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무쌍 황진
김동진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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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한국사의 여러 위기는 우리 후손들이 갚으려고 해도 결코 갚을 수도 없는 큰 은혜를 끼친 위대한 영웅들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게 거의 전부입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 책에도 이런 말이 나오지만, 7년 전쟁 임진왜란은 해전에서의 기적뿐 아니라 육전에서의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전과 덕분에 결국 적을 격퇴하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이 저렇지만, 황진 장군에 대해 보다 더 포커스를 맞추었을 뿐 "소설로 보는 임진왜란"이라 해도 될 만큼 조선과 왜 사이의 16세기말 7년 전쟁 전반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게 지어진 소설입니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근거를 실록, 징비록, 김학봉 문집 등 다양한 문헌에서 찾았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이라는 느낌보다 역사서를 차라리 읽는다는 생각이며, 다만 소설처럼 술술 잘 읽힌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물론 터무니없는, 도요토미라는 자의 제 주제를 모르는 탐욕 때문에 발발했지만, 왜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고 전략은 치밀했으며, 정말로 우리 민족이 큰일날뻔한 위기였다는 점 소설을 읽고 다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소설 중에도 나오지만 백 년 가까이 저들끼리 목숨 걸고 싸운 전국시대를 거쳤기에 "견고한 성을 짓고 공방전을 벌이길 밥 먹듯이 하였으며" 수백 년 동안 북방의 오랑캐와 남쪽의 도적들(물론 다 민간인들이죠)이 일으키는 변방의 난리만 수시로 격퇴했을 뿐 거의 태평성대를 누린 우리 민족이 처음에 얼마나 당황했을지 눈에 선하게 그러졌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목과 주인공이 황진 장군인데도 임란 주요 국면 전반을 다 개관할 수 있는 소설인데 그 이유는 자칭 관백 히데요시를 보러 조선에서 파견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의 사신 행렬에서부터 이미 황진 장군이 젊은 무관 신분으로 참여(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황진 장군은 의외로 탄탄한 실력을 갖춘 채 한반도를 향한 야욕을 드러내던 왜의 실체를 보고 경악하고선 그들의 장점을 현지에서 최대한 파악하고 실전(미래에 일어날 게 거의 확실)에 대비하려던 자세를 보입니다. 실제로 군인으로서 전략적 두뇌도 뛰어났고 개인적 무용도 출중했던 분이었기에, 이분이 사신단을 수행했던 건 겨레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백 년 전부터 양다리를 걸치고 간교한 술책을 벌이던 쓰시마 무리의 행각, 그나마 전쟁을 회피하려 했자만 오만무례하고 비뚤어진 세계관을 가졌던 고니시(소 요시토시의 장인) 등의 모습이 잘 그려졌더군요. 또 소설 전반부에서 주목해야 할 건 부사(副使)였던 김성일의 태도와 인품입니다. 물론 그는 수길에 대한 평가절하를 통해 전쟁 대비에 차질을 빚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신으로서의 행차 내내 꼿꼿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고 본인뿐 아니라 당대 사대부 모두가 공유하던 철학을 현지에서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나마 사신단의 체면을 지킨 면도 있었고 이 소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황진은 젊은 무관으로서 때로는 그를 존경하고 때로는 부딪히는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다 같으나 그 실천론에서 차이를 보였던 점이 흥미롭습니다. 


정사 황윤길 역시 현실을 바로 파악하여 "예(禮)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귀국하여 전쟁에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현명한 면모를 보입니다. 독자로서 다만 건강을 좀 잘 간수하시지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했습니다(건강은 상당한 경우 본인 관리 의지의 문제이니 말입니다). 이처럼 서인은 시대착오적 화이관에 찌든 무리들이기만 했던 게 아닙니다. 조선 후기 북학파 등도 다 서인 혹은 특히 노론에 속했던 인사들입니다. 오히려 학봉 김성일이 동인 소속이었고 이 소설에서도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잘 묘사되죠. 


