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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서랍 - 말, 인생을 원하는 대로 끌고 가는 힘
김종원 지음 / 성안당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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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됨됨이를 가르는 옛 선인들의 지혜 중에 "신언서판"이라는 게 있다고 하죠. 풍신이 의젓하고, 언변이 유창하면서도 사리에 맞으며, 글씨를 잘 쓰고, 사리 분별이 빼어난 인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자께서는 이 넷 중 특히 "언"과 "서"를 가리켜, 후천적 요소이니만치 얼마든지 노력에 따라 개선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특히 열등 DNA를 타고난, 길거리 캐스팅의 망상에 오늘도 내일도 밤잠 못 이루며 눈먼 포인트 타 먹을 생각에 오르가즘을 느끼는 미친 노파가 사실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법한 충고죠. 허나, 못된 아메바 후미부에 융털 돋는다고 말을 알아 먹을 종자라면 애초에 저런 뻘짓을 하고 다니겠습니까만.

"눈빛은 눈의 언어고,
지식은 두뇌의 언어이며,
지성은 삶의 언어이다."

"말은 결국 내 말의 서랍에 있는 것을 꺼내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리 검색해도 찾을 수 없고, 내 안에 없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새기면 새길수록 마음에 와 닿는, 심금을 울리는 충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은 느닷없이 발설자의 혀 끝에 영감처럼 와 닿으며 그 사람의 수요와 갈망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평소에 꾸준한 수련이 뒤따라야, 필요할 시에 그 사람의 혀끝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며 단단한 돌 틈을 가르듯 본연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래서, 평소에 꾸준히 자신만의 서랍 속에 기품, 치유, 긍정, 자존, 공감, 안목의 재료를 꾸준히 축적하라고 우리에게 권합니다. 서랍에 내용물이 있어야, 필요할 시 적기에 꺼내 쓰며 말과 행동으로 우리의 의사와 희구를 관철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통장 서랍보다 중요한 게 말의 서랍이라고 저자는 일침을 놓으십니다. 하긴 이런 좋은 말을 정반대로 해석하여, 어차피 통장에 다섯 자리 숫자의 돈도 없는 팔자(그래서 시청료를 못 냅니다),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그저 말(IT 전문가니 과학자니 심지어 길거리 캐스팅이 다 되었다느니, 어렸을 때 잘 살았다느니 하는, 현재의 실체와는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는 새빨간 거짓말)로 다 때우는, 졸혼 떠돌이의 견강부회로 이어진대서야 또 안 될 말입니다. 저자는 그저 평소의 수련, 준비, 정직한 노력을 강조하시는 게죠.

사람은 진정한 인격을 바로세울 바탕이 될 기품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강조하시는 게 바로 "말의 서랍"입니다. 오히려 이런 서랍은 "말"보다는 참된 노력과 도야를 거친 "말의 소재로서의 인격"을 담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회원 탈퇴만 하고 댓글만 지우고 동시에 그 나쁜 머리에서 자신의 범죄 행각만 까마귀 고기 삶아 먹은 양 잊었다고 해서 끔찍한 범죄가 지워지는 건 아닙니다. tv를 봤으면 시청료를 내어야 하며, 남의 명예를 훼손했으면 복역을 통해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아둔하고 비천한 천품을 타고난 자는 가장 좋지 않은 순간에 뭣이 한풀 꺾였다며 현실 도피를 하는데, 어디 인생이 그리 편할 대로 넘어갈 수 있는지 하회를 지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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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최고의 선물, 세상법칙 사용설명서
김영철 외 지음 / 좋은땅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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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물론 이 말은 책의 저자가 우리 독자들을 가리켜, 참다운 자존과 긍정의 눈을 뜨라는 격려의 뜻에서 베푸는 찬사이겠습니다만, 우리 역시 주변에서 열심히 일하는 동료라든가, 그 의식에 허위의 거품이 끼지 않은 정상적인 경제 활동 인구를 향해 얼마든지 같은 말로 응원을 보낼 수 있지 싶습니다. 물론 지 허위 망상에 취해 멀미를 하는 자, 혹은 가짜 IT 전문가(실상은 초딩 코딩이 뭔지도 모르는 밑바닥) 따위는 선물은커녕 토사물에 가까운 해악이겠지만 말입니다.

