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인간, 그리고 하나님 - 실재에 대한 통전적 앎을 위한 과학과 신학의 연대
이안 바버 지음, 김연수 옮김 / 샘솟는기쁨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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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턴 상은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보통 불립니다. 2013년에 타계한 저자 이안 바버는 독특하게도 핵물리학자 출신인데, 서구 세계에서 예리한 지성들이 간혹 보이는 패턴대로, 순수 사유의 영역인 철학 일부 영역에서도 큰 성취를 이룬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술과 과학을 메타적으로 바라보며 이를 윤리, 종교와 연결하여 조화적으로 성찰하는 데 탁월한 진전을 이룬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본연의 필드가 핵물리학이었는데 종교 영역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이룬 분이라서 그 글들이 더욱 깊이와 매력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Come Holy Spirit, come, make us truly new creatures in Christ! p91을 보면 성령을 향해 이렇게 간구하는 문구가 나옵니다. 1991년의 세계교회공의회에서 작성된 기도문이 그 출처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의 배덕행위 이후 우리 모든 인간은 원죄를 안고 태어난 것으로 나옵니다. 죄 없이 깨끗하게 태어난 몸과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고 또 회개하여 깨끗한 존재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저자는 이 결론에 이르기 전 이른바 과정 사상에 대해 설명하는데 어쩌면 신학을 메타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자연과학자의 시선이라서 이 대목이 더욱 박력 있고 정연하며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p76에서 저자가 거명하는 앨프리드 화이트헤드는 1947년에 타계했으므로 이 책 저자 이안 바버와 살짝은 생존기간이 겹칩니다만 직접적인 인적, 학적 연계점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 바버 박사(물리학으로 학위를 딴 분입니다)는 저 화이트헤드 사상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사색의 결과물을 이 책 안에 대단히 명징하게 담아냅니다. 양자물리학은 20세기에 출현하여 물리학계에는 물론 철학계에조차 엄청난 역설의 과제를 던지며 논쟁의 핵심으로 자리했는데 화이트헤드 역시 이 논쟁에 참전하여 그만의 독자적인 기여를 한 바 있습니다. 다만 바버 박사는 상대성이론, 양자물리학, 진화론으로부터 모두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이 일정 부분 빚을 졌다고 규정하는데 보기에 따라 화이트헤드가 거꾸로 이들 분야에 기여를 했다는 해석도 존재하므로 독자는 더욱 흥미롭게 바버 박사의 견해를 좇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과연 타 유인원에 비해 질적으로 구분되는 특질을 지닌 존재일까요, 아니면 그저 양적으로 우연히 타 종(種)에 비해 몇 발 앞서가 만물의 임시 영장 노릇을 하는 중일 뿐일까요? 저자는 예컨대 p109 같은 곳에서 네안데르탈인 등 타 유인원과 비해 인간의 지적 능력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고 할 수 있을지, 아니면 그저 "전통적으로 생각해 오던 바에 비해 타 종과의 간격이 훨씬 좁을 뿐인지"에 대해 다소 혼란스러워하는 태도를 솔직히 드러냅니다. 

그리스도는 칼케돈 공의회 이래 신과 인간의 양성을 지닌 존재로 더 명확히 인식되었으며 단성론은 이단으로 배척되었습니다. 저자는 p124 같은 곳에서 과학적 진화론과 신학을 조화롭게 이해하려는 다소 과감한 시론을 보입니다. "단지 몸으로가 아니라 인격으로서도 그리스도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초기 생명 형태에 이르기까지, 전체 진화를 관통하는 연속적인 과정 중 어느 한 부분이었다." 확실히 이런 전향적인 서술은 아직도 구시대 인식에 머물러 있는 많은 목회자나 신도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대목이겠습니다. 

