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리건 K - 2013 제1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최홍훈 지음 / 연합뉴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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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야구소설'로 보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주인공은 고등학교 때 이미 야구를 못하게 된 중년의 아저씨이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근미래의 야구 경기라는 것은 지금의 야구와는 많이 다르다. 룰도 그렇고, 선수가 아니라 심판이 경기를 지배하는 이상한 스포츠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단순히 '야구'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야구팬보다는 야구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 더 재미있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가 죽었다"라는, 야구팬의 심장에 빈볼을 던지는 듯한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훌리건 K>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배경은 가까운 미래. 고등학교 때 스트라이크를 볼로 판정받아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리던 한 육손 투수가 당시의 야구 심판이자 현재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판관 포청천에게 항소를 하는 내용이다. 줄거리가 간단한 만큼 소설은 매우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소설보다는 웹툰이라는 형식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이 소설은 재미있고, 머릿속에서 빠르게 시각화된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바로 90년대 우리에게 '정의가 지켜지는 사회'의 통쾌함을 보여준 드라마 '판관 포청천' 속 인물들이다. 

<훌리건 K> 속에서 절대권력을 쥐고 흔드는 이가 왜 포청천이어야 했을까,라는 의문은 남는다. 드라마 속에서 부마에게조차 공정한 판결을 내리던 꼿꼿한 법 집행자의 상징인 포청천은 이 소설 속에서 부패한 권력의 화신이 되어 있다. 그래서 소설 중반까지 포청천이라는 캐릭터에는 쉽게 몰입되지 않았다. 쓸데없이 수식이 많은 문장이 종종 눈에 띄고,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긴 주석은 읽다 보면 소설의 흐름을 끊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런 단점은 사소하다. 왜냐하면 작가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큼은 돌직구로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에 대한 한 소시민의 작지만 거대한 반란. 그 결말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말과 관계없이 그는 이미 영웅이다. 두려워서 외면하려고만 했던 자신의 정의를 당당히 내세웠기 때문이다. 

나는 심판의 권위에 불복하는 야구선수를 보며 통쾌함을 느꼈던 거야. 오심에 대한 한 선수의 불복종이 야구를 지켜낸 거야.(213쪽)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라 체념하며 현실을 외면하거나 마치 수퍼맨처럼 초인적인 존재가 되어 현실을 뒤엎는 것만이 부당한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은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한 작은 정의를 내보일 용기를 가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절대권력의 무게에 짓밟히지 않고 사는 방법일 것이다. <훌리건 K>는 현실에 무조건 굴복하지 말라고, 현실을 제대로 보려는 노력을 그만두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9회말 2아웃 동점 상황에서도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면 피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야구고, 그것이 인생이다. 

원문 주소 : http://cafe.naver.com/cine035/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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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노래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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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도 가지 않던 여름이 가고, 보내고 싶지 않은 가을이 왔다. 바람이 완전, 음악이다.(186쪽)

보내고 싶지 않은 가을, 음악과도 같은 그 바람을 조금 즐기나 했더니 벌써 겨울이 새치기를 했나 보다. 쌀쌀맞은 바람이 창문의 틈이란 틈은 다 비집고 들어와 나를 괴롭힌다. 겨울에는 그저 따뜻한 핫초코 한 잔에 음악을 곁들여 이불 속에서 책이나 읽으면 파라다이스다. 그래서 겨울이 코앞까지 다가온 계절에 만난 김중혁의 『모든 게 노래』는 때이른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다.  

