소곤대는 성은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185페이지)

 

아버지의 구타가 장난 아니다. 주인공 오광철은 아버지의 술과 폭력으로 말더듬을 갖게 되었다. 이 말더듬은 그냥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그의 첫 사회생활인 학교생활부터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그 말더듬은 어마무시한 장애가 된 거다. 학교생활, 직장생활, 군대생활, 연애까지 모두. 술을 마실 때, 노래를 부를 때 그의 말더듬은 잦아든다. 그가 찾은 말더듬의 치유법이다. 그래서 넘치게 술을 들이켠다. 술을 깨기 위해 노래방을 돌고, 다시 술을 마시고, 노래방, 술, 노래방, 술... 이 정도면 알코올중독 수준 아닌가? 금방 끊겨버리는 필름, 일어나보면 젖어있는 옷,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몸뚱이. '자신이 이렇게 된 게 다 그 인간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가 세상을 제대로 살지 못한 이유, 말더듬을 숨기려고 침묵을 택한 일상, 비겁하고 외로워지는 순간들은 덤. 세상에 섞이지 못하고 격리된 생활을 하게 된 것도 모두 그 인간 탓이다.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모든 걸 내보일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음악을 좋아했던, 기타를 잘 쳤던, 말발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던 개둥이(개주둥이). 개둥이와의 우정은 광철이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해진다.

 

제목 때문에라도 눈치를 챘겠지만, 다양한 노래가 등장한다. 1980년대의 음악이 주를 이루고 팝송과 가요가 계속 언급된다. 솔직히 내가 모르는 음악도 많았고, 흥얼거리던 기억이 있는 오래된 노래도 있었다. 가사의 정확한 의미를 몰라도 멜로디가 기억나 나도 모르게 알게 된 노래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삶을 성장의 과정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음악으로 인해 이들의 인생이 어느 정도 흔들리는, 혹은 포기한 꿈이 만들어낸 격한 감정들을 풀어낸다. 거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광철이 처음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순간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나올 때는, 음악이 한 인생을 어떻게 주관할 수 있는지 놀랍게 한다. 그 안에 한 사람의 집착 같은 사랑이 어떻게 폭력을 감당하게 하는지 보여준다. 사람이, 절실해지면, 간절해지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구나 싶은 절망, 체념, 혹은 기대가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광철의 엄마가 선택한 인생, 광철의 아버지가 포기한 삶, 광철이 알지 못하는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게 한다. 그가 선택한 인생의 찰나들이 그에게 남겨준 게 뭐였는지, 그 고리의 시작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또 어떤 것들을 포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게 했다. 그 길에서 함께한 노래들이 구성지다. 피식 웃음도 났는데, 사실 그 절절한 마음들이 노랫가락에 들려오는 것 같아서 아픈 마음이 더 컸다. 노래라는 게, 음악이라는 게 위로나 즐거움이 되면 더없이 좋겠지만, 때로는 그 음악이 거부와 분노의 몸부림이 될 때는 안타까움이 흘러내린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모든 것들에 음악도 있을 텐데, 그 음악이 미움으로 변해버린 순간 바로 버려질 것만 같아서 말이다.

 

노래는 내게 휴식이었고, 삶을 버팅기게 하는 피난처였다. 그건 내가 처음 음악을 접하게 된 계기부터가 그랬다. 구타 뒤에 나오는 아비의 그 흥얼거림.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이 싫어서도 나는 곧잘 내 방에 처박히곤 했다. 처음엔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헤드폰을 꼈다. 헤드폰을 끼는 순간, 나는 외부로부터 완벽히 단절되었다. 헤드폰만 끼면 원하는 소리를 언제고 들을 수가 있었고, 혼자서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었기에 아비의 노랫가락이 들려오지 않아도 나는 자주 헤드폰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FM 라디오를 듣다가 금방 팝송에 빠져들었고, 중1 때 처음 스모키 판을 사들이는 걸 시작으로 그때부터 과도한 열정으로 레코드판을 모아댔다. (47페이지)

 

『노래는 누가 듣는가』의 주인공 오광철의 인생 안으로 다가온 노래가 참 굴곡지다. 화자인 '나' 오광철의 연대기적 서술로 이어가는 이 소설 속에서, 틈틈이 그에게 다가온 노래가 그의 역사를 함께했다. 그의 삶에 숨겨진 것들이라고 말해도 되려는지 모르겠지만, 지나고 보면 다 그의 시간을 채워준 것들이지만, 그 당시에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고스란히 보여서 감정을 이입하게 한다. 외롭고 고독하고, 상처가 깊고, 죄의식을 만드는, 열정을 품었던 음악과 인생들. 좋아서 좋았고, 싫어서 싫은, 귀로 파고드는 그 음악들이 그에게 온갖 감정을 만들고, 분노게이지를 상승시켰으리라. 알 것도 같다. 어쩌지 못하는 그 몸부림을, 발악을, 회피를, 그의 인생을 이렇게 만든 원인으로의 화풀이를, 결국, 어떻게든 이루어질 것 같은 화해의 멜로디를...

