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 이문영 장편소설
이문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시마다 고유한 소리를 발산했다. 그 도시의 고음과 저음이 분리되는 동네에 그 방은 있었다. 이 나라 정치를 결정짓는 도시로부터 멀지 않은 동쪽에서 과거 왕조시대의 성문이열리고 닫혔다. 왕이 백성 위에 군림했던 옛날이나 국민이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 지금이나 성문은 안과 밖을 구별했다. - P25

새는 것이 비 말고 또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다. 이사한 방에 짐을 들이는 순간 고향 마을로 되돌아간 줄 알았다. 입주 첫날부터 위층 사람들과 살림을 합친 기분이었다. 천장에서 빗방울 대신 소리가 흘러내려 방바닥에 투두둑 떨어졌다. 페트병으로도 받쳐지지 않는 소리들이 온 집안 구석에 고였다. 일주일도 안 돼 한 번도 본 적 없는 위층 가족의 모든 것이 보였다. - P27

직(職)이 업(業)이란 것. 일과 삶이 카르마로 얽혀 있다는것. 일을 하며 일로 꾸린 일상은 일을 잃으면 무너진다는 것.
‘업으로서의 직‘을 그 공장 해고자들처럼 삶과 죽음으로 격렬하게 입증한 경우는 없었다. 삶이 깨진 사람들에게 지옥의 반대는 천국이 아니었다. 지옥은 천국의 도래가 아니라 파괴된일상이 회복될 때 물러갔다. - P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시선 50
이종형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봄바다


붉은 동백꽃만 보면 멀미하듯
제주 사람들에겐 4월이면 도지는 병이 있지
시원하게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생손앓듯 속으로만 감추고 삭혀온 통증이 있어

그날 이후
다시 묵직한 슬픔 하나 심장에 얹혀
먹는 둥 마는 둥
때를 놓친 한술의 밥이 자꾸 체하는 거라
시간이 그리 흘렀어도
깊고 푸르고, 오늘처럼 맑은 물빛 없으니
한걸음에 내달려 보러 오라고 너에게 기별하던 봄바다만
보면
요즘은 별나게 가슴 쿵쿵 뛰고
숨이 턱턱 막혀올 때가 있는 거라
세상에서 가장 큰 무덤인 듯
바라보는 것만으로 죄짓는 기분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 P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 이문영 장편소설
이문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자가 되지 못한 그의 이야기들이 이력서 빈칸을 비집고 들어가려다 곧고 매끄러운 실선에 막혀 무음의 소리를 질렀다.
그에게 영원은 그 실선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 상태 그대로 끝나지 않고 뻗으며 그가 달려가는 곳마다 먼저 도착해앞을 가로막는 바리케이드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 시간을 쪼개며 살아온 그의 애씀을 이력서는 학력과 경력의 틈에 끼워주지 않았다. 그는 애를 쓰고 이력서를 쓸수록 묶어졌다. - P18

너무 전형적이어서 뻔한 가난은, 요즘 유행에도 뒤떨어진 불행은, 공정과 능력 같은 단어들에게도 외면받는 청춘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묽어지고 있을뿐이었다. - P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 이문영 장편소설
이문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부터 묽은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가는 낮과 밤을 쫓아가려고 따다다다다 액셀을 당기다 보면 하루하루 묽어지기 마련이었다. 피부가 쓸리고 색이빠지면서 윤곽선이 뭉개진다. 너무 싱거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농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 P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시선 50
이종형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람의 집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 P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