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즈 하노이 - 최고의 하노이 여행을 위한 한국인 맞춤형 해외여행 가이드북, ’24~’25 프렌즈 Friends 38
안진헌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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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이며 인도차이나 반도 동쪽에 오래 터잡고 살아 온 이들이 꾸준히 남진하며 자신들의 영향권을 넓혀갈 때 그 중심으로 기능하던 심장부였습니다. 하노이를 기반으로 삼았던 정치세력은 20세기 후반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현대 베트남 영토 일대를 석권했습니다. 이후 대외개방정책을 단행하여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일정 부분 이루고 오늘에 이릅니다. 한국과 베트남은 현재 밀접하게 경제적 협력을 맺은 관계이므로 하노이에도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며 교류도 매우 빈번합니다. 따라서 관광 목적이건 비즈니스 트립으로건 이 도시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필요한데, 언제나 믿고 보는 여행가 안진헌씨의 솜씨라서 특히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가이드북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하노이는 오랜 동안 북부의 중심지 노릇을 하던 유서 깊은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구시가(舊市街)"로 불리는 구역이 아직도 고유의 개성을 갖고 번영해 있습니다. 저자는 p73에서 매우 낭만적인 표현을 쓰며 이 지구(地區)의 매력을 요약합니다. 롱비엔 대교는 한자로 橋龍編(교룡편)이라 쓰는데, 베트남어는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오는 구조라서 이런 독특한(우리 입장에서) 이름이 되었습니다. 구태여 우리식으로 고쳐 읽으면 룡편교가 되겠습니다. 

아무튼 이 롱비엔 브리지에 대한 설명이 p82에 나오는데, 프랑스 식민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으며 전쟁 기간 중에는 미군의 폭격에 시달려야 했다고 나옵니다. 북위 17도선 위로는 미군이 공격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미군이 북베트남의 수도 소재, 홍강(瀧紅. 농홍)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폭격할 수 있었나 싶지만, 남베트남 영역의 반군 베트콩을 돕는 보급로에는 공중 폭격이 가능했습니다. 이 부근에는 하노이 고유의 멋이 물씬 풍기는 야시장도 열리는데, "흥정이 기본임을 잊지 말고" 관광객들이 꼭 들러 즐겨 볼 만한 어트랙션이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베트남 현지에서, 혹은 미국 영화에서 베트남타운 같은 곳이 묘사될 때 자주 들리는 단어가 "비아 허이(p110)"입니다. 이때 "비아"는 프랑스어 비에르("맥주". 영어의 beer와 어원이 같습니다)에서 왔으며, 허이는 기체라고 할 때의 氣를 베트남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기포가 녹아 뽀글뽀글 피어오르는 맥주잔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베트남 고유의 도수 약한 맥주이며 책에서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약간 무거운 생맥주는 "비아 뜨어이"라고 다르게 부른다고 가르쳐 줍니다. 뜨어이는 신선하다는 鮮을 역시 베트남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책에서는 또한 "네 칵테일 바" 같은 명소를 독자에게 소개합니다. 

베트남인들이 천년고도라며 자랑스러워하는 하노이라서인지 도시 곳곳에 사연이 가득 서린 명소가 많습니다. p128에는 호안끼엠 호수가 소개되는데 "규모는 아담하다"는 게 책의 묘사입니다. 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실제로 아담합니다. 어느 정도냐면 잠실 석촌호수의 절반에 못 미칠 정도죠. 그러나 명소의 가치를 그저 크기로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호안끼엠이라는 말은 "검을 돌려주다"인데 앞의 "호"는 한자로 湖입니다. 안끼엠이 還劍(환검)으로서 검을 돌려준다는 뜻이며, 베트남어는 앞서 말했듯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오기 때문에 환검호가 아니라 호환검이 되는 것입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베트남은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p169에서 보듯 하노이에는 그래서 문묘(文廟)도 있으며, 대성문을 지나 공구, 안회, 증자, 자사, 맹자 등을 모시는 사당이 나오는 구조까지 우리네 서울의 그 구조물과 무척 닮았습니다. 고려에서 국립중앙교육기관을 국자감이라 불렀는데 하노이에도 옛 문화재로 비슷한 기능을 하던 국자감(p170)이 있습니다.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과 대결하여 승전했다는 자부심이 무척 큰 나라인데 군사역사박물관은 그런 그들의 행적을 압축하여 전시한 뜻깊은 공간이겠습니다. 바딘 광장의 역사적 의의 역시 책에 자세하게 나오는데, 바딘이라는 이름은 하노이 내 구 행정구역이었던 巴亭(파정)에서 유래했습니다. 