 

주둥이만 살아있던 개둥이와의 추억, 미친 듯이 패대기치던 아버지의 폭력 뒤에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던 노래, 어머니가 중독되듯 빠져들었던 교회의 찬송가.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를 카페 풍차의 주인 정희. 순간순간 어둠이 온몸을 장식하지만, 햇빛 아래로 돌아온다. 누구나가 바라는 결말 아닌가? 읽으면서, 대물림하듯 술판을 벌이는 광철에게 매번 분노했지만, 그 이유를 찾고 싶어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그를 향한 분노는 동정으로 변한다. 내가 알 것 같은 느낌들, 그냥 놔두는 수밖에 없는 성격의 일들, 그래서 보는 이가 좌절하게 하는 순간들이 답답했지만 읽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을 봐야만 안심할 것 같아서... 참으로 광철스러운 행보에 웃음이 나지만 어쩌랴. 그가 그런 모습인 것을. 됐다, 그 정도면. 지금쯤 어디 시골 다방에서 주방을 책임지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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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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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의 글귀를 보는 일은 인생에서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엄마와 함께 책을 읽는 일은 삶의 지혜와 철학을 만나게 해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영혼을 느끼고 영혼이 풍요로워짐을 깨달으리라. 참으로 멋진 일이다. 지금 당장 엄마가 좋아하실 글이나 시를 전해보기를. 그러면 그 순간 추억이 만들어진다는 것. (206페이지)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아니,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 어떤 문장 하나, 어떤 음악 하나가 눈과 귀에 들어와서 힘든 한순간의 위로가 되는 때. 무심코 들었던 멜로디에서 눈물이 주룩 흐르기도 하고, 시의 한 구절이 가슴을 파고 들어와 이 순간을 건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에도 벅찬 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하나를 지탱하는 것도 어려운 순간마다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엄마'라는 존재감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감정의 거대한 숫자이리라. 그 무게가 나를 꼿꼿하게 설 수 있게 묶어주면 좋겠지만, 또 그러지 못해서 에너지의 기복을 그리는 게 인간이고 엄마일 것 같다. 시인이자 작가이자 선생인 저자가 엄마로 살면서 그런 순간이 없었으랴.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순간이 이 사람에 없을 수는 없다. 그때마다 그녀를 위로하고 힘이 되게 하는 시의 구절들을 그대로 담아온 책이다.

 

매번 흔들리고 좌절할 때마다 엄마라는 이름의 그녀가 사는 의미를 얻게 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녀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힘을 내게 했던, 이 세상의 모든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38편이 담겼다. 거기에 저자가 엄마로 살면서 겪은 온갖 감정을 쏟아내는 에세이가 함께 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 겪는 육아의 고충, 아이가 커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세상의 시선에 상처받았던 일. 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된 딸의 엄마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옆에서 위로가 되었던 문장들이다. 두렵고 막막한 날들에 겁이 나면서도 나아갈 수 있었던 건 그녀가 품은 시 때문이었다. 시인들의 시가 묵묵히 그녀를 지켜주었고, 그녀 자신이 써 내려간 시 구절들은 그녀의 삶이 오롯이 담겼다.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글귀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할 어떤 곳이 있을 것 같다

그 비로소는 어떤 곳이며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비로소까지 도달하려면 어떤 일과 어떤 현상, 말미암을 지나고

또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할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저의 한계를 놓아버린 그곳

