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론강
이인휘 지음 / 목선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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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적들을 읽었을 때, 작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이인휘. 하지만 이내 잊었다. 

늘 그렇듯 작가의 이름은 작품의 잔상과 여운, 야박하게 남는 의미들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 파란 표지의 폐허를 보다를 읽었다. 그 때 이런 감상을 적었었다.

< 누가 그랬다. 더이상 '노동문학은 없다. 문학노동만이 남았다'라고 말이다. 현장으로 들어간 작가보다 작가의 책상으로 올라간 노동이 더 많았다. 현실이 아닌 환상, 꿈, 막연함. 이런 것들이 담아내는 노동의 의미는 뒷맛이 썼다. 어쨌든 가검을 들고 설치는 사람들 사이에 제대로 벼린 날 선 진검을 든 검객이 나타났다> 라고.

그리고 작가의 이름을 살폈다. 이인휘. 

작가의 이름을 검색했지만 당시 세간에서는 어떤 연예인의 부인이었던 이인휘라는 사람의 프로필이 뜨고 그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김남주를 검색했더니 연예인과 화장품 목록이 좌르륵 떴던..

작가는 내 생의 적들 이후 오랜만에(내 생각일 뿐이지만..)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 후로 착실하게(?) 작품이 나왔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건너간다. 우리의 여름을 기억해 줘 . 그리고 부론강. 

폐허를 보다와 노동자의 이름으로 건너간다를 나는 노동3부작이라고 칭한다.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을 샅샅이 파헤치며 적어낸 글은 때론 당혹스러우리만치 솔직했다.

2016년 폐허를 보다 부터 2020년 현재까지 다섯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자본과 싸우는 처절함. 나의 청년기와 맞물리는 투쟁의 역사는 생각보다 생생하게 파고들었다. 작중 인물이 아니라 내가 아는 선배, 후배, 전해들었던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생생했다. 조금씩 타협해가는 지도부들의 이야기, 동지들을 두고 뒤돌아서야 했던 사람의 심정, 그러나 끝내 놓을 수 없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요구는 너무나 아팠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둘째치고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전제되야 사람답게 살아내려는 의지와 요구가 나올테니 말이다. 자본의 세계에서 사람으로 산다는 건 그저 소모품으로 산다는 것은 아닐까. 소모품이 아닌 주체로 살아내려는 의지는 언제쯤 강건하게 나를 뚫고 나올까를 수없이 되묻는다.

책 세 권을 읽고 나는 많이 물었다. 내 삶을 관통하는 '정의'는, '노동'의 가치는 '사람'의 의미는 얼마나 단단한가하고 말이다.


그 후 만난 우리의 여름을 기억해줘.는 사실 의외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인휘는 노동자의 이야기만 쓸 것 같아서..

산하와 정서의 이야기는 표지만큼 푸르렀다. 환경의 문제와 자본들이 자연을 어떻게 잠식해들어오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발랄(?)하게 써내려갔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이 험한 길을 기꺼이 디뎌온 사람들의 상처를 하나씩 짚어갔던 이야기라면 우리의 여름을 기억해줘는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에 대한, 아니 어떻게해야 상처를 줄일까에 대한 고민이보였다. 단지 노동의 문제뿐 아니라 각계층별 지역별로 연대하고 함께 지켜내야 할 가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출간된 작가 이인휘의 부론강.

두 남녀가 마주한 표지가 낯설지만 궁금했다. 부론에 산다는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찬미와 원우를 중심으로 부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상처를 지닌, 그것이 사람에 대한 상처이건 시대의 상처이건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이들이 서로의 삶에 스며드는 이야기다.

남녀의 사랑이야기라고 읽을 수도 있고, 그들이 건너 온 시대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읽을 수도 있다. 박상화 시인의 시집 '동태'를 비롯해 사이사이에 적힌 시들과 재주 많은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들이 강물에 뛰어든 달빛처럼 일렁거리는 것이 나름 이쁘다.

386이라고 불렸었고, 486이라고 칭해지다 586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살아 온 시간들과 많이 겹친다.

주변에서 원우처럼 찬미처럼 차라리 떠나거나 차라리 숨어버리는 사람들을 적잖이 보았고 그들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끌어않은 채 평생을 자책과 회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종종 보았다. 

유명짜한 지도부(?)는 아니었지만 현장에서 진심으로 연대하고 용맹하게 싸우고 헌신적으로 투신했던 사람들이 실망하고 때론 내쳐지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386이 어쨌고 저쨌다며 욕을 할 때는 마치 자신이 잘못인양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들이붓는 이들도 많았다. 누가 저들을 욕할것인가. 

