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척도
마르코 말발디 지음, 김지원 옮김 / 그린하우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영하는 도시, 혹은 국가가 그런 질서와 안녕을 누릴 수 있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이들의 노력과 지혜가 쌓여야 하지만, 공동체의 안보, 안정이 무너지는 건 불과 한순간입니다. 그 원인이 질병이 되었든, 혹은 불순한 외부 세력의 간여(干與)와 공작이 되었든 말입니다. 소설은 어느 미스테리어스한 살인 사건(인지도 처음엔 모를 만한)을 해결하는 과정을 다루지만,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만족이 결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라는 교훈도 은근히 전달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르네상스의 천재 기술자,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지만 그가 활약한 도시를 다스렸던 권력자 루도비코 스포르차도 큰 비중으로 나옵니다. 이 소설에 나오지는 않지만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끝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이 소설에서 그가 갖고 노는 멍청한 프랑스 왕이 그 후계자를 맞은 후에는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여 유폐되는 신세로 떨어지는데 바로 자신이 저지른 어느 악행의 경과(이 소설에도 잠깐 묘사되는)와 비슷한 꼴입니다. 역시 인간의 악업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인가 봅니다. 자신이 알든 그렇지 못하든 말입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이 소설 속에서, 또 실제 역사에서, 적어도 통치 초기에는 매우 유능하고 노련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다 빈치가 근거지였던 피렌체를 떠나 그가 다스리는 밀라노로 이주한 것도, 밀라노에서는 광신적 믿음에 들떠 아무 일에나 코를 들이미는 무도한 세력의 간섭을 비교적 멀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수시로, 아니 매우 자주, 무지몽매한 종교 맹신 속에 시드는 인간의 지혜와 각성에 대한 안타까운 느낌이 표현됩니다. 그들은 겉으로야 신(神)의 뜻, 정의를 입에 올리지만 본인들이 신이 아닐진대 누가 감히 신의 뜻과 정의의 본질에 대해 확언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건 비루한 사익과 탐욕에 불과합니다.

어느날 스포르차의 궁정 한복판에 웬 젊은이의 변사체가 발견됩니다. 변사체라 함은 그 죽은 원인이 특별히 수상하게 보이는 시체를 가리키는데, 겉으로 보아 자연사와 다를 게 없으며 점성술사 등 일 모로가 거느리는 전문가(?)들은 질병의 창궐, 즉 직전 시기에 전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재유행 조짐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현재 코로나 때문에 고생하는 한국 독자들도 괜히 신경이 쓰이죠(이 소설은 몇 년 전에 지어졌습니다). p79에는 편지를 소독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러나 시신 앞에서 다 빈치는 유독 긴장된 반응을 드러내고(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후반부에 밝혀집니다), 이 젊은이가 색다른 방법으로 타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후부터 우리 독자들과 다 빈치, 권력자 일 모로가 함께 그 진상을 추적해 가야 합니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 소개가 꽤 긴데 보통 소설 앞에 놓인 캐릭터 요약은 굳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 부분이 거의 본문의 일부에 가까워서, 좀 힘들더라도 미리 읽어 두는 편이 좀 낫습니다(안 그래도 상관 없지만). 소개에서도, 또 본문에서 샤를 8세는 많이 모자란 위인으로 나오는데 다른 누구보다 전지적 시점의 작가가 가장 큰 경멸감을 가진 듯합니다. "무장은 우리가 하고 전쟁에는 네가 나가라"가 아마 샤를 8세의 모토가 아니었을까 하는 문장이 있는데 저는 1970년작 영화 <패튼>에서 병사들의 불만이었던 "His guts, our blood."가 생각 났습니다.

소설 처음에 페라라 공국의 대사(밀라노에 파견된)가 나오는데 기대보다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주의깊게 봐 둬야 합니다. 사실 인물 소개에 나오는 인물들 중 상당수는 본문에서 비중이 적거나 아예 안 나오곤 합니다. 소설을 2/3 정도 읽고 "이 많은 사람들은 언제 다 나온다는 건지?" 싶었는데 혹시 작가가 시리즈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릅니다(기대가 되는데 말이죠). 페라라의 지배자 데스테 가문은 유럽 전체에서 손 꼽는 명문가로서 찬탈자 스포르차 따위와는 격이 다르죠. 이탈리아 드라마 <보르자>에서도 교황 알렉산데르를 배출한 보르자 가문을 서슴없이 무시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너무 가문이 비천해서 니네 집안 딸(루크레치아)은 못 맞아들이겠다고 하죠. (그러나...)

이 소설에는 전지적 작가의 내레이션이 수시로 끼어들어 코믹한 멘트를 치는 게 하나의 특징입니다. p38에는 "이상한 소리 같겠지만 15세기에 밀라노는 이미 교통 체증을 겪었다.", p157에는 "현대의 꽉 막히는 길을 SUV로 달리는 기분"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통 체증은 대도시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치르는 곤욕이며, 원래 기술이라는 게 이런저런 불편을 딱 그 시대가 감당할 만큼만 발달하는 까닭이죠.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p60에는 "요즘은 시(詩)가 아니라 인터넷을 보고 (경험하지도 못한 바에 대한) 헛소리를 떠든다"는 말도 나옵니다. p63에서 "공작에게 공작은.."은 같은 대목에서 역자가 적절한 보충어구를 끼어 넣어 약간은 난해한 작가의 원문이 매끄럽게 읽힙니다. "계속 부연 설명을 해서 미안하지만..." 같은 유머도 여전합니다.

p38에 "갈레아초는 미남이라 레오나르도가 관심을 보일 만한..."이라든가,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아들처럼"(p117), "베네치아식 취향" 같은 말로 다 빈치의 성적 취향을 제멋대로 짐작하는 다른 인물들의 대사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나 소설 후반부에 나오듯, 다 빈치의 성향을 지레짐작하고 수작을 건 어느 인물이 웃음거리가 되는 장면에서 작가는 이런 추측들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셈이죠. 소설에 등장하는 다 빈치의 어머니도 도통 장가 들 생각을 하지 않는 아들에 대해 걱정하는 말이 있는데 다 빈치는 적어도 그건 아니라는 식으로 대꾸를 합니다. 결국 이게 거짓말은 아닌 걸로 소설에서는 정하고 갑니다. 작가 에필로그에 "섣부른 추측은 그 정도 되는 천재에게 예의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독자인 제 생각도 그렇네요.

p56에 "사회적 승격이 제한된 프랑스의 군인들은 이탈리아 인들과는 달리 죽기살기로 싸운다"는 말이 있는데 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19세기에 대영제국이 그처럼 번영한 것도, 사회적 하층민이 식민지에서 열심히(?) 일한 덕을 보았지요. 한편으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의 꽃이 활짝 핀 건, 이런 열린 사회의 특성에 기댄 바도 큽니다. 다 빈치가 프랑스에 태어났더라면 과연 그처럼 활력을 얻을 수 있었을지.