싱거운 개울이 기어이 만나고 만

짠물의 그 어리둥절한 곳일까

비로소는 지도도 없고

물어물어 갈 수도 없는 그런 방향 같은 것일까

우리는 흘러가는 중이어서

알고 보면 모두 비로소,

그곳 비로소에 이미 와 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봄꽃,

그 봄꽃이 자라 안 할의 사과 속 벌레가 되고

풀숲에 버린 한 알의 사과는 아니었을까

비로소 사람을 거치거나

사람을 잃거나 했던

그 비로소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아득함의 위안을

또 떠올리는 것이다 (「비로소」, 이서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부터, 너무 유명해서 귀에 익숙한 시인들까지. 그들의 시를 저자와 같이 듣고 있는 느낌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계속된다. 누군가의 일상을 듣는 것도 같고, 힘든 순간을 잘 건너고 싶은 주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부정의 감각들이 온몸을 감싸고 주저앉고 싶게 할 때마다, '그래, 사는 거 뭐 별거 있나, 다시 일어서는 거지, 이 정도도 건너지 못하면 뭘 할 수 있다고, 계속 가보는 거야.' 많은 의미와 감동을 담은 메시지로 전해오는 시 구절들이 힘이 된다. 그때마다 보이는 건 바로 옆의, 저자의 딸이다. 딸을 키우면서 알게 되는 감정이 또 다른 문장들로 함께 녹아 있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다. 이제는 딸과 함께, 친구처럼 동료처럼 가족처럼, 서로 의지가 되고 무한의 응원을 보내는 사이가 되어 있다는 거. 힘든 시간 같이 겪어간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저자의 상황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 내가 엄마와 함께 지내면서 겪고 느끼는 시간의 감정은 저자와 비슷하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이지만, 그 이상의 많은 관계로 정의할 수도 있는, 엄마와 내가 공유한 같은 경험들이 만든 관계의 끈끈함이 있다. 지금도 서로 싸우면서 감정도 상하고 그러지만, 언제 그렇게 싸우고 그랬냐는 듯이 새로 개봉한 영화를 같이 보고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웃는 시간이 있다.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떤 순간들을 같이 건너온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다. 저자와 딸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엄마의 아픔을, 엄마의 노력이 얼마나 힘에 부치는지... 그런데도 딸과 함께하는 시간을 계속 이어가는 엄마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괜히 뭉클해진다.

 

물 냄새를 맡고 싶어

좁은 계단으로 강가에 내려간 적이 있다

 

휘어진 모래톱

부드러운 변방에 서서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았지만

 

물가에선 또 다른 냄새가 그리워

어디로 더 가야 하지

 

다리도 계단도 없을 곳이라면,

아득히 귀를 열고 선 내게

 

흘러드는 물은 멀어지는 물살은

날더러 기슭이라고 그토록

 

어디든 닿고 싶어서 (「강가에 내려간 적이 있다」, 조원규)

 

여름을 느끼게 하는 한낮의 더위가 아니라 아직은 봄이 다 가지 않았다고 느끼게 하는 선선한 바람을 맞는 기분으로 읽고 싶은 글이다. 부채질하면서 밀어내고 싶은 않은, 가슴으로 스며드는 바람으로 느끼고 싶어서... 아무리 이해를 한다고 해도 엄마의 모든 것, 모든 시간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이는 것 이상으로 건네져 오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저자의 글이 낯설지 않다. 읽는 순간순간 어떤 감동이 느껴질 때마다, '한 번도 좋은 딸인 적 없다'는 저자의 고백이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끔해진다. 엄마의 마음을, 엄마의 힘든 시간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습관처럼 '엄마니까'라는 생각으로 지나쳤던 순간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쉽지 않았겠구나. 우리 엄마도, 세상 모든 엄마도...

 

'엄마라는 무게를 견디고 있는 당신에게'라고 말하지만, 늘 삶의 무게를 이겨내야 하는 숙제로 오늘을 버티는 우리 모두와 공유하고 싶은 글이다. 엄마라는 책임이 절대 가볍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또 각자의 무게를 안고 사는 게 우리니까 말이다. 삶이 언제나 편하게 지나갈까 싶은 투정이 가슴 속에서 뛰쳐나오려고 하면서도, 이렇게 살아가며 울고 웃는 게 우리 인생인가 싶은 마음에 또 한 번 자신을 토닥이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위로가 없다면 우리가 오늘을 사는 일은 더 힘들 것만 같다. 저자가 전하는, 위로와 힘이 되었던 시 구절들이 이 책을 읽는 모두에게 그대로 가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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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의 서 -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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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막연하게 죽음을 생각하면서 읽는 것과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지켜보고 읽는 것은 매우 다르다. 소설로 읽으면서 대비하듯 죽음을 대하는 건 전자에 가깝고, 현실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공감하며 읽는 건 후자에 가깝다. 분명 둘 중 한 가지만의 공감이 따라올 것 같았는데, 나에게 『위안의 서』는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느끼게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겪은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갑작스레 몇 번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도, 아직 다 모르겠는 죽음을 생각하게 하면서도, 경황없이 겪은 죽음이 실재라는 걸 각인시킨다. 누구에게든 죽음은 가까이 있으며, 매 순간 죽음과 협상하듯 오늘을 버티는 기분이 든다. 그건 아마도 소설 속 두 주인공 정안과 오상아가 감추려 애쓰는 것이 보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속도가 너무 빠르게 다가와 더는 미뤄두지 못하는 시간을 사는 정안과 죽음을 경험한 이들에게 위로를 보내며 자기의 죽음을 미뤄두는 상은의 진심 때문에...

