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세계경영이 있습니다 - 가장 먼저 가장 멀리 해외로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 2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엮음 / 행복에너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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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서야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이며, 코로나 진단키트를 전 지구에 수출하는 나라이지만 30년 전만 해도 존재감이 미미했습니다. 이런 이른 시기부터 그 보는 시야를 세계로 넓힐 것을 강조하며, 대담하고 창의적인 발상과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영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대우그룹의 창업자 김우중씨입니다(창업 자체는 1960년대로서 훨씬 이른 시기). 1980년대 후반이면 아마 청소년들 사이에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읽힐 무렵입니다. 그 즈음 대우그룹은 (이 책에서 보듯이) 세계 곳곳에 지사를 설립하고, 공장을 세워 현지인을 고용하며 "대우"라는 브랜드를 널리 알릴 시절입니다.

"대우맨"들은 그 당시 특히 소속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고 합니다. 다른 대기업들도 창업자의 신화적인 행적이 널리 알려졌지만, 제 생각에 대우는 창업자뿐 아니라 그가 거두어 아끼고 키웠던 휘하 사장급 인물들도 그에 준하는 유명세를 탔던 기업인데, 다른 대기업에서는 이런 예가 비교적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삼성에서도 진 모 씨, 현대에서는 이 모 씨(이분이 훨씬 선배지만) 등이 있긴 했지만 말입니다. 제 생각에 그 비결은, 대우만의 독특한 기업 문화에서 비롯한 것 같습니다. 대담하고 어떤 격에 얽매이지 않는 창의적 사고를 회장부터가 독려(p29)한다든가 하는 게, 특히 삼성 같은 곳이라면 좀 찾아보기 힘들겠죠. 현대도 오너의 그 숨막힐 듯한 카리스마 때문에 자유로운 행동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카길이나 더나번트 같은 원면 메이저가 된다는 꿈을 꾸었다..." 이동근 대화아이앤씨 상무의 회고인데, 역시 저는 이 역시 그 당시(저자가 회고하는 1990년대 초중반) 다른 대기업에서는 쉽사리 갖기 힘든 포부나 다짐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필자는 원면 수출입의 경우 더 이상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이는 물론 대우가 갑자기 그룹 해체가 된 까닭도 있겠으나, 그간 산업 구조가 크게 바뀐 까닭도 있겠죠. 또 당시에는 대학생들 사이에 MBA 코스가 (뭔지지도 잘 모르면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미시간大에서 수료 중이던 저자를 비롯한 여러 대우맨들에게 김 회장이 끝까지 지원을 약속한 점(p28)도 인상 깊었습니다. 이 역시 다른 회사였다면 좀처럼 지켜지기 어려운 약속이었을 겁니다.

수단은 현재 남부의 남수단이 독립한 상태지만 한때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하던 나라였죠. 차백성 필자는 이미 2000년에 퇴직한, 앞의 이동근 필자와는 세대가 다른 분입니다. 책의 특징 중 하나는 필자들이, 자신들이 한창 젊은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의 사진을 골라 책에 실었다는 건데, 역시 상사맨들이라 스타일이 깔끔하고 댄디하다는 사실입니다(그 당시 기준으로 ㅎ). 현지인과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라는 주문은 대우뿐은 아니고, 당시 중동에 진출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리 방침을 정해 사원들에게 지시했습니다. 현대 같은 경우 어느 책에 "가서, OOO고 OOO라"란 말도 있었는데 표현이 다소 과격해서 전에 읽던 중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아마 1980년대를 산 어른들 같으면 여행가 "김찬삼씨"를 잘 알텐데 이 책에도 그분 이름이 나옵니다. 당시에는 한국인 여행가가 드물었기 때문이죠(헤외 여행 자체가 금지된 시절). 차 필자는 현재 그 김찬삼 씨처럼 여행작가로서의 삶을 사시는 듯합니다. 필자는 또한 "나는 학창 시절 그리 성적이 좋지 못했으나, 호기심은 남들에 결코 못지 않았다"고 하시는데, 이런 분들도 기꺼이 품고 그 장점을 살려 주는 게 바로 대우만의 독특한 문화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우가 1980년대 말에 동유럽에 진출했던 건 널리 알려졌으나, 프랑스에도 현지 공장을 두었던 건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유재활 필자는 당시 로렌 지방에서 근무했는데, 책에도 나오지만 도데의 <마지막 수업>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죠. 프랑스이다 보니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그곳만의 독특한 노조 문화도 하나의 장벽이었을 텐데, 글에서는 그런 부분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언급이 어렵다는 건 대우가 현지인 노조와 아주 잘 융화했다는 뜻도 됩니다. 몇 년 전에도 미국 월풀이 LG와 삼성에 반덤핑 제소를 했습니다만 결국 이들 기업이 현명하게 위기를 넘겼듯이, 1990년대 초에 대우도 프랑스에서 비슷한 곤경을 겪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2003년에 프랑스 대우 공장이 문을 닫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면 그동안 애써 쌓아온 현장의 암묵지가 묻혀 버리는 게 안타깝죠(p63. 또 저 앞 p29).

대우하면 또 1980년대에는 VTR이 유명한데, 기기뿐 아니라 컨텐츠를 담은 테이프도 유명했죠. 현재 OCN이란 채널이 있지만, 이게 1990년대 중반에는 DCN이었고 이때 D가 대우의 약자입니다(p77). 그 이야기가 p66 이하에 나오는 우형동 대표의 사연입니다. 재미있는 건  HBO가 이들 대우맨들에게 친절히 사업 분야의 특징이라든가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대목이었습니다. 또 제가 눈여겨 본 건 이 케이블 채널 설립 과정이 민간 주도가 아니라 1990년대 초 정부가 정책 가이드라인을 먼저 내어놓고 우 저자 같은 분이 나중에 그에서 구체적인 착상을 얻어 추진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크게 달라져 민간에서 무엇이든 먼저 시도가 이뤄지죠.

중국은 지금도 우리에게 큰 시장이지만 대우를 비롯하여 한국의 대기업들은 당시 덩샤오핑이 갓 개방을 시작했을 때 이미 중국에 열심히들 진출했습니다. 책에는 이미 1987년에 푸저우에 진출했던 대우 이야기(p96)가 나오네요. "진짜 영업맨은 SKY출신도 아니고 MBA출신도 아니다. 오로지 '들이대' 출신이다.(p99)" 바로 이게 바로 대우 정신입니다.

