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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1 - 세계의 책 속에 피어난 한국 근현대 ㅣ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1
최종고 지음 / 와이겔리 / 2019년 6월
평점 :
한국을 사랑한 세계 작가들] 평생 법학자로 지낸 저자의 이력를 뛰어 넘어 문학사 혹은 문명사적인 한국 근대 100년전의 역사 기록을 그의 손에 의해 간간히 들여다 볼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여기 책속에 나와 있는 분들은 한국인이 아닌 서방 서계에서 그 당시 한국에 어떤 목적으로던 체류 하게 되면서 격은 일들을 혹은 선교사적 위치로 혹은 공관 사무관의 위치로서 근대 100여년전의 생활상과 궁중 전반에 걸친 이야기들을 지금의 한국 사학자 보다 자세히 전달 한다.
우선 먼저 , 전체 70여인 중에서 1권 35인이 먼저 소개 되었고 중간 중간 " 양화진" 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외국인 묘지에 안장 되어 있다라고 서술 되어 있는 그곳이 궁금 하여 위키 백과를 찾아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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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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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로 가기검색하러 가기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楊花津外國人宣敎師墓園) 대한민국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공원이다.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의 일부이다.
조선 시대 양화진(楊花津) 나루터를 수비하던 양화진영이 있던 곳으로 1860년에 외국인 묘지로 조성되었다. 이 곳에는 조선 말 고종 때부터 한국을 위해 공헌한 언론계, 교육계, 종교계 외국인 인사들 500여 명이 묻혀 있다. 한국의 암흑기였던 1900년 전후에 언론창달의 기수 역할을 했던 대한매일신보의 어니스트 베델,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이화여대 설립에 공이 큰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그의 가족들, 세브란스 의대를 세운 더글러스 B. 에비슨, 한국의 은인으로 추앙 받는 호머 헐버트 박사,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의 묘도 이곳에 있다.
현재 이 곳 부지를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사업 협의회와 100주년 기념교회가 관할하고 있으나 현재 묘지 공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경성구미인묘지회, 유니온교회, 양화진 선교회, 예장통합과의 이권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2013년 2월 28일 대법원에서 ‘양화진의 법적 소유주는 100주년기념재단이고, 유니온교회는 쫓겨난 것이 아니다’는 확정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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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기술 되어 있고 좀더 자세히는 아래와 같다.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서울 楊花나루와 蠶頭峰 遺蹟)은 한강의 동북쪽 강변에 있는 사적 제399호로 지정된 양화나루와 잠두봉 일원을 말한다. 한강의 이 지역의 교량으로는 서북쪽에 길이가 약 1.2km인 양화대교, 동남쪽에 역시 약
양화나루[편집]
양화나루 또는 양화진(楊花津)은 잠두봉과 주변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정자도 강변에 많이 세워져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화진 일대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할 수 있는 개시장(開市場)이 되었다.
잠두봉[편집]
절두산 천주교 성지(切頭山天主敎聖地) 또는 잠두봉(蠶頭峰)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일대의 한강변에 있는 천주교 순교 사적지이다. 잠두봉은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 곳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楊花津)까지 올라왔다가 돌아갔다.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이 양화나루 옆의 봉우리인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여 1만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그 뒤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며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19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천주교회에서 절두산순교기념관을 세웠다. 2000년에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명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최양업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또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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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한 한일 합방 1910년도에 이뤄 지기 전 혹은 이후에도 일제 시대상의 많은 부분들을 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보았고 ,,, 사건 사고의 관찰자로서의 역할도 충실 히 해 내엇다... 필자는 읽어 내려가는 내내 중간 중간 삽입 되어 있던 흑백 사진의 경성 풍경과 100년전의 당시 한국인의 복장 , 거리 , 광화문 벌판 ? 에서 눈을 뗄수가 없엇다... 당시 카메라 기술이 전무 했던 한국으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사적 사료 라고 할수 있다.
또한 , 당신 조선을 현제의 교통이 발달한 것도 아닌 지형을 약 20여회 이상이나 전국을 다니면서 현제와도 거의 비숫한 지도 지형을 그려낸 화가 이자 작가인 사람도 있고, 우리가 역사 교과서에서 자주 접하엿던 고종을 모신 목참판 이란 칭호를 얻은 독일인 뮐렌도르프 ,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세계에 알란 퍼시벌 로렌스 로웰 이나 ,, 여성 화가 이자 여행가인 조지아나 켐프 , 동방의 등블을 노래한 인도의 유명한 시인 타고르 까지 ,,, 우연 찮게도 당시 아주 작고 힘없는 조선을 지지한 외국인 들이 있었다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100년전의 가슴의 응어리가 조금은 치유가 될까 ....