요즘은 주부들을 상대로 등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회사가 꽤 많습니다. CEO도 여성이고(약장수 같은 미친 수다쟁이가 아니라 진짜 프로그래머, 개발자 출신) 직원들도 80% 가까이가 여성인 견실한 어느 중소기업이라든지 말이죠(사명은 구태여 거론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회사에서 항상 강조하는 덕목이 "워라밸"입니다. 요즘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구호처럼 되었습니다만, 여성들이 특히 많이 근무하는 회사의 경우 육아, 가사 문제를 아무래도 직원들이 신경 안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회사는 창업 초기부터 이 문제를 대단히 정책적으로 고려해 왔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을 잘 둘러 보면 요란하게 생색이나 내듯 표어를 만들어 내기 이전, 이미 조직 성장과 생존의 문제로 이를 인식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경영을 솔선수범한 중견 기업이 여럿 있습니다.

동화세상 에듀코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회사는 지금도 주부 인력을 대상으로 양질의 연수 과정을 통해, 돈도 벌고 젊은 시절 못다한 자아 실현도 마저 이루는 등 이른바 사회와 소통하며 상생의 기회를 제공해 왔으며, 이제는 바인그룹이라는 거대한 사업체를 이뤄 더 큰 규모로 사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흙수저가 절대 금수저가 될 수 없다고, 계층 사다리는 이미 붕괴된 지 오래." 어쩌면 이 말은 맞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타임머신이라도 개발되어 1960년대쯤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 봅시다. 그 시절에는 그럼 계급 간의 장벽이 없고 차별이 없고 부조리가 없었을까요? 지금은 누구누구가 갑질한다며 하소연하거나 목소리를 모아 을들의 반란을 시도할 수나 있는 세상입니다. 어떤 밑바닥의 경우 말도안되는 헛소문이나 퍼뜨리고 자신의 비천한 현실이 떠넘긴 스트레스를 풀다 댓글 싹 지우고 회원 탈퇴나 한 걸로 과거가 다 씻겨 내려갔겠거니 또 특유의 자폐 망상에 잠겨 흐뭇해 하는 중입니다만 어디 그리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되겠습니까? 지은 죄가 있으면 벌을 받아야죠. 멍청한 주제에 입만 살아 떠드는 인간은 범죄도 어설프게 저지르다 신세를 망치기 일쑤입니다.

여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것대로 모순과 한계가 있으며, 과거 역시 "와 저런 세상에선 죽어도 못 살겠다" 싶은 지긋지긋한 질곡이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따지고 보면 어느 시대 사회에서나 흙수저가 신분 상승하는 일은 없거나 극히 드물었으며, 혹 있다 해도 지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가능했다는 게 진실에 가깝습니다. 당대에 무지 고생하고 그 과실을 맛보는 쪽은 그저 그 자녀들일 뿐입니다. 이들 역시 그 부모가 고생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아프거나 고생을 분담하니, 결국 세상에서 호강만 하고 마른 자리만 골라앉는 인생은 하나도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알고 보면 근본이 뻔한 한국 사회에서 집안 세탁 빼면 다 서민의 자식들이지 무슨 용가리 통뼈가 있겠나 이 말입니다. 손에 십억 백억을 쥔 사람은 그 십억 백억 만큼의 고뇌가 또 따르게 마련입니다. 반면 빈털털이 밑바닥은 시청료 오천원 삥땅하는 요령을 발견하고 무슨 천년 묵은 산삼이나 발견한 듯 희열에 벅차 개멀미를 하니 참으로 세상은 공평합니다. 가정은 파탄이 난 채 길거리를 헤매는 졸혼 늙은이한테 그 정도 낙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긍정의 힘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이렇게 긍정의 힘을 발휘하여 큰 재산이나 횡재를 노리겠다는 게 아니라(그런 건 멀미하는 밑바닥 인생이 자기합리화나 거짓말로 제 초라한 인생을 어설프게 위장할 때나 필요하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주변의 소중한 지인들과 뜻 깊은 시간을 채워 나갈 때 필요합니다.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건데, 하긴 입만 벌리면 헛소리 거짓말인 범죄자 사기꾼들이 이 경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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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슬, 멈추지 않는 추진력의 비밀
닐 파텔.패트릭 블라스코비츠.조나스 코플러 지음, 유정식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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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모 프로야구 팀에 "허슬O"라는 별명이 붙곤 했는데(물론 그 팬들로부터) 요즘은 그 팀이 그냥 강팀으로 위상이 아예 굳어서인지 구태여 그런 식으로 칭찬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누군가의 "허슬(HUSTLE)"을 우리가 칭찬해야 할 상황이라면, 그 누군가는 아주 강하지는 않으나 정해진 여건에서 몸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는 그 "감투 정신"에 대한 경탄이 그 동기이겠습니다. 우리들도, 썩 유리한 여건은 아니나 한 번 정도는 내 몸, 내 정신을 오롯이 던져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는 저런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근데 실천에 옮기기란 정말 쉽지 않은데, 첫째 그러다가 실패하면 내 자신의 에고가 모두 무너질 것 같고, 둘째 무엇보다 그러다가 너무 아플 것 같고(신체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엄두가 안 나서입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극복한 사람은 정말 대단한 겁니다.

