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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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스펜스가 만들어내는 긴장감만은 이 책이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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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산업화 이후 우리는 남이 해준 음식을 먹는 시대에 살고있다. 가족이나 찬모 같은 가까운 타인도 아니다. 가공식품을 쏟아내는 공장들, 각종 식품 첨가물을 개발한 연구자들, 기업적으로 농작물을 '찍어내는' 농산업체에 이르기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전적으로 밥줄을 맡기기란 인류 역사상 전례없던 일이다. 재료수집부터 요리까지 스스로 해결해오던 때와 달리 음식과 나 사이엔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십겹의 장막이 생겼다. 이러한 미지는 공포를 부른다. 그러나 이 공포가 다분히 과장된 그림자였다면 과연 어떨까? 저자인 하비는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약 100여 년간 미국을 중심으로 전세계엔 건강과 섭생에 대한 수많은 유행들이 명멸했다. 그중에 상당수는 '바이오 하자드(Bio Hazard : 미생물과 같이 실제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생물학적 재해)' 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파스퇴르가 세균을 발견하자 세균박멸에 대한 집착이 시작되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반대로 메치니코프는 세균의 일종(유산균)이 생명연장의 도구라 주장했다. 세균 열풍 다음엔 미량 영양소의 차례였다. 비타민이 발견되면서 비타민 결핍증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퍼졌고 최근엔 미국의 치솟는 심장병 통계가 보여주듯 콜레스테롤과 지방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유행 자체가 치기어린 연구자, 굼뜬 관료, 약삭빠른 기업가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대략 이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 저자의 논지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매력적이기도하다. 그러나 문제는 논거다.


파스퇴르부터 다이어트 열풍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나열한 역사적 사실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엔 다소 부족하다. 오히려 스스로의 발목까지 잡는다. 4번째 챕터인 쇠고기에 관련된 장을 떼어놓고 읽으며 누가 쇠고기를 먹고 싶어질까. 남북전쟁 시절부터 시작된 핑크슬라임(본문에는 분홍점액이라고 번역했지만 그 자체가 일종의 고유명사다. 선도가 낮은 고기나 회수육을 암모니아를 이용해 살균하고 다시 갈아낸 혼합가공육을 말한다. 지난해 버거킹을 비롯한 미국의 대형 패스트푸드 체인들이 연이어 이를 사용하고 있음을 시인해 충격을 주었다.)의 전통(?)은 육골분 사료와 광우병을 통해 정점에 도달했고 현재진행형이다는 내용이다. 이걸 읽으면 쇠고기 공포는 오히려 실재한다고 생각하는게 상식 아닐까? 그러나 저자는 이런 끔찍한 쇠고기 잔혹사들을 주욱 나열하고 '현실보다 과장되었다' 라고 말한다.


책의 구성 자체에도 의문이다. 여기서 다룬 식품공포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세균, 우유, 유산균, 비타민, 쇠고기, 유기농, 콜레스테롤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과거의 일 들이다. 이들보다 최근 우리에게 가깝게 대두된 문제들은 애써 피한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스파탐(합성감미료), MSG(중국음식점 증후군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난제다), 환경호르몬(내분비 교란물질), GMO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음식이 아닌 의약품의 사례지만 탈리도마이드와 같은 사례도 있다. 이 또한 그냥 공포마케팅의 일환이겠거니하고 넘어가라는 뜻일까? 저자는 식품공포는 실제 통계에 비해 다분히 과장었고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어차피 죽는거 그냥 적당히 먹고 적당히 죽자(?)는 식의 투박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미국산 수입쇠고기 파동 때 TV토론에 참여한 한 대학교수를 연상시키는 태도다. '실제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로또맞을 확률보다 낮으니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 이는 시청자들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더욱 분노하게 했다. 식품공포의 본질은 위험도가 낮고 높음의 문제가 아니어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타인의 손에 의해 자신의 안위와 건강이 결정된다는 점이 진짜 공포다. 백만분의 일이든 천만분의 일이든 나에게로 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서운 점이다. 


