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영어
조정현 지음 / PUB.365(삼육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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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재는 튼튼한 재질의 파일폴더 안에, 레벨1, 레벨2, 레벨 3 교재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케이스 표지에는 "온 국민의 아침을 깨워주는 영어 라디오 프로그램 굿모닝 팝스"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장수 컨텐츠는 예전부터 전국 학원가 영어 일타강사분들만 진행하던 자랑스러운 내력이 있죠. 영어는 학문이 아니라(물론 학문이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입으로부터 술술 나오는, 하나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3단계는 또 3단계라고 해도, 3분간 하루 3번 집중만으로 과연 영어가 내 체질 안에 들어올까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역시 에센스만 뽑아내는 일타강사의 감각은 남다릅니다. 월간 굿모닝 팝스 공식 교재와는 또 별개로, 조정현 선생님의 이 책은 초심자를 위한 영어 공부 교재로 하나의 마스터피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교재는 학습지 포맷입니다. 외곽의 큰 파일폴더뿐 아니라, 레벨1, 2, 3에 각각 따로 포장지가 둘러져서 학습자입장에서 보관이 편하게끔 배려되었습니다. 시중에 나오는 다른 "학습지" 형태의 교재들도 이런 점은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다른 데서 나온 학습지들도 파일폴더는 예쁘게 제작하지만, 또 각 교재들의 성격에 따라 표지 색을 달리 넣어 그 구분을 쉽게 하지만, 이 책처럼 레벨(또는 영역)별로 다시 포장지를 두르지는 않습니다. 레벨마다 각각 세 권씩의 학습지가 제공되는데 사실 세 권이면 구태여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아무튼 레벨별로 세 권 분책 형식이라 초심자 입장에서는 더욱 부담이 줄어듭니다. 

요즘은 네o버에서 블로깅을 하는 중에도, 유저의 관심사를 알고리즘이 추측하여 타 블로거의 컨텐츠를 추천해 줍니다. 저 같은 경우 이런저런 영어 구어 표현을 정리하여 꾸준히 업로드하는 여러 크리에이터들의 글들을 추천받는데, 기존 출판 교재들에서 자주 보기 힘든 표현들이 많아 흥미롭게 읽곤 합니다. 요즘 영어 공부는 꼭 공인시험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 넷상에서건 외국에서건 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이런저런 체험과 추억을 쌓는 게 메인인 것 같습니다. 이 교재도 그런 최신 트렌드를 반영해서인지 그런 내용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레벨1의 제1권 p29를 보면 "아오, 답답해"를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가 나옵니다. 이런 간단한 말이 그때그때 바로바로 나와야, 영어가 그 학습자의 진짜 실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페이지 하단을 보면, [θ]과 [ð]의 차이에 대해 자세히 가르칩니다. 중학교 영어 시간에 가장 먼저 배우는 발음 중 하나인데, 우리 한국어에는 없는 발음이라서 어린 학생들(또는 초심자들)에게는 더욱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몇 번 듣다 보면, 대략 어떻게 혀를 대고 놀려야 저런 소리가 날지 감이 옵니다. 음성학상으로는 dental fricative, 즉 치(齒) 마찰음(磨擦音)들이죠. 이 교재에는 문장, 단어들의 원어민 발음을 담은 mp3로 연결되는 QR코드도 찍혀 있으므로 학습자가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또 눈여겨 본 건, 페이지 최하단에 저자가 적어 둔 설명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탑건, 매버릭>이라는 영화가 개봉하여 큰 관심을 모았는데, 이 작품은 1989년작 <탑건>의 수십 년 후 사연을 다뤄서 올드팬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 작품의 주제가 <Take my breath away>는 벌린(Berlin. 독일의 수도 베를린과 발음이 같습니다)이 불렀는데, 이 곡은 영화관에서 돌비 사운드로 들어야 제맛이 납니다. 원래도 좋은 곡이지만, 저런 데서 그 웅장한 전주와 함께 들으면 정신이 잠시 다른 경계로 인도받는 듯한 느낌이 들죠. 가사 중 브레쓰어웨이🎵라는 파트는 연음이 되어 "브레써웨이"처럼 들리는데, 이때 voceless(유성음) dental fricative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기에 저자께서 특히 강조한 게 아닐까 저는 짐작합니다. 

