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임용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라"

 

우리는 요즘 역사에 무임승차하고 있는지 다시 새겨봐야할 것 같다.

그와 같은 고민은 시대를 막론하고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했음직하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인생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을 하고 있는가?!

내 것은 옳고 남의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조선 시대 고리타분한 지식 계층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 이가 있다.

바로 박제가.

 

역사 책에서는 아주 간단한 몇 줄로 요약되어 지나가 버리는 박제가.

하지만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만의 인생이 들어있었다.

시대를 거스르고 조선을 변혁시켜야한다는 외침을 한 선각자 박제가.

어쩌면 우리 시대에도 많은 박제가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잘 파악하는 것은 일반인인 우리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국민이 나라의 운명과 따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미로 다가가면 평범한 우리들도 역사와 국제 정세에 밝아야할 것 같다.

 

남들이 차려놓은 밥상에만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지 말자.

내가 남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보는 게 어떨까?!

쉽고 간단한 일들만 찾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기 전에 나와 남이 동시에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한다.

박제가와 그의 친구들이 몇 백년 전 하려고 했던 일도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나만 잘사는 것이 아닌, 일반 백성들과 모두 잘살게 되는 길.. 조선이 부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길에 대한 고민이 여기저기 녹아있다.

 

과거 조선을 개혁하고 부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박제가와 정조대왕의 이야기, 다른 동지들의 이야기 들이 흥미진진하게 쓰여있는 이 책은 요즘 읽기에 딱 좋은 것 같다.

오랜만에 역사서의 매력에 다시 한번 빠져버린 오늘이다.

 

“언제까지 우리 것만 좋다고 주장할 것인가?”
조선의 현실 타파를 외친 박제가의 삶과 사상을 만난다!

▶ 왜 아직도 박제가의 외침은 유효한가?
시대를 거스르고 싶었던 한 선각자의 일생을 읽는다!


17~18세기 조선은 극빈한 상황에 처한 나라를 부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변혁은 커녕 기존의 체제만을 고집한 채 이를 거부한 사회적 풍조는 결국 조선사회를 낙후시켰고, 근현대사의 비극마저 초래했다. 지금도 매년 국가 경쟁력 순위가 발표되거나 국제 정세에 따라 경제 위기를 느낄 때마다 늘 불안정한 한국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하지만 집단의식에 갇힌 채 변화에 따른 손해가 두려운 기득권 세력을 과감히 해체하거나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움직임은 둔하다.
저자 임용한은 전작들을 통해 우리 역사 속 인물들을 재조명하고, 그들이 살다간 삶의 흔적 속에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역동성을 발견하는 데 전념해왔다. 이번 책에서는 조선 후기 이용후생 실학자 가운데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온 박제가의 삶에 주목했다. 우리는《북학의》를 통해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우리 것을 버려야 한다는 ‘중상주의’ 개혁을 외친 박제가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왜 이렇게까지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게 되었는지 그 근원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는 없었다. 정계 진출의 야망보다 모든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나라를 고민하고 꿈꿨던 박제가. 비록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하고 통찰했던 그의 외침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 일세의 천재, 부당한 사회에 한을 품다!
박제가, 꽉 막힌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고뇌하다


이 책의 제1부, 제3부, 제4부에서는 박제가의 성장과 청년시절, 관료생활 등 그의 사적인 모습과 조선 후기 생활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박제가는 어릴 때부터 책과 글을 가까이하면서 이미 탁월한 통찰력과 판단력, 방대한 학식과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났다. 하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차별과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주류 사회에서 따돌림과 무시를 당했다. 그는 허울만 가득한 조선의 양반, 학자, 선비, 지식인 등 편협하고 답답한 집단을 비웃었지만, 거대한 힘을 가진 기득권 세력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점차 그 벽에 부딪히며 삶의 희망보다는 절망과 고통을 먼저 맛봐야 했던 한 천재는 뜻을 펴볼 기회를 잃은 채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편 ‘백탑파’로 불리는 박제가의 친구들과 그들의 궁핍했던 삶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당시 한양 도성의 종로 일대에는 학식을 갖춘 선비들이 모여 살았는데, 박제가 또한 이곳에 거주했다. 그러면서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백동수, 박지원 등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가난한 살림에도 좌절하지 않고 시와 학문을 교류하고, 술과 수다를 즐기며 서로 위안을 얻었다.