역사학자라는 저자의 한계도 보인다. '사료' 에 의존해 거시적 접근만하니 역사라는 큰 틀에서 봤을 때 식품 공포란 순환주기를 가지고 반복되는 역사적 사건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를 살았던 개개인의 미시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면 어떤 의미를 가지게될까? 또 생리학이나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이 공포를 검증할 재간이 없으니 그저 당시 신문보도를 뒤져서 인용과 인용만 반복하는 걸로 과학적 논거를 대신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실패다. 뭔가 전복적인 결론을 통해 Hot Shot Star가 되려는 욕심에 부적절하게 사료들을 꿰맞춘 과욕의 결과물로 보인다. (아니 막말로 진짜 중간중간 내가 같은 주제로 한권 쓸까? 하는 생각이 여러번 불끈거렸다니까...) 빈곤한 관점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면 자료가 아무리 풍부한들 그 앙상함을 감출 수 없다.


출판사 리뷰나 홍보를 통해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이 있다면 몇가지 다른 책들을 권해주고 싶다.



최낙언 -  당신이 몰랐던 식품의 비밀 33가지

식품공학을 전공하고 빙과업체 연구개발자로 재직했던 저자가 전공을 살려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식품첨가물 공포에 접근한다.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와 결론적으로 같은 말을 하지만 접근법은 전혀 다르다.


안병수 -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위의 '당신이 몰랐던 식품..' 과 대척점에 서 있는 서적. 이미 국내 베스트 셀러를 기록해 친숙할 것이다.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와 비교해서 읽어보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렉 크리쳐 - 비만의 제국

팜유와 옥수수과당에서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뚱뚱한 나라 미국의 연원을 찾는 논픽션 르뽀. 읽는 재미가 특히 좋다


에릭 슐로서 - 식품 주식회사

2010년 오스카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책을 정리했다. 첨가물, 기계적 사육, 대규모 영농, 종묘회사, 패스트푸드등 현재 만연중인 식품공포의 '제공자' 들을 집요하는 좇는다.



로렌 코데인 - 구석기 다이어트

첨가물은 고사하고 산업화, 증기기관 심지어 농경조차 발명되지 않았던 시기 태초의 인류. 과거를 통해서 '종' 으로서의 인류 본연의 식성을 찾아 떠나는 모험, 팔레오 다이어트.



P.S. 실컷 씹어놓고 별은 왜 3개냐구요? 이게 증정본으로 받은거라서 차마 평점까지 깎기엔 조금 미안해 지더라구요.