전쟁 발발 후 특히 5만 명의 근왕병이 모여 불과 2천명의 왜군에 패퇴한 용인 전투는 지금도 큰 수치로 꼽힙니다. 다만 당시 왜군이 보여 준 놀라운 전술과 무기 등을 감안하면, 그저 종래의 왜군 무리겠거니 하고 몰려온 근왕병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이해는 됩니다. 5만 명이 모였다는 자체가 일단 어디겠습니까. 전쟁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백 년 가까이 내전에만 몰두하여 살아남은 승자들하고 게임이 안 되는 게 당연하죠. 칠 년 동안 상대와 싸우며 적의 장점을 배워 끝내 그들을 몰아낸 점이 대단하며 마치 2차 대전 당시 초기에 궤멸적 피해를 입고도 끝내 상대 전술을 그대로 흡수하여 격퇴한 소련군의 업적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권율 장군이 꽤 자주 나오는데 황진 장군이 이 노장, 본래는 그저 문관이었던 그를 잘 보좌한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권율 본인은 나이도 많고 전쟁 경험이 없었으나, 문관으로서 고루한 우월 의식만 내세우지 않고 황진 장군 같은 무(武)의 인재를 잘 알아보고 적시적소에 그를 기용했다는 자체가 벌써 불멸의 업적입니다. 그 외 그만의 탁월한 전과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후손들이 다 잘 알고 기리는 바입니다. 


일본에는 오랜 동안 불교 문화가 정착했기에 승려 출신으로 무장이 된 이갸 많습니다. 무장까지는 아니었으나 왜군에 소속되어 많은 일을 한 현소(겐소)도 우리 나라에서 유명하고, 이 소설에는 무장으로 안코쿠지가 나오는데 승려 출신이라서인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는 면이 자주 묘사됩니다. 훌륭한 적에 대해 최소한의 리스펙트를 바치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군도 "곡예처럼 칼을 쓰는 사무라이"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으며 이 때문에 도쿄 대공습이나 원폭 투하 등 다소 무리한 수를 두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러나 목책을 쌓고 지형지물의 유리한 점을 잘 이용하는 등 전술의 디테일에 있어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 내어 이런 가공할 적의 무력에 대항하는 모습이 놀랍습니다(실제 역사이기도 하고요). 이런 점은, 섣불리 상대를 야잡아보고 쳐들어온 저들 왜적이 결코 예상 못했을 것입니다. 위에서 학봉 김성일도 "조총이 뭐가 무섭냐? 우리에게는 화포가 있다"고 했는데 이런 기개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총은 개인 화기이며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했던 반면 화포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조총을 두고 명중률이 나쁘다며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화포도 마찬가지며 왜군이 이 단점을 알아 체계적으로 전술적 극복을 이미 이뤘다는 게 중요합니다. 


한 개인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싶게 황진 장군은 웅치, 이치, 사평, 죽주 등 거의 모든 주요 theater에서 맹활약합니다. 책에는 "황진 장군의 임진왜란"이란 표현도 나옵니다. 과연 그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충무공께서 노량에서 사거하신 것처럼 황 장군도 진주성 싸움에서 그 위대한 생애를 마감합니다. 우리는 종종 "진주성 싸움에서 우리가 혹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면?" 같은 가정을 하는데 이게 사실이었다면 더 이른 시기에 덜 피해를 입고 간악한 왜의 무리를 축출했을 것입니다. 작가는 "진주성 싸움에서 만약 황진이 전사하지 않았더라면?"으로 질문을 확장합니다. 왜는 김시민 장군 같은 이들만을 이 힘들었던(저네들 입장에서) 싸움의 영웅으로 기억하지만 우리는 황진 장군의 놀라운 행적까지 후손으로서 기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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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 개정판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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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교수님의 작품을 읽으면서 언제나 개인적으로 느끼는 점은, 동반자(간혹은 상간자. 내연녀[남]), 부모님, 와이프, 혹은 남편, 친구 등에 대해 종전과는 정반대의 느낌으로 성찰하는, 어떤 계기가 작품 중에서 제공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서두에 대뜸 말테가 등장하여 조금은 놀랐습니다. 말테는 물론 라이너마리아 릴케의 책 <말테의 수기>에서의 그 화자입니다. 