신학은 여태 이성,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지를 두고 중근세 이래 인문주의 진영과 치열한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체스터튼 같은 이는 그의 피조물 브라운 신부를 통해 "이성을 함부로 폄하하는 건 천박한 신학"이라는 한 마디 말로 가짜 신부 플랑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그의 단편 <푸른 십자가> 중). 지금 이 책 p163에서 저자 바버 박사는 감정의 정체를 구명하려 시도합니다. 구교 신교를 막론하고 크리스트교는 이성과의 400년 간 대전투에서 그렇게나 힘들게 포지션을 잡으며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았는데 이제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예측불허의 기질을 뽐내는 감정과도 싸워야 합니다. 저자는 모두 다섯 가지의 접근법을 고찰하며 신학이 바라보는 감정의 정체, 나아가 21세기의 현대인들이 고루 수용할 만한 해석론을 전개하려 분투합니다. 읽으면서 이 석학의 인식 지평의 한계는 대체 어디쯤인지 새삼 경외감을 느끼게 된 대목 중 하나였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이 책에서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책의 핵심 토픽 중 하나가 과정 신학인 만큼 화이트헤드의 관점은 이 책이 디디고 선 가장 보편적이고 튼튼한 비계판(scaffold) 중 하나로 보입니다. 이처럼 서양에는 자연과학의 최변방 분야를 개척한 학자들 중 신학과의 새롭고 단단한 접점을 마련하려 분투한 뛰어난 지성들이 있으며, 이 책에서도 우수한 두뇌가 시도하는 미지에의 영역 정찰을 위한 부지런한 발걸음들이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지성과 영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낙원에의 머무름이 즐거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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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를 위한 인성 수업 - 올바른 인성 만들기를 위한 행복 단어 43가지
이충호 지음 / 하늘아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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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해, 또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생을 살면서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많은 수의 사람들과 접촉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만큼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나의 의견과 이해를 더 신중하고 센스 있게, 그러면서도 동시에 진정성을 담아서 표현해야만 합니다. 이는 바탕에 올바른 인성이 깔려 있어야 지속적인 표출이 가능하며, 어떤 가식이나 계산만 갖고는 감당이 안 되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예, 인성의 기본이 만들어지는 10대 때부터 바른 바탕을 깔아 주어야 하며, 이는 억지로 성격을 어른 바람대로 만들자는 게 아니라 당사자인 청소년이 자발적으로 자기 인성을 갖춰 나가는 기쁨의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20세기 미국 산업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 발명가 에디슨(p35)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호기심을 발동하여 우리 주변의 불편함과 비능률에 대해 그저 당연한 것이겠거니 여기지 않고, 가능하면 이를 개선하여 우리 삶의 질을 보다 낫게 하려는 의욕에 가득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어떤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끝없이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여 기어이 원하던 발명품을 만들어내던 끈기로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에디슨의 어렸을 적 일화를 보면, 과연 위인은 어려서부터 떡잎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혹시, 주변에서 지나치게 만사에 호기심을 보인다며 그럴 시간에 영어 단어나 외우라는 식으로 청소년들 기를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한국에 생길 제네럴일렉트릭 하나를 미리 싹부터 죽이는 셈입니다. 