 

정안은 박물과의 보존과학자다. 모든 죽은 것의 시간을 복원한다. 죽은 사람의 흔적으로 생존의 모습을 최대한 살려내고, 사라지고 부서진 유물의 처음 모습을 찾아준다. 시간과 자연으로 빛을 잃고 원래의 생태를 잃은 것을 복원하는 일이 그의 업무다. 그에게는 안성맞춤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싫어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나누는 감정도 불편한 그가 찾은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에게 주어진 또 한 번의 일, 미라 보존처리를 하게 된 그는 미라 특별전에서 관람객을 상대로 설명까지 하게 된다. 거기서 본 어떤 여자, 오상아. 오상아는 정부에서 비밀리에 파견한 공무원이다. 자살을 방지하거나, 가족의 자살로 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게 그녀의 업무다. 타인의 죽음을 막는 일이라니, 그녀 자신이 생의 의지가 거의 없는데, 타인의 죽음을 막으며 그들이 겪은 죽음으로 더는 나아가지 못할 삶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일을 한다니... 그녀의 삶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있는 듯하다. 그러다 우연히 찾아간 박물관의 미라 특별전에서 여자 미라의 악수(幄手)를 간절히 바라보던 오상아는, 그 미라에게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순간을 느낀다. 그때 정안의 목소리를 듣는다.

 

“유리에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그 순간 정안은 무엇을 보았기에 오상아가 미라의 악수에 다가가려 했던 것을 저지했을까. 단순히 관람객이 전시물의 유리에 손을 대는 걸 막기 위함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어떤 것이 그녀를 부르게 했던 거다. 아마도, 비슷한 듯 다른 두 사람 사이에 부유하는 공기만이 설명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가 소리 내어 타인을 부른 순간, 그녀가 미라의 악수에 다가가려 했지만 저지된 순간, 무언가가 깨졌다. 각자가 단단한 성벽처럼 세웠던 원칙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본 것만 같고, 그녀는 감추고 싶은 것을 들킨 것만 같다. 그리고 며칠 후 박물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죽음을 사이에 둔 채로 진심을 듣는다. 여자 미라가 입고 있던 수놓아진 저고리에 이야기를 부여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킨 그의 설명에 반박하듯 그녀는 소리친다. 그녀가 매일 겪는 죽음의 모습은 그의 설명처럼 전혀 아름답지 않음을 진하게 새긴다. 그녀가 본 죽음은 얼마나 잔인하게 현실을 보게 하는지 그는 모른다는 것처럼 외친다. “죽음은 우리 인간을 어느 순간 냉정하고 잔인하게 덮쳐올 뿐이라는 거예요.”

 

그녀의 성장 기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가 매일 겪는 죽음의 양상들 때문이었을까. 그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시간에 아름다운 기억을 부여한 것으로 여겨도 좋을 미라의 사연에 그녀는 현재 자기가 보는 죽음을 대입시켜 그들의 사연을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말한다. 죽은 여자에게 입혀진 남자의 옷에 아름다운 상상 따윈 집어치우라는 듯이, 수놓아진 그림 속의 새와 벌레의 생존에 그녀의 시선을 새긴다. “삶은 그래요. 새가 생존을 위해 벌레를 잡아먹은 것, 그렇게 벌레의 생이 끝난 것, 그렇게 하나의 죽음이 완성된 것. 그것뿐이에요.”라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은 그렇다는 것을 새삼 증명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아름답게 포장하려 애써도 결국 포장지도 낡고 찢어지기 마련이라는 듯이, 그 안의 내용물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을 거라는 걸 강조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꺼져가는 그의 삶이 그대로 보인다. ‘그거 봐, 당신이 누군가의 죽은 시간을 복원하려고 해도,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한 의복이어도, 잘 맞춰진 뼛조각이어도, 그뿐이잖아. 그들의 시간은 거기서 멈췄잖아.’