자계서 저자의 성공하는 자질은, 자신이 아니라(자신이면 물론 더 좋겠지만) 남이 이뤄 놓은 업적을 (어리석은) 우리 대중에게 멋진 포장과 확실한 설득력으로 캐스팅(전달)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건 일반인들이 알지도 못했고, 솔직히 저는 이 시간까지도 그게 과연 법칙은커녕 일말의 진실을 담고나 있을지 깊은 의문이 듭니다. 허나 말콤 글래드웰 덕분에 이건 이제 "진실, 법칙"의 위상으로 올라섰고, 이처럼이나 인식이 굳어버린 이상 설령 누가 1만 시간을 투자해서 일이 안 되었다고 해도 그건 그 자신의 잘못일 뿐 "법칙"을 탓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 버렸습니다. 아니 이처럼이나 법칙이 예외가 많으면 그게 과연 법칙이기나 할지 의문도 들지만, "법칙"의 가장 확실한 마력(권력)은 그런 의심과 회의를 한순간에 제압하고 든다는 데에 있기도 합니다.

혹시 마크 노플러나 다이어 스트레이츠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까요? 사실 질문이 좀 잘못된게, 이들은 지난 특정 시기 특정 장르의 레전드이자 아이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세대에게는 기억이야 안 될리가 없지만, 단지 최근에 그 이름을 잠깐 잊었을 뿐이겠죠. 여튼 저자는 말합니다. "1만 시간을 투자하라! 그럼 당신도 (당신의 우상인) 그들처럼 될 수 있다!" 저자께서 아무래도 그 세대에 속하셨다 보니, 책 중에서 예를 들어도 이런 예를 드신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우리가 보통 어떤 특정한 위인을 거명하며, "당신도 이분처럼..." 이란 충고, 권유, 인스파이어링을 접할 때는, 그 착석한 현장에서야 열띤 호응을 보내어도, 자리를 떠서는 대부분 심드렁해지기 일쑤입니다. 말이 맞고 공감이 되어서라기보다, 대개는 강연자의 지명도나 수입 정도에 비례한 반응입니다. 이런 사람한테 호응 안 보내면 자신이 뭔가 뒤떨어진 것 같아서죠. 우리들 대부분은 지독한 속물들이라서, 각성, 동의, 반감, 감명 같은 내면의 반응에조차 이처럼 자신을 속입니다. 한 술 더 떠 어떤 자는 책을 읽고도 특유의 허위의식을 못 버려서, 알맹이는 이해 못하고 껍데기만 남는다느니 뭐니 하는 식으로 저자의 취지를 왜곡하며 마치 자신은 알맹이를 이해나 했다는 양 가당찮은 허세를 떨기도 합니다. 너무 어려서 일화 위주의 책들만 읽어, 정작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수업 받을 시간이 없어 기초 원리도 이해 못한 채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나 봅니다. 책은 적당히 읽고 학교 공부에도 좀 성의를 보이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무튼 저자의 필치는 탁월합니다. 당신도 1만 시간만 투자하면 잡스나 게이츠나 스티븐 호킹(헉)처럼 될 수 있다!고 누가 말하면, 겉으로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도 속으로는 아마 한 톨의 납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1만 시간 후 마크 노플러 변신"이라고 하면, 당장 낙원동에 가서 헌 기타 하나라도 돈 주고 사오고 싶은 느낌이 들 겁니다. 이는 첫째 내 내심이 진짜 원하던 꿈이기도 하고(자질이 안 따라주는 이가 꾸는 과학자의 꿈은 사실은 그의 성공, 경제적 풍요, 지명도 따위에 대한 선망이거나 세뇌, 강박의 산물일 뿐입니다), 둘째 뭔가 단순한 손가락 노동만으로 이뤄지는 투입, 수행은 머리를 쓰는 일보다 훨씬 낫겠지 하는 생각도 들어서입니다. 그러나 마크 노플러 같은 초일류 대가의 성취는, 볼륨 99.99999%까지는 누구나 모방 가능합니다. 마지막 0.00001%에서 기술자와 천재의 차이가 갈리는 거죠. 이 역시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처럼 하늘이 점지한 자질이라서 안타깝지만 극복이 안 됩니다.


