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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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찬양을 받는 콘텐츠라고 해서 꼭 나도 그것을 찬양할 필요는 없다. 이효리가 집에서 로브를 입는 것이 멋져 보인다고 해서 나도 따라 입어 보지만 내가 입은 로브는 그저 한 조각의 넝마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에게서 고전이라고 인정받은 소설이라고 해서 나도 그 작품을 반드시 칭송할 필요는 또한 없을 것이다. 세상에 취향은 다양하고 다양한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니까.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25살에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일주일도 훨씬 전에 다 읽었건만, 도대체 이 책과 관련하여 어떤 말로 내 감상을 끄집어내야 할지 갈팡질팡하였다. 더 이상 꾸물대다간 갈팡질팡하는 이런 마음조차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도화지만 덩그러니 남게 될 것 같기에 정리 못한 내 마음이라도 남기자고 일단 끄적여보기로 했다. 


소설을 쓴 괴테와 같은 25살로 설정된 주인공 베르테르는 불구하고 오해와 게으름이 불러일으킨 많은 갈등과 다툼을 뒤로하고 발하임이라는 조용한 마을로 내려간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베르테르의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주는 지상과 하늘을 품고 있는 발하임 계곡의 언덕배기에 앉은 베르테르는 호메로스를 읽으며 이따금 상념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무한한 신의 영혼의 거울인 자신의 영혼을 신이 발하임을 그린 것처럼 자신도 종이 위에 잘 그려서 종이를 자신의 영혼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행복하게 고민하곤 하였다. 


어느 날 베르테르는 발하임 마을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는 길에 그만 그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보지 못했던 가장 매혹적인 것을 보고야 말았는데 그것은 마을에 살고 있는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여인 샤를로테였다. 첫 만남에서부터 샤를로테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가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것. 베르테르는 샤를로테의 약혼자가 출장을 나가 있는 몇 주동안 샤를로테의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였는데 이것은 해와 달과 별들은 고요히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베르테르는 낮인지 밤인지 모르고 그를 둘러쌌던 세계가 사라져 버린 듯하였다. 


로테와 함께 하는 충만하고 행복한 나날은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토가 돌아오면서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로테는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머리로 인지하고 있던 베르테르는 이제 그 사실을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25살의 피 끓고 감성 충만한 성정의 베르테르는 이미 너무 깊이 로테를 사랑하게 되었다.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헤라이자 아프로디테였고 아르테미스이자 아테나였다. 사랑과 숭배와 헌신을 이미 바쳐버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렇듯 감성이 지배하는 성정을 지닌 베르테르와는 달리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토는 훌륭한 인품에 근본적인 성실함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당시 독일 사회에 지배적이었던 계몽의식의 영향을 받았던 듯 이성이라는 것이 그를 대부분 잠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알베르토와 베르테르의 아주 다른 성향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잘 지내는 듯했던 그들의 관계는 점차 부딪히게 되고 게다가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마음이 줄기는커녕 점점 더 켜져 가면서 두 사람의 대립은 한번 크게 부딪히게 된다.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현실 속에서 괴로움을 잊으려 일 속으로 자신을 던져보지만 속세에 찌들어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은 그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다. 자신의 안식처인 로테에게로 다시 돌아간 베르테르. 하지만 이미 유부녀가 되어버린 로테는 이제 베르테르의 안식처가 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종교와도 같이 되어버린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숭배는 공존할 수 없었다. 얄궂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초조함과 불안이 베르테르의 영혼에 뿌리내리며 잠식해갔고 그의 생기와 명민함은 소멸되갔다. 베르테르는 신변을 정리하고 알베르토에게서 빌린 권총으로 자신의 서재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 출판사의 거절을 겪은 다음 가까스로 출판된 처지였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판되자마자 독일과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가져왔다. 18세기 계몽주의와 지독한 이성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억눌려 있던 젊은 감성들은 베르테르의 내면이 말하던 감성과 감정의 솔직함 풍부한 감수성에 열광했다. 냉철한 이성과 지식을 당연한 진리로 여겼던 당시의 풍조에 그들은 지쳤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어떤 사조이든 경향이든 하나의 시간과 공간을 그것으로만 채워지게 되면 반드시 반대편의 억눌린 기류가 빈 곳을 비집고 나오게 되어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당시 사회에서 반대편 억눌린 기류였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말할 때 ‘이건 좋다. 저건 나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어떤 행동에 특별한 속사정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나 했나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 P89