p74에는 발기부전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임포텐치아 코에운디"가 나오는데 coeundi는 어느 동사의 동명사꼴에다 다시 소유격을 취한 꼴입니다. p82에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연상하는 마시밀리아노라는 이름으로 어린 아들을 불렀다고 하는데 그거야 작가의 상상입니다.
"막시밀리안"이란 이름이 이탈리아식으로 자음 생략된 형태인데 이것 말고도 여러 예가 있습니다. p84에 레오나르도는 라틴어를 잘 모르고 실력이 형편없다는 말이 있는데 저 뒤 p134에도 consider의 어원이 "cum sideribus(별과 함께)"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현대의 어원학자들도 고작 그 정도밖에 못 밝혀내었죠. 물론 그 당시의 학자들(와 교양인)에게 기대치가 더 높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p109의 라틴어 표기에서 페라라의 지배자 에르쿨레라는 이름이 Heracules에서 유래했다는 걸 우리 독자들이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저 뒤 p208에도 나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천재성은 여러 대목에서 작가의 생생한 필치로 묘사됩니다. 예를 들어 "2D가 3D보다 훨씬 구현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고대 회화가 하나같이 우습게 보이는 건 원근법 등 특정 기술이 발견되기 전이어서이다. 한편 조각은 하나같이 빼어나다는 설명이 따라옵니다. 백번 타당한 서술이죠.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p105에 "그를 만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관습적인 가벼움"이라든가, p117의 "사근사근함" 같은 표현에서 특유의 유쾌한 성격이 드러납니다.

p179의 "제 자신이 판 함정"은, 만약 다 빈치 본인이 거짓말을 했다면 주위 점성술사들의 대세 의견에 따라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하면 그만일 것을 구태여 살인이라며 일을 크게 벌일 게 뭐 있겠냐는 항변이고 이걸 일 모로가 잘 이해하는 대목입니다. 윗사람이 머리가 나빠서 괜한 의심을 일삼으면 아랫사람이 참 미치기 직전까지 가죠. 이 소설은 일 모로와 다 빈치가 여러 번 충돌하고 때로는 좋지 않은 기색으로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 통에 독자가 괜히 긴장도 하게 되는데 이게 다 작가의 페이크이니 속으면 안 됩니다. 은근 반전과 복선이 많은데, 다만 작가가 현학적인 말투라서 이 멋진 장치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작가는 장에서 다른 장으로 넘어갈 때, 전혀 다른 장면과 인물들 사이의 사건을 두고 공통된 단어로 연결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p139의 "명령"이라든가, p112의 "물론 긴장했지", 그 외에도 많은데 일종의 이중노출 기법일까요? p286 "화가서로 -> 화가로서" 같은 게 유일한 오타이며, "지아코모, 지오아키노" 같은 인명은 국어원의 이탈리아어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자코모, 조아키노 등으로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p108 "알프스 건너편 사람 억양" p109 "알프스 아래쪽" 같은 표현은 아직도 유럽 문명의 중심이 이탈리아에 놓였을 무렵, 심지어 알프스 건너편에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표현의 흔적입니다. p185에는 "진짜 명나라 도자기를 깬 코커스패니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멋진 비유이며 과연 이 무렵에는 중국 대륙에 명조가 있었지요. 명나라라면 이미 중국사의 황혼기인데 유럽에선 겨우 이 시기에 본격 문명이 꽃피었으니 두 대륙의 성숙도 차이를 실감합니다. p200의 익명의 제노바인 항해사는 물론 콜롬부스입니다. p211 화음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 대목은, 왜 그렇게 우리가 서양 고전 음악에서 평온한 쾌감을 느끼는지 잘 설명해 줍니다. 아름다운 건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의 관계이며, 이를 동아시아 음악에선 구현하는 데 실패했죠. 안타깝게도요.

책표지에는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며, 그 실수를 통해 발전을 하는 게 인간의 척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편으로,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신의 뜻, 정의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어떤 무지, 광신을 극복하는 게 참된 인간의 척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존엄에 대한 요구와 분노의 정치에 대하여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란 대체 누구일까요?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0년대 후반 <역사의 종말(혹은 종언[終焉])>을 써서 전세계적 유명세를 탄 학자입니다. 또 이후 그는 저작 <트러스트>를 통해, 이른바 사회적 신뢰가 있는 사회(국가)와 없는 사회를 준별하여 또한번 화제에 오른 바 있습니다. 이 중 <역사의 종말>은, 인류가 더 이상 이념과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도도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 물질적 영달에만 골몰하게 된다는 취지로 "역사의 끝"을 선언했기에 엄청난 여파를 불렀더랬죠.

재미있게도 그 예측은 다소 묘한 방향으로 빗나간 듯 보이는데, 그동안 이 교수님이 적잖이 피곤했던 듯합니다. 이 책 서문에서는 그에 대한 일종의 해명을 내놓고 있는데, 독자에 따라서는 변명(?)으로도 읽혀 무척 흥미롭습니다. 똑똑하신 분이 자신의 전적에 대해 진땀을 흘리며 해명에 나서는 건 여튼 보기에 재미있기 때문이죠. 물론 저는 그런 해명의 취지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편인 독자입니다. 학자는 점쟁이가 아니기 때문이죠.

여튼 그건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고, 다시 이 책 제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존중 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대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그 전에, 우리는 일상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존중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흔쾌히 "예"라고 나오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 책은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쳐도, 그런 우리들(?)을 위해 정치학씩이나 필요한 걸까요?

