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탁샘 - 탁동철 선생과 아이들의 산골 학교 이야기
탁동철 지음 / 양철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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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지나가도 만나면 또렷하게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탁동철 이름 석자도 그렇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보리출판사에서 어른용으로 내는 잡지 <개똥이네 집>에서다. 딱 한번 이름을 보았고 그 때 그는 그림책 <야쿠바와 사자>를 읽고 아이들과 무슨 연극을 하였다고 했다.

그즈음 나도 그 책을 읽고 이 좋은 그림책을 아이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그의 글은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인상에 남았다. 글로 남은 사람을 <달려라 탁샘>의 저자로 확신한 것은 자세하게 말할 수 없다. 그냥 그랬다.

 

교사가 쓴 교단 일기는 학생과 교사에게 우선 소용된다. 그 학교의 학부모까지 그들만의 이야기 속에 들어간다면 독자의 자리는 조금 더 밀려난다. 그러나 교단 일기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 독자에게 이 책은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시골 분교 학교 아이들과 생활하는 탁쌤은 자주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이들과 선생이 투덕투덕 싸우는 것은 다반사고 더러 선생은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학생과 맞짱을 뜨기도 한다. 학교 운동장에 쓰레기를 버리는 얌체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일이 편지를 쓴다. 아이들을 몽땅 앞세워 경찰서에 가서 시위도 한다. 막대과자 주는 날에는 애들하고 떡볶이를 만들어 먹는데, 이 과정도 볼만하다. 우선 읍내에 맛있다고 소문난 집 세 군데를 정해서 그 집 떡볶이를 맛본다. 물론 차비는 탁쌤이 낸다. 그대로 따라 하거나 입맛대로 손맛을 내도 된다. 이렇게 모둠이 만든 떡볶이는 급식소에 가서 전문가(?)에게 심사를 받는다. 빼빼로데이가 어쩌구저쩌구 잔소리는 단 한마디도 없다. 그냥 그날은 지들 멋대로 맛대로 떡볶이를 만들어 먹은 날이다.

 

우리 동네 알아보는 사회시간에는 누구는 어른들의 별명을 조사하고, 누구는 처마에 무엇이 있나 조사하고 누구는 김장을 몇 포기 했고 거기에 무슨 재료가 들어갔나 조사한다. 옛날에 쓰던 농기구에 대해 알아볼 일이 있으면 아이들을 앞세워 동네 아저씨를 찾아간다. 아저씨는 말도 천천히, 친절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아이들의 일일 선생님이 되어준다.

 

밤낚시도 가고 밤 떨어지면 밤주우러 가고 눈 내리면 비료푸대 들려서 눈썰매 타러간다. 온도에 따라 물고기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보려고 얼음과 실험도구를 챙겨 냇가로 간다. 직접 잡아 실험하고 냇가에 다시 풀어준다. 메뚜기를 잡아 구워먹는다. 일이 생기면 바로 토론에 들어가고 반장은 일주일씩 돌아가며 한다. 사정에 따라 상황극을 펼쳐 한 가지 일을 여러 가지로 경험하게 돕는다. 방학숙제도 시 몇 편 쓰겠다하면 그게 그 아이의 방학숙제다. 단 30편을 쓰겠다하고 세 편만 써오면 30편을 다 쓸 때까지, 쓰지 못하고 졸업해도 반드시 채워야한다. 맨 이런 식이다. 짧은 사건들이 수도 없이 많다. 웃기고 신나고 재미있다. 사계절의 변화가 교과서고 그와 아이들이 사는 동네가 교실이다.

 

부럽다고 하고 말 일이 아니고 시골이니 그렇게 즉석 현장 체험이 가능하지 하고 말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교사로서 학생을 대하는 태도이며 부모로서 자식을 대하는 태도다.

 

학생이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직접 보았어도 그 아이가 끝내 말을 하지 않을 때 그는 그 아이가 충분히 고통 받았음을 이해한다. 말을 안 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말을 하라고 하지 않고 싸우는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아이의 이유, 아이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오히려 제 할 말을 못하고 기계적으로 사는 것을 싫어한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자 거짓으로 꾸며 사는 것을 못견뎌 한다. 헐렁해보이지만 그 속에 단단한 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교사 생활을 한 양양은 그의 고향이다. 마을 어른들은 학교 선배이거나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는 그 선배의 아이들이다. 그 상황이 어색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그가 마을을 교실로 삼고 마을어른들을 다 선생님으로 생각하는데 그가 선생입네 고개들고 다닐 위인이 아님은 당연하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자신의 말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의 마음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말하라는 그의 다그침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어린 학생이었을 때, 나에게 그런 가르침을 준 선생님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모범생 딱지가 부끄럽다고 느낀 것은 얼마나 최근 일인가.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래도 어찌어찌 지금껏 읽어온 책 속의 스승에게 들은 말이 아니던가.

