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적인 여성 캐릭터 중 대표적인 것이 메두사다. 혹자는 데 이두사가 바로 바기나 덴타타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를 묘사할 때 크게 벌어진 입, 길게 늘어뜨린 혓바닥, 멧돼지어금니처럼 뾰족한 이빨‘ 이라고 쓴다. 거기에 뱀으로 뒤덮인머리카락이라니! 상상해보라. 무성한 음모로 뒤덮인 이빨 달린 질, 영락없는 바기나 덴타타가 아닌가. 한 번 보기만 해도 돌체 럼 굳어버리게 하는 괴물. 

이러한 원초적 어머니는 프로이트가 주장하듯 거세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세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보면 메두사 신화는 남성들이 갖는 거세공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꼼짝 못하도록 얼어붙게 만드는 이빨 달린 질을 가진 위대한 어머니 여신,모계사회와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를 처단하는 이야기가 된다.


죽어서도 힘을 잃지 않아 누구든 그 얼굴을 보기만 하면 돌로 굳어버렸다는 메두사의 얼굴을 페르세우스는 아테나의 방패에 박아넣는다. 이 얼마나 상징적인 이야기인가. 지금도메두사는 아테나의 방패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남성의 직접적인 지배의 흔적을 지우고 여성을 대리로 삼아 행해지는 여성억압의 흔적으로 읽는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아테나의 방패에 갇혀 있는 메두사의 머리를 끄집어내는일일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여신이었다가, 악마와 붙어먹는 사악한 존재였다가, 메두사나 스핑크스 또는 세이렌이었다가, 마녀가 된 여성이라는 타자는 현대에 오면 유대인이 되고, 난민이 되고, 흑인이 되고, 성소수자가 되고,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된다. 이들이 사회에 악을 퍼뜨리고 망가뜨린다고 한다.

파우스트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 Das ewig Weibliche zieht uns hinan"고 외쳤다. 문학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대한 환상.
남자들을 현세의 관능과 쾌락에 빠지게 만들어 죄로 이끄는 것도 악마 같은 그녀지만, 오직 그녀의 순결한 사랑의 힘이 그를구원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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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어머니 여신 티아마트는 마르두크에 의해 살해당한후 다시는 살아날 수 없었다. 따라서 티아마트의 살해는 ‘위대한 어머니 여신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비록 티아마트가 마르두크에게 패배했지만 마르두크는 티아마트 없이는 우주를 창조할 수 없다. 우주는 바로 티아마트의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아테나 탄생 신화를 모계적 가치규범에서 가부장적 가치규범으로의 전환‘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흥미롭게도 아테나는 다른 어떤 자식들보다 제우스의 가치를 충실히이행하는 ‘파파걸‘로서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일반적으로 마마보이는 어머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질한 남성으로묘사된다는 걸 떠올린다면 파파걸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평가는 다분히 편파적이다. 가부장 문화는 그렇게 여신들을 주변으로 몰아내거나 남성적 가치로 흡수하고 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며 공고화된다. 그리고 그렇게 없애려고 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고대 여신들을 악마로 전환시킨다.

인류 문명 초기에 위대한 어머니 여신은 생명을 가져다주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거두어가는 존재이기도했다. 혹시 그에 대한 두려움이 이빨 달린 질로 형상화된 것은아닐까

이렇게 서양미술과 문화는 여성과 자궁을 괴물과 연결짓는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거세공포라고 설명한다. 바기나덴타타는 아마도 성욕에 빠져 다른 일을 그르칠까 하는 두려움, 여자에게 모든 정력을 빼앗겨 쇠약해질지 모른다는 걱정,
여자에게 좌지우지되어 남성다움을 잃지 않을까 하는 공포, 여자에게 지배당하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이 합쳐져서 만들어진형태일 것이다. 

문명사회로 접어들면서 생물학적인 남성성에 대한 거세공포는 사회적 거세공포로 진화한다. 즉 사회에서 누리는 남성성의 우월한 지위를 여자 때문에 잃게 될까봐 공포에 떠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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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감정과 내면 표현이 아닌 사회의 객관적 실체를 담아내려 했기 때문에 세밀묘사에 기반해 약간 과장된 형태와 강렬한색채를 사용해서 당대의 불편한 현실과 타락한 사회상을 폭로하려 했다. 그들은 모두 자기가 사는 시대의 증인이 되고 싶어했다. 전쟁에 나갔다가 불구가 된 병사들, 거리의 창녀들, 지식인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위선과 부도덕을 폭로하는 그림들을 통해서 말이다


‘실은 이렇듯 젠더적으로 불공평한 시각이 서양미술에서 넘쳐난다. 정의롭지 못하고 불평등한 사회에 대해 날카로운시선을 던지는 작가라도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는 둔감하기 짝이 없다. 젠더 문제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없다. 

눈을 될 수 없도록 아름답지만 절대로 순종적이지 않은여자 남자의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 여자. "우리가 동등하다.
면 네가 왜 항상 내게 명령하는가" 라고 생각 할 줄 알고 의문을 제기하는 여가, 자신의 성욕을 인정하고 욕망과 쾌락을 포기하지 않는 여자, 편안하지만 종속적인 낙원을 스스로 박차고나간 여자는 악마로 내몰리고 악마의 더불어 살아간다. 여자를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아담과 사느니 악마와 사는걸 선택했다니, 통쾌하지 않은가! 이로써 릴리트는 인류 최초의 페미니스트가 된다.