책을 다 읽은 독자인 저로서는, 이 제목이 누굴 염두에 둔 것인지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고 생각합니다). 잘라서 말하자면, 교수님이 물론 일상의 우리들을 일차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쓴 건 아닙니다. 이 책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란, 분명 어떤 특정 그룹, 특정 사회,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겁니다. 허나 예컨대 문제적 사회, 혼란한 위기의 공동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법한 한국인들이, 과연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그거 장담 못하겠다" 싶었습니다. 지금부터 차근히 저자의 주장을 저 개인적 시각에서 리뷰해 보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아이덴티티>입니다. 몇 달 전 광화문에서 조국 장관 반대 시위가 벌어졌을 때, 청와대의 한 관계자(라고 언론에 나온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최측의 정체성이 모호한 시위이다." 아마 이 책 제목, 또 내용에서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는 이 맥락에서의 의미와 좀 닿아 있을 것입니다. 또, 뭐 구태여 특정 맥락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보통 쓰곤 하는 그런 의미의 "아이덴티티"와 그리 다르지도 않습니다만 여튼 저자가 논하는 건 좀 더 현대적인, 우리가 사는 지금의 시대에 포커스가 맞혀져 있습니다. (이 책에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다룬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 읽고 나서 보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이라는 우리말 제목은 참 잘 붙여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이 책에서 말하는 "존중"이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서문 도중인 p12에 보면 이 책의 핵심 개념으로서 책을 읽어 나가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두 가지 키워드가 나옵니다. 옮긴이께서도 본문 중 역주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듯이, 그리스어에는 "투모스"라는 개념이 있는데, 혈기, 격정, 기개 정도의 뜻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 기원은 소크라테스의 이론에 서 찾으며, 인간의 혼에 대해 설명할 때 용기, 분노, 격분, 자부심 등이 일어나는 부분이라는 게 역자의 설명입니다(p12). 이 정도로도 대략 무슨 뜻인지는 독자에게 충분히 감이 옵니다. 참고로 사실 투모스는 원 발음으로 "튀모스"에 가깝고 왜 고 이윤기 선생 책에서 신화를 "뮈토스"라 쓰는 것과 같습니다만 책에서 이렇게 개념어 표기를 고정시키므로 그대로 따르는 게 좋겠습니다. 앞으로 일상에서 토론 같은 걸 할 때에도 괜한 혼란 없이 "투모스"란 단어가 정착했으면 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 투모스의 근원에 대해, 저자는 인간의 두 가지 욕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대등 욕망"이요, 다른 하나는 "우월 욕망"입니다. 내가 이 정도는 남들처럼 대접 받아야지 하는 게 전자이며, 그를 넘어 내가 남들처럼 대접 받고 그칠 수는 없다는 게 후자인데, 전자 못지 않게 후자 역시 흔한 인간의 동기와 본성, 욕망 중 하나입니다. 즉 사람은 의외로 "아니 이거 내가 누군줄 알고 니들이 감히!" 라며 발끈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심심하면 터지는 갑질 파문이라는 게 다 뭣에 기인하겠습니까.

저자가 조명하는 건, 현재 국제 사회가 왜 이렇게 시끄럽냐는 겁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이런 욕망, 이런 인정 욕구, 이런 감정 반응을 개인 차원 아닌 집단 차원에서 발현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겁니다. 미국에서 흑인, 여성, 성소수자, 빈곤층 등이 제각각의 이유에서 대등 욕망을 표현하는 게 작금의 혼란으로 드러나며, 국제 사회 역시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한 종족, 민족, 혹은 강대국에 의해 과거, 혹은 현재 핍박을 받은(혹은, 그렇다고 여기는) 국가가 이런 동기에 의해 행동한다는 겁니다. 이들이 모두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이며, 현대 정치(국내이건 국제이건)는 바로 이 점, 이 현상에 주목해야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물론 종족의 자부심, 자존감, 독립 욕구, 혹은 남을 지배하려는 충동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특히 현 21세기 초에는, 어떤 계급 해방이라든가, 거대 민족 사이의 패권 다툼이라든가, 자본의 피말리는 경쟁 구도 같은 것보다 이 요인이 더 지배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작용한다는 게 저자의 견해입니다. 확실히,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테러, 분쟁, 총기 난동 등은 이 요인으로 어떤 통일적 설명이 가능합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이들의 정체성이야 사건마다 천차만별일망정 말이죠.

p22에는 샘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이 언급됩니다. 이 이론 역시 이 책 저자 후쿠야마 교수의 <역사의 종언>과 비슷한 시기에 제기되었습니다만 훨씬 강한 설명력과 유효성을 여태 유지하는 듯합니다. 아무튼 이 무렵부터 이념 대결이 종식되고 세계는 구미, 그 중에서도 미국 중심으로 문화, 경제 등 모든 면이 재편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경제 체제, WTO가 주도한 국제 분업 체제가 특히 심각한 도전을 맞았습니다. 이 책은 2018년에 저술되었으므로 코비드 19의 만연까지는 목도할 수 없었지만, 현재는 서플라이 체인이 이 전염병 대유행 탓에 결정타를 맞고 구조 재편을 꾀하는 중입니다. 여튼 저자는 전염병 이전부터 이미 "존중받고자 하는 자들의 몸부림" 때문에 세계화 추세가 멈출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는 거죠.

일단 값싼 노동력을 찾아 선진국의 기업과 자본이 해외로 이동하고, 그 와중에 기존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고 생계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무리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이라 해도 이들은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에, 자국 내에 들어와 있는 불법 체류자들을 향해 거침 없이 혐오의 표현을 내뱉고 일자리와 자존을 지키려 듭니다. 이것이 표면화한 결과가 2016년 "국외자" 트럼프의 집권으로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몇 달 전 브렉시트 역시 국경이 허물어진 EU 로부터(혹은 그 권역 외로부터까지)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경계심이 발동한 후과입니다.

유럽에 이주한 아랍인, 북아프리카인들 역시 이런 "투모스"를 표현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왜 너희들은 종교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를 차별하는가? 이런 몸부림이 각종 테러로 나타나는 건데 설령 동기면에서 납득이 갈 부분이 있다 해도 여튼 폭력이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 와중에 서유럽은 기존의 존경, 권위, 리더십을 잃고, 그 결과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회의도 확대되었으며, 이는 다시 중국, 헝가리, 터키, 필리핀 등에서 발호하는 신 권위주의, 독재체제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죠.

저자는 특히 ISIS 같은, 명백히 인류 보편의 가치와 상식에 반하는 집단에 대해서조차 젊은 세대가 자발적 참여 행태를 보이는 데에 경악합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기존의 사회, 기성 체제가 보여 주지 않은 관용, 포용, 존중을 바로 저 반사회적 반인륜적 기구, 집단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당장 대한민국의 "김군"만 해도 자발적으로 찾아가 입대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게 역시 "존중받지 못한 자의 몸부림"에 해당합니다. ISIS에 소속된다고 해서 무슨 실질적 존중이나 물질적 혜택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의 천국을 약속하며 그들은 이런 어린 대원들에게 자살 공격 따위를 거리낌 없이 시킵니다. "죽음"이란, 현생의 종말을 뜻하는 건데 대체 사후의 복락, 쾌락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도 이들은 "투모스"를 충족하기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내가 어떤 이념, 더 큰 자아를 위해 죽는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무한한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겁니다. 인간의 행동 동기 중에는 이처럼 비이성적, 비타산적(?)인 것도 있습니다. 아쉽지만 이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고, 저자는 이런 본성이 종족, 민족, 국가 단위로 나타나는 현상, 부작용 등을 분석하는 거죠.