 

아직 어린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마음을 다 알리라고는 그도 나도 기대하지 않는다. 좋은 선생이 되고 싶지만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좋아하리라 마음 놓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사람에게 존재 이유가 있다면 증명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할 줄은 안다. 나는 못하고 산다는 것도 알고 그걸 하며 사는 사람을 알아볼 줄도 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사는 사람이다. 가슴을 탕탕 치면서, 더러는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부당한 일을 보고서야 어찌 가만히 있어야하느냐는 그의 말을 따라 내가 한 짓거리를 고백한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어’ 하는 마음에 저지르는 어설픈 짓거리다.

지난 일요일,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끓이자해서 동네 슈퍼에 갔다. 라면을 사들고 나오는데 부동산 앞에 늘 있던 차 한 대가 턱하니 눈에 들어오겠다. 보니 그곳은 인도요, 아이들이 학교가고 올 때 드나드는 길이다. 가뜩이나 좁은데 덩치 큰 차가 길을 반 넘어 먹고 있다. 이것들이.

경비 아저씨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다. 말 해도 듣지 않고 상가 건물이라 할 말도 없다나. 그렇겠지. 차 주인에게 차를 여기다 두는 게 옳으냐 물으니 아니라고 하고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물으니 아파트 주차장을 못쓰게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나 참, 이사람들이.

관리소장에게 말하겠다 하고 돌아오는데 아차, 우리 집 아파트 그 부동산에 내 놨는데, 그럼 그 차 주인이 부동산 사장의 남편인가. 뭐야, 이거 집도 안나가는데 입방정을 떤거야? 처음부터 관리소장에게 말하거나 조용히 관리관청에 신고전화를 할 걸. 그나 저나 내가 왜 이랬지? 이게 다 탁동철 그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가만 두지 않을꺼라고 생각하고 내가 대신 한 거야. 계속 가? 그래도 차 주인한테 항의라도 했으니 그도 괜찮다고 할까? 그래, 그 정도면 적어도 말이라도 했으니 됐소라고 인정해줄까?

나는 이러면서 머리를 쥐어 뜯었다. 훈련 받지 못하고 억압된 권리는 이렇게 맥을 못쓴다. 이만한 일에도 겁을 먹으니. 그리고 권리와 이득 앞에서 저울질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비겁하다. 움추러든 마음이 펴지질 않는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와 임길택이 겹쳐 보인다고 하는데 동의한다. 자연스러움과 체하지 않는 모습, 자신 또한 한 사람의 욕망 덩어리요, 배워야 하는 사람이라는 낮은 마음, 아이들에게 ‘나 좀 가르쳐 다오, 오늘 내가 너에게 배웠다’ 하는 모습은 내가 아는 임길택과 탁동철이 통한다.

밑줄 그을 데가 많고 배꼽 잡을 때 또한 많은 책이다. 너무나 친근한 내 고향말도 눈에 띄어 더 반갑다.

마음에 새기고 싶어 여러번 되돌아 읽은 부분을 다시 잊지 않으려고 옮겨적는다.

 

“이제부터 2학기다. 또 시작이 아니라 세상에서 처음 맞는 시작이다. 굳지 않은 말, 닿아 있는 말들로 잇고 쌓아서 세계를 새로 지어 나가고 싶다.(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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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가지 행동 - 김형경 심리훈습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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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나는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여 오랫동안 열등감에 빠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열등감에 빠져 있어서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인가.

