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법정 - 미래에서 온 50가지 질문
곽재식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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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벌어지는 사건 처리, 당사자 사이의 공방을 보면 그 사회의 축소판을 구경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구나, 평화롭게 잘 작동하는 듯 보였던 이면에서 이런 분쟁상이 존재했구나 등등... 만약 미래의 법정을 미리 구경할 수 있다면, 그 법정에서는 어떤 일들이 다뤄지고 또 심판은 어떻게 내려질까요? 

이 책에는 마치 법정물소설, 혹은 SF처럼, 등장인물들이 실제 사건 속에 등장하여 대화를 나누거나 싸우기도 하며, 미래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립니다. 그냥 하나의 소설로 읽는 편이 낫겠으며, 독자에게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읽힐 것입니다. 다만 소설 속에 수시로 작가가 끼어들어, 미래상이 이러이러하게 펼쳐질 전망이니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이런 쪽으로 생각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과 설명이 나옵니다. 

누구나 나 자신, 혹은 나의 아이가 키도 크고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의 외모, 자질, 적성 등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며 이를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반하지 않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p58). 주어진 조건이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엄연히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소중한 조건들이며 다만 이 조건 하에서 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지금의 통념입니다. 그런데... 

이제 크리스퍼 기술 등을 써서 호조건으로 바꿔 놓는다면 그 역시도 인간 삶의 조건 개선, 발전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자연의 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무모한 시도로 볼지는 현재로서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외모나 지능의 개량이 아니라 유전병, 신체 장애 등의 치료라면 이는 예외적으로 허용되어야 할까요? 허용과 금지의 기준 경계는 언제나 모호합니다. 만약 전면적으로 모든 게 허용된다 해도 한정된 자원을 분배할 때 누구한테 우선적으로 혜택을 줘야 할까요? 지불의사와 능력 기준이라면(=돈 많은 사람 위주라면) 아마 사회가 붕괴할 것입니다.    

베텔게우스는 항성 간의 크기 비교 짤방 같은 것 때문에라도 대중에 널리 알려진 별입니다. 이 베텔게우스 별 근처에 우연히 들른 이미영과 김양식에 대해 우주 검찰에서 곧 기소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얻고 로봇 변호사(대리)가 등장하여 자기네 서비스를 이용할 것을 권하는 듯 촐싹거리는 투로 설명합니다(p110). 이 대목은 여러 모로 흥미로웠는데, 일단 우주 검찰 같은 게 따로 있어서 전체 질서를 관할하기는 한다는 거겠습니다. 지금 지구 같은 작은 별에도 질서가 하나로 세워지지 않아 나라 간 전쟁이 끊일 날이 없는데(단일 질서가 바람직한지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그 광활한 우주 한 구석에서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가 잡아가기는 한다는 게... 

다음으로는 이런 사소한 개인의 범죄(?)까지도 누가 관찰하고 잡아내는 기술적 감시 시스템이 있다는 뜻이겠고요. 마지막으로 관(官)과 결탁하여 사건 있는 곳에 사설 구급이나 렉카, 혹은 흥신소처럼 한 발 먼저 찾아와 수익을 올리려는 업체가 있는 걸 보니 미래에도 자본주의가 잘만 작동하는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여튼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시려는 바는, 서로 다른 문명이 충돌 여지가 있을 때 과연 어느 편의 규범을 어느 정도까지 침투시키고 조정해야 할지 그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겠고, 이는 먼 미래의 문제라기보다 지금 우리들이 겪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법의 무지(ignorance of the law)가 보호되지 않는다는 원칙은 미래에도 변함이 없나 봅니다.  

인공지능이 빚는 저작권 침해 역시 현재의 난제입니다. 인공지능의 핵심 원리는 바로 딥러닝인데 이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켜 그로부터 패턴을 뽑아내게 합니다. 그런데, 그 방대한 데이터는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모두, 기성 작가들이나 화가들, 사진작가들의 표현력과 구도 포착 센스와 독특한 심미안으로 이룬 성과들인데, 이제 이것들을 기계(컴퓨터)에 투입하여 원료로 소모하고 그를 통해 기계적 창작을 대량으로 이룬 후 금전적 이익은 AI 운영 주체에 귀속된다면 이는 칼만 안 든 강도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실제로 몇 달 전에 일어난 미국 헐리웃 작가 파업도 이런 이유에서 일어났습니다. 물론 창의성이라고는 1도 없는 엉터리 작가라면 기계한테 일거리를 빼앗겨도 할 말이 없겠으나 진짜 작가의 진정한 비선형적 창작 의욕에마저 그 싹을 밟는다는 게 문제이겠습니다. 

