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코피코 소년
렌스케 오시키리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의 30대에게 가장 추억하기 좋은 시절은 아마도 80~90년대일 것이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놀지가 가장 중요했던 유년시절과 미래가 온통 장밋빛일 것만 같았던 학창시절이 담긴 그 시기는 각박한 현재를 살아내야 하는 30대에게 찬란하고 아련한 시절이다. 그때는 어른이 되기만 하면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보니 삶은 힘들고 더 나은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현실이 암담할수록 우리는 자꾸만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한다. 후회스럽지만 때로는 돌아가고 싶을 만큼 아름답게 기억되는 그 시절.  


『피코피코 소년』은 '게임'을 통해 그 시절을 되살려낸다. 시대적 의미보다는 게임 오타쿠였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넓은 층의 공감을 얻기는 어렵지만 비슷한 연령대의 독자들에게는 '추억'을 더듬어보게 하는 작품이다. 다만 그림체부터 마이너한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내 경우에는 읽을수록 그림체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 게임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이 처절할 만큼 잘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록 아이는 아이 같지 않고 어른도 어른 같지 않았지만.

 


가족 중에 게임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있고, 주변에도 게임 제작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지인들이 있지만 정작 나는 게임에 별로 관심이 없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게임이라고는 테트리스류의 단순한 퍼즐게임이나 레이튼 교수 시리즈 같은 추리게임 정도였다. 지금도 스마트폰 '게임' 폴더에 들어있는 게임은 고작 3개이다. 내가 직접 플레이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러니 게임의 역사를 아무리 줄줄 읊어도 내게는 제2외국어로 들릴 뿐이다.   


바꿔 말하면 오락실과 게임기 앞에서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푹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통하는 '전파'라는 게 있으니 말이다. 내가 공감한 부분은 게임이 아니라 동전 몇 개로 사먹을 수 있었던 불량식품이나 친구들과 만든 허술한 비밀기지 등이었다. 어린 나는 새로운 불량식품은 뭐든 다 먹어봐야 했고, 집보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아지트를 더 좋아했던 아이니까. 

 


대상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중략) 그 사랑의 깊이 탓에 현실(3차원)은 우리에게 가혹하다. 그래도 우리는 매진한다. 어떤 사랑이더라도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 만화의 매력이라면 게임에 눈이 멀어 사고친 경험담 와중에 뜬금없이 인생의 진리가 담긴 대사를 뱉어내는 것이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파고들다가 결국 그 분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 꼭 오타쿠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의 꿈일 것이다. 무언가를 미친듯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즐겁게 삶을 살 수 있는 충분조건이다. 

 



게임의 진화와 함께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작가처럼, 어른이 된 후에도 어린 시절 열광하던 것에 대한 추억은 우리 몸 속 어딘가에 깊게 박혀있다.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뛰거나 미소가 번지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어른은 마음속에 여전히 강력한 '아이'를 담고 있는 것이다. 과거 없이는 미래가 오지 않는다. 『피코피코 소년』은 한심하다며 주인공 칸짱을 비웃다가 자신도 그런 아이였음을 깨닫고 피식 웃게 되는 그런 만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자꾸만 딴짓하고 싶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자꾸만 딴짓 하고 싶다 - 중년의 물리학자가 고리타분한 일상을 스릴 넘치게 사는 비결
이기진 지음 / 웅진서가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아버지는 '딴짓'이라곤 모르고 사시는 분이다. 특히 혼자 하실 수 있는 작은 취미가 전혀 없으셔서 휴일에 집에서 하시는 일은 주무시거나 TV를 보시는 게 전부이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야말로 삶의 괴로움을 견디는 가장 좋은 비타민이 아닌가. 시간, 장소, 인원에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취미는 온전한 평화와도 같다. 

 

이 책의 저자 이기진은 물리학자이자 걸그룹 투애니원의 멤버 씨엘의 아버지이다. 물리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쓴 책이라기에 이 책은 표지부터 너무 발랄(?)하다. 아마 표지부터 '딴짓'의 결과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딴짓'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희한한 물건들을 모으는 것이다. 역사와 사연을 담은 물건들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며 즐거워하는 저자의 모습은 마치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 같다. 학자답게 물건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 사이사이 저자의 추억도 한몫 거든다. 