영어에 그간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던 초보들에게 이 책은 그 허들을 낮춰 주는, 실용적인 도움을 주는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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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패턴 독일어 회화 - 내 인생 첫 번째 독일어 내 인생 첫 번째 시리즈
이로사 지음 / PUB.365(삼육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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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들은 대체로 영어를 잘하는 편입니다. 회사에서 업무상 독일 현지인들과 통화를 해 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발음은 약간 어색해도 문형이 정확하고 격식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영어를 구사합니다. 따라서 독일인을 상대하기 위해 반드시 독일어를 배워야 할 이유는 요즘 크지 않긴 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그러나 음악, 법학 공부 등을 위해 현지 유학을 해야 한다거나, 그 외 상사(商事) 관련 장기 체류가 필요하다거나, 국제 결혼 등을 염두에 둔 분들은 이 언어를 공부해야 합니다. 단기간에 회화 능력을 갖추려면, 실생활에 자주 쓰이고 유용도가 높은 표현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게 가성비 좋은 선택이겠습니다. 저는 작년(2024) 10월, 지금 이 책의 저자인 이로사 선생님이 쓴 ZD 시험 B1 등급 대비서를 리뷰한 적 있습니다. 학문적 정확성도 잘 유지되고, 초심자들을 배려한 쉬운 설명이 돋보이는 건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내첫(=내 인생 첫번째)" 시리즈 중에서는, 제가 작년 11월에 러시아어(벨랴코프 일리야 著) 120패턴 교재를 리뷰한 적 있으니 그 글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옷이나 신발을 살 때 "다른 사이즈 있나요?"라고 물을 경우는 아주 많겠습니다. 이 교재에는 모두 50패턴의 회화(의 상황)가 나오는데, p112의 제18번 패턴을 보면 바로 그 문장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 코트가 다른 색깔로 있나요?"라면 영어로는 "Does it(=that coat) come in another color?"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걸 독일어로는 Haben Sie den Mantel in einer anderen Farbe?라고 합니다. Farbe가 색깔(color)이라는 뜻이며, 독일어는 명사가 모두 대문자로 시작하니(꼭 고유명사가 아니라도) 모양이 저렇습니다. 또 영어나 독일어나 "~색 옷"이라고 할 때에는 전치사 in을 쓰며, 영어도 흰색 옷, 푸른색 옷이라고 할 때에는 in white, in blue라고 합니다.

p113을 보면 "이 스웨터 (내) 마음에 들어요."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스웨터는 한국인들은 요즘 니트라고 많이들 부르죠. 이걸 영어로는 pullover라고도 하는데, 아까 말했듯이 독일인들은 영어를 잘할 뿐 아니라 영단어를 (우리 한국인들처럼) 일상에 들여와 자기네 말처럼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 p113에도 der Pullover라고, 남성명사로 정관사까지 붙여 저렇게 자국어처럼 쓰는 것입니다. v도 독일식으로 [f]으로 발음할 필요는 없고, 그냥 영어처럼 유성음 [v]로 소리내면 되겠습니다. 이 페이지 마지막 줄 맨앞 문장은 tja로 시작하는데, 독일인들과 실제 대화를 해 본 분들은 알겠지만 일종의 감탄사로서, 응, 자, 또는 헐 같은 뜻으로 대화에서 자주 씁니다. 이렇게 뭔가 구어체 분위기가 실감나는 예문이라서 더 좋았습니다. 