 

그는 문화재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에 매달리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금속이나 돌처럼 물성이 본래 차갑고 단단한 것들은 그만큼 시간이 파고들 틈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을 지녔던 닥나무를 원료로 한 종이나 비단, 모시, 삼베 등의 부드러운 것들은 너무나 쉽사리 자신의 틈새를 열고 시간을 흡수한다. 결과는 처참하다. 본래의 치열하고 매혹적이었던 빛깔은 빠르게 제 빛을 잃고 퇴색해버린다. 뿐만 아니라 부후균이나 벌레에 의한 공격까지 받는다. (59~60페이지)

 

매일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그와 매일 타인의 죽음을 보는 그녀가 사는 오늘을 떠올려본다. 누구의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삶이었다.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유전적인 병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맞서 싸울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담담하게, 혹시 내일 내가 돌아오지 못할 순간을 맞이한다면 누군가가 자기 삶을 깨끗하게 정리해주길 바라는 부탁을 할 뿐이다. 생존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보고 들으며 위로를 업으로 삼는 그녀는 그들의 죽음을 저지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형식적인 위로를 건넨다. 그게 그녀의 일이다. 그녀가 진심을 담아 건네도 아무것도 나아질 게 없는 그들의 삶에서 죽음을 배제하라고 강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녀는 안다. 다행이라며 살아남은 그들은 곧 다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 거라는 것을. 그런 두 사람의 만남이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한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관조하는 진심을 숨긴 채로 건네는 위로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데?

 

소설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문자에 그가 답하면서, 그가 유물 발굴 현장으로 그녀를 이끌면서 분위기를 전환한다. 죽음에 끌려가는 것처럼, 자조적인 웃음으로 죽음을 마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의 시선에 빛을 비춘다.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고개를 들고 바라본 환한 달빛, 온몸으로 건네는 위안이 보여준 동트는 아침. 그는 죽어가는 시간을 잊은 듯 그 순간을 보내고, 그녀는 관조하듯 타인의 죽음에 위로를 건네는 것을 그만두겠다는 듯이 눈빛을 빛낸다. 그녀는 처음으로 전화벨이 울리길 기다린다. 새벽에 울리는 그 죽음의 전화벨 소리가 아니라, 그녀가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게 사랑과 위안이 될 타인의 시선을... 여자 미라에게 입혀진 남자의 저고리가 말하는 의미를 이제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그녀다. 혼자가 아닌,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유대감, 이제야 비로소 내 삶에 타인을 들일 수 있게 된 순간의 희열.

 

누군가의 죽음을 유기하기 위해 파놓은 깊은 구덩이 같은 발굴 현장에 내리고 있는 눈송이들이 그는 죽음처럼 보였다. 죽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언제나 우리 머리 위로 일정하게 떨어져 내려 삶의 윤곽을 뒤덮어버리는 선뜩한 비늘들인 것이었다. (115페이지)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삶의 모든 순간이 풍성한 안도로 채워져 있지는 않을 테니까. 가까이서 멀리서 겪는 죽음에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시간에 공존하는 죽음이다. 정안과 상아가 비슷한 상처로 고통받고 비슷한 바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 그들의 두려움이 옅어졌던 것처럼,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위안도 비슷할 것이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찾아오고야 말았던 위로의 순간은 서로를 보듬는 손길로 온도를 가진다. 죽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죽음이 삶을 갉아먹지 않도록 죽음으로부터의 공격을 막는 일은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그게 사랑이라면 더없이 아름답겠지. 상아가 기다리는 전화벨 소리는 울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그녀는 이제 죽음이 삶을 잠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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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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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로 이 책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책의 느낌을 읽은 그대로의 느낌대로 표현한다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공감한다는 말은 너무 과장된 것 같고, 이해한다는 말도 거짓말 같고... 그 어떤 말로도 위로나 이해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쩌면 나 역시 남의 일로 치부하며 지나갔을, 혹여 내 자식에게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 하는 방관자였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말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살아왔을 고통의 시간을 이렇게라도 듣게 된 건, 이제는 방관자(방관자 역시 가해자일지도 모를)로만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는, 적극성을 가지게 된 계기로 남을 듯하다.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고하는 린이한의 유서였다.

 

빨간 글씨 : 왜 할 줄 모른다고 했을까? 왜 싫다고 하지 않았을까? 왜 안 된다고 하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야 이 모든 일이 그 첫 순간에 결정되었다는 걸 알았다. 억지로 욱여넣은 건 그인데 내가 죄송하다고 말한 그 순간에. (43~44페이지)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친해지고, 영혼의 단짝이라고까지 불러도 좋을 두 아이, 팡쓰치와 류이팅.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시간으로 쌓은 게 있다. '나'와 '너'를 동일시해도 괜찮을 만큼 하나의 존재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이 둘의 관계나 마음이 여린 시절 뭘 모르고 가지는 절친의 과장된 의미인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고, 이 아이들의 관계 이상의 성장 모습이 보이면서 더 큰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낯선 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이팅은 쓰치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 쓰치의 이야기가 비밀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쓰치의 일기장으로 드러나면서, 이팅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생각한다.