대우는 영업이나 무역, 제조 분야만 있는 게 아니라 금융 섹터도 강했습니다. 한국에서 몇 개 안 되는 대형 IB 중에 "미래에셋대우"가 있는데 박현주씨의 미래에셋도 물론 굴지의 업체였지만 그와는 별개로 뒤의 "대우(증권)"을 잊으면 안 되죠. "경제와 산업이 몸이라면 금융은 피가 되는 것이다(p105)." 사실 대우는 차입경영으로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역으로 그만큼 자금 조달 능력이 탁월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증권사관학교"라는 말도 나옵니다(p106).가치투자의 철학으로 지금도 전설로 꼽히는 템플턴 경을 직접 만나기도 하셨는데, 책에도 잘 나오지만 영국은 특히 금융가라는 게 일류 학교를 나와 인맥으로 엮이지 않으면 발도 못 붙이는 풍조로 유명하죠. 이런 곳에서 업적을 이룬 구자삼 필자 같은 분의 역량이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단, 책에도 나오지만 대우증권은 본래 대우 계열사는 아니었고 삼보증권을 대우가 나중에 인수한 거죠. 대우는 본래 이처럼 인수해서 경영하는 계열사가 좀 많았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두산인프라코어에 대해 현대중공업이 인수한다는 보도가 나와 주식시장이 크게 들썩였다가 진정되었습니다. 두산인프아코어가 (현재 모기업인 두산이 크게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알짜기업임이 다시 확인된 해프닝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이 두산인픙라코어, 또 공작기계 등이 원래 대우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역시 1970년대에 정부의 권유(p122)로 대우가 인수한 기업이지만 말입니다.

김우중 창업주가 말년을 베트남에서 보낼 만큼, 베트남과 대우는 매우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p145에 보면 "베트남의 자원, 토지는 결국 베트남인에게 돌려 줘야 한다"는 김 회장의 말이 나오는데, 이런 정직한 철학이 있었기에 베트남에서 대우가 그리 큰 신망을 얻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GYBM은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듯 대우경영 철학의 정수인데(영어학원이 아닙니다) p151에도 다시 이 말이 나오네요. p13 머리말 중에 보면 신장섭 국립싱가포르대학(한국의 서울대를 능가하는 명문대죠) 교수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책좋사 카페에도 이 신 교수와 김 창업자의 대담을 다룬 책이 2014년에 이벤트로 나온 적 있습니다. p400 이후에, 대우의 세계 경영 정신을 현재의 청년들에게도 가르치는 GYBM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다뤄집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책 맨 앞 이동근 필자의 글에서도 주무대였는데 p152 이하의 김상태 필자는 그분보다 몇 년 연상이지만 여기서 다루는 이야기는 몇 년 후의 사연이고, 분야도 1차 산업이 아니라 IT로 매우 다릅니다. 막심, 비올라, 이고르 등 여러 이름이 나오는데 우즈벡은 구 소련의 영향력이 강해서 이름들이 이렇습니다. 며칠 전 부산에서 패싸움으로 뉴스가 난 "고려인"들도 대부분 여기서 온 사람들이죠. "미스터 킴은 나의 스승입니다." 이처럼 대우맨들은 현지인과 참 잘 융화하고, 모두가 윈윈하는 사업 패턴과 성과 달성에 능합니다.

"처음 듣는 말과 글을 익히며 잘 적응해 준 아이들이 무척 고맙고 대견했다. ... 그때는 그것이 김우중 회장을 비롯한 대우가족 모두의 워라밸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지금도 가슴에 이슬이 맺힌다(p167)." 이처럼 대우맨들의 회고에는 어떤 비정함, 각박함이 없고 한결같이 인간적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책 말고) 생산직 근로자들의 추억에도 대우맨이라는 회고에 반드시 모종의 따뜻한 자긍심이 담겨 있습니다.

"자율권을 존중하고 도전의식을 북돋는 기업 문화는 때때로 기적 같은 일을 많이 만들어내었다(p211)." 조봉호 두인코 부회장의 회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벨기에에 거점을 구축한 그는, 점-선-면의 전략 구상에 따라 차근히 현지를 공략합니다. 그는 또한 "오너나 경영자처럼 장기 변화는 모르지만, 중단기 전략에 관해서는 탁월한 감각이 있었다"며 자긍심을 표현합니다. (당시) 젊었던 사원이 이 정도로나 자신감을 갖게 된 것 역시 대우만의 기업 문화 강점입니다.

유태현 필자도 저 앞의 차백성씨와 비슷하게 해외 건설 파트에서 근무하신 분인데 "당시 너무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월급을 많이 받으려면 헤외 현장 근무를 자청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중동 건설은 익히 잘 알아도, 저 먼 중남미 에콰도르 키토에까지 한국인들이 진출헸었나 싶은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때 공사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중단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실무에 대해 크게 배운 바가 많아 보람이 있었다는 회고가 인상적입니다. 이후 이분은 (우리가 잘 아는) 사우디, 리비아 등으로 다시 현장 근무를 합니다.

대우세계경영 하면 바로 폴란드가 생각나죠. 현지인들에게는 "대우"라는 발음도 어렵고 DAEWOO라는 철자는 더 어려운데 오히려 이걸 역이용해서 TV 광고를 만들어 동네 꼬마들까지 "대-우-대-우"를 중얼거리게 한 일화가 아주 유명합니다. 대우는 비교적 사원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문화가 잘 알려져 있는데, 권오정 과장(필자)에게 당시 현지 CEO였던 S사장님은 굉장히 무섭게 대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도 상무께서 찾아와 달래 주었다는 사연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기업에선 좀처럼보기 어려운 모습 아니겠습니까.