P.S. 책의 완성도 자체도 조금 불만입니다. 오탈자가 두세곳에서 발견됐는데 그건 그냥 눈감아주지만 번역에 있어서 인명과 같은 고유명사 (키튼튼 -> 치텐튼) 를 바로 잡아야 할 것들도 보이고 이야기한 핑크슬라임처럼 역자가 각주나 역주를 달아서 해결해야 될 부분도 여럿 있습니다. 참고문헌이나 각주를 통째로 날린 건 국내 출판사들이 늘상 하는 일이라 뭐 그러려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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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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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하겠다는 야심 찬 기획 (+★★)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 인물의 생을 추적하는 방법(평전), 비슷한 여러 인물을 모아 전시하는 방법(열전), 특정 사건에 집중하는 인과적 서술, 최근 들어 각광받는 미시사 연구까지 제각각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가장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정공법' 은 바로 시간순서에 따른 연대기다. 개개의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주욱 나열만 하면 되지만 막상 시작해보면 쉽지 않다. 동시대 다른 공간에서 일어난 무수한 사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야 해서 자료의 양은 눈더미처럼 불어나고 이내 개인이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대표적인 편년체 사서인 '조선왕조실록' 이 왜 유네스코 기록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역사적 사건의 흐름을 정리하기 위해 동떨어진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사건들, 그 안에서 제각각 뛰논 인물들의 궤적으로 하나하나 추적해 적는다는 것은 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한 명의 기록자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여 주제가 무엇이 됐든 그 기원에서 종극에 이르기까지 연대기적 구성으로 역사를 정리하겠다는 시도는 실로 야심 찬 시도다. 그 분야에 정통한 최고의 권위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며 기초학문 분야의 토대가 부실한 국내에선 더더욱 견물생심인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버트 서비스의 '코뮤니스트' 는 그 시도 자체만으로 별 다섯 개를 주고 시작할 만하다. 이 책은 공산주의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는 맑스-엥겔스 정도가 아니라 '비포어 맑스' 까지 거슬러 올라가 시작한다. 맑스와 엥겔스가 영국 망명후 본격적인 프로파간다를 실시하기 전부터 어떤 인물들의 어떤 저작들을 읽었는지 부터가 시작이다. 그 기원은 프랑스 혁명이후 실시된 수평적 자유와 루크와 같은 사상가들의 자유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시작된 저자의 펜은 다음 장에서야 맑스와 엥겔스를 거쳐서 러시아 혁명, 2차대전, 동구권의 공산화, 미국 내의 공산주의 운동, 중국와 인도 차이나 반도에서의 혁명, 쿠바와 체게바라를 거쳐서야 비로소 1980년대 말 공산주의 종언에 도달한다.


방대해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디테일 ( - ☆)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 책은 시리즈로 된 기획이 아니라 한 권짜리 단행본이다. 물론 그 분량은 몹시 두툼하다만 100년도 전에 시작된 한 현상의 역사를 모두 다루기에는 또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다. 더욱이 저자는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시작했다. 지구 상에 존재했던 공산주의 정권과 위정자라면 그 누구도 빠짐없이 짚고 넘어가는 '분량의 공산주의' 를 실천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10월 혁명과 2월 혁명, 스탈린과 독소전과 같이 이야깃거리가 방대한 러시아의 경우를 제외하면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이라 한들 모두에게 나눠주니 몹시 제한적이다. 그래서 각 장마다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은 오히려 제한적이다. 저자의 독창적인 해석이나 사건의 전후 맥락을 깊이 파고드는 디테일은 없다. 그저 어느 해에 레닌이 편집장이 되고 다니 그라드로 돌아왔고 조직을 구성했고 임시정부를 장악했고 하는 사실들의 나열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얻으려는 이들이 있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이미 공산주의의 역사와 역대 공산정권을 지배해온 독재자들에 대해서 최소한 들어서라도 알고 있는 이들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정리하기 위해서 읽으면 좋을 책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한 청년이라면 위키피디아가 더 친절하며 맑시즘이 궁금하다면 다른 맑스-엥겔스 선집을, 자파스타 혁명과 체게바라를 흠모한다면 체게바라 평전을 읽은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뼈대는 있지만 살은 없다.



식상하다 싶은 결론과 팍팍한 읽는 맛 ( - ☆)


그렇다면 이 야심 찬 기획과 압도적인 분량에 담긴 주제는 무엇인가? 지극히 당연하고 식상한 것이라서 다소 맥이 빠진다. 한마디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되겠다. 저자는 단순히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기획한 듯하다. 특히 공산주의 체제와 독재가 거의 필연적인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 사실을 귀납적으로 독자들에게 확인시켜주기 위해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중국의 개방에 이르기까지 그 수많은 꼬뮤니스트들을 하나하나 언급했던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 혁명을 수평적 해방의 이데올로기라 믿고 주장했다. 그러나 막상 본인들의 생활과 삶에서부터 권위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인 면모를 담고 있었다. 특히 맑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과 필연적 혁명론은 기독교적 종말론과 메시아의 재림을 외치는 '천년왕국론' 을 기저에 깔고 있었음을 저자는 누차 강조한다. '종말 뒤에 오는 천년왕국론' 은 맑스 이후 수반은 공산지도자들이 정권을 잡을 때 이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맑스의 국가는 언젠가는 해체되어 개인들이 자유를 누리게 될 이상향이었지만 실제 공산국가들의 현실은 달랐다. 특히 '평등' 을 강제하기 위해선 각종 규제를 강제할 강력한 국가가 더욱더 필요했다. 이들은 단순히 경제적 수단과 분배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과 문화까지 억압했던 공통된 패턴을 보인다. 러시아에서는 소비에트 혁명이후 교복과 땋은 머리를 강요하는 폐색된 학교문화가 부활했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일당독재와 추상과 같은 지도자의 권위를 강화했고 그 정점은 역시 북한의 김일성이 보여줬다.


