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의 그릇 - 이나모리 가즈오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양준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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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모리 가즈오 사장님은 워낙 CEO 리더십에 대한 책을 자주 쓰셔서 잘 모르는 독자들은 전문 저술가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저 역시 그분의 책을 여러 권 읽고 이 블로그에다 독후감 여럿을 여태 남긴 적 있습니다. 여러 권의 책을 쓰셨으니 내용이 중복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제가 읽어 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고, 그래서 현역 CEO 경력을 통해 참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하고 소중한 지혜를 쌓으셨다는 점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어느 챕터를 펼쳐 봐도 "제가 어느 시점에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했는데..." 같은 회고담이 일단 먼저 펼쳐집니다. 펼쳐지는 이야기 거의 모두가 다 자신의 진지한 체험과 성과에 근거했다는 점 확인 가능하죠. "왜 실적이 악화하는가?" 중간 관리자이건 최고 책임자이건 이런 근본적인 문제 앞에서 언제나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완 형사라고 해도 매번 사건을 해결하는 게 아니듯, 노련한 사장 역시 때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장벽 앞에 주저앉고 다음 과제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대개 이런 경우, 저자는 이런 지향점을 갖고 문제 해결에 골몰한다고 합니다.

1) 가급적이면 긍정적 사고를 갖고 문제를 바라본다
2) 직원들은 의욕 충만, 향상심, 밸런스 감각이 있는 인재들 위주로 충원하고 활용한다
3)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혁신을 도모하는 회사(직원 입장에서는 "자기 실현")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도 잘 나오지만 2세, 혈족 등은 언제나 회사 안에서 왕처럼 군림할까요?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단 조직이라는 게 서열도 중요하지만, "숫자"도 중요합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위에서 이끌어가는 사람이 많겠습니까, 아님 밑에서 "이끌어지는" 이들의 숫자가 많겠습니까? 리더십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밑에서는 비웃는 소리, 나아가 반감을 조직화하는 어떤 움직임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2세의 경우, 여태 능력만으로 조직에서 그 어려운 "게임"을 해 오던 이들이 볼 때에는 명분도 없고 감정적으로도 꽤나 거슬리는 시선을 받는 게 당연하죠. 이 역시 그 2세들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시련"입니다. 저자는 (당연히) 창업자이니까 그런 2세의 고충을 모르지만, 만약 당신이 그런 입장이라면... 이란 역지사지의 시선에서 주장을 전개합니다.

이나모리 가즈오 저자의 책들은 이처럼 다양한 시선에서 전개되는 주장들이 큰 장점입니다. 제가 앞서서 "절실한 현장 체험"에 기대는 솔직한 깨달음이 장점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와는 다소 상충되는 이런 특징들도 저자 책의 뛰어난 개성입니다. "역지사지"는 어찌보면 성공하는 CEO의 필수 덕목입니다. 아니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대중의 트렌드를 읽겠으며 상대 기업의 전략 그 허를 찌르며 전쟁을 펼 수있겠습니까.