충분히 이성적인 알베르토에게 베르테르는 이와 같이 항거하며 감정이 이끄는 대로 하는 것이 어찌해서 나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되묻고 있는 것이다. 아마 베르테르의 이 주장은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목소리였을 수도 있겠다. 


'젊은 베르테르'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나 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나는 너무도 늦게 읽어나보다. 

베르테르의 우유부단함에 못내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처음부터 샤를로테가 약혼자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유부녀가 되어 버린 로테에 대한 사랑을 계속 키워가고만 있었다. 처음부터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는 베르테르가 나는 불만이었다. 

그 끝이 해피엔드가 아님을 베르테르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인데 '로테'라는 여신에 대한 숭배는 여전하고 스스로 초조함과 불만과 불안을 내부에서부터 키워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모든 비관적인 감정 덩어리는 독자들이 예상한 바 그리고 현대의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베르테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인공은 초조함과 불안과 그리운 사랑으로부터 구원하는 방법으로 왜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감정은 이미 과거 저 편에 묻어버리고 오로지 현실과 이성만이 살 길이라는 듯 2020년 이 해를 살고 있는 나는 베르테르를 이해는 하지만 용납하지는 못하겠다. 예상되는 결말이 오기 전에 나를 보호해야만 했다, 고 생각한다. 베르테르는 로테는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베르테르는 대화를 나누지 않아야 했다. 베르테르는 로테와는 거리를 두고 알베르토와만 사교를 지속하여야 했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그는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 베르테르의 처연한 사랑과 끝 모를 슬픔을 용납하지 않고 '안전'부터 생각하는 나는, 이제  정말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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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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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저장

자네 말이 옳았어. 인간이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서 과거의 불행한 추억을 떠올리는 일에 매달리는 대신 현재를 있는 그대로 담담히 견단다면 고통이 훨씬 줄어든 텐데 - P11

나는 이번 일을 통해서 다시금 깨달았네. 술수나 악의보다는 오해와 게으름이 더 많은 갈등과 다툼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 - P12

황혼이 깃들면 나를 둘러싼 지상과 하늘이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내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준다네. 나는 이따금 상념에 잠기곤 하지. 아, 내 안에 가득 차오른 이 따사로움을 과연 그림으로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종이 위에 그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내 영혼이 무한한 신의 거울이듯 종이가 내 영혼의 거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이내 자신이 없어진다네. 대자연의 장엄한 힘에 압도당하고 마는 걸세 - P14

사람들은 대게 먹고사는 일에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어쩌다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아주 불안해하고 말이야. 그러고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네. 아, 인간의 운명이여! - P18

아이들은 무언가를 원하면서도 왜 그것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지. 이 점에 대해서는 박식한 교사나 교육자들 모두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네. 그러나 어른들도 아이들과 별다를 바 없어. 이 지상에서 어쩔 줄 모르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네. 진정한 목적을 향해 행동하지 못하고 비스킷과 케이크, 아니면 회초리의 지배를 받지. 누구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주 명백한 사실일세. - P22

그 이후로도 해와 달과 별들은 고요히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도무지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지낸다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온 세계가 사라져 버린 듯해. - P51

모든 일반적인 명제에는 예외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변호를 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그는 자신이 뭔가 성급한 발언을 했거나 일반적이고 확실치 않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 말을 계속해서 제한하고 수정하고 가감한다네. 그래서 마지막엔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 P88

"당신 같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말할 때 ‘이건 좋다. 저건 나쁘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어떤 행동에 특별한 속사정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나 했나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 P89