아인슈타인을 만약 내내 제도권의 숨막힐 듯한 교육 안에서만 붙잡아 두었다면 그는 상대성이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상대성이론은 아마 지금쯤이면 그의 업적이 아니었어도 그 비슷한 단서가 잡혀 가고 있었겠습니다만 그의 선구적 노력, 아무도 기존 뉴턴 세계관에 그닥 큰 아쉬움을 못 느끼고 있던 차에 미리 대안을 생각해 내려 했다는 자체가 놀랍고 또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대부분의 물리학 이슈는 뉴턴 체계로 큰 무리 없이 해결됩니다. 작은 모순이라 해도 범상하게 넘기지 않고 끝까지 물고늘어지려 한 그의 의지와 고집 자체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p167에는 감사하는 어머니의 사연이 나옵니다. 대형 교통사고가 나서 사방에 다친 아이들이 널려 있고 피해 청소년들의 어머니들이 통곡하는 소리에 아수라장과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머니만큼은 똑같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감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도 가볍게 다치지 않았건만, 주변에 수없이 널린 시체들을 보며 그 어머니는 내 아들의 소중한 목숨이 지켜졌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매사에, 범사에 감사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아이는 그 역시도 마음과 인성이 바른 어른으로 자라납니다. 우리도 사소한 불편에 일일이 불만을 토로하기보다, 당장 내가 가진 게 얼마나 많은지를 두고 부모님께, 이웃에게 감사할 줄 아는 인성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p237에서 책은 청렴의 미덕을 강조합니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이들에게는 대체로 그들이 먹고 살 수는 있을 만큼 보수가 주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갑자기 주변 누군가가 그 자리를 잃고 패가망신했다는 소식을 듣곤 합니다. 그 대부분은 제 분수를 잊고, 의롭지 못한 일확천금을 노리며 무리수를 두다 직분을 망치고 속한 조직에 대해 심대한 피해를 끼쳐서입니다. 그래서 책은 청렴의 미덕이 그 당사자를 얼마나 단단히 지켜 줄 수 있는지를 어린 독자에게 가르칩니다. 조금 욕심이 생길 때, 아 이 길을 가면 당장은 편할 것 같아도 앞으로 내 장래를 영원히 망칠 수 있겠구나, 이런 경각심과 교훈을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마음에 넣으려고 하면 그게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바른 인성이 심어지는 과정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들은, 아이가 자라서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결정적인 지침이 될 만한 아름답고 고귀한 교훈들을 담았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어른들이 먼저 읽고 소중한 초심을 찾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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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전 시집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윤동주가 사랑하고 존경한 시인 전 시집
백석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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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도 납북, 월북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긴 시간 동안 판금되었지만 백석이야말로 그 아름답고 모던한 시 세계가 오로지 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일절 독자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던 비운의 시인입니다. 출판, 표현과 그 향유의 자유를 막는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태인지를 새삼 되씹게도 되며, 한편으로 이렇게나 낭만적이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했으니 북에서 기어이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았겠습니까. 그의 시를 읽어 보면 대책없을만큼 천상 부르주아의 자유분방하고 탐미적인 시상이 그네를 뛰는데 이런 분이 애초에 프롤레타리아트 리얼리즘과 어떤 접점을 갖는다는 자체가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백석의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티없이 맑고 천진한 귀공자의 상입니다. 앞서 리뷰한 정지용 시인은 냉철하고 날카로운 지성인의 모습인 점과 대비됩니다. 정지용이 백석보다 열 살 위이며 백석은 김일성과 동갑인 1912년생입니다. 많은 이들이 거론하듯 백석은 실제로도 러시아 여인들과 일정 접촉을 가졌으며, 비록 백여년 전이라고 하나 러시아의 영토가 저 먼 극동(즉 우리 동아시아)에까지 미쳤고 더군다나 러시아 혁명 후의 혼란상이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아 적계와 백계가 곳곳에서 무장 충돌 중이었기 때문에 조선 인텔리 청년(더군다나 극장신)이 러시아 여성들을 만날 여지는 충분했습니다. 유독 그가 러시아 문학에 심취했던 것도 (러시아 문학 자체의 질적 우월성과는 별개로) 이런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나는 나의 녯한울로 땅으로 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니(p145)" 그의 시 <北方에서>의 한 구절입니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이 스타북스 시집 4권 세트에서는 시인들의 작품 발표 당시를 표기 기준으로 삼았기에 뭔가 모양새부터가 옛스럽고 그윽한 맛이 풍깁니다. 백석을 우리가 퇴폐적인 로맨티스트로만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 작품만 봐도 뭔가 자신의 먼 근원을 탐구하고 현재의 척박한 현실을 곱씹는 반항아의 영혼이 느껴집니다. 역시 시인의 시어(詩語)는 중의와 상징과 풍유 환유의 향연입니다. 

아무래도 백석은 정통 평안도 사람이다 보니 이 시 전집 전체에서 그 특유의 지방색이 느껴집니다. 평안도 일대의 지방색이라 하면 꼭 향토색만 뜻하는 게 아니라 관서 지방이 당시 독특하게 지닌 모던한 스타일도 포함하는 의미에서입니다. p100을 보면 <秋夜一景>에서 당등, 인간, 석박디 등의 독특한 고유어 구사가 두드러지는데 "인간"이란 단어도 아래 각주를 보면 평안도 일대에서 "식구"를 일컫는 말이라고 설명해 줘서 약간 놀랐습니다. 위대한 문학가의 작품은 그 자체로 언어사전 구실을 한다는데 백석의 작품에서는 정말로 어떤 신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듯합니다. 남한의 ㅈ에 해당하는 음(치경파찰음)을 ㄷ 비슷하게 치경파열음으로 내는 평안 방언의 특색 때문에 長燈(장등)을 "당등"으로 읽는 것인데, 시인은 구태여 이 단어를 한자 아닌 한글로 적은 걸로 봐서 의도적으로 지방색을 표현한 듯합니다. 

