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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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이 단편집 마지막에 수록된 작품의 제목입니다. 하지만 이 단편집에 실린 모든 작품들은, 어떤 종류의 불 속에서 무엇인가를 잃은 우리의 상실, 좌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불은 대개 "공포"이며, 혹은 믿었던 누군가에 대한 큰 실망, 좌절,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는 공동체 성원들의 절망, 가난과 범죄, 불신이 빚은 무기력, 증오 같은 것으로 이어집니다.


<더러운 아이>는 빈민가에서 온갖 사회악과 범죄에 노출된 어느 아이, 아주 어린 아이에 대해 주인공 여성이 느끼는 타자의식(죄의식 가득한)을 담습니다. 처음에 주인공은 이 아이가 어느 여성의 소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가 상상도 못할 잔인한 방법으로 죽고 그 시신이 발견된 후 조금 다른 진상을 (뉴스를 통해 그 소식을 접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알게 됩니다. 자신만의 편안한 안식처에서 듣고 보게 되는, "바깥 세상의 온갖 끔찍한 소식"들이란 사실 실감이 크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아이가, 한때 잠시나마 바깥 세상(가난이 지배하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마주친 누군가였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잠시, 이웃 대부분이 고생 중인 지옥이야말로 현실이고, 편안한 곳에 고립된 자신이 혹 환각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난 아들이 없단 말이야!" p54에는 역주를 통해, 원문의 se는 복수일 수도 단수일 수도 있다고 설명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단수, 즉 산 라 무에르테에게 이 미친 여인이 아이를 바쳤다는 뜻이라면, 범죄자는 그 어머니(혹은 큰이모일 수도 있습니다)이겠습니다. 끔찍한 가난은 여인을 광신으로 내몰며, 인륜의 기본을 까맣게 망각하고 짐승만도 못한 범행을 저지르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혹 이게 마약조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도, 어떤 초월계의 악마가 아닌 현생의 마귀들에게 비슷한 공양을 했다는 뜻이겠죠. 사실 se는 단수든 복수든 별 뜻의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스테리아 호텔>에서 개인적으로 저는 몇 년 전에 만들어진 이탈리아 영화 <신데렐라>가 떠올랐습니다. 오래된 호텔, 투숙객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 호텔은 동네에서 볼 때 살짝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어린 여자아이는 "담배 연기 때문에 구역질이 난다"고 하지만(p57), p64에서는 "낙엽을 태우면서" 그 고소한 향기를 즐기기도 합니다(이 대목에서 이효석의 어떤 수필이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낭만적인 후각적 심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 호텔은 금세 공포의 발원지가 됩니다.


주인공은 행실이 나쁜 여동생 랄리 때문에 약간의 고민거리를 가졌는데, 로시오라는 (이름도 남자 같은) 친구가 생기면서 다소의 탈선을 시도합니다. 이 건물이 과거(대체로,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혹은 언급되는 군사 독재 시절은 "과거"일 뿐입니다)에 경찰학교로 쓰였다는 설명이 있지만(p66), 아마 그날밤 두 꼬마가 마주친 무서운 군중은 그 시절 희생된 민중의 원혼이 아니었을까 저는 짐작했습니다. 사장 엘레나는 아이들의 설명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혼을 내는데, 저는 읽으면서 행여 엘레나가 아이들의 환각에 공감했다면 많이 김이 샐 뻔했다고 안도했습니다. 호러, 고딕에는 인물 사이에 개연성 없는 공감이 과하게 이뤄져서는 안 되니 말입니다.


<마약에 취한 세월>에서는 1인칭 화자가 (앞 작품들과는 달리) 빈민층에 속한 가망 없는 밑바닥 인생입니다. 독특하게도 화자는 1980년대말~90년대 초를 회상하는데 그만한 지성이 없어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의외인 구성이고 언급입니다. 앞의 "대통령"은 알폰신이겠고 뒤에 전화를 깔아준다는 공약을 한 후임자는 메넴이겠죠. p90에서 주인공은 아무 무서운 눈빛을 한 아이를 만나는데 "...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여자아이가 누군가의 딸이었다고 믿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습니다(즉 악령 비슷한 존재였다는 뜻이겠죠. 자신에게는). 이 아이는 p104에 어떤 비유의 보조관념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어떤 불량 청소년 집단에서 유치한 비행에 몰입할 수 있는 건 그 또래들끼리 같이 지내다 보면 수치심과 객관화를 깡그리 잊을 수 있어서입니다. 그러다가 멀쩡한 이성친구라도 생기면 여태까지의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는데, 나머지 멤버들에게는 친구의 이성친구가 죽이고 싶도록 밉겠죠. 결말에서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이처럼 단순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주제는 빈곤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구조적 타락과 그로 인한 공포이겠습니다. p93의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여러 약품"은 과거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겠습니다(마약류까지는 아니지만). p96에서 나스카 유적 어쩌구는 읽으면서 고개가 갸웃했는데 역시 의도된 유머였습니다.


p99에서 낙태가 금지된 시절 오히려 미혼모들이 길에 영아를 버리거나 아예 개한테 먹이로 준다는 끔찍한 풍속도(작품에서도 소문일 뿐이라고 합니다만) 같은 서술은 민주화 이행 후에도 여전히 혼란에 싸여 있던 아르헨티나의 암울한 사회상을 드러냅니다(심지어 지금도?). p101에 "쐐기풀에 베여 다리에 피가 송송 맺힌다"는 묘사는 한국에서도 공감할 만한 풍경의 묘사겠죠. "드라곤시토"가 일종의 애칭을 만드는 축소사라는 역주 설명이 있는데 저 뒤 다른 작품의 p333 "실비니타"라든가, p236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르는 "파울리타" 같은 예도 나옵니다.


<아델라의 집> 역시 어떤 건조물이 빚는 공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델라는 나면서부터 한쪽 팔이 없는 아이인데, 주인공의 오빠 파울로와 친해지고 나중에 미스테리어스한 사건을 겪게 됩니다. 제 생각에 이 작품집에 수록된 중 고딕 호러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작품 같았습니다. p102에 "캘리포니아에 가면 머리에..."는 역주 설명에도 나오는데, 이건 작가의 착오일까요 아니면 의도적으로 작품 중에서 그렇게 바꾼 걸까요? p114에 "자기 아내를 토막내서 냉장고에 숨긴..."에서는 정말로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p125의 "누렇게 말라죽은 정원", p118의 "누런 이", p119의 "누렇게 말라 있었다" 등이 비슷한 느낌을 환기합니다. p110에서 "뇌가 뼈에 눌려 광기로 발전하는 도베르만"과, p119의 "무엇인가 안에 갇혀 못 나오고 있는" 같은 문장 들을 잘 연결하여 읽어야 작가의 의도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다. p131 가면, 빈껍데기가 스페인어로 서로 비슷한 발음임을 이용한 말장난도 흥미롭습니다.


