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에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사로잡힌 생각, 세상이 나아져야 한다는 신념도 떠올랐다. 확실히 무주는 순도 높은 정의감과 도덕심에 홀려있었다. 다시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신념 때문만이 아니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받는 게 두려웠다.

연민 때문에 아내는 무주를 이해한다고 착각했다.

「사무장 말대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은죽기 마련이다. 다른 곳도 아닌 병원에서. 특히중환자실이나 일부 병동에서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가끔은 사람들이 죽으러 병원에 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사들이 실패할 때도있었다. 병원에는 날마다 긴급을 알리는 코드 방송이 이어졌다. 

동정을살수록 이석이 저지른 비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아이가 죽었다고 해서 이석의 비리가 없어지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무주는 자신이 특별히 나쁜 게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의 결점을 지적하는 쪽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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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가 이석을 흉내 내서 다시 물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건 이석이 고안한 농담이었다. 웃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리를 두고 싶을 때 주로썼다.

이석은 언제나 의사에 대해 혹평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믿을 수 없는 건 희망을가지라는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의사만큼 악랄한 인간은 없어. 희망으로 병이 낫나. 절망에 빠진 사람한테 돈이나 계속 쏟아부으란 얘기지. 잘 들어둬. 그런 인간한테 속으면 안 돼.˝ 」

 ˝하지만 그보다 더 못 믿을 건 포기하라는 의사야. 그렇게 말하는 의사는 무능한 거야. 사람이수학이야? 포기하게……. 무능한 의사보다는 악랄한 의사가 나아. 안 그래?˝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게그렇게 좋더라고, 세상에 내가 단숨에 볼 수 없는 게 있다는 거 말이야. 아무리 봐도 훤히 다 보이지 않고 한눈에 죄다 알 수 없다는 게 정말 좋았어. 면송리하고는 너무 달랐거든. 거긴 너무 뻔했지. 동네 사람들 입속의 금니 개수까지 알고 지 냈어. 시시하잖아. 그런데 배는 그렇지 않은 거야!

세계는 애초 구球나 정육면체처럼 정확하고완벽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트램펄린 같은 것이었다. 똑바로 서면 균형을 잃는 곳, 균형을 유지하려면 비틀거리거나 한쪽 발을 구부리고 팔을뻗어야 하는 곳, 뒤뚱거려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 세계이므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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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을 다시 시작한건 독보적이라는 독보적(?)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애써 좋게 말하자면 한 곳에 오래 버티는 습관이 있는 나에게 하루 만보의 도전은 좋은 자극이 되고 있다.
오천보가 미니멈이지만 스스로 만보를 넘겨보려 목표를 잡았다. 무작정 걸었던 적도 있다. 시간을 정해 규칙적으로 걷는다. 가끔 폰을 놓고 나가 걷고는 허망해하기도 하지만..
이제 걷기가 틀이 잡혀가니 책들이 눈에 담긴다.
사놓고 잊고 있던 책들을 찾아 읽고 친구(?)들의 책에도 눈이 간다.
아! 이 책!
사려다 놓친 책들이 보이고
어? 이 책?
호기심이 동하는 책들이 보인다.
어? 이 분!
엄청난 밑줄 긋기와 1일 5~6권을 읽는 분들.
책 좀 읽는다 소리를 가끔 듣는데도 나는 아직 멀었구나 싶다.

마구잡이 읽기가 맥락을 잡아가고 제멋대로 걷기가 규칙을 찾아간다.
어떤 이에게는 별것 아닌. 무쓸모의 앱이거나 프로그램이겠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물리적 시간이 한정적이므로 시간배분을 해야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다보니 하루의 규모가 짜임새를 찾아간다.
일종의 나비효과일까?
‘북플앱을 깔았다‘에서 시작된 거의 2개월여의 일상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어떻게든 걸어보려 애쓰고 얼마라도 읽어보려 노력하는 것이 때때로 대견하다.

책을 챙기고 운동화를 고쳐매는 일상.
날이 추워지니 걷기에 꾀가 나기도 하지만 어쨌든 잘 유지해봐야겠다.
하루 한권 읽기도 빠듯한 나의 일상. 하루 대여섯권 백여개의 밑줄을 그을 역량은 못되지만 꾸준함으로, 일상의 틀을 잡는다는 생각으로 북플을 이용해야겠다.
나이가 든 탓인지 창의적으로 앱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도 같지만..
알뜰하게 읽기 위한 방편으로라도 당분간은 사용할 듯하다.