p198을 보면 유명한 퍼꾸온 식당이 소개됩니다. 한국에서도 퍼꾸온을 즐겨먹는 이들이 많은데 퍼라고 하면 보통 국수지만, 퍼꾸온에서의 퍼는 만두피와 비슷하며 자르기 전의 국수 상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꾸온은 한자로 卷(권), 돌돌 말았다는 뜻이며 그래서 영어로는 보통 roll로 옮겨집니다. 확실히 안진헌 저자의 여행서는 식당, 맛집 파트가 강점입니다. 가 볼만한 식당은 웬만해서는 다 언급이 됩니다. 한국은 웬만해서는 그 단일민족성을 부인하기 힘든데, 베트남은 정말 다양한 민족들의 집합체라고 해도 됩니다. p212에는 민속학 박물관이 소개되는데 여기서 외국인들은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인접 하룽베이까지 해서 하노이 일대의 명소가 빠짐없이 소개된, 완벽한 여행서입니다. 이때 베이는 영어로 만(灣)을 뜻하는 bay이며, 유명한 통킹만 사건의 배경이 된 그 인접의 베이이기도 하죠. 책 말미에는 간략한 베트남 역사까지 실은, 여행서를 넘어 미니 인문서 구실까지 하는 정말 멋진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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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떠러지 끝에 있는 상담소 - 우리 모두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지연 지음 / 보아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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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은 기껏해야 2m, 120kg을 넘기 힘든 자그마한 입체입니다만 그 안에 깃든 마음, 영혼은 전 우주를 품고도 남을 만큼 복잡하고 다단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고 무난하게 성장하면 본래의 착한 심성을 지키지만, 그렇지 않고 어떤 심각한 상처라도 받는다면 그 다친 마음 때문에 큰 사고를 저지르거나 아까운 인생을 낭비하며 방황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인생이 파멸하기 직전,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양 위태위태하게 타락과 일탈에의 경계를 넘나듭니다. 타인의 고민을 들어 주고 괜찮은 대안을 제시하는 이들은 그래서 정말 뜻깊은 직분을 행사한다고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나쁜 심성을 타고 태어난 아이는 없습니다. 좋지 못한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나쁜 영향을 받은 끝에 마음이 망가지고 말았을 가능성이 큰데, p6에 잠깐 언급되는 정윤주(가명)라는 아이의 사례는 아마도 얼마 전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정xx을 염두에 둔 캐릭터겠습니다. 이 첫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현수인데 다니던 학교에서도 포기하고 만 문제아로 아주 낙인이 찍히고 만 처지였습니다. "마음서고"의 소장이자 심리상담사인 이유경은 이 현수라는 애한테 관심을 갖고 친절히 대하며 바른 길로 이끌려고 합니다. 

문제아가 문제아가 되고 마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그 가정에 있습니다. 어느날 상담소장 이유경은 현수가 그 부친과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현수는 이른바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편인데,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에 감정을 잘 다스리는 건 사실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알고 보니 현수 아버지도 속마음으로는 아들을 몹시 걱정하며, 이유경 소장이 진정성을 갖고 설득하자 금세 협조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상담은 성공적이었고 김해인 상담사는 이 소장과 현수의 사례를 사후 분석하며 어떤 교훈을 끌어냅니다. 

내담자들도 다 같은 접근, 해답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감정적으로 감싸고 옹호해 주길 원할 것 같아도 의외로 이들은 "논리적(p75)"인 어프로치를 선호할 때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그들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가 대단히 부당하고 비논리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대해 주길 바랐던 것입니다. 이유경 소장도 세훈의 "스마트함"을 알아 보고 그의 자존을 효과적으로 달랩니다. 김지수 임상심리전문가는 세훈처럼 영리한 내담자도 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투사적 검사(p79)"의 결과를 이 소장에게 보여 주며, 세훈이 어려서부터 어머니와의 애착 관계에 문제가 생겼으며 그 결과 성 정체성에 문제가 생겼을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요즘은 알코올중독자라는 용어보다, 의존증이라는 말을 더 자주 쓰는 듯합니다.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성격이 내향적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상처를 자주 받고, 부당한 대우에 욱하고 분노하는데 이 화를 다스릴 길이 따로 없어 술에 의존한다는 거죠. 술은 어떤 경우에도 현실 탈출구가 될 수 없고, 술에 의존한다는 건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서서히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유경 소장은 내담자 이미희씨가 그 모친과의 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음을 알게 됩니다. 남편인 정철씨는 아주 자상하고 아내를 최대한 이해해 주려는 선한 인물이었습니다. 많은 여성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이 남편과 원만치 못한 관계 때문에 고생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p150을 보면 이미희씨의 상담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는 등 여유를 크게 찾은 모습이 나오네요. 