어디에서도 속시원하게 터놓지 못할 이야기들, 어디에도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들, 어떻게 해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들..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들어주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되돌아가고 싶은 곳이 생기고 그냥 아픈대로 내버려두겠다던 상처가 나아가고 다른 사람의 상처가 보이고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 살아가는 이야기가 '부론강'이다.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사람 인(人)자는 서로에게 기대어 완성되는 글자라고 했다. 이제야 저들은 '사람으로 사는 법'을 깨우친 것일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기술되는 부론의 사적들과 문화재, 나무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우리 동네를 잘 아나? 라고 혼자 생각하고 웃었다. 뭐 별로 아는게 없다. 있다고 해도 검색해서 나오는 결과 이상의 것은 아니다. 작가를 통해 듣는 부론의 풍경은 단아하고 묵직하다. '부론'이라는 지명마저 생소한 사람조차도 한 번 가볼까? 싶게 만든다. 

부론강은 작가의 이전 저적들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힘이 빠졌다기보다 눈이 깊어졌다는 표현이 맞을것 같다. 


'강물은 빗방울 하나하나의 여정을 개의치 않고 무심하게 흘러갔다. 인간의 생이 빗방울 같았다. 한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자신의 생이 떠밀려 온 것처럼 강물은 하나의 빗방울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흘러가는지 관심조차 없었다.(p150)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강물도 알고 있을거다. 그 거대한 흐름을 만든 건 빗방울이었다는 걸..

빗방울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하고 싶게 만드는 소설. 부론강이다. 


내게는 파란만장했던 2020년.

부론강을 읽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도닥여주는 듬직한 손길을 만난것 같다.

조심성 없이 강물에 떨어진 잎새처럼 일렁이며 떠내려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꼭 부론강이 아니어도.


사람들 사이엔 날마다 깊어지는 강이 흐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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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궤적
리베카 로언호스 지음, 황소연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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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을 무렵 라디오에서 바그다드 카페의 ost 인 calling you 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책을 읽고 난 후의 매캐한 바람의 냄새와 서걱이는 모래가 입 속을 구르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욕심이 독점을 낳고 재앙을 불러온 후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 출몰하는 괴물과 괴물사냥꾼으로 자란 여자와 여자의 주변인물들이 관계를 맺고 풀어나가는 이야기라고 하면 좋을까? 인디언들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그들의 정신세계, 그들의 뿌리가 되어주며 때론 해결의 지혜가 되기도 하는 인디언 신화들이 구석구석 포진된 이야기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영화나 이야기들을 접했던 탓일까? 이야기는 인디언이라는 정체성을 이야기하지만 자꾸 매드맥스나 그와 비슷했던 대재앙 이후 인간의 삶과 그것을 극복해가는 영웅들의 이야기들과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뒷부분에 나오는 모지의 이미지에서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하트여왕이 그려지기도 했다.

나는 어쩌면 더 독특한 이야기나 흐름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특별한 태생과 성장배경때문인지 ( 아메리카 원주민 어머니와 아프리카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이후 백인 가정에 입양되어 자랐다는) 이질감 없이 서술되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디테일이 살아있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건 이런걸까? 싶은 생생한 묘사는 화약냄새와 피비린내를 이내 불러왔고 생고기를 씹는, 정확히는 사람의 팔뚝이나 목을 물어뜯는다는 건 이런 질감일까? 싶은 감각의 자극을 이어간다.

새로 시작한 일들로 집중력은 수시로 흩어짐에도 불구하고 책 한권을 붙들고 후루룩 읽어낼 수 있었다는 건 흔히 이야기하는 가독성이 좋다.라는 반증일 것이다.

섬세한 묘사와 개연성이 납득되는 만남과 복선은 영리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2. 누구를 믿을 것인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면, 아니 믿게 된다면 그만큼 위험한 도박은 없을 것이다. 매기가 카이를 믿기 시작하는 순간, 위험은 한 발 더 다가와 있게 된것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랑 혹은 우정이라 불리우는 것을 믿기 시작하는 것은 큰 용기다.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 믿고 싶어지는 누군가. 의심이 되기도 하지만 믿고 싶다는 갈망이 생기게 되는 건 지쳤다는 의미이다. 클랜 파워가 저주인지 축복인지 알 수 없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선 차라리 불행속에 주저앉고 싶어지기도 한다는 데 공감이 되기도 했다. 읽는 내내 매기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녀의 선택은 그녀의 몫일 뿐이지만..

