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의 책들 중, 유난히 아끼는 몇권의 책이다. 팔, 다리에 어떤 패티쉬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표지에서 주는 느낌이 좋다.

세계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나보코프의 롤리타. 그의 지성이 녹아든 글들을 처음 읽을 때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어째서 이게 무슨 의민지 모르겠지? 왜?..오기로 다시 읽고 다시 읽고 소리내어 읽으며 그의 장치들과 문장에 매료된다. 롤-리-타..발음을 하면서 윗니를 치는 혀끝에서 나보코프가 그토록 좋아하고 오래 연구했던 나비의 날갯짓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과대망상일까? 


 


 




또한 조엘 디케르의 장편에 나오는 노라와 해리 쿼버트의 이름 사이에서 롤리타와 험버트의 그림자를 보았다면..억측일까?










갤러웨이의 상승..저 위태로운 줄 위의 걸음을 어찌하면 좋을까.




 좀 더 멀리서 보는 좀 더 아슬한 줄타기..멀리서 볼 수록 위태로운건 줄타기뿐만은 아니겠지.











디어라이프와 눈송이의 손이 향하는 방향은 서로 반대다. 아래로 향한 채 편안한 표정의 디어라이프의 손의 방향과 하늘을 향한 눈송이의 손의 방향은 어쩐지 시리다.

두 손을 포개어 주고 싶어진다.


손과 다리로부터 시작된 오늘의 꿈은..이렇게 몇개의 표지들을 들추어내고 그 표지들을 들추었을 때 드러났던 속살같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 막막했던 기억과..먹먹했던 감상과..또한 애틋하고 명료했던 기억들을 말이다.

때때로..책의 표지는..내용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다. 내용과 상관없는 꿈을 꾸게도 한다.

늘 다른 내용을 꿈꾸게 한다. 


오늘은 몇권의 책을 펼쳐두고 징검다리 놀이를 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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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권력 -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
사토 요시유키 지음, 김상운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 1.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 내용이 어떤 악마적이거나 반인류적이며 비평등한 것인지는 정확히 인지되지 않으나, 어쩐지 그 어감만으로 무언가 억압과 굴레를 벗어내고 개개인이 주체가 되어 정치,사회,경제적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새로운 사조인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확한 개념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사고의 오류. 혹은 개념의 왜곡은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 이루어진다.

新자유주의. 그렇다면 자유주의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없을 수는 없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봉건적 공동체의 구속과 국가의 간섭을 배격하려고 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라고 사전적으로 정의된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봉건적 구속을 배격한다는 것이 얼핏 개개인이 주체화되고 스스로의 경제활동의 영역을 보장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어떤 경제적 기반도 갖지 못했던 기층민중들에게는 오히려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사회적, 국가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한다.

지금에 이르러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어떠한가. 이 역시 사회체를 경쟁 원리로 가득 채우고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해 가는(p10) 통치 기법에 다름아니다.

# 2. 신자유주의와 권력

작가는 이 책에서 목적으로 삼는 것은 신자유주의 권력에 대한 비판과 그 권력에 대한 저항 전략의 구축(p11)이라고 밝힌다.

1부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특성을 분명히 하고 그 비판을 시도한다.

-1장 :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일종의 국가에 의한 개입주의에 기초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개입은 경제 과정 자체에 대한 개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법적 제도적 틀에 대한 개입이라는 점. 그런 개입주의는 사회의 모든 국면을 경쟁으로 에워싸고 빈부 차이의 확대를 통한 사회 양극화를 야기한다. 이렇게 형성된 권력은 시장원리의 내면화를 통해 자기-경영의 주체를 형성하고 그 모델에 적응할 수 없는 개인들을 가차없이 사회 밖으로 내친다.

-2장 : 신자유주의 권력이란 사회체 모든 국면을 시장화하고 리스크를 관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환경에 개입함으로써 통치를 행하는 권력이라는 것.

-3장 : 신자유주의의 이면을 이루는 정치에서의 신보수주의적 경향, 즉 주권 권력의 강화에 대한 고찰

-4장 : 권력이란 자본의 흐름, 즉 경제이며 그것은 욕망의 배치를 형성함으로써 주체를 복종화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5장 : 소수자-되기 라는 개념속에서의 탐구. 사회적 배제가 주체화 복종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또한 이런 통치에 저항해야 할 저항전략의 구성.