p128을 보면 21번 패턴에서 je-desto 비교급 구문이 나옵니다. 고교에서 독일어를 선택했다면 2학년 1학기 말쯤에 배웠겠습니다(저는 그랬습니다). 책에서는 "Je mehr du lernst, desto besser wird dein Deutsch."라는 예문이 나옵니다. 뜻은 "더 많이 공부할수록 독일어(실력)는 더 나아진다."인데, 잘 보면 앞부분은 (주어)+(동사)로서 동사가 맨뒤에 위치하여 후치(後置)이고, 뒷부분은 (보어)+(동사)+(주어)로서 도치(到置)입니다. 저자 이로사쌤은 p128 최하단에 이 점을 꼼꼼하게 밝혀 두었는데, 보통 회화책에서는 이런 문법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에, 저는 이런 점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p158에서는 상대방에게 공손하게 들릴 수 있는 말투로 접속법 2식을 배웁니다. 접속법 2식 자체가 공손한 말투라는 게 아니라, 이게 영어의 가정법과 비슷하여, 상대가 만약 나의 이러이러한 행동을 허락해 주신다면... 같은 "가정"이 은근 들어간 말투라서, 결과적으로 그게 공손한 말투가 되는 거죠(앞의 p121도 참조). 아무튼 이 접속법 2식에서 동사는 그 모습이 제법 크게 변하는데, 책에도 나오듯이 sein 동사는 wäre(1인칭 단수)처럼 모양이 심히 달라집니다(직설법 과거는 1인칭 단수의 경우 war). 책에서 간접화법이라고 한 건 접속법 1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저는 그렇게 생각되네요). p236에는 희망을 표현하는 용법의 접속법 2식이 설명됩니다. "반카드"라는 건 Bahncard인데, 독일에 가 본 분들은 알겠지만 (이 책의 설명대로) 기차 여행시 필수품입니다. Bahn은 영어의 vehicle, car와 같은데, 사실 독일어에도 Karte라는 여성명사가 있습니다만 이처럼 영어 card를 끌어댄 합성어가 쓰이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 교재는 이처럼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 실용적인 정보까지를 제공해 주는 점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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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괴물
김정용 지음 / 델피노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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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걸려 다 읽고 나서 참으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처럼 하루하루를 전투하듯 살아가는 걸까요? 니체는 일찍이 말한 적 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고 만다." 생(生)이란, 나를 먹어치우려는 천적, 나에게 적대적인 환경과의 지속적인 투쟁으로 채워집니다. 나에게 먹히는 피식자 역시, 제 생명을 걸고 필사적인 도주를 행하니 나의 일격을 피하는 순간 그가 바로 승자입니다. 약한 자는 약하게 태어난 대로 강자를 피하며 살아갈 방도가 있으니 세상이라는 격전장에서 누가 최후의 승자로 남을지는 아무도 모르나, 그 과정에서 상처만 가득 입은 채 내가 괴물로 남는다면 이는 너무도 슬픈 일 아닐지요.

(*문충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어려서부터 특별한 머리를 타고난 소년 서이준. 하지만 그의 재능이 마냥 축복만은 아니었습니다. "곧 모두의 날이 옵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날은 도둑처럼 온다. 준비 없이 그날을 맞는 자는 새신랑 앞에서 전혀 단장을 못했던 신부처럼 너무도 부끄러워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형사 민성후는 모든 게 비틀어진 공간에서 중력과 에너지의 이질적 파동을 느끼듯, 이 천재소년의 괴이한 진술을 듣습니다. "죽은 사람은 슬프지 않잖아요. 왜 다른 사람들이 슬퍼하는 거죠?" 소년은 하나만 알고 둘을 알지 못합니다. 조문객들이란, 뭇 사람들이란, 원래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울 뿐인 존재들입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조.효.익(p108)" 일부러 또박또박 끊어 읽는 이명도의 속셈이랄까 심리는 우리 독자들도 어느 정도는 눈치챌 수 있을 듯합니다. 회색 눈동자 증후군(p59, p228)이라고 들어 본 적 있을까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눈동자의 색이 변하는 현상인데, 다미앵이라는 광인이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를 암살하려 들었다가 잡혀 거열형에 처해진 적 있었습니다. 집행 중 그의 머리는 하얀 색으로 변했다고도 하죠. 사람의 신체는 환경의 극단적 변화를 겪으며 어떤 기이한 변화를 겪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돌연변이도, 진화의 급작스러운 발생도 어쩌면 비슷한 기제를 통하는지 모릅니다.