p157에는 <흰 바람벽이 있어>가 소개됩니다. 왜 여기서는 "힌"이 아니라 "흰"인지 의아해할 수 있는데 책 겉표지에 실린 "힌당나귀"와 달리, 본문에서는 시 제목이나 시어에서도 "흰"이란 표기를 유지합니다. 이런 게 예외이고, 다른 작품에서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발표 당시의 표기가 관철된 게 대부분입니다. p158을 보면 "이즈막하야"라는 단어가 눈에 띄는데 책 전체를 통틀어 각주가 일련번호를 달았고 이 단어에는 각주 240번이 달렸으며 그 뜻은 "이즈음에 이르러"라고 합니다. 이 세트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 말미에는 외국 문학인 몇이 언급되는데 라이너 마리아 릴케, 동진(東晉) 대의 시인 도연명은 그렇다 쳐도 "프랑시쓰 쨈"이 누구인가 할 수 있습니다. Francis Jammes이며 프랑시스 잠이라고 읽으면 됩니다. 드 샤토브리앙이나 모리악처럼 가톨리시즘에 (후기에) 경도된 작가죠. 

작품집 말미에는 그가 북에서 창작했다고 알려진 몇 편의 시가 실렸는데 원래 백석은 한국전 이후 꽤 이른 나이에 숙청당하고 죽은 줄 오인되었지만 1996년에 비로소 사망했다고 최근에 알려진 바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에서 (대체 백석 입장에서 그가 누구였을지 알기나 했을까 싶은) 어느 한국 대통령 이름이 갑자기 나와서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 역시도 이념으로 갈라져 극렬 대립한 동족 상잔의 역사 그 흔적인 셈이라 마음이 착잡하면서도 한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편집이 깔끔하고 각주가 많이 달려 독자가 그 시대상이나 정확한 시어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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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전 시집 : 건축무한육면각체 - 윤동주가 사랑하고 존경한 시인 전 시집
이상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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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보다 두 살이 많았던 천재시인 이상은 그 빛나는 재능을 온전히 피우지 못한 채 27세의 나이에 세상을 뜬 문인입니다. 전공은 건축이었고 인접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미술, 회화에서도 기량을 드러냈습니다. 만약 그가 애초에 프랑스나 영국, 보헤미아(西 체코) 같은 데서 태어났다면 우리는 아폴리네르나 구르몽, 혹은 입체파 브라크의 재능을 두루 갖춘 위인으로 그를 기억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p44에는 그의 작품 <Le urine>이 실렸습니다. 과연 그의 시답게 난해하고 현학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뭔가 친근하게 말을 거는 느낌이 나 신기합니다. 아예 로마자를 쓴 단어는 그렇지 않지만, 한글로 쓰인 외래어, 외국어에는 방점이 찍혔습니다. 우수(憂愁)의 보조관념으로 사용된 사전(辭典)은 그 철자가 dictionaire인데 이건 아마 시인이 살짝 착각한 것 같습니다. 프랑스어 딕쇼네르는 n이 geminate되기 때문입니다. 수탉도 순사(巡査)가 오기 전에 고개를 수그린 채 미미하게 울어야 하는 암울한 밤, 도어에 manstruation을 휴업 핑계로 써붙여 놓은 대담한 마담, 사보타지를 행하는(왜일까요?) 태양 등 앞에서 무기력하게 퇴폐적으로 여송연을 꼬나문 시인의 남루한 행색이 절로 떠오르는 시입니다. 

p99에 실린 <No.2 열하약도>를 보면 1931년의 풍운을 적적하게 말하는 탱크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구태여 9.18 유조구(유조호) 사건을 떠올릴 것 없이, 그냥 중단된 건설 현장의 물탱크 같은 걸 연상해도 되겠습니다. 그는 누구못지 않게 공사판을 많이 떠돌아다녔던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십 년 만에 재분출한 온천... 이 시의 배경으로는 더 이상 객석이 차지 않고 무대도 휑한 어느 극장이 적당할 듯합니다. 早辰(조신)은 새벽이라는 뜻입니다. 