 

『모든 게 노래』는 음악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소설가 김중혁이 쓴, 노래에 관한 이야기들을 올망졸망 엮어놓은 산문집이다. 고등학교 때 라디오에 매달려 살다시피 했고, 외출할 때 이어폰이 없으면 불안에 시달리고, 드라마는 안 봐도 O.S.T는 찾아 듣는 성격인지라 이 책을 받아들고 무척 설렜다. 표지에서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이름도 많이 보여서 더 두근거렸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29쪽)


 

'좋은 에세이'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좋은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모든 게 노래』를 감히 평가하자면 10점 만점에 9점. 읽으면서 계속 '맞아, 나도 그런데'나 '나는 그렇지 않은데'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 김중혁 작가가 좋아하지만 나는 잘 몰랐던 김정미의 <봄>이나 고찬용의 <무지개 나비> 같은 노래가 내 취향에도 맞다는 것을 알았고, 김중혁 작가의 취향에는 별로라는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나는 무척 좋아한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노래방에서 남의 노래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사소한 날짜나 사건까지 기억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 어릴 적 "온몸을 뒤흔들면서 귀가 터지도록" 듣던 메탈과 록을 이제는 어지간하면 못 듣는 것은 나와 김중혁 작가가 비슷하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와 비슷한 점을 찾으면 퀴즈라도 맞춘 듯 뿌듯하고, 다른 점을 찾으면 새로운 발견을 한 듯 신기했다. 마치 내가 김중혁 작가와 음악에 대한 수다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음악도, 사람도, 물건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정체성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사랑해) 그 사람에게서 알 수 없는 묘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풀기 위해(흠, 푼다니까 좀 야릇한 어감이 되어버렸지만) 반복해서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100쪽)

나도 공부를 하거나 리뷰를 쓰거나 책을 읽을 때 항상 음악을 듣는 편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뮤지션의 새 앨범이 나오면 일주일에서 길게는 보름 이상 주구장창 그 앨범만 듣지만 평소에는 최신곡부터 90년대 명곡까지 되는대로 재생목록에 걸어두고 무작위로 듣는다. 그러다가 귀에 탁 꽂혀서 마음까지 푹 찌르는 노래를 만나는 짜릿함이 좋다. 그래서 미처 몰랐던 좋은 노래를 알게 되면 보물이라도 찾은 듯 마음이 풍족해진다.


음악은 친구가 되어준다. 나와 함께 묵묵히 걷는다. 시간을 함께 붙잡아주고, 계절을 잘 느낄 수 있게 해준다.(44쪽) 

노래를 추천받는 것은 새로운 친구를 소개받는 것 같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친구 하자'는 말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말이나 글 대신에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낭만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노래 아니겠는가. 


작가로서 김중혁의 매력은 읽다가 무의식 중에 웃음이 터지는 문장을 쓸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 문장이 전혀 과하다는 느낌 없이 자연스러워서 또 대단하다. 타고난 감각이든, 오랜 연습과 노력에 의한 것이든, 혹은 둘의 적절한 조화이든 간에 이 책에 소개된 노래들을 몰라도 글이 술술 잘 읽히는 것은 역시 김중혁 작가의 글솜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밤만 되면 스스로가 어쩐지 진화한 인간같이 느껴질 정도다. 물론 오후 1시쯤 잠에서 깨어나 머리를 쥐어박으며 이런 잠벌레 같은 인간이 다 있나 자학하고,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오고 말지만 말이다.(203쪽)

글 속에서 무척 겸손한 김중혁 작가이지만 읽다 보니 재주가 너무 많다.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데, 기타까지 칠 줄 안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사기캐릭터'다. 음악가를 꿈꾸다가 재능이 없어서 소설가가 되었다니, 둘 다 못하는 사람으로서 샘이 나서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모든 게 노래』를 읽고 나니 김중혁 작가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다. 올 겨울 남자친구 대신 옆구리를 따뜻하게 해 줄 노래를 잔뜩 선물받았으니까. 이제 책 속에 소개된 노래를 몽땅 모아서 새로운 플레이리스트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리스트 제목은 물론 '모든 게 노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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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업 -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법륜 지음, 유근택 그림 / 휴(休)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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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기계발서나 지침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라는 것이 대체로 천편일률적이고, 내 상황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스스로 찾아 읽지 않는다. 법륜 스님의 『인생수업』도 신간평가단 활동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다행히도 성공한 사람의 자기자랑이 아니라서 조금 편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이 책의 메세지는 아주 간단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나 실천하지는 못하는 '지금 행복하기'이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예요. 그래서 내가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할 책임도 있고 권리도 있습니다.(17쪽)