남다른 박제가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를 특별히 돌봐준 사람들도 있었다. 먼저 장인 이관상은 모범적인 관료이자 인자한 인생 스승으로서 사위 박제가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피면서도, 그의 성격적 결함을 감싸주었다. 또한 서얼차별법을 철폐한 정조는 과거시험 에서 형식을 무시하고 파격적인 답안을 제출한 박제가를 관직에 등용했으며, 그에게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청나라 북경을 연행했을 때 만난 이조원, 반정균 등 청나라의 학자들도 박제가의 학문을 높이 사면서 그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홍대용, 정약용 등 동시대에 활약한 실학자들과의 교류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규장각의 검서관이 되어 오랫동안 일하면서도 그는 좀더 높은 관직에 올라 개혁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결국 적극적으로 정책에 관여할 수 없는 부여현감 자리밖에 얻지 못했다. “평생토록 혜업을 끊어내지 못한다” “태어나 밥 먹은 지 오십 해가 지났는데/ 세상은 모래 같아 달여도 떨떠름해”라고 한탄하는 그의 시를 통해, 이상을 펼치기보다는 봉급에 의지해 살아야만 하는 현실적인 고뇌가 더 컸음을 엿볼 수 있다. 국왕의 측근으로 일하면 분명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았을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정조의 죽음 이후 난세에 휘말려 유배 생활로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 가난을 끊어내지 못했던 그는 이렇다 할 저작마저 후대에 남길 수조차 없었다.

▶ 바꾸고, 버리고, 개혁하라!
조선사회를 바꿀 수 있었던 마지막 해결책 《북학의》


청나라 북경 연행을 다녀온 경험은 박제가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특히 상공업과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그는 연행 이후 《북학의》를 통해 성벽, 도로, 목축을 비롯한 39가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개혁방안과 중상주의론을 꼼꼼하게 적어나갔다. 이 책의 제2부에서는 《북학의》를 중심으로, 박제가가 통찰한 조선사회의 한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 배는 엉성하고 낮다. 적재한 화물이 썩으니 중국의 선박제조술을 배워야 한다” “나라에서 관청을 설치해서 장 만드는 것을 감독하고 편리한 기구를 사용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군에서 사용하는 큰 수레는 너무 투박하여 빈 수레를 운행해도 소가 지친다” 등 중국의 문물과 조선의 문물을 비교한 그의 저술에서 조금은 충격적인 우리 전통의 허점을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박제가 사상의 핵심은 “외국을 배워야 한다”가 아니라 외국 문화에서 배울 것을 찾고, 나를 변화시키는 통찰과 분석의 태도와 방법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박제가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문화, 우리 것에 대한 습관적인 태도, 맹목적 자부심에 비판을 가하는데, 21세기 한국사회도 여전히 감상적인 국수주의와 자기기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비판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사회 상류층도 끼니를 건너뛰기 일쑤고, 선비들은 종이가 없어 책을 쓰지 못하며, 소 한 마리 갖지 못한 농부가 태반인 나라 형편에도 조선은 비효율적인 농본정책과 극단적인 국수주의를 선택했다. 16세기 서양의 농업사회를 비판한 버나드 맨더빌이 말한 것처럼 ‘소비와 욕망을 없앤’ 비극적인 사회였다. 검약은 무조건 이로울까? 박제가는 이에 대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는 “소비가 생산을 촉진한다”는 케인스보다 200년 더 앞선 깨달음이었다.

▶ 박제가의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사회적 부조리를 없애야 할 때


세상은커녕 주변사람들조차 설득하지 못하고, 꽉 막힌 사회를 고수하려는 분위기를 체감하며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박제가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 고루함이 조선의 미래에 재앙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면 그의 고통은 더욱 커졌을지도 모른다.
지금 한국 사회는 단 몇십 년 만에 완전한 산업사회와 무역국가로 변신하고도 여전히 그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리지어 비웃고, 또 덩달아 이를 업신여긴다. 좁은 소견으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엿보고, 틀에 박힌 안목으로 끝없는 변화를 논하곤 한다.” 박제가의 한탄처럼 그가 겪었던 사회적 부조리는 똑같이 현재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변화의 싹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며 치열하게 살다간 그를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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