 

이 소설은 쓰치의 이야기지만 이팅의 시선으로 읽어가게 되러데, 그게 독자의 시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하다. 쓰치의 일기를 발견한 이팅이 쓰치가 겪은 지난 5년의 세월을 재구성한다. 문학을 배우겠다며 찾아간 리궈화의 집. 쓰치와 이팅은 오직 여학을 배우려는 목적이었다. 문학 강사 리궈화를 믿고 학업을 목적으로 찾아간 곳에서 쓰치는 되돌릴 수 없는 성폭력의 시작을 경험한다. 리궈화는 처음부터 쓰치를 강간할 목적으로 손을 내민 거였다. 선생이란 이름을 더럽히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 어린 소녀들의 순진한 마음을 세뇌하듯 문학의 문장들로 사랑을 착각하게 하는 위선자였다. 리궈화가 쓰치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하면서 길들이는 동안, 쓰치는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선생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생을 사랑하면서 이 모든 행위가 사랑이라고 여겨야만 했던 거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 관계의 비정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랑했다. 리궈화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쓰치 자신이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이건 선생님이 널 사랑하는 방식이야. 알아듣겠니? (중략) 넌 선생님을 좋아하고 선생님도 널 좋아해. 우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어. 이건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야. (중략) 넌 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니? 너무 많이 와버렸다고 나를 나무라도 좋아. 하지만 내 사랑을 원망할 수 있어? 너 자신의 아름다움을 원망할 수 있어? 게다가 며칠 있으면 스승의 날이잖아. 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의 날 선물이야." (90~91페이지)

 

미처 몰랐던 마음을 이제야 듣는 기분에 답답했다. 뭔가 잔뜩 오해해서 서먹해지고 더없이 친했던 사이가 낯설어지는 느낌이 드는 채로 멀어지는 관계가 되는 듯했는데,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생기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일. 쓰치가 겪은 일을 그렇게밖에 바라볼 수 없었다. 내가 다 들어주지 못해서,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죄스러운 마음. 그건 이원 언니가 느끼는 마음과 닮기도 했다. 쓰치의 전화가 그냥 안부 전화만은 아닐 터였는데, 쓰치가 망설이면서도 결국 꺼내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좀 더 파헤쳐볼 생각을 못 했다는 게 아쉽고 안타깝고 미안해진다.

 

그 후 20여 년 동안 리궈화는 자신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여학생들이 세상에 널렸다는 걸 알았다.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에게는 최고의 방패였다. 여학생을 강간해도 세상은 그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순수 혈통의 양치기 개였다. (123페이지)

 

이런 일들은 왜 가능한 것일까.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온 유교적 환경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점점 더 개인주의로 변하는 세상도 한몫하는 듯하다. 게다가 입시 위주의 교육이 치열한 학습의 장으로 만들면서 리궈화 같이 선생이라는 이름의 대상에게 내 딸을 믿고 맡기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기도 했을 테지. 리권화에게 여학생을 조달하던 그 관리자 역시 여자였는데, 나와 직접 관계없는, 나에게 피해가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걸까? 특히 이런 폭력은 쓰치의 이웃 첸이웨이와 결혼한 이원에게서도 비슷하게 확인된다. 이원은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한여름에도 목이 올라오는 긴 소매 옷을 입고 생활한다. 쓰치와 이원은 서로의 상황을 알아보지만 직접 얘기해본 적은 없다. 쓰치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하면서도 캐묻지 못하는 이원, 이원이 맞고 사는 걸 알면서도 묻지 못하고 주변에 알리지도 못했던 쓰치. 무엇보다 궁금한 건 쓰치의 부모가 왜 나서지 못했나 하는 거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 딸에게 왜 성교육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고 차단했으며, 딸의 변화와 심리를 조금 더 세심하게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좋은 학교로의 진학, 우등생, 학업이 최우선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싶었겠지.

 

사실을 말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합의된 성관계가 아니며, 사랑도 아니며,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이팅이 처음 쓰치와 리궈화의 만남을 듣고 불륜이라고 여기면서 더는 듣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열세 살의 어린여자 아이가 무엇이든 터놓고 말할 유일한 상대라고 여긴 절친에게 들은 말은, 더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나를 가장 이해해주고 보듬어줄 거로 믿은 대상에게 들려온 말이 부정의 대답이었는데 뭐가 더 필요할까. 내 딸에게 성교육이 웬 말이냐고 여기는 쓰치의 엄마 역시 쓰치가 인생을 의논할 대상은 되지 못했던 거다. 그래서 쓰치는 자기가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게 폭행의 대상을 사랑으로 만드는 거였다. 리궈화와의 시간이, 쓰치가 성폭행을 당하던 상황을 낙원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결국, 낙원으로 만드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쓰치에게는 제일 나은 방법이었으리라.