자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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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경제학 - 4만 년 인류 진화의 비밀
필립 E. 워스월드 지음, 이영래 옮김 / 동아엠앤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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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패러다임은 끊임없이 진화해왔습니다. 아니, 적어도 현상을 오래 유지하지 않고, 이 페이즈(phase)에서 저 페이즈로 끊임없이 자리를 옮겨오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예전에 "경제이론은 계속 돌고도는 것"이란 말까지 했습니다.

이 책은 실무와 이론 경력을 두루 갖춘, 필립 E 에스월드의, 다분히 새로운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이른바 "코드 경제학"이란 것인데, "경제학"이라는 표제어 중 일부 때문에 혹시 어려운 내용 아닐지 지레 겁먹는 독자가 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경제학 관련 토픽은 이 책에서 아주 비중있게 실제로 다뤄지며, 심지어는 경제학사 입문자에게 이 책을 개념서로 권해 줘도 될 만큼 (저자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다른 용도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허나 내용은 인류 문명사 전반을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꼭 "경제, 경제학"에 독자의 시야를 한정하여 읽어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문명사 전반"으로 영점을 조준한 후에야 저자의 취지를 곡해하지 않고 온전히 독해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저자가 논하는 "코드"는, 인류의 습성이랄까 통성 한 부분에 주목한 개념입니다. 즉 인간은 문화와 문명의 고안, 개척 이전이건 이후이건, 사물과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코드를 만들어거 해석하며, 또 자신의 대응(혹은 응전, 토인비식의 개념) 과정에서도 코드 만들기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이런 코드 만들기, 혹은 코드라는 렌즈를 통해 걸러대는 습성이, 특히 경제학이라는 거대한 이론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요즘도 4차 산업혁명의 여파 때문에 누가 일자리를 잃는다느니 뭐니 하며 논의가 분분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21세기에 고유한 현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 90여년 전 폴 더글라스라는 경제학자가 감지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던 그 아티클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먼 과거(적게 잡아도 중세)에는 수 년 혹은 십 수 년 동안 잘 훈련된, 계산에 능하고 장부 작성 기법에 정통한 전문가들만이 사업체에 속하여 우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만, 더글라스의 시대에는 이미 "미숙련 여성 노동자들"이 불과 수 주의 훈련 기간만을 거쳐 이 분야에 투입되곤 했던 현상이 (특히 이런, 눈 밝은 학자 같은 이들에 의해) 지적되었던 것입니다. 이 아티클이 발표되고 얼마 후에는 "컴퓨터"라는 이름으로 불린(오타 아닙니다) 여성들이 계산 등 특정 영역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게 그리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닌 게, 1980년대만 해도 학군 내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주산 잘 놓는 학생들이 차출되어 인문계 고교 등의 내신 성적 산출에 동원되기도 했었으니, 이들이 다 "컴퓨터"들이 아니고 뭐였겠습니까. (품삯이나 제대로 쳐 주기나 했을지 원)

이 책에서 인용되는 더글라스 교수는, 특히 경제학 전공자라면 초년생 시절부터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는 게, 이른바 규모의 경제에서 체증이나 체감 말고 스케일 비례하여 수확이 균일하게 발생하는 이른바 콥-더글라스 생산함수를 공동 창안한 바로 그 사람이라서입니다. 고교에서 이과 출신들은, 지수함수의 경우 아무리 미분을 해도 "거의 그 원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현상을 잘 알 텐데, 바로 이 성질을 콥과 더글라스가 자신의 모형 구상에 그대로 써먹었습니다.