보론에서는 복종화/주체화가 단 한번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권력 장치들이 항상 주체에게 계속해서 행사하는 반복적 과정임을 분명히하며 저항전략으로서 권력의 ‘이타화’와 ‘재기입’개념에 주목한다. 이것은 권력의 내면화와 사회적 배제라는 권력의 두가지 작동원리에 대한 저항 전략이다.

# 3. 경쟁의 시대, 자유는 과연 존재할 것인가.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자유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좀 더 틀을 제시하자면, 복종하지 않을 자유와 경쟁에서 이겨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자유를 내어준다면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또한 어떤 선택이 더 유의미한 선택일까를 생각해보자.

일제강점기와 해방의 시기, 그리고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봉건적 생산구조가 잔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맞게 되는 기형적 시장경제는 자본가와 노동계급사이에도 불평등한 관계, 기존의 계급관계를 떨쳐내지 못한 억압적 관계들이 유지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서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거나, 혹은 개인의 노력으로 사회적 신분상승을 이룬것을 “성공”사례로 일컬으며 시간은 왜곡된 경제관계를 숙성시켜왔다.

그 결과, 사회체 내부에서는 개인의 능력을 경쟁력으로 평가하기 시작했고, 부의 축적의 정도로 사회적인 성공을 판별하기 시작했고, 극단적인 사례로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자조적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한다.

그 어떤 경제기반도 갖지 못한 채 시작된 저소득층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또한 그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이익을 보게 되는 상황. 그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은 좀 더 구체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법적인 규제와 법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예를 들어, 나의 노동력을 100의 댓가로 제공하고 자본가는 나의 노동력을 정당하게 100만큼의 가치로 지불해주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그런 이상적인 계급간의 거래는 없었다. 임금이 필요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 혹은 주체화를 통해 경쟁을 하고 더 나은 경쟁조건을 노동력을 제공하는 측에서 제시해야한다. 더 많은 능력을 내어놓고, 더 낮은 조건을 요구하게 되는 것. 그것이 가능한 시장경제구조는 자본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국가와 권력은 자본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과도한 개인경쟁을 부추기며, 마치 그것이 정당한 기조인양 권력의 틀을 갖추어간다. 소수자로 대변되는 이민자나 외국인 소외계층은 그나마 최소한의 보호조치의 틀에서도 내쳐지게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경쟁을 강요받는 개인이 버텨낼 수 있는 방법은 “복종”이다. 언제라도 빼앗길 수 있는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부당한 요구와 경제외적인 굴종을 견뎌내야 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부조리를 이야기하거나 부당하게 해고당한다고 해도, 이것이 개인의 능력과 경쟁력 부족이라는 시선으로 비추어지고, 이는 무능한 사람으로 다시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을 개인의 무능과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권력과 경제의 결탁 속에서 강요받는 복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체제 속에 순응한 채 단지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한 굴종의 삶을 알량한 자유라 이름붙이고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책이다.

# 4. 어떻게 할 것인가.

신자유주의는 얼핏 경제적인 부분에만 국한된 사조인듯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체 전반을 관통하는 억압의 이데올로기이다. 경제기반 확보를 위한 권력의 유착, 권력의 강화를 위한 위임독재의 형태. 결국은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보수세력의 확장과 강고한 법의 힘을 발휘하려는 힘이 작용한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평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써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개개인의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의 구조는 개혁되어야하며, 그것이 권력에 의해 자행되어지는 폭정이라면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다각적인 목소리들로 “옳지 않음”을 주장해야한다.

막연한 “뭔가 잘못됐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요구해야 한다.

선의의 경쟁. 서로가 상승작용을 일으켜주는 경쟁, 발전으로 이어지는 경쟁이 아닌, 개인의 능력이 저평가되는, 혹은 그 능력에 과도한 책임과 결과를 안기는 경쟁이라면 단호한 거부가 가능한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

작은 실천에서부터 이어져야 할 것이며, 이것이 개인에서 공동체로, 작은 목소리의 엮음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책을 덮으며 들었다.

감정적인 억울함과 분노가 아니라 어디에서부터 이 모순이 시작되었는가를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많은 곳에 내 노동력을 선택받기 위해 싸게 내어 놓은 내 노동력의 가치를 제대로 획득해내기 위해서라도 이 시장의 모순과 권력의 횡포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발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만한다.

“정당한 경쟁과, 정당한 보수와, 정당한 국가의 보호”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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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책읽기란 어떤 의미인걸까를 생각하게 하는 제목이다. 도대체 왜 읽으며 어떻게 읽어야할까를 늘 고민한다. <읽는다>는 행위가 갖는 의미와 당위성이 궁금한것이다. 