불사신인 네이즈가니. 그녀의 사랑이자 증오의 대상. 내내 그가 궁금했다.

서사로는 선뜻 그려지지 않는 그. 잘 읽어내지 못한 탓인지 나는 아직도 네이즈가니를 잘 모르겠다.

 

3. 선과 악의 구분은..

주술사에 의해 재창조된 괴물들이 살아남은 인간들을 공격하고 그 괴물을 처단하는 역할을 하는 괴물사냥꾼 네이즈가니와 매기. 괴물을 사냥하며 극도의 잔혹함을 보이지만 그것이 정말 악을 응징하는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슬러 올라가 그 악의 발생의 빌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면 그 악의 근원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또 소위 응징이라고 하는 것에 사사로운 적개심이 보태지지는 않는가에 대한 의문. 괴물을 사냥하면서 점점 복잡해지는 심리는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의심은 아닐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렇다면 상대적이라는 건 과연 용인될 수 있는 적절한 변명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선과 악을 구분짓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그 판단을 하게 된 주체는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아니 그 판단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4. 호불호가 충분히 갈릴

그런 이야기다. 잘 읽힌다는 건 휘발되기 쉽다는 소리이기도 하다(내 경우엔) 속도감과 감각에 이끌려 읽게 되는 글은 어느 순간 꿈처럼 묘연해지곤 한다.

더 많은 인디언 신화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을까? 라는 아쉬움. 신화를 좋아하는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야만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다른 것들에 대한 소모(희생)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라고 했던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네이즈가니의 표식인 천둥검에 찔린 상처를 갖게 된 매기.

천둥의 궤적이라는 제목은 네이즈가니로부터 촉발된 이야기가 그가 남긴 상처로 마무리 되는 까닭이었을까?

객관적으로 재미있는 책이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밀려들 공간이 많다.

큰 물과 같은 재앙은 아니지만 세계적인 재앙이 창궐하고 있는 때, 잠깐이라도 살아있다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다.

클랜 파워가 용솟음치며 나이프를 손에 쥐고 화살처럼 괴물의 숨통을 끊어내는 간접경험을 즐기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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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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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이형을 처음 읽은 건 2014년 이었다. 쿤의 여행. 글을 읽으며 내내 흥분했다. 같은 단어를 다르게 조합하고 있다는 느낌.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촘촘하게 의미를 박아넣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기회가 될 때마다 윤이형의 작품을 읽었다.

우퍼스피커 같은 작가라고 나는 평가했다. 묵직하게 소리만 울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듣는 존재까지 공명하게 하는 힘이 있는 작가라고..차이라면 우웅~울림 뒤에 오는 날카로움일거다.

이 책을 읽어야지 하고 꺼낸 날. 이상문학상에 관련된 이야기가 세간에 회자되고 급기야 작가의 절필선언(?)을 듣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는 마지막 작품인셈인가?

오늘, 문학사상사측에서 올린 사과문을 읽었다.

다만 문학사상사의 문제일까? 라고 의문을 품다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 의문은 늘 뒷맛이 썼다.

어쨌든 붕대감기를 읽었다. 작가가 세영이처럼 한바퀴 더 돌리는 바람에 '악'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심한 압박감을 받으면서..

그러나 뿌리치진 못했다.

 

2. 헤어디자이너 해미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기가막힌다고 밖에 설명할 방도가 없다.

율아와 서균이, 두 꼬맹이를 빼고, 성추행 가해자인 천을 빼고 모두 열세명의 이야기가 레고조각처럼 맞물리며 쌓여간다,

책을 덮으며 아라크네를 생각했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신들을 그려낸 아테나와 붙어서(?)도 조금도 꿀리지 않았던 아라크네. 그녀의 천 위에 그려진 인간의 세밀한 삶의 모습은 신들의 권능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거미가 되고 말았지만 그 패기.

속속들이 파헤쳐 들어간 이야기와 이야기 속 사람들을 이렇게 펼쳐놓다니..근래들어 읽은 책 중에 가장 진솔하고 가장 영민하며 가장 치밀하다고 생각했다. 아라크네는 거미줄을 내려왔지만 결국 다시 거미줄을 짜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3.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뻔한 이야기라서 소름돋게 이해가 되고 저절로 그려지는 단점(?)이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대상화되지 않는다. 나는 진경이며 세연이고 지현이며 바람이고 해미면서 윤슬이거나 명옥과 효령같은 사람인 것이다. 어떤식으로든 교집합이 성립되는 이야기 속에서 투영되는 '나'를 보게 만드는 글의 힘이 대단했다.