모 기업 광고 카피 중에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는 말이 있다.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법륜 스님은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 '왜 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지금'뿐이다. 바로 어제도 지나간 과거이고, 바로 내일도 오지 않은 미래이다. 스스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시간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행복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닙니다. 일어난 일은 다만 일어난 일일 뿐이에요. 그것을 좋게 생각하면 좋은 일이 되고, 나쁘게 생각하면 나쁜 일이 됩니다. 좋은 일 나쁜 일은 결국 내가 만드는 거예요.(112쪽)

행복하려면 다른 이에게 베풀 때 똑같이 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죽은 이는 빨리 떠나보내야 하며, 집착을 버리고 기대를 줄여야 한다는 말에 무척 공감했다. 젊은 시절 너무 편하게만 지내도 안되지만 몸을 너무 혹사해도 안된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무작정 치열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요즘 사람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게 다 좋은 건 아닙니다.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 서로 기대하는 게 많아서 오히려 원수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130쪽) 

이 말 또한 깊이 공감했다. SNS를 통해 좋은 인연도 많이 얻고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으면서 나 스스로 깨달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때 무척 가까웠던 관계가 점점 멀어짐에 아파하기도 하고, 요즘 소홀해서 섭섭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너무 무심한가 고민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관계의 형태와 깊이는 자연히 변하므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생수업』을 읽으면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복지제도가 잘 되어있으니 여자나 노인이 경제적인 걱정 없이 혼자 살기 좋다는 것이나, 가난한 나라의 노인은 눈빛에 생기가 넘치고 미국 노인들은 눈에 생기가 없다는 이야기는 성급한 일반화이다. 이런 오류가 가끔 눈에 띈다. 


지침서란 재미나 감동보다는 실질적인 조언을 얻기 위해 읽는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자신만의 '중심'이 잘 잡혀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쓴 지침서라고 해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 독자 스스로 필요한 것은 뽑아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필요없는 것들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물론 이것도 내 주관적인 기준이기는 하다). 


『인생수업』을 읽기 전에 딱 한 가지만 기억하자. 이 책은 '지금 행복하라'고 말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행복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한 번도 행복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행복하기 위해서 준비만 하다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행복해 보지 못한 채 죽습니다. 그러니 준비할 것도 없어요. 바로 지금부터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준비하지 말고, 오늘 당장 행복해야 합니다.(267쪽)

내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오늘을 괴롭게 산다면 행복해지기도 전에 자신이 피폐해지고 만다. 행복해지기 위해 힘든 것과 힘들지만 행복하게 사는 것은 분명 다르다. 괴로운 일은 피하고 즐거운 일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힘들어도 행복한 일을 찾고,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즐겁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법륜 스님의 행복론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1등만을 강요하는 경쟁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하기 위한 첫걸음을 어디로 떼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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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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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독일에서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문학의 교황'이라 불리는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향년 93세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그의 저서 <작가의 얼굴>이 우리나라에서 재출간된 지 약 한 달만의 일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에 받아든 이 책은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독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TV 프로그램 <문학 4중주>를 통해서 일반 시청자들을 고전 독자로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지녔다는 사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게다가 이 책에 소개된 40명의 작가 중 이름조차 낯선 사람이 거의 절반에 가까운 것을 깨닫고 조금 충격이었다. 나의 독서력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나는 그의 이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라는 위대한 평론가와 세계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작가를 스무 명 가까이 새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작가의 얼굴>에 실린 작가들의 초상화는 하나같이 개성이 넘친다. 마치 시사만화처럼 다소 익살맞아 보이는 로레다노의 그림들은 특히 눈길을 끈다. 화풍 때문이라고 해도 같은 작가가 그린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이는 것을 보면, 역시 그림이란 그리는 사람의 마음을 담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수십장의 초상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툴리오 페리콜리가 그린 막스 프리슈의 초상화이다.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 속에서도 작가로서의 고집 같은 것이 느껴지는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라이히라니츠키가 페리콜리에게 "재치와 풍자만이 아니라, 존경과 연민까지도 담아낼 줄 아는 화가"라는 찬사를 보낸 이유를 알 것 같다. 