작가들 중엔 주로 선교사나 그 일행 혹은 여행가가 있었으나 그중에는 저널 리스트 등도 있어서 프레데릭 아서 메켄지 는 한국 독립운동을 세계에 널린 알린 공로도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일로는 대한 매일신문을 창간한 사람은 조선인이 아닌 유대인 언론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텔 이라는 사람으로 조선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한국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이에 고종 황제는 베텔에게 한국이름 배설을 부여 하였고 여러가지의 편의도 제공 하엿다라고 기록 된다.. 이를 기점으로 양기탁 , 신채호, 박은식등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치외 법권으로 보호 받던 대한매일신보에 모여 일본 제국과 맞서 싸우게된 전기를 마련 한다....하지만 이후 일본 통감부는 영국에 압력을 가하게 되고 재판정에 서게된 베텔은 3주간 금고형에 처한다...당시 영국과 일본은 군사동맹 관계이고 1904년 2월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입장에선 영국은 우방이엇고 ,, 이를 활용한 발행인 영국인 베텔 신문 발간 전략은 주효 하엿으나 그리 길지 않은 세월안에 다시금 통감부의 손아귀에 언론은 장악 되고 만다..
다시 약간 거슬러 올라가 병인 양요로 가면 이를 쓰고 그린 프랑스 화가 작가 장 앙라 줴비르가 있다.. 그는 당신 해군으로 참전 하였는데 당시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강화도 우너정에 참여 하였고 한강 입구를 찾기 위한 1차 2차 원정을 하였고 2차 원정에서 강화부를 우세한 화력으로 점영 하였다... 그 이후 배 선상으로 조선의 한 관리로부터 도착한 서한 한장을 인상 깊게 소개 한다.
" 이제 그대들은 이 보잘것 없는 소국의 강산을 보았으니 부디 돌아가 주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온 백성이 기뻐할 것이외다, 제발 그대들이 우리에게서 눈길을 돌려 주기만 한다면 ,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는 모든 의심과 의혹들을 몰아내 준다면 그것으로 그대들은 우리를 어없이 행복 하게 해주는 것이외다. 감히 천번 만번 청하는 바이오니 , 그대들이 우리의 청을 들어 주리라 믿겠소이다."
이 얼마나 순박한 퇴각 탄원서 인가....사실 병인 양요는 1866년 흥선 대원군의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 조선인 천주교도 박해 약 8000여평 이상을 절두산에서 제거 한것이 화근 이었다.. 그 중 살아남은 클레르 리텔 신부는 중국 텐진에 주둔 중인 피에로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후 9월 10월의 접전끝에 프랑스군 해명이 강화 문수 산성 정족 산성 작전에서 실패 하여 돌아가며 막을 내린다.. 떠나며 쥐배르가 남긴 글은 다음 과 같다.
" 유럽의 국가들이 처음 접촉 하는 이국의 국민들에게 폭력을 드러내고 횡포한 요구를 주장하는 일이 너무 빈번하다. 일단 그나라가 아직 전신기를 갖지 못했고 도 그들 문명의 본원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면 , 우리는 그들이 입는 페해를 감안 하지도 않고 주민들의 모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마치 우리에게 허락된 줄로 생각 한다.'' 당시 그의 지성을 가늠해 볼수 잇는 어귀이다..
고종이 일제 치하에서 벗어 나기 위한 여러가지 방편 중 하나는 미국의 도움을 얻는 것이엇는데 당시 루즈 벨드 대통령의 딸이 조선을 내방할 기회가 있엇고 이를 활용 하는 방안이 있었으나 이미 가스라 테프트 밀약에 의해 미국은 필리핀을 , 일본은 조선을 점유 통치 분할 한다라는 조약이 되어 있을리 알바 없는 조선으로서는 회답이 없는 미국이 야속할 따름이다...
당시에도 정보란 것이 중요 하다면 중요하고 정세 파악이 중요 하다면 중요 하다. 나라간 일이 이러할 진대 개개인 민생들의 삶은 얼마나 피폐 하였을지 100여년 적 푸른눈의 이방인들이 써내려간 삽화와 그림 , 그리고 조선 민중들보다도 더 가까이 민비 시해 현장에서 그 장면을 목도한 그들에게서 다시 나라 잃은 혹은 대세의 운을 읽어 버린 비운의 조선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룬다...
책력가99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