심리훈습에세이라는 낯선 이름표를 단 김형경의 <만가지 행동>을 읽고 내가 얻은 결론은 후자인 것 같다. 마음이라는 것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 행동대로 하면 되는가 했는데 실천이란 그 마지막 단계다. 누구나 알되 실천하지 못하는 한계와 만나게 되어 있다. 이 책은 그녀가 앞서 쓴 심리에세이 완결편인데 산 정상을 앞두고 마지막 힘을 써야 하는 것 만큼 큰 고비로 다가왔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정신분석에 대해 이미 가진 지식이 있는 사람한테 해당한다. 즉 나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는 난관에 부딪혔다. 실천의 방법은 너무 높이 있는 것 같고, 나는 아직 내 마음 조차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다. 그 사이 몇 년이 흘렀는데, 나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나는 ‘살았는가, 살아졌는가’. 이런 반응 뒤에 또 허겁지겁 이것저것 말이 많아지는 것을 느낀다.

밑줄을 그으며 오래 새기고 싶은 말들이 많다. 위로를 받을 만한 조언들도 많다. 프로이트와 융, 예수와 부처, 혹은 요가수행과 노자, 장자, 그리고 수많은 여행에서 그녀가 경험한 내적인 사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가능해보이지 않는다.

지금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에서 맺어진 결과 혹은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오랜 훈습 과정을 겪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과정이 어디 쉬이 나오는 것이던가.

이건 분명 ‘저항’의 마음인 것 같다. “흠, 당신은 이토록 많은 공부와 여행,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인류에게 성인으로 받들어지는 사람들이 한 말의 본질에 다가갔군요. 그런데 오늘도 내 마음이 왜 이런지도 모른채 지지고 볶고 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기회가 전혀 없잖아요. 그 사람들은 몰라서 행복할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차라리 마음이고 뭐고 그런거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죠 뭐. 그럴 수 있다면. 문제는 그런 사람들과 난 좀 달라 하는 저 같은 사람은요, 도무지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쑥대밭이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지 알고 싶은데 어디서 어떻게 도움을 받아야하나요? 혼자 책읽고 공부하는 것도 제자리고요. 여행은 꿈도 못꾸지요.” 이런 말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

늘 이랬던 것 같다. 당신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마음 밑바닥에는 열등감이 자리했다. 누가 나 같은 사람의 말이나 마음에 관심을 두겠는가 하는 마음 안에는 인정받고 지지 받고 싶은 어린 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생각 속에는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는 마음도 있지만 낮은 자존감은 그 마음 조차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찐득허니 자라지도 않고 딱 그만큼으로.

김형경은 원인을 어려서 부모에게 사랑과 지지와 인정을 받지 못한 것에서 찾는다. 아마 내가 또다시 울고 말았던 대목이 여기쯤이었다. 친정 엄마와 가족에게는 단 한번도 내색해보지 못했던 깊은 우물 속 자갈처럼 분명한 마음의 돌. 확실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내 부모의 처지 또한 가엽다는 것이 내가 조금 변한 부분이다.

책의 어느 대목 쯤에 안 좋은 상황이 3대쯤 세습되면 그 3대 누군가에게 정신병증이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몰래 안도의 숨을 내 쉰 것은 내 부모가 열등감을 물려주었으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더 나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과 나는 내 아이에게는 절대 이것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십 년이 흘러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의 원인을 안 것은 꽤 지난 일이다. 늘 내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좋은 사람이라는 페르소나를 갖게 한 것이 이 열등감이다.

남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마음을 갖는 것 또한 분별하는 마음이라고 해석해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런 마음이 생기고 나를 사랑하게 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정답을 알려주듯이 보편적인(그런것이 있을수가 있겠는가마는)행동 강령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은 저자 자신이 훈습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이라 그것을 나에게 적용해도 되는 지 의문이 생기고 말았다. 그 전의 책에서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 그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고 얻은 결론은 처음부터 다시였다.

이미 김형경은 정신분석을 끝내고 어느 단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녀는 독서모임을 통해 분석가 혹은 치료자의 위치에 서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그 단계인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니다. 어느 위치, 어느 단계는 꿈도 못꾸고 다만 현재의 내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알아내서 내게서 끝나게 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내 가족이 나를 규정지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그 대가로 누리는 지금의 여행이 즐겁다는 칠십 대 할머니 같은 존재감을 획득하고 싶은 것이다.

정신분석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대상이 신이라는 결론에 동의하면서 특정 종교가 아닌 일반적이 종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아주 소박하게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인정하는 것,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래도 된다는 것, 좋은 사람 페르소나에 억압되어 있는 자유 의지를 이제 꺼내어 조금은 이기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만가지 행동>을 읽으며 프로이트나 융, 예수, 부처, 노자, 인도의 수행자 같은 대상들을 걷어 내려고 노력했다. 그들에게 기대 내 마음을 들여다 볼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책과 나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이해하려면 그들을 다 알아야 하는가라는 저항의 마음이 책을 다 읽을 즈음에 가서야 이런 마음으로 바뀌었다. 즉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이기를 한 것이다.