현대에는 ‘릴리트 콤플렉스‘라는 단어도 생겼다. 릴리트 로 상징되는 자유 본능‘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문화에서는 남 녀 모두 불균형한 행동과 정신적 고통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 에서 명명되었다. 

요컨대 이 여신들의 이야기를 쭉 따라가면 수메르의이난나가 곧 바빌로니아의 이슈타르이고 유대 신화의 아스리테이자 릴리트이면서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 로마 신화의베누스, 디아나와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과 지역을달리하면서 이름은 바뀌지만 성과 사랑과 다산, 전쟁을 주관하는 신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대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순환하는 것으로 보았다. 땅 이 품지 않으면 씨앗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죽은 사람의 시신이나 동물 사체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았으며,
여인의 성과 사랑으로 다산이 이루어짐을 경이롭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어머니 여신은 태초부터 그냥 존재하는 신이다. 그녀의 몸에서 태어나는 모든 것은 선악을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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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인간이 기술적·과학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임을 믿던시기에 일어난 야만적인 역사를 예외‘로, 이미 지난 역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를양산해내고 혐오하며 추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을 ‘신사실주의New Realism‘라고 부르는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상화한 일상이 아니라 진짜 일상의 흔적인 물건들을 오브제로 제시함으로써 그 시간과 분위기와 대화와 인간관계와 성격 등을 고스란히 보여주니 말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덫을 놓아 붙잡아둔 예술, 아, 그래서덫예술인가?

만일 예술이 언제나 ‘인생은 아름다워‘만 보여준다면 그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고 사람들은 이성적이지 않으며, 강자는 약자를 괴롭히고 착취함으로써 더욱 강자가 되고, 사랑의 맹세는 덧없고, 인간은 스스로의 자리를 파괴하고 더럽히면서 살아간다. 지금도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으며, 부는 정의롭게분배되지 않는다. 이렇게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세상의 추한 면면을 예술로 기록한다.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이라는 책에서 "상기하기는 일종의윤리적 행위이며, 그 안에 자체만의 윤리적 가치를 안고 있다.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이다"라고 썼다. 기억하고 있는 한 우리는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쓸 것이기 때문이다. 」

오토 딕스Otto Dix는 1920년대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시대를 잘 보여주는 작가다. 그의 그림은 신즉물주의 NeueSachilichkeit 양식이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New Objectivity라고쓰니 신객관주의 정도로 하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게오르게 그로스George Grosz,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이 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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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환경에서도 앨리슨 래퍼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순응과 체념은 그녀의 사전에 없었다. 장애인이니까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저항했다. 그녀는 육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미술을 공부해 구족 화가가 되었으며 사진전을 열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힘썼다. 그녀가 맞선 편견에는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녀는 많은 이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해 장애인 엄마이자 미혼모라는편견을 깨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신체 일부만 가지고도 특별한 긴장을 자아내면서 그 자체로 조형적인 미와 완벽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음.
을 알아차린 예술가들이 있다. 로댕Auguste Rodin 이 대표자다. 그들은 여기서 영감을 받아 하나의 독립적인 주제로 삼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팔다리 없는 조각을 보면서 누구도 장애를 문제 삼거나 불쾌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토르소인 앨리슨 래퍼의 육체를 아름답게 보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앨리슨 래퍼는 자신의 몸을 현대의 비너스‘라고 했다. 왜 아니겠는가? 앨리슨 래퍼 조각은 위대한 정신적 승리‘를 이룬 인물에 대한 존경이고, 장애에 대한 편견이 만연한 사회에서 정상은 무엇인가 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행위이며, 남성중심의 역사와 사회, 문화에 던지는 젠더적 문제제기이기도한 것이다. 작가 마크 린은 단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려고무리수를 둔 것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탁월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작가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깨기위해 각업을 하기도 한다.

서구의 합리적 주체는 언제나 ‘나와 다른너를 통해 주체를 형성했다. ‘나‘를 정상이자 기본으로 놓고나와 다른 사람들을 철저히 타자화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선
‘정상‘ 이었고 지금도 정상인 그녀의 몸이 유럽으로 와서는 ‘비정상‘으로 타자화된다. 다른 피부색, 커다란 엉덩이와 유방, 다르게 생긴 얼굴 모양은 야만이자 비정상이며 기형으로 치부되었고 유럽인들은 이것을 구경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정상인지를 확인하고 안도했다. 보라, 괴물 같은 인간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안전하고 정상이며 문명인이다.

사르키 바트만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의 세상에서 살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노예였다. 야만인을, 괴물을 어떻게 자유롭게 풀어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에 가두고 ‘동물‘이라며 조롱하던 19세기 사람들은 정작 그녀의 몸을 따라 엉덩이가 부풀려진 페티코트를 입었다. 이건 낯설지 않은 현상이다.
매춘부를 혐오하던 사람들이 정작 매춘부들의 의상과 화장을따라 하면서 유행을 만들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성의 몸은 그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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