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3 세트 - 전3권 -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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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읽기 시작 , 읽는 감이 좋음, 언제가는 다시 읽어야 하는데 하며 부채감이 있었음. 읽으면서 왜 내가 이 책에 환장하는지 확인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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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한국전쟁의 기원 1 + 2-1 + 2-2 - 전3권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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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전쟁의 최종 승자는 스탈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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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과  그 3000만 국민을 떠올리는 미국인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은 상당한 가치가 있었으며 다시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그 자체만으로는 무익한 존재였다. 1949. 7. 상원의 한 논의에서 톰 코널리 상원의원이 남한은 "우리가 극동에서 소유한 것 가운데 가장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언급하지 헨리 캐벗 로지 상원의원은"한국은 그리 가치가 크지 않지만 우리 것"이라고 대응했다. 그 논의 후반에 코널리는 한국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은 일본 바로 옆에 있으므로 일본과 경제 재정관계가 긴밀해 질 것이며, 한국을 강화시키면 우리가 그 지역에서 어떤 군사작전을 펼칠 경우 군사적 자산이 될 것입니다."(136페이지)


2.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이후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단검이라고 불렀다. 미국이 한국에서 갑자기 철수하는 것은 자유국가 한국이 붕괴하고 그 단검이 다시 한번 소련의 손에 넘어간다는 뜻이다. 요컨데 일본을 방어하려면 군사적 경제적으로 일본 전역을 기지로 삼아야 한다 - 뉴욕타임스 1950. 5. 27. 사설(97페이지)


3. 북한은 평양을 다시 점령한 뒤, 그동안 평양에서만 1만 5000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했다. 2000명 정도가 평양형무소 안마당에서 사살된 채 발견됐으며 수천구의 시신이 26곳의 방공호에 싾여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잔학행위가 일어난 곳이라고 북한 당국이 계속 주장하는 곳은 평양과 개성사이에 있는 신천이었다. 이곳에서 미국과 남한당국은 도망간 남성 친족의 정보를 얻기위해 수백명의 여성과 어린이를 며칠동안 물도 먹을 것도 주지 않고 헛간에 가둬 놓았다. 그 뒤 그들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이 사건은 독립된 기관이 조사해 사실로 입증한 적도 없지만, 북한의 주장과 증거사진이 조사되거나 부인된 적이 없다. 1987. 11.나는 템스 텔레비젼과 함께 납골당과 묘지를 방문했고, 원본 사진과 신문기사를 봤으며, 유일한 생존자와 하루를 보냈다. 누가 잔혹행위를 저질렀는지 문서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행위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확신했다.


4. 뉴욕타임스 조지 배럿은 안양북부의 한마을에서 근대전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사례를 목격했다.

마을에서 들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민은 네이팜탄의 폭격으로 사망했는데 폭격당할때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자전거를 타려던 남자, 고아원에 놀던 50명의 소년과 소녀, 아무 외상도 입지 않은 여성도 있었다.그녀는 손에 시어스 로빅sears roebuck의 상품목록에서 찟겨진 한 페이지를 쥐고 있었는데 주문번호 3811294번으로 2.98달어의 '매혹적인 산호색 침실목'이라고 인쇄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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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웃한 중국이 교섭과 연합 정부 구상의 과정에서 유혈내전으로 전환되면서 북한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중국 공산당과 협력해 싸움으로서 국제협력주의 의무를 실천하였다. 대규모 병력이 처음으로 중국 국경을 넘은 것은 1947. 3월의 일이었다.(7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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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작은 나라가 더 큰 요구를 제기하고 강대국은 자신의 이익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기술과 수완을 가진 인물이었다.(82페이지)

2.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정부와 민간을 포함해 남한이나 북한 어느 곳에서도 연구비를 받지 않았다.(머리말 38페이지)

3. 1977년 나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 있었는데, 한 직원이 큰손수래 가득 골판지 상자를 싣고 가면서 내게 그 안에 든 것을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242 기록군 record group'인 '노획 문서'였는 데, 1950년 가을 미군이 북한을 점령하였을 때, 수집한 출판물과 극비자료로 이뤄진 보물창고였다. 갑자기  내 연구 주제가 내 앞에 펼쳐졌다. 이를테면 1940년대에 발간된 로동신문은 북한 바깥에서 이용할 수 있는 복사본이 없었지만, 이 문서에는 그 공식 기관지가 다 들어있었다.2년 넘게 이 자료를 읽으면서 북한에 대한 내 이해가 극적으로 달라졌다.(한국어판 서문 1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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