가장 소중한 거둠은 유효기간이 또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마음과 접속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마음의 변화에 집중하고 묻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위로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전이와 역전이가 일으키는 소란스러움 혹은 싸움들도 줄어들기를 기대한다.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어른이 되고 힘있게 늙어가기를 희망한다.

내 삶의 결론은 죽음으로 끝날테고 죽음의 순간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단계를 소망한다.(가장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다.)

많은 감정의 입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테지만 <만가지 행동>을 읽는 과정 속에서 생긴 지금의 마음을 기록하는 일에 의미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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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0-26 14:32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
 
 
 
그대 아직도 부자를 꿈꾸는가 - 우리 시대 부모들을 위한 교양 강좌
심상정 엮음 / 양철북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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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의 <마을학교>에서 이런 사람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들을 수 있다면 그건 마을학교 교장 격인 심상정의 힘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지역구의 어떤 당 소속 의원은 임대아파트 건축을 결사반대하고 있다.

어쨌든 서울 서쪽 끝 동네에 사는 나는 책을 통해 이런 학교 소식을 접하면 일단 배가 아프다. 전에 없던 욕심이다. 나라는 사람은 이런 것을 부러워 할 만큼 사회화가 된 사람이 아니다. 도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동네가 그래서 나한테 딱 맞는 동네다.

그러던 사람인데 어쩌자고 요새는 괜한 트집을 잡고 입꼬리가 치어 올라가는 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늘 뭔가에 화가 나있는 나를 발견한다.

겉보기에는 작은 키에 앳된 얼굴을 한 그녀가 있다. 그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굉장히 열을 받는 사람이다. 아픈 손가락 같은 아들 때문에, 그보다 더 많이 아픈 평범한 둘째와 그 친구들이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기운 없어 하다가 마치 박카스를 찾는 사람처럼 <나꼼수> 언제 업 되냐며 ‘졸라’ 씩씩댄다.

사십을 훌쩍 넘겨 살면서 그녀는 욕 한 번 써보지 못했다. ‘완벽하게 도덕적인 사람’인 그녀가 아이가 학교에서 하도 이것 저것 뺏기길래 부부가 욕을 한번 가르쳐보려다가 실패했던 일도 알고 있다. 그러던 그녀가 <나꼼수>를 들으면서 욕과 도덕의 경계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대단한 <나꼼수>다.

말이 길어졌다. 단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를 생각했고, 내가 열받아 하는 이유가 아마도 그녀에게 바짝 붙어 있기 때문인가 보다 생각했다. 나쁘지 않다.

 

박경철의 말을 읽은 날, 마침 아들과 피자에 꽂혔고 동네 59쌀피자를 꼭 먹어야 한다며 큰 거 두 판을 쏘았다. 아들 녀석 친구들도 마침 들이닥쳐서 예산이 더 들었지만 특별히 더 맛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지역경제, 서민 경제, 동네 경제 그런 것 잘 모른다고 이마트 피자 사먹는 짓 하지 않겠다고.

정태인의 죄수의 딜레마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야말로 컴퓨터를 싹 지우고 재부팅 하듯이 그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부터 준비 땅해서 우리 모두 사교육 같은 거 동시에 손 딱 놓는 걸로!

이범의 얘기는 언제 들어도 목소리가 분명하고 커서 듣기 좋다. 딱 써먹기 좋은 구체적인 방법들이라서 더 잘 들린다. 너무 분명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거나 의심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결국은 선택인데, 선택하지 말고 제도로 정해져 버렸으면 좋겠다. “이제부터 학교에서는 어떤 경쟁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나임윤경이라는 여성학자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기쁨이고 소득이다. 이러니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있겠나. 세상에는 이토록 멋지고 훌륭하게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을 직접 만날 수 없으니 책으로 만나는 것이다.

사교육을 외도와 연관지어 현 상황을 들여다 보니 정말 요즘 우리 부모들은 다 집단 최면에 걸린 게 맞구나 싶다. 증세는 좀 더 심한 것 같다. 부부가 부부의 삶을 못살고 부모로서만 사니, 부는 돈을 벌고 모는 자식을 가르치고 결국에는 부부는 없고 의무만 이행하더라는 말.