(이하 내용 누설이 조금 있습니다)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는 약간의 반전(제 생각에)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성실한 가이드이며, 최근에 결혼도 하고 아내는 갓 아이도 낳은, 행복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내와의 사이는 예전 같지 않고, 어려서 많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이 와중 그는 관광객들에게 과거의 어느 연쇄살인범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며 흥미를 돋우는데, 불필요하게 그 끔찍한 인간들에 과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당황합니다. 어느 순간 그는 이 과몰입을 직업에의 헌신 모드로 자연스럽게 전환하며 안도하는데 독자의 입에 흐뭇한 웃음이 지어지는 유일한 결말이더군요(제가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 - 혹은, 이 가이드의 전생이라는 소린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어차피 선량한 일상인들일 듯한 그들 관광객은 왜 그렇게 "시그니처 액션"이니 뭐니 하며 오버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마 이게 우리들 평균의 자화상이겠죠. p156의 각주에 나오는 빠른 발음 말장난은 우리 식이라면 "간장 공장 공장장"이라든가 "쇠창살" 어쩌구 하는 놀이와 같겠죠.


<거미줄>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배경이 아르헨티나 북쪽 국경 파라과이인 작품입니다. 아르헨티나가 비록 여전히 경제와 사회상이 불안합니다만 일찌감치 민주화로 이행한 데 반해,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파라과이는 여전히 군사 독재의 상흔을 말끔히 떨치지는 못한 모습입니다. 저 뒤 <검은 물속>은 배경이 아르헨티나이긴 하나 공권력에 대한 강한 불신이 잘 표현됩니다.


마지막의 그 "실종"은, 아내와 처제에게 완전한 환멸을 느낀 남편의 자발적인 행동("결별")일까요, 아님 그 트럭 운전수들과 여인들이 공모한 일종의 범죄일까요? p175에서 "여기엔 모두 범죄자들뿐이라고!"라며 소리지르는 남편은, 여성들이 영원히 거리감을 느끼는 타자적 남성상, 압제자, 소통 불능의 이미지를 표현합니다.


p164에는 과라니어(語)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본디 남미는 원주민들이 오랜 세월 살았고 스페인 정복자들이 몹쓸 짓을 한 역사가 있죠. 작가가 다분히 이를 의식하여 삽입한 코드이겠으며, 앞 <오스테리아 호텔>에는  p73의 역주에 "케추아어로 물에 젖게 하다라는 뜻"이란 설명도 나옵니다.


일본 애니나 드라마, 소설을 보면 "자해하는 여고생" 테마가 자주 등장합니다. <학기말>도 기괴한 분위기의 어느 왕따 학생이 얼굴과 사지에 자해를 하는 이야기가 주된 줄기인데, 피해자에 대한 일종의 죄의식이 과한 반응을 일으켜 주인공 역시 "무엇인가에 홀려" 같은 패턴으로 자해를 한다는 결말이 충격입니다. 저 뒤에 나오는 <초록색 빨간색 오렌지색> 역시 서두에 일본 문화 코드 몇을 언급하는데 결국 히키고모리의 사이버 범죄 이야기로 이어지는 게 충격이었습니다. 본래 남미에는 일본인 이민자들이 많이 살았죠. 특히 <초록색...>은 최근 한국에서 터진 손 아무개의 다크웹(이 작품에는 "디프웹"이란 용어가 나옵니다) 범죄라든가 N번방 사건을 연상시키는 묘사가 등장하기 때문에 시사적이기까지 합니다(시기는 이 작품집이 훨씬 먼저지만).


<이웃집 마당>에는 체구가 작은, 마치 고양이 같은 남자아이가 공포를 유발하는데 아동학대 이슈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소설집에는 남성의 성*가 대체로 일관된 심상을 유발하는 듯합니다. "발*한 성*가 18cm나 되었다"라는 묘사라든가(<파울리토가 못을 박았다> p152), 앞 <거미줄>에서 "어딘가 남성의 성*를 연상시키는 살잠자리(p168)", 또 바로 이 작품에서 "남자아이의 고추가 보였다(p241)"는 문장 같은 건, 남성기가 여성을 향해 자아내는 이질감, 공포감 등을 드러냅니다. 반면, 역자 후기 중 특히 p365에서 "집"을 두고 바기나 덴타다를 언급하는데 오타이며, vagina dentata가 맞습니다. p249에 "트럭 운전수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나오는데 앞의 <거미줄>에서도 그랬습니다. 광활한 대륙에서 도로 위의 난폭자 노릇을 하는 이들에 대한 나쁜 인상은 북미나 남미나 비슷한 듯합니다.


살찐 몸에 대한 어떤 불편한 의식이 드러나는 문장으로는 p219의 "걸을 때 허벅지가 서로 스칠"이라든가, p84의 "걸을 때마다 살이 쓸려 짜증.."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중세의 마녀사냥과 현대의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듯한 "아내 혐오 범죄"를 연결하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어머니, 진취적인 행동파에 키 큰 여성이었던 분을 일종의 롤 모델로 삼습니다. 앞의 다른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그 부모와 불편한 관계이기도 했던 점과는 대조적입니다. 사회적 약자로서 "불에 타는 의식"으로 부당한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박해를 받는 여성들의 분노를 담았습니다. p200의 <거미줄>에 보면 주인공이 그전날밤 꿈에서 본 "불에 타는 노파" 심상과도 이어 생각해 볼 만합니다.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에서 빚어지는 공포는, 등장인물, "작품 자체"와 그 배후에서 작가인 포가 협업하여 빚어내는, 그야말로 순수 공포의 원형입니다. 반면 이 작품의 호러는, 비참한 가난과 사회적 폭력 따위가 인위적으로 지어낸 것에 가깝습니다. 아무튼 온갖 사회악 때문에 고통 받는 이웃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공포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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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였을 때
민카 켄트 지음, 공보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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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내가 나이길 바라며, 그저 동물적인 욕구나 충족된다고 삶에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나라는 정체성은 오랜 세월 동안 나에 의해 형성되며, 비록 그 결과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내가 오랜 동안 소중히 가꿔 온 만큼 내가 사랑하고 또 내가 책임을 지는 대상인 것입니다.