기억조작은 아마 PKD의 <기억을 도매가로 팝니다>가 이 문제를 다룬 원조 SF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연 기억이 조작될 수 있는지 기술적 가능성은 일단 논외로 하고, 기억은 결국 개인의 존엄과 정체성을 이루는 본질이라는 데 인식이 미치면 세상에 이처럼 윤리적으로 델리키트한 이슈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저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폴 버호벤의 영화 <토털 리콜>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나아가 생각을 조종당해 저지른 범죄의 처벌가능성을 논하는 대목도 매우 심오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들인데 가상의 사연 속에서 캐릭터들로 하여금 다투고 옹호하는 형식에서 다루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읽으면 아주 유익할 것 같습니다. 이슈가 50개나 되기 때문에 독자가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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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후쿠오카 : 유후인.벳부.키타큐슈 - 최고의 후쿠오카 여행을 위한 한국인 맞춤형 가이드북, 최신판 ’24~’25 프렌즈 Friends 33
정꽃나래.정꽃보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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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프렌즈 시리즈 중 일본 여러 지역, 즉 도쿄, 교토, 오사카, 홋카이도 등을 집필한 정꽃나래, 그리고 정꽃보라 두 분이 지은 후쿠오카 편 최신판입니다. 이 책에는 후쿠오카뿐 아니라 유후인, 벳부, 키타큐슈 등도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p56을 보면 "후쿠오카에 갔을 때 꼭 사와야 할 명물들"이 소개되는데 그중에 보면 니와카센베가 있습니다. 센베는 한국에서도 나이 든 세대가 많이들 먹는 과자이며, 책에 보면 "니와카"가 특이하게도 二◯加라고 표기됩니다. 이는 오타가 아니며, にわか라고 읽는데, 環, 輪(환, 륜. 둘 다 동그라미를 뜻함)이라는 글자를 わ라고 읽는 용법이 일부 관행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우리식 "전병"하고는 많이 다르죠. 옆 페이지 아래에 하카타노온나도 나오는데 책에 설명이 나오는 대로 양갱을 독일식 케이크인 Baumkuchen 안에 넣은 것입니다. 지명인 하카타(博多)에 おんな(온나. 여인)이 붙은 어원입니다. 

어느 도시에나 높은 구조물을 지어 그곳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삼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관행입니다. p88을 보면 아타고신사가 나오는데 이 역시 특이하게도 신사(神社)가 고층에 위치해서 이름이 그리 붙었습니다. 일어로는 진자 비슷하게 읽죠. 이 후쿠오카 편은 책 맨뒤에 맵북이 따로 붙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설명된 사항에 대해, 혹 맵북에도 표시가 되었다면 그 맵북 중의 쪽수를 같이 적어 놓습니다. 따라서 지금 현지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두 군데를 함께 참조할 때 더 요긴한 정보가 취득될 것입니다. 후쿠오카 타워는 저 뒤 p210에 소개됩니다. 

아무리 볼거리가 많아도 교통이 불편하면 그런 관광지는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 하면 후쿠오카 같은 이름난 큰 곳 말고도 인지도가 낮은 작은 지역에까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혹 그렇지 못한 곳이라 해도 제한된 인프라나마 합리적으로 운용하고, 정보를 정확하게 게시하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하고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며, 제발 한국 정부 당국이나 지자체에서 속히 개선해야 하는 과제이겠습니다. p133을 보면 각종 교통패스가 소개되는데 이런 걸 잘만 활용하면 훨씬 저렴하기까지 한 비용으로 후쿠오카 곳곳을 편하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p174 이하에는 다이묘와 텐진이 소개됩니다. 다이묘는 과거 일본 각 지역의 영주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여기서는 그저 특정 지역의 고유명칭일 뿐입니다. 텐진은 중국의 그 톈진(天津)이 물론 아니며 한자까지도 天神(천신)이라서 완전히 다릅니다. 다녀오신 이들은 다 알겠지만 이 지역에는 편집숍, 부티크가 참 많은데, 일본은 오랜 역사 동안 그저 남한테 침략을 잘 안 당해서 유적들만 많이 남은 게 아니라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최신 트렌드를 선도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참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도 노포 백화점이 될 만한 곳이 많았지만 현재는 상당수가 문을 닫았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백화점이라고 하면 주로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고가품을 취급하지만, 이 책 p194를 보면 나오는 다이마루 같은 곳은 (책의 설명에 따르면) "1953년에서부터 후쿠오카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져 온 곳"이라는 설명이 붙었습니다. 이런 서민향 백화점도 있으며, 아마 예전 한국 백화점은 이런 곳들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물론 신세계나 롯데는 대개 그런 곳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입니다. 