김희진은 본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성장과정에서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은 듯합니다. 그녀는 가난을 견딜 수 없었고 따라서 반드시 부유한 집안에 시집을 가야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댁에서 지독한 냉대를 받았고, 이 과정에서 경제적 풍요가 반드시 당사자에게 행복을 필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게 아님을 깨닫습니다. 새로운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희진을 사랑해 줄 줄 아는 도량을 갖춘 사람들이며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돕습니다. 이 소장은 그녀의 나이가 아직 젊음을 상기시키며 창창하게 남은 인생을 힘차게 가꿔 나가라고 격려합니다. 

TV의 돌싱 예능에 나오는 김희준은 한때 이 소장이 대했던 내담자였습니다. 희준은 순탄치 못했던 젊은 시절을 보냈고, 영업직 일을 하면서 배우자가 될 여성의 "스펙"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잘 골라 인생역전을 노린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남자가 여자 잘 만나 팔자를 고치려 든다는 사연은 흔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희준은 다른 스펙이 좀 부족해도 영업 능력 하나는 봐 줄 만했고 이는 그만의 뛰어난 능력이 맞았습니다. 희준은 참된 자존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책의 대미는 바로 이유경 소장 본인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아픈 사연이 있고, 이를 잘 다스리려는 과정에서 남들의 인생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은 아깝게 흘러가버린 자신의 소중한 시간입니다. 이 책에 실린 어떤 내담자들보다, 아니 어쩌면 다섯 명의 사연을 한 인생에 합쳐 놓은 듯 힘들게 살아 온 게 이 소장 본인이었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옛 대중가요의 가사도 생각났으며, 상처가 깊은 만큼 그로부터 피어나는 꽃도 한층 아름다울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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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스페셜 에디션 홀로그램 은장 양장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김수영 옮김, 변광배 해설 / 코너스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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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는 20세기 전반 프랑스의 요절한 문학가, 저널리스트, 비행사였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남긴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새삼 어떤 소개가 필요없는 명작입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지만 특히 한국에서도 세대를 초월하여 사랑 받고 널리 읽힙니다. 웬만한 큰 도시의 적당한 장소에서 이 <어린 왕자>의 어느 한 구절(번역)이 새겨진 걸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 코너스톤에서 나온 이 책은 예쁘게 홀로그램이 입혀졌으며 겉표지에 한글 인쇄 부분 없이 Le Petit Prince, Antoine de Saint-Exupery라고 작품명과 저자명이 불어로 적혔을 뿐이라서 마치 외국 책 같은 인상을 줍니다. 혹은, 책이 아니라 고급 팬시 상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생텍스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가 배경으로 입혀져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양은 보이는 거면 무엇이든 먹어버려. 가시가 있는 꽃도 먹지." "그럼 가시가 대체 무슨 소용이지?(p36)" 마치 동양 고사에서 모순(矛盾)의 고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순간순간을 비연속적으로 잘라놓고 보자면 아킬레우스도 거북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아마 양은 가시가 돋힌 꽃을 먹을 수 없다가, 어느 순간부터 가시에도 대응할 수 있었을 겁니다. 거꾸로, 지금 이 순간에도 꽃은 양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기만 한 게 아니라, 양이 자신을 먹을 수 없는 방법을 연구하는 중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먼 훗날, 어느 특이점이 지나면, 양은 이제 그 꽃을 먹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나, 저 꽃, 양 모두, 개체로서는 너무 짧은 삶을 살기에 그 결과를 볼 수 없습니다. 왕자에게 "나'는 이미 무언으로 그 답을 전했으며, 왕자도 답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가시가 소용이 없겠습니까. 지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존재 이유(raison d'etre)가 있습니다. 