나는 다독(多讀)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책을 분석하고 파헤치고 연구하며 읽는 것도 아니며, 오래 남는 여운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감성적인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책 못읽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거야?" 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어떤 책을 내가 읽었는가에 대한 검증없이 다만 집구석에 쌓여있는 책들의 양을 보고 하는 이야기이리라.

어쩌면 나는 일점호사주의자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나의 책읽기는 경박하고 즉흥적이다. 

한 권의 책을 들고 읽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몰입이되면 예를 들어 음악이라든가, 아는 이름이라든가, 반대로 모르는 이야기이거나, 궁금해진 것이 있으면 바로 찾아서 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종종 시작한 책과 마무리 짓는 책이 달라지곤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책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때론 하나의 주제로 읽었던 책들을 벽돌 쌓듯이 쌓고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띠지에 그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시인의 시를 적기도 하고, 때론 책 사이사이에 우스꽝스러운 낙서를 하기도 한다. 

아, 물론 밑줄긋기와 모서리 접기는 기본 옵션이다. 이렇게 책을 난장판을 만들며 읽는것이 내 스타일의 독서다.


거기에서 얻는 것? 작가의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도, 작품의 예술성도, 그 무엇도 아니다. 나는 오로지 나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서 읽는다.


 놀이를 하듯 책을 읽고 어떻게 놀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 나의 책읽기의 결과물, 리뷰랄것도 없는 리뷰인 것이다. 호모루덴스적 독서법이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할 수는 없다. 그냥 노는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런 책이 참 좋다. 최근에 읽고 "맞아..맞아"를 연발했던..고품격의 책읽기 & 놀이.


작가의 범상치 않은 시선이 낯설지 않고 신선하다. 그가 얼마나 책을 아끼는지..느껴지는 책이다.

 















오직 소설로 말하는 윤대녕의 장미창과 사강의 독약, 그리고 언급된 책은 아니지만 '자코메티'의 등장과 더불어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한 책 

이렇게 하나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의 연결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내 책장은 점점 비좁아지고, 가족들의 지탄은 태산만큼 쌓여가지만, 그 태산의 길목마다 묶인 재미난 리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것이 때론 통쾌하다.


  이쯤해서 등장해주어 마땅한 후마니타스의 연쇄독서. *^^*













책을 읽고, 결과물을 꼭 내놓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것은 전문가, 혹은 좀 더 심도있는 책읽기를 하는 사람들이 해주어도 괜찮다. 나의 책읽기는 이기적이며. 그렇기에 어떠해야 한다는 틀도, 기대감도 없다. 즐기는 것. 삶의 의문들을 유쾌하게 풀어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런 좋은 책들과 저자들이 있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딱히 리드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맹목적 읽기가 아닌 읽기에 힘을 더하는 방법론으로 잠시 펼쳤다가..이내 그만두었던 아쉬운 책이다..













 책읽기는 소통을 열어주기도 하고, 사유의 폭을 넓혀주기도 한다. 그 모든것이 가능한 것은 책과 나의 동격(同格)이 성립되야 가능하다. 책에 대한 과도한 기대나, 자신의 독서력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책 읽기에서 조심해야 할 일 중 하나이리라.

무언가 얻어내겠다는 욕심도 무언가 감동하게 되겠지라는 기대도 다 접어 두는 것이 좋다.

독자의 이기적인 책읽기에 대한 책의 방어 역시 이기적이고 다의적이라는데 있다. 읽어낸 만큼만 독자의 몫이고, 책의 내용이라는 것. 

여튼..책읽기는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충분히 개인적이고 고독한 일일테니까 말이다.

낭독과 별개로, 독서는 철저하게 외로운 행동이다. 나는 책을 누군가와 나눠 읽지 않는다 (...)
만약 독서가 인류에게 해로운 점이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이다. 외로움을 정당화한다. 더 오래 홀로 있게 한다. 나는 그 해로움을 사랑한다. 읽는 속도도 내가 정해야 한다. ( 책등에 베이다. p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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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맛, 백설공주의 사과, 그리고 황금사과..가운데 끼인 저 설탕의 맛은 뭐지? 다름아닌 "김사과"의 글이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다는 김사과의 글이 나는 좋다. 차갑게 말하는 그 속에서 두려움과 간절함이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천국에서를 읽을 때, 그녀의 글에 심하게 몰입했었던 기억이 오롯하다. 무엇때문이었을까? 낯설게 다가온 것들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경험의 왜곡이 일어났다고나 할까? 여튼..사과처럼 상큼하고 달달하지 않은 그녀의 글과 그녀의 이름이 어쩐지 잘 어울리는 느낌. 부실한 이로 사과를 깨물때..머리끝까지 쭈삣해지는 시림을 느끼는 것 처럼..