"대우는 기술력 측면에선 삼성에 버금가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메이텍이 가져갈 수익성도 좋을 것이다.(p276)" 인천 제물포고를 졸업한 전영석 필자는 특히 대우전자가 어려울 시절 맹활약한 분입니다. ODM이 OEM과 어떻게 다른지도 나오는데, 생산자가 설계까지 책임지는 게 ODM이며, 금형 기술 수준이 큰 역할을 한다고 하네요. 이후 동부를 거쳐 위니아에 매각되었는데, 필자의 말씀은 "큰 책임감을 느낀다"이지만 저는 독자로서 이 대목을 읽으며, 모기업이 공중분해되는 와중에도 이처럼 생명력을 (현재에까지) 이어가는 그 놀라운 흐름에 경의를 바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부터, 모르는 분야에 대담하게 도전하는 정신을 강조하는 "후츠파" 이념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구태여 낯선 히브리어를 쓸 게 아니라, 이미 1970년대부터 적극적 도전 정신을 내세우고 이런 창업자의 DNA를 임직원에게 보급한 대우의 멋진 사례를 먼저 들어도 좋겠습니다. p186에는 명품 고가 자동차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 마티즈를 판 최안수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패기와 도전 정신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청년들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가 아니라 벤처 창업을 독려하는 나라가되어야 하며, 그 중심에 이미 1960년대부터 샐러리맨 신화를 일군 김우중의 대우 정신이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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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 기술, 일본 소부장의 비밀 - 왜 지금 기술을 중시하는 일본 기업에 주목하는가?
정혁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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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부장은 소재, 부품, 장비를 가리키는 약어(略語)입니다. 한국 역시 이제는 오랜 동안 제조업 강국의 위상을 지켜 왔으므로 소부장 강국 중의 하나입니다만, 그래도 아직은 일본의 저력과 깊이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작년 여름 일본이 불화수소 금수를 단행함에 따라 급속히 소부장의 국산화를 도모했으며, 지금은 놀랍게도 상당 부분에서 성과를 크게 내는 상황입니다. 일부 몰지각한 층에서나 비관적인 시각을 노출했을 뿐이며, 불필요하게 자국 비하에 나섰던 이들은 현 시점에서 달성된 가시적 성과를 보고 크게 반성할 일이겠습니다. 천성이 무지한 데다 체계적 사고를 할 능력이 없으면, 감정에 기반한 폭주를 하다가 망신이나 당하기 마련이죠. 불화수소가 뭔지나 어디 알겠습니까?

아무튼 일본에는 여전히 강한 기업이 많고, 그 중 상당수는 소부장 섹터에서 특유의 저력을 발휘하는 중입니다. 이제는 일본을 총제적 롤 모델로 삼고 맹종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럴수록 겸허히 남의 장점을 배워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강자로 거듭날 수 있는 길입니다. 지금 증권시장에서는 제약바이오뿐 아니라 5G, 2차 전지 등에서 큰 랠리가 일어나는데, 이 섹터 모두에서 소부장은 매우 중요하며 눈 밝은 투자자들에 의해 주가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일본 기업의 장점까지 겸한다면 이런 기업들(의 주식)은 앞으로 더욱 성장주로서 각광 받을 것입니다.

나가시노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 막강했던 다케다 가문의 전력을 격멸했던 역사적 전투인데, 여기서 저자는 신상목의 책을 재인용하여 그 혁신의 정신을 지적합니다. 또 이후 덕천막부가 천하를 재통일한 후, 다소 이상하게 들리는 "쇄국 정책과 서양 문물 수입의 병용"을 정책으로 채택하는데, 여기에도 일본 특유의 실용주의가 드러납니다. 인공섬 같은 건 1990년대 부산에서도 추진하려다 만 적이 있는데, 에도 막부는 17세기에 이미 데지마라는 인공 섬 건설을 나가사키 상인들에게 발주한 바 있습니다.

본래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도모할 때는 프랑스를 모델로 삼았으며 근대 민법전 제정 작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프랑스가 크게 패하고 바야흐로 독일 제국이 창립되자 일본도 시선을 돌려 독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빛나는 과학 발전상이라든가, 다른 나라가 좀처럼 따라올 수 없는 공학 부문의 선진상은 일본에 강한 인상을 주었을 터이며, 이후 유카와 히데키 교수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에사키 레오나, 이후 다나카 고이치 등의 수상은 일본 과학과 기술의 놀라운 성취를 증명합니다. 특히 마지막 분은 학벌도 경력도 두드러질 게 없는 회사원 출신이라서 더욱 놀라웠죠. 저자는 이에 대해 "신기술 연구를 지원하는 기업 문화"의 소산이라고 지적합니다.

요시노 아키라 씨는 리튬이온 전지의 개발로 노벨상을 받은 엔지니어입니다. 지금은 리튬이온 전지가 안 쓰이는 데가 없다시피하지만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최신형 PCS폰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만든지 3년 동안 전혀 매출이 발생하지 않다가 1995년이 되어서야 팔리기 시작했다(p86)." 과연 우리 같으면, 근 10년을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할 이런 무모한 도전이 싹을 피울 수 있었을까요?

한국에서도 1960 ,70년대에 심각한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나서 혼식 장려라든가 술 제조 제한 등의 조치를 정부가 취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알아서 잡곡류가 웰빙 식문화를 이끄는 등 환경이 크게 변했지만 말입니다. 일본도 1차 대전 후 쌀 가격이 폭등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합성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치 요즘 유행하기 시작한 배양육하고도 비슷할 듯합니다. 일본은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대량으로 미곡을 수입(약탈)하여 오히려 가격 폭락 사태를 부릅니다.

일본의 이화학 연구소는 과학자의 낙원으로 불리며(p94), 이는 "연구 성과를 바로 산업화"하는 데에 탁월한 그들 특유의 기업 문화에 기인합니다. "출신 대학, 소속기관, 전공 등 영역의식은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었다(p95)." 우리 기업 문화하고는 너무도 차별화되는 풍토이며, 한국이 사실 가장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병폐를 극복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책은 앞에서 일본과 독일의 역사 발전상의 공통점을 짚었습니다만 과연 그래서인지 일본과 독일은 "가족 기업 성격, 장기근속 일반화, 종업원 중심 경영(p103)" 등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도 코스닥이나 코스피를 보면 강한 중소기업이, 그것도 소부장 섹터에서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입니다만 여전히 대기업 중심의 생태계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굴지의 대기업도 대기업이지만, 경제, 특히 제조업 섹터가 중소기업 위주로 돌아갑니다.

"히든 챔피언의 절반은 독일이다." 히든 챔피언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 책에서 자주 나오는 용어인 GNT, 즉 글로벌 니치 탑이겠습니다. p105에서 독일 자동차 기업은 다양한 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책 처음에서도 다루었듯 일본 역시 한우물만 파는 기업이 많죠. 물론 이런 장인 정신은 기술 우대 풍조, 기술의 심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겠으나, 급변하는 트렌드에 제때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한 예로 최근 현대차, LG, 삼성, SK 총수 들이 연쇄회동을 가지며 테슬라 주가의 미친 상승이 상징하는 자동차 산업의 완전 재편에 대응하는 제스처를 보였는데, 이런 건 우리 기업들이 재빠르게 현실에 대처하는 기민성의 징표입니다. 한우물만 판다고 능사는 아니죠. 어떤 애널리스트는 "현대차는 주가가 크게 오르지 않는다. 전기차를 만든다 해도 기존 내연기관차의 시장을 그대로 가져올 뿐이 아닌가?"라고 하던데, 독일이나 일본 메이커가 머뭇대는 사이 전기차, 수소차 시장 셰어를 재빨리 점유한다면 당연 시장 선점 아니겠습니까? 최근 상승하는 주가가 이를 증명하고 남습니다.