문학을 사랑한 사람답게 라이히라니츠키는 글 속에 작가들에 대한 애정을 가감없이 담는다. 하지만 그는 '좋은 게 좋다'는 두루뭉술한 표현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그는 진짜 스타 평론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라이히라니츠키가 신보다도 믿는다는 셰익스피어와 괴테에 대해서는 각각 "역사 이래 가장 뛰어난 작가"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표현했지만 하인리히 만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그의 책을 좋아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반편의 폴란드인, 반편의 독일인, 그리고 온전한 유대인"이라고 말했던 라이히라니츠키는 유대인 작가들에 대해서는 감정을 더 많이 드러낸다. 그는 구스타프 말러를 "도달 불가능한 것을 동경하고 갈망하다가 최고조에 이르러 좌절한" 작가로, 알프레트 되블린은 "바보라서, 측은히 여겨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요제프 로트는 "고향을 찾아 헤맨 동구의 유대인"으로 표현했다.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부자와 천재의 상징이 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약속의 땅'을 찾아 헤매는 실향민이다. 그런 동포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라이히라니츠키는 굳이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지독한 유대인 혐오주의자"인 리하르트 바그너를, 그를 감동시킨 <트리스탄>이나 <명가수>를 썼다는 점에 있어서만은 인정하는 객관성도 지니고 있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라이히라니츠키의 글솜씨이다. 평론가이니 글을 잘 쓰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의 놀라운 표현력과 비유는 책 여기저기에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다가 독자의 입에서 감탄을 끌어낸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말이다. 

토마스는 시민이면서 귀족이었고, 하인리히는 구제불능의 보헤이만이면서 준엄한 예술가였다.(164쪽)

그는 위트를 갖춘 설교자였고, 유머를 아는 세계 변혁가였으며, 풍자를 구사하는 정의의 사도였다.(67쪽) 

읽을 때는 무척 쉬워 보이지만 아마 글을 써본 사람들은 이런 문장을 써내는 것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얼굴>은 에세이라기보다 라이히라니츠키의 사진 일기 같다. 읽고 나면 왠지 라이히라니츠키의 삶의 단편들을 엿본 느낌이 들어 그가 무척 친근하게 느껴진다. '누군가가 읽은 책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는 책이 삶이고 삶이 책인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책을 말하고, 인용하고, 권한다. 그래서 어려운 작가론과 어려운 책들이 가득한데도 가벼운 수필을 읽듯 편안하게 읽힌다. 그가 소개한 작가와 작품이 궁금해서 자꾸만 기웃거리게 된다. 어려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재능이 아니고, 쉬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어려운 글을 쉽게 쓰는 것이야말로 진정 글쓰는 재주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라이히라니츠키는 최고의 작가다. 


작가 지그프리트 렌츠와 "너무 가까웠기에, 평론에 필수적인 '거리'를 확보하기 힘들"어지자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자제한 것에서 평론가로서의 단단한 신념도 느껴진다. 그는 "평론가의 첫째 의무는 정직함"이라 했고, "명료함은 예의"라고 했다. 나는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쓸 때 '내가 책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자격은 없다'는 생각과 누군가 반박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모호한 태도를 견지해 왔다. 비록 평론가도 전문가도 아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리뷰어로서의 내 태도는 책에 대한 예의도 독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라이히라니츠키라는 평론가를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 정말 많이 아쉽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영화 <러시안 소설>에서 김기진 작가가 한 대사처럼 '말은 뱉으면 사라지지만 글은 남으니까'. 앞으로 그의 글을 좀 더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아,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 한 가지. "살아 있는 한 최종 결말이 어찌 날지" 모른다던 귄터 그라스와의 악연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답은 이제 귄터 그라스만이 알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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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 2013-11-02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수리뷰로 선정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마법고냥이 2013-11-02 23:05   좋아요 0 | URL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이라 얼떨떨하네요~

남희돌이 2013-11-02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수 리뷰 선정 축하합니다.

