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1
이철환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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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훈훈하면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연이면서도 그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 공감이 가능하게 돕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간만에 딱 내 스타일이다 싶은 소설을 읽고 감상했다 싶었네요.

요즘은 물질이 풍족해져서인지 동기간이라도 음식을 나눠먹고 양보하며 내 몫을 삼가는 모습을 극히 보기 힘듭니다. 참 이상한 결과입니다, 다들 가난하게 살 때는 식탁에서 내 몫을 서로 줄이려 경쟁했다는데(물론 다 그랬던 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만), 요즘처럼 풍요로운 시절에는 같은 테이블에서 오히려 서로 고기 몇 점이라도 내 입에 더 넣으려고 싸우니 말입니다. 어렵고 힘든 세월이, 오히려 가족의 소중함을 더 절실히 깨닫고 더 인간다운 가치로 우리를 복귀하게 돕는 것일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저 어리고 가난한 남매가, 서로 먹겠다고 싸웠다면 사장님 영선씨가 과연 그렇게 인심을 썼을까요? 사실 이런 손님들은 요즘 손에 꼽을 만큼도 안 될 만큼 수가 적기에, 이런 손님한테 인심을 썼다고 가게가 휘청이지는 않습니다. 사장님 동팔의 태도는 "당신이 그런 태도를 계속 유지하면 경영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일종의 경각심의 환기이지 남매를 돕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동팔도 내심 그들을 돕고 싶었으며, 만약 처지가 바뀌어 동팔이 먼저 그들을 접했으면 똑같은 행동을 했겠고, 이번에는 영선씨가 이를 말리려 들었을 겁니다.

동현이는 서연을 사랑합니다. ㅎㅎ 어린 감정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지만, 사실 그 나이에 사랑이 뭔지 내 진짜 감정이 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외인구단>의 까치는 엄지를 위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을 읊었고 실제 행동에까지 옮긴 녀석입니다만 이런 게 과연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의 결과일까요?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이에 대한 동경이며, 혹은 갖지 못한 자신에 대한 한탄이자 분노의 산물이 아닐까요. 여튼 동현이도 비슷한 처지의 다른 세입자의 딸내미가 아니라, 자신이 겪고 있는 곤궁함을 한 큐에 날려줄 듯한 "다른 신분"의 보유자, 건물주의 딸을 사랑합니다. "반 1등하고 전교 1등은 레벨이 다르지!(p77)" 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게 나의 영혼 빈 곳을 채워줄 만한 상대방을 만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아무튼 어른들의 계층, 계급이 남긴 상처와 미련이 아이들 대에까지 물려지는 듯하여 가슴이 아프지만, 한편으로 그 나이 또래 순수한 영혼의 갈구와 실수가 공감을 살짝 부르기도 합니다. 또, 이처럼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하고 그리워할 때,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가장 겸허히 성찰하게도 됩니다. 이러니 이런 감정은 동기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소중하고 존엄한 것입니다. 동현이가 우리 독자에게 깨우쳐 주는 바는 생각 외로 심대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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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 처음 만나는 초등 고전 시리즈
조이스 박 지음, 권영묵 그림 / 미래주니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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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 로마 신화는 서양 문화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므로 어렸을 때부터 신들이나 영웅의 이름에 익숙해야 청소년기 이후의 독서에 무리가 없습니다. 거의 필수라고 해야겠죠. 사자성어라든가 동양 고사를 잘 알아야 한국에서 교양인으로 대접 받는 것이나 비슷합니다. 그런데 동양 고전은 비록 한자라는 장벽이 있긴 해도 같은 동양권 문화라서 큰 거부감이 없는데, 그리스 신화는 이름도 어렵고 등장하는 신들이 너무 많아서 접근이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내용은 대단히 성적(性的)이기도 해서 더욱 난감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좀... 아이들 용으로 너무 복잡하지 않게 정리하거나, 이런저런 민감한 내용을 좀 쳐내고 순화한 책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아이들 책은 확실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 pp.6~7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 계보도가 나오는데 제가 보기엔 아이들 용으로 가장 깔끔하게 정리된 표처럼 보였습니다. 일단 올림포스 12신의 이름은 따로 두드러지게 표시를 하고, 그 외에 누가 누구와의 사이에서 누구를 낳았는지 보기 좋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읽어 가면서 이런 내용을 머리 속에 정리할 건지, 아니면 먼저 표로 개념을 잡고 이야기를 읽을 건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튼 중요한 건 이런 표가 좀 따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어른인 저도 신들의 "계보"가 머리 속에 잘 정리된 건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누가 누구였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마다 아이들이 책을 앞으로 넘겨 참조할 수가 있어야 할 겁니다.