그래서 외도를 하는데 또 이혼으로 가정이 깨지면 외도 또한 깨진다는 말은 너무 슬퍼서 속상했다. 부부의 삶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을 남편에게 해주었더니 그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아이 교육 때문에 부부가 돈버는 기계, 돈쓰는 기계가 되지는 않아야겠다. 아이도 그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니 우리 부부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윤구병과 이이화 선생의 말은 죄송하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두 분 다 한평생 흙과 역사에 뜻한 바 대로 삶을 집중해오신 분들인데 왜 나는 이 두 분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을까.

대안학교의 귀족화에 상처를 받았다고 윤구병 선생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다. 아마 아직도 내가 수양이 덜 되어 편협한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두 분이 하시는 얘기가 더 근본적이고 지당한 말씀이긴 한데 “저는 지금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며 일어나 가버리는 나쁜 청중이 되어버렸다. 언젠가 무릎 꿇고 두 분의 말씀을 들을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신영복 선생이 나는 늘 어렵고 무섭다. 부드러움과 단호함이 섞이면 그것은 양면이 아니라 더 큰 하나의 덩어리(힘)가 되는 것 같다는 것을 선생을 보면서 느낀다. 그래서 감히 우러르기는 해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이 되는 것 같아 부끄럽다.

한 마디 한 마디 새겨들을 말씀들이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말.

 

“인디언들은 초원을 달려 작은 언덕에 올라가면 말머리를 돌려서 자기가 달려온 초원을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했을까 봐 영혼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먼 길은 영혼과 함께 가야 됩니다”

 

이 먼 길은 “자신의 논리, 자신의 이유로 가야하는 길”이다. 그리고 ‘더불어’ 가야하는 길이다.

 

조국은 늘 그렇듯이 말보다 글이 쎈 사람 같다. 말로 한 것을 글로 옮겼을 때 조차 그렇게 느껴진다. 학자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일 년 열두 달 책상에 앉아서 연구만 하는 선생이 아니라서 좋다. <진보집권플랜>에서 동네 커피전문점에 가서 그곳에서 모은 쿠폰을 쓰더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듯 생활인으로서 법학자인 그가 멋지다고 생각한다.

사심이 아니라 뭐라 할 말이 없는 먼 그대(나는 잘생긴, 엄친아들, 강남좌파를 감당할 만한 자신이 없다, 뼛속깊은 이 촌스러움!)인 그가 열심히 자기 몫을 하되, 현실에 발딛고 있는 것이 좋다.

심상정은 알면서도 모르는 사람이다. 부끄럽지만 그녀에 대해 알려고 해 본적이 별로 없다. 그래도 이 책이 그녀의 손에서 나오게 된 책이라는 것으로 나는 그녀가 국회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끝내 그곳에서 굳건히 뿌리 내리기를 바란다.

 

이 책을 손에 들기 전부터, 다 읽고 몇 날이 지난 지금도 뉴스만 틀면 학교 폭력 기사가 뜬다. 이젠 거의 기겁의 수준으로 그 뉴스만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역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른 방송사 뉴스도 학교 폭력 소식을 전하고 있다. 집과 학교 밖에 모르고 사는 나같은 엄마는 좀 과장하면 패닉 상태다. 그래도 세상이 좀 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화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책에서 얻은 위안과 위로, 희망의 힘이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툭하고 맥이 빠져버린다.

신영복 선생의 “자신의 논리, 자신의 이유로 가라는 말”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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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1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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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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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는 경계의 글이다. 타이르고 주의를 주는 글이라 우화는 두려운 글이다. 그 결과를 비극으로 맺기 때문에 독자는 그 서슬에 놀라 몸과 마음을 단속한다.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우화가 현재성을 갖는다는 것이 신기하고 섬뜩했다. 현실의 정곡을 파고드는 작가의 가슴이 그의 손끝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하나같이 새겨 볼 가치가 있는 글들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찍는 열 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은 어리석고 나약하고 비굴한 삶을 사는 2011년 지금 여기 대한민국 국민에게 보내는 도끼질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처럼 누구한테도 싫다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늘 끌려다니기만 하던 나 아닌가. 입만 열면 자기 자랑에, 앞 뒷말이 다르고 제대로 속물의 모습을 보여준 이웃 언니한테 ‘난, 당신을 만나는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하지 못해(사실 쉽게 이런 말 못하지) 찌질하게 전화를 받지 않는 것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나다.

