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데이즈 제프 다이어 선집
제프 다이어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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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 전에 마무리해야 한다고 느끼는 작업이나 어떤 종류의 정리. 어느 나이 대를 지나며 가끔 혹은 자주 생각하게 되는 주제이다. 황혼을 향해 돌진하는 열차에 이제 막 올라탄 제프 다이어는 이 책의 마무리가 그 중 하나였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내 인생의 한 시기에 내 주변에 모여 거친 별자리 모양을 이룬 경험들, 사물들, 문화적 산물들의 집적에 관한 것이다.”


한 작가의 삶을 통과하고, 그를 형성한 경험과 예술 작품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작가가 직접 그것들을 썼다면 더욱. 작가 자신이 이전에 그가 “알던” 삶이 “끝나가는 것”을 체감하는 시기에 썼다면 더더욱. 과거의 기억과 경험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추체험되는 길 끝의 시간. 흘러간 시간에 별들 같이 박힌 그 경험들을 노년에 이른 제프 다이어는 이 책에 기록했다. 자극과 영감을 주었던 스포츠, 음악, 문학, 철학, 그림, 사진, 영화. 그리고 스포츠맨들과 예술가들. 이 모든 것들의 시간과 함께 작가의 시간도 함께 흘렀다. 시간은 경험의 빛과 파장을 변화시킨다. 이 책은 그 변화들에 대한 기록이다.


(흥미로운 글쓰기 작업이다. 노년에 이른 자신을 통과했던 사람들, 경험들, 예술 작품들을 정리해보기. 어쩌면 너무 방대해서 시작조차 어려운 일이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면 자신의 물살을 만들어 흘러가는 것이 글쓰기가 아니던가. 제프 다이어의 이 책은 그 작업의 방법과 의미에 대해 많은 영감을 준다. 일단 시작하기, 힘 빼기, 우회하기, 머물기, 보내주기, 맞이하기. 이 책이 보여주는 제프 다이어의 회고 방식은 자유분방하다.)


예술 작품과 그 예술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절벽, 시간의 벼랑. 모든 변화들이 수렴되는 하나의 소실점. 제프 다이어의 기억과 문장도 그 하나의 소실점으로 향한다. 예술가의 황혼과 자신의 황혼. 그리고 그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의 코로나 봉쇄가 상징하는 문명의 황혼. 이 책은 작가 개인과 천재라 불리는 예술가들과, 문명에 길게 드리워진 저묾의 징후들. 빛이 사위어 가는 그 석별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벼랑 끝에 매달린 이들 앞에 단 두개의 선택지처럼 보이는 버티기와 그만두기. 다양한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본 제프 다이어는 전한다. 퇴락과 일몰의 의미 그리고 버티기와 그만두기의 이유와 방법이 얼마나 다채로운 스펙트럼 안에 놓이는지를. 누군가에게는 이른 나이에 석양빛이 스미고, 누군가는 노을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어떤 이는 쇠락을 부정하고, 어떤 이는 준비한다. 누군가는 그만두었다가 돌아오고, 누군가는 말년에 처음으로 ‘발견’된다. 가장 찬란하게 뒤늦게 도착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사후에 태어난다.” (니체, 작가 인용) 그 찬란함과 쇠잔함, 절망과 환희, 아이러니의 순간들이 이 책을 수놓고 있다.


쇠락과 노쇠에 접어든 삶을 사색하는 이 책은 무거운가? 그럴 리가. 60대란 나이를 분명하게 의식하지만 제프 다이어가 아닌가. 어떤 작가들은 늙지 않는다. 그렇게 보인다. 자신의 자신의 노화를 묘사하는 문장에서조차 푸릇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전작들이 새긴 감각의 청춘이 독자에게 너무 깊게 각인된 걸까. 왕성한 호기심, 집요한 관찰력, 작가로서의 성실함, 그리고 엄청난 기억력, 마치 평행 우주 속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동시도 살고 있는 듯한 기억력.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함과 열정. 그리고 유머, 유머. 이 모든 것을 숨길 수 없었던 이 책은 그러니 재미있다. 혼자 계속 “쿡”, “쿡”하며 읽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한 권 작가’의 두 번째 책이 갖는 목적은 자신이 여기까지라는 일종의 확인 사살을 하는 것이다” 하필 그 예로 나오는 작가가 내가 친애하는 작가지만, 정말 후추 같은 유머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와 동행하는 예술가들이 여럿이지만 작가가 (가장)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는 니체다.(내 생각) 작가는 니체의 문장들을 여기저기 출몰시킨다. 그때마다 웃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 모두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오직 나만이 니체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안 웃을 수가!) 그렇다. 작가는 작가대로, 나는 나대로 이해한다고 착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니체. 웃기고, 슬프고, 반짝이고, 번뜩이는 니체. “가장 심오한 정신은 가장 경박한 정신이어야 한다.” (니체, 작가인용) 이렇게 경박하고 심오한 문장을 누가 또 쓸 수 있을까.