서양 동화, 민담, 심지어 동양이나 한국의 그것에도 "의붓부모, 의붓 자녀" 이야기가 상당히 자주 등장하며 특히 계모한테 학대 받는 아이들 이야기는 거의 빠지지 않습니다. 사실 아이를 학대하는 건 계부가 현실에서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말입니다. 예전에는 일부일처제 의식이 희박해서 그랬다고 쳐도,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데 구태여 아이들에게 결합 패턴 가정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 줘야 할지 의문도 들지만, 예컨대 p104 이하에 나오듯 헤라가 시앗에 대한 질투 때문에 의붓아들이라 할 수 있는 헤라클레스를 개고생시키는 건 원래 신화의 줄거리가 이러하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그나마 책에서는 최대한 거부감 없게, 마치 심술꾸러기인 헤라가 헤라클레스를 고생시키는 것처럼, 원 내용의 왜곡까지 안 가는 범위에서 최대한 무난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노역"이라는 단어가 어린이들에게 좀 어렵게 다가오겠지만 여튼 12난사를 최대한 재미있고 간단하게 추렸다는 느낌입니다.

표준 표기는 (이 책에 나온 대로) "미다스"입니다만 여튼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표현은 이제 일상에서도 널리 쓰이며 이의 패러디인 "마이너스의 손"도 재미삼아 널리 회자됩니다. 책 p146에는 "미다스의 손"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지는데, 무작정 물욕에 빠져들다 인생 전체를 망친 인물의 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 어린 독자들이 생각할 바가 많을 듯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동양의 여러 고사가 품은 익숙한 교훈과 가장 접점이 많은 예이기도 하겠습니다.

p60 이하에는 사랑의 신 에로스의 장난으로 다프네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에 빠진 아폴론의 치정 이야기가 다뤄지는데 요즘 스토킹이라든가 여러 사회 문제가 많이 벌어지기도 하기에 시의적절한 면이 있습니다. 아폴론은 만약 에로스의 장난이 아니었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텐데,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뭔지도 모르고 이런 감정의 폭주에 빠지는 일이 잦습니다. 일시적 격정에 몰려 인생 전체를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로부터 교훈을 잘 추출하여 정신을 가다듬는 건 의미있는 체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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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한 내과 의사입니다
이정호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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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 가장 선망 받는 직업은 단연 의사입니다. 의사라고하면 누구나 우러러보며, "결혼 시장(상당히 어폐가 큽니다만 이 또한 현실입니다)"에서 특등 대우를 받는 게 의과 대학을 다니거나 재학 중인 젊은이들입니다. 의사의 자녀라고 하면 일단 가문의 배경으로 최상급의 존중을 받는 편입니다. 이런 신분상의 리스펙트는 돈으로 함부로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요? 이 책은 현업의 내과 의사이시며, 현재는 요양병원에서 연로한 어르신들을 위해 애 쓰시는 이정호 선생님이 "과연 대한민국에서 내과의사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진솔하고도 심각한 이야기를 펼쳐 놓고 계십니다. 의사가 아닌 사람이라고 해도, 하루 종일 천태만상의 환자를 진료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어렵지만 의사가 일단 되고 나서 치르는 과업 역시 얼마나 지난한지에 대해 다들 공감합니다. 개업의로서의 고충 역시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주위 친지 중에 의사가 있다면 잘 알 것입니다.