"나약함 때문이라고요? 제발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폭군의 혹독한 압제하에서 신음하던 미눚ㅇ이 마침내 궐기하여 그 폭압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경우에도 그걸 나약이라고 말할 겁니까? 자기 집에 화재가 나자 놀란 나머지 맨 정신으로는 움직이지도 못할 짐들을 온 힘을 다해 드는 사람, 치욕을 당항 데 분노하여 여섯 명과 맞붙어 이기는 사람도 당신은 나약하다고 말할 건가요? 노력하고 앴는 것이 장점이라면서, 왜 정도를 벗어난 힘은 나약하다고 말하는 거죠?" - P91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입니다. 기쁨과 슬픔, 고통을 어느정도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면 무너져 버리지요.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어떤 사람이 약한가 강한가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그가 그 정도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에요. 나는 자살한 사람을 겁쟁이 취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심한 열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부른다면 정말 무례한 일 아니겠습니까?" - P94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 안되는 건 아닙니다. 심신이 쇠약재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다시 일어설 힘조차 없고 또 어떤 신통한 치료로도 몸이 회복되지 않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든 정도가 될 때 우리는 그걸 죽을병이라고 부르지요.
이것을 정신에 적용해 봅시다.사람의 마음이 점점 작아지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여러 가지 인상들에 압도당하고, 마음속에는 관념들이 고착되어 가지요. 그러다가 점점 커져 가던 정열이 마침내 침착한 분별력을 앓고 파멸하고 맙니다.
평온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이처럼 불행한 사람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를 설득하기 위해 어떤 조언을 해 줘도 소용이 없어요. 그건 건강한 사람이 환자 옆에 아무리 오랫동안 붙어 있다 해도, 정작 환자에게는 자신의 힘을 조금도 불어넣어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P95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이 들뜬다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 보면서, 자유가 싫증이 나서 스스로 안장과 짐을 얹게해 달라고 했다가 죽도록 혹사당했다는 말의 우화를 떠올리곤하지. 어찌해야 될지 도무지 모르겠어. 환경의 변화를 동경하는 나의 욕망은 내 마음속의 불쾌한 조급함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것은 어딜 가든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지 않을까? - P105

낙천적인 마음가짐이라! 이런 말을 쓰면서도 웃음이 나온다네. 아, 내가 조금이라도 낙천적인 기질을 타고났더라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어떤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힘과 재능을 가지고도 유쾌한 자기만족에 빠져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데, 어째서 나는 내가 가진 힘과 재능에 절망하는 걸까? 신이시여, 당신은 내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허락하시면서, 이찌하여 자신감과 만족감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참자! 참는 거다! 그러면 더 나아질 거야. 그래, 빌헬름, 자네 말이 맞네. 날마다 세상 사름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면서 그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를 보고 난 후부터는 훨씬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어. 확실히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과 비교하도록 만들어진 모양일세. 행복이나 불행은 우리가 배교하는 대상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러니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네. - P117

우리의 상상력은 본래 더 높은 것을 추구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문학의 환상적인 이미지에 영향을 받아 피조물들을 순서대로 죽 늘어세우는 경향이 있네.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아래에 두고, 우리 외의 것은 모두 우리보다 다 근사해 보이고 완벽하다고 여기지. 어찌 보면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야.
우리는 곧잘 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네. 그리고 하필 우리가 갖지 못한 그것을 다른 사람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또한 그에게 우리가 가진 것까지 모조리 다 주어 버리고, 그에 더하여 우리에게 없는 이상적인 특징까지 부여한다네. 그렇게 가장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을 완성시키는 걸세. 사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물에 지나지 않아. - P118


반면 우리가 아무리 약하고 힘이 든다 해도 최선을 다해 전진해 나간다면, 비록 꾸물거리고 난관을 만난다 해도 돛을 달고 노를 저어 가는 다른 이들보다 어느새 앞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네. 그리하여 다른 사람과 나란히 가거나, 다른 사람을 앞지를 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느끼게 되는 법이지. - P119