 

월요일에는 이름이 '희(喜)'자로 시작하는 모텔에 그녀를 데려가고 화요일에는 이름이 '만(滿)'자로 시작하는 모텔에, 수요일에는 '금(金)'자로 시작하는 모텔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희, 만, 금 모두 길한 글자였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녀를 송두리째 사로잡을 수 있었다. 문학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197~198페이지)

 

문학의 생명력은 가장 참담한 상황에서도 언어로 유머를 캐내는 데 있다. 그건 남들에게 떠벌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혼자 느끼는 즐거움이다. 문학은 쉰 살 아내와 열다섯 살 연인에게 똑같은 사랑시를 읊어줄 수 있는 것이다. (289페이지)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에서 쓰치에게 고통을 더하게 해준 것도 문학이고, 쓰치에게 고통을 덜어주던 것도 문학이다. 이원 언니와 같이 문학 작품들을 접하면서 문학의 즐거움이나 문학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을 배우는 게 성장하는 모습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문학에서 발견하는 삶의 아이러니나 지혜 같은 것들. 아마 지금 문학을 읽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문학을 먹이로 리궈화는 손을 뻗었다. 이 어린 소녀에게 달콤한 쿠키를 입에 물려주듯이, 문학으로 미끼를 던지고 문학 작품 속 문장들로 그의 폭력을 사랑이라고 감싸며 들려주었다. 이원 언니 역시 문학 작품을 꾸준히 접했지만, 그 문학이 그녀의 인생을 구원하지는 못했다. 문학 작품은 그녀 옆에서 그냥 존재하고만 있었을 뿐이다. 쓰치와 이원에게 문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리궈화의 입에서 나오는 포장된 문장들로 쓰치는 무너져갔지만, 한편으로 쓰치는 문학으로 그 위기를 간신히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기록. 쓰치는 일기를 썼다. 하루하루, 리궈화의 폭력을 기록했으며 그녀가 겪는 마음을 적었다. 문학이 가지는 힘의 양면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오늘의 여성들이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경험. 말하기 어려워서 더 쌓이는 비극들. 그 마음들이 문학으로 드러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 세상에 문학이 있어서 다행이다. 쓰치에게는 그 문학이 달콤한 사탕발림이 되어 판단 오류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저자에게 문학은 세상의 폭력을 알리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독자에게는 여성들이 겪는 비극을 마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여전히 강단에 서 있는 리궈화 같은 사람에게, 형태가 없는 사회가 하나가 되어 협조하는 가해를 마주함으로써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일을 남겼다. 편 가르기가 아니라, 어느 편에 서는 게 정의를 찾는 방법인지 계속 묻게 할 작품이다. 그 질문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잠재적 쓰치, 이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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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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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끝이 있다. 그게 사랑이라도 말이다. 사랑의 끝에 이별이 있거나, 사랑으로 함께하는 시간 계속되어 영원한 헤어짐으로 끝이 나거나. 사랑의 끝이 힘든 것은 전자이리라. 그것도 헤어짐을 통보 받은 처지에서는 더더욱. 내가 하는 사랑은 최선을 다했어도 이런 결말일 수밖에 없는 건가 하면서, 이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거나. 무엇보다 이별이 이별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일상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로 거듭나기도 한다는 것. 인생의 커다란 한 부분을 실패한 것만 같고, 무엇을 해도 안 될 것 같은 좌절감에 앞으로의 시간을 내다보지 못하고 현재의 절망만을 보는 상태로 계속되기도 하는 일이 무서운 거다. 이별은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포기해도 좋은, 나 자신의 행복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냥, 또 한 번의 사랑이 끝났을 뿐이다.

 

 

남남으로 돌아가는 게 이별이에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과거의 자신과 한 걸음 멀어질 수 있습니다. (57페이지)

 

이별은 일방적이어도 괜찮습니다. 상대를 설득시킬 필요가 없을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만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남아 있는 정을 싹둑 잘라버리고 비정해질 것. 그게 서로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119페이지)

 