후쿠오카 자체가 규슈 섬 북단에 자리했으며 당연히 해변을 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후쿠오카에도 딸린 섬들이 있고 여기도 볼만한 데가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p226에 나오는 시카노시마(志賀島)입니다. 책에는 어린이들이 이곳 중 우미노나카미치 공원을 좋아한다는 설명이 처음에 나옵니다. 바다를 일본어로 "우미"라 부르는데, 이 이름은 해중도(海中道)를 거의 그대로 부르는 것입니다(海와 中道 사이에 の가 들어가긴 하지만). 프렌즈 시리즈의 최고 장점인 맛집 소개가 여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여길 스쳐지나간 적 있는데 맛집이 이렇게 있는 줄 몰랐으며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꼭 들러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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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인, 벳부, 키타큐슈는 후쿠오카의 교외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렌즈 시리즈는 언제나 그렇지만 주제가 되는 지역, 도시, 나라 말고도 그에 인접한 타 지역까지 함께 소개해 주는 센스가 돋보이죠. 키타큐슈는 후쿠오카 시처럼 같은 후쿠오카 현에 소속되었으며, 유후인과 벳부는 오이타현 소속입니다. 벳부는 벳푸라고 우리가 더 잘 아는 바로 그곳이며 사실 후쿠오카보다는 오이타 시의 교외라고 봐야 맞겠습니다. 책 말미에는 후쿠오카 근방 머무르기 좋은 호텔이 여럿 소개되었습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관광지라고 해도 그를 잘 소개한 가이드북이 따로 있어야 뭔가 마음도 놓이고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을 하나하나 챙기는 알찬 여행이 됩니다. 온라인 정보는 물론 최신 사정을 알기 위해 반드시 참조해야 하겠으나, 현지에서 수시로 보기에는 불안정할 때가 많아서 책이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이 책 덕분에 언젠가는 다시 한 번 후쿠오카를 찾고 싶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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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
이하진 지음 / 열림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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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웹진 LIM에 연재되었던 이하진 작가님의 장편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은 이 책 표지에 나와 있듯이 "theory for everyone"으로 영역될 수 있으며 또 작가의 의도도 이를 통해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하진 작가님은 물리학 베이스가 갖춰진 분이고 소설을 읽어 보면 우리 독자들도 알 수 있듯 이 제목은 문언상의 의미 외에 다른 암시를 풍기는 구절입니다. 물리학에서 theory of everything이라고 하면,  상대성이론의 주창자 아인슈타인(뿐 아니라 현재까지 그 누구도)이 생전에 접점을 마련 못 했던 앙자이론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이론을 뜻합니다. 2014년 에디 래드메인 주연의 영화 <Theory of everything>도 생각이 났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everything이 아니라 everyone이란 단어가 쓰였으며, 전치사도 of("대한")가 아니라 for("위한")라서, 작품의 주제에 걸맞게 뭔가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을 줍니다. 

재능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 있다는 건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당혹감을 안깁니다. 이 소설에서 이능력(異能力)은, 그 정체를 모르지만 뭔가 기분나쁘고 예측 불허의 부작용이 염려되며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감염까지 될 수 있는 일종의 병으로까지 여겨집니다. 반갑다기보다 기분 나쁘니까 이능력, absurd force라는 모호한 이름만 붙었으며 몇 가지 현상들만 기술, 보고될 뿐입니다. 자연계에는 지금까지 4개의 힘이 학자들이 알려졌는데, 이 이능력이란 건 다섯 번째 힘인 셈입니다.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열역학 제2법칙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 이능력이라는데 역사상 이적이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병자 치유라든가 망자의 소생 능력 같은 것도 어쩌면 이것의 일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이능력을 영구적으로 무효화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고 싶습니다(p46)." 미르 같은 애 입에서도 오로지 대학 입학을 위해 위선적인 말이 줄줄 나올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현행 입시 제도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여튼 한 사람, 그 한 사람 외 나머지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미르의 말은 솔직해서 좋습니다. 이력흔과 그것이 암시하는 이능범죄가 만연한 사회의 앞날이 고작 이 어린 미르에게 좌우된다는 게... 