이 소설에서의 "아들"도 뭔가 익숙하면서도 약간은 능청맞고 뭔가는 좀 부족해 보이기도 하는 그런 인물입니다. 사실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진짜 부족한 사람이야 당연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부모님 앞에서는, 번듯한 회사를 다니거나, 뭐 남한테 딱히 꿀릴 것 없는 학교를 졸업했다거나, 어지간히 벌이를 함에도 불구하고 뭔가는 떳떳지 못하고 부족한 느낌을 가집니다. 이 소설 중에서도 나는 딱히 죄 지은 바(?)도 없으면서 "스트레스 많을 때에나 걸린다던 결핵을 우리 아들이 걸리다니...:"라며 안타까워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내가 무슨 공부를 그리 심하게 했다고..."라며 도리어 자책 중입니다. 스트레스 받은 것도 딱히 없으면서 결핵에나 걸리고, 어머니께 오해를 부른 것 자체가 큰 불효이자 떳떳지 못한 아들 점수 1점 더 벌기나 한 것처럼 말이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처럼 꼬이고 꼬인 인물들의 난해한 의식까지는 아니라도, 이승우 작가님 작품 속 역시 별의별 생각으로 다 마음 속이 복잡한 이들이 나와 그 내면을 (원튼 원치 않든 간에) 우리 독자들에게 (준비가 되었든 안 되었든) 들려 줍니다. 아니 누가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지금 그런 얘기는 왜 하시는 건가요 라고 물어 보고 싶지만 틈도 안 주고 이야기 시작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이승우 작가님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내면의 독백(이라기보다 누구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혼잣말 아닌 혼잣말)이란... 저 릴케라든가 울프의 주인공들처럼 현학적이거나 배배 꼬이지 않은... 카프카의 주인공들처럼 좀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싶은 불안의 지점에도 머무르지 않는, 그저 동네 아저씨 수준의 담화인데 다만 쓸데없이 섬세해지는 그런 내러티브입니다. 이러니 듣고 있다 보면 우습기도 하고(우스운 게 가장 첫째 반응입니다) 다음으로는 어 이거 혹시 내 이야기인가 하고 은근 공감의 지점을 찾거나 뭔가 뜨끔해지는 순서라고나 할지. 여튼 섬세하고 집요하다가 이지적으로 들어가면서도 별 부담이 없고 친근하다는 점, 그러면서도 억지스럽게 감정의 폭발이나 강요된 감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솔직하면서 온건한 세계라고나 하겠습니다. 


p169에서 김중사가 그리 나올 때, 우리 주인공이 (사실 피지컬로는 해 볼 만할 텐데도) 혹 저 (예비된) 폭력에 반항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독자가 있을까요? 언제나처럼 이 유니버스의 주인공은 무기력 그 자체입니다. "나는 어차피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으므로 호주머니에서 순순히 전화기를 꺼내 주었다." 이 문장은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주인공이 그처럼 쉽게 포기하리라는 점 어느 독자라도 예측할 수 있기에 이 문장은 의미상 잉여입니다. 기술적으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아버지들은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한다. 그러나 아들들은 그렇지 않다. 아들들은 그저 아버지일 뿐인 존재를 찾을 뿐이다."(p177)


만약 이 문장이 릴케라든가 카프카의 작품 중에 나왔다면, 평론가나 대학원생들은 그 의미를 궁구하기 위해 1t분량에 이르는 논문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우 교수의 작품 중에서 저런 문장은 어떤 심오한 사색을 부르기보다, "그건 그려" 같은, 보편적이고 진입 장벽 낮고 뜨듯미지근한 반응을 부를 뿐입니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떤 심각한 의미의 탐구 이전에 한국인이면 누구나 공감할 듯한, 어떤 최불암씨의 연기 같은 푸근한 지점을 이미 만들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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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미로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이야기 2
천세진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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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모든 것은 이야기를 갖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물, 사람 등에 생명을 부여하는 건 이야기이며, 무엇이 살아 있는지 아닌지는 이야기로 확인이 가능하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이상, 누가 감히 그것이 죽었다고 말할 수 없겠죠. 


마을마다 전문적으로(?) 이야기만 전해주거나 읽어내는 사람이 있고 이를 "이야기꾼"이라 부릅니다. 이야기꾼도 생업에 종사는 하지만 마을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는 듯하며,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의 후계자를 양성하기도 합니다. 이야기꾼은 자신이 (스승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전달할 수 있습니다. 공력이 높으면 말 없는 사물이나 심지어 오래 전에 죽은 이들로부터도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삼촌이 미로와 함께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 버렸기에, 또 아직 저쪽 편 세상에 대해 외삼촌 자신도(또 미로 역시) 모든 걸 알지 못하기에, 이어지는 사연은 말로 전하지 못하고 글로 전달됩니다. 하지만 외삼촌 역시 지금 우리 세상에 대해 꽤나 회의적이고 비관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므로, 그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그가 전하는 진실은 말 그대로 정직한 진실입니다(혹은, 그렇게 믿고 싶네요). 


