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섬 고양이 창비아동문고 294
김중미 지음, 이윤엽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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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기 직전까지 몰린 노숙자 최 씨, 두 번이나 버림 받은 수민이, 이주 노동자의 딸로 남의 집에 얹혀사는 미나, 자식이 있으나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던 할머니의 삶은 인간답지 않다. 한 때 인간과 함께 살다 이제 길고양이나 들개가 된 삶도 동물답지 않다. 인간다움과 동물다움을 잃어버린 종족들이 서로가 서로의 희망이 되고 삶의 근거가 되어 얽혀 사는 것의 가능성을 도모하는 김중미 작품들의 선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큰 이견이 있을 수 없고 그래서 독자가 거들거나 빼고 다른 말을 보탤 여지도 없다. 네 편의 작품이 개별성을 획득했다는 것도 판단하기보다 경험하는 것으로 독서의 방향을 이끈다. 이것은 자칫 주입받는 것 같은 혐의가 있지만 그게 틀린 말이 아니기에 마땅히 거부할 근거도 희박하다.

이번 작품집에는 사회적 약자와 그보다 더 취약한 동물의 연대’(박숙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의지가 하나의 공식처럼 들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의 네 번 정도 비슷한 경험을 반복하면서 작가의 주장에 동의하고 강화하면서 길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당연하고 옳은 방향이므로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역시 고양이와 개가 화자가 되어 말할 때가 훨씬 역동적이며 설득력이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동물의 말을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인간이 생각하고 듣고 싶은 말로 동물의 언어를 번역하는 것이지만 아무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김중미가 그렇다면 정말 그런 말로 들을 수 있다.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김중미는 로드킬 당하는 동물들의 최후에 머뭇거림이 없고 키우던 개를 버리는 인간들에 대해서도 일말의 인간적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그가 악한을 그리거나 나쁜 상황을 이야기할 때 훨씬 더 실감난다는 건 그릇된 인간 행태에 대한 그의 차가운 분노 때문이 아닐까.

상대적으로 수민이나 최 씨, 미나의 말들은 교과서 문장처럼 지나치게 정확하다. 그들의 선의의 말들이 불의의 말들에 맞서지 못 하니 품은 말의 힘이 기운을 돋우지 못하는 거 아닐까.

다만 동물과 사회적 약자 혹은 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마치 정답이 정해진 것 같은 상황에서 다시 또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어떤 상상이 가능할까에 대한 피로감이 든다는 것도 사실이다. 또 다른 고양이, 개에 대한 얘기를 한다면 김중미는 이것과 다른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인류는 식용에서 반려의 관계가 될 만큼 질적인 인식의 변화를 겪고 있다. 인식의 변화가 인간 보편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는 지점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아직은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소수라고 한다면 동물 이야기는 당분간 더 유효할 수도 있다. 이게 인간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여부와 함께 고민되어야 할 지점이겠지만 말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그린 작품들에 대해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 둘의 관계가 수평적이라기보다 호혜적 관계가 주는 편리함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함께 살아야하고 그들을 돕는 게 당연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하기 쉽고 동의할 수밖에 없다. 동물이 잠재적 테러 용의자로 상상되지는 않으니까.

사회적 약자와 그보다 더 취약한 약자가 있고 그들이 잠재적 테러 용의자로 무관용과 무자비로 분류되고 거부당하는 난민이라면 문제는 몹시 어려워진다.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옳지 않을까.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반복, 강화하여 설득하는 데 어렴풋 성공했듯이 난민(을 비롯한 약자)에 대해서도 동의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가능성들.

동물이든 난민이든 타자로서 그들은 우리의 과잉과 결여를 알게 하는 지침들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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