"거 요술 부리는 사람이면 사람 아녀요? 좀 놔줘!(p98)" 영화 엑스맨(마블) 시리즈에서도 뮤턴트들은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이능력자들인데 소수자(p95)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차별을 받습니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타자화되다 못해 일부가 반란을 시도한 건데, 이 소설에서 미르는 그보다 더 입장이 미묘합니다. 미르는 여튼 이능력을 일종의 질병으로 보고 이를 무효화할 방법을 찾겠다고 내세우는 것이고, 영화 엑스맨에서는 입장이 다른 주인공 둘이서 공존이냐 절멸이냐를 놓고 대립합니다. 미르의 입장은 만약 엑스맨의 세계관이라면 제3의 스탠스, 자기 부정인 셈이라서 더 흥미롭습니다. 

p373의 심완선 평론가들도 그 점을 지적하지만 소설 본문 p123에서도 이 이능력이란 걸 absurd라 부르는 대목이 있습니다(정확하게는 명사형 absurdity겠지만). 아델리온(p122)은 이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민들레의 이종입니다. 어차피 이능력이라는 것도 이 지구상에서 갑자기 출현한 이현상이다 보니, 그를 해결, 원상복구, 아니 무효화할 단서나 큐어도 지상에서 기어이 발견되기는 한다는 게 참... 병이 있으면 약도 반드시 있다는 말이 맞는 건지(p163에서 이 아델리온은 혈액반응법 시약으로 쓰입니다). "RIMOS에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있습니다(p139)." 직원이라면 누구나라는 뜻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누구나"라는 말이 특별한 뚯으로 들립니다. 

사람이 번호로만 불리는 관행이나 상황은 참 삭막합니다. <벤허>에서 주인공은 갤리선 안에서 그저 41번이라는 죄수번호로 호칭됩니다. p200에서 레이첼 머스크라는 배우 지망생은 그저 1번 사망자로 지칭될 뿐입니다. 우리도 코로나 팬데믹 때 많은 이들이 병으로 죽었으며, 어떤 이들은 백신 부작용으로 허망하게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소중한, 소중했던 사람들이 이처럼 온 세상을 병적인 무엇인가가 휩쓸고 지나가면 그저 하나의 숫자로, 부호로 치환되어 짐짝 같은 취급을 받으니 얼마나 슬픕니까. 능력이란, 재능이란, 사람을 위해 쓰여야 하며 그것의 소유 여부가 사람을 차별하는 표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소설에 나오듯 우리 모두는 재능의 보균자이며 다만 발현되고 안 되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다만, 아무 노력도 않고 남과 같은 대접을 받거나 남을 속이려 들어서는 안 되겠죠?)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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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교육용 기초 한자 900자 - 문해력을 높이는
미래주니어 편집부 지음 / 미래주니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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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한자를 많이 써서 기록도 남기고 의사 소통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도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한자어가 많으며 한자를 정확히 알면 그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어원은 어떤지에 대해서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중학교에서 배워야 할 기초 한자가 900자라는데, 과연 어른인 우리들은 저 900자 중 과연 몇 개나 읽고 쓸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요즘은 문해력이 중시되는 사회입니다. 중학생 때부터 정확한 한자를 익힌다면 어른이 되어 더 유창하고 올바른 소통과 공부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하루에 아홉 글자씩 배우고 모두 100일 동안 900자를 마스터하게 돕습니다. 하루에 아홉 글자라서, 교재에서는 페이지마다 한자 9개씩이 제시됩니다. 정자체로 글자가 나온 뒤, 음(音)과 훈(訓)이 제시되고, 다음에 필순이 나옵니다. 필순은 한자의 모양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 또 한자의 구성을 선명하게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필순이 바르지 못하게 한자를 쓴다면 이는 이미 글자가 아니며 서투른 낙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한자에는 부수라는 게 있어 옥편을 찾을 때 도움을 주고, 그 글자의 뜻을 짐작하게도 돕습니다. 옥편에서 부수로만 글자를 찾는 건 아니며, 총획수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교재에는 부수와 총획수가 동시에 표기됩니다. 

p24를 보면 동(洞)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이게 동이라는 음만 있는게 아니라 통으로도 읽습니다. 교재에는 통찰(洞察)이라는 예를 들어 주며 어른들도 "아, 여기서는 과연 그렇게도 읽히는구나."라며 수긍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밑을 보면 동포(洞布)라는 단어도 나오는데, 이는 동포(同胞)와는 다르며 조선 후기에 징수하던 세품의 일종입니다. 여튼 이 교재는 글자만 파편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글자가 들어간 단어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학생들이 단어도 함께 공부할 수 있고 개별 글자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1800자는 모두 가나다순으로 배열되었습니다. 