사랑이 끝나고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누군가의 위로는 힘이 되기도 한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져, 같은 따뜻한 말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지금의 이별이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말들. 정말 주문처럼 다 잘 될 거라고 믿게 되는 말들. 그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주 많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별 후에 정작 필요한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이별 후 정말 들어야 할 말은 냉정하고 따끔한 말들, 착각 속에 허우적대다가 시간 낭비하지 못하게 현재의 모습을 보게 하는 말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게 하는 말들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저자는 이별 후의 다양한 사례들을 들려주면서, 더욱 정확하고 분명한 말로 위로를 전한다. '아직 사랑이 끝나지 않은 건 아닐까?' 하면서 희망 고문에 시달리는 일, 상대가 건넨 달콤한 이별의 말에 또다시 허무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일, 전 애인의 흔적을 따라다니며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하지 않는 일을 그만두어야 함을 경고한다. 동시에 이별의 후유증으로 다음 연애가 두려워 연애 세포를 죽이는 사람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어도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람들, 이별 후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일상의 곳곳에서 전 애인을 떠올리는 사람들을 보듬는다. 울고 싶은데 참지 말라고, 좀 외로우면 어떠냐고,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 연애에 그만 끌려다니고 이별을 선택한 건 아주 많이 잘한 일이라고. 당신은 너무 강한 사람이기에 이 모든 일을 건너왔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이별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더욱 현명하게 이별을 대했다면, 우리는 이별을 인생에서 통과하는 하나의 문으로만 여겨도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일어나는 판단과 감정을 다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경험했겠지만(곧 경험하겠지만) 사랑을 하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이별은 찾아온다. 그때마다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사랑으로 인한 불행과 이별을 반복한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면, 이미 끝난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그건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설픈 배려의 말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상대의 표정에서 읽히는 무관심을 못 본 척하고, 이미 변해버린 사람을 붙잡고 있으려고 애쓰며, 아직은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순간들을 놓기 싫어서. 의미 없는 희망 고문은 상대가 쳐놓은 그물일 때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만들기도 하는 거 아닐까? 그럴 때마다 매번 자기 자신을 볼 타이밍을 놓친다. 끝난 마음에 미련 두지 않고 이별을 인정해야만 하는 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상대를 사랑하느라 나를 보지 못한 시간을 이제라도 되찾아야 한다는 걸 저자의 따끔한 충고로 알게 된다.

 

아무리 듣기 좋게 늘어놓은들 밑바탕에 깔려 있는 뜻은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입니다. 그럴듯한 포자에 마음을 뺏겨 진실을 보지 못해서는 안 돼요.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이별을 택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별이란 가슴 시릴 정도로 냉정한 거예요. 이별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건 훨씬 더 나중의 일입니다.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마음껏 우세요. 그래도 돼요. (73페이지)

 

이별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이별을 감당하는 정도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이 슬픔을 감당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는데 판단 오류였던 듯하다. 오히려 '무엇을 하지 않는' 시간이, 지나간 시간과 나의 감정들을 되돌려볼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한다. 그런 시간이 가져야만 이별은 깔끔하게 소화되고,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주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만든다. 그 시작이 또 다른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뻔한 이별의 위로, 흔한 사랑에 관한 조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주제의 글을 처음 접한 것도 아니었고,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그동안 익숙하게 보아왔던 사랑에 관한 많은 지침서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의 문장 곳곳에서 발견하는 이성적인 한 마디가 마음에 들어온다. 따끔하게 가슴을 찌르기도 하고, 후회했던 순간을 떠올리게도 한다. 저자가 이야기에 비슷한 경험을 기억해내면서, 그때 미처 대처하지 못한 바보 같은 모습을 저장했다. 온갖 이유로 꺼냈던 말들, 들었던 말들이 결국은 '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하나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지지부진 끌고 가려고 애썼던 어리석음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품게 한다. 나는, 우리는 행복해져야만 하는 사람들이니까. 물린 말이지만,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랑의 가장 중요한 스킬은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아닌 이별하는 법입니다. 이별을 통해 살아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우고 더 나은 사랑을 위해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잘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랑을 제대로 한 사람은 같은 눈물을 두 번 흘리지 않아요. 한번 이별을 결심했다면 확실히 혼자로 돌아오세요. (205페이지)

 

그러니까, 제목 그대로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라고 말할 수 있게, 사랑할 때의 나보다 (때로는 불안하게 보이는) 사랑이 끝난 후의 내가 더 성장해 있는, 사랑을 제대로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사랑을 똑바로 보는 눈을 가졌다면, 이별 역시 현명하게 배우고 감당할 수 있다. 나답게 살아가는 법, 슬퍼할 가치도 없는 일에 혼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서툴렀던 사랑과 이별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누군가 이별을 하고 있다면, 사랑이 힘들어서 고민하고 있다면, 다시 시작할 사랑에 두려워하고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펼쳐 봐도 좋겠다. 사랑과 이별을 넘어서서, 인생 사는 법을 한 수 배우게 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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