2세 혹은 누가 되었든 간에, 나에게 존중을 보내지 않고 고깝게 여기는 사람이 등장하면 CEO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저자의 답은 그래도 "일단 설득하라"입니다.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일단 자신이 경영 최전선에서 부딪히며 얻은 체험과 지혜가 많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 상대 역시 현장에서 이것저것 겪어 보며 그 나름 체득한 지혜에 바탕하여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일 텐데) 그저 탁상 공론의 논리로 상대가 설득될 리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손오공이 되고 싶었다." 성공한 기업들은 대개 독자적인 DNA를 가졌다고도 하며, 그 DNA는 창업자가 일궈 낸 개성, 노하우, 근성 따위의 응집체입니다. 그래서인지 현대나 삼성 등 대기업에서도, 그 성공하는 관리직들의 경우 창업자의 개성을 많이 닮았습니다. 심지어... 무슨 불미스러운 일로 구속이 되거나(!) 할 때에조차 그 창업자의 못된 악행을 닮았다고나 할 정도입니다. (대신 뒤집어쓰는 경우는 일단 제외하고) 여튼 성공하는 기업가는 "제발 내 몸이 열 개라도 되어" 현장에 나의 복제품을 여럿 보내 나의 감각과 지식과 기술을 그 자리에서마다 펼쳐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입니다. 그런 후계자, 혹은 오른팔 왼팔을 여럿 잘 키우는 일 역시 CEO의 능력입니다. 이 역시 CEO가, 남들이 닮고 따라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되어야 가능한 일이죠.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자가 p143 이하에서 주장하는 게 바로 "시스템을 만들어라"입니다. 어떻게 일일이, 터지는 사태와 돌발 변수에마다 사람(그것도 뛰어난 사람)이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겠습니까? 잘 되는 기업은 그래서 노하우와 암묵지를 구체화한 시스템을 구축하여 이에 대응합니다. 이 역시 "비범하면서도 유연하며 낙관적인 사장의 그릇"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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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쇼크 - 인류 재앙의 실체, 알아야 살아남는다, 최신증보판
최강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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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체가 바이러스 하나(변종도 많다고 하지만)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는 요즘입니다. 얼마 전 TV 뉴스에서도 서점에 부쩍 바이러스 관련 책을 찾는 이들이 늘었다는 소식이 나왔는데, 지금 이 책도 화면과 멘트에서 다뤄진 책들 중 하나입니다. 책이란 게 집필되고 제작, 배포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일종의 레거시 미디어라서 과연 나의 관심사가 다뤄지기는 할까 같은 의구심이 있었는데, "쓸데없는 걱정 하덜 말어!"라고나 일갈하듯 벌써 p76에 "2019년 12월에 출현한 우한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혹 아니라고 해도 배경 지식은 필요할 텐데, 책이 대뜸 시사성, 시의성까지 증명한 셈이라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갔습니다.

이미 한국은 2014년에 메르스라는 특이한 병원체 때문에 나라가 큰 홍역을 앓은 적 있습니다. 메르스는 물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었지만 에볼라 따위와는 달리 한국에서도 유독 감염자가 발생했고 몇몇 분이 격리조치되는 등 그전에는 없던 사태가 벌어졌기에 국민적 관심을 뜻하지 않게 모았죠.

역시 책 p76에는 이런 언급이 있습니다.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하는 경로에는 여럿이 있다. 그것은 푸시&풀이다." 여기서 저자는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숙주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최소한 한 개체 이상을 감염시킬 여건이 되어야만 한다고 알려 줍니다. 상식에 가까운 말입니다만 바이러스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신종"이 새로 고고의 성을 울리기 위해 숙주나 감염체의 조건이 언제나 녹록한건 아니겠죠. 인류 역시 그들에게 해가 되는 여러 치명적 바이러스를 격퇴하기 위해 나름 분투해 왔으니 바이러스 입장, 특히 신종 입장에서 마냥 우호적인 조건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여튼, 자연숙주에서 다른 종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스필오버"라 부릅니다. 스필오버는 미생물학 외에도 다른 분야에서 갖가지 뜻을 지니는 단어인데 여튼 이 불길한 스필오버가 지금 전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셈이죠. 어제쯤 한국에서 "확진자 인간을 통해 반려견에 전염된 사례가 최초 보고"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는데(아직 확인이 필요합니다), 혹 그 반대, 즉 동물에게서 거꾸로 사람에게 옮겨지는 사례까지 확인된다면 문제는 훨씬 심각해 지는 겁니다. 이처럼 일단 바이러스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어떤 종과 종을 건너뛰는 자체가 보통 힘든 과업(?)이 아니죠.

지금 겪는 난리가 어제오늘 시작된 게 아니라며 일단 위안을 구하고 다음으로 선조들의 지혜를 참조하는 노력 역시 인간의 본성입니다. p118이하에서는 여태 인류를 엄습해 온 전염병과 그 바이러스, 혹은 세균들의 역사에 대해 다룹니다. 근대까지만 해도 세균의 존재, 즉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어떤 녀석들이 바글거리며 병을 옮긴다는 가설 자체를 황당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선입견을 극복하고 백신 등 예방법을 최초 개발한 과학자들이야말로 인류의 구원자에 가깝죠.