브리엔은 몇 달 전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이상한 건 그 일이 있은 후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서 떠났으며, 머리를 다친 탓인지 몇몇 기억이 분명치 못하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호화로운 저택에 살지만 사고 후 그 큰 집에 혼자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젠틀한 의사인 나이얼을 세입자로 들입니다.

나이얼은 나무랄 데 없는 매너와 인성, 훌륭한 직업을 가진 남성인으로 브리엔 눈에 보이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건 그가 부인 케이트와 별거 중이라는 사실입니다(이렇게나 훌륭한 남자인데, 어떤 여자가 감히... 같은 생각이죠). 브리엔은 차츰 세입자인 그에 대해 깊이 알아가지만, 또 하나 이상한 점은 그가 처음에 알던 나이얼에 대한 이런저런 사항이 알고 보니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겁니다(p55에 "이 사람이 그 얘길 했던가"라며 고민하는 모습 나옵니다). 하긴 이 역시 브리엔 자신이 사고의 충격으로부터 채 회복을 못한 탓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모두 자신이 성치 못하다고 하니, 브리엔 자신이 매사 조심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p11에는 수혈을 통해 낯선 이의 피가 내게 흐르는 느낌이라는 브리엔의 말이 나옵니다(이게 1부 말미의 어떤 사건에 복선 구실을 하죠). 작품은 크게 3부로 나뉘었는데 1부는 브리엔, 2부는 나이얼, 3부는 두 사람의 시점이 교차 서술됩니다. 음.... 우리 독자들은 1부 내내 1인칭 시점에서 이어지는 브리엔의 말을 조심스레 따라갑니다만, 브리엔 본인도 뭔가 확신이 없고, 이 여성이 스스로 그리 지각(perceive)한다는 것일 뿐 진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조금씩 품게 됩니다.

브리엔은 그저 사고 후유증 때문에 고민하는 게 아닙니다. 우연히 그는 자신과 이름, 신분 사항, 심지어 외모까지도 똑같은 여성을 웹상에서 보았는데, 자신의 많은 지인, 친척들마저 그녀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 연결하고 있는 걸 보고 경악합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사칭하고 다니는 걸까? 그것도 하필 자신이 사고를 당한 후 취약,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후에 말입니다. 정신과는 아니고 종양학 전공이지만 의사인 세입자 나이얼에게 도움을 청할까 생각도 해 보지만 조심스럽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일수록 누구에게건 친구가 필요합니다. 브리엔이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유독 친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예를 들면 p27의 "내가 괴한에게 습격당한 후 네 친구들은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라든가, p66의 버려졌다 운운하는 대목, p81에서 (세입자이자 이제는 유일한 친구인) 나이얼마저 잃고 싶지 않다고 하는 부분 등이 있습니다. 나이얼과 식당에서 근사한 한 끼를 먹는 대목(p85)에서 전에 친했던 앰버를 만나는 대목도 그렇죠. 참고로 저는 여기서 이 앰버라는 친구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그렇지는 않고, 뒤에 가면 마리솔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그 몫을 대신(?) 하더군요. 조금 맥거핀 같아 보였습니다.

p105에서 그녀는 다시 "나이얼은 가장 친한 친구"라며 의존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진상이 다 밝혀진 p282에서는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왜 모든 친구들이 나를 버렸는지"를 알아내게 됩니다만 사실 독자들은 여기쯤에서는 별반 궁금함을 품지 않게 됩니다. 바로 그 몇십 페이지 앞에서 누가 진상을 다 이야기했기 때문이며,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더 앞에서 다 알아챌 만도 했습니다. p154에서 "나에게 친구는 있어요?"라고 그녀가 말하는데 이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 꼭 남의 흉을 보며 뒷담화를 일삼는 이들이 있죠. 여기서도 브리엔은 이웃인(아마도) 두 아줌마를 의식하며 괴로워합니다(p32).
p19에선 "내가 괴물이 아님"을 분명히하고 싶다고도 하는데 독자가 보기에도 왜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을지가 의아하죠.

브리엔은 이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가뜩이나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음이 p56에 나옵니다. 그녀의 생모가 어렸을 때 부모(즉 브리엔의 조부모)와 불화하고 집을 나간 후 완전히 떨어져 산 거죠. 조부모의 가정이 매우 윤택했으므로 브리엔은 별 불편을 겪지는 않았으나 생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이 큰 상처가 아닐 수는 없었을 텝니다. 뭐랄까, 다친 사람이 더 자주 다치는 경향처럼.