 

한번 이런 열정에 사로잡히면 나는 앞뒤를 못 가리는 상태가 된다. 일종의 '몰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들이 보기엔 이런 상태의 나는 뭔가에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중략) 세상엔 이런 흥분과 열정에 빠질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얼마나 고마운 열정인가?(41쪽)

 

나이가 들면서 가장 빨리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호기심, 열정, 몰입이다. 원하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포기하는 것은 점점 늘어나는데 그런 삶이 당연한 것처럼 스스로를 세뇌한다. 그럴수록 불만과 스트레스는 점점 더 쌓여 가지만 애써 외면하고 묵묵히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버틴다. 물리학을 전공하면서도 문과대 강의를 더 많이 들으러 다녔던 별종 이기진 교수는 우리나라의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행복이란 그리 큰 것이 아니다. 나만의 시간을 보장받고, 그 시간에 남들이 뭐라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마 지금보다 몇백 배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읽다 보면 불편함도 느껴진다. 예를 들면, 만화를 그리는 것에 대해 "사실 해 보면 간단한 일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그중 하나가 만화를 그리는 일이다."라고 한 부분이나 너무 바빠서 그림 그리고 싶은 소망을 미루고만 있는 어느 잡지사 사장에 대해 "죄송하고 불행한 예언이지만, 그 사장님은 그림을 다시 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20대에 헤어진 애달픈 첫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라고 한 부분이 그렇다. 요리에 대해서 "그냥 편한 대로 최종적인 맛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료와 도구를 이용해 만들면 그만이다."라고 한 것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문장에 담긴 뜻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뭐든 시작하면 어렵지 않은데 거창하게 생각하니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는 건 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입장에만 비춰서 단정짓는 사고방식은 읽는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갈수록 스스로의 관점만이 옳고 다수에게 당연한 것은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는 사회에 살다 보니 뜻이 좋아도 배려가 부족한 문장을 만나면 아쉬움이 커진다. 

 

그래도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마음에 든다. 한 가지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24시간 한 가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숨가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는 시간이 사람에게는 늘 필요하다. 꼭 이기진 교수처럼 외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수집하고, 로봇을 만들고, 요리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취미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몰입할 수 있는 '딴짓'을 찾는 것은 바람직하다. 살면서 한눈 좀 판다고 세상이 뒤집어지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으니까 하루에 단 30분이라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에 즐거움을 심을 수 있는 딴짓을 찾아보자. 한 가지로 모자라면 두 가지, 세 가지도 좋다. 잘할 필요도, 평가받을 필요도 없는 딴짓이 우리의 삶을 조금은 반짝이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 무리드 바르구티 / 후마니타스

 이 에세이의 저자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라말라는 그의 고향이고 그는 유학 도중 난민이 되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행위 중 하나인 전쟁으로 인해 고향에조차 갈 수 없게 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이야기 속에서, 지금도 끝나지 않은 팔레스타인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읽고 싶은 책으로 꼽았다. 알지 못하면 움직일 수도 없다.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무심하게 지나치기에는 우리의 삶 역시 불안한다. 할 수 있다면 팔레스타인 사람의 눈으로 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도 찾아보고 싶다. 





2. 장서의 괴로움 / 오카자키 다케시 / 정은문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목을 보는 순간 '뜨끔'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3만 권이나 되는 책은 아니지만 방에 두기에는 분명 버거운 양의 책을 품고 있으니까. 사두면 언젠가는 읽는다는 말을 격언으로 모시며 미처 읽지도 못하는 책을 사대는 통에 집에는 읽은 책만큼이나 많은 못 읽은 책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그만 사고 있는 거 읽어야지,라는 다짐도 일주일을 못 간다. 뭐니뭐니해도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버리기 힘든 물건이 바로 책이다. 책과 이별하는 법을 배워보고 싶어 이 책을 골랐다. 책과 이별하기 위해 책을 보다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싶지만. 