얼마 전 <북극에서 온 남자 울릭>을 읽었을 때, 북반구 추운 지방에 사는 원주민분들은 그 부모가 갑자기 죽거나 한 고아의 삶에 대해 그리 넉넉한 배려를 베풀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게 사실 우리 세계의 냉혹한 현실이죠. 그런데 저기 미로가 사는 세상에서는, (아직 아빠가 살아계시긴 하지만) 미로가 흘린 눈물 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고민도 하는 등 고아(아직은 아니지만)에 대해 조금은 더 배려가 이뤄지지 안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강을 이뤄 흘러넘치는 눈물 때문에 입을 현실적 피해"가 걱정이 되어서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저는 남의 슬픔에 대해 냉정하고 잔인하게 구는 편인 우리네 세상에서 고작 누구(그것도 어린애)의 눈물 정도로 집단 피해가 안 일어나는 건, 이게 둘이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는 것 아닌가, 반대로 저쪽은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라서 그렇게 홍수가 나기도 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큰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려면, 세상을 널리 둘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미로네 세상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고, 또 스승인 이야기꾼에게 이야기를 전수 받고, 이 과정을 통해서 상처가 근본적으로 치유되는 건, 우리 역시 사정이 그럴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받아들여. 어차피 누구나 겪는 일이야."라고 위로하지만 우리나 미로나 그런 말로는 힐링이 안 됩니다. 


스승인 이야기꾼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p80에 처음 이름이 나오죠. "이름"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이름이 없어도, 혹은 잘못되거나 우스운 이름이 붙어도 그리 신경 쓸 게 없다는 말도 나오는데 그래서인지 구루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그저 이야기꾼으로만 불릴 뿐입니다. 


이 소설, 이야기를 읽으면서 독자로서 제가 인상 깊었던 건, 마을의 크기나 부유함 같은 것에 무관하게,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빈곤하면 사람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걸로 봐서, 아마도 우리네 세상의 소설가, 시인, 혹은 널리 문화 컨텐츠 크리에이터에 이 이야기꾼이라는 분들이 해당하는 것 같고 또 그에 대한 비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외삼촌과 1인칭 주인공인 "나" 등이 흥미롭게 생각했던 것처럼 저들은 이야기꾼 포함 문자를 쓰지 않는다는 게 꽤 특이합니다. 이야기뿐 아니라 다른 전승지식, 노하우 등을 문자로 적어 두면 정말 편할 텐데도 구태여 그리 하지 않는 건(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동화 "구연"이라든가 판사 앞에서 이뤄지는 법정의 생생한 직접 증언 등에 특별한 가치를 두는 건, 눈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통해 이뤄지는 진술 속에 더 강한 진실이 담겨 있고, 단순 정보 이상의 더 인간적인 감정, 진실이 소통된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들"이 사는 우주의 이야기, 이야기꾼이 특별히 존중 받는 이유도 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의식적으로, 허위와 왜곡이 이뤄지기 쉬운 문자 체계 채용을 배척한 것이겠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네 사는 세상에서 이야기가 중요한 다른 이유는, 우리들 하나하나가 마치 미로네 엄마처럼 언젠가는 유한한 생을 마치고 모두와 이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로장생할 수만 있다면 표정과 더 간단한 말로 그때그때 소통하면 충분합니다. 남겨진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걸 남겨 주고 싶다면, 이야기는 더 진실해야 하며 그런 진실된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세상은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바뀌어갈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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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탁월한 취향 - 홍예진 산문
홍예진 지음 / 책과이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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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아니라, 비 오는 날이 좋은 거야." 비 오는 날마다 "아, 날씨 좋다!"며 탄식(?)하던 어느 선생님이 자신의 반응에 대해 붙인 설명이라고 합니다. 설명인 듯도 하고 새로운 문제를 낸 듯도 합니다. 만약 말의 순서가 바뀌어 "비 오는 날이 좋다는 게 아니라. 비가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거야."라고 하셨으면, 형식적으로는 여튼 설명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그분의 진의는 그게 아니겠지만). 