저자는 니체의 이른바 초인 개념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기존 개념과 가치를 모두 재평가하고 새로이 창조하는 존재입니다(p102). 그런데 작금의 무질서와 혼동은, 이런 니체식 의미에서의 각성에서 기인하는 게 아닙니다. 니체의 초인은 어디까지나 개인 레벨의 각성이지만, 현재의 "정체성 몸부림"은 개인이 아닌 집단 정체성 차원의 모색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월한 민족, 남성, 백인, 기독교(혹은 이슬람)인 집단"을 그들 행동의 준거로 삼고 이를 맹렬히 내세웁니다. 이런 움직임은 (앞서도 말했지만) 21세기에 들어 처음 나타난 게 아니고 예컨대 에스파냐의 카탈루냐인, 바스크인 등 소수 민족들이 수십 년 전부터 표방해 온 움직임입니다. 다만 아일랜드 분리주의나 바스크 민족주의는 지도자들의 성숙한 결단에 의해 차츰 수그러드는 추세(역주에서 에스파냐 북동부라고 한 건 아마 역자의 착오인 듯합니다. 카탈루냐는 북동부가 아니라 남동부죠)이며, 반대로 저 멀리 스리랑카의 분쟁은 엉뚱하게도 일방의 패권이 우세해지며 폭력적으로 종식되는 단계입니다.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 역시 21세기에 들어 이론적 분석의 집중적 목표가 된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새로 탄생한 "행동경제학"의 경우, 사람들은 크기에 무관하게 이익보다는 손해의 회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익의 경우 아무리 액수가 크고 확률이 높아도, 만약 작은 손실이나마 감수해야만 한다면 쉽사리 선택을 안 한다는 겁니다. 저자는 이런 심리를 중산층, 빈곤층 등이 느끼는 비이성적 반응에까지 적용하여, 혹시나 상실될 수 있는 계급적 이해(근거가 없다 쳐도)에 왜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하려 시도합니다. 이 대목에서도 저자는 헌팅턴 교수와 예전 알렉시 드 토크빌의 책을 인용하는군요.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건, 이것 연관하여 저자가 태국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비교적 자세히 분석하는 대목입니다.

"각 집단에게, 외부인은 가질 수 없는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는 믿음은 1970년대 대중문화에서 빈도가 급증한 체험이라는 단어에도 반영되어 있다(p181)." 사실 이런 믿음은 잘못된 것이지만, 특히 우리 같은 단일민족이 소중히 여기는 착각이기도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경험과 체험(lived experience)은 서로 다르며, 이는 독일어 단어 Erfahrung과 Erlebnis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합니다(같은 페이지 중반부). 이에 저자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는데, 에를레프니스를 에어파룽으로 전환하기를 어려워하는 대중이, 공동의 기억을 와해시켜 가며 마침내 폭력성으로 전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p182). 이를 두고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야만성의 시대를 논하며, 바로 이 개념에 착안한 게 저자의 "정체성 위기"라는 겁니다. 독자인 제가 주관적으로 정리하면, Erfahrung은 보편적 가치를 담은 경험, Erlebnis은 분개와 원한이 그대로 녹은 미성숙한 체험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네요.

이제 다시 이념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역사의 종말을 어떤 이념의 종말로 인식한 건 당시 미디어와 대중의 오해이며, end는 종말이라기보다 목표, 도착지점에 가깝다"고 합니다. ㅎㅎ 솔직히 저는 고개가 갸웃해지지만 이 저자께서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분석틀 중 하나로 줄곧 사용해 온 것은 사실이며 이 책에서도 요소요소 전통적 좌파 사회과학 키워드가 기본 프레임으로 인용됩니다. 이제 논의는 기존의 좌파, 우파 정치 진영이 이런 현상을 어떻게 대처할지로 이어집니다. "빚을 내어서라도 명품을 걸쳐야 한다"는 많이 모자란 허영심을 정체성, 존중감의 일부로 삼는 낙오자가 만연한 사회 역시 결코 정상이 아니며, 좌파 우파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실 대응 능력과 균형 잡힌 인식을 어떻게 함양할지에 대해 이른바 지도자들이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듯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화의 힘 Philos 시리즈 4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과 방송인 빌 모이어스 사이의 대담을 싣습니다. 책 자체는 한국어판이 십 수 년전에 이미 나왔더랬고, 생전에 이윤기 선생이 번역까지 하여 큰 관심을 모았던 책인데 이번에 21세기북스에서 새 장정으로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더 깔끔하고 보기 좋은 편집이 된 듯도 하고, 언제 읽어도 심오한 진리를 담은 대담 내용이라서 독자는 새롭고 경건한(그러면서도 유쾌하고 재미있는) 기분으로 정신을 물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한, 일종의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며 <천의 얼굴을 가진...> 같은 책이 큰 화제가 된 적도 있죠.

"그 영적 잠재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까?- 모이어스"(p30)
"선생님께서는 신화의 정의를 의미의 모색에서 의미의 체험으로 바꾸신 거죠?-모이어스"(같은 페이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캠벨은 석가의 염화시중 고사를 인용합니다. 누군가 삶의 오의를 물었고 석가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꽃을 들었을 뿐이며, 이에 좌중의 단 한 사람만 의미를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는 대답을 합니다. 우리가 모두 알듯 이 좌중의 한 사람은 석가모니의 제자 중 한 분인 마하가섭이죠. 참된 의미는 이미 분석의 대상이 아니고, 실제로 체험(육체적, 감각적인 것이든 순수 내적인 것이든 간에)을 해 봐야 알 수 있을 뿐이라는 게 캠벨의 의도이겠습니다. 그 전까지 서양의 거의 모든 신화학자(나아가 인문학자)들이 취한 태도와는 사뭇 대조적이고, 여기서 우리는 동양인 독자로서 뿌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뜬금없이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데, 캠벨 박사께서 무슨 인생 상담을 해 주시나 싶지만 일단 그는 신화의 한 화소로서 결혼을 언급할 뿐입니다... 만 읽다 보면 진짜 인생 상담도 겸하는 걸 우리 독자들은 느낄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건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신의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졌다는 원형적 발상이 깔려 있고, 결혼할 때 서양의 남녀들이 "You complete me."라고 말하는 뜻을 이해해야 더 잘 와 닿을 듯합니다.