서로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어야지. 건강, 명성, 기쁨, 휴식, 모조리 다! 다들 어리석고 무식하며 속이 좁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네. ‘좋은 의도‘라는 미명하에 말이지. 나는 가끔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라도 부탁하고 싶어져. 제발 그렇듯 성급하게 자신의 오장육부를 들쑤시고 다니며 스스로에게 성처를 주지 말라고. - P131

오, 내 마음이 쉽게 변한다면 좋겠어. 내 마음이 괴팍해져서 이런 기분을 날씨 탓을 한다든지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든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원망하거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탓할 수 있다면...... 그러면 견디기 힘든 불만과 불쾌라는 무거운 짐이 반으로 줄어들 텐데 말이야. - P167

그래, 그때 너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행복했구나! 하느님! 당신은 인간이 이성을 얻기 전과 이성을 잃었을 때에만 행복하도록 만드셨군요! - P179

불만과 불쾌감은 베르테르의 영혼에 점점 깊게 뿌리내렸고, 서로 강하게 엉켜서 그를 잠식해 나갔습니다. 정신의 조화는 완전히 깨져 버렸고, 내면의 흥분과 격정이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그의 본성이 지녔던 모든 힘이 뒤죽박죽되어 그는 완전히 지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지금까지 모든 불행에 대항했을 때보다도 더욱 초조하게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극도의 초조함과 불안함은 그 안에 남아 있던 정신력을 모두 갉아먹어, 그의 생기와 명민함까지도 모두 소진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점점 더 우울한 사람이 되었고 점점 불행해졌습니다. 그럴수록 판단력은 더 흐릿해졌구요. 적어도 알베르트의 친구들은 그렇게 말하더군요.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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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리부트 - 코로나로 멈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
김미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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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라고 하면 뭔가 감정적으로 위축되는 느낌이 들고 기회라고 하면 왠지 운이 따라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위기와 기회 사이에서 내가 주체가 되어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 P34

함께 일하는 공간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구체적인 성과와 실력뿐이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꼭 이걸 물어봐야 한다.
"나는 회사에서 함께 일하건 혼자 일하건 똑같이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인가?" - P106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코로나 이후 세계에서 생존할 수 없다. 마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면 그 나라 언어와 문화를 습득해야만 생존하고 성공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 P94

한 분야에서 코어콘텐츠를 가지고 있다는 건 그 코어가 재정비되고 업그레이드된 상태를 매일 유지한다는 얘기다. 적어도 3~5개 정도의 업그레이드 시스템을 가져야 한다. 코어콘텐츠가 유지되고 더 탄탄해지려면 그 코어의 주변 공부를 해야하고, 그래야만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가 탄생다. - P111

인디펜던트 워커는 하나의 작은 회사다. 투자하지 않는 회사에 미래가 있을 리 없다.
수입의 30퍼센트 정도는 미래를 위한 공부에 투자해야 한다. 나는 매일 영어공부, 디지털 공부, 책 읽기, 과학 공부, 취미 계발을 꾸준히 한다. 남들은 그러면 너무 히미들지 않냐고 묻는데 괜찮다. 힘든 것과 바쁜 것은 구분해서 말해야 한다. 그래도 바쁜 게 한가한 것보다는 낫고, 힘든 게 슬픈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오랫동안 인디펜던트 워커로 살아오며 체험했다.
그래도 참 좋은 것은 이런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결과가 내 몸과 커리어와 내 인생에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이다. - P112

회사 밖에[서 혼자 일하게 되면 일감이 끊기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왜 나를 찾지 않는지 감도 안 잡힐 때는 더욱 난감하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거다. 일이 끊겼다는 것은 ‘독립‘한 게 아니라 ‘고립‘되었다는 반증이다.(...) 혹시 인디펜던트 워커를 ‘혼자서 일하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독립적으로 일하되 사람과 사회와 촘촘히 연결되고 그 연결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 - P113