칠십이면 그때 기준으로 천수에 가까웠겠는데 이상은 고작 자신의 스물넷의 나이(p127)를 갖고도 뻔뻔하게 살아왔다며 부끄러움을 표현합니다. 그보다 일곱 살이 어렸던 윤동주 시인과도 비슷한 정서, 주제입니다. p161에서는 "죄를 내어버리고 싶다. 죄를 내다던지고 싶다"고 합니다. "자서전에 자필의 부고를 삽입하였다"라는 구절에서 어떤 비장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못했으므로 이런 표현들이 그리 호들갑스럽게 다가오지 않고 독자에게 애수를 안깁니다. 차압은 압류의 옛 용어입니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한참 후에도 문학에서는 이 차압이라는 용어가 참 널리 쓰인 듯합니다. 

요즘은 이상하게 데드마스크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p94의 <自傷>에서 시인은 "데스마스크(death mask)라며 정확한 용어를 댑니다. "식어들어가는 마음의 도해." 백지에 깔린 한 줄기 철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허위를 담았다는 전보에는 명조(明朝. 내일아침) 도착이라는 네 글자가 담겼다고 합니다. 허위 메시지를 날린 발신자 역시 식언의 자책이 왜 강하게 마음을 치지 않겠습니까만 여유작작한 시인의 마음은 천성이 그러한 듯합니다. 出奔은 도주와 같은 뜻입니다. 

요조하다던 정조가 성을 낸다, 칠면조처럼 쩔쩔맨다... 과연 이런 부류의 여성들 심리를 훤히 꿰뚫은 시인다운 날카롭고 해학적인 묘사입니다(p87. <白畵>). 우리는 세상에서 얼마짜리로 통하는 인생들일까요. 그 값을 정확히 알고 싶다면 저런 부류의 여성들한테 가서 정확하게 감정을 받아 볼 일입니다. 단, 어떤 대답을 들어도 이 시인처럼 타격감 제로라며 너스레를 떨 만한 주제는 되어야 합니다. 

장난감 신부의 살결에서 우유 냄새가 난다... 그렇다고 말을 건네니 이 신부 역시 성을 내었답니다. 그 연유는 목장까지 산보갔다와서라며 답답한 시인을 나무랍니다. 여기서 다소 섬뜩한 고백이 들리는데, 시인이 영양분을, 영양분이라는 것을 입이 아니라 코로만 섭취해서 수척해간다는 말이 있어서입니다. 그러고보니 코로 맡았다는 냄새 역시도 일종의 환각취이지 싶습니다. 시인은 이 장난감 신부가 자꾸 자신을 찌른다고 여기는데 이 역시도 그의 일방적인 perception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애써 모른체하는데 건강도 나빠지고 신부에 대해 면도 안 서는 곤궁한 신랑의 불가피한 처세이겠네요. 

예쁜 장정 안에 천재시인의 거의 모든 작품을 담은, 소장 가치 만점의 에디션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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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전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서거 77주년, 탄생 105주년 기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뉴 에디션 전 시집
윤동주 지음, 윤동주 100년 포럼 엮음 / 스타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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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은 온 민족의 마음과 영혼 속에 영원토록 그 시혼과 작품이 아로새겨질 문학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 전집은 그의 짧았던 생 중에 창작되었던 모든 작품들을 담았습니다. 

p30을 보면 <또 태초의 아침>이라는 그의 작품이 수록되었는데 전신주 울음소리를 하나님의 계시로 표현합니다. 시인이 받은 계시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이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봄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사람을 넘어 동물,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생리이겠는데, 죄를 짓고 눈이 "밝어"진다니요? 신의 계시를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 부끄러움을 알았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압니다. 문제는 이미 한 번 겪은 일인데도, 이 시적 화자(아마 아담이겠지만)는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하겠다고 천연덕스럽게 표백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태초의 아침 앞에 "또"라는 부사가 들어갔습니다. 아담이 딱히 배덕의 영혼이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만큼 원초적 인간은 순수하고 자신의 본능을 (말과는 달리) 부끄러운 줄 모르고 표출하는 존재라는 뜻이겠습니다. 