인쇄는 전통적인 산업 섹터로서, 선명하고 오래 색이 바래지 않는 인쇄는 그 완성도와 고급성을 상징할 만큼 중요한 척도입니다. 일본에서는 돗판과 다이니치 양대 기업이 있어 가히 "백년전쟁"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런 경쟁이 기술의 완성도와 장인 정신의 건설적 경쟁이란 점에서 타 산업 분야에까지 귀감을 이루는 것입니다.

모터는 자동차 등 수많은 장치와 기계에 핵심으로 쓰이는 심장과도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니혼덴산과 마부치모터가 오랜 세월 동안 겨뤄 왔으나 비교적 최근 니혼측이 새로 진입한 파워윈도 영역에서 특히 심한 격돌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이 싸움에서 마부치 측이 의론의 여지가 없는 압승을 거뒀는데 그 비결을 여럿으로 책은 분석합니다. 우리도 매년 "표준품셈"이란 게 계산되어 서점에도 두꺼운책으로 출간됩니다만 마부치 측의 원가 절감 혁신이라는 게 실로 대단했나 봅니다. 마부치는 주문(개별) 생산에서 표준품 생산으로 전략을 바꾸었고, 이것이 연쇄적으로 원가 절감 효과를 낳았던 거죠.

우리 같으면 40년 적자 산업에 과연 투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가치 창출"은 어느 기업이나 쉽게 입에 올리는 구호입니다만 도레이는 말이 아닌 실천으로 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40년 적자 산업이란 바로 "탄소 섬유 개발"을 뜻하는데, 지금은 누구나 알듯 이 탄소섬유 분야가 산업의 전체 판도를 바꿀 만큼 중요해졌지만 198년대에 이런 혜안을 가졌다는 게 그저 놀랍습니다.

반도체는 굴지의 삼전이나 하이닉스뿐 아니라 한국에도 중소기업 중에 세계적 기술력을 자랑하는 곳이 제법 많습니다만 원조는 아무래도 일본이라 봐야겠죠. 반도체용 웨이퍼, 염화비닐 섹터에서 신에츠는 세계 1위이며(p196), 싷리콘, 포토레지스터는 3위라고 합니다. 물론 이제는 한국에서, 특히 포토레지스터 분야에서 세계 정상을 다투는 기업들이 있는데 작년 이후 촉발된 소부장 국산화의 효과입니다. 책에는 특히 PVC 분야에서 LG화학(얘도 이제는 한국에서 손꼽는 가치주가 되었죠. 불과 며칠 전 주가를 보십시오)과 비교하는데, 매출액은 60%이면서도 영업이익이 2배라고 합니다. 이게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저 앞에서도 원가 절감을 통해 경쟁사를 꺾어버린 강소기업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JIT와 칸반 시스템 이야기는 이미 1990년대부터 경영학 교과서에 나올 만큼 도요타의 혁신은 유명하고 모범적입니다. "재고는 절대악" 어떻습니까? 토요타의 혁신은 이미 남부럽지 않게 성과를 달성하던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자기 혁신을 도모한 결과이기에 더욱 대단합니다. 삼성에서 이건희 회장이 1990년대 중반 "불량품 화형식"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글로벌 대기업이 과연 있었겠습니까? 소부장에서는 특히나 혁신과 기술연구가 중요하며, 한국도 마냥 기업 적대적인 풍조를 키우거나 엘리트 교육 지양을 외칠 게 아니라, 오늘날 눈부신 발전을 이끈 인재와 기업이 과연 어디서 비롯했는지, 현실에 기반한 각성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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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릴리스 폭스 지음, 최지원 옮김 / 세종서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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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원이 왠지 내 적성에 딱 맞을 듯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 자체가 드물겠으므로, 만약 본인이 그렇다면 용기를 내어 해당 기관에 지원을 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만약 그런 본인이 여성이라면(그래서 더욱 망설여지겠지만), 한국과 미국의 사정이 물론 크게 다르긴 하겠으나, 이 책을 읽고 첩보원이 과연 무슨 일을 하는지 미리 알아볼 수도 있겠습니다. 첩보원이라 하면 007 제임스 본드(책 p109에 "그런 첩보 영화 같은 건 믿지 않아요"라는 말이 나옵니다)나, 혹은 약간 자영업자 버전(?)으로 인디아나 존스(p151, p157. 또 p243에는 "핵 테러의 성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가 생각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책의 진짜 가치는, 저자 겸 주인공이 나중에 어떤 선택을 했느냐 하는 그 과정에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외할머니는 소아마비로 30대 중반에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으나 정신은 누구 못지 않게 영민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비서들이 (그녀가 버젓이 곁에 있는데도) 3인칭으로 가리키는 걸 못 견뎌했다는 기술이 있는데, 노약자 돌볼 때 이런 점 특히 유의해야 할 듯합니다. 정상인(어폐가 있습니다만 일단)들은 보통 이런 분들을 "객체화"하는 게 몸에 배어 있죠. p36에 재미있는 서술이 있는데 "담요라도 덮어 드려야 할까요? - 아니, 진토닉이라면 모를까"가 그것입니다. 저 부인은 진토닉으로 "덮어 드려도 될 만큼"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아직은 좋다는 농담입니다.

이분은 1980년생입니다. 그러니 1991년 소련이 갑작스럽게 붕괴했을 때 나이가... 그녀는 시사에 매우 관심이 많고 중요한 업무를 수행한 조부, 부친(이분은 아마, 책에서 명시적으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만 HAM을 다루었나 봅니다[좀 뒤에 PC 통신 이야기도 나옵니다만]. 요즘이야 인터넷,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시대입니다만 당시에는 이런 게 참 신기한 영역이었겠죠)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아직 어렸던 그녀의 세계에서 "겐나디 야나예프는 악당, 고르바초프는 (그 사건 당시) 집에 갇힌 지도자" 정도로 인식되었나 봅니다. 잠시만 인용해 보면...