인간을 두고 흔히 "도구를 만드는 동물(homo faber)"라고도 부릅니다. 사실 원시적일지라도 어떤 도구를 만들어 쓰기 전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에 가깝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자신의 능력을 훨씬 증가시킬 수 있는 어떤 도구를 만들어 온 그 오랜 패턴과 습성에,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4차 산업혁명(저자는 꼭 이 개념을 책 속에서 쓰지는 않고 있습니다)의 트렌드를 포섭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기한 건, 우리들 현대인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능력, 퍼스널하게 몸에 지닌 능력"만을 신봉할 뿐, 기계를 통한 능력 증폭, 대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는 거죠. 저자는 이런 완고한, 혹은 이해가 뒤떨어지는 이들을 위해 "더 예가 필요한가?"라며 다양한 예증을 들고 있습니다. 이래서 제가 이 책을 "경제사, 경제학사, 혹은 문화사 입문서"로 써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고 안 하고와는 별개로 말이죠.

책에서는 "코드 사용의 극한 도전" 끝에 발명해 낸 핵무기, 그에 연관한 프로젝트(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를 거론하며, 다시 윌리엄 제본스를 거론합니다. 윌리엄 제본스 역시 칼 멩거, 레옹 왈라스(레옹 발라) 등과 함께 지지난 세기 이른바 신고전 학파의 3대 개조 중 한 사람인데, 이 책에서는 그 중에서도 특히 제본스를 자주 거론합니다. 이 이론은 참으로 다양히, 저자에 의해 이곳저곳에 적용되는데, 심지어 블록체인의 핵심 이론 파트인 "인증-검증 알고리즘"에까지 이 제본스의 이론을 적용합니다. 이미 네그로폰테 같은 인문학자에 의해 문명, 나아가 인간 본성까지 디지털 부호로 변형, 재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 책에서 우리는 "너무도 코드를 좋아하다 코드 자체로 변화해 버릴지도 모르는, 마치 콧대 높은 사람이 되려다 아예 코 자체로 바뀌어 버린 코발료프 서기관"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찾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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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백신
스튜어트 블룸 지음, 추선영 옮김 / 박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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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에게 맞히는 백신이라고 하면, 아 이런 게 다 나와서 접종이 되기에 지금 우리가 문명사회에 산다는 규정이 가능하구나, 그래도 이런 안심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게, 한 10년 전부터 애 키우는 어머니들 사이에서 불신하는 분위기가 생기더군요. 그 불신이라는 게 나름 근거까지 갖춘 것이어서, 원 이거 세상이 어떻게 뭔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게 아니라, 이런 중요한 분야에서 오히려 퇴보하는 것 아닌가 싶기까지 했습니다.

저희가 자랄 때에도 시스템에다 무작정 신뢰를 보냈던 건 아니었고, 좀 까다로운 동네(출신들)가 흔히 사소한 낌새에도 많은 동요를 보이듯이, "재활용 주사기를 쓴다더라" 같은 헛소문이 돌아 방과 후 대기하던 애들이 전부 도망가는 일도 벌어지곤 했습니다. 나중에 학부모회가 소집되어 조사가 개시되었지만 잡음 없이 깔끔하게 해결도 되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인근 보건소에서 인력이 출장오는 건데 어차피 집행, 할당된 예산을 공무원들이 아껴서 착복할 여지, 동기도 없는 거고(돈 굴러가는 과정이 너무 뻔해서 불가능), 뭐 그런 걸 떠나서 제 생각에는 오히려 그 시절이 못된 잔머리를 덜 굴리던 분위기 아니었을까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은, 어쩌다 이지경까지 사태가 나빠졌던가 싶을 만큼의, 백신의 위험성 그 근황을 주제로 삼습니다. 배경은 물론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영리 추구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는 곳에마저 든 못된 버릇 등에 대한 고발입니다만, 그 외에도 "우리가 애초에 신뢰를 줄 만한 자격을 갖춘 곳에 신뢰를 주고 있었던가?"에 대한 근원적인 점검, 회고가 이어집니다. 의학사의 한 중요 섹터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독자의 교양도 넓히고 현재의 이슈에 대한 각성의 계기도 삼게 돕는다고나 할까요.