"나(캠벨)에게는 이것이 바로 비교신화학에 입문한 계기였습니다.(p40)" 이 책의 날개에 보면 "북미대륙 원주민 신화와 아더왕 전설(sic.)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걸 깨달은 캠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히 이 대목을 염두에 둔 요약 소개이겠습니다. "고만고만한 중류 가정 출신의 처녀들에게 어떻게 정통 종교와 다른 이 신화를 가르쳤습니까?"라고 묻는 모이어스는, 이 무렵만 해도 구식 기독교 가정 문화에서 압도적인 영향을 받고 자란 여성들에게 자유분방한(때로는 문란한) 신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의미를 교습(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말했지만)하려는 시도가 적잖이 어려웠으리라는 짐작을 하는 거죠. 그에 대해 켐벨은 "젊은 사람들은 덥석 집는다"는 말로 한칼에 자릅니다. 뒤에 나온 설명을 요약하면, "신화가 곧 생생한 삶의 표현인데 이를 받아들이는 데 무슨 장애가 있겠냐"는 겁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캠벨의 내러티브가 워낙 힘이 있기에 가능했겠죠?

이어 캠벨은 말합니다(p43). "신문을 한번 보세요. 엉망진창입니다. 예전에는 미덕이던 게 오늘날에는 악덕이 되었구요. 예전에 악덕이던 게 오늘날에는 필요악 정도가 되었습니다." 캠벨은 사회와 시대상이 변한 만큼, 종교는 이제 더 이상 윤리와 도덕률로 작용하기 어렵게 낡은 틀이 되어 버렸고, 반면 유연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화는 시공을 초월하여 "낡은 종교"를 (어느 정도는) 대신할 수 있다는, 이미 (그 여학생들에게) 대신하고 있었다는 게 캠벨의 암시이겠습니다. 게다가 신화는 종교와 달리 재미있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이 왜 하필 13개의 주(州)로 출발을 잡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는 없고, 멀쩡한 주를 두 개로 쪼개어 14개로 출범한다든가, 아직 제도가 미비한 테리토리가 더 성숙하길 기다린다든가 하는 여유를 부리기에는 현실이 급박했겠죠. 고작 미신 때문에 말입니다(버지니아에서 웨스트버지니아를 분리한 건 그보다 훨씬 후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여기서 캠벨은 그 연혁적 이유를 설명하는 건 아니고(역사학자가 아니니까요), 피라미드의 몸체에 나 있는 구획이 13개이며, 미국 독립 연도인 1776에서 숫자 하나하나를 다 더하면 이성의 숫자 21이 된다며 수비학(?)적 풀이를 합니다. 13 역시 불길한 숫자가 아니라, 예수와 십이 사도가 곧 죽어서 재생(원문 그대로입니다)하니 이는 현세 초극의 상징이라고까지 말합니다(독자는 바로 이런 맛에 캠벨을 읽는 것입니다). 12궁 역시 태양의 숫자를 더하면 13이 되지 않냐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대담하게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런 사정까지 다 감안하여 독립 당시 연방 가입 주 수를 13으로 정했다고까지 하는데 ㅎㅎ 과연 켐벨 답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인문적 상상력으로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부활과 재생과 새 생명의 상징이 13이라는 게 그의 결론 - 그 다음에는 "이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라는 강조까지 덧붙이네요. 이러니 여대생들에게 인기를 끌죠ㅋㅋ 그에 그치지 않고 국장에 나오는 라틴어 "노부스 오르도 세클로룸"이라는 구절 역시 자신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합니다. 저승의 그 국부들이 들으면 무척 흐뭇해할 것 같습니다.

다만 그저 웃어넘길 게 아닌 대목은, 캠벨은 이 책(이 대담)에서뿐 아니라 전(全) 저작, 전 강의를 통해 일관되게 강조하는 주제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삶의 재생, 신의 모방(을 통한 인간의 불멸 동경)"인데 13이라는 숫자에까지 이런 의미를 부여, 강조하는 대목에서도 독자는 그의 사상과 주제의식의 일관성을 감 잡아야 할 듯합니다. "동경"이라는 주제어에 대해서는 책 좀 앞으로 돌아가서 p43에 보면 자세히 나옵니다. 또 그의 주된 필드가 비교신화학이라는 사실과, 기발하게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미국 국장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는 그의 시야를 우리는 동시에 염두에 둘 필요가 있죠.

"인류는 어떤 것을 노리고 이런 식으로 산화를 다룬다고 생각하십니까?(p108)" 모이어스의 질문에서 "이런 식"이라는 건 각국, 각 종족의 창세 신화가 상당한 차이를 보이면서도 일종의 원형을 공유하는 걸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켐벨은 "삶의 체험과 초극 의지의 조화(상반되는 둘 사이의)"를 의도한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p270에서 두 사람은 "녹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녹기사를 다룬 영화로는 <용사의 검>이라는 숀 코너리 주연의 1984년작이 있는데 꽤 재미있고 예전에 KBS 2TV 토요명화 시간에 더빙으로 틀어 준 적이 있습니다. p151에서 두 사람은 아름다움의 창조라는 관점에서 샤머니즘을 분석하는데 왜 저기 토테미즘을 보면 부족이 특정 동물을 숭배하죠.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왜 짐승 따위를 숭배하는지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어색할 때가 있는데 이 두 분 대담 속에서 그 모순점이 거의 해명되는 듯합니다. 물론 이게 유일한 해명은 아니고 많은 설명, 답안 들 중 하나이겠죠. p237에는 불(의 이용과 발견) 덕분에 인간은 짐승과 비로소 결별할 수 있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p151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일본 사무라이 특유의 恩과 恥의 관념에 대해 다루는데, 어느 사무라이가 주군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잡았는데, 상대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더랍니다. 그러자 이 자는 원수를 그냥 놓아주는데, 이유인즉슨 "지금 원수를 갚자고 처단하면 이는 내 개인의 감정 풀이일 뿐 대의의 실현이 아닌 게 된다"는 거랍니다. 그래서 원수를 다시 놓아주고 추적해 들어가는, 처음부터 다시 그 기나긴, 고된 과정이 되풀이된다는 거죠.

"체험"은 이 책 내내 되풀이되는 관념으로서, 역시 캠벨 사상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p124에는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看取)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며 예로 "스키를 책으로 배울 수 없다"고도 듭니다. "간취" 같은 번역어에서 이윤기 선생의 흔적이 느껴지기도 하죠? 다음 페이지에는 성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聖別로 씁니다(남녀라는 뜻이 아닙니다). p183을 보면 consecra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거하고 서로 통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네요.

p221에는 "인생에 있어 자신만의 천복(天福)을 소중히 여김"이란 대목이 있습니다. 뭐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저 개인적으로 좀 울림이 깊은 문장이었네요.