꽃은 호랑이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지만 바람만은 두려워합니다. 어린왕자는 꽃을 사랑하면서도, 그 말과 행동에 괴리가 생기는 걸 보고 당혹했으며, 마침내 꽃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에로스는 자신을 의심한 프쉬케에게 "의심이 깃든 곳에 사랑도 더 이상 자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사랑하던 두 연인도, 여전히 사랑하지만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서로에게 더 머물 수 없을 때가 있으니 이런 모순(p46)이 또 없습니다. 자신이 꽃을 올바로 사랑하기에는 너무 어렸다며 왕자는 꽃의 말이 아니라 그 행동을 보고 선택했어야 했다고 자책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꽃은 거짓말쟁이는 아니지만 너무 약했고 그러면서도 허세가 강했습니다. 차라리 왕자에게 자신은 바람도 호랑이도 심지어 왕자도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왕자는 아마 그런 꽃을 바르게 파악하고 더 알맞은 방법으로 보살펴 주었을 것입니다. 

왕은 권위와 군림을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더 이상 그의 명령을 받을 신민(subject)이 없어도 그는 끊임없이 명령을 내립니다. 왕자(물론 자신의 아들은 아닙니다)에게도 그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리는데, 사실 법무부장관은 누구를 심판하는 직위가 아닙니다. 어린 왕자가 이 점을 지적하자 그는 엉뚱하게도 "그럼 너 자신을 심판하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p56)"라고 합니다. 말이야 맞는 말입니다만 그게 이 왕자가 직분을 수행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하니 말입니다. "이치에 맞는 명령을 내리시면 바로 이행이 됩니다." 그래도 왕은 이치에 맞길 좇기보다, 자신의 명령 권위를 세우기 위해 애써 이치를 맞춥니다. 선후가 거꾸로 되었습니다. 

"작은 종이에 별들의 수를 적고, 그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근다는 뜻이지.(p68)" 사업가가 자신의 직분을 정의하는 방식입니다. 어린왕자는 그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듣고 잠시 술꾼의 논리(이 사람의 말도 상호순환모순이었죠)와 같다고 생각하더니, 이내 "매우 시적(詩的)"이라며 애써 좋은 방향으로 정리합니다. 부처님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무엇이 중요한 일인가. 어린왕자는 내가 하는 일이 상대한테 유익한지 아닌지가 "중요성"의 기준이라고 하는데, 여기 대해 사업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뻔뻔스럽게 상대의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왕자의 말에 답할 논리가 생각이 안 나 당황해서인 듯합니다.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위인입니다. 

예쁜 외관과 달리 생텍스의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위해 만들어진 동화인지 그 묵직한 메시지가 독서를 마친 후에도 내내 독자의 가슴을 지긋이 누릅니다. 사람의 양심은, 초심은 그만큼이나 소중하며 우리가 먼 곳 먼 시간에 안타깝게 분실하고 온 소중한 자산이라서인기 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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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 어제의 불행이 오늘의 행복이 되는 쇼펜하우어의 지혜
이동용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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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가 사거한지 근 180년이 가까워오는데도 여전히 그의 철학, 그의 지혜는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힐 뿐더러 한국에서는 꾸준히 베스트셀러의 반열에까지 오릅니다. 이 책은 독일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한 이동용 저자의 책인데, 우리의 기존 상식과 신조에 넉넉하게 호소도 하면서 동시에 미처 살피지 못했던 삶의 여러 국면에서 숨겨진 진실을 들춰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의 문이 닫히면 삶은 또하나의 문을 열어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고, 이제 죽음에 임하면 모든 문들이 닫힌 듯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감동적인 일화를 인용하는데, 문호 괴테는 조금 다른 말을 했다고 합니다. "두번째 창도 열어라. 더 많은 빛이 들어올 수 있게" 여기서 저자는 두번째 창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새기지 말라고 합니다. 생이 끝나도 우리가 몰랐던 그 무엇이 있어 다른 문을 열어 줄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 원래 괴테의 유언은 아주 짧은 "Licht, mehr Licht!"일 뿐이지만 친우 실러에게 임종 자리에서 빛이 더 들어오게끔 두번째 창을 열어 달라는 부탁을 한 게(den zweiten Fensterladen zu öffnen, damit mehr Licht in's Zimmer komme) 이렇게 윤색되어 전합니다. 물론 저자의 주장대로, 괴테 역시 그런 두번째 뜻을 담아 한 말이겠습니다. 