단언컨대 이 이야기는 줄거리라고 장황하게 적어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빼도 안되니말이다. 물론 진경과 세연을 중심으로 큰 조각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4. 아군도 적군도 모호해지는 페미니즘, 혹은 여성운동의 허와 실을 담담하게 써내려간 부분이 좋았다. 전선이 수시로 바뀌고 신념과 아집사이를 넘나드는 그 위태로운 발걸음이 미덥지 못하다기보다 단단히 연대해 주어야 할 이유가 되어준다.

사람으로 시작해서 우정을 매개로 그려내는 상처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몸짓, 그리고 서로에게 어깨를 대어주고 연습으로라도 서로의 상처에 붕대를 감아 줄 친구가 되어주는 것의 의미를 본다.

그러고보니..나도 세연이 같은 친구가 있었네.

 

5. 책장을 덮으며 전화번호를 뒤적여본다.

문득..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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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어디 있나요
하명희 지음 / 북치는소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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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덟개의 작품들이 눈 내린 아침 담장 위에 쪼르르 앉은 눈사람들처럼 모여 있다.

소설집이라고는 하지만 작품의 갯수가 '?' 싶을만큼 적지 않다.

 

문학평론가 김명인님은 추천사를 통해 '하명희의 소설들은 따뜻하다'라고 했다. 세상을 따뜻하게만 보려는 사실상 방관하는 온정주의와는 거리가 먼 확실한 방향성을 가진 따뜻함이라고 한다.

보통은 추천사나 해설을 잘 읽지 않는다. 책을 읽기 전에는 선입견이나 과한 기대를 품게 만들기도 해서..다 읽고 나서는 내가 읽은 것과 엄청난 괴리를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어느 해 겨울을 강타했던 유행어 '내가 이러려구 책을 읽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 대한 추천사에는 동의한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아마 그 즈음일거다. 엄마는 지금으로 치면 공방처럼 뜨개질한 옷과 소품들을 수출하는 일을 하셨다. 아침을 먹고 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실과 도안이 넘쳐나는 작업장에 앉아 하루 종일 자신이 맡은 부분을 뜨기 시작했다. 소맷단만 뜨는 사람, 오른쪽 소매, 왼쪽 소매, 앞판, 뒷판, 제일 늦게 출근해서 제일 늦게 퇴근하는 시아게 아줌마까지. 커다랗게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바늘과 바늘을 따라 나서는 색색의 실들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시아게 아줌마가 두툼하게 썰어놓은 생선살 같은 작업물을 모아 하나씩 이어붙이면 가디건도 되고, 스웨터도 되고, 조끼며 망토가 되었다. 마지막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확인되는 정체들.

책을 읽으며 열 여덟 개의 조각들이 만들어 가는 고요의 정체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림자의 이야기. 어쩌면 너무 꾹꾹 눌러놓은 탓에 저도 모르게 흘러버린 이야기들일지도 몰랐다. 엄마한테 잔뜩 혼이 난 원두(반려묘)가 의기소침하게 앉아있는 그림자. 그 그림자는 원두의 설움과 서운함과는 관계없는 배트맨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용감한 정의의 용사(?)

이야기는 바로 거기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되는 건 아닐까? 서러운 현실과 그림자 속 정의. 그 간극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이야기.

고요는 어디있나요? 헐겁게 대답하자면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스치듯 지나가버렸던 시간과 길과 사람들 사이에 오도카니 앉아있었을 고요. 너무나 고요해서 눈치채지 못했던 고요.

하명희의 글은 내가 지나왔던 길모퉁이 어디쯤에서 서성이던 고요를 깨닫게 한다.

..거기 있었구나. 거기 있었겠구나.

 

천천히, 어느 가을 날 길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뭇가지에 노란 리본을 묶어가며 걷듯 읽었다.

기억할께요’ ‘기다릴께요’ ‘죽지 않을께요혼잣말을 보태며 읽었다.

 

소란하고 소란한 세상의 틈에 오도카니 박혔던 고요를 만나는 일. 사람의 눈과 그림자의 이야기를 만나는 일. 하명희의 글은 그런 일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돌아오는 일.