신자유주의 이슈가 꼭 아니라 해도, 이 책은 일단 백신 개발의 과거사를 꽤 오래 짚고 넘어갑니다. 이성, 혹은 오성의 개안으로, 당장 기초 단계에서 인간 생존을 위협하던 질병 이슈에 대해 얼마나 더 효율적인 대처가 가능해졌는지의 회고는, 현대인들을 가장 큰 감격에 젖거나 자긍심을 갖게 해 주는 부분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한테도 현대 문명에 대한 신뢰, 긍지를 함양하는 데 이만한 좋은 소재가 없을 정도지요. 그러나 당장 드러난 문헌상의 증거만으로도, "백신"은 태생부터 썩 믿을 만한 존재는 아니었음이 입증됩니다. 정확하게는, 이 분야 선구적인 종사자들이, 공명심이나 탐욕 등 다른 동기를 개입시키는 일이 (아직 영리주의적 풍조가 속속들이 침투하지는 않았을 무렵인데도) 잦았음에 대한 재조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코흐의 경우 아마 아이들이 보던 백과사전이나 위인전기에서 단독 항목으로는 잘 안 다뤄지고, 사항 설명의 곁다리쯤에서 그 이름이 언급되는 정도였습니다. 투베르쿨린 반응은 저희 때에도 널리 쓰이던 테스트 방식이었는데, 이 물질의 개발 초기 코흐는 테스트 시약이 아니라 "백신"으로 이를 활용했다고 합니다. 효과는 당연히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부작용까지 속출했으며, 흥미로운 사실은 캐릭터 홈즈의 창조주이며 본업이 의사이기도 했던 작가 코난 도일이 그 초기 단계에서부터 "효능 없음, 게다가 부작용"에 대한 지적, 예언(?)을 하고 들었었다는 점입니다. 코흐는 이 사건을 계기로 명성이 크게 실추되었다고 책은 정리하는데요, 역시 제 어렴풋한 기억으로도 이분이 그리 썩 좋은 평가로 정리하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빈곤 이슈는 19세기에 유럽 각국에서 꽤 중요하게 다뤄졌는데, 예컨대 맬서스 같은 경제학자, 성직자가 극단적인 회의론, 염세론을 기반으로 독특한 주장을 전개한 건 알고보면 당시의 거대한 담론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더 지독한 결론을 근거도 딱히 없이 제기했던 자들도 많은데 그나마 논거 비슷한 갖춘 고지식한 논자가 후대에 들어 남이 먹어야 할 욕까지 대신 먹고 있는 셈이죠. 여튼 빈민가를 중심으로, 각종 질병에 대한 예방 조치가 강제적으로 이뤄진 데 대해 반발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과거 오히려 취약계층일수록 "나라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겠거니 "하며 묵묵히 순응하던 현상과는 큰 대조를 이루는데(지금은 또 오히려 반대라서 근거 없는 불신 풍조는 무지한 이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곤 하더군요), 이는 애초에 영국, 프랑스 등이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라 국가 형성 단계에서 계급이 엄격히 구분되던 구조였던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때 당사자들이 "양심의 자유"를 들어 강제접종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게 다가올 겁니다. 이는 영국은 물론 대륙법상의 이론체계에서조차, 우리와 기본권 표제 체계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른 항목도 이것저것 포함시켜 해석함)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우리 같으면 행복추구권, 혹은 일반적 행동 자유권 등으로 더 세분화한 조항에서 그 권원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자동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것처럼, 백신이,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사망자 수를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역량을 지녔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신을 독특한 무엇인가가 아니라, 공공보건을 보호하는 기술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사뭇 달라진다." (p209)

책 앞부분에서, 지난세기 코흐 측이 개발한, 부실한 효능만을 지닌 백신이 결국 파스퇴르 측의 더 완전한 솔루션에 밀려 퇴출된 예를 들고 있었습니다. 해당 섹터의 작동원리가 크게 달라지고, 의약학 분야의 발전상도 그때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인데, 적실치 못한 예(적어도, 시기적으로 너무 오래 전 일)를 든 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제 주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련한 저자가 이 점을 몰랐을 리 없고, 그 의도는 p210 이하에서 자세히 드러납니다.