33일차(p42)까지 가면 칠 벌(伐), 다를 별(別), 변할 변(變) 등을 배웁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조금 낯설 수 있어도 밑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면 아 이게 거기에 들어가는 한자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정벌(征伐), 각별(各別), 변수(變數) 같은 단어들은 중학생이라도 들어 봤을 어휘이겠습니다. 모든 페이지에는 오른쪽 상단에 날짜 수가 표기되고, 공부했는지 여부를 표시하는 체크란도 있습니다. 

이 교재만의 독특한 구성은, 20일치가 끝날 때마다(20일, 40일, 60일 등) 완성 평가가 제시된다는 점입니다. 1번 세트에서는 한자어 일부를 가리고 독음을 물으며, 2번 세트에서는 문장 속 일부 단어에 밑줄을 치고 그에 알맞은 한자를 보기 중에서 고르게 합니다. 예를 들어 p26의 2-(2)를 보면 "남자에게 꼭 필요한 운동이다."에서 밑줄 친 부분에 해당하는 한자를 고르게 합니다. 답은 ⑩男을 고르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완성 평가 바로 뒤에는 사자성어 학습 코너가 따로 나오는데 앞에서 배웠던 한자가 들어가며 교재 초반에는 가가호호(家家戶戶), 구구절절(句句節節) 같은 첩어 형태의 성어들을 주로 공부하게 됩니다. 

이 교재에서는 가나다순으로 한자들을 배열했기 때문에, 예를 들어 위(威), 유(猶) 같은 글자들은 교재 뒤편에 나옵니다. 유(猶)는 우리가 오히려라는 뜻으로 아는 글자입니다만, 교재를 찬찬히 보니 예로 든 단어 중에 猶女가 있습니다. 동음이의어인 유녀(遊女)와는 다릅니다. 저는 전혀 모르는 단어라서 사전을 찾아 보니 이게 조카딸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배움은 이처럼 끝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p80을 보면 위력(偉力)이 나오는데, 이것도 위력(威力)과는 다른 뜻입니다. 

p126 이하에는 여태 배웠던 한자 900자가 글자모양, 훈, 음만 추려 가로 10자, 세로 10자 해서 모두 100자씩, 9페이지에 걸쳐 정리되었습니다. 본문 공부를 마치면 이 표를 통해 한눈에 봐 가며 정리할 수 있습니다. 깔끔하게 필요한 사항만 중학생들에게 잘 전달하는 멋진 교재였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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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명작 단편소설 모음집
알퐁스 도데 지음, 김이랑 옮김, 최경락 그림 / 시간과공간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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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스무 편의 고전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누구나 평생 한 번쯤은 꼭 읽어야 할 명작들" 물론 이 중 단 한 편도 읽지 않고 한세상 마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삭막하게 살다 가기엔 생이 너무도 소중하고 아깝습니다. 문장이 쉽고 책 편집이 예뻐서 부담 없이 읽어나갈 수 있고, 특히 이런 고전 명작을 조금이라도 이른 시기에 읽어야 할 청소년들에게 알맞은 포맷이라고 생각합니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 둘이 책 맨처음에 나오는데 우리 모두가 적어도 그 제목만은 들어봤을 두 고전이며, 이 둘 중 한 편도 안 읽어 봤을 사람이 과연 있겠나 싶을 정도입니다. 아멜 선생님이 제대로 우리 주인공 프란츠에게 못 가르친 내용은 분사법(分詞法)인데, "법"은 빼도 되며 이 수업에서 무슈 아멜이 가르치려 했던 건 분사(participle)입니다. 과거분사, 현재분사 하는 그것... 프랑스어에는 영어와 달리 완료분사가 따로 있는데 복합과거 시제를 만드는 데 쓰입니다. 오늘 이후로 더이상 아름다운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 까다로웠던 문법 시간도 마냥 소중하게만 여겨지는데 1930년대 후반 일제하에서 민족 말살 정책을 겪은 우리 민족 입장에서도 공감되는 바가 많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정철의 관동별곡 가르칠 때 고마운 줄 알고 제발 졸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별>에서 새삼 놀란 건 목동인 주인공 소년이 역사와 별자리에 대해 저렇게 해박(p29)했나 하는 점입니다. 역시 여자 잘 꼬시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합니다. 