세상에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일. 고요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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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고독
강형 지음 / 난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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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지날 무렵. 습관적 우울과 절망에 잠식 당하던 시절. 살아있다는 것이 못견디게 힘겨울 때면 벽제 화장터에 갔었다. 무작정..시외버스를 타고 가기도 했고, 기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벽제가 가까워지면 늘 해가 기울기 시작했고 한껏 타올랐던 연기들이 습습 내려앉곤 했다. 무언가 타는 냄새. 어쩌면 떠나는 사람이 지상에 남기는 마지막 흔적일 냄새를 들이마시곤 했다. 그저 나무가 타는 것과는 다른 냄새. 나는 그 냄새를 '미련의 냄새'라고 불렀다. 낮고 천천히 '잘가요'라고 인사도 했다. 그러고 나면 땅에 잘 붙어있는 내 발바닥이 대견했고 아직은 미련의 냄새를 남길만큼 삶에 남은 미련이 없다는 것이 억울해서 오기가 생겼다. 더 살아볼께. 이상한 다짐을 하게 되고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은 아주 늦은 밤이었다.  이 기괴한(?) 습관을 알게 된 친구들은 나와 거리를 더 두거나 호기심으로 더 가까워지곤 했다.

어쩌면 철 없던 내가 원한 것은 '고독'이었을지도 몰랐다.

 

조금 더 자라서 여행에 대한 로망을 품던 때, 유적을 찾아서, 먹거리를 찾아서, 패션을 찾아서..등등의 주제들 속에 '묘지를 찾아서' 라면 꼭 떠나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었다.

유명인이 묻힌 묘지들을 가끔 TV에서 보았지만 그런 근사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 아닌 황량하고 인적 드문 그런 곳을 찾아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술이 잔뜩 취했던 날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흙투성이가 된 채 망우리 공동묘지 근처에서 눈을 뜬 일이 있었던 것을 친구들은 아직도 이야기한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할 때마다 뭔가 조금씩 덧붙여져 이제는 거의 설화처럼 들릴 지경이지만..그 끝에 '얘가 아주 고독한 애였어 그치?'라고 붙여주는 건 여전했다.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딱 두가지였다.

작가도 출판사도 아니고 '고독'이라는 제목과 '묘지'라는 공간.

묘지관라인 피터와 묘지의 유령들의 이야기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다. 작은 소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시간에 끼어든 유령의 이야기일수도 있고 유령의 시간에 발 들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살이있음과 이미 죽었음의 경계를 걷는 피터를 찾아 온 한 형사와 나눈 일주일간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힘이 제법이라고 느낀 것은 책을 다 읽어갈 무렵이었다. 음성지원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하는 그런 경험. 늙은 피터의 음성으로 읽히는 책. 두껍지 않은 책을 빨리 읽지 못했던 건 그런 이유였다. 재미가 없어서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라 피터의 진술(?) 속도에 맞춰 읽어지는 것. 하루에서 다른 하루로 넘어갈 무렵엔 긴 한숨을 쉬게 되고 커피를, 물을 한 잔 마시게 되는 묘한 상황.

살아있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피터는 정말 고독했을까? 유령들과 이야기하며 피터는 고독하지 않았을까?

 

수정구슬에 갇힌 한나의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태자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린 아이를 유괴해 굶기고 굶기다가 작은 통에 먹을 것을 넣어두고 아이를 유인하면 아이는 먹을 것에만 집중한다. 그것을 먹으려고 할 때 아이를 죽이면 아이는 자신이 죽는줄도 모르고 먹을 것에 대한 집착으로 통에 갇힌 귀신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한나가 수정구슬에 갇히게 되는 과정도 비슷하다. 왜 아이여야 하는가. 순수한 집착 순전한 기다림 순결한 죽음이기에 아이여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는 또 얼마나 잔인한가. 태자귀는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 갇혀버린 영혼이라는데 한나 역시 다르지 않다. 이런 잔인한 일을 벌인 리즈는 자신의 딸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려고 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집착.

집착을 놓으면 주박이 풀리고 자유로워질텐데 끝끝내 놓지 못하는건 욕심인건가? 본성인건가?

 

생각이 묘지의 묘비만큼 많아졌다. 산 사람의 발소리가 잦아든 시간에 시작되는 유령의 시간을 가늠해본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라고 한 폴 틸리히의 말을 빌어온다.

어쩌면..?

그렇다면..?

피터는 충분히 '고독'했으리라..

외롭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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