마법고냥이 2013-11-03 00: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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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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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문화가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으로 화제가 된 1997년 작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조차 2003년에야 정식으로 극장에서 개봉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사람들은 다 봤다고 하는 것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었다. 나 역시도 1997년 당시 <모노노케 히메>를 정말 보고 싶어서 영어판 비디오를 구했다. 영어도 일어도 짧아 주인공 이름 외에는 거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몇 번씩 보고 또 보았다. 지금도 내게 있어 미야자키 감독 최고의 작품은 <모노노케 히메>이다.


비록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나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적잖이 아쉽지만, 그래도 그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절대 가벼워지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도 띠지 속에서 자신이 만든 캐릭터 '토토로'와 똑 닮은 얼굴로 지그시 미소짓고 있는 수염 할아버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가 소개한 50권의 책은 우리나라에도 대부분 번역서가 나와있는 것으로 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읽는 것이라는 편견과 미야자키 하야오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은 잠시 덮어두고, 그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이 책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고른 이와나미 소년문고 50권에 대한 짤막한 소개로 이루어진 제1부와 책과 그림, 자신의 일에 대한 그의 에세이로 이루어진 제2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50권 중 첫번째 책으로 <어린 왕자>를 꼽았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 처음 읽은 후로 2~3년에 한 번씩 다시 읽는 책이라서 무척 반가웠다. 그의 말대로 '한 번은 읽어야' 할 책이다. 소개된 책 중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은 미야자와 겐지의 <주문 많은 요리점>. 이미 유명한 책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개글을 보면 지금 당장 이 책을 읽어야만 할 것 같다. <파를 심은 사람>이라는 한국 민화 모음집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웃 나라 사람에 의해 우리나라의 책을 알게 되는 기분은 무척 기묘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 속에서 한결같이 평화와 자연의 소중함을 이야기해 온 감독이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은 예술인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예전만 못하다는 비판과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애니메이션을 꿋꿋이 만들어 온 장인이다. 그래서 그의 창조 기반에 어린이책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책은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가 책 읽기를 정말 즐길 수 있게 된 계기가 어린이책이었던 것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그의 말처럼 '살아남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니까. 그는 자신에게 재미있는 책을 읽었고,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어 할 작품을 만들었다. 


애니메이션 감독답게 그는 책의 표지와 일러스트에도 관심이 많다. 어린이책에 실린 유럽 작가들의 정교한 일러스트에 감탄하는 것을 보면 그의 지독한 장인정신과 순수한 예술혼이 느껴진다. 아름답고 섬세한 배경으로 유명한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바탕이 그의 이런 성격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책에 대한 그의 생각에 나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단 한 권만 있으면' 되는 책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 책이 너무 많아서 평생 다 읽지 못한다는 것이 꼭 안타깝지는 않다. 죽는 순간까지 내게는 열리지 않은 책의 내용을 상상하며 설레는 기대감을 가지는 것도 무척 낭만적일 거라 생각한다. 좋은 책이 많은 곳에 사는 것은 축복이다. 그래도 '나만의 책 한 권'은 가지고 싶다. 누가 뭐래도 내게는 최고인 책, 마치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애인 같은 책 한 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책 읽는 법을 깨닫고, 좋아하는 책을 찾고, 자신만의 책 한 권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자라서 기억에 남는 책이 수학 참고서나 영어사전이 되는 세상은 상상하기조차 싫다. 


아무도 현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현 시대에서 '종말'을 보고 있지만 어린이들에게서 '미래'를 보고 있다. 빠르고 쉽게 소비하며 금방 잊어버리고, 왜곡된 현실과 진짜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다시 해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 바로 어린이문학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한때 아이였던 어른들을 위해서도 그가 권하는 50권의 책들은 의미가 있다. 


책 읽기의 즐거움도 잊은 지 오래, 책을 읽어야 할 이유도 잃은 지 오래인 사람들에게 이 책에 소개된 어린이책들로 다시 독서를 시작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뽑은 책이라서가 아니라, 세상에는 재미있는 책이 아주 많다고 말해주며 사람좋게 웃는, 어린이책을 무척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권하는 책이라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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