싫다는 말을 처음 해 본 사람이 남편이 된 남자다. 그것도 남편이 되고 나서야 감히 ‘싫다’는 말을 했다. 그게 뭐든지 오케이, 그게 내 장점이고, 사람 좋다는 말은 관계 유지를 위해 내가 확보해야 했던 태도였다. 참고 용서하며 살라는 천사의 말에 속아 죽음 직전에야 그걸 깨달은 노인의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개인의 문제보다 더 경계해야 하는 것이 집단의 문제다. 당연히 개인은 집단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자주 그 집단의 논리 속에 개인을 희생당한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늘 희생양을 요구한다. <가위바위보>에서처럼 집단은 개인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바위를 못내는 나약한 개인을 철저히 희생양으로 삼고 그 덕으로 집단은 유지된다. 집단이 공공성을 잃고 전체 권력이 되었을 때 손을 다친 개인은 즉 집단에 끼일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개인은 무력하게 희생된다. 더 우화적인 상황은 1%의 집단을 위해 99%의 개인이 희생당하는 시절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99%의 개인이 그들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결국 공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염소와 늑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검은 염소, 흰 염소 구분 없이 모두 함께 힘을 모았을 땐 늑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을 가르고 한 쪽만 공격했을 때 상황은 검은 염소들이 흰 염소를 돕지 않게 된다. 내가 지금 늑대의 공격을 받는 흰 염소와 동류(동무)라는 걸 잊은 채 늑대에게 희생당하는 흰 염소를 남의 일로 여기는 것. 심지어 흰 염소가 숨어있는 곳을 일러바치기까지 한다. 검은 염소들이 생각하기에 흰 염소가 잡아먹히는 것은 그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늑대는 결코 자애롭지 않다. 오로지 목적은 자기 배를 불리는 것이다. 흰 염소가 모두 잡아먹히고 힘의 절반이 빠진 검은 염소들도 흰 염소와 같은 운명이다. 검은 염소가 그 이유를 자기들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섬뜩한 경고다.

 

“이제 검은 염소들은 한 마리가 잡아먹힌다면 그놈이 왜 잡아 먹혔는지 알아내느라 대항할 생각도 못할 거야. 뿔이 굽어서 먹혔는지, 다리가 짧아서 먹혔는지, 암놈이라서, 아니면 수놈이라서 먹혔는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겠지. 스스로 먹힐만한 이유가 있어서 잡아먹히는 거라고 여기는 놈들을 사냥하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끔찍한 상황이다. 실체가 분명한 늑대를 못보고 제 동료가 먹히는 게 이유가 있어서라니, 이렇게 우매한 족속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가난하고, 지방대를 나오고, 외국어를 못하고, 취업을 못하는 그들을 루저라고 조롱하고 비웃지 않았던가. 너만 잘해봐라, 그게 다 노력 부족이라고 개인의 문제로 지적질만 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간교한 늑대였던 것이다. 그 늑대를 바로보고 함께 물리쳐버리리지 못하는 한, 흰쥐, 검은쥐 또한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그림과 글이 적절히 섞여있고 그림의 선이 좋아 책장이 잘 넘어가지만 읽는 내내 우울하였다. 열을 받아 확확 달아오르던 마음이 한 모금의 물로 달래지느니, 차기 추장을 노리는 두 아들에게 물을 길어오라 한 아비가 서로 제가 잘했다고 싸우는 두 아들에게 혀를 차며 이른다.

 

“ 첫째의 맑은 물은 병들거나 너무 많이 쇠약해진 사람들에게 먼저 먹이고, 둘째의 탁한 물은 아직 건강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단다. 한 그릇에 모았다면 모두가 탁한 물을 먹어야 했을 거야.”

 

우화가 전하는 경계를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혜다. 이 시대의 말로 하면 ‘깨어있는 시민’이 아닐까. 이것과 저것 중에 단 하나만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이것의 쓰임이 있고, 저것은 저것의 쓰임이 있는 것이라는 지혜의 말씀은 위안이 된다.

작가의 바람처럼 그의 이야기가 열 번의 도끼질이 되어 너와 내가 ‘이드거니’ 어우러져 서로에게 스며들어 소외받는 개인이 없이 ‘대동 사회’가 될 수 있기를.