머리로는 변화의 진폭을 이해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변화하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지금 가진 것들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사는 재고 청산이 빠른데 개인은 재고 청산이 힘들다. 자기를 여태껏 먹여 살려온 내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아쉽고, 심지어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 서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재고는 재고일 뿐이다. 괄거에 나를 먹여 살렸지만 더 이상 유용하지 않아 재고가 되어버린 자산이 있다면 빨리 처분해야 한다. 재고를 처분해야 새로운 곳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45

변화가 빠를 때는 투자 관점에서 자산을 매각하는 일을 일상화해야 한다. 끊임없이 바꾸고 조합하고 새로 채워야 내 분야에서 유능해질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마음의 빗장을 여는 일이다. 열어야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야 바꿀 수 있다. - P146

이렇게 가져갈 것과 채워야 할 것,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적다 보면 자동으로 일어나는 반응이 있다. 작대기 긋기다. 짝을 지어 서로 연결을 시켜보면 목록들이 저절로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 만약 목록을 다 적고도 스파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직 분석이 덜 끝났다는 뜻이다. - P165

모든 아이디어는 낯선 것을 봤거나,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됐거나, 나와 다른 분야의 사람을 만났거나, 내가 지금껏 관심 없던 것들과 연결되면서 만들어 진다. 낯선 것과의 충돌은 기존의 생각에 균열을 만들고, 그 틈새에서 새로운 시각이 탄생한다. - P169

우리가 이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멋들어진 시나리오 자체가 아니라 시나리오 쓰기와 실행을 수도 없이 반복해나가는 실행력이다.
개인의 리부트 시나리오에는 그저 전망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이렇게 하려고 한다‘는 개인의 의지가 들어 있다. 시나리오 3단계와 실행이 습관이 된다면 우리도 현재와 미래를 만나게 할 수 있다. 상상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상상만으로 이루어지는 미래는 단 하나도 없다. 나를 살리는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방법은 계속 실패해보고 수정하는 것뿐이다. 해보지 않은 일은 실패가 곧 검증이다. - P178

우리도 지금까지 해왔던 교육 방식을 리부트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는 몇 년간 파고드는 ‘석박사형 공부‘가 아니다. 넓게 알고 빨리 연결시키는 게 중유한 융합형 학습니다. - P196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실력‘이다. 기술은 집중하면 단기간에 얻을 수 있다.(...)먹고사는 기초 실력이 없으면 기술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강의하는 실력이 없었다면 유투브를 하건, 줌을 하건 누가 내 얘기를 들어줬을까. 아무리 SNS 홍보 기술이 뚸어나도 음식이 맛없고 경영 실력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기술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엄청 대단해 보이지만 써복 익숙해지면 일상의 하나가 될 뿐이다. 그러니 자꾸 움츠러들지 말자. - P260

코로나 이후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으려면 목표를 수정하는 방법밖에 없다.
수정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상수‘와 ‘변수‘를 구분하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나를 둘러싼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든, 그 일을 하고 싶은 나는 변하지 않는 ‘상수‘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변수‘는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는 것이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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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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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우리나라에 그리스 로마신화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그 중심에 번역가 이윤기가 있었다. 동화 같은 신화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성인들이 신화를 읽게 한 장본인, 바로 이윤기이다.


나도 그 열풍에 같이 뛰어들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를 1,2권을 사서 탐독하였다. 아쉽게도 수많은 헷갈리는 신들의 이름과 범람하여 한꺼번에 몰려드는 강물처럼 쏟아지는 신들의 사건들에 치여 후속 책들은 읽지 못했지만.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을 때 받은 느낌은, '이 사람 글 참 쉽게 쓴다'였다. 이후로 나는 이윤기가 소설이면서도 전문 번역가로 아주 유명한 사람인 것을 알았다.