현해탄 건너 열도의 중심지 도쿄는 우리네 서울과 닮은 바도 많고, 갖은 음모와 탐욕이 판치는 현대 자본주의의 압축적 무대이기도 합니다. p174에서 민창진(민성후의 부. 현재 식물인간 상태)은 피를 말리는 긴장 상태에서 대체 무슨 운명이 그를 기다릴지 필사적으로 추론해 보지만 여전히 답은 오리무중입니다. 이케부쿠로[池袋]에서 구입한 선불폰이 그의 행적을 모호하게 가려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올리에라 호텔을 황급히 떠나, 저 멀리 후쿠시마의 대참변 뒤에 과연 어떤 사정이 숨어 있는지에 대해 생각만 해도 전율이 느껴지지만, 세상이 통째로 뒤집힐 만한 그 비밀은 누군가는 나서서 끝까지 지켜 내야만 합니다. 이치가 본래 그렇기 때문이죠.

권 실장(p232).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돌연한 사태의 진전에 대한 보고를 받고 격노한 모습을 보이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당신은 대체 무엇을 했냐고 질문 받는다면 그 입에서 어떤 변명이 나올까요? "자살로 위장한 타살(p252)!" 보통, 허탈한 블랙 유머로 "자살당했다"고도 하죠. 우리 주변에서는 이처럼 대체 무슨 곡절인지도 모른 채 여러 사람이 죽어나갑니다.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는 시국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이럴진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한 일상을 이어가며 천진난만하게 공터를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놓여야 하는 건지 눈물이 주루룩 터져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천재 서이준은 답을 알고 있을까요.

아, 민성후는 드디어 권총을 집습니다(p275). 일이 여기까지 왔는데, 지독한 놈인 줄은 알았지만 그 역시도 놈에게 쉬이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제 세상의 운명도 그의어깨가 지고 있는 셈, 건곤일척의 한판 싸움을 벌여야 할 때입니다. 방독면, 방독면. 세상에 그 어떤 독가스가 퍼져도 누군가는 나서서 사랑하는 사람과 죄 없는 영혼들을 구해 내야 합니다. 가능하면 그 과정에서 나도 내 자신으로 온전히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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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 세상의 모든 전략과 전술
임용한 지음, 손무 원작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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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 박사님은 국방TV에서 제작 방영했던 토전사 시리즈를 통해 큰 인기와 영향력을 얻은 분이며 사실 그 이전부터 전쟁사 관련 대중서 저술로 유명했던 분입니다. 최근 계엄령 사태에 대해서도 한 말씀을 남기기도 했는데, 지금도 YTN 등에서 틀어 주는 <전쟁과 사람> 몇몇 회차에 출연하여 허준 MC, 이세환 기자, 윤지연 아나운서 등과 함께 다시 좋은 컨텐츠를 만드시는 모습을 보면 시청자로서 반갑기도 합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손자병법>은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담겼기에 이천오백년이 지난 지금도 고전으로 존중됩니다. 임 박사님도 토전사 등에서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사건 이면의 독특한 사정이나 맥락을 잘 짚어 주기에, 해당 고전의 주해자로서 이보다 더 적격인 분이 없다 싶었습니다. 책을 받아보고 큰 기대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손자병법은 모두 13편으로 되었는데 임 박사님도 이 편제에 맞춰 내용을 이어갑니다. 역시 임 박사님답게 동서고금의 중요 전쟁사를 자유자재로 원용하며 이 오랜 동아시아 고전의 내용에 생생한 주해를 달며 원전의 볼륨을 훨씬 풍성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p122(제3편 謀攻 중) 같은 곳을 보면, "병력이 대단히 열세이면 전투를 피한다"는 구절에 대해, 저자는 이게 정말로 항전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나마 최선인 방법을 모색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같은 말이라 해도 수백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 의미라는 게 바뀌게 마련입니다. 또 워낙에 중국이란 나라가 땅이 넓다 보니, 이 전선에서 일이 잘 안 풀리면 다른 theater에서 재도전을 모색한다는 뜻도 관용적으로 품는다는 의견을 저자는 제시하는데, 임 박사님의 책들은 이런 독자적이고 살짝 변칙적이기도 한 해석의 독창성이 그 읽는 맛 중 하니입니다.