동물은 그저 동물적 직관에만 의존하지만(물론 단기적으로 그 정확도가 매우 높긴 합니다) 인간은 직관도 직관대로 가지면서 이성의 통제를 받습니다. 물론 비교 불가의 장점이 있어서 이렇게 진화했습니다만 때로 이 통제 때문에 "버젓이 두 눈을 뜨고서도 보지 못하는" 일이 간혹 발생합니다. 이 역시도 이성이 아주 정밀하게 작동하는 사람이라면 안 빠질 함정입니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을 다시 새겨서 이렇게 말합니다. "눈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만 보지 말고, 나 자신에게도 향할 때 비로소 바로 볼 수 있다(p150)." 이 말은 사실 쇼펜하우어 시대 천 수백 년 전에 고대 라틴 속담도 하던 말이며, 더 멀게는 소크라테스가 비슷한 취지의 가르침을 남겼었습니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카타르시스라는 말을 감정의 정화라고 배웠습니다만 사실 이는 그 개념(체험)의 결과, 효과에 가까우며 그 원래 뜻은 "배설"입니다(p175). 무엇을 배설하느냐, 공포라는 감정입니다. 공포는 인간의 생존에 아무 도움도 안 되면서 의지와 희망을 갉아먹기만 하는 해로운 녀석입니다. 그래서 FDR도 "가장 두려워해야 할 건 두려움 자체"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쇼펜하우어는 그래서 삶이 본래 지옥이니 회피한다고 부정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으며 그저 훈련, 단련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 저자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했다는 아스케제라는 개념을 인용하여 이 "훈련"의 의의를 강조합니다. 독일어의 Askese는 고대 그리스어 ἀσκέω(딴짓않고 운동에 전념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영어의 ascetic(금욕적인) 같은 형용사도 어원이 같습니다. 

p222에도 또 "연습'이란 개념이 나옵니다. "연습, 오로지 연습만이, 정신을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게 도와 줄 것이다." 불행마저도 의미를 따로 품게 하는 것이 연습의 바람직한 결과 중 하나라고도 강조합니다. 확실히 이 책은 여태 독자가 알지 못했던 쇼펜하우어 철학의 많은 이면을 조명합니다. 삶은 본디 많은 모순, 부조리에 가득합니다. 정의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삶을 그대로 수용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동물은 삷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잔인하게 사자에 잡아먹히는 어린 사슴, 물소 등도 "대체 왜 이렇게 약하게 태어났지?"라며 신세를 한탄하지 않습니다. 물론 맹수에 의해 숨통이 끊어질 때 극한의 고통을 느끼겠지만 그때조차 염세적 태도를 새삼 드러내지 않습니다. 시니컬하게나마 진지한 답을 제시하는 쇼펜하우어더러 염세주의라 규정하는 건 피상적이고 부당합니다. 

"순간을 알고 있기에 인간은 (그와 반대되는) 영원도 상정할 수 있다(p278)." 고통이 없다면 쾌락이 뭔지도 인간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저자는 이런 말도 합니다. "희망은 신이 인간에게 준 고통이지만 그 희망을 거머쥔 건 인간이다." 세상에 마구 던져졌을 뿐 의지대로 태어난 게 아니지만 여튼 태어난 후 대부분의 결정은 우리 자신이 하며 그 책임은 우리 스스로가 져야 합니다. 책임을 지고 기꺼이 고통스러운 길도 걸어갈 수 있기에 인간은 존엄하며 참된 자존에서 일어나는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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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오타니처럼 -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한성윤 지음 / 써네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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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2015년 프리미어12 대회에서 이 선수를 TV 중계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 국대는 지금과 달라서 훨씬 실력 좋고 이름값도 높은(빅리그 소속) 선수들이 많았는데, 이제 스무 살을 넘긴 오타니 쇼헤이, 대곡상평 투수의 공을, 이대호 선수를 포함해서 단 한 명도, 배트를 제대로 공에 갖다 대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투수 관리 차원에서 다른 투수를 상대팀에서 올린 후에야 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는지 공략을 시작했는데, 겨우 이기긴 했지만 오타니에 한해선 아예 손을 대지도 못하는 처량한 모습이었는데, 그 정도로 차원이 다른 선수였고 나이가 저렇게나 어렸다는 점도 충격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오타니는 이도류(二刀流)입니다. 이도류란 일본 무사들 중에 양손으로 칼 하나씩을 휘두르는 부류를 가리키는데, 손이 둘이라고 누구나 양손잡이가 가능한 게 아니라 대부분은 칼 하나도 두 손으로 핸들링해야 합니다. 칼 한 자루도 힘에 부치는데 두 손으로 두 칼을 휘두른다면 일단 정밀도는 둘째치고라도 타고난 힘부터가 남달라야 합니다. 이도류 자체가 만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며, 동네 야구도 아닌(동네 야구라도 해도 드물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프로야구에서 한 선수가 투구(그것도 선발)와 타격을 겸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반쯤은 신화화한 미야모토 무사시가 그 대표적인 중근세 일본 칼잡이였다고 하며, 미국인이긴 하지만 20세기 초의 조지 허먼 루스가 투타 모두에서 두각을 드러낸 야구 선수였지만 그 역시도 젊었을 때는 투수 전업에 가까웠으며 홈런왕 커리어를 이어갈 때는 투수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마야구의 박노준 선수, 프로야구 원년에 김성한 선수 정도가 투타겸업을 했었으며 둘 다 야구천재라고는 불렸지만 이 역시도 투타 모두에서 성적이 압도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리그의 수준이 낮았다는 것도 감안해야 합니다. 