작가의 문장들과 화음을 이루는 또 한명의 작가를 소개하자면 필립 라킨. 작가는 필립 라킨의 유머를 언급하며, “유머 감각에는 웃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으니, 바로 그것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쓴다. 솔직하고, 엉뚱하고, 유쾌한, 그러다 돌발적인 도약으로 한 방의 킥을 날리는 제프 다이어야말로 유머라는 고난이도의 서커스로 세계를 돌파해가는 사람이다. 그것도 무심하게.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하고 있는 다른 일이 적을수록 존재 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게 된다.” 얼마나 정확한 통찰인가? 버티기도 어렵지만, 그만두는 것도 어렵다. 버티기 위해 그만두고, 그만두기 위해 버티기도 한다. 존재의 품은 이래저래 많이 든다. 버티고, 그만두는 것처럼 ‘보이는’ 각자의 내면의 삶을 타인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버티는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실은 포기 상태일 수도 있고, 생 자체를 버티기 위해 어떤 이는 무언가를, 혹은 모두를 놓아버린다.


제프 다이어가 언급했듯이 “더 큰 맥락 안에서 자신을 파악할 줄 아는” 내적 성찰은 모든 이들에게 할당된 재능이 아니다. 작가가 예를 든 마이크 타이슨처럼 버티기와 그만두기 자체보다 내적 성찰이 우선이다. 자기의 현재 실존 상태를 어디까지 통렬히 꿰뚫을 수 있을까. 버티든 그만두든 자기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 인가.


이 책의 클라이막스는 수없이 많지만, 우선 <버닝맨 페스티벌> 참여기와 니체와 베토벤의 연관성에 관한 글이 인상적이다. 읽어들 보시라. 아름답고 톡 쏜다. “우리는 꿈과 같은 존재이므로, 우리의 미약한 인생은 잠으로 둘러싸여 있으니”(셰익스피어,<폭풍우>중에서) “나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열려 있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미완의 천국>중에서). (이런 아름다운 인용이 계속 이어진다.) “음악은 그 자체의 중력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무중력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 때 중력의 일부는 바로 이런 몸부림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통찰이 책 여기저기에 반짝인다. 몸부림치지 말지어다. 그것이 너를 지상에 묶어둘지니. 어떤 비상을 위해선 버티기를 멈추고, 그만두어야 한다. 그 순간 삶도 음악이 되는 건가?


도어즈의 <끝The End>로 시작한 이 책은 수많은 장르의 음악들을 경유해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로 마무리 된다. 작가의 문장에 이런저런 이유로 설득당한 나는 음악을 찾아 듣기에 바빴다. 작가가 탐독한, 읽다가 던져버린, 나중에 다시 집어든 문학 작품들 또한 정말 방대해서 그 중 일부를 찾는데 시간을 보냈다. 정말 많은 음악과 책이 등장한다. 제프 다이어의 박학과 다식에, 예민한 감성과 촘촘한 사유에 놀라게 된다. 그는 음악도 책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경험해서 좋았고, 억울했던 그의 지극히 사적인 예술사가 펼쳐진다. 이 또한 이 책이 안겨주는 즐거움이다.


“나는 큰 목표나 야망, 꿈같은 것을 가져 본 적은 없지만 아주 많은 자잘한 계획, 잔꾀, 취미, 관심사들로 늘 분주했기 때문에 더 원대한 목적이 없다며 아쉬워하거나 더 고상한 위안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이 책은 이 문장의 진위를 확인시켜 준다. 이 책도 여전한 관심사로 분주하다. 제프 다이어의 여전한 청춘의 비밀은 이 분주함일지도 모르겠다.