저 앞에서도 "변화한 시대를 더 이상 포용할 수 없는 낡은 종교의 옷"이 여러 번 언급되었는데 p259에도 또 비슷한 지적이 있습니다. "강령, 계명 때문에 종교는 신학으로 축소되었다." 물론 강령이나 계명, 나아가 신학에도 특별히 긍정적인 의미 부여가 가능하지만 여튼 켐벨은 그런 뜻으로 썼다는 것입니다. p214에는 살바도르 달리의 십자가형 그림이 도판으로 나오는데 네이버에 보면 달리가 특별히 4차원으로 고안해 그린 그림이라는 멋진 수학적 설명이 나오니 한번 참조하십시오.

pp.54~55, pp.264~265 두 군데에 걸쳐 영화 프랜차이즈인 스타워즈에 대한 재미있는 수다가 펼쳐집니다. 이로써 왜 캠벨의 신화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고 현대의 독자들에게 광폭의 호응을 얻는지가 잘 설명됩니다. 해당 페이지에는 영화의 스틸 사진 몇 컷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참고로 p49에는 존 웨인의 어느 출연작에 대해서도 도판 하나와 함께 언급이 있는데 이게 바로 "왜 조셉 캠벨인가?"에 대한 대답 그 작은 실마리 하나를 제공한다고나 해야겠네요.

p204에는 유명한 안드레아 만테냐의 <악덕을 제압한 지혜의 승리> 도판이 나옵니다. 이 페이지 전후로 약 열 쪽에 걸쳐 컬러 도판이 모여 있고 독자는 작품 언급이 나오는 해당 챕터를 비교해 하며 읽는성의를 좀 보여야 합니다. 만테냐는 대표작 <십자가형>으로 잘 알려진 르네상스 화가인데 참 무서운 그림이고 이후 후배들의 많은 작품에 영향도 주었죠. p211에는 구원(atonement)이란 단어를 "at-one-ment"라고 재미있게 파자(破字)했는데 이게 그저 말장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캠벨 사상에서의 "생각과 하나되는 체험(과 그를 통한 깨달음)"을 함께 떠올려야 합니다.

p211에는 영웅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물리적 삶을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이라는 건데, 멋지지 않습니까? 몇 페이지 뒤로 가면(p211) 예수의 말,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을 인용합니다. 이게 바로 켐벨이 파악하는 신화상의 영웅인 것입니다. p363에는 그노시스 계열에서 중시하는 토마 복음에 대한 짧지 않은 평가도 나옵니다. 이 모든 이질적인 토픽이 "신화"라는 캠벨식 개념에서 하나로 엮이는 것입니다.

신화가 어렵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일상에서 매번 겪는 체험의 연장선상이며 가장 소박한 진리의 표명이라는 점은 캠벨만이 구사할 수 있는 친숙한 내러티브 속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이래서 고전 명작은 언제 어디서 읽어도 유익하며, 매번 새롭고 재미있기까지 한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기와 성 - 사이코패스의 심리와 고백
리하르트 폰크라프트에빙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의 광기는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발생하고, 여러 가지 패턴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광기가 반드시 성(性)과 관계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상당수는 성과 밀접한, 그리고 이상한 방법으로 관계가 있겠습니다. 광기와 성이 이처럼 긴밀한 관계를 갖는 걸 보면, 언젠가는 성적 이상 발현(흔한 말로 "변태"라고 하는 것)으로 모든 광기를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물론 전혀 아닐 수도 있죠). 혹, 만약 그런 날이 오기라도 한다면, 아마 그 훗날의 연구자들은 이 고전에 큰 빚을 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사드 후작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욕구, 행태로 당대에 큰 물의를 빚었고(현대인의 관점이라면 N번방 저리가랄 만큼의 극악무도한 범죄), 그 결과를 책으로 쓰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폰크라프트에빙은 점잖은 의사요 학자였습니다.

이 책은 처음에 라틴어로 쓰였다고 하는데, 라틴어가 국적 불문 유럽의 모든 학자에게 필수 교양이었고 학술서가 쓰이는 언어였던 건 이때로부터 몇 세기 전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니 꼭 라틴어로 쓰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구태여 저자가 그런 태도를 취한 건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임상(?) 서술이, 일반 독자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겠으니, 당국에서 검열을 통해 엄격한 제한을 가할 수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다만 책 뒤 후기에 보면, 이 책은 "독일어 원전"을 다시 프랑스어로 옮긴 판본을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사드 후작의 책도 대략 8, 9년 전에 한국 문체부에서 판금 조치가 내려졌던 걸 해당 출판사가 소송을 해 바로잡은 적도 있습니다. 이 책 역시 한국어로 쉽게 쓰여진 걸 보면 여러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많이 불편해지는 대목도 있습니다만 여튼 고전을 읽는 자세, 공부하는 태도로 읽어낼 수 있는 책입니다.

책날개에 보면 체자레 롬브로소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아마 학부때 법학, 그 중에서도 형법학을 공부했다면 귀에 익을 듯합니다. 공교롭게도 그때로부터 백 년 전쯤에 베카리아라는 학자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이분도 퍼스트 네임이 "체자레"입니다. 여튼 롬브로소는 p91 하단 등에서 다시 인용되는데 이 책이 학술 고전이라는 점 독자들은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이 책은 다양한 사례에 대한 보고(report) 형식입니다. 그 중에는 저자가 직접 치료하고 상담했던 이들의 케이스가 많은데, p121에 보면 ".... 나는 (저자) 폰크라브트에빙 박사의 책을 읽고 도움을 받아 ..." 라는 대목도 나오죠. 책에서 이른바 자기 언급(self-reference)이 등장하는 건 언제 봐도 흥미롭습니다. 여튼 이 고백에서 사례자는 "... <톰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읽고(물론 우리가 잘 아는 그 스토우 부인의 소설입니다) 성적 흥분을 느꼈다..."는 충격적인 진술도 합니다.

특히 주인공 엉클 톰 등이 채찍질을 당하는 대목에서 그러했다는 건데(...), 우리는 한숨이 나오죠... 뭐 여튼 이 책에서 잠시 다른 대목을 보면 p171에서 채찍질에 쾌감을 느끼는 여러 다른 시대의 사례가 다뤄집니다. 중세에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며 참된 종교의 오의를 탐구한 이들을 가리켜 편타고행자라고 불렀는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잠시 언급이 나오며, 댄 브라운의 메가셀러 <다 빈치 코드>에도 flagellation, flagellist가 나오죠. 원서로 읽으면 이 단어들이 그대로 언급되니 예전 기억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p97에는 카트린 드메데시스의 악행을 언급하며 혹시 이것(성 바르톨로뮤의 학살)이 그 여인의 뒤틀린 성향에 기인하지 않았는지 하는 암시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광기, 성적 좌절, 분수에 넘는 비뚤어진 권력욕, 터무니없는 과대망상,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 열등감,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의사 결정 등이 분명 어떤 식으로건 정신 분석의 대상이 된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 가장 깊은 기저에 "성"의 문제가 깔려 있을 수도 있고요.