브리엔의 조부모가 했다는 말, "졸부는 요란하고 거부는 조용하다."에서 어느 정도 집안 분위기가 짐작됩니다. p96에서 "아직 외조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헐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는 뭔가 이분이 자신만의 환각 속에 사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일단은 말이죠.(대충 이런 말이 나오면, 이 장르의 관습상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이 소설에는 여러 번 레거시 미디어의 명칭이 등장해서 문화 코드를 환기합니다. p58의 "ESPN 하이라이트나 보며 곯아떨어지는...", p79의 "데이트라인을 마치 노부부처럼 시청하는..." p168의 "NPR 채널에서 클래식락을 들었다"는 부분 등이 그렇습니다. p58의 저 문장은 그래서 그런 남자하고는 엮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데 문득 엠스플 베이스볼 투나잇을 보며 잠드는 저하고 비슷하다 싶어서 뜨끔해지기도 했습니다. p161에는 "찌그러진 기아차Kia"라는 말이 나오는데 물론 우리 한국의 그 자동차 메이커가 만든 상품을 가리킵니다. 기아차라고 하면 한국 독자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이런 대목에서조차 고유명사라고 영어를 병기한 출판사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물론 꼼꼼하고 일관된 편집 원칙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브리엔은 점잖고 조신한 여성인데 작품 중에서는 거친 말이 자주 등장해서 약간은 당황스러웠습니다(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지만). 예를 들면 p67의 "싸가지 없는 것들에게는 사과 따윈 하지 않는다."라든가, p75의 "돼먹지않은 개새x" 같은 게 그렇습니다. 이 둘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p290)"를 향한 게 아니라서 이상하죠(물론 놈한테라면 상관 없습니다만). p267에서는 회계사(진짜 고맙고 일 잘하는 사람ㅋ)와의 통화 후 비로소 모든 걸 알게 되어 "그 개자식이 내 재산을 털었다."고 합니다만 이건 뭐 당연한 반응이겠고요.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스포일러라고는 했으나 2부 시작부터 벌써 나이얼이 자신의 정체와 의도를 모두 독자 앞에 밝히기 때문에, 이후에는 마치 "재능있는 리플리씨"가 어떻게 법의 추적을 피하는지 구경하는 느낌으로 이 스릴러를 읽게 됩니다. 3부 끝무렵에는 나이얼이 본인 입으로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처럼(p303)"이란 말을 하기도 하죠. 그는 거의 평생 좀도둑질과 사기, 자기 합리화로 점철된 삶을 살았는데 마지막에 만만히 봤던 브리엔에게 정신적으로 치명타를 맞습니다. 근본이 잘못된 인간이기는 하나 꽤나 치밀한 편이었던 그가 마지막에 실책을 연달아 저지르는 건 아마 이 타격이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이얼, 아니 소설 후반부에 셰인 넛센이라고 본명이 밝혀지는 범죄자는 여튼 본인 딴에는 꽤나 유능하다며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이 자가 어떻게 브리엔을 알게 되었는가. 그에게는 계모이자 인생의 사표였던 소냐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이 계모는 고생고생하며 피 한 방울 안 섞인 셰인을 키웠습니다. 이 점에서 아 소냐라는 이름의 그녀나 그 아들 셰인이나 근본이 나쁘지는 않은 사람들이구나 하고 잠시 착각도 했습니다만, 나중에 브리엔이 "그 수많은 편지 중 너(셰인)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없었다"며, 일종의 세뇌, 가스라이팅 대상으로 셰인을 갖고 놀았다는 것, 혹은 세상에 자신의 복제품 하나를 내놓는 걸로 보람을 삼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사만다는 어렸을 때부터 셰인이 동료로 삼은 여성인데 셰인은 내내 그녀에 대해 애정이 아니라 "충성심"을 확인하며 만족합니다. 물론 사만다는 충성심과 애정을 동시에 품었겠습니다만 후자는 셰인에게 큰 의미가 없었을 텝니다. 그렇다고 셰인이 (나중에 사만다가 "깨달은" 대로) 그녀를 철저히 이용만 한 건 아니지 싶고, 적절한 보상이랄까 대접은 해 줄 생각이었던 듯합니다.

반면 무고한 피해자이기만 한 브리엔에게는 나중에 "죽일" 생각까지 품었는데, 이 역시 계모 소냐의 가스라이팅이 성공적으로 먹힌 결과입니다. p177에 "꿈을 이루는 녀석"이라는 평가가 나오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죠. p186, p172에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다"며 셰인은 다짐을 거듭하거나 합리화를 시도 중인데 역시 계모에게 세뇌된 결과입니다. p153에서 셰인은 브리엔에게 "장모님은 교과서처럼 꼬장꼬장하며 자기도취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 이걸 보아 그의 계모가 비정상이었음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런 장르는 독자들이 익숙한 분야인데 p128에선 대프니 듀모리에가 직접 언급(오마쥬)되며, 그 장편(<레베카>)의 배경인 만달레이 별장과 관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p210에 랭곤크랩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p338에서야 이 소설의 전체 주제이다시피한 "가스라이팅"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p373에는 윌리엄 윌키 코린스의 장편 제목이기도 한 "월장석"이 언급되네요.

p245에서 브리엔은 "수 개월 동안 살아 오다 왜 지금 정신병원에 나를 보낸" 나이얼이 이상하다며 의사를 설득하는데 이 점은 독자들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대목이며, 작게 봐서는 나이엘의 계획이, 좀 크게 보면 소설의 구성이 다소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게는 저 말이 작가의 솔직한 고백처럼도 들렸습니다.

p306을 보면 브리엔이 본명을 알아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친구 마리솔에게 말하는데 미국 사법제도가 이처럼 허술한 면이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범죄자 특정이야 필요하지만 우리 같으면 경찰이 충분히 수사에 나설 만한 사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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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 서커스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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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란 단어는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고는 하나 우리말에서는 그리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다만 "인외마경" 같은 말에서 접하는 정도죠.

이 판타지 스릴러는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인외"와 "서커스"를 다룹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유명한 서커스단이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는 뉴스도 나왔습니다만 유행병이 아니라 해도 요즘 세상에 서커스를 구경하긴 힘듭니다. 엄청난 완력을 지닌 데다 거의 불로불사에 가까운 흡혈귀 역시 마찬가지(?)지요. 어렸을 때는 모르겠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인외든 서커스든 그리 큰 관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말입니다.

소설은 별다른 서두도 없이 대뜸 흡혈귀와 인간 사이의 격렬한 전투 씬부터 시작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흡혈귀는 완력이 매우 강하며 일부는 비행도 가능한데(대체로 판타지에 피처링되는 흡혈귀는 날 수 있긴 합니다만), 이에 대항하는 인간들은 수가 많고 무기가 강력할 뿐 그저 인간일 뿐인데도 기술과 용기가 범상치 않아 자기 임무를 잘 해 냅니다(한참 뒤 p253에, 평범한 인간은 흡혈귀를 절대 이길 수 없으며 예외 조건을 어느 녀석이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서두의 전투 씬을 이미 구경한 독자는 수긍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고는 쳐도 무슨 소설이 대놓고 본론부터 펼쳐지나 싶었는데, 그건 제 착각이더군요.

서두를 장식한 인간 콘서시움(소설 속에서 이런 용어를 씁니다)은 알고 보니 일종의 바람잡이였고, 작품의 진주인공들은 가난한 유랑 서커스단원들로서 훈련을 통해 몇 가지 특별한 기술을 갖춘 것 말고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흡혈귀는 본래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원기를 유지하는 놈들이니 사람을 죽이는 건 이상할 게 없으나 왜 하필 이 서커스단원을 표적으로 삼았는가. 앞부분에서 흡혈귀만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콘서시움이 서커스단으로 위장했다는 말을 듣고 혹 이들이 그들이 아닌지 착각해서였습니다. 가뜩이나 경영난에 시달리며 고생하던 단원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는 격입니다. 아무튼 소설의 진짜 사연은 지금부터 펼쳐집니다.

