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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켰을까? ㅣ 혁명 시리즈
칼렙 에버레트 지음, 김수진 옮김 / 동아엠앤비 / 2021년 6월
평점 :
우리 한국인들은 워낙 어려서부터 열성적인 교육을 받는 환경(부모님, 학교, 각종 사교육...)에서 자라나서인지 숫자가 얼마나 추상적(p177)이고 고차원적 개념인지 실감을 못합니다. 에디슨이 어렸을 때 헷갈렸다던 빵 2개의 2와, 사람 눈 개수의 2, 하늘을 나는 참새 두 마리의 2 등으로부터 공통의 개념을 추출할 수 있고부터 인류의 문명은 새로운 레벨을 향해 도약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책 p32에 인용되는 언어학자 하이케 비제 같은 분은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합니다.
1) 숫자는 본래 존재하는 관념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2) 숫자는 관념을 추론하기 위해 사용하는 게 아니다.
어떤 책이 정말로 균형 잡힌 관점을 전달하거나, 시간을 내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는 이런 구절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독후감 맨첫머리에 제가 쓴 내용은, 우리가 중학교 입학하면 받아들곤 하는수학 교과서 머리말에 보통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보편적 상식에 저 비제처럼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의견도 있고, 그런 의견들의 건설적인 대립 속에 새로운 관념이 싹트고 정설이 태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자는 비제의 의견에 반대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정론에 더 찬동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쓰고 있습니다.
요즘은 융합, 통섭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책의 가장 뛰어난 점은, p35에도 나오듯 인류학, 언어학, 심리학을 두루 원용하며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니 이 책의 진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학 자체보다 수학을 뒷받침하는 철학과 수학관에 조금은 기초 소양이 있는 독자라야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책을 즐겨 읽어 온 독자라면, 고고학, 인류학적 논거를 널리 자유자재로 원용하는 저자의 필치에 다소 놀랄 수 있습니다만 차분히 읽어 가다 보면 "그래, 이런 시도가 필요했었는데 여태 없었어" 정도의 느낌이 들 것입니다. 수학 안에서만 수학을 논하지 말고, 그 밖에서도 근거를 끌어올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동아시아인은 한자를 널리 쓰고, 한자의 용법인 육서 중 하나는 지사입니다. 하나, 둘, 셋 같은 숫자를 일상에서 고유한 문자로 기록하는 건 인류 문명의 아주 오래된 전통 중 하나죠. 이 책의 2장에서는 그런 기수법의 역사를, 정말 광범위한 전거를 통해 정리합니다. 대중서 중 이런 시도를 하는 책은 적어도 저 개인적으로는 그리 자주 접하지 못했습니다.
"수량을 10 단위로 세는 걸 우리가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은 아니다(p59)." 그래서 우리는 무려 중1때 십진법이 아닌 기수법도 배웁니다. 오진법, 이진법... 사실 중학생에게 가르치기에는 (아주 솜씨 좋은 선생님이 있다면 모를까) n진법이란 결코 쉬운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한 기계적 테크닉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큰 수를 세기 위해, 또 계산하기 위해 진법 같은 걸 고안해 내었다니 인류의 지혜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 걸 일상에 도입 않고 어떻게 일상이 가능했을까를 생각하면 그저 아찔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중학생 때 어느 원주민 부족의 수 체계가 "하나, 둘, 많다"로 이뤄졌다는 지식을 접한 적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이런 생각은 특정 종족에 대한 편견을 부른다는 이유 때문에 꺼려지기도 합니다. 이 책 저자는 p73에 자신이 직접 연구하여 정리한 카리티아나 수 용어를 제시합니다. 수의 이름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면 11은 "우리의 발가락 한 개를 가져라"입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을 배웁니다. 그 유명한 연설문의 첫 시작은 four score and seven...인데요. 여기서 20을 한 묶음으로 여기는 수사가 score임도 배웁니다. 이 책 p81에서 구태여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십진법의 사용이 생래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자명하다거나 타당한 근거를 가진 게 아님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사실 링컨의 시대에도 무슨 score 등의 비 십진법 사용이 일반적이지는 (당연히) 않았겠죠. 연설문에서나 쓰이는 문어투였을 뿐입니다. 아마 우리 세대도, 대략 이십 년 정도 지나면 사흘, 나흘 하는 말들이 우리말 퀴즈대회 정도에서나 나오는 사어(死語)가 될지도 모릅니다.
사실 하나, 둘, 셋, 하는 구어 체계와, 일, 이, 삼, 하는 보다 문어적 체계가 왜 따로 분화했는지는(상당수의 언어에서 그렇죠)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죠. 이 책에서 논하는 가장 흥미로운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히 두 개의 체계가 병존한다 정도가 아니라(그래야 할 필연적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는 생활의 편의를 위해 그저 쓰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산과 특별한 기억 보존을 위해 감성을 배제하고 기술적 수단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문법적 수가 전 세계 언어에서 대부분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였다.(p122)"
그렇다면, 만약 이런 수를 나타내는 단어가 모조리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부터가 이 책의 가장 흥미진진한 논의의 시작인 셈입니다. 어떤 부족은 "숫자 없이 사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고 오래 전에 결단을 내렸는지 아예 관련 어휘가 없다고 합니다. 또 책에서는 귀가 안 들리는 분들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저자가 p156에서 내리는 잠정 결론은 "숫자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타고난 모든 능력을 완벽하게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입니다.
다음에는 (수에 대한) 영아 인지 개념이 나옵니다. 아무래도 이 영역은 사회적 환경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고 저자도 (주류 학설을 따라) 그런 의견입니다. 저자는 이 논의 과정을 통해, (한때 영아였던) 우리들이 지금처럼 수를 정밀한 방식으로 인지하는 건 철저히 누적적이고 단계적이며 또 귀납적임을 증명합니다. "이러한 전통과 기술은 궁극적으로 숫자단어에 의존한다(p181)." 여기서도 저자는 언어 속에 포섭된 숫자 단어가 그 개념의 인지 기능에 절대적 구실을 한다는 입장이죠.
7장에는 동물들이 생각하는 수량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되는데 동물인지전문가라며 박준구라는 분(의 공동연구)이 잠시 소개됩니다. 이분은 유매스 교수로 재직중이고 한국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진 자랑스러운 분이죠. 주전공은 뉴로사이언스입니다. p254에는 "기호 혁신의 중핵에 선 숫자"라는 성격 규정이 등장합니다. 책을 통해 전개되는 저자의 논지로 보아 필연적인 결론입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죠. 저 명언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저자 역시 "사람이 숫자를 만들었고, 숫자가 (현재까지도) 사람(의 정신)을 만들고 있다"란 말로 책을 마무리짓습니다. 여태 인류(중 최고의 두뇌)가 수를 만들고 발전시켜 온 과정도 놀랍지만, 그 과정에 대해 이처럼 인지적, 반성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능력 또한 경이롭다고 생각합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된 서평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