이 책에는 자위행위에 대한 언급이 아주 자주 나오는데 이 패턴이 당시에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취급되던 풍조를 반영하는 듯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죄로 취급하여 고해성사 때 고백할 항목 중 하나며, 만약 알고도 언급이 없으면 모고해로서 그 자체로 독립된 죄가 되죠. p71에 보면 "수음의 치명적 결말.." 같은 표현에서 분위기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또 중세 수도사들에게는 이것이 큰 죄였죠. 그러나 현대 의학에서는 "지나치지 않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들 봅니다.

또한 p289 등에서 "...후천적 동성애는 진단하기 어려운 편이다" 같은 서술이 있는데 역시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보던 당대 컨벤션의 흔적입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 만약 어떤 정치인이 요즘 젠더 이슈 관련하여 이런 발언을 하면 아마 진보단체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p292에는 여성 동성애를 암시한,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유명한 작품이 도판으로 나옵니다. p286에 보면 "드물게나마 아동에게서도 동성애가 (성도착의 일환으로서) 발견된다"는 서술도 나옵니다. 이런 건, 후천적, 선천적 두 패턴 중 의사인 그가 무엇으로 분류했는지 궁금하네요.

폰크라브트에빙 박사의 시대에나 지금이나 여전히 범죄로 취급받는 행태도 나오는데 이른바 소아성애입니다. 이 외에도 이 책엔 여러 충격적인 패턴들이 분석되고 서술됩니다만 차마 이 서평에 자세히 옮기기는 망설여집니다. p529에 보면 "'소도미아'라는 용어를 법률가들은 혼란스럽게 사용하는데... "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사실 법률가뿐 아니라 언어학자, 성경학자 등도 혼란스럽게, 모호하게 사용하는 건 같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경멸스러운 행태를, 자국이 아닌 먼 이방에서 유래했다며 문제를 회피, 왜곡하는 건 흔히 보는 모습인데, 일부 학자들은 이란 등 근동에서 구태여 사례를 찾았고 이 페이지에서 인용하는 폴락 등의 학자가 보인 태도도 그러합니다. 소도미는 동성애를 뜻하기도 하지만(구약 창세기에서 소돔인들의 요구. 참고로 이 무대 역시 중동이죠), 수간(bestiality)을 뜻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이유형의 여성들이 주로 개를 선호한다며 파리의 불독 사건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 우리 동아시아에도 포송령의 <요재지이>에 비슷한 사건이 나옵니다.

성 관련 외에도 저자가 의사이다 보니 성과 직접 무관한 다양한 증상(?)에 대해 언급합니다. p133에 보면 "사두증"이 나오는데 마치 머리의 한쪽 면이 뱀의 그것처럼 평평한 증세라고 하네요. 이 비슷한 걸로(아니 훨씬 심각한 병으로) 조셉 메릭이 앓은 "상피병" 같은 것도 있죠. 머리가 평평한 게 병이라면 동아시아의 현인 공자 역시 머리가 평평해서 이름이 구(丘. 언덕)이었는데 이분도 환자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p137에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나오는 여러 충격적인 대목, p140에는 그 유명한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작품에서 나오는 징글징글한 묘사를 놓고도 저자의 분석이 이어지는데 재미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이 이른 시기 이미 고전의 한 전범을 확립했다고도 볼 수 있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로나 경제 전쟁 - 세계 석학들이 내다본
리처드 볼드윈.베아트리스 베더 디 마우로 엮음, 매경출판 편역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19 때문에 전세계가 고통에 신음합니다. 엊그제 빌 게이츠가 "세계 3차대전"에 작금의 상황을 비교했습니다만 그보다 훨씬 앞서 이 책의 저자, 세계의 석학들이 이미 "전쟁 상태"를 선언하고 우리 시민들이 어떻게 사태를 대처해야 할지 자세히, 친절히 조언해 주고 있더군요. 분량은 220쪽 정도이지만 폰트가 작기 때문에 내용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또, 매 챕터가 마치 기업의 상급자에게 올리는 보고서처럼 분석적이고 치밀하게 구성되었습니다. 읽다 보면 마치 독자가 중요 포스트를 차지한 고위급 인사 같은 착각이 듭니다. 하긴, 요즘 상황이 엄중하니 일반 독자가 읽는 책도 각 잡고 쓴 텐션이 느껴져야 제격일지도 모릅니다.

"신속하게, 그리고 무엇이든 최대한으로." 리처드 볼드윈과 베아트리스 베더 디 마우르 교수의 첫번째 아티클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단어는 "평탄화"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급격히 솟아오르는 확진자 그래프"의 높이를 보고 경악한 적 있습니다. p20에는 누적 확진자 수에 대한 그래프가 나오는데 이게 원 숫자가 아닌, 그에 로그를 취한 값입니다. 너무나도 가파르게,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니 한정된 공간에 제대로 그래프를 그릴 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 로그값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겠죠(이것도 어찌 보면 기술적 측면에서의 평탄화입니다). 어떻게 이 그래프를 진정시키겠습니까? 평탄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당장, 당장" 억제 정책을 집행하지 않으면 재앙을 막지 못합니다. 이 챕터에서, 신속하게 액션을 취한 나라는 평탄화의 추세를 보여 주었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그래프가 천장을 찌릅니다.

누구든 최대한의 신속한 조치로 상황을 진정시키고 그래프를 달래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있는데 그건 바로 "돈"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한국 역시 국채 발행으로 재원을 조달할 것인가, 아니면 (김종인 씨 등이 주장한 것처럼) 기존 예산 항목 변경을 시도할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이 책 해당 챕터의 저자들 역시 1) 유럽연합 예산 안에서 재분배하는 방법, 2) 예산 외에, EU 회원국이 분담하는 방법 3) 팬데믹 채권을 새로 발행하는 방법 등이 논의되는데 사람 사는 곳은 달라도 생각이 미치는 범위는 비슷하다는 점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동시에, 머리를 아무리 짜내고 짜내어도, 기발하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방안이란 참으로 나오기 힘들다는 점도 다시 새기는 중이네요.

제이슨 퍼먼 박사는 "사람이 먼저이며, 경제는 그다음"이라고도 합니다. 마치 한국의 어떤 정치인이 예전 선거에서 내세운 구호도 떠올리게 합니다만 역시 실행 방법이 무엇이냐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짚는 "정책의 근본적 제약"은 세 가지입니다. 불확실성, 시간, 역량. 이 중에서도 저는 "역량"의 문제야말로 정치인의 자질과 실력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라고 생각이 드네요.