소설은 판타지 장르이지만 여러 곳에서 작가의 깊은 성찰의 산물일 듯한 인간사 보편의 진리가 읊어지는 점이 좋았습니다. 소설 내내 인물들은 누가 적이고 누가 내 편인지, 피아식별의 과제와 의무감을 마주합니다. 사르트르도 "타인은 그저 지옥"이라 말했지만, 사람은 설령 가까운 친구, 친척이라 해도 마냥 동질감과 유대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란 본디 개체로서의 강렬한 느낌과 독자성을 자각하며 사는 동물입니다.

흡혈귀는 신체적으로 탁월한 존재이지만 개체 생존을 고집하는 건 아니라서 캐릭터인 그리즐리와 그의 부하들은 조직을 이뤄 살아갑니다. 반면 미티어처럼 "고독한 늑대"처럼 사는 녀석도 있나 봅니다. p248에 보면 어떤 놈(스포일러)이 자신을 가리켜 "무리에 속해 있긴 한데 권력관계일 뿐 애정은 없다"고 하는데,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 중에 나온 소리이지만 이 부분만큼은 진짜인 듯 보였습니다. p290에서 누가 하는 말 중 "녀석들이 죽었다고 별 느낌은 없어"라든가, p321에서 "녀석들의 분열은 놀랄 일도 아니"라는 전문가의 말에서처럼, 흡혈귀 종족의 연대감과 윤리의식, 성숙도는 가히 최악 수준입니다.

어쨌든 간에 흡혈귀들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터라, 과연 그들이 우리와 같은 생물인지부터 의심스럽지만 중반 이후 등장하는 도쿠 노인의 분석에 따르면 "신체의 조직 강도 자체는 우리 인간과 비슷"하며 나중에 란도가 (누구의 도움을 받아) 약점을 밝혀 내듯, 급소는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있으며 정말 우리와 닮은 바 많더군요....

서커스단원들은 여인 기프티라든가 단장 피에로처럼 나이 많은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젊은이들입니다. 그래서 서투르고 미숙한 점도 많지만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정신의 키가 크는 모습이 독자 입장에서 또 볼만합니다. p122에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해"라며 자신의 기술이 존중 받아야 함을 주장하자, 누가(알고보니 이게 일종의 복선이었음) "그건 네 생각이지 관객의 논리가 아냐."라며 냉정한 현실을 일깨우는 대화 같은 게 재미있었습니다. p130에는 이동전화 기지국 타령도 나오는데 비록 판타지 장르지만 독자는 이런 상황 설정에서 현대인으로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p133에 "하늘을 나는 건 우리잖아?"라고 하는 말이 큰 웃음을 주는데, 사실 공중 곡예사에 지나지 않음은 모를 리가 없건만 이 절망적인 대치 상황에서 용기를 잃지 말자는 유머지요. p142에서 흡혈귀 캐터피라(책의 표기를 따릅니다)가 "하늘을 나는 새는 총에 맞고 싶겠냐고?"라며 비꼬는 대목은 그들의 잔인성을 일깨우지만 인간들도 이 대목에서 자성할 필요가 있죠. 소설 말미에 누가(스포일러) 란도더러 "너희들은 바퀴벌레인데 무슨 연민을 느끼겠냐?"고 하는 말도 뭐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커스단에는 곡예사뿐 아니라 마술사도 있는데 란도와 슈티가 이 작에서 거의 주인공 비중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마술의 비밀이 여럿 설명되는데 작가는 아마 이런 테크니컬한 면에 평소부터 관심이 많았던 분 같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마술사가 당당히 살펴 보라고 하니 당연히 아무것도 없겠지" 같은 건 우리 관객들이 빠지기 쉬운 심리적 함정입니다. 만약 등장인물 중 누가 누군지 헷갈린다면 p97이하에 비교적 몰아서 소개가 나오니 그쪽을 수시로 참조하십시오. 등장 인물들의 개성을 좀 세밀히 파악을 해야, 뒤에 기다리는 대반전이 더욱 충격으로 다가올 겁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판타지 장르인데도 곱씹어 볼 만한 좋은 말이 자주 나옵니다. 주인공격인 란도는 물 속에서 탈출하는 묘기가 전문인데 공연 중 잘못하다 죽을 뻔합니다. 자신이 세밀히 설계한 장치였는데 하청업체에서 불량품을 넘겨 준 까닭입니다. 이 실패 후 그는 큰 좌절에 빠지는데 이 사정을 간접으로 전해 들은 도쿠 노인은 p167에서 "그를 도울 수 있는 건 그 자신뿐이니 네가 조바심칠 것 없다"며 참으로 현명한 충고를 해 줍니다. 일종의 휴브리스가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인데 오만과 과신의 함정에 빠진 건 란도만은 아닙니다.

흡혈귀는 여기서 거의 절대 불멸의 존재지만 진짜 약점은 그들의 오만과 그에 따른 방심하는 습성입니다. p282에는 죽은 누구한테 도쿠 노인이 "같은 실수를 반복했던 걸 보니 아직 어린 녀석이었구나"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p203에는 "인간은 우리에게 상대가 안 된다고. ....라기라도 하면 모를까 말야."라고 하는 말이 있고, 같은 페이지에서 "오빠들" 어쩌구 하는데 이걸 보면 확실히 녀석이 어리긴 하죠. 어리긴 어린데 이루말할 수 없이 못됐습니다. 이런 녀석에게 어떤 잔인한 분풀이를 해도 무방할 듯하지만 p283에는 "우린 괴물이 아니니 그럴 수 없다"고 말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허나 니체도 말했듯이 "괴물과 싸우는 자는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되기 마련"이죠. 슬프게도 말입니다. 이 대목은 영화 <에너미 게이트>에서 베우 에드 해리스가 잘 소화한 나치 장교의 대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오만함의 폐해"가 잘 지적된 대목은 p171에서 캐터피라의 오만함, p165에서 역시 자신감 과잉 등을 지적한 곳, p186 그렇다면 그 요구는 부당해 슈티는 정론을 말하고 있다이 있네요.