"...고르바초프는 국민들에게 권리를 나눠 줄 생각이었으며 아버지는 그런 그를 돕고 있었고, 야나예프는 그런 권리를 전부 되찾아오려 했다."(p41)

어린이답게 참 단순화한 구도입니다. 아, 뭐, 지금 생각해도, 또 어른의 관점으로 봐도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만. 여튼 어린이였던 아마랄리스는 "모스크바 시민들은 상점의 소유권을 갖고 싶어했고, 고르바초프를 감금했던 이들은 그걸 원치 않았다."라는 한 문장 속에 당시 긴박했던 모스크바의 정세를 요약합니다. 전 참 이해가 안 되는 게, 한때 저렇게 용감했던 시민들이 왜 지금은 비겁하게 독재자의 철권에 눈을 내리까는 건지. 여튼 어렸을 때 받는 교육은 참 중요합니다.  학교(뷰캐넌 선생이라는 분이 책에서 언급되죠)에서건 집에서건 말입니다. p32에 "쿨 큐컴버스"라는 동아리 이름은 영어의 관용어구인 as cool as a cucumber를 생각해 보면 뜻을 알 수 있겠네요. 저자는 그 어린 나이에 아빠를 따라 소련을 방문도 했는데, 아마 방부처리된 레닌의 시신을 보고 "왜소하고 연약해 보였다(p43)"고 느낌을 털어 놓습니다. 물론 뒤에 "아름답다"는 느낌도 적혀 있는데, 아름다운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레닌이 왜소한 편이었던 건 사실입니다.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에도 비슷한 인상 묘사가 있죠. 뭐 사진도 많이 남아 있으니.

"지금의 러시아가 이렇게 변한 걸 보면, 레닌은 많이 놀랄까?"(p43) 근데 독자인 저는 이렇게도 묻고 싶습니다. "지금의 러시아가 (또) 이렇게 변한 걸 보면, 옐친은 많이 놀랄까?" 물론 알코올 중독자(의 혼령)에게 뭔 신통한 반응을 기대하진 않습니다만.

겐나디 야나예프라는 이름을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데, 저는 그동안 "아나예프"로 알고 있었으며 당시 한국 언론이 그렇게 보도를 해서입니다. 지금 찾아 보니 과연 철자가 Янаев이군요. Я에 강세가 안 올 때는 [이]처럼 발음되기도 합니다만 여튼.

버마(현재는 미얀마라 불리는)는 군부 정권이 오랜 동안 다스려 온 폐쇄 국가였습니다만 이 군부의 성격이 딱히 좌파라 보기 힘들면서도 반서방 노선을 유지했다는 게 독특합니다. 이는 아마 영국의 식민 지배를 오래 받았기에, 해방 후 한참 뒤에 등장한 군부 정권이 (이후 많이 리버럴화한) 영국 정계 주류의 눈에 거슬렸을 수 있습니다(구 남아공 백인 정권도 비슷합니다). 세상은 비록 냉전시기라 해도 이처럼 미-소, 자본주의- 공산주의의 양대진영으로 쉽사리 가를 수 없을 만큼 복잡했던 면이 있습니다.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이분이 아직 여덟 살이었던 1988년 8월 8일에 버마 정권의 시위대 학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녀가 여덟 살일 때는 팬암 기[機]가 로커비에서 리비아의 테러로 폭파되는 사건도 벌어졌는데, 지인이 거기 타고 있었다고 하네요(p33). 그 주범이었던 카다피는 몇 년 전에 심판...을 받았지요. 저 뒤 p130에 이것 관련 언급이 또 나옵니다.

 저자가 11살 때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고등학생 때에도 여전히 연금되어 있던(p58) 다우 수(아웅산 수지)는, 뷰캐넌 선생이 강조했던 "독재자와 싸울 수 있는, 컴퓨터 잘 다루는 여전사(p48)"의 이미지와 일치했습니다. 그녀는 태국으로 날아갔고(왜냐면 당시만 해도 버마행 노선이 없었을 테니), 이후 버마의 민주화 투사이자 작가인 민 진과 알게 됩니다. 민진이 관여한 신문 <이라와디>는 우리가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도 배운, 버마의 큰 강 이름이죠.

여성 행동가의 로망이라 하면, 현지에서 만나는 뜻있는 (또래) 남성들과의 로맨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책에서 자세히는 안 다뤄집니다만... 저자가 아직 어렸을 때 "대여금고를 비우러 미국에 다녀온 아버지" 때문에 집안에 큰 분란이 일어났던 듯 암시하는 대목(p49)이 있는데 명시적인 설명은 없으나 제 짐작으로 아마 그 부친의 불륜사가 있었던 듯합니다. p53에 통역사 언급이 있습니다. 또, p353 이하에 "우리와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 아빠를 다시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언급 있습니다.

p57 역주에 보면 "저자는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뜻에서 랭군, 버마 같은 옛 명칭을 사용함"이란 설명이 있는데, 시사주간 타임을 비롯해서 서구 언론 대부분은 성향에 크게 관계 없이 아직도 구 명칭만을 씁니다.

p70에 어느 버마 사람, 상반신과 하반신에 각각 다른 동서양의 복식을 걸친 사람더러 "반인반수" 같았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p56에 나오는 "이름이 어렵거나 낯선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런 건 사진의 필터 같은 것일 뿐..."이란 말과 정면으로 모순됩니다. 이런 태도는 PC에 정면으로 위배되죠? 아닌가요? ㅎㅎ 물론 뭐 아직은 어린 영혼이 그때그때 느낀 솔직한 느낌을 책에 적은 것이라 봅니다만. p75에 나오는 <컨트리 로드...>는 잔 덴버가 부른 유명한 넘버죠. 가수는 그 가수가 아닙니다만. p52에는 <스테어웨이 투 헤븐>을 연주하는 친구가 나오는데 여기 대해서는 역주가 없습니다. 너무 잘 알려진 곡이라서?

"만달레이는 러디야드 키플링의 작품에서 금방 튀어나온 곳 같았다.(p81)" pp.90~91에는 네윈 장군의 악정에 대한 서술이 있는데, 이 네 윈을 만나기 위해 전두환도 1983년에 버마를 방문했다가 그 일을 당했죠. p99에 "저들에게 강간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란 부분이 있는데 사실 이런 회고록, 혹은 다른 픽션을 읽을 때 항상 조마조마한 게 이런 문제입니다. 저는 예전에 TV에서 라이언 오닐, 앤 아처(아주 멋진 여배우죠) 주연의 <그린 아이스>란 영화를 보고 좀 충격을 받았던 적 있습니다. 저자는 아마 성곻회 신자인 것 같으므로 "하느님"이 여기선 맞지 않겠나 싶습니다.

"알 카에다"나 "빈 라덴"이나 한국에서는 911 이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만 이미 그로부터 3년 전 주(駐) 케냐 미 대사관 테러가 있었기에 세계적으로는 큰 유명세를 탄 바 있습니다. p108에는 다미얀 석불 폭파와 탈레반이 언급되네요. 유난히 자주 테러리즘, 또 유명한 테러 사건에 희생된 지인을 자주 두게 된(책 후반 p263의 서술을 꼭 읽어 보십시오) 저자는, WSJ 카라치(파키스탄) 지국장이었던 대니 펄이란 분이 끔찍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사건을 또 겪습니다(카라치는 이 책 후반부의 흥미진진한 첩보극 주요 무대이기도 합니다). 이때 그녀는 다시 어떤 근원적 두려움을 느끼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보여 준 "박쥐 인형 분해" 체험을 떠올리며 이를 이겨냅니다(p117).