일당, 일국, 독재자라른 꼭지점을 향해 모이는 '공포위에 세운 체계' 라는 말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맑스적 이상에 따르면 수평적으로 나눠지고 여러가지로 분절된 개개인들의 집합체일 것 같으나 그 구조를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당과 지도자 일극으로 수렴되는 피라미드 형태였다. 권력이 민중들에게서 나와 민중들이 힘을 행사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그냥 독재였다는 뜻이다. 공산정권하면 아이콘처럼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과 같은 독재자가 자리잡고 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까지도)들은 공산주의에 경기를 일으켰으나 시간이 일으킬수록 공산주의와 공산지도자들은 그 독재자와 똑같아졌다. 사실상 2차대전 이후에는 파시즘, 전체주의, 공산주의, 독재정치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져 간다. 마치 독성이 강한 바이러스는 변종을 일으켜 여기저기 널리 퍼져 박멸하기 어려운 것처럼 현대의 공산주의도 그러한 것이라고 로버트는 진단했다. 


덧붙여 호치민과 아옌데처럼 비교적 긍정적으로 알려진 공산지도자들에게까지도 가차없다. 호치민의 베트남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어도 그것은 애국이나 독립운동 탓이지 민주주의나 수평적 공산과는 거리가 먼 또 하나의 독재였다며 비판한다. 사르트르와 같은 동시대의 지식인들이 베트남의 공산정권을 옹호한 데에 대해서는 '당시의 언로가 막혀있어 그들도 제한된 정보에 속았기 때문' 이란다. 민주적 절차 (직접선거)에 의해서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 미국이 조종한 쿠테타로 실각한 아옌데는 '사람은 좋았어도 무능했다' 는 식이다. 한마디로 이 600페이지의 결론은 공산당이 싫어요, 공산당은 나빠요 정도가 되겠다.  


제 점수는요... (★★★)


결과적으로 원대한 계획과 묵직한 분량에 비해 다소 아쉬운 내용이다. 뼈대는 있으나 살이 없고 단순 사실의 나열이라 지루하다. 결론과 해석은 고등학교 교과서 만큼이나 평이하다. 특히 '공산주의' 라는 경제적 측면에 집중하면서 '사회주의적' 특성이나 이를 전체로 포괄하는 '맑시즘' 에 대해서 일부러 말을 극도로 아낀 인상이 강하다. 맑스의 공산주의 사상에 더없이 큰 영향을 준 헤겔이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상 없다. 방대했지만 그만큼 빛을 발하기는 어려웠던 연대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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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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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언가 획기적인 최신이론이 발표되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수용된다. 
경주마 - 불치병 환자 - 보디빌더 - 스포츠 선수 - 부자 - 대중 최첨단에서 최말단까지의 정보격차는 대략 10년이다."


정보의 첨단을 이루고 있는 곳은 학계다. '논문' 이라는 빡빡한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안에서 다뤄지는 논의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 '접근성' 의 한계로 밀알들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정체된 경우가 허다하다. 식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당연시 되던 이야기가 한참 세월이 흘러 대중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킨다든지 대중적 이슈가 실은 오래전 학계에선 논의가 끝나고 '용도 폐기'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많다. 문두에 인용한 "경주마 - 불치병 환자 - 보디빌더 -스포츠 선수 - 부자 - 대중" 의 연쇄고리 역시 이러한 정보격차를 꼬집는 말이다.