사자성어에 "과유불급"이란 게 있지만 책에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왜? 경제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했으니까요). 즉, 미미하고 느린 조치보다는 차라리 과도한 조치가 낫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가능하면 기존에 마련된 매뉴얼이나 방법에 의존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로 FDR의 실험이 결국 10년 간의 시행착오를 거쳤다는 실례를 듭니다(사람은 실험 대상이 아니라는 거죠). 대응 과정은 다각화하고 어느 한 방법에만 기대지 말라고 합니다. 정부 주도보다는 민간의 참여가 낫고(한국의 현 정부가 "민간 기부"를 기대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활발하고 지속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잊지 않습니다. 그 외, 시민들에게 인당 최소 천 달러 정도를 현금 지원하라는 말도 있는데 이 사항은 트럼프가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고 한국에서도 현재 집행 중입니다. 책이 훨씬 이전에 쓰여졌다는 점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이래서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거죠).

과감하고 신속한 정책을 집행해도 언제나 비평가들이 우려하는 바가 있습니다. 어느 사회건 "제도를 악용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인데 책에서는 이를 가리켜 도덕적 해이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글까요? 찰스 위폴로즈 박사는 "도덕적 해이를 무서워하지 말고, 병목 현상은 초기에 찾아내어 제거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우리는 지금 경제위기를 걱정해야 하며, 금융위기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입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도덕적 해이에 대해 더 주의를 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위기의 종류와 본질이 다르니 역시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속시원한 충고였습니다.

코로나 위기가 세계를 뒤덮었고 그에 따라 증시도 휘청였습니다. 한국만 해도 순식간에 시총 상당액이 증발하는 등 이러다 나라가 망하지 않나 싶었지만 참여자들(특히 개미들)이 성숙하게 대응하고, 일부는 오히려 역으로 공격적 매수에 나서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시장이 안정되었습니다(놀라운 일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게 금모으기 운동과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국민과 소액 투자자들이 국가에 대해 신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게 다름 아닌 애국이죠. 책에는 물론 한국의 사례가 나오지 않습니다만 각국의 증시 현황(책의 출간 시점이란 한계가 있으므로 대략 2월 28일까지의 상황이 언급되네요)이 차분히 분석됩니다. p81에 나오는 휩소 패턴이라는 걸 우리 독자들은 유념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p85에는 "위기 극복을 위한 열 가지 열쇠"라는 아티클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이 파트가 가장 인상적이고 유익했습니다. 저자 명의는 "샹진 웨이"인데,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없고 우리 동아시아식으로 성씨를 먼저 읽으면 "웨이샹진, 위상진"입니다. 유명한 분이죠. 짧으면서도 강력한 글인데 제가 통째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pp.86~91)

1) 급속도로 퍼지기 전 준비하라
2) 국내 공급이 부족하면 여유 있는 국가로부터 수입하라
3) 중환자실 병상을 충분히 확보하라 (우리도 초기에 대구에서 병상 부족으로 고생한 적 있죠)
4) 바이러스 확산 방지 방침을 분명하고 빠르고 단호하게 대중에 전달하라

대략 여기까지만 봐도, 두어 달이 지난 시점에서 왜 한국이 모범 대처국에 속하며 현재 피해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적은 편인지 감이 옵니다. 마치 미리 이 책을 읽은 듯, 당국에서 효과적으로 대처했다는 점을 우리도 넉넉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단, 저자는 아홉째 조언에서 "각국이 독자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여러 나라들이 동조적으로 조치하는 편이 낫다"고 하는데 이는 현 시점에서조차 여전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미국, 중국 등 강대국들이 미온적이고 미숙하게 행동한 탓이 큽니다.

p116 이하에서 볼드윈, 디 마우르 교수 들(맨앞의 글을 쓴 그 저자들입니다)은 앞으로의 경제 상황을 예측합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기존 공급망(서플라이 체인)이 붕괴되고, 특히 그 중에서도 타격을 받는 건 중국인데 세계의 공장으로 그간 누렸던 지위와 신뢰가 붕괴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1990년대 중후반 WTO 체제의 확립으로 세계화 추세가 가속되었으나 이제 이런 트렌드가 퇴조하고 리쇼어링 붐이 일지 모른다는 암시로도 들립니다.

볼드윈 교수와 토미우라 박사가 함께 쓴 다음 아티클에서는 "공급망을 통한 전염"을 논하는데 물론 여기서 전염이란 바이러스 전염을 말하는 게 아니라(이것도 가능은 하겠죠), "한 나라가 입은 경제적 타격과 불황의 여파가 번져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글에서 세체티와 스코엔홀츠는 "전염 효과"로서 뱅크런의 확산을 거론하는데 사실 여기까지 간다면 정말 갈데까지 간 것입니다. 여기서 이들이 강조하는 대안은, "공시를 대중이 철저히 믿을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네요. 문자 그대로의 뱅크런이 아니라, 국민이 국가가 발표하는 "전염병 확산 실태"를 못 믿어서 패닉에 빠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일종의 비유이죠. 정부는 언제나, 전염병 확산 실태에 대해 100퍼센트의 진실만을 말해야 사회가 붕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유로존은 언제나 주위 관측자는 물론 당사자들의 걱정을 부릅니다. "이번 위기에 드디어 유로존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실제로 며칠 전 나온 어느 기사에서는 이탈리아인들이 "EU(중에서도 독일)이 밉고 중국이 믿음직하다"고 하는 내용이 보도되었는데 물론 어디까지 믿을지는 의문입니다. 여튼 본래 하나의 나라가 아니던 게 다분히 무리를 해 가며 합친 통화권이고 그예 영국이 떨어져 나갔는데 이번 코로나 여파로 또 내상이나 입지 않을지 고민이죠. 이 파트를 올리비에 블랑샤르가 썼는데 역시 읽을 만합니다.

이후에는 좀더 장기전망으로 혹시 경제민족주의가 발흥하여 무너져가던 장벽이 다시 서지 않을지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이에 대한 처방은 교역 상대국을 선진국들이 착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네요. 폴 크루그먼은 경제 부양책을 쓰는데 전혀 주저하지 말고, 최근 일본의 과감한 화폐 증발책으로 경기가 살아나는 게 좋은 예라며 거의 롤모델로 삼아야한다고까지 말합니다. 뒤에 이어지는 오덴달, 스프링포드의 제언도 거의 같은 취지이며, 한국 정부가 현재 취하는 스탠스와도 사실상 일치합니다.

위기를 맞아 머뭇하다간 실기(때를 놓침)하고 더 큰 재앙을 맞을 수 있습니다. 이거냐 저거냐 고민할 시간에 행동을 더 많이 취하는 게 낫다는 이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