"조국을 위해 잃을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게 애석할 뿐이다.(네이선 헤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성경)"

이 두 구절을 왜 저자는 특별히 인용했을까요? 물론 신입으로서 조직에 처음 발을 들이는 그 순간의 기억이 각별했겠습니다만, 독자인 저는 왠지 이 두 명언이 서로 충돌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저자가 그런 인상을 받았던 것 아닌가, 뭐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전자는 애국주의, 후자는 리버럴리즘. 그렇다면, 애초에 저자는 (특히 자신의 출신 배경 등을 생각해 볼 때) 커리어의 첫걸음을 잘못 디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맨 뒤, p369에 이 의미에 대해 저자가 다시 언급합니다.

p129의 "랭글리"는 물론 각주에 나온 그대로지만, 영화 많이 본 분들에겐 꽤 익숙한 지명이겠으며, 그런 영화들을 더 세심히 주의 깊게 본 분들은 실제 발음이 "랭리"라는 점도 아마 알 것입니다.

"'공작팀에서 자넬 데려가겠대. 학교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던 거야. 나쁜 놈들.' 여태까지 받아본 중 가장 무서운, 그러나 가장 기다려 온 초대장이었다." (p135)

저자는 오로지 어려서부터 그녀를 괴롭혀 온 두려움, 즉 왜 이 이 세상에는 테러를 통해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려는 세력이 있으며, 어떻게 해야 그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일종의 사명감으로 이 지점까지 온 것입니다. 아직도 그녀의 나이 이십대 중반 정도(p175, p258:3)밖에 안 되었지만 말입니다. 여튼 그녀는 세계 최고의 첩보 조직에서, 그 하부 섹터 간에 서로 모셔가려는 경쟁이 벌어질 만큼 귀한 자원이 되었습니다.

"무고한 사람 한 명을 고통받게 하느니 죄인 백 명을 놓아 주는 게 낫다. 벤자민 프렝클린의 말을 인용하신 거잖아요? - 그건 미국 시민에 한해서지.(p148)"

벌써 여기서부터 그녀의 생래적 성향과, 조직의 이념이 갈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앤서니라는 남자친구와 오래 사귀었으나, 여친이 CIA 소속이라는 걸 알고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또 이 p156에, 아마 저자 이름 "아마랄리스 폭스"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듯합니다. 둘은 드디어 결혼하고, 이때 즐겨 토론 주제로 삼은 책들 중 하나에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있던데, 우리 나라에서는 청소년 필독서로 꼽히지만 저쪽에서는 그리 잘 알려진 책이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저로서는 좀 의외였습니다.

p167에는 "고르바초프를 똑 닮은, 카자흐스탄의 공무원"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생겼기에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스파이처럼 보이는 스파이보다 이런 내가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스파이를 뽑을 때의 첫째 원칙이 이겁니다. 제임스 본드 같은 유형은 그저 영화에서나 나올 뿐이죠. 생긴 건 평범할지 모르지만 훈련생으로 받던 훈련(시뮬레이션)의 강도는 장난 아니어서 p188 에는 "민간인 인형을 혹 맞히기라도 하면 바로 퇴학"이란 말도 나옵니다.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입을 싹 다물게 되는 순간이, 말하자면 이런, 총 좀 만져 본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부터이죠.

이것과는 무관하게, 저자는 자신이 여태 익숙하던 현실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앤서니와의 혼인 서류는 무효화되는 등 알게모르게 갈등을 겪는 중입니다. 또 이때부터 딘과의 관계가 점점 깊어집니다(결혼은 잔지바르에서 하고 p264에 좀 자세히 나오죠). 남녀 사이의 애정이란 참 무상할 뿐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이 대목에선 씁쓸해지더군요. CIA 동기생들 가운데 추잡한 관계를 시도하는 익명의 어떤 요원 이야기도 있어서 기분이 더욱 그랬습니다. 한편, "그래, 이게 바로 버마에서 저항운동을 하던 우리 언니지.(p200)" 간만에 여동생이 등장하는데 책 맨앞에서 다소의 지적 장애로 고생하던 오빠 이야기는 독자들도 이미 알고 있죠. 이후 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오빠 벤에 대한 사연은 p352 이하에 나옵니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악령과 싸울 수 있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p203)"

p210에는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 그 유명한 압둘 카디르 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단순한 학자 정도가 아니어서, 책에서는 비밀 핵무기 거래 네트워크를 만천하에 폭로하려는 조직(과 그녀)의 분투가 언급되죠. p234에는 본격적으로 그녀의 활약이 묘사되고, 끔찍한 무기 밀매가 일종의 "틈새 시장"으로 언급되는 등 독자에게 충격을 안깁니다. p237에 1995년 옴진리교 테러 사건이 언급되고, 이 단체의 예금이 10억 달러나 되는 데다, 호주에서 우라늄 밀수까지 시도했다는 사실을 보면 문제의 심각성이 한층 부각됩니다. 저 위 헤세의 작품 <싯다르타>에도 사실 "옴"이란 주문이 나오긴 합니다 ㅋ

"게다가, 그들이 보기엔 당신들이 테러범이죠.(p212)" 스웨덴은 본디 중립국 비슷한 위상이긴 합니다만 이 말은 저자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다소 충격으로 다가올 겁니다.

"네, 어르신. 세상을 구하는 일이 끝나면 바로 그렇게 합죠.(p218)" 이것은 닐의 말입니다. "세상을 구하는 일"! 한편으로 냉소적이고, 참 거창하면서도 아직은 젊은 나이인 그들이 짊어지기엔 무겁기 짝이 없는....