학계와 대중사이에 가로막힌 이 높은 벽은 사실 식자들이 자초한 바가 크다. 어려운 글쓰기와 고답적인 태도로 스스로를 담 안에 가두었다. 때론 대중저술가나 대중들을 무지하다며 비난하기도 한다. 이렇게 대중과 유리된 진공상태 속에서 낳은 말 들은 갈곳을 잃고 허공을 떠돈다. 학계에 투자되는 시간과 노력 비용이 공회전이라고 빈축을 사기도 한다. 이러한 두 문화 사이의 격차를 좁히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적극적인 '동방정책' 을 펼치는 학자들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 가족 기담과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기획으로 앞서 출간 된 <프로이트 심청이를 만나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대표저자인 신동흔 박사는 국문과 교수로 한국 고전문학 안에서 오늘날의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교훈들을 추출해냈다. 자신이 지도하는 대학원 석, 박사 과정의 제자들과 함께 기존의 논문양식에서 탈피한 쉽고 대중적인 글쓰기로 고문( 拷問 )같은 고문(古文) 읽기에 변화를 주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재미는 별로 없음. 평점을 주자면 별 두개 정도 ㅅㄷㅎ 교수님 죄송합니다만 그건 좀 무리수였지 말입니다...)

같은 출판사, 같은 기획, 저자이력, 다루는 영역까지 '가족기담' 은 '프로이트..심청...' 과 맥을 같이 한다. 저자인 유광수 박사는 고전문학을 공부한 국문과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학자다. 식자인 그가 학계의 이야기를 대중의 언어로 전달하는 프로젝트를 맡은 것이다. 이런 '식자에서 대중으로' 향하는 글쓰기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미덕은 부드러움이다. 의고체와 번역체로 가득찬 사변적인 글쓰기가 아닌 고등학생에게도 무리없을 부드러움을 뜻한다. 이 면에 있어서 가족기담은 합격이다. 상아탑의 학술언어 대신 일상의 언어로 내용을 전달하고 있어 쉽게 읽을 수 있다. 책장 넘기는 속도가 조금 빠른사람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독서를 끝낼 수 있을 정도로 글이 순하다.

그러나 무작정 쉽기만 하다면 이제 '식자의 글' 이 가지는 차별성이 없어진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단순지식의 방대함을 자랑하는 것이다. 대중들이 알고 있는 고전문학이라고 해봐야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같은 전래동화 내지는 교과서 문학들 뿐이다. 대중들에게 친숙하진 않지만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들을 발굴해 현대 언어로 소개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가령 춘향전이 신효재가 엮은 판소리 완판본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결말이 존재하는 이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거나 춘향이의 자살로 끝나는 각종 경판본들의 엔딩을 묶어 소개하는 서지학적 작업등이 여기에 들 수 있겠다. 선정적인 이유로 교과서에선 배제된 당시의 통속문학들을 엮어 소개하는 방법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기담은 이러한 '지식적 사항' 을 충족시켜 주기엔 부족하다.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장화홍련,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구운몽, 심청전 등등으로 교과서문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식과 또다른 방향에서의 통찰적 접근이다. 똑같은 그림을 보고도 누군가는 노파의 얼굴을 보고 누군가는 미인의 옆모습을 보듯이 같은 대상을 새로운 측면에서 읽어주는 방법이 있다. 가족기담은 이런 측면에서 읽어야한다. 앞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본문에 수록된 14작품의 과반은 정규교과 과정을 마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익히 들어본 것들이다. 그러나 그 뻔한 이야기를 또다른 방식으로 해석해내는게 가족기담의 맛이다.