일단 병의 만연이라는 건 위생 조건의 불비에서 비롯합니다. 2003년 사스가 중국을 강타했을 때 유독 한국에서만 환자가 없는 걸 두고 김치의 면역력 증가니 뭐니 별 말들이 많았습니다만 그때 많은 이들은 중국에 비해 월등히 나은 한국의 위생 상태를 지적했습니다. 헌데 2014년 메르스 사태, 2019년 우한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그런 정도로 설명이 안 되는 게 있음을 깨닫게는 됩니다. 저자 최강석 박사님은 p134에서 수 년 전 동남아를 방문했을 때의 경험담을 들려 줍니다. 파리가 들끓는 식당에서 제대로 씻지도 않은 접시에 음식을 내 주는 주인... 그런데 아무리 미개(?)하다 해도 그처럼 더럽게 해서 먹다 탈이 나면 사람인 이상 주의를 하게 됩니다. 안 그런다는 건 몇 차례 겪고 면역이 생겼다는 뜻이겠죠. 박사님 같은 경우 그 과정이 없었기에 바로 설사병에 걸렸던 거고요.

대상포진 역시 한국에서 한때 큰 문제가 되었고 지금도 적지 않은 이들을 괴롭히는 병입니다. 이 병은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데 어느새 사람을 죽음에까지 몰고가는 게 황당하게까지 느껴집니다. 저자는 이런 병의 원인으로 스트레스와 함께, (책의 주제에 맞도록) 대상포진 바이러스를 지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분명 특정 바이러스가 서식하고 번식하기 좋은 숙주, 감염체의 조건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p206이하부터는 대체 어떤 조건에서 바이러스가 한 숙주에서 다른 숙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지,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일 이 난관을 해결하는 기제를 설명합니다. "새로운 숙주에 서식하기 위해, 바이러스는 그 새로운 현관문의 자물쇠를 열기 위해 입자 표면 단백질에 있는 열쇠 구조를 변형시킬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메르스의 경우 구체적으로는 "S단백질의 746번째 세린, 762번째 아스파라긴이 핵심이며, 이 아미노산이 각각 아르기닌과 알라닌으로 바뀔 때 사람 감염 가능 바이러스로 돌변할 수 있다"고 합니다(p207). 이런 기제가 아마 바이러스 일반에 대해서도 비슷한 과정으로 유추될 수 있겠죠.

이번 바이러스는 대체로 우한이 그 시발점으로 여겨지지만 많은 학자들은 중국 광둥성을 예전부터 주목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p246). 비위생적인 환경, 유독 다양한 가축들이 별다른 방역 관심 없이 자라는 풍조 등이 그런 좋은 "숙주"를 만듭니다. 한국에서도 조류 독감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농가의 큰 근심거리를 만드는데 이런 가금류가 바로 신종 바이러스의 좋은 모태가 되곤 한다는 사실 역시 흥미롭습니다.