현재 미중간의 갈등이 점점 격화되는 시국이기도 하지만, 책 p283 이하에서부터 중국에서의 첩보 활동이 본격적으로 다뤄집니다. "첩보 작전을 매우 정교히 구사하는" 사실상 적국인 중국의 이미지는 이 책이 쓰일 무렵에는 일반 대중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을 텝니다. 북한도 두어차례 언급되는데 남아시아 핵무기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부분, 또 저자가 신입으로서 훈련받는 대목 등에서죠. <프로젝트 런웨이>나 <앙투라지> 같은 프로그램을 본다는 대목(p304)에서 우리는 저자가 우리와 동시대 사람임을 새삼 깨닫게도 됩니다.

p310에 그녀의 첫 출산 이야기(딸 "조이"), 또 방사능 차로 암살당한 정치인 리트비넨코 이야기가 나옵니다. 딘과는 직업관, 나중에는 (슬프게도) 세계관의 차이까지 분명히 확인되어 이혼하며, 이 무렵 그녀는 애정을 깊이 담아 활약했던 자신의 조직과도 "이혼"하게 됩니다. 아직도 젊은 나이지만, 남들 사는 몇 배의 길이와 밀도로 살아온 어떤 여성의 이야기, 여느 첩보 영화보다도 더 흥미롭고 묵직한 감명을 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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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파서블 보이
벤 브룩스 지음, 허진 옮김 / 위니더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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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렸을 때는 상상과 현실의 세계를 넘나듭니다. 때로는 꿈 속에서 그 상상의 세계를 즐기는데, 눈 뜨고 일어나면 아 좀 더 머물러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때문에 간혹 눈물까지 짓곤 합니다. 작가께서는 컨설팅이 본업이신데, 이런 재미있는 어린이 컨텐츠를 창작하신 그 동기가, 읽는 내내 궁금해졌습니다.

때로 그 상상의 세계에서 원치 않던 험한 모험까지 즐깁니다. 이런 모티브를 다룬 영화로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라스트 액션 히어로>가 있죠. 저 영화에서는 캐릭터들도 픽션에서 우리의 현실로 건너오곤 하는데, 그들 역시 "우리 현실의 부조리함"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의 상상은 매번 현실이 되지 못하고 의식의 건너편에 머물고 마는지를 생각해 보면 슬프기까지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작가분의 동기 속에 그런 슬픔이 혹시 없는지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이야기는 매우 유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분위기이니 오해 없으셨으면 합니다.

"올렉은 문득 현실보다 꿈이 더 재미있어서 잠만 자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p19)." 여기서 아빠는 실직 상태인데 주방 용품 외판원이었나 봅니다. 책 중에서 등장하는 작가는 그 아빠의 엄마,즉 올렉의 할머니죠. 이런 할머니가 혹 곁에 계신다면 어린이들이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로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지 않을지 생각해 봤습니다.

"선생님이 일억원을 준다고 해도 저는 거짓말 안 해요.(p63)"

가상의 세계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현실의 이웃들이 들어 줄 리 없습니다. 1997년 영화 <쥬만지>에서 친구를 보드게임 속 세계로 보내고 혼자 현실에 남은 여자아이는 어른들의 권고 때문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으나 마음의 상처가 나았을 리 없습니다. 중년 여인이 되어서도 그녀는 정상적인 소통과 일상이 불가능했죠. 이런 동화에서는 어린이들이 바로 이 불신, 이 현실에서 새로 생긴 장벽과 "자신만의 진실"을 어떻게 타협시켜 나가는지를 구경하는 게 또 포인트입니다.

"올렉의 아빠는 잠에서 깨는 순간 더 이상 자지 못하는 것에 대해 투덜거렸다.(p88)"

이런 책에서 특히 이런 유형의 아빠는 그리 분량이 크지 않은 게 보통인데 이분은 좀 달라서 간혹 웃겨 줍니다. 사실 저런 처지에 놓은 분들은 마음이 불편해서 불면증에 걸리거나 그리 깊이 못 자는 게 보통인데 ㅎㅎ 아무튼 올리버는 이 세바스찬이라는 아이, 다른 세계에서 왔기에 아직 파스타가 뭔지고 모르는 아이가 몹시 궁금해집니다.

"엠마가 집 정원에서 찾은 건 누군가 울타리 너머로 던져버린 먹다 남은 케밥이 다였다.(p128)"

이 이야기 속에는 이처럼 음식 관련 모티브가 종종 등장하여 재미있는 상상의 원천이 됩니다. 다채로운 음식은 다문화의 상념으로도 이어지고, 아마도 이 책에서 세팅하는 상상의 세계는 "다른 문화권"의 은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발랄한 애드립이나 행운, 혹은 무모한 용기 등으로만 상황에 대처하는 게 아니라 작전을 중요시합니다. 엘리사는 그리고 p166에서 아이들에게 작전을 지시하는데, 그 도구는 "음식"입니다.

"세바스천은 소행성이 아니라 우리 친구에요(p204)."

2009년작 영화 <스타더스트>를 보면 지구에 떨어진 별똥별은 그저 운석 덩어리가 아니라 아름다운 여성입니다(배우는 기네스 펠트로). 아이들은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 놓은 별들에다가도 의미를 부여하고 "길들일" 줄 아는 존재지요. 이 세바스찬, 파스타가 뭔지도 몰랐던 아이를, 선생님과 이웃들, 또 친구들에게 이해시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없다면 미래는 우리 손을 벗어나, 대비할 수 없게 된다고(p233)" 어떻습니까? 이 책은 작전, 계획, 이런 것처럼 지금의 욕구와 무관한 어떤 조심성, 대비 같은 미덕을 은연중에 강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자 갚는 속도가 이자 불어나는 속도를 전혀 못 따라가 가난해진, 이제는 코 고는 괴물 같은 올렉의 아빠처럼 곤경에 빠질 수 있다는 거죠. 동화책에 이처럼 현실에 대한 은근한 경고가 들어있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작가가 컨설팅 하시는 분이라서 그럴까요? ㅎㅎ

"상상력도 근육처럼, 쓰지 않으면 무뎌진단다."
할머니는 역시 작가답게 올렉에게 이런 충고를 들려 줍니다. 사실, 현실도 정글과 같아서, 상상력이 없으면 그때그때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힘들어지는 수가 많죠. 이 책은 아이들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의 효용을, 공부 못지 않게 중요하다며 강조해 주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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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같은 회사에 거침없이 어퍼컷
조기준 지음 / 포춘쿠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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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같은 회사"라고 하면 듣기에는 좋지만 사실은 사회 생활 경험이 일천한 젊은이들을 현혹하기에나 딱 알맞을 뿐입니다. 위에서 원칙도 없이 일을 시키거나, 무리한 지시도 그저 분위기의 화합을 위해 뭉개고 넘어가기 일쑤지요. 젊은이들은 잠시 듣기 좋은 말에 일시 현혹될 뿐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는 젊은이 입장에서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합니다. 자신은 직분을 다하지 않은 채, 마치 부모님이 날 돌봐 주듯 배려를 부탁한다면 이 얼마나 모순된 행동이겠습니까. 이 책은 그래서 갓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들이, 직장에서 유념해야 할 바를 재미있고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초두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 준 인상이 거의 내내 가다시피한다는 건데, 책에서는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의 말을 인용합니다. 초기의 부정적인 정보를 뒤집고 긍정적인 인상을 다시 주기 위해서는 200배의 물량이 필요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초기의 긍정적 인상이 부정적으로 이후 바뀌기는 쉬우나, 그 반대로 부정적인 인상이 (설령 이게 진실이라 해도) 긍정으로 바뀌기는 훨씬 어렵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정중한 매너와 공손한 인사는 물론 필요합니다. "활짝 웃지는 않더라도 정말 반가운 마음가짐을 담는다면....(p44)"이란 지적처럼, 진심과 성실함, 최선을 다하려는 성실한 태도가 정말 그 사람의 마음에 담겼다면 작은 제스처만으로도 효과가 다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른바 "팬암의 미소"처럼, 가식은 그저 가식으로서 역효과가 날 뿐입니다. 윗사람들이나 동료 눈에는, 저 사람이 성실하다 진심이다 정도는 분명히 다 보입니다.

