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녀는 그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도 다시는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그들이 마지막 데이트를 한 날, 이 지구상의 7891 커플이 마지막 데이트를 경험했으니까. 그건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 다. 

아서는 한번도 그녀에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아서뿐만이 아니라. 그때 그녀를 알았거나 만났던 모든 사람들, 그게 여자 .
든 남자든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 시걸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어떤 불경을 저지르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걸 상실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한번도 만져본 적이 없고 가져본 적도 없고 심지어 바라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그러한 것들 때문에 상처를 받았었다고,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까 자신의 그런 상실에 대해 궁금증 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심지어 그것이 신일지라도 자신을 저주할 수도, 축복할 수도, 긍휼히 여기거나 용서할 수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반딧불이를 바라보는 시선의 초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안경을 고쳐 썼다. 

하지만 나는 아줌마에게 그걸 하기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체 왜? 나는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가 지나친 선의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런 선의를 거부할만큼의 배포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에, 나도 그래 나도 아보카도 알레르기가 생겼어.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말이야."
"그래?"
나는 제이가 방금까지 맛있게 먹은, 식탁 위에 있는 아보카도 연어롤을 바라보았다. 제이를 제외한 우리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그녀에게 "너 방금까지아보카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었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 그녀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은건, 우리가 그저 다른 사람의 어떤 부분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리라고

어쩌면 나는 분실물 찾기 전문이 아니라, 오히려 분실물 ‘발견하기 전문인지도모른다. 결국은 그게 그거겠지만, 

"나는 아침 7시를 잃어버렸어요."

이봐요, 때로는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으로 놔둬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잃어버린 것은 그저 잃어버린 것으로,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즐거움과 지루함, 충만함과외로움이 마치 격자무늬처럼 그의 삶을 질서 있게 채우고 있었고, 그는 그게 묘하게 균형적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내 불행을 가져가고, 그리고 또 무언가를 가져가요.
그게 룰이에요. 그게 불행 수집가와 교환하는 방식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그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이 부분이 가장 웃기고도 무서운 부분인데,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바람 때문에 그녀의 머리칼이 헝클어졌다.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들이 불행과 더불어 무얼 내게서 가져가는지는 모르는 거예요. 

 그는 어둠에 잡아먹힌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빛에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는 자신이 지금 살아가는 삶이 나쁜 삶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마침내 천천히, 그가 눈을 뜬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 중이라고생각한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는 하염없이 그것을 기다린다. 

"위험하진 않소?"
"위험이 따르지 않는 일은 없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기 전에 쓰는 글들 - 허수경 유고집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수경을 처음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으로 만났다. 제목부터 빌어먹게 아팠다. 시뻘건 시집을 오래도 보았다. 표지가 나달나달해지도록 보았다. 시뻘건 표지에 쓰인 '차가운' 심장이라는 말이 잠시 우스웠다.

한동안은 '너 없이 걸었다'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지나 멈춘 곳.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발굴지의 먼지를 아무리 떨어내도 그녀는 찾아지지 않고 모래 먼지만 날렸다. 어쩌다 눈물을 흘린 건 모래 때문이라고 탓하기 좋았다. 역시 허수경의 사막은 울어도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다시 읽는 허수경의 유고 시집

가기 전에 쓰는 시들. 시에 빗금을 긋고 글이라고 다시 쓴 제목을 고집스레 가기 전에 쓰는 시들이라고 읽는다.

밑줄을 그으며 한참을 읽고 '모서리가 부서진 눈송이'같은 그녀를 만난다.

비슷비슷한 모습들이라고 퉁치기에는 구석구석 인이 박힌 그녀의 외로움과 예술을 향한 온 몸 던짐이 얼마나 큰 댓가를 치르는 일인지를 낱낱히 고백하고 있다.