평소에 야구에 관심없던 여성들도 작년 아시안게임에서 오타니를 TV에서 보고 깜짝 놀라는 걸 봤는데 유명한 선수인 건 알았지만 저렇게 키도 크고 잘생긴 줄은 처음 안 데서 온 충격으로 보였습니다. 이 선수의 만찢남 신화는 사실 그 외모에서 방점을 찍는 건데, 실력이 그렇게나 좋으면서 외모까지 비현실적이니 여성들이 열광하는 게 당연합니다. 이 선수는 인성마저도 최고로 평가받는데, 개인적으로 저는 2015년 한국 선수들을 향해 눈빛을 번득이며 이를 악물고 던지는 걸 보고 애가 아주 못됐겠구나 하고 잘못된 선입견을 가졌더랬습니다. 선수가 경기에 최선을 다해 임하고 전의를 불태우는 건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 한국에 와서도 한국 팬들을 향한 립서비스도 잊지 않고 좋은 말들을 해 주는 걸 보고 적어도 매너는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인성은 여러 일화를 통해 이미 주변에서 호의적인 증언이 넉넉하게 나옵니다. 

사람은 노력으로 커버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오타니도 일단 그 큰 신장, 운동신경, 파워 등이 타고난 DNA에 크게 기대는 선수입니다. 물론 노력의 힘은 숭고하지만 이렇게 애초에 타고난 사람을 평범한 사람이 노력한다고 능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p43을 보면 오타니 선수는 양친 모두가 운동선수라고 하는데, 책에 보면 흥미로운 서술이 있어서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일본에 2세 야구 선수는 많지만 그 대부분이 부친의 퍼포먼스에는 못 미치는데, 운동과 관계 없는 여성과 결혼한 이가 많기 때문이다." 약간 웃음도 나오는 구절인데, 젊은 남자들이야 일단 외모가 아름다운 여성에게 끌리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책이 쓰일 시점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사항이겠는데, 오타니 선수가 현재의 배필을 그분으로 고른 건 그렇다면 2세도 운동선수로 키우려는 치밀한 계획(?)도 한몫 했다는 뜻이겠습니다(농담입니다). 

그라운드에서 온갖 욕 들어가며 고생하는 직종이 바로 심판입니다. 선수가 공에 맞으면 관중들이 걱정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심판이 공에 맞으면 손뼉을 치며 웃는다고도 했었습니다(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라운드에서 각광을 받는 건 어디까지나 선수이며 심판은 조연으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직분입니다. 이런 심판들에게도 일일이 이름을 기억하며 인사를 깍듯이 하는 게 오타니라고 하니(p127) 그 인성의 훌륭함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타니 선수는 프로 첫 팀에 입단할 때부터 "사과"를 해야했다고 나오는데(p182), 아직 얼굴에 솜털도 안 가신 어린 선수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야 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워낙 뛰어난 선수라서 LA 다저스가 일찌감치 관심을 두고 접촉했었는데 기어이 일본 국내 팀에 입단했으니 그 미국 구단에 미안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과는 마음을 먹는다고 아무 처지에서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다. 선택 받은 인생이라야 할 수 있는 종류의 사과이겠는데, 그렇다고 이런 행동을 할 꿈도 안 꾸는 한심한 운동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그의 인성은 경외의 대상입니다. 

위대한 선수가 그 실력뿐 아니라 이처럼 경기 외적인 요소로부터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일종의 현상까지 일으키는 건 매우 드물게 봅니다. 그에게서 풍기는 일종의 선한 영향력이 그만큼 볼륨이 크다는 뜻이며, 앞으로도 그가 많은 팬들에게 계속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영감과 의욕을 북돋우는 존재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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