이 글 앞부분에서 뉴스 언급을 잠시 했습니다만 우리가 이런 유익한 책을 찾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차피 몸이 아프거나 하면 우리가 스스로 병을 낫울 수도 없고, 자가 치료를 할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병은 그저 전문가에게 맡기면 그만 아닐까요?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전염병에 관해 일반 대중의 지식이 늘면 그만큼 경각심이 생기고, 사소한 부주의에서 비롯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의 확산이 그만큼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겁니다. 책에는 바이러스 관련 전시회의 예를 들며, 바이러스가 스스로 자신을 증식시켜 나가는 과정을 마치 퍼즐 풀듯 이해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잠시 묘사됩니다. 이런 고민을 해 본 어린이들이 커서 더 유능한 전문가가 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인이 코딩 능력을 키워 모두가 4차 산업혁명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시대에, 일반인들 사이에서 지식이 널리 퍼져 바이러스에 창의적으로 대응하는 지혜까지 퍼져 나간다면 이런 재난에 더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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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익스체인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2
최정화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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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은 어디서 근거할까요? 사람은 당장의 곤궁을 모면하기 위해 못 할 짓이 없어 보이는, 때로는 참으로 초라하고 비천한 존재입니다. 물론 루머에 불과하겠으나 과거 군사정권 당시 대규모 개발에 쫓긴 도시 빈민들은 자기 자식을 삶아 먹었다는 충격적인 소문도 있었습니다. 먼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면 자식을 바꿔 먹기도 하고(조선 경신대기근), 딸을 팔아 생계에 보태기도 하는 등(중국 청조 말기) 인간이 굶주림과 가난 앞에서 못할 짓이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곤경이 과거형으로만 회고되는 건 물론 아닙니다. 이 책 뒤편 해설에도 나오듯, 멀지도 않은 한국 제주에 체류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난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TV 광고를 통해 전세계의 딱한 처지에 처한 이들, 특히 어린이들에 대한 도움이 절실하다는 메시지를 항상 접하다시피 합니다. 그럴 일이야 없겠으나, 이 코로나 위기가 장기적으로 지속되어 혹 한국 경제가 파탄이라도 난다면 저런 곤경과 기근이 우리에게도 닥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인간 존엄이 우리의 의지, 자존감, 그리고 "기억"에 달려 있음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합니다. 제가 찾은 대목만 해도 p30, p38, p59, p70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또 누가 우리의 굴욕을 강요해도,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갖고 단호하게 그에 대해 No라고 말해야 한다는 점, 우리의 자존은 우리 스스로가 지킬 때 비로소 처음부터 있던 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작품은 SF 형식을 띱니다.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사건 위주로 진행되기보다 사건과 사태에 처한 인물들의 처절한 감정 표백이 주된 내레이션이라서 어떤 독자들은 갈피를 조금 잡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책 뒤에는 다른 평론가분의 "해설"이 딸려 있습니다. 물론 해설의 주된 이유는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 이야기가 그저 SF로 읽힐 게 아니라 "난민 문제 등 현재의 모순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정"임을 강조하는 데 있겠습니다만.

"니키라고? 그 이름은 어쩐지 여자 같습니다만." 그러나 반다는 자신이 니키임을, 최소한 니키의 기억 상당부분을 머리에 짐졌음을 자각하고 이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반다는 니키이고 니키는 반다인데, 그 니키는 이제 도라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존재와 기억을 바꿔 살게 된 건 물론 누가 총칼로 강요한 건 아닙니다만 사실상 체제가 개인을 한계 상황으로 몰아 넣은 결과입니다. 결국 그들은 현재가 만족스럽든, 아니면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를 약이나 전자파의 효과로 망각하며 연명하든 간에, 자존을 포기하고 짐승 같은 삶을 꾸려 나가는 셈입니다.

p24에는 화성인들, 즉 지구인들을 천시하는 "주류 계급"의 머리형이 타원형으로 뾰족하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기억을 팔아넘기곤 도라로 탈바꿈한 니키 역시 머리 모양이 어느새 그리 바뀐다는 암시도 있죠. 이런 이미지는 예전 코미디 영화 <콘헤드 대소동>이 잠시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p14, p21에는 그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하에, 순간의 고통을 망각하고 현실 도피를 꾀하는 수용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마치 불교 설화 "호랑이에게 쫓겨 벼랑 끝에 매달린 통에 잠시 산딸기의 달콤한 맛을 보는"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흥분지수의 단위는 pp요, 온순행동지수의 단위는 qrp인데, p54, p62에 각각 나옵니다. 단위가 통일되었으면 어땠을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생소한 말도 많이 나오는데 비록 짧은 소설이지만 용어집 같은 게 있어서 독자의 이해를 도모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p33에는 무소르기 미후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아마 가상의 예술가인가 보죠? p13, p62에는 "데스트 이블"이라는 재앙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작품 내내 끝까지 설명이 없어 궁금했습니다. 물론 몰라도 맥락 이해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p54에는 "전에 다리를 다쳐 본 적이 없는지 목발 짚는 게 서투른" 모습이 나오는데 사실 다리를 목발 짚을 만큼 다쳐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아마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혹독한 환경을 암시하는 듯도 하고요. p67에는 화성인의 사고로 "지구인은 사고가 복잡하기는 하나 필요한 과제에 집중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화성인은 아니지만) 영화 <프레데터>의 외계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 인간이란 경증 주의력 집중 장애 환자이거나 정신 병자일 지도 모르겠네요.

p90에 나오듯 결국 사람들에게서 기억을 뺏는 행위는 영혼을 침탈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영화 <토탈 리콜>에서도 인물들이 그렇게 맹렬히 저항하는 거죠. 혹, 난민이거나 소수 인종 출신인데 주류 사회에 착실히 적응해서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전 장관처럼) 본래부터 그들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도라/니키"처럼 영혼을 판 인간들일까요?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모를 일입니다. 답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죠?