걸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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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1-25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만보와 글쓰기의 명분이 생겼어요

나타샤 2019-11-25 13:28   좋아요 1 | URL
좋은 동기부여인셈 이죠.^^

cyrus 2019-11-25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밑줄을 많이 그으면서 책을 읽는 것이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북플에 밑줄 긋기를 자주 이용하는 분들에게는 서운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하루에 5~10개 이상 밑줄을 올리는 그분들을 보면 보여주기식 독서를 하는 것 같다고 느껴져요. 책에 있는 문장 한 두 개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알 수 없어요.

나타샤 2019-11-25 20:44   좋아요 0 | URL
그럼요..^^
 

플라톤은 이러한 인식의 전통에서 영혼의 비물질성을 강화했을뿐만 아니라 이 점이 중요하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창발적(emergent)으로 진화할 가능성조차도 부정하는 길을 찾았다. 창발성이란 새로운 성질의 출현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진화의 차원에서도 진화의 각 단계가 이미 있던 여러 요인들의 단순한 총화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합에서 새로운 성질이 출현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살육자로서의 시간은 모든 분리 중의 분리, 곧 죽음˝을 의미하기때문이다. 여기서 커니는 시간의 죽임(to kill) 행위를 강조한다.
이는 그의 의도가 ‘자연스럽게 죽는(to die) 것에 방점을 찍지 않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죽음의 주체가 죽이는 행위자 ‘시간 영감‘
이지, 죽어가는 생명체가 아니라는 철학적 의미의 차이가 잠재되어 있다. 커니에게 크로노스의 삼중 행위, 즉 게걸스럽게 먹어치움‘, ‘대체‘, ‘거세‘는 시간의 기본적 양상들을 나타낸다.

 아인슈타인 이후, 과학자들은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안다
뉴턴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절대 불변이었지만, 아인슈타인에게
시간은 물질과 에너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여전히 시간은 왜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하는지 명쾌하게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시간은 일정한 방향으로만 진행한다. 곧 방향성이 있고 비가역적이다. 그래서 물리학자 아서 에딩턴은 ‘시간의 화살‘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질서의 상태에서 무질서의 상태로 가려는 보편적 경향은 시간이 방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다. 그러나그 설명은 우주가 그 시작에 어떻게 질서 상태일 수 있었는가 하는문제에 답할 수 있을 때에만 만족스럽게 작동한다. 우주는 매우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무질서 상태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 큰 무질서를 향한 점진적인 경향은 없었을 것이고, 시간의 방향성도 없었을 것이다. 

플라톤도 티마이오스에서 시간을 논하면서, 우리가 ‘시간의부분들 곧 있었음 (과거)과 있을 것임‘ (미래)을 부지중에 영원한 존재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우리가 ‘있었다‘거나 ‘있다‘ 그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긴 하지만, 영원한존재에는 ‘있다‘ 만이 참된 표현으로서 적합하고, 있었다‘와 ‘있을 것이다‘는 시간 안에서 진행되는 생성에 대해서나 말하는 것이적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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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상상 가능한 모든 미이출발점이며 최종적인 참조 목록이다. 인공의 작업과 결과인 예술은 자연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것이다.

게오르그 짐멜은 문화의 비극‘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인간이 라는 창조자와 그 피조물의 조화가 깨질 가능성이 문화의 변증적구조에 근원적으로 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술 혐오증 내지는 공포증을 떠나서도, 공작인으로서 인간은 비극적일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비극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 탄생한다.

철학이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라 ‘아는 자의방황‘일 때 의미가 있음을 역설한 푸코의 말도 상기해두자. 몽상가의 철학이라고 조롱받더라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어리석은 시도를 해보자. 언제 철학이 몽상 없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과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월적 위상은 철학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신화의 시대에 퍼져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이야기가 육체의 반어법으로 서술되는 것도 그와 같은맥락에 있다. 헤라클레스가 지상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반어법적 서술은 그 절정에 이르러 직설법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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