착한 정실과 나쁜 첩실의 식상한 대립구도에서 저자가 읽어내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금오신화 안에 수록된 '이생규장전' 을 보더라도 여성의 연애란 남자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된다. 시대의 로맨스 소설이라는 것에 표현된 한계가 이 정도니 일상에서의 연애와 결혼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이 안에서 사실 남성의 자기 결정권도 제한받았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결혼이 가문 대 가문의 공식적 비지니스였던 시대에서 일대일 관계의 낭만적 연애가 불가능 했던 것은 비단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단 말이다. 날을 받아놓고 마음에도 없는 상대와 한평생 살아야 했던 것은 남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에겐 공식적인 해방구가 존재했으니 바로 '후처' 라는 이름의 첩실이었다. 조선시대 당시 첩을 얻는 것은 경제력의 문제였고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정실부인과 혼례를 올리기 전 첩과 먼저 살림을 꾸리는 것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시대였다. 이 상황에서 저자는 첩의 존재를 기능적으로 해석하여 '남성의 실질적 연애대상' 으로 풀이한다. 결혼은 비지니스다. 그러면 후처를 얻는 것은 연애다. 이러한 틀을 이용하면 홍길동전의 서사가 새롭게 들어온다. 홍길동의 모 춘섬은 사실 홍판서에게 있어서 '낭만적 연애' 의 대상이 된다. 길동은 사랑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고 단순한 적서의 차별과 울분만 드러나던 홍길동전에서 또다른 면모가 보인다. 좌충우돌하는 길동에게 초당을 지어주고 상대적으로 독립된 생활과 경제적 안녕을 약속해준 까닭, 그에게 호부호형을 허하며 자유를 준 이유등이 대략 납득이 간다. 더 나아가 유독 첩실들이 투기와 질투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까닭도 이해가 된다. 정실부인에게 있어서 남편은 비지니스 파트너(!)에 가까운 존재지만 후실에게 남편은 일대일 낭만적 연애의 대상인 것이다.

심청전에선 장애인 인권 문제로 심봉사의 삶을 해석해낸다. 흔히 우리는 '무능' 과 '무기력' 을 혼동하기 마련한다. 무능과 무기력은 그 선후관계가 불분명하지만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판정이 어렵다. 무능한 사람과 무기력한 사람을 구분없이 사용하며 하나의 대상으로 매도하는 행위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이어지는데 홈리스(노숙인)들을 거지나 걸인과 동일시하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는 잡지 빅이슈를 구독해본 이들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우리는 집이 없어 거리에서 생활을 해결하는 이들이 무기력하고 의지가 없어서 스스로 삶의 끈을 놓은 이들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이들을 거지나 걸인 부랑아라는 경멸적인 용어로 범주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 '빅판' 이 되는등의 자활 의지를 가지고 경제활동중인 홈리스들을 만나게 되면 이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우습고 폭력적인 시각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자활 의지도 있고 현재 소득도 존재하지만 빈곤이 빈곤을 낳는 사회적 제관계 때문에 - 이는 지난달 리뷰 도서였던 노동의 배신을 읽어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 자꾸 길바닥으로 내몰리고 있는 이들도 많다. 단지 무능한 이들을 무기력한 이들과 동일시 해서는 안될 것이다. 심봉사도 그러했다. 우리는 심봉사를 딸을 사지로 내몬 나쁜 아버지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심봉사는 청이어미가 죽은뒤로 혼자 젖동냥을 다니며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한 아버지였고 황성 맹인 잔치를 찾아가기 위해 혼자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던 능동적 의지의 소유자였다. 심봉사의 무능은 장애로 인한 것이었고 그것은 스스로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무기력' 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무기력' 한 사람으로 대했고 이것이 심청이 일가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사실은 곱씹어 볼만한 지적이다. 차상위계층과 같은 복지취약 계층과 장애인 문제와 같은 오늘날의 복지행정과 인식 개선을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가족기담의 장점은 똑같은 대상에서 남들과 다른 면을 읽어내는 데 있다. 똑같은 그림을 보고도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식자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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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 히스테릭 이대택 박사의 인간과학 2
이대택 지음 / 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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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이후 세계는 '성인병의 민주화' 를 겪고 있다. 그 첨병격인 비만은 특히 무섭도록 세를 불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서구는 물론 이제 개발도상국과 경제적 취약계층까지 위협받고 있다. 의료인, 휘트니스 강사, 사회 운동가들이 비만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악전고투 중이지만 전세는 역적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전복적 시각들이 등장했다.