3.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 / 김종관 / 달

 책의 소재로 '사랑'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세상이 변하고 살기가 어려워도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사랑만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으로 남겨두고 싶어한다. 그래야 생의 마지막 환상을 지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아름답고 깨끗하고 따스하기만 하던가. 사랑만큼 유치하고 찌질하고 질척거리는 게 없지 않은가. 사랑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칭송하기만 하는 에세이에 지친 지 오래라 이 에세이가 더욱 기대된다. 세상이 더럽고 치사해도 사랑만은 고결하다고 말하는 글이 아니라 세상만큼 사랑도 더럽고 치사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지?라고 말하는 책을 만나보고 싶다. 





4.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 장근영 / 예담

 심리학자에게 가장 연구하고 싶은 동물을 꼽으라면 왠지 고양이를 말할 것 같다. 도도하고 시크하지만 애교 넘치고 사랑스러운 요물 같은 고양이. 신비로운 눈빛은 시시각각 바뀌고, 이런 생각을 하나 싶으면 그 기대를 단번에 배신해버리는 반려동물. 고양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세 고양이의 집사로 살고 있는 저자는 자신의 전공을 십분 활용하여 독특한 고양이 에세이를 써냈다. 고양이와 심리학을 모두 좋아하는 내게는 꼭 읽어보고 싶은 에세이이다.






5. 읽고 싶은 이어령 / 이어령 / 여백

 이름에 무게가 실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좋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책임과 부담도 커진다는 것이니까. 이어령의 이름은 듣는 것만으로도 무척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제는 노(老)학자가 된 그는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무수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유명인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의 글도 점점 빛이 바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청년 이어령의 글을 만날 수 있는 책이라니, 신선하다. 세상의 더러움에 대항하고자 하는 패기로 가득찬 글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거침없는 문장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 책을 골라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1
초평화 버스터즈 지음, 이즈미 미츠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이하 『그날 본 꽃』)는 애니메이션이 원작이다. 2011년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큰 인기를 끌어 2013년에는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제작되었다. 극장판의 경우 올해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했는데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일본에서는 만화책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각본가가 직접 쓴 소설도 출간되었다고 한다(소설의 한국어판은 출간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인기를 끈 작품이라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일단 만화책의 그림체는 애니의 그림체를 꽤 잘 살린 것 같다.  

 

어느 여름의 끝자락, 진탄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난다. 그녀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멘마. 하지만 그녀는 진탄에게밖에 보이지 않는다. 멘마는 자신이 '소원'을 이뤄주길 바라는 것 같다며 진탄의 곁을 맴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변해버린 친구들 중 유일하게 진탄이 멘마를 본다는 것을 믿는 건 포포뿐이다. 포포를 시작으로 어릴 적 늘 함께였던 여섯 친구들이 차츰차츰 다시 모이기 시작한다.  

변하지 않았어. 다들 그 시절 그대로야--.

 

이 작품을 보자마자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이 떠올랐다. 악의 조직에 대항해 세상을 지키겠다는 당찬 포부를 지녔던 켄지와 친구들처럼 『그날 본 꽃​』에서도 진탄을 비롯한 여섯 아이들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장대한 목표 아래 '초 평화 버스터즈'를 결성한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된다. 한 동네에 살고, 한 학교에 다니고, 그래서 이유 같은 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함께였던 친구들이 내게도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 앞 골목에 모여 뛰고 구르고 소리지르며 놀던 친구들. 평생 함께 하자며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손가락 도장 찍고 얼굴만 봐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던 친구들이 말이다.  

 

지금은 그 시절 친구들을 볼 수 없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만난다면 나조차 기억 못하던 그때의 추억들이 서로의 눈과 입을 통해 새록새록 되살아날 것이다. 그것이 꼭 좋은 추억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초 평화 버스터즈'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과거로부터, 혼마 메이코로부터 도망 다니는 것도... 끝일지도 모르지.