싼 옷을 걸쳐도 옷 고르는 안목이 좋아서 주위의 선망을 사는 젊은 여성은 언제나 주변에 한 사람씩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패피"는 간단하지만 타고난 센스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기 때문에 부럽기도 하고, 누구한테건 유용한 충고를 해 줄 수 있으므로 집단 안에서 (혹 도시 출신이 아니거나, 심지어 고졸이라고 해도) 상위 랭크를 차지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석경의 <숲 속의 방>에 나온 소양은 홀든 콜필드처럼 악을 가장(=위악)한 순수(p19)"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진실은 회색지대에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는 지금 와서 보면 무엇이 옳은지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던 양극단 중 누구 하나가 정말로 정의를 독점했던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진실이 과연 그 둘과 관전자들 눈에 회색으로 보였던 그 지대에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어느 진영이든 간에)의 (어리석은) 눈에는 다 뭉뚱그려 흑과 백 외의 모든 게 회색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듈 다 위선도 위악도 아닌,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던 미개인들이 아니었을지. 


블랙 라이브즈 매터를 누군가들이 외치는 이 순간, 씬 블루 라인 깃발을 걸면 오해를 받을 수 있다...(p111) 물론 공권력의 폭력 앞에 목숨을 무참히 잃은 이들이 사소한, 미세한 정치적 메시지의 뉘앙스에도 민감해할 수 있으며 제3자는 되도록이면 저 민감한 이들의 감정과 원한, 분개 등을 존중해야 합니다. 저 같아도 깃발을 치웠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특정 가치와 신념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다른 이념과 취향과 소신을 깔아뭉개며 most favoured, 최혜국 대우를 받아야 할까요? 지금 이 순간에 절실한 그 무엇이 발견되면 앞선 시대의, 혹은 다른 계층의 소중한 감정과 정의체계는 그저 먹줄로 지워져야만 하겠습니까? 이는 또하나의 폭력이고 야만입니다. 민중의 지팡이는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고 모든 공권력은 악이었던 걸까요? 그렇다 치고, 그럼 이제부터 그 모든 걸 단죄, 파괴하고 세워질 시스템은 어떤 것이라야 합니까? 대안 없이 증오와 분풀이만 내세우면 인류의 앞날에 어떤 미래 같은 게 있겠습니까?


"지도상으로 보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라도, 소득 계층에 따라 바다를 소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흥미롭다(p79)." 이 문장 후 지역 유지들이 그들만의 "소비"를 위해 꾸려 놓은 공간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저는 이 대목을 읽고 1988년작 영화 <더티 댄싱>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거기서도 중산층은 하층민과 다른 방식으로 휴가, 공간, 여유 등을 즐기며 "더티 댄싱질"을 경멸하죠. 영화 안에서는 마침내 편견을 버리고 대동단결하며 원초적인 쾌감을 맛본다는 결말이지만 현실은 ㅎㅎ 글쎄요. 그리고... 역시 영미권에서는 연극, 연기... 이런 게 우리와는 달리 최상류층의 문화이며, 사실 우리도 1960년대에 활약한 연기자들 중 유난히 명문대 출신들이 많은 게(또 셰익스피어극에 그렇게 집착하는 전통 같은 게) 다 그런 문화를 어설프게나마 배워 들여와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긴커녕 멋지죠). 


"잔디와 형제인 척하는 크랩그래스(p126)" 사실 이 잡초가 얼마나 꼴보기 싫었으면 이름부터가 그리 붙었겠습니까. 그런데 남편분이 "저것도 나름 그래스인데"라고 하는 말씀에서 독자는 현웃이 터졌습니다. 그래도컨벤션은 지켜 줘야 할 듯하며, 꼭 이웃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결국 보기 싫어질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옳게 여겨져 온 것은 되도록이면 지키는 편이 (높은 확률로) 유리하며 또한 현명합니다. 이걸 뒤집으려면 오로지 과학의 힘만 빌려야 하겠네요(쓸데없이 진지).


p148에 나오는 V님 같은 분의 태도나 직장관을 보면 확실히 한국이 근대화에 빨리 성공한 건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중국만 해도 워크에씩(workethic)이 아직 많이 미진하며 그냥 자기일만, 밥값만 최소한으로 해 놓고 집에 가는 패턴이 대부분입니다. 한국은 그렇지 않아서 동료 눈치를 보고 체면을 지키는가 하면 조직 내 승진 욕구도 무척 강한 편입니다. 직위가 돈을 꼭 가져와서가 아니라 오너 앞에서 밥값한 후 훈장 받는 가치를 무척 중시합니다. 그래야 내가 당당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도 그저 공명심 수준이 아니라 분명 워크에씩으로 이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100을 해놓으라고 하면 100에서 어정쩡하게 끊지 않고 그 이상을 하고 갑니다. 세르비아인들은 그 나름 역사가 오래된 민족이겠으나 이런 체험을 집단으로 거친 적이 없고 (죄송하지만) 그 하시는 말씀도 공산주의 체제에서 흔히 하는 선동 교육 시간에 나올 법한 말에 불과합니다. 노동자가 자기 권익 찾지 말자는 게 절대 아니고 말입니다. 