저자께서는 아주 엄격한 가풍 하에 자라신 듯합니다. 할아버님께서 하루마다 행하곤 하셨던 검열은 가히 군대내무반의 그것을 방불케 했나 봅니다(p46). 조부님께선 그 당시에만 있던 제도로 "공의(公醫)" 신분이셨는데(p31) 이처럼 이 책에는 현대 한국을 사는 우리들이 잘 모를 만한 생소한 이름이나 직역, 제도가 자주 등장합니다. 본디 우리 속언에는 "의술은 인술이다"라는 말이 있긴 하나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이들은 극히 드문데, 저자님의 조부님이야말로 손에 꼽을 만한, "의술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활인지불" 같은 분이 아니셨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군대식의 엄격한 훈육도, 사회에서 쓸모있는 사람으로 장차 자라나려면 자신만의 이기적이고 초보적인 욕구를 억누를 줄 알아야 한다는 인식 하에서 나온 게 아니었겠나 짐작합니다. 요즘은 이런 훈육이 너무 드물어서 갖가지 사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닐지 생각도 해 봅니다.

"자녀들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스스로 공부하게 해야 할 것이다."(p91) 간단하고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를 교육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제 생각에도 스스로 책을 펼치고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만큼 뜻 깊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실제로 겪어 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지입니다. 물론 예술작품을 두루 감상하고 건전한 감성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며, 합당한 운동을 적절히 행하여 신체가 고루 발달하고 건강을 갖추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진정 쓸모 있고 공동체 성원들의 존경을 받으려면 역시 공부와 학식이 중요합니다. 이 책에는 오로지 의술 한 길을 파며 배움과 깨달음의 희열과 보람을 온 몸으로 체득한, 실로 대단하신 의인의 인생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마치 조선 시대 호남의 고고한 선비, 학자의 모습을 엿보는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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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가라
조셉 M.마셜 저자, 유향란 외 역자 / 행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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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긴 여정에 있어 우리는 누구나 크고작은 장애물을 만납니다. 이때 아 여기서 그만 멈춰야 하는지, 아니면 개의치 않고 계속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합니다. 의지대로 나아가는 것도 멋지겠지만, 때로는 현실을 돌보지 않고 무작정 기존의 진로만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만용으로도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저 개인적인 소감은, 지나친 고집이나 독단의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편인지 잘 모르겠을 때, "그저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도 하나의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바람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든 개의치 않는다면, 저 매는 자신을 위한 선택을 바람에게 맡겨 두는 셈이지."(p47)

그래서, 그 매의 선택이 바람직하다는 걸까요, 아님 그 반대라는 걸까요? 이어지는 대화는 "너의 인생은 네가 행한 그 수많은 선택으로 이뤄져 있다"는 말로 귀결됩니다. 사실 이 독후감에 건조하게 정리된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대화로 채워져 있습니다만(저자분의 글솜씨가 매우 찰집니다), 뭐 결론만 추리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권에서는 나의 인생이 나 자신의 선택보다는 부모님, 학교, 기타 사회적 서열이 우월한 이에 의해 결정되는 바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pro-life, pro-choice라고 할 때, 후자의 무게가 너무 가볍지 않나(밸런스가 안 맞지 않나)라고도 하는데, 이는 영어권의 관습과 가치관을 너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동양권에서는 개인의 선택이 집단의 가치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저쪽 사람들은 개인의 독특한 가치와 선택, 취향을 존중합니다. 무시되고 매몰된 개인의 선택이 쌓이고 쌓일수록 공동체의 유대는 약해지며, 나중에는 형식적인 권력 관계, 공허한 매너리즘만 남게 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참된 발전과 진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서양 가치관이 무작정 옳다는 게 아니라, 동서를 가르지 말고 명백히 저쪽이 옳다 싶은 건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의 장점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능력과 의향이 없는 사람은 이미 자신 고유의 장점도 다 잃은 사람입니다.

p102 이하에는 "홀로 서 있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한때 남부러울 것 없이 모든 걸 가지다시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자식들을 잃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풍족한 재산을 던져 가며 "비움 속에서 채움을 찾는" 의로운 인물이었습니다. 헌데 마치 기독교 구약에 나오는 욥 이야기처럼, 이번에는 그의 아내가 외로움과 허무감을 못 견디고 자살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초심을 꺾지 않고 더욱 결의를 다지며 "혼자 서는 데" 성공합니다. 결국 이 사람은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존경을 받는다는 결말인데,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라든가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는지도 충분히 짐작이 가더군요.