회사에서 형이나 오빠라는 호칭을 함부로 쓰는 건, 공과 사를 구분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 걸 넘어, 저 사람 좀 어디가 부족한 것 아닌가 의심을 받기에 충분할 겁니다. 우리는 분별을 못하고 "마구 앵기는" 걸 사회성 좋은 걸로 착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절도가 바로 선 조직일수록 이런 무분별한 태도를 더 엄격히 대할 것입니다.

별 필요도 없이 점심 식사를 알뜰히 챙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일 하기가 싫어 그저 도피처를 찾는 데 그치는 겁니다. 일에 애착이 있다면 점심은 책상 위에서 간단히 빵 정도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대신, 요즘 괜찮은 직장이 대부분 그러하듯, 저녁은 나만의 시간으로 확실히 누릴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책에도 나오듯 만약 그 직장에서 점심 시간이라는 게, 구성원들과의 특별한 소통 시간이 되거나(종전의 "회식"처럼), 혹 타 조직의 직원들을 배려할 시간으로 쓰인다면, 그에 걸맞게 필요한 준비를 갖추고 정보를 준비하는 게, 앞서와는 반대로 성실한 사원의 표징이 될 것입니다.

상사에게 보고를 하거나 일상의 소통 경로라고 해도, 말은 정확하고 분명한 언사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사물 높임과 사람높임"의 준별은 그저 메시지가 통하는 선에서 이해를 하고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아니 자네는 나를 높여야지 왜 넥타이를 높이나?" 이런 건 그 직원을 바르게 훈육한다기보다, 그저 시비를 걸려고 괴롭히는 것 이상이 아닙니다.

예전에 저는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온 텔레마케터에게 객체 높임의 오류를 지적했다며 떠들고 자랑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 게, 만약 그 사람이 내 시간을 빼앗는다 싶으면 양해를 구하고 끊어 버리면 됩니다. 도대체 자신이 국어 실력이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나서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모멸감을 준답니까? 이런 사람은 진짜 고수를 만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나 봐야 제 주제가 바로 파악될 겁니다. 전형적인,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사람이랄지. 밖에서 텔레마케팅 일을 하며 돈이라도 버는 분이, 집에서 노는 백수한테 훈계를 들을 이유가 대체 뭐겠습니까. 이렇게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자기 본위로 생각하니까 직장도 없이 집에서 노는 거죠. 아, 물론, 삼전 쯤이나 되는 일류 직장에서야 저런 객체 높임 용법 등 문법의 구사가 중요할 것입니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하고, 남들한테 최소 수준은 맞춰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블링크>가 베스트셀러가 된 적 있고 이 책에서도 중요 내용이 인용됩니다. 첫인상의 중요함이 다시 부각되며, 특히 책에서는 "당신은 지금 동호회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직장에서 통할 기본 예의를 배우는 것"이라며 상황을 정리해 줍니다. 결론은, 타 부서 직원이라 해도 절대 인사하는 것에 소홀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사 잘하는 능력 하나로 예전 김운용 IOC 위원은 사마란치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고속 출세가 가능했습니다. "예절은 그 자체로 습관이 되어야 한다(p77)"는 말도 나옵니다.

집에 간다고 다가 아니라 직장에서는 퇴근 예절 또한 중요합니다. 책에서는 "칼퇴가 권리 아닌 의무(p91)"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우리 속담에 "시집살이 모질게 한 X이 며느리 더 못되게 대한다"고 한 것처럼, 본인이 신입 시절 상사 눈치 보느라 칼퇴를 못 한 걸 이제 상사가 되어서 분풀이를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책에서는 팀장이, 후배 직원들이 퇴근할 때 퇴근 예절을 지킬 수 있게(!), 자신이 혹 자리를 비우거나 하면 미리 부하들에게 나 어디 있을 거라고 알려 준다거나(왜냐면 문자로 띡 통고하는 식이 되어선 후배가 예의가 아니니 말입니다), 알아서 몇시에 퇴근하라고 아예 말을 하라고 하네요. 이게 맞는 거죠 사실.

책에는 좋은 말이 너무 자주 나옵니다. 한 예로, 부하직원이 상사 지시를 메모하는 건 그만큼 당신의 지시를 중히 여긴다는 충성 제스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중에 책임 소재를 분명히하기 위해서라도 이 메모를 활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이 이렇게나 바뀌고 있는 겁니다. 책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상사 역시 자기 지시를 메모하는 게 부하들에 대한 공감 능력 표시이자 매너라고 하네요. 이런 말을 들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상사들도 있을 건데, 사실 미국 등의 정상적인 기업에서는 기본입니다. 이제 한국 직장도 비로소 조직 같은 조직이 되어 가는 거죠. 꼰대가 설 자리가 없는.

브레인스토밍이라는 개념이 한국직장에 들어온 지도 십 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저 혼자서 떠드는 상사가 많습니다. 말 그대로 브레인스토밍은, 된 이야기건 되다 만 헛소리건 다 떠들어 보는 겁니다. 상사가 유능하면 이런 데에서도 영감을 얻는데, 그 이유가 뭐냐면 절실한 팀장은 평소에 항상 그 프로젝트 생각만 하고 있기에 엉뚱한 데서도 "맞아!"라며 출구를 찾는 거죠. 직장은 사실 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 생각 많이 하는 사람, 절실한 사람이 잘나가는 곳입니다. 재능만 갖고도 안 되는 게 일입니다. 이 책을 잘 읽고 진심, 절실한 마음, 조직원 모두를 위하는 공감 능력이 어느 정도 계발된다면 정말 평균 이상은 하는 훌륭한 직원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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