이 세상은 책 p174에 나오는 대로, 남한테 폐 안 끼치고 자기 일은 확실히 하면서 자신의 대(代)보다 더 나은 삶과 재산, 보람 등을 자녀에게 남겨 주고 가려는 "검박하고 안전한 사람들"이 지키고 만들어나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회색분자" 같은 건 아니죠. p196에 언급되는 <플랫(flat)라이너즈>는 우리 나라에서는 <유혹의 선>이라는 다소 이상한 제목으로 개봉되었더랬습니다. 최근 나온 리메이크보다 훨씬 더 유명한 배우들이 총출동한 호화 캐스팅인데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올리버 플랫(Platt)도 나오죠. 


"어차피 돌려주실 돈으로 계산했으면 애당초 받을 생각도 안 하시는 게 간단하잖아요!(p247)" 이게 합리주의이며 그 백인 며느리(라는 말도 부적합)도 그리 생각하셨겠을 뿐 아니라 애초에 다른 방식이 존재할 수도 없다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그 세대분들은 돈이든 뭐든 오고가는 과정에서 아들(의 가족들)과의 영원한 정이 커 가고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죠. 오히려 저는 "스폰지 같은 이해력으로" 또 진심으로 그 충고를 받아들인 그 시어머니분이 더 대단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 연세 드신 분들이 자기 생각을 좀처럼 안 바꾸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죠. 역시 모정의 힘은 위대하며 무엇이든 다 이해하게 만듭니다. 애초에 번잡한 다른 감정, 다른 장치를 마련하려 들지 않는 편이 훨씬 간단했는지 모르지만.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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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공중부양 - 오늘도 수고해준 고마운 내 마음에게
정미령 지음 / 싱긋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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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하늘을 훨훨 날고 싶지만 중력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또 타고난 인간의 신체가 그걸 허용하지 않기에 그러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알바트로스죠. 여기서 작가가 말씀코자 하는 건, 나이 마흔을 넘고도 자아실현, 꿈의 이뤄짐, 이런 걸 마음 속에 담아둘 수 있냐는 겁니다. 그걸 "공중부양"이란 비유로 표현한 거겠죠. 하긴 꿈이란 10대~20대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것만 생각하면 훨훨 하늘을 날듯, 극복 못 할 곤경이 없을 듯 나의 정신적 비상과 부활, 재생, 회복을 돕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는다 해도 여전히 이게 가능할까요.


독자인 저는 카페를 잘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거리를 걸을 때 왜 한국에는 변두리, 부심, 외곽에조차 이렇게 카페가 많은지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수요에 비해 좀 많은 건 사실이지만, 또 어느 정도는 기본 수요가 있으니까 이처럼 많이들 카페를 차리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작가분이 말씀하는 건, "혼자 가도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 카페뿐(p60)이라는 건데요... 예전에는 업소, 공공장소 등에 갈 때 "혼자이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장소"란 아예 없었습니다. 지금은 한국 사회가 그래도 카페 정도는 예외로 쳐 주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게도 됩니다. 중요한 건 그런 사회적 허용 여부가 아니라, 간만에 얻은 여유를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위해 알뜰하게 쓸 것인가, 뭐 그것이지 싶습니다. 