책에는 상당히 잔인한 묘사가 많은데 앞서 말한 대로 작품 전체는 서사와 교훈, 유머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너무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인외마경, 엽기적인 잔혹성을 파고드는 미학은 20세기 전반의 에도가와 란포가 유명한데 p168에는 "신을 모독하는 교잡종" 어쩌구 하는 부분이 있어 더욱 그를 떠올리게 되네요.

p175에서 캐터피라(얘가 제일 못됐죠)가 쿠와이에게 "너, 왜 아직 도망치지 않지?"라고 물어보는 대목이 있는데, 우리 인간이 인간이며 괴물 수준으로 안 떨어지는 이유를 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겠죠? 여기서 독자들은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고(동료뿐 아니라 동물들도 버리지 않습니다) 분투하는 그들, 거의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반면 흡혈귀들의 본성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이 독후감 앞부분에서 말했습니다.

p186에서 슈티는 민법 지식에도 꽤 밝은 듯한데(ㅋ), 설계가 잘못되었다고 그 업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고, 그 업자가 그런 사정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어야 한다면서 마치 민법 교과서의 한 대목을 읽는 듯해서 우스웠습니다.("그렇다면 그 요구는 부당하다며 슈티는 정론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작가는 기술적인 면에 꽤 관심이 많은 분인 듯한데, p187에는 아들자가 나오며, p201, p291에는 바이스가 등장합니다. 아들자는 버니어 캘리퍼스라고 불리는 건데 책에도 설명이 나옵니다. 저는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이걸 배웠는데 아니 무슨 실업계 고교도 아니고 일반 중학교에서 국영수 아닌 이런 걸 왜 가르치는지가 몹시 짜증났습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역시 남자의 로망은 공구의 자유로운 활용이며 인터넷에도 DIY를 잘한다며 자랑 삼아 작품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더군요.

뭐 그건 그렇고 바이스에다 머리를 넣어 조이는 잔인한 장면은 1995년 스콜세지 영화 <카지노>에도 나오는데 여기서 거기 머리가 끼인 사람은 압력 때문에 안구가 튀어나옵니다. 작가분이 그 영화를 혹 보기라도 했는지 이 소설 속 묘사 역시 잔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p179에 보면 "불의 추격 속도가 훨씬 빨라서" 홀랑 타 버리는 흡혈귀의 한심한 최후가 나오는데 이런 장면은 1990년 영화 <다이하드 2>의 마지막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말도 안되는 상대에게는 말도 안되는 방법을 써야 한다는 말이 p210에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오케하자마 전투가 생각났습니다. 여기서 요지는 지나치게 강해 이길 가망이 없는 상대에게는 기습으로 공격을 가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는 거죠. 일반인에게 존재를 알리지 않고 흡혈귀를 처단하고 다니는 건 1997년 영화 <멘 인 블랙>(그 이전에도 마블 원작이 있었지만)도 생각나는 대목입니다(흡혈귀가 외계인으로 바뀌었지만).

묘사가 잔인하지만 마지막에 코끼리, 사자 등 맹수와 힘을 합쳐 놈들을 무찌르는 건 마치 동화 <브레멘의 음악대>가 생각났습니다. 하나하나는 힘이 약하지만 지혜와 용기를 모으면 무찌르지 못할 강적은 없다는 교훈면에서도 그러하죠. 다 읽고 보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게, 작가의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이 결국은 효과적으로 작 중에 잘 녹아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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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경계선 - 사람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그어지는
아포 지음, 김새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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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을 보면 특정 위도를 따라 기나긴 일직선으로 이어집니다. 인위적 경계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어떤 무엇이 인위적이라는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해체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게 합니다. 이는 마치, 민족, 인종이 달라도 두 남녀 사이에 언제든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든 느낌은, 경계선이라는 게 그리 만만한 존재가 결코 아니며, 애초에 지상에 없던 경계선을 구태여 만든 인간의 마음 안에 우리가 쉽게 극복 못할 어떤 무엇이 단단히 응어리져 있지 않나 하는 일종의 근원적인 절망감이었습니다.

阿撥이라고 한자로 쓰는 이름(우리식 발음으로는 아발)의 저자는 대만 출신의, 아직은 젊은 인류학자입니다. 전 처음에 중국 대륙에서 나고 자란 분인 줄 알았습니다. 공산 중국은 표면상으로 중국 경계 안에 터잡고 사는 다양한 민족들에 각각의 생존권과 자존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잔혹한 탄압과 일률적 동화 정책에 가깝습니다. 이런 당국의 이념과 스탠스에 동조하는 저자가 "슬픈 경계"를 논한다면 독자 입장에서 진정 슬픈 독후감이 빚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만에서 나고자란 이의 시선과 입장이라는 게 의의로 큰 보편성을 담보할 수 있구나, 나아가 대만과 우리 나라의 젊은 세대가 생각 밖으로 많은 공통의 지평을 가졌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베트남은 저 개인적으로 몇 주 전 책프 독후감에서도 말한 것처럼 중국과의 항쟁 역사가 그 주된 정체성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책 저자는 분명 "중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대만인으로서의 무심함(이 "무심함"은 아마 대륙 출신이라면 도저히 유지하기 힘들 겁니다)과 중립성도 그 영혼에 분명 배어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본디 중국과 짧지만은 않은 경계를 공유하지만, 대만과는 바다를 사이에 둘 뿐입니다. 비단 베트남뿐 아니라 대만은 섬나라이기에 주변국 모두와 바다를 경계삼죠.

베트남은 분명 베트남으로서의 독자성을 갖고 있습니다만, 사실 외국인 눈에는 남중국과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분간이 힘듭니다(아마 우리 한국도, 밖에서 보기엔 북중국과 큰 구분이 안 될 겁니다). 베트남 주류 민족은 그 먼 근원을 중국에 두기까지 합니다. 이런 베트남에 심지어 "화교"까지 많이 사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배트남 국민인 이상 그들은 중국에 근원적 경계심을품고 삽니다. 중국과 베트남은 같은 사회주의 이념을 공유하지만, p27에 나오듯 국가 차원에서 유리한 계약을 거부할 만큼 "어두운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서의 중국을 경원시합니다.