작년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었다. 이윤기가 번역한 책이었다. 46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이 2권이나 되는 책이었는데 내용 또한 난해하여 서양 중세의 종교와 철학, 기호학, 시학이 책 속에 넘쳐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책을 다 읽고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당시 나는 "뭔 번역을 좀 쉽게 하지. 이야기를 이해를 못 하겠잖아!"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집 앞에 알라딘 중고 서점이 있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다 시간이 남아서 정말 오랜만에 실물 서점에 들어갔다. 책을 사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서점을 막 나오는 순간 이 책이 내 눈에 띄었다. 눈에 잘 띄는 노란 표지였다. 책값은 단돈 5천 원. 바로 책값을 지불하고 말았다.


책을 읽고 보니 이윤기가 <장미의 이름> 번역을 어렵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냥 책의 내용을 이해할 만큼의 수준이 안되었던 것임을 알았다. 스스로 1.5세대 번역가임을 자처했던 이윤기는 장미의 이름을 번역하기 위해서 철학 전공자가 아님에도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학, 철학과 무수한 철학의 개념을 일일이 찾았다. 또 그는 애초 원문인 이탈리아어가 아닌 영문판으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놓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오독과 오역은 필수불가결하게 따라왔기에 2000년대 들어 그의 오독과 오역이 지적을 당하자 두말 않고 지적을 흡수하고 수정하여 더 나은 품질의 번역으로 다시 책을 출간하였다. 번역은 소설 창작을 두 번을 동시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장미의 이름>이 어려웠던 건 그의 번역이 부실함이 아니라 내가 중세의 종교와 철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윤기도 처음에 그러했던 것처럼.


소설가이자 번역가였던 이윤기가 살아있을 때 썼던 글들을 모아 만든 책이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이다. 부제는 '땀과 자유로 범벅이 되게 써라!'. <그리스인 조르바>를 번역했던 이윤기는 '조르바'와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던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작품과 작가라고 칭송하였다. 카잔차키스가 묻힌 크레타 섬에 두 번이 찾아가서 그의 무덤에 묵념할 정도로 좋아하였다. 그랬던 그가 '조르바'를 사랑하고 '조르바'와 카잔차키스가 숭배해 마지않았던 "자유"를 찬양하고 애정했다는 것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다.


이 책은 글쓰기와 번역하기에 대해서 이윤기가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글과 말로 나누었던 느낌들을 가벼운 필치로 써 내려간 책이다. 메모장과 연필 없이 나도 가볍게 읽어내렸어갔지만 두 가지 지점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미국에 자리 잡은 뒤부터 번역 일을 줄였다. 내가 가장 힘써서 한 일은 '노는 일'이었다. 푹 놀았다. 노는 틈틈이 책 읽고, 영어 입말 배우고, 미국을 배웠다. 하지만 그것은 영어라는 특정 언어 배우기와 미국이라는 특정 국가 배우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에 새롭게 적응하는 방법 배우기였다. 나는 개인의 힘은 자기를 바꾸어보려는 의지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나는 바닥부터 박박 기었다.

(93쪽)

이윤기는 나이 마흔다섯에 한국에서 안정적인 직업 잘나가는 번역가라는 신분을 걷어차고 스스로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뛰어들어갔다. "그는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싶었다"라고 했다. 잘나가는 번역가로 남아있어도 되지만 그에게 글쓰기이라는 동반자를 있게 해준 소설과 소설 쓰기가 아직 내지 못한 숙제처럼 계속 뇌리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는 밀린 숙제를 내기 위해서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낯선 곳에서 아침'을 맞았다. 모두 다 그처럼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어쨌든 익숙한 것과 결별을 하여서 꿈꾸던 것을 이루었다. 밀린 숙제를 마침내 다 해서 제출한 것이다. 그렇게 낸 밀린 숙제는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 동인문학상이라는 큰 상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는 말했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흐르려면 바닥을 기어야 한다. 사람 또한 그렇다. 사람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94족)

나는 흐르는 물일까, 고여있는 물일까. 나는 바닥을 기고 있는 걸까, 아직 바닥에 도달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바닥을 무사히 지나온 것일까. 