캄포스의 비만신화가 그렇고 샤를롯의 팻앤프라우드 같은 저서가 등장했으며 뚱뚱한 사람들을 위한 권익증진 단체의 활동을 소개한 인류학적 보고서(Fat 돈쿨릭, 앤 메넬리 엮음)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비만은 위험하다' 는 오래된 사회적 합의에 의문을 표하며 통계학, 사회학, 성정치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비만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하고 '포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조를 받아들여 국내에도 비슷한 책이 출간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대에 차서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결론은 실망, 그것도 큰 실망이었다.


1. 미국 논문 번역집, 그 이상의 의미부여가 어려운 초반부

국내 비만학회와 연구자들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이 책에 이용된 자료 가운데 국내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 전무하다. 오로지 미국산 논문들을 계속해서 열거하고 그것들의 트집을 잡으며 '비만은 없다' 라는 공격적인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비만이라는 질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통계상의 조작이며 의학계, 식품업계, 피트니스 업계가 수조원의 이권을 나눠먹기 위해 부풀린 허상이라는 말인데 과연 이 논의에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을까?


일단 제일먼저 저자인 이대택 교수는 비만 연구의 고전 '간호사 연구'의 문제를 말한다. 간호사 연구로 말할 것 같으면 하버드 대학교에서 1995부터 무려  16년간 11만5천195명의 간호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병력한 연구의 고전이다. 비만 문제를 다루는 대부분의 교양서들은 이 간호사 연구의 지표들을 활용하고 있다.  저자는 이 장에서 '연구에서 흡연자를  제외하고 비흡연여성들만 놓고 살찐사람 마른 사람을 비교 했다' 며 여기서 얻어진 결과는 변인통제가 공평하지 않기 때문에 믿기 어렵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밖에도 사망자의 수가 전체 집단에 비하면 5% 미만이라 비만과 사망률의 상관관계를 알기엔 너무 규모가 작다는 식의 문제 제기를 하며 결국 '비만이 건강에 나쁜게 아니라 비만과 건강상은 모종의 관계가 있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정확히 말하려면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는 결론을 내린다. 뭔가 충격적인 고발을 할 것처럼 무게를 잡던 도입부에 비하면 용두사미에 가까운 결론이다. 



2. 비만이라는 기준의 자의성에 대하여

장을 넘겨가면 저자는 '비만 평가의 불안정성'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비만이라고 이야기하는 기준이 객관적 공신력이 없음을 주장한다. 이 장의 지면은 8할 이상이 BMI(신장과 체중제곱의 비로 비만도를 측정하는 전통적 지표)로 이루어지는 비만평가의 부당함을 지적하는데 할애되어 있다. 하지만 '관건은 체중이 아니라 체성분이다' 라는 이야기가 상식이 되어버린 시대에 BMI를 까내리는데 이 정도로 공을 들일 필요가 있나 의심스럽다. 비만 진단 지표로 BMI보다 체지방률을 선호하는 풍조가  대중화 되어 동네 보건소보터 비만 클리닉까지 다들 '인바디' 를 받들어 모시기 시작한지 오래다.

그런데 막상 중요한 이야기인 체지방에 대한 장은 단 1한장 챕터 23장 뿐이다. '15%, 25%로 설정된 이른바 표준 체지방률은 의학적 근거가 없고 몸짱기준인 10-15%는 운동선수를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허황되다. 지나치게 노력할 필요없다. 건강을 위한 적절 체지방률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는 식의 언급으로 짧게 마무리하고 있다. 막상 중요한 논의에 대한 근거는 부족하고 첫장부터 줄곧 반대를 위한 반대 뿐이다. 