p123에서 저자는 분진합격(分進合擊)이라는 전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는 12세기 몽골 기병들이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택틱스라고 할 만한데, "여러 개의 여단으로 산개(散開)하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다 결정적 타깃 앞에서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적을 타격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격의 위력이란 이치상으로 누구라도 납득하고 상상할 만하지만, 몽골 군대의 특별한 성공 비법이 있었다면 그건 그들만이 실전에서 구현할 수 있었던 기동력 덕분일 것입니다. 또 저자는 십자군의 요새 운용법에 대해, 부족한 병력을 기술로 대신했다고 진단하는데, 크라크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가 <손자병법>의 "적은 분산, 아군은 집결" 원칙을 저 성채라는 구조물로 달성했다는 탁월한 분석이 있습니다.

"수비는 내게 남음이 있게 하고, 공격은 적이 부족함이 있게 하는 것이다(p181)." 임 박사는 이 구절을 두고, 손자병법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평가를 소개합니다. 이 구절은 제4편 형(形)에 나오는데 4편의 제목은 진형(陳形)이라고도 칭합니다. 바로 앞 페이지에서 저자는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 된 진주만 폭격에서, 왜 미군을 더 철저히 무력화할 수 있었던 유류저장고 파괴를 단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평소의 지론을 다시 전개합니다. 토전사 해당 에피소드를 시청한 이들에게는 익숙할 듯합니다. 이어 저자는 독소전으로 화제를 옮겨,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도 소련군 포로의 엄청난 숫자가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자유로운 기동에 큰 방해가 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기세(氣勢). 사람 사이의 싸움이라는 게 참 묘해서 분명 어느 한쪽의 역량이 상대방에 크게 못 미쳐도, 이 기세라는 것이 뜻밖의 국면에서 작용하기라도 하면, 마치 1526년의 파니파트 전투처럼, 명백한 언더독 바부르가 이브라힘 로디를 패퇴시킨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p238에서 이릉의 전투를 분석하며, 적의 기세에 휘둘리지 말고 나의 기세를 조절할 줄 알라는 문장으로 이 장의 취지를 요약합니다.

1차 대전 직전 독일 육군은 필승의 방책이라 할 슐리펜 작전을 마련해 두었으나, "지나치게 대담한 계획이었던 탓에 독일 참모본부의 심장이 나약해진 탓으로(p286)"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저자는 결론내립니다. 반대로 2차 대전 때에는 간이 부은 히틀러가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을 기다렸다는 듯 승인하여, 허를 찔린 프랑스 육군을 대파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기세" 라면 바로 이런 걸 두고 이름이겠는데, 요아힘 페스트 같은 이는 그저 "도박꾼의 행운"으로 평가절하하기도 했습니다. 