그녀의 삶의 진술이자 쉼표이자 이 땅을 걸은 일일 보고서 같은 글을 읽었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의 심정은 얼마나 처연할까. 끝끝내 고독을 선택한 용기는 어느 사막에서 발굴한 보물일까.

녹을 줄 알고 떨어지는 눈송이는 어떤 심경일까. 끝끝내 하강을 결정한 용기는 어느 별모서리에서 뿌려진 비약(秘藥)일까.

책을 덮으며 허기가 졌다.

문득 날아가던 새와 눈이 마주쳤던 것을 기억해냈다. 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나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전율에 화가 났다. 모서리가 부서진 눈송이가 아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상실은 종종 허기로 오독되어지기도 한다.

배가 고픈건 아마도 그리움 때문일것이다.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이제 누구든 찾아 나설 수 있는 유적이 되어버린 그녀는 발목을 붙드는 모래 속에서, 높은 별 밭에서, 깊은 그리움 속에서 우리가 찾아내게 될 것이다.

 

'허수경' 이라고 발음하고 나면, 낯선 얼굴 하나가 희뿜하게 웃는 잔상이 떠오른다.

단 한번도 본 일 없는 시인이지만 그녀의 시가 만들어 낸 나만의 '허수경'은 늘 그렇게 희뿜하게 웃는다.

단 한번도 찡그린 일 없이 ..

그녀를 이제 묻는다. 언제든 꺼낼테지만 그 때마다 그녀는 나의 유적이고 보물이 되어있을것 같다.

 

-이 지구 어디에 묘지가 아닌 곳이 어디 있으랴. 모든 일상의 삶터는 묘지이다. 사막이 우리의 일상이고 열대림이, 광야가, 대도시가, 태양계가, 우주가 우리의 일상인 것처럼. 팽창하는 모든 것은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낸다. 고립된 인간은 팽창을 거듭한다.

평생 시를 쓰는 일에 종사하면서 얻은 것은 병이고 잃은 것은 나다. 이 말을 어떤 직업에다 대고 해도 맞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일은 일이다.

아직 길을 내지 못한 많은 언어가 내 속에는 있다. 그것뿐이다. 다만 나는 나이테를 완성하는 나무처럼 무의지를 배워야 한다. 수많은 인간의 길에 난 언어들을 안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가 신채호는 훗날 묘청의 난을 1천 년 내 제1대 사건‘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것은 고구려 계승 세력 대 신라 계승 세력, 자주당 대 사 대당, 진취적 개혁론 대 기득권 옹호론의 최후 결전이었다. 

 개경의 권문세족부터 지방의 향리들까지,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진오랜 지배층은 조선이 건국되자 양반 사대부로 변신한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행세하는 가문들은 그대로였다. 그들은 더욱 엄격하고 정교해진 유교 통치를 들고 나왔다. 이전 시대와 도덕적으로 차별화하면서도항구적인 지배를 그럴싸하게 옹호할 길을 성리학에서 찾은 것이다. 그것은 정욕을 억누르고 절의를 좇는다는 미명 아래 남녀의 진실한 사랑을 음란한 풍속으로 낙인찍고, 여성에게 정절이라는 족쇄를 채워 구속하는 통치 체제이기도 했다.

남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박씨는 어우동으로 흑화하기 시작했다. ‘어우동(於于同)‘이라는 이름은 ‘어울려서 통한다‘ 또는 함께 어울린다‘로 풀이할 수 있다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 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 이름은 그녀가 사용한 별명이었다. 어우동은 ‘이혼녀 아닌 이혼녀‘가 된 뒤 기생, 내금위 무관의 첩, 과부로 행세하며 남자들과 만났다고 한다. 법적으로 여전히 종친의 아내인 자기 신분을숨긴 것이다. 간통죄에 걸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어우동의 처형(1480)은 성종이 부부 싸움 끝에 폐비 윤씨를 쫓아내고(1479) 사약을 내려 죽이는(1482) 와중에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내가주목하는 포인트다. 우연 치고는 너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