한국의 문 대통령도 몇 달 전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앙코르와트 유적 앞에서 "이렇게 큰 나라가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었던가"라고 발언했다고 합니다. 수도 프놈펜도 그렇고 캄보디아 곳곳에는 과거한때 찬연한 문화를 발전시킨 흔적이 뚜렷합니다. 그런데 캄보디아 인들의 마음 속에는 "폴포트, 또 그가 거느린 크메르 루즈"에 대한 공포감이 가득합니다. "아주 무서운 사람". 뭐 두 말이 필요 없죠. 이 폴포트를 겨냥하여 이웃 베트남이 쳐들어오기도 했고 베트남 역시 캄보디아 인들에게는 가공할 만한 앙숙입니다. 베트남인들도 "나는 캄보디아 인들을 증오해(p61)."라 말할 만큼 감정의 골이 깊습니다.

p81에는 리처드 뮤어의 말이 나옵니다. "국경은 영토의 접촉면이다. 이에는 수직이 있을 뿐, 수평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호한 평면의 공간이 아니라, 철저하고 확실한 단절이다." 저자는 식민주의자들이 일별하고 파악하기 쉽게, 마치 백화점의 진열 공간처럼 재편집해 둔 것이 바로 근대 국가의 지도라고 합니다. 저자는 묻습니다. "이 땅이, 식민주의자에 의해 모습을 갖추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잘못도 무척 큽니다만, 그 이전 중국은 어떨까요? 수평이 없고 수직만 존재하는 경계에서, 인간은 누가 누구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는 힘의 논리를 위에서 아래로 강요할 뿐입니다. "사실 내 눈에는 모든 동남아시아인들이 비슷해 보였다(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를 가리지 않고)." 그러나 실제는 말도 풍습도 다르며, 이것들이 서로 차이 나는 그 이상으로 그들은 서로를 경계(警戒)하며 진한 경계(境界)를 짓습니다.

인도네시아도 수많은 부족들이 인위적 경계 안에 부대끼며 사는 광대한 나라입니다. 논과 보르부드르 사원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이슬람이 외부에서 침입한 이래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다(p89)." 저자도 말하듯 인류학에서 어찌 보면 영원한 한계가 되는 게 "연구자와 타자 사이의 간극"입니다. "스스로가 짜낸 의미의 그물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기에, 일단 연구자는 나 자신(연구자가 비서구인일 때)의 관점과 서구인의 관점(주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첫 출발을 잡아야 합니다. 스스로의 관점을 당연히 정립하고 첫 발을 떼어도 죄의식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데 이런 어려움까지 있으니... 저자는 이 다양한 부족의 모자이크가 이루는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서 새삼 그 한계를 절감합니다.

인도네시아는 독립 운동 영웅이었던 수카르노 치하에서 한때 열광적인 유일 체제를 만들었지만, 그가 용공 노선을 취하고부터 커다란 불안에 시달리다 결국 수하르토 장군의 쿠데타를 겪고 군사 독재 시스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수하르토 장군은 의도적으로 반 화교 노선을 취했으며, 무려 삼십 년이 지나 민주화 바람이 부는 와중에 역설적이게도 이 나라는 또 한 번 화교 대학살을 겪었습니다. 자구의 한 구석에서는 중국인이 비(非) 중국인을 향해 잔혹한 탄압을 가하는 현실을 보면 참으로 개탄할 만한 사태였습니다. "경계에 대한 맹목적 신봉"은 이처럼이나 위험하고 무섭습니다.

오키나와는 류큐라고도 불렸으며(역사적으로 둘의 범위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도 어떤 아주머니가 충셩[중승이라는 지명의 중국식 발음], 오키나와, 류큐를 목적지로 각각 표기한 여행을 다녀온 후, "어쩜 그렇게 서로 똑같대?"라며 놀라는 유머러스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조선, 왜,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자존을 유지했습니다만 근대 들어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다룬 사연도 여러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안타까운 사연의 정한이란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일제의 패망 후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지금까지 주둔합니다만, 놀랍게도 이들은 미군 당국에 의해 모멸감을 새로이 겪고 심각한 차별과 착취 정책을 경험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주장이 주장일 뿐이라 생각했고, 특정 정치 진영에 의해 과장되었다고 여겼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미군이 물러가고 즉시 일본에 재편입되게 하려는 운동이 다 벌어졌겠습니까. 이 일로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아시아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웃지 못할 일입니다. 어떻게 된 게, 우리 아시아에는 경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비극을 품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게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놀라움이었습니다.

한국이 또 이 학자의 여정에서 빠질 수 없습니다. 대만인답게 한국을 보는 시선과 감정은 복잡미묘합니다만, 인류학자가 꼭 아니라 해도 개인으로서 저자 아포의 스탠스는 담백하고 중립적이며 교육적이고 유익하기까지 해서 고마웠습니다. 역시 한국인들은 누가 봐도 근면하고 역동적이며, 무엇보다 세계를 휩쓰는 한류 열풍의 배경이자 근원입니다. 한국에서 저자가 만난 친구 신아영은 독특한 열정을 지닌 여성인데, 그녀는 대만인들이 쓰는 번자체를 낯설어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동안 한자를 써 왔는데 이는 당연히 (현대에 들어와서야 번자체로 불리는) 정자를 뜻합니다. 그러던 겨레가 불과 수십 년만에 한자를 모두 잊고 대륙에서 쓰는 (다소 격 떨어지게까지 보이는) 간체자를 원칙으로 삼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르네오라는 섬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경계를 사이에 두고 공유하는 지역입니다. 말레이시아 역시 화교의 영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며, 이슬람 술탄들이 돌아가며 국가 수반을 차지하는 데서도 볼 수 있듯 종교의 영향이 아래 이웃 인도네시아만큼이나 큰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역시 이주 중국인들이 그 형성에 많은 족적을 남겼으니 경계의 무상함이 이보다 클 수 없습니다. "종족 사이 마음에 진 응어리를 풀려면 정말이지 갈 길이 앞으로 한참 먼 것 같아." (p257) 여행을 함께한 친구뿐아니라, 그 기록을 간접적으로 구경하는 독자의 소회도 이와 별 다를 바 없습니다.