과연 멘마의 소원은 무엇일까. 그리고 여섯 친구들이 도망쳐야만 했던 과거는 무엇일까. 밝은 그림체와 명랑한 여주인공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날 본 꽃』은​ 미스터리의 기운이 짙게 느껴지는 독특한 작품이다. 나처럼 만화책으로 이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당할 것이다. 미스터리가 풀리기를 기다리며 스스로의 옛 추억을 살짝 들춰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잊고 싶은 기억도 있겠지만 없던 일로 하기엔 분명 아까운 시간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 10]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10 -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2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항상 경계한다고 하는데도 무심코 빠져드는 것이 편견이다. 펼쳐보지도 않고 호화로운 유럽의 여행지에 대한 찬사가 가득한 흔한 가이드북일 거라고 마음대로 추측했던 이 책이 지금까지 읽은 어떤 여행 에세이보다 더 멋지게 다가올 줄이야. 이 책의 공동기획과 사진 제공을 담당한 대한항공의 TV CF를 보며 '가 보지도 못한 유럽인데 어디가 좋은지 알 게 뭐야'라는 질투를 불태우던 것도 편견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좁은 마음으로 끝내 외면했다면 얼마나 아까웠을까, 내가 하고 싶었던 여행이 고스란히 담긴 책, 『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 10』은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은 10가지 테마를 정하고 각 테마별로 10개의 장소를 뽑아 그곳의 여행 이야기를 풀어낸다. 최고의 여행지이자 모든 여행자의 꿈인 유럽. 그 깊고 넓은 공간은 보고 또 봐도, 가고 또 가도 질리지 않는 곳인가 보다. 예술, 음식, 사람, 풍경 등 독특한 테마 안에서 만나는 유럽은 일반 여행 가이드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같은 장소라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여행 에세이가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인생은 항상 ㄷ자로 뚫려 있어. 자꾸 억지로 ㅁ자로 메우려 하면 꼭 에러가 나. - 10쪽

겁이 많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내게 유럽여행은 신분상승의 꿈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유럽을 동경하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다음 생에서는 꼭 유럽에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적어도 유럽 여행을 못해서 가슴앓이할 일은 없을 테니까. "산책자"가 되어 기꺼이 길을 잃고 싶은 파리, 달콤한 젤라또와 살아있는 신들로 대표되는 로마, 유럽답지 않게 소박한 나폴리, 공기만으로도 찾아온 이들을 치유해주는 알프스, 전쟁의 상처를 품고 더 아름답게 되살아난 두브로브니크 등 유럽은 고작 100이라는 숫자로는 절대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의 원천이었다. 게다가 유난히 아름다운 사진들이 이 책을 유럽처럼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글을 담당한 정여울 작가의 풍성한 인문학적 소양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의 의미를 절절히 느끼게 해 준다. 현존하는 유토피아가 12년간의 고통스러운 투쟁 끝에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스페인의 작은 마을 말리날레다는 우리에게 부러움만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한 행동에 대한 절실함마저 일깨워준다. 별 고민 없이 눌러앉아 살아도 될 것 같은 한적한 옥스포드에서 '작은 나눔의 공동체'라는 꿈을 꾸며 설레기도 한다. 정 작가처럼 책으로밖에 만날 수 없었던 예술가나 학자들의 흔적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다면 그들에 대한 경애(敬愛)도 더 깊어질 것이다. 여행은 '쓰디쓴 인생을 속이는' 달달한 마카롱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삶의 자세와 세상을 보는 시선을 정련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여행이 저절로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서라도 내 삶을 바꾸겠다는 절실한 의지가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 16쪽

여행지란 여행자에게는 낯설고 신기한 곳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지켜야 할 보물이라는 당연한 사실도 정 작가의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다. 여행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고 마음에 담아오는 것이다. 나와 비슷한 여행관을 가진 정 작가의 글 하나하나가 마음에 깊이 퍼져왔다. 나는 자주 떠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여행기를 읽는 것은 참 좋다. 나도 이런 아름다운 여행을 해봐야지, 진짜 고독, 진짜 삶, 진짜 나를 찾아봐야지,라는 꿈을 갖게 하니까. 

 

'나만 알고 싶은 유럽'이라니, 새빨간 거짓말이다. 자신이 가본 곳에서 자신이 느낀 것을 당신도 느껴보라고, 당장 떠나는 게 어떻겠냐고 등떠밀고 있으면서 '나만 알고 싶은'이라니 당치도 않다. 이토록 여행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르는 책도 오랜만이다. 지금 가장 먼저 이루고 싶은 소망은 영국의 피카딜리 광장에서 뮤지컬을 보는 것이다. 미안함도 자책감도 다 던져버리고, 뒷일따위 생각하지 않고, 당장 떠나고 싶어졌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