책은 시집처럼 예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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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중의 탄생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군터 게바우어.스벤 뤼커 지음, 염정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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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떤 이슈,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대중의 의사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닙니다. 유능한 장군, 좋은 혈통을 타고난 귀족, 큰 돈과 재화의 유통을 다루는 상인 등 극소수가 여사의 흐름을 좌우하던 시절이 훨씬 길었죠. 20세기 들어 매스 미디어가 발전하고 교통 통신 수단이 개발됨에 따라 대중이 비로소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를 악용해서 대중을 선동하고 그들의 의사와 감정을 조작하는 히틀러와 괴벨스 같은 악한 정치인 유형이 새로 등장하는 등 부작용도 속출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주체인 국민은 선하지만 대중은 경우에 따라 악할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믿음이지만, 도대체 국민/인민/대중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유럽, 미국, 그리고 그 외의 세계에서는 새롭게 정의된 의미의 대중이 다시 관심을 받습니다. 대중이 중요하다 아니다, 혹은 어떤 대중이라야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당위론을 제기하는 것 역시 우리 같은 대중이라는 점도 아이러니합니다. 대중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대중이 아닌 척 대중을 타자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적인 대중이 기존의 담론을 벗어나서 열심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 와중에 불의나 혼란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러니 대중의 실체가 뭔지, 어떤 식으로 현실에 참여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한 이런 책을 안 읽어 볼 수가 없습니다.

저자들은 말합니다. "20세기는 대중의 시대였고, 21세기는개인의 시대이다." 그래서 요즘의 대중에게는 어떤 획일화한 선동이 잘 먹히지 않는 면 분명히 있습니다. TV나 라디오 뉴스에 영향을 받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튜브 스타의 요란한 원맨쇼에 더 몰입하니 말입니다. 과거에는 1인 매체가 있지도 않았지만(기술상의 애로 등 이유), 설령 있었다 해도 그렇게 편향되고 권위를 못 갖춘 의견을 아마 외면했을 겁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고,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스피커가 어떤 권위자보다 더 존중을 받습니다.

바로 이 과정이 중요합니다. 결국 기존의 대중은 작은 단위로 쪼개어졌다뿐, 또다시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990년대 초반 신세대들이라 자처했던 젊은이(지금은 그들 역시 꼰대, 혹은 소위 "틀딱"이 되었죠)들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며 "이게 나의 개성"임을 내세웠지만 밖에서 보기엔 "친구들이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따라하는" 또하나의 몰개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개성인 줄 착각하는 또하나의 획일이 바로 21세기식 대중의 특징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중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하나로 뭉쳐 정치적 변혁을 이끌어내는 건 때로 감동적입니다. 책 p74에서는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심지어 몇 세기 전의 프랑스 대혁명 등이 예시되며, 놀랍게도 2016년의 한국 촛불 시위까지 언급됩니다. 이 책을 보면 "박근혜는 완전히 고립되어 자리에서 쫓겨나기까지 그들만의 축제를 벌였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처럼 비슷한 형태로 역사의 여러 국면에서 반복되는 대중의 힘, 행동, 특성에 대해 주목합니다.

1990년대 초반 공산 동독에서 일어난 대중의 움직임은 놀라웠습니다. 슈타지라는 비밀 경찰에 의해 매순간 감시 받고 억압당하던 그들이 그처럼 짧은 시간에 결집하여 단호히 행동하는 건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었죠. 또 비교적 최근인 십여 년 전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일어난 일련의 독재자 축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역사는 자유와 개인의 행복을 위한 방향으로 흐른다면서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나라에서 벌어지는 최근의 혼란상은 어떻습니까?