앞에서 어떤 근원적 절망을 느꼈다고 했지만, 국적과 혈통을 떠나 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고 이웃을 포용할 수 있는 저자 같은 젊은 세대의 비전을 접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싹튼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몇 달 전 이용수 할머니가 "젊은 세대는 서로 소통하고 교류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역시 참 옳은 말씀이다 싶었습니다. 경계는 결국 어리석은 환상일 뿐이며, 그러잖아도 많은 슬픔이 침노하는 우리네 마음에 뭐하러 이런 인위적이고 쓸데없는 근심거리를 또 하나 들일까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선이 아니라 공간이 이웃과 이웃 사이에 무심히 노닐게 하는 게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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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경제 생태계 만들기 - 채이배가 말하는 한국 경제 위기의 유일한 해법
채이배 지음, 주준형 인터뷰어 / 헤이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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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노력하지만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회가 무한 경쟁으로만 성원들을 몰아가는 것도 문제지만, 살인적인 경쟁을 거치고도 정작 엉뚱한 이들에게 성과가 배분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나친 경쟁을 강요하고도 결과가 정의롭지 못하기에 많은 국민들이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앞장 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민중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시스템이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채이배 전 의원은 재벌기업 내부의 오랜 폐단을 자세히 비판합니다. 예컨대 기업에는 시스템 통합(SI) 업무라는 게 있는데, 그룹의 각각 계열사(물론 모두 독립된 법인이죠) 내부에서 처리되어야 할 이 업무를 모두 뽑아내어 별개 회사로 또 설립하고, 이 회사에다 SI를 몰아주기라도 한다, 그리고 그 회사가 총수 일가의 사유물이 되게 한다, 이러면 아주 쳬계적이고도 망라적으로 "오너 가문에 일감 몰아주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젊은 경영인들이 의욕적으로 SI만 전문으로 삼는 스타트업을 만들 수도 있을 텐데, 이런 문어발의 첨병 때문에 이들은 아예 자신들의 장기가 될 수 있는 분야에 발도 못 들여놓게 되죠. 명백한 불의(不義)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채 전 의원은 IBM(물론 우리가 잘 아는, 전에는 컴퓨터 제조 회사로만 유명했던 그곳입니다), 오라클, SAP(요즘 빅데이터 관련으로 일반인들도 잘 알게 된) 같은 SI 전문 기업이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성장하지 못한다고 하며, 심지어 재별 계열사가 물류 섹터도 과점하는 통에 중견기업의 씨가 마른다고 합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런 듯합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저를 포함) 잘 모를 이가 많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일 만합니다.

물류 섹터를 재벌이 독점하는 폐해로 저는 H 택배, C 택배 같은 곳을 떠올렸지만 사실 이런 곳은 자영업자를 관리하는 센터 비슷한 체제이기에 상대적으로 그리 심각한 건 아니죠. 채 의원이 드는 예는 현대글로비스로서, 현대차(화주)와 일반 차주를 연결, 주선하는 데 (많은 투자 없이도) 분명 기존의 유리한 위치만 활용하여 업계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땅짚고 헤엄치기에 다름 아닙니다. SI 센터도 가상의 위험이 아니라 SK C&C가 이미 그 큰 그룹 내의 전산 용역을 독점하는 중입니다. 이래서야 공정경쟁이 될 리가 없고, 청년 창업 같은 게 꽃필 수가 없습니다.

재벌들이 일감 몰아주기를 하는 이유는 상속세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런 일감 몰아주기의 가장 근원적 문제는, 야심찬 젊은 업체들을 결국 재벌가의 하청사로 계열화한다는 것입니다. 창의력 발휘의 대가가 딱히 이유 없이 대기업 오너 가문으로 그 상당 부분이 빨려 들어간다면 이는 전근대적, 봉건적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농노나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와중에서 젊은 개혁 성향 국회의원으로서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 온 채 전 의원은, 그런 노력을 통해 정의선, 정경선 같은 현대가(家) 후계자들이 보다 전향적으로 스탠스를 전환하기도 했다고 스스로 뿌듯하게 말하는군요.

1998년 외환 위기 이후 도산법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p74), 이는 이른바 기촉법 등 당시로서는 새로운 입법이 순기능을 발휘한 바 큽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관치 주도(혹은 책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보수적인 기관인 은행" 위주)의 시스템이며 채 의원 같은 젊은 개혁 성향 의원들이 주장했던 건, 이런 법제가 보다 민간 주도가 되어 작동해야 한다는 쪽이었습니다. 여기서 민간이라 함은 아마 그가 몸담았던 참여연대 등의 단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고 지레짐작했으나, 책을 꼼꼼히 읽어 보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이게 좀 놀라웠습니다(솔직히 좀 부끄럽기도 했고요).

회사가 파산지경에 도달했을 때 가진 잔여재산 다 팔고 그나마 채권자들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청산이 우선이냐, 아니면 노동자들에게 일단 밀린 임금을 지불(이들 노동자들도 분명 채권자이며, 다만 정부, 특히 노동부에서는 임금 채권의 만족 순위를 낮추지 말자는 취지입니다)해야 하느냐. 후자의 근거는, 임금을 지불 받은 근로자들은 의욕을 찾고 열심히 근로에 복귀하여 노동을 계속하겠으며, 이는 기업의 생산을 재개하여 진정한 의미의 "회생"을 촉진할 것이라는 전망에 있습니다. 남은 채권자들도 낡은 집기나 건물, 혹은 부지를 팔아 얻는 몇 푼 안 되는 변제를 받느니 이 편이 낫지 않겠냐는 뜻이겠죠. 설득력이 대단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현실론으로 회의를 품는 이들도 있겠습니다. 성과, 가치 창출의 원천이 노동이냐, 아니면 다른 요소의 기여가 더 크냐에 대한 오랜 의견 대립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입니다.

채 전 의원은 모험 자본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신산업을 육성하고,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통한 일자리를 지키고, 나아가 제조업을 몰락시키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p79). 회생 절차에서 이런 모험 자본에 우선 순위를 주면(심지어 임금 채권보다도), 앞선 청산 절차에서 모든 일자리가 완전 없어질 위기를 일단 막은 기여에 대한 보상 아니겠냐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에 정부가 그저 모태 펀드에 대해 지원한다거나(개별 기업을 찾으려는 노력을 않고), 은행 팔 비틀어서 돈을 대는 식의 "격화소양"식 처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성과물이 바로 20대 국회에서 멋지게 통과된 "채무자회생법"이란 거고요. 글쎄 사람마다 진보다 보수다 하여 입장이 갈릴 수는 있겠지만, 이런 개혁은 노선이나 세계관의 차이 불문하고 모두가 긍정할 수 있는 해법 아닐까요? 더군다나 이런 방안은 기본적으로 민간 자본(이윤 추구가 최우선인)에 주도권을 준다는 점에서 효율성을 해하지 않고(오히려 제고하고) 시장 친화적이기까지 합니다. 관이 개입하지 않고 민간 기업의 문제(또한 노동 문제)를 민간 안에서 찾아 해결하는 셈이지 않습니까.

대기업과 (한국인 대부분이 일하는) 중소기업의 상생을 위해서는 어떤 인센티브가 있는 제도적인 틀 마련이 중요하며, 이게 꼭 경제적인 것일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경영 자율성 존중만으로도 기업은 크게 만족할 것이라고 하네요. 이는 문재인 정부가 주창하는 스튜어드십코드와도 색깔이 다른 입장 같아 보입니다. 한국이 이제 질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주장을 여러 면에서 곱씹게 되는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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