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이러한 인식의 전통에서 영혼의 비물질성을 강화했을뿐만 아니라 이 점이 중요하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창발적(emergent)으로 진화할 가능성조차도 부정하는 길을 찾았다. 창발성이란 새로운 성질의 출현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진화의 차원에서도 진화의 각 단계가 이미 있던 여러 요인들의 단순한 총화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합에서 새로운 성질이 출현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살육자로서의 시간은 모든 분리 중의 분리, 곧 죽음"을 의미하기때문이다. 여기서 커니는 시간의 죽임(to kill) 행위를 강조한다.
이는 그의 의도가 ‘자연스럽게 죽는(to die) 것에 방점을 찍지 않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죽음의 주체가 죽이는 행위자 ‘시간 영감‘
이지, 죽어가는 생명체가 아니라는 철학적 의미의 차이가 잠재되어 있다. 커니에게 크로노스의 삼중 행위, 즉 게걸스럽게 먹어치움‘, ‘대체‘, ‘거세‘는 시간의 기본적 양상들을 나타낸다.

 아인슈타인 이후, 과학자들은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안다
뉴턴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절대 불변이었지만, 아인슈타인에게
시간은 물질과 에너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여전히 시간은 왜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하는지 명쾌하게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시간은 일정한 방향으로만 진행한다. 곧 방향성이 있고 비가역적이다. 그래서 물리학자 아서 에딩턴은 ‘시간의 화살‘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질서의 상태에서 무질서의 상태로 가려는 보편적 경향은 시간이 방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다. 그러나그 설명은 우주가 그 시작에 어떻게 질서 상태일 수 있었는가 하는문제에 답할 수 있을 때에만 만족스럽게 작동한다. 우주는 매우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무질서 상태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 큰 무질서를 향한 점진적인 경향은 없었을 것이고, 시간의 방향성도 없었을 것이다. 

플라톤도 티마이오스에서 시간을 논하면서, 우리가 ‘시간의부분들 곧 있었음 (과거)과 있을 것임‘ (미래)을 부지중에 영원한 존재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우리가 ‘있었다‘거나 ‘있다‘ 그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긴 하지만, 영원한존재에는 ‘있다‘ 만이 참된 표현으로서 적합하고, 있었다‘와 ‘있을 것이다‘는 시간 안에서 진행되는 생성에 대해서나 말하는 것이적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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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상상 가능한 모든 미이출발점이며 최종적인 참조 목록이다. 인공의 작업과 결과인 예술은 자연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것이다.

게오르그 짐멜은 문화의 비극‘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인간이 라는 창조자와 그 피조물의 조화가 깨질 가능성이 문화의 변증적구조에 근원적으로 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술 혐오증 내지는 공포증을 떠나서도, 공작인으로서 인간은 비극적일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비극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 탄생한다.

철학이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라 ‘아는 자의방황‘일 때 의미가 있음을 역설한 푸코의 말도 상기해두자. 몽상가의 철학이라고 조롱받더라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어리석은 시도를 해보자. 언제 철학이 몽상 없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과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월적 위상은 철학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신화의 시대에 퍼져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이야기가 육체의 반어법으로 서술되는 것도 그와 같은맥락에 있다. 헤라클레스가 지상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반어법적 서술은 그 절정에 이르러 직설법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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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에게 교육, 교양, 문화등의 의미를 지닌 ‘파이데이아(paicleia)‘를 로마인들은 후마니타스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인간다움‘을 내포하는 후마니타스는교육과 교양의 차원에서도 애지(philosophia)보다는 애인 또는박애 (philanthropia)의 정신을 물려받았다. 

그러므로 오늘 철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의 인문학적 속성으 지나치게 강조하여 철학의 이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게 아니라. 철학의 정체를 진지하게 밝히는 일이다. 그것이 인간만을 위한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들켜서 비난받을지라도 말이다. 

 오늘날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연관해서 의식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지배적인 태도는 의혹과 불신일 것이다. 이러한 거리 두기 현상이 나타나는 근본 이유는 과학-기술을 동원한 인간의 엄청난생산력 때문이다. 

하지만 아라크네는가장 예술적일 수 있는 소재를 선택했다. 그것은 바로 섹슈얼리티의 메타포, 즉 성의 은유였다. 고대인들도 외설과 예술 사이에는은유라는 여과 막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은유 없는 성은외설이지만, 은유의 망사를 입은 성은 예술이라는 것 말이다. 아라크네는 마지막까지도 농밀한 은유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담쟁이덩굴과 꽃이 한데 엉킨 그림을 짜 넣지 않았던가..

플라톤이 실재와현존 사이에 막을 쳤다면, 아라크네는 허구와 실재 사이의 막을 치운 것이다. 아라크네 코드, 즉 공작인의 암호를 푸는 열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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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철학의 역사에서 필로소피아를 지혜 자체인 소피아와 확연히 구분하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영향 때문이다. 그것은 지자를 자처하는 소피스트의 출현과 이에 대한 비판의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로소피아라는 말은 그 이전에도 사용되었으며 ‘끊임없이 탐구한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애지자란 끊임없는 탐구로 세상의 사물과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포착해 자기 자신 및 타자와 소통하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애지의철학은 즉각적 결실은 없어도 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필로소피아는 바로 과학적 탐구의 모체이다.
‘필로소피아와 에로스 사이의 이 모든 유사점 가운데서 그 어느것보다 중요한 것은 에로스의 활시위를 떠난 ‘사랑의 화살‘이 비가역적이듯이 애지의 과정 역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서구 사상에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을 어떻게정의하든, 그 본질은 필로소피아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넓은 의미의 철학은 균형 있는 삶의 지혜를 포함한다. 하지만에로스의 사랑처럼 지를 끊임없이 사랑할 때 필로소피아의 에너지 집중은 고조에 달한다. 그러므로 애인‘의 필요성을 망각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오늘날의 애지자인 과학자들에게 먼 조상이 쓴필로소피아의 문헌들은 ‘탈인간의 신화‘ 이다.
필로소피아의 정신적 유산은 이렇게 오늘날 과학-기술 행위에유전자처럼 스며들어 있다. 철학이 쓴 탈인간의 신화를 과학-기술이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영향력 있는 모든 학문이 이미 오래전에 에로스의 화살만큼이나 강력한 철학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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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방패 한가운데에 지식의 모든 대상을 매섭게 노려보며,
석상으로 바꾸어버리는 막강한 눈초리가 있는 것이다. 여신이 관장하는 일과 방패의 상징은 이렇게 의미적 합치를 이루게 된다. 신화가 전하는 은유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은 태생적으로 메두사의 시선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통합은 과학의 지형 도처에서 발견된다. 현대물리학의 통일장이론도, 모든 지식을 연계 통합하려는 통섭(consilience)의 시도도 ‘메두사의 시선‘의 폭을 확장한 것일 뿐이다. 진리를 붙잡아두려는 욕망의 한계를 최대화한 것일 뿐이다. 과학의 탄생에서부터 진리의 빛을 향한 욕망은 메두사의 눈을 갖고자 하는 욕망과 일치한다. 메두사의 시선은 진리의 빛을 통합하고 고정한다.

 메두사의 시선 앞에서 ‘대통합‘ 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통합은 ‘모든 것을하나로‘ 라는 단순함과 모든 것이 함께 조화로운‘ 이라는 아름다움에 더해, ‘전체‘가 ‘여기 있다‘는 장엄함을 가져온다. 이 장엄함에대한 기대가 과학의 시선을 유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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