- 나는 이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숱한 외국의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이윤기는 어쩔 수 없이 우리말을 공부하고 우리말 어법에 맞게 쓰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런 그가 글을 읽거나 말을 들을 때 못 견뎌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게 쓰는 말과 글이었다. 요즘 우리가 흔히 쓰거나 들을 수 있는 표현들, 책에서 가져온 예를 들어보자면

"보여지는 것으로는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은데요."

"오늘은 00팀이 우세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의 말을 빌면, 위 표현은 잘못되었다. "보이는 것으로는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은데요.", "오늘은 00팀이 우세한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우리는 영어를 공부하면서 국어에 영어식 표현을 갖다 쓰다 보니 영어의 사역어법을 우리말에도 많이 쓰고 있다. "~보여지는 것은" "~되어진 것은" "그것은 나로 하여금 ~하게 했다" 등이 그것인데 이것은 "~보이는 것은" "된 것은" "나는 ~을 했다"등으로 표현해야 맞는 것이라고 했다. 이 외에도 '~에 있어서"같은 일본식 표현도 아직까지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나도 꽤나 많이 "~하게 되다" "보여진다" 등의 글을 말이 쓰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할 때는 별로 그렇지 않은데 글을 쓸 때는 이런 어미의 표현을 더 많이 쓰고 있었다. 글자 수를 늘려보려는 꼼수가 버릇이 된 것일 수도 있겠고, 직접적으로 쓰는 위험을 줄이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겸손해 보이는 효과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고 난 후 이런 내가 글을 이런 어미로 마무리하는지 어떤지를 한 번 더 검토하곤 한다. (방금도 검토하게 되었다. 라고 썼다가 고쳤다. 이게 정확히 문법적으로 잘못된 건지 아닌지 다시 한번 알아보아야겠다.)


글을 많이 쓰고 싶고 잘 쓰고 싶어서 '글쓰기'에 관련한 책을 종종 읽는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주제 정하기, 소재 고르기, 비유, 묘사 등 글 쓰는 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작가가 평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갖고 있던 생각을 가벼운 수필로 쓴 책이다. 하지만 나는 마냥 가볍게 느껴지진 않았다. 나는 여전히 조르바가 어렵고 춤추는 것은 더더욱 못하기 때문에 조르바를 춤추게 하기는커녕 춤 못 춘다고 조르바에게 역정이나 듣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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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경험의 재해석도 삼가려고 하지요. 그 까닭은, 경험할 때의 세게 인식과 재해석할 때의 세계 인식은 그 층위가 다르게 마련인데, 이 양자를 화해시키는 과정에서 무리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열다섯 살 소년의 경험 해석에 쉰 살 먹은 사내의 인식이 개입하는 사태가 종종 벌어지는데, 이래가지고는 열다섯 살배기의 종잡을 수 없이 혼란스럽고 그래서 대책 없이 강력한 에너지의 형상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 P48

경험의 재해석으로부터 탈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상상력이라는 날개가 있기는 합니다만 일상의 중력에 길들고 타성에 물든 이 상상력이라는 날개는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는 데 너무나 무력하지요. 중력권 바깥은 어둠의 벽입니다. 상상력은 어둠의 벽 앞에서 번번히 격퇴당하고 말지요. 중력권을 탈출하자면 막강한 추진력 혹은 파괴적인 돌파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 P49

나는 숨은 그림과 나 사이에 거대한 어둠의 벽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어둠의 벽입니다. 벽의 어둠입니다. 나는, 작가느 ㄴ숨은 그림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을 숨기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진 겁니다. 작가란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가 아닐까 싶어진 겁니다. - P55

미국의 대학에서 나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또 그 책이었다. 내가 몸 붙인 대학의 도서관에서는, <신화 이미지>같은 책이 길이 50미터쯤 되는 서가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저 많은 책을 다 읽을 것인가? 나의 책을 쓸 것인가? 학문을 할 것인가? 소설 쓰기로 돌아설 것인가? - P61