3. 가장 우려스러운 마지막 장

가장 위험한 것은 마지막 7부다. 필자는 '요즘 아이들 덩치는 커지고 체력은 약해졌다' 는 통념이 잘못됐다며 초중고등학교 체력검정 기준을 공박한다. 체력검사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체력적으로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덩치만 크고 힘을 못쓴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란다.

그 근거로 '절대 스트렝쓰 (외부저항운동능력)' 과 '상대 스트렝쓰(맨몸 운동능력)'를 들고 나왔다. '체구가 커진 만큼 절대 스트렝스는 증가 했으나 상대 스트렝스 발달은 더딜 수 있는데 작금의 체력검정 방식은 죄다 상대 스트렝스 중심이다. 따라서 평가 방식이 배근력, 악력 같은 근력 측정 방식으로 바뀌면 요즘 아이들은 체구도 커지고 체력도 좋아졌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올 것이다. 아이들이 비만해지고 힘도 약해졌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이에대해 기린과 쥐, 이종범과 최홍만 같은 나름 대중친화적 비유까지 동원해가면서 비만에 따른 수행능력 감소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야 말로 '유학파' 에 '운동처방 전문가' 로 활동하다 '4년제 대학 체육학과 교수' 로 재직중이라는 필자의 실력을 의심하게 하는 지점이다. 좌전굴 측정에 대해서 '팔다리가 긴 사람이 유리하다' 라며  '체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일정 수준까지 훈련에 의해 지배되는 게 아니다.' (215p) 라는 주장은 몹시 심각한 오류다. 무지에 의한 오류다. 다리짧고 팔이 길면 좌전굴이 20Cm 나오는게 아니다. 좌전굴은 햄스트링을 포함한 몸의 포스테리어 체인의 균형적 발달을 측정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서 측정된 모빌리티는 다른 스포츠 수행능력의 잠재력, 부상방지와 직결된다. 요가, 강제적 스트레칭, 마사지등을 동원해서 이를 개선하려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애초에 여러분은 팔이 짧아서 그런 겁니다. 개선 불가능' 이라고 말해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게다.


체력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큰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저자의 말대로  절대근력이 상승했다고 한들 무조건 체력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 없다. 체력은 모빌리티, 지구력, 심폐능력, 균형감각, 절대근력등을 말하는 종합적 지표다. 따라서 현재 측정 도구도 달리기, 제자리 멀리뛰기, 턱걸이,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등으로 다분화 되어 있다. 필자의 주장처럼 '절대 근력' 을 측정해 넣는다해도 악력, 배근력등 체력의 일부를 구성하는 두가지 지표만 상승했을 뿐, 종합적인 체력 상승이라고 결론짓기엔 빈약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저 대세에 저항해 한번 튀어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난감한 책이다. '기존의 연구에 문제가(그것도 사소한) 있다. 그러니까 비만 공포증은 거짓말이지' 라고 우기는 인상이 강하다. 국내 현실에 아무런 의미부여를 할 수 없는 미국 논문의 짜깁기, 부실한 논거, 잘못된 운동처방을 늘어놓은 뒤 지나 콜라타의 리씽킹 씬의 결말부를 차용한 냄새가 다분히 나는 현학적인 문장으로 마무리 짓는다.'아, 비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이전보다 좀 더 통통한 인류로 진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참담하다. 


이 책은 문화관광부 추천도서목록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저자의 사회적 지위와 관이 부여한 권위를 쉽게 믿는 문외한들에게 '양서'로 보일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은 사람들이 '아하!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적 몸담론으로 부터 자유로워 진 것 같아요!' 라며 정신적 자위행위를 반복한다면, 참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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