최근 유럽과 미국의 이슈는 단연 포퓰리즘입니다. 책 p160 이하에서는 본격적으로 포퓰리스트들의 특성을 다룹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포퓰리즘이란 국가와 공동체의 건강한 역량을 갉아 먹는 병증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어찌되었든 이런 포퓰리스트 움직임도 대중이 시작하고 추동하는 정치적 행동입니다. 어떤 때에는 정의로운 국민이며, 대체 어떤 때에는 그럼 무지하게 선동당한 "대중"이 되는 걸끼요? 그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전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면 학생 운동가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들마저 이러면 어떡하냐고!" 그런데 지식인이나 혁명 엘리트들은 그런 민중, 대중에 비해 어떤 우월성이 있기에 이런 단정, 단죄를 쉽게 하는 걸까요? 그들이 소수 지배 계층을 적대하고 전복할 때에는 거리낌 없이 민중의 이름과 권위에 기대면서 말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엘리트층은 문화 대중에 보편성에 대한 권리를 인정할 용의가 없었다(p160)."

"엥겔스와 보들레르의 목표는 얼핏 여겨지는 것처럼 그리 많은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p240)." 여기서 저자는 보들레르의 한 작품을 통해 "폭력을 수단으로 동등성을 획득한 어느 거지의 자존"을 논합니다. "군중으로부터 분리되지도 않은, 또 매개 인물을 필요로 하지도 않은 채" "군중과 함께 섞여 목욕할 기회를 얻는 건 하나의 예술임"을 주장하는 보들레르의 이 작품은 제목부터가 "군중"입니다. 대중, 군중의 뿌리를 추적함에 있어 근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저자들의 폭 넓은 시야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대중은 오히려 인간의 원초적 존재 형태다(p289)."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부사 "오히려"입니다. 사실 현대에 들어 대중이 이처럼 문제가 되는 건, 원래부터, 안 그랬을 법한 "원초"에서부터 그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이건 지식인이건 그렇다는 걸 뻔히, 일찍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 했을 뿐이지요. "대중은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들'로 변한다.(p353)" 위험하지만 때로는 고맙고 착하기 짝이 없는 대중이란 것의 실체를 똑바로 알려면 결국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금언대로 "우리 자신을 먼저 냉철히 들여다 볼" 수밖에 없겠습니다. 설령 그 안에서 간간히 괴물이 목격된다 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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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인연 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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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거의 모든 편의 특징은, 확실히 일단 손에 잡고 나면 도저히 궁금해서 도중에 중단할 수 없게 독자를 이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1권에서도 고이치는 자신이 세운 전략을 가능한 한 천천히, 신중하게 이어가는데 이에 대해 캐릭터 본인의 입으로 설명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애써 생각해 낸 그 답에 더 집착한다."(p19)

이런 말은 1권에서도 나왔죠. 아마 시즈나의 대사일 건데 "똑똑한 여자들을 속이는 게, 그렇지 못한 여자를 속이는 것보다 더 쉽다."였습니다. 똑똑하지 못한 여자는 자신도 자신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느낌과 판단을 못 믿고 신중하게 굴 수가 있죠. 이런 사람은 속이려 드는 사기꾼은 (결과적으로) 잘 퇴치할지 몰라도, 지인 등이 이런 사람 설득할 때 아주 애를 먹습니다. 본인한테 뭐가 이로운지 판단을 못하고 무조건 이 사람 저 사람 말만 들으며 주관없이 흔들리니까요.