p131 이하에는 온갖 시련을 물리치고 마침내 영혼의 안식을 얻은 형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용감한 형제들"이라는 아주 예전 미국 드라마도 있었고, 그런 이름을 가진 작곡가도 있으며, 배달의 민족 법인명은 "우아한 형제들"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형제가 의기투합하면 세상에 못 해낼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형제들은, 그저 속물의 관점으로 보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많은" 불운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자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네 마음이 절망으로 가득하지 않다면, 이미 네 마음에는 희망과 승리가 자리한 것이다" 어떻습니까? 저는 어떤 사람이 진정 마음의 평안을 얻었는지, 그렇지 않고 아Q식의 정신 승리만 거듭하는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 가장 확실한 해답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형제들은 그 많은 시련을 겪고서야 비로소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지를 깨달았으며, 이로서 그들은 모든 것을 비로소 손에 쥔 셈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다 이러합니다. "그래도, 그대, 계속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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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무엇인가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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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우리가 상실한 천국이요, 무례하게 쫓겨난 행복한 정원이요, 역사적 지평선 너머로 멀리 사라져 버린 유기적 사회다."(p23)

인류 문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삼천 년 전이라고들 말합니다. 물론 이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어서 흔히들 4대 문명으로 일컫는 것들 중 보다 멀리 거슬러올라가는 게 있다고도 하는 반면, 페르시아의 엘람 문명은 이보다도 더 오래되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여튼 "문명"이라는 게 때로 대단히 세속적, 물질적으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문화는 대단히 고고한 성격을 띠며 경우에 따라 문명과 정반대의 길까지 걷는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p102에는 헤르더와 버크 간의 유명한 논쟁이 나옵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찰스 테일러의 경우 저 독일학자 헤르더의 업적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언어와 그 의미에 대해 매우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을 고안"했다는 요약을 내놓았었죠. 결국 이런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이 후대의 스위스 학자 드 소쉬르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대개 영국의 인문학자, 철학자들이 대륙의 학문적 경향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취하지만, 저자 이글턴의 경우 마르크스의 지평 위에 서 있으므로 저 위에서처럼 헤르더에 대해 열렬한 찬동의 경향을 보이는 게 그리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T S 엘리엇은 주로 작품으로 말하던 작가였지만 여기서 이글턴은 그가 남긴 저작과 (비교적 소수의) 평론을 통해 저 헤르더와 정반대의 지평을 향한(그의 시각에 따르자면) 엘리엇의 비전을 꼼꼼히 분석합니다. "정신보다는 내장과 신경 말단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p118)." 특히 이 말이, 이글턴이 인용한 T S 엘리엇의 지향성을 압축하다시피한 표명인데, p120에 인용된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도 함께 읽어 보십시오.

이후 이글턴은 예이츠의 입장, 또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사회적) 무의식"을 끌어들인 논변까지 인용합니다. 사실 이 이슈에서 문화의 본질과 성격이 좀 지나치게 영국쪽 논자들의 입장만 원용된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만, 고드프리트 헤르더의 주장이 자세하게, 또 비교적 우호적으로 논의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균형이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컬처의 어원 중 하나인 라틴어 동사 colere는 차지하거나 거주하다는 뜻을 갖는다(p167)." 물론 이 점은 우리가 영단어 colony등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이기도 합니다. 바로 밑에서부터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트리컨티넨털리즘)으로 논의가 옮겨가며, 테리 이글턴 자신이 영국 주류사회로부터 영원한 이단아일 수밖에 없는 그 개인적 배경, 아일랜드계 가톨릭이라는 어떤 숙명의 코드가 다시 등장합니다. 시니어드 오코너가 교황(당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을 찢은 것처럼, 저자 테리 이글턴에게도 교황이란 혹 현임자 프란체스코처럼 상대적 진보의 스탠스 성직자라 해도 미묘한 안티테제의 아이콘일 수밖에 없습니다.

테리 이글턴이라면 또한 "문화적 위계를 무너뜨리는 행위(p197)"에 대한 열렬한, 또 매혹적인 찬동의 논변자이겠습니다. 차별이란 "차이를 식별하려는 행위"인데, 이것이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이건 아니건 간에 이글턴적 논법 중에서는 깔끔하게 단죄가 이뤄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트럼프의 시대(지나갔지만)에 나온 가장 이글턴 적인, 재치있고 신랄하며 박식한 논의였으며, 다음 저작에는 이 시대의 가장 핫한 화두인 "증오, 혐오"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특유의 시원시원한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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