사과에 일종의 포비아가 있다면 다들 웃는다. 바늘이나, 벌레에 대한 포비아에는 익숙하니까..하지만 그런게 있다. 내가 그렇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나를 작가 김사과는 능숙하게 끌어내곤 한다. 그래서 그녀가 좋다. 그래서 그녀의 글이 호감인것이다. 단순하게도 말이다.

어느 날 즈음에 "사과야 미안해..널 오해했어"라고 사과에게 사과하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과를 한다는 건, 어쩌면 용감해지는 것이며 자신의 오류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사과를 한다는 것이 나약하고 비굴한 것이라는 이상한 통념과 학습효과가 부쩍 사과해야할 일들에 사과하지 않고 뻔뻔한 작태를 갖게 만드는 상황을 종종 마주한다. 소위 목소리 큰놈이 이긴다는 논리다. 버티면 이긴다는 수작이기도 하고..

올바르게 사과하는 법, 사과를 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건 아닐까? 


                                    















정중하고 정확한 사과는 당연한 용서를 구할 수 있을거다. 그렇게 이어지는 관계들은 감정적인 호감이 아닌 이성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고, 그것이 요즘 우리나라의 대표 화두가 되는 "소통"의 시작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김사과의 이야기에서 뜬금없이 소통의 이야기까지..삼천포로 빠진 이야기. 

사실..김사과라는 이름이 좋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거다. 아참..김개미도 참 좋은 이름이다. *^^*



그리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 순간 밀려든 바람이 케이의 얼굴을 때렸다. 그건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그녀는 더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걸음, 또 한걸음 이어지던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다 마침내 달리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문득 그녀는 수족관 따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기억의 푸른 물은 나를 익사시키지 못할 것이다. 헤엄쳐 그 강을 건널 거니까. 그렇다 헤엄쳐, 저 너머에 닿을 거다. 거기에 한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좋을지 나쁠지 모르겠다. 거기가 천국일지 지옥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겠다. 아니, 지금 간다. 케이의 붉게 달아오른 뺨위로 이른 봄의 투명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봄이 왔음을 느꼈다. 여름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천국에서 p341~ p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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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29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길> 이라는 단어는 어서 떠나라는 귓속말을 먼저 던진다. 그 곳이 낯선 곳이든, 사랑하는 이에게 가는 길이든, 뭔가 중요한 것을 두고 온 길이든 말이다.

길과 잘 어울리는 단짝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여행"이라는 단어일거라는 평범한 생각을 해 본다.

세상이 던지는 말을 듣고, 길의 끝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또 다시 다른 길로 접어드는..어쩌면 길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나지 않는 폐곡선일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실수로 마디 하나가 잘려나가면 그때는 새로운 궤적을 그릴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그 익숙한 길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다면 말이다.



 이런 길치가 엮어내는 기담 또한 얼마나 흥미로운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이야기들..듣지 못했을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마치 동막골처럼 숨어있는 그곳에 도착하는 건, 그 은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또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가.












그리고..자신의 체험과 기억이 머문 곳에 대한 이야기, 혹은 그 길과 마주하는 건 얼마나 아릿한 느낌일까.




(음..이건 검색에서 안찾아지네..이미지만..)

용산의 이야기..내 본적지는 용산구이다. 지금은 배우자의 본적지를 따르고 있으나 원래는 그랬다.

어린 내 손을 잡고 아버지는 본적지의 근처를 걷곤 하셨다. "여긴 말이다.." 혹은 "여기 기억하니?"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머릿속에서 풍경이 되고 사람이 되고 웃음이 되었었다.

고개를 넘어 삼각지까지 걸어가는 길은 그렇게 징검다리 댓돌처럼 이야기를 건너는 재미난 길이었다.


나는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아직도 구매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아버지 냄새와 아버지의 손의 온기가 느껴질것만 같아서 말이다. 왈칵 밀려들 그리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어쨌든..

<길>이 주는 상상과, 추억과, 떠나고 싶은 충동은 늘 적절한 온도를 유지한다.

아직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내는 우리동네 작고 허름한 골목길이 고마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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