p74는 <비로봉>이라는 작품을 담았습니다. 비로봉은 지금은 북한 땅인 금강산에 속한 대표적인 봉우리인데, 분단된지 74년이 지났지만 현대 한국인들도 이 봉우리가 금강산의 절경을 압축하여 담은 줄 잘 알 정도입니다. "만상을 굽어 보기란 - 무릎이 오돌오돌 떨린다" 아마 몸소 봉우리에 올라 보고 시인이 직접 느낀 바를 솔직히 토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화는 어려서 늙었고 새는 나비가 된다... 이런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산세 안에서는 저런 초자연적인 현상도 얼마든지 가능하리라고 시인은 여겼나 봅니다. 

윤동주 시인이라고 하면 서정적이고 차분한 어조에 청명한 심상을 표현하는 고유의 시구들이 바로 떠오릅니다만 p91의 <닭> 같은 작품을 보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잠시 인용해 보면 "자유의 향토를 잊은 닭들이/시들은 생활을 주잘대고/생산의 고로를 부르짖었다"라는 구절인데... 당시 표기를 그대로 따르느라 "시든"은 "시들은"으로 저렇게 쓰였습니다. 이 시에서 닭들이란 일제에 의해 자존을 박탈당한 우리 겨레를 상징합니다만 어찌보면 공장식 대량 사육 시스템에서 고생할 일이 없었던 저때 닭들이 더 행복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생산의 고로(苦勞)" 같은 표현은 뭐 누가 봐도 노동계급에의 착취 행태를 꼬집은 말입니다. 

p106의 <애기의 새벽>을 보면 닭이 또 등장합니다. 이 집은 닭도 없는 집이며, 다만 배가 고파 우는 아이 울음소리가 새벽을 알릴 뿐입니다. 부업으로 수익을 올릴 수단이 없는 것도 서러울 텐데, 철없는 아기 먹일 것도 없는 가정 형편이 얼마나 딱합니까. 제2연에서는 "시계도 없음"을 다시 하소연하는데 이게 의미 없는 되풀이는 아니고, 냉혹한 시스템의 생산 강요를 저 시계라는 장치가 상징한다고 봅니다. 궁벽한 시골이라서 아예 시스템의 감시, 독촉의 눈길로부터도 일시 이탈한 채라는 뜻이겠습니다.  

<모란봉에서>는 제목과는 다르게 평양의 근대적인 풍경 일단을 묘사합니다. "철모르는 여아들이/저도 모를 이국말로/재잘대며 뜀을 뛰고..." 현대의 북한이라면 모란봉경기장이라는 시설에서 이런 풍경들이 보일 법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일제 말엽이라면 어떤 상황이기에 어린 소녀들이 일어, 혹은 영어 외마디말로 소통하며 유희를 즐기는건지 감이 안 잡힙니다. 어쩌면 식민 본국에서 이주해 온 일인들의 자녀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시인의 마음은 착잡해 보이며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는 말로 시를 마무리지으며 시대의 모순에 아랑곳않는듯한 도시의 평정을 탓합니다. 

시집 후반에는 여러 문인들의 평론이 실려서 이 독보적인 청신한 심상의 시 세계에 대해 해석의 성찬을 제공합니다. 정지용과 박두진의 이름도 보이며, 교과서에 <다도해 기행>이라는 명문이 실리기도 했던 평론가 백철의 묵직한 글도 있습니다. 이 책 자체가, 지금은 이렇게 스타북스에서 판권을 입수하여 예쁜 장정으로 내었지만 이미 1967년에 정음사가 제3판까지 찍어서 낸 책이라는 사실이, p251에 나와 있습니다(초판은 1955년). 이 연표는 2017년까지의 사실이 정리되었으며 이렇게 망라적으로 깔끔하게 편집한 출판사의 노고에도 독자로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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