그렇다고 똑똑한 사람을 속이기 쉽다는 건 일반적으로야 그럴 리 없고 여기 시즈나 남매처럼 고단수의 협업이 되는 사기꾼 수완으로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여튼 이들의 말에 의하면, 바로 상대방이 철석 같이 믿을 만한 대목(대부분은 착각이지만, 자신의 약점이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사기꾼의 생각 아닌 자신의 생각인 양" 속이는 데에 포인트가 있다는 소리겠네요

여튼 그래서 고이치는 자신이 조작한(영어로는 plant한) 증거들을 경찰 앞에 교묘히 깔아 놓습니다. 경찰은 뜻하지 않게 이 증거들을 "발견하게" 되며, 그래서 조작이나 모함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자신들의 노력에 의한 성과"로 자랑스럽게 가꿔 가며, 아마도 소추 과정에서 강한 집념으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서양 미스테리 장르에는 이처럼 범인의 시야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의심을 벗어나거나 완전범죄를 꿈꾸는 설정이 많으며, 묘하게도 우리 독자들은 "범인이 성공하거나 적어도 큰 망신은 당하지 않고 상황을 모면했으면" 하고 바람을 갖게 됩니다. 아마도 주인공들에게는 (이 작처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식으로 합리화의 발판이 마련된 채 말이죠.

고이치 들은 세심하게도 변명거리를 마련해 둡니다. 평소에도 아주 사소한 것까지, 누가 들었을 때 수상하게 안 느끼도록 말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저는 "너무 그처럼 완벽하게 모든 언행에 대한 핑계와 이유, 배경 사정이 준비되어 있으면 더 어색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p69에 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에 어떤 이유가 꼭 있으라는 법은 없"다는 취지의 문장이 나옵니다. 아마도 이런 세팅 프로세스에 대해 독자가 느낄 법한 피로감 내지 위화감을 어느 정도 예상한 작가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소하지만 p164:4에 "천창"이라는 오타 있습니다.

p239에 "그 사람이면 그렇게 할 수도..?"라는 말이 나오죠. 여기까지 읽으신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OOOO는 과연 자신의 OOO에 대해 저렇게까지 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여기서 약간의 의구심이 들어, 혹시 이 부분에 반전의 암시가 있지 않나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거야." 그런데 그런 사람은 아마 극히, 극히 드물 것입니다. OOOO는 좀 특별한 사람일까요? 시즈나 남매는, 특히 시즈나는 OOOO에 대해 "절대 우리가 사기나 칠 만큼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 똑똑하다"고 평가합니다.

이 점은 앞서 시즈나가 곤경에 몰렸을 때 OOOO가 나타나선 마치 시즈나에게 빚이라도 받을 게 있다는 듯 짐짓 연극을 한 장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XXXX는 자리를 피하는데, 골치 아픈 일이겠기도 하고 OOOO가 무서워서(그런 외모 묘사는 없었지만요)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시즈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았기에 그리한 것 아니겠습니까. 상황도 모면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 시즈나는 다소나마 죄의식을 덜어내고(그러나 그게 끝은 아닙니다). 동시에 상대에게도 "자신의 떳떳지 못한" 동기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는데 이 모든 게 (어리숙해 보였던) OOOO의 덕이라는 점 우리 독자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OOOO은 이미 여기서부터 대단한 사람이었음을 작가는 복선으로 보여 준 겁니다.

역자 양윤옥 선생은 OOOO가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고 후기에서 말하는데 사실 그 정도 평가에 그칠 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OOO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 아니라 삼남매 모두를 끔찍한 범죄에서 벗어나게 도운 것입니다. 마지막에 삼남매는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죄를 씻어내려 하는데 이는 1권 중반부에서 독자인 제가 느낀 불편함을 완전히 해소해 주었고, 작가의 역량을 확인케 해 주는 대목입니다. 떡밥이 남아 있는 채 작품을 끝내는 작가는 힘이 부족한 거죠.

p262에서 "그걸 그대로 믿으라는 건 아니겠죠? 무슨 증거라도.."라고 말하는데 사실 고이치 같이 똑똑한 친구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걸 왜 증명해야 합니까? 소송법에는 "입증책임"의 문제라는 게 있는데, 사리가 부족한 사람은 그저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게 폭주할 뿐 자신이 무슨 무리수를 두는지 남에게 폐를 끼치는지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천하의 고이치도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판단력이 흐트러지나 보죠. 아니면 무대 밖의 우리 독자들을 배려한 추임새...?

아무튼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긍정적이고 선한 세계관으로 결국 마무리되는 점, 참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이렇게 우리 독자들이 영혼이 깨끗이 정화되는 시간을 마련해 준 점에 대해 독후감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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