구내식당은 그곳(회사, 학교 등)에 적을 둔 사람으로서는 꽤 의미있는 곳입니다. 일단 가격이 싸니 자주 이용하게 되고, 이곳에서 제공해 주는 메뉴, 손맛에 길들여진다는 게 그만큼 그 소속기관에 대한 애착을 더하게도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정말로 조직 자체보다, 구내식당의 다양한 요리 맛을 즐기는 낙에 회사를 다니는지 매일같이 오늘의 식단을 찍어 인터넷에 올립니다. p81에는 "지인이 언제 그 회사를 그만둘지 모르기 때문에 거기 가 봐야 했다"는 작가분의 말이 나옵니다. 매일같이 접하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여튼 적이 없어지면 당장 오늘부터라도 이용을 못 하는 겁니다. "좋은 회사에 다닌다는 혜택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어디 뭐 그것뿐이겠습니까만, 확실히 좋은 기관에 부속한 "구내식당"은 이모저모로 그런 소속감, 자긍심을 약간은 확인을 시켜 줘야 하기에 저런 외부인의 반응이 나올 만하게끔 운영을 합니다. 그래도 작가분은 "프리랜서의 자유"를 다소 희생하는 거라고 애써(?) 평가절하를 합니다. 사실 주는 대로 먹는 건 메뉴가 좋아도 내 자유가 희생되는 게 맞습니다. 


p148의 일러스트에는 "꼭 그렇게 가시 돋친 말을 해야 해?"라고 묻는 남자와, 허리에 손을 얹고 단호한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망설임, 후회 등을 품는 여자의 모습이 일러스트로 나옵니다. 가시 돋친 말은 상대의 어이없는, 기대이하의, 멍청한, 성의없는, 실망스러운, 몰상식한 언행에 대한 리액션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 마음이 다듬이지지 않아 나도 모르게 자란 가시가 밖으로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분은 "상대의 상처는 (결국) 내게 다시 꽂는 가시와 같았다"라고 합니다. 


가족에게, 특히 부모님께 친절하지 못했는데 여튼 이게 즉시 생각이라도 나고 나중에 후회하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인간 못된 건 "아 그때 더 심하게 받아쳐야 했는데 괜히 참았다"며 밖에다 광고까지 합니다. 이런 작자는 정말 나중에 그 죄를 어떻게 받으려고 이러는 거겠습니까? p190에 나오는 상황은 이런 건 아니고, 나(즉 작가분)에게 좀 친절하게 설명하려 들지를 않으시는 엄마에 대한 서운한 반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작가분은 "내게 그렇게 하고 전화를 끊은 엄마 마음은 편할까?"입니다. 이걸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철이 들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독자인 저는 아직 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음을 이 책 이 대목을 읽고 처음 깨달았기 때문에 더 뜨끔했습니다. 


"청소년기와 20대 때는 뭐가 나한테 어울리는지도 모르고 뭐가 예쁜 모습인지도 모르는, 참 어중간한 시기였던 것 같다.(p196)" 물론 안 이런 분도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아마 이랬을 겁니다. "나만 알고 싶은 나의 못난 모습"... 이런 건 정말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나는 이때의 나를 거쳤기에 이 어색한 표정에 어떤 생각이 담겨 이랬는지 다 아니까 정말 미칠 만큼 부끄럽죠. 그런데 이게 다 긍정이 될 정도까지 가면 사람은 그때서야 정말 철이 드는 것 같습니다. 


p224에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 마음 속에는 또다른 내가 있다." (사진 속) 과거의 나뿐 아니라 현재의 나 역시, 딱 보면 느껴지는 나의 취약점은 그게 나만 아는 것입니다. 이걸 참 어떻게 "숨기고" 다스려야 할까. 그렇다고 무작정 무시하고 남들 앞에선 요란한 쇼만 하자니 미친 X 되는 것 같고... 공황장애라는 게 이런 순간에 오지 않나 싶습니다. "작고 슬퍼 보였다. 안아주고 싶었다." 역시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나인 걸 인정하고, 내가 안아줘야지 누가 대신 해 주겠습니까. 해 준다고 해도 미안하죠. "혼자여도 괜찮고 나대로 산다(p246)." 예전에는 이런 말을 누가 하면 그건 사회부적응자, 실패자의 자백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p98에는 "마흔은 특별한 나이다. (그래서) 모아 놓은 돈은 있니? 나중에 너 혼자 외로워서 어쩌니?(같은 말을 듣는다)"라고 합니다. 특히 마지막 질문은 "당연히 결혼은 못한다고 전제를 하고서 위로랍시고 건네는 말이라서 더욱.... 라고 하네요. ㅎㅎ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적어도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답이 나오지 싶습니다(물론 그 답을, 상대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습니다. 진짜 그게 답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은 동요 없이 편안하겠으니 말입니다). 


혹 답이 아직 나오지 않는다면, 이 책을 한 번 더 읽어 보고 이제부터 나만의 답을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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