제11편 구지(九地)에는 박사님 말씀대로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용어들이 자주 쓰입니다. 사실 <손자병법>뿐 아니라 중국 고전 대부분이 이와 같습니다. 박사님은, 어렵게 파고들면 한도끝도없이 어려운 이 고전에 대해 최대한 쉽게, 또 박사님의 장기인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며 경쾌하게 해석해 줍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에는 위 무제(조조)가 주석을 달았고, 이제 인류의 간교한 지혜가 끝을 모르고 발달한 현황을 낱낱이 반영하여, 박식한 임 박사님이 고전에 이처럼이나 팔팔 뛰는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손자병법의 타이틀을 빌린 세계전쟁사로 읽어도 되겠으며,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책보다 더 실용적이고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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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인사이트 - 예술에서 배우는 삶의 가치
김영애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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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측적, 수치적, 정량적 접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와는 별개로 예술의 영역을 유보하고, 때로는 예술만의 심미적 기준과 기능을 더 우위에 놓는 것은, 예술을 통해서만 가능한 통찰, 카타르시스, 나아가 정신적 평온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1954년작 <십자가형>을 보면 4차원 초입방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의 십자가형을 묘사했는데, 이처럼 뛰어난 예술가들은 번거로운 계산, 검증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단 한 번에 진실에 도달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입니다. 이런 걸 두고 예술적 통찰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저자 김영애 이안아트컨설팅 대표의 이 책은 그 수많은 미술품 감상을 통해 추출한, 삶과 자연과 생리와 일상 여러 국면에 대한 수상록과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p45를 보면, "잠(sleep)"이라는 주제어에 대해, 수백 년 동안 천재들이 전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작품 속에 묘사한 바를, 매우 쉽고도 재미있게 풀어 줍니다. 그림이란, 손기술만 뛰어난 기술자가 번잡한 색깔과 선을 잔뜩 늘어놓은 게 아니라, 그 안에 자신만의 감정, 이야기를 담은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에 남은 화가, 조각가들은 그저 기술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우리 시대에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최초의 표현이 탁월해서 불멸의 명성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풍만한 여인들을 자주 그린 루벤스의 <헤라와...>는, 눈이 100개나 달린 아르고스가 헤라의 명을 받아 암소(이오)를 지키는데, 헤르메스의 음악에 속아 잠에 빠지고 소도 못 지키고 목숨까지 잃은 이야기를 담습니다. 저자는 이 이야기(p45)에서, 잠은 이처럼 인간에게 원초적인 공포를 부르는데, 죽음과 잠이 매우 닮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으나 H J 드레이퍼가 20세기 초에 그린 <율리시즈(오뒤세우스)와 사이렌들>도, 바다의 요정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정신이 홀린 선원들의 상태를 일종의 "잠", 혹은 죽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중에서 (도판은 없으나) 저자께서 (영어 제목까지) 언급하신 고야의 그 작품을 제가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는데, 시대를 훨씬 앞서간 초현실주의 화풍이 놀라웠습니다.

p84에서 저자는 마르크 샤갈에 대해 말하는데, 샤갈뿐 아니라 유명한 작가, 예술가 중 많은 이들이, 대표님 평가처럼 우리가 이미 세월의 검증을 거쳐 어느 정도 정착된 평가로 접하는 것과, 그 사람들 당대에 무슨 평가를 받았는지와는 생각 외로 갭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1975년생이고, 일종의 보트피플 출신 예술가인, 덴마크 국적의 자인 보에 대해서도, 저자는 이른바 고향에서 추방당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다는 점에서 샤갈과 닮았다고 평합니다. 책에 나오듯이 베트남 글자(쯔놈)으로는 Danh Vō(자인 보. 보가 성씨입니다)라 쓰며, 한자로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1975년생이니 한자 이름은 아예 갖지 않았을 수 있죠.

p144에서 저자는 아마 자신의 최근 기획과도 관련이 있었을, 런던 서펜타인 박물관에 대해 이야기를 꺼냅니다. 세즈터 게이터라는 흑인 남성 건축가를 저자는 책에서 언급하는데, 이름이 정말 어렵습니다. Theaster라는 저 이름을 디애즈터라고도 읽는가 봅니다. 여튼 구글에 찾아보니 유명하신 분인지 그에 대한 정보는 많으며, 50대 초반이지만 수염이 하얗게 세어 할아버지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은 시카고(미 일리노이 주) 출신이라고 하며, 이 책에서 시카고 코드가 또 있나 해서 이리저리 찾아 보니 p154에 시카고 미술관에서 개최한 반 고흐 관련 행사가 나오네요. 역시 저자가 기획자라서 그 눈에 보이는 바가 남들과 다르신가 봅니다.

p226에 보면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예술, 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픽셀에 대해 저자가 깊이 있게 성찰한 바가 나와서 독자로 하여금 깊은 성찰을 유도합니다. 컬러 도판도 많아서 이해가 더 쉬워지는 멋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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