이무렵에 프로이센이 비스마르크 같은 명재상을 만나 마침내 독일 통일을 이루고 프랑스를 어지간히 피곤하게 만들어서인지 프랑스 문학 작품들 속에 그 흔적이 많이 배어납니다. 모파상의 <비계 덩어리>에도 프로이센에 대한 적개심(p93)이 수시로 드러나며 저 앞 <마지막 수업>도 알자스와 로렌을 나폴레옹 3세로부터 빼앗았던 역사적 사건이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흔한 이름이기도 하지만 모파상의 작품에는 잔(느)라는 니름의 여성이 자주 등장하는 듯합니다. 한때 그렇게도 세련되었던 마틸드이지만 긴 세월 동안 그렇게나 고생을 겪고 나니 친구가 몰라볼 만큼 늙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독자에게 결정적 충격을 주는 대목도, 어떻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본 주인공에 대한 연민입니다. 그래도 소시민으로서의 알량한 자존을 지키기 위해 10년 동안 독하게 마음 먹고 빚을 갚은 마틸드 부부가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모파상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겠지만 사실 진짜 잔인한 건(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건) 잔느입니다. 그 진실은 끝까지 밝히지 말았어야죠(물론 너무도 미안해서 그랬겠지만). 

톨스토이가 그렇게나 극찬했다는 체홉의 대표작 <귀여운 여인>이라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왜 그리 명작 평가를 받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결말에서 잠꼬대를 하며 곤하게 자는 사샤의 한 마디로 작품이 덜컥 끝나는 처리가 인상적이죠. 물론 리처드 기어,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그 영화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 책은 유독 사샤가 꿈 속에서의 전쟁놀이 중 기세 좋게 호통치는 대상을 "운명"이라며 해석까지 따로 넣었는데 원문에는 그런 말이 사실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새긴다면 사샤는 주인공 올렌카의 심정을 대변이나 해 주는 셈인데 그렇게나 사려깊고 조숙한 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는 투르게네프의 <밀회>, 톨스토이의 <사람은...>, 고골의 <외투> 등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 셋이 더 실렸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희곡(극시)이지만 여기서는 단편 소설로 각색되어 실렸습니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이 둘 실렸는데 <검은 고양이>와 <어셔 가의 몰락>입니다. 두 편 다 호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으스스한 걸작입니다. 전자는 이번에 다시 읽으니 1인칭 주인공 화자가 자신의 가증스러운 범죄를 감추고 합리화하려 드는 대목(p192)이 두드러진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후자에서 로더릭 어셔가 작중에서 즉흥으로 짓는 <The haunted palace>가 또 근사한데, 치품천사로 번역되는 세라핌(p202)은 현재 한국과 세계에서 잘나가는 걸그룹 이름의 일부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영국 작가 중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가 이 책에 실렸습니다. 

현대 단편 플롯을 최종 완성하다시피한 사람이 미국작가 오 헨리이겠으므로 그의 단편이 셋이나 이 책에 실렸는데 당연한 결과입니다.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은 뭐 모르는 이가 있을까 싶습니다. 후자는 어렸을 때 읽으며 감동도 감동이지만 정말 기발한 이야기라며 감탄했었습니다. <20년 후>는 이걸 어렸을 때 읽으면 20년이란 세월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와서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읽으니까 느낌이 완전히 새롭네요. 결말을 다 알고 읽어도 온몸에 전율이 돋는 명작입니다. 다른 미국 작가 중에는 호손의 <큰바위얼굴>이 실렸는데 아마 국어 교과서에서 이 작을 처음 접한 이들도 있겠습니다. 개더골드(스캐터카퍼), 올드스토니피즈는 원어 그대로인데 천둥장군(p357)만 번역어로 실렸네요(원어는 올드블러드앤썬더). 제가 피즈(phiz)라는 단어를 몰라서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physiognomy(骨相學)에서 유래했다고 나옵니다. 

프랑스 작가들의 비중이 단연 높은데 후반부에도 앙드레 지드, 위고의 작품이 한 편씩 실렸습니다. 동양인 작품은 루쉰의 <고향>, 독일어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뿐입니다. 여튼 이런 앤솔로지를 감상하는 기분은 언제나 새롭고 벅차며 영감에 가득한 듯하네요. 적절하게 곳곳에 컬러 일러스트가 들어간 점까지 너무 좋았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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