친구는 ‘유단자‘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은 유단자였다. 문학에 대한 친구의 이해는 실로 깊고도 넓었다. 나는 친구야말로 고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굴에 모닥불이 묻은 듯했다. - P67

나는, 사람의 삶은 나남의 삶에 간섭하면서 끊임없이 그 삶을 변화시켜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남의 삶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나는 가정합니다.
첫 번째는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형,transformation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두 번째는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은 화학적, 연금술적 변화의 단계입니다. 나는 이것을 ‘변성,transmutation‘이라고 불러보기로 합니다. 세 번째는 포도주가 그것을 마신 사람 안에서 성체가 되기도 하고 술주정이 되기도 할 때 일어나는 제3의 초물질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역,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 P69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나비가 바다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그 수심을 모르기 때문‘일지도모른다. 새는 제 몸무게를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하늘을 더 잘 나는지도 모른다. - P73

겨울이 오고 있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겨울은 매우 혹독한 계절이다. 풀은 말라야 하고 나무는 자라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계절이다. 새들은 배를 곯아야 하고 산짐승은 먹을 것이 없어서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 계절이다. 하지만 봄이 오거든 보라. 자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살아난다.
겨울이 오고 있는데도 나는 화분 중 몇 개는 집 안으로 들여놓지 않고 있다. 겨울을 경험하지 않으면 다음 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식물도 있다. 대부분의 알뿌리 식물은 겨울을 경험해야 다음 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래서 식물원은 매장으로 나갈 알뿌리를 냉장고에다 보관하는 것이다. - P89

나는 개인의 힘은 자기를 바꾸어보려는 의지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 P93

나는 아들딸을 외국에서 공부시킨 것을 두고 ‘트란스플란테이션(옮겨심기)‘이라는 말 쓰기를 좋아한다. 풀이나 나무에게 이식당한다는 것은 아픔이다. 하지만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는 성숙해질 수 없다. 외국에 대한 적응, 우리 가족이 장착한 ‘베이식‘, 변화에 대한 대응, 우리 가족이 장착한 ‘풀 옵션‘이다. ‘미국‘대신 다른 나라 이름을 써도 좋다.
나는 외국을 향해 3,40대의 등 떠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흐르려면 바닥을 기어야 한다. 사람 또한 그렇다. 사람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 P94

나에게 크레타는 온통 카잔차키스, 그리고 조르바였다. 쪽빛 바다 위에 웅크린 섬 크레타는 거대한 거북의 등짝 같았다. 나는 왕을 알현하러 들어가는 변방의 병사가 된 느낌으로 크레타로 들어갔다. - P146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것이 ‘메토이소노‘다. 물리적.화확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 ‘거룩하게 되기‘가 바로 이것이다.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이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 P155

"저렇게들 심고자 하는데, 너는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느냐?" - P164

"연극과 영화의 원자재 공급? 결국은 문학이 맡아야 하는 소임입니다. 앞으로 꽃필 영상 문화는 결국 문학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 P183

사람들은 왜 어려운 말을 즐겨 쓰는가? 자기네들끼리만 아는 말을 씀으로써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난처하게 하는가? 말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포기하기 싫은, 달콤한 권력에의 유혹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 P276

문제는 소통이다. 반평생 영어만 끼고 살아온 내가, TV토론자들이 쓰는 영어 앞에서 쩔쩔매는 것은 여전히 영어에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치자. 반평생 글만 써온 내가 군청에만 가면 쩔쩔매는 것도 한국어에 무식해서 그런 것인가?
글 부리고 말 부릴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묻는다.
소통을 우너하는가, 과시를 원하는가? - P277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지요, 라는 질문을 나는 자주 받는다. 내가 글을 잘 써서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 것이 아니고, 글 쓰는 일을 아주 직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면 초단은 되어요, 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아 초보자의 입단은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되풀이해서 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만 하면 초단은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여느 살마들은 하지 못하는가? 유식해 보이고 싶어서 폼 나는 어휘를 고르고,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제 생각을 비틀다 제 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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