종래의 백신이 다른 더 나은 신약에 의해 자리를 내어준다면, 과연 어떤 수월성 요건을 갖추었기에 이런 대체가 가능한가? 여기에 대해 각국의 보건 당국이, 의식을 갖춘 시민들이 기대하는 만큼이나 잘 확립된 기준을 마련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공신력 있는 제약업계가 많지 않았고, 이들의 전문성이라든가, 혹은 모럴 해저드에 쉽게 빠지지 않으리라는 일정 신뢰가 있었기에 비교적 안정적인 간격을 두고 재선정이나 검토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게, 근래 들어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입법부(국가이건 지자체 단위이건)에 로비가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확고한 컨센서스가 이뤄졌다고 보기 힘든 자의적 기준이 종종 개입한다고 합니다. 물론, 극한의 방식으로 영리를 추구하기에 이른 신자유주의 풍토가 이 과정에서도 크나큰 해악을 발휘함은 새삼 뭘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이쯤에서 책은 다시, 1차 세계 대전 직후를 재조명하며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백신 불신 풍조를 언급합니다. 1925년 독일 뤼벡에서는 BCG 접종을 받았던 이가 "1년 후에"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는데, 이 원인은 일부 batch가 오염된 데서 비롯했을 뿐이라고(p232)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지역뿐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BCG 자체를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영국 역시 북구권에서 해당 약품이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고 유병률 자체가 크게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임상 시험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고 합니다(앞에서 예를 든, 이전 시기 빈곤층 상대 강제 접종은 사실 이 이슈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 시점까지 여전히 각종 실용 기술과 학문적 발전이란 유럽각국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균형과 상호 자극을 받았을 뿐이며, 현재처럼 특정 국가군에서 성과의 과실을 독점적으로 향유하지 않았다는 점도 확인하게 됩니다.

냉전 이후에는 소련이 국제 무대(특히 WTO라든가)에 등장하며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기도 하는데, 당시 소련은 특히 저개발국들을 상대로 "앞선 보건과학기술과 이념의 필연적 귀결인 인도주의"를 들어 소련 주도의 백신 보급과 개발에 특히 역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민간 외교의 전개라기보다는, 정치 선전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의혹의 시선도 받았고, 정작 해당 국가의 백신 기술이 썩 높은 수준에 이르지도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p255). 여기에 미국, 영국 등의 "진영 논리"가 개입하여, 흔쾌히 인정해야 할 상대측(소련)의 성과마저도 부인하고 들기 일쑤였다는 점도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죠. 이러던 갈등상은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야, 인도,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등의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해 미소 양국이 손잡는 국면에서 점차 해소되어 갑니다. 이는 꼭 천연두 예방, 치유라는 특정 질병이나 의학 분야에 한정된 게 아니라, 당시 세계를 강타했던 "데탕트" 무드와도 연결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아마비의 경우 요즘은 관측도 잘 안 될뿐더러 일찌감치 극복이 이뤄진 질병으로 치부하기 일쑤이지만, 1950년대만 해도 심지어 미국, 영국 같은 곳에서도 대규모로 환자가 발생하였으며 그 원인 규명도 명확히 이뤄지지 않은 채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는 등 현대인의 평범한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소란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하긴, 세계 10위권 무역대국인 한국에서도 고작 백신, 고혈압약 따위의 부작용 의혹을 말끔히 해소 못 해 이처럼이나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걸 보면, 문제는 언제나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되었으며 다만 무지와 무관심 탓에 은폐되었을 뿐이라는 점도 확인 가능합니다. 완벽하게 가치중립적인 이슈, 혹은 그런 이슈의 해결 방안이란 불가능하며, 결국 이런 보건 방면의 문제들조차에도 "정치, 잇속, 산업상의 고려"가 반드시 개입하는 씁쓸한 현실을 엿볼 수 있었네요.

서평 중반쯤에, 이 책 p209를 인용한 대목에서 "백신은 그저 공공 보건 증진의 한 수단일 뿐"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분명히 와 닿지 않는 이들도 많았을 겁니다. 자연과학의 필연적, 유일 결론이 존재한다면 이는 다른 정책적 고려 같은 게 낄 수도 없고 끼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기술적 수단"으로 백신 문제를 본다면, 사회정책적으로 다양한 사정을 고려하여, 여러 대안 중 어느 하나를 시민사회의 합의에 의해 결정할 수도 있으며, 오히려 이쪽이 더 바람직하며 일반적이기까지 하다는 함의가 자동 도출됩니다. 이게 현실을 바로 보는 태도이며, 행정학에서 자주 논급되는 이른바 "만족 모형(완벽한 솔루션은 없으며, 현실의 여러 제약과 타협한 방안이 가능할 뿐이라는 주장)" 패러다임과도 일맥상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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