그러자면 우선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가 두루 읽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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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이다 - 동서양 미술의 완전한 만남
손철주.이주은 지음 / 이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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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이다>는 남편이 먼저 읽고 내게 선물로 준 책이다. 말로는 나를 위해 샀다고 하면서 읽기는 본인이 먼저 읽었다. 속도가 무진장 빠른 사람이라 금새 읽었지만 나는 설거지 하고 나서 잠깐, 빨래하고 나서 잠깐, 화장실 가서 잠깐(이런, 실례! 하지만 가끔은 망설이기도 했다는 변명)이러다 보니 며칠 걸렸다. 쉽게 잠못들면서 그때나 좀 읽지, 한번 불끄고 누우면 꼴딱 밤을 샐 지언정 일어나지 못하는 내가 싫다. 흐~억! 

동서양의 그림을 두 사람이 주제에 맞게 골라 매개로 삼되 주거니 받거니 편지처럼 이야기가 이어진다. 정말이지, 글들을 잘 쓴다. 손철주의 글은 한 세상을 알고난 사람들한테 느껴지는 앎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동양화를 담당하여 그림을 통해 인간사의 다양한 감정을 읽어내는데, 특히 이 책이 좋은 것은 편지 형식이 갖는 내밀함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감정을 곧잘 나타내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괜히 끼었나 싶다가도 그걸 훔쳐보는 것이 또한 재미나다.  

연배가 아래인 이주은은 서양의 그림을 담당했는데, 곧잘 영화이야기를 들여와 예술과 인간사의 넘나듦의 폭을 넓혀준다.  

나는 그림이 낯설다. 어쩌다 사람들한테 묻어서 미술관에 가면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그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지 몰라 늘 당혹스럽다. 뭘 느껴야 하는지, 뭘 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낑낑대다 보면 허리만 아프고 한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들을 훔쳐보며 몰래 그 그림을 다시 보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도 여전히 그림은 내게 너무 먼 당신이다. 급이 달라 사랑할 수조차 없는 그런 사람 같은. 그래서 슬프다. 한때는 내 문화적 토양이 척박해서 그건 고급이야, 난 순대국에 소주체질이거든 위로도 해보았지만 그때 뿐이다.  

그래서 그림 이야기를 사실 나는 좀 좋아한다. 느끼는 것을 모른다면 누가 가르쳐주는 대로 받아들여보기라도 하리라. 그러다 보니 글쓰는 이가 일러주는 대로 어떨때는 그 그림이 내게 살짝 미소를 건네기도 한다. 물론 책을 덮으면 그걸로 싹 끝나는 인연이다.  

무엇보다 이 그림 이야기가 좋은 것은 그림에서 삶, 즉 그리움, 유혹, 성공과 좌절, 나이, 행복, 일탈, 취미와 취향, 노는 남자와 여자, 어머니, 엄마까지 다루고 있어서 특별한 감식안을 가져야하는 것에서 조금 자유롭다. 그럼에도 서양의 그림에는 기본적을 알고 있어야 하는 상징 혹은 관습 같은 것이 있어서 설명이 없다면 그저 보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부러운 것보다, 혹은 이토록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부러운 것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날 정도로 부러운 것은 두 사람의 관계였다.  후배의 눈웃음을 사랑하는 선배의 마음, 그 선배를 한없는 존경으로 따르는 후배의 모습이 또 한장의 그림이었다.  

내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책도, 그림도, 시도 아니었다. 나는 책같은 사람, 그림같은 사람, 시같은 사람을 기다렸던 것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을 알기에 늘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일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림을 눈여겨 보듯 사람을 눈여겨 보는 일, 나는 그게 어렵다. 나를 눈여겨 보는 일 조차 어렵다. 그래서 나는 늘 한자쯤 땅위에 떠다니듯 헛헛하고 휘청거렸다고 생각한다.  

그림처럼 좀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김장 이야기를 주고 받든, 아이들이 어제 끝낸 야생화 이름 맞추기를 두고 뒷담화를 하든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 내게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지 오래되었다.  

<다 그림이다>는 재밌기도 하지만 부럽기도 한 몇 안되는 책이다. 그림을 볼 줄 알아서 부럽고 그림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서 부럽다,  

내 인생은 언제까지 부러워하고 질투만 할 것인가. 멈춘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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