제프 다이어의 이 책과 그의 문장은 잘 구워진 크래커 같다. 적당한 소금과 밀가루가 잘 배합된 바삭한 크래커. 짭조름하고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크래커. 그래서 손이 계속 가는 크래커. 제프 다이어는 천재들의 삶과 황혼을 통해 ‘삶’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이야기한다.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그것. 땀과 휴식, 눈물과 웃음, 고통과 환희, 승리와 좌절, 권태와 유희, 회한과 안식으로 반죽된 그것.


작가는 니체가 농담과 성찰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고 적는다. 싱거운 유머 속에 페이소스가 짙게 깔린 이 책도 역시 농담과 성찰로 분주하다. 이 책은 필멸하는 인간의 공평한 운명에 대한 오마주이다. (너무 깊게 알아버려 외롭고 불행했던 니체에 대한 오마주로도 읽혔다.) 최후의 승자는 모든 것을 지극히 무관심하게 관장하는 무심한 시간이다. “가장 무거운 무게”(니체, 작가 인용)를 지닌 “끝을 맞이하는 상황”,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그의 화법이 좋다. 눅눅하지 않고 바삭해서 좋다. 짭조름해서 좋다.


P.S.) 니체가 틀림없이 반했을 것이라고 이 책에서 제프 다이어가 장담한 작가, “에스키모가 눈을 알 듯” 남부 캘리포니아의 바람을 아는 그 작가의 책이 국내에 어서 번역되기를 바란다.


#예술#예술가#에세이#제프다이어#라스트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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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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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월 28일 10시에 그가 특검에 출석했다. 나는 어쩌자고 TV 생중계로 그 모습을 보려했을까. 특검 출석시간, 출석방식을 두고 실랑이를 벌여 어김없이 쓴물을 올라오게 한 인사가 아닌가. 나중에 뉴스를 봐도 될 것을 왜 주말 오전 그 낯짝을 보겠다고 리모컨을 눌렀나. 불법 계엄령 이후 나는 집요하게 생중계되는 현장들을 쫓는다. 밤을 새우고, 예정된 시간들을 기억한다. 마치 그 현장들을 내 눈으로 목격하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내가 쫓는 것은 무엇일까.


차에서 내린 그는 사적인 용무를 처리하려고 관공서에 들른 민원인처럼 굳은 얼굴로 검찰청 포토라인을 지나쳤다. 바로 얼마 전까지 한 국가를 대표하던 공인의 모습은 없다. 성가신 사적 용무를 앞둔 사인이 취재진들 사이로 무심히 사라졌다.


어쩌면 불법계엄령도, 탄핵심판도, 내란재판도, 내란수사도 그에게는 정말 지극히 사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 그 냉담하고 희멀건 얼굴을 본 순간, 이런 생각을 처음 했다. 국가를 내 손아귀에 넣겠다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네. 그의 사고는 여기서 멈춰있는 것 같다. 검찰 총장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내’가 그러고 싶은데, ‘내’ 마음처럼 안 되네. 왜 오라가라하고, 왜들 이렇게 시끄럽게 굴지. 내 개인적인 일에 왜들 저렇게 난리야. 그와 그 배우자는 정말 줄곧 이렇게 생각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도.


황정은 작가의 <작은 일기>를 읽는다. 명치 부분이 묵직하다. 오늘 아침 본 그의 얼굴과 이 책이 복기시키는 무수한 날들이 겹쳐진다. 담금질을 당하는 것 같았던 밤과 낮이 그 말끔한 외관과 냉담한 표정에 어른거린다. 뭉근한 울화가 차오른다. 그는 이런 마음들을 모른다. 모르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저들의 법과 우리가 아는 법 사이의 괴리를 다스리려고, 황정은 작가는 책상 근처에 고사리 화분을 잔뜩 가져다두었다고 한다. 나는 작가의 일기를 읽는다. 나를 통과하는 이 모난 감정들의 연원을 거슬러 오른다. 그 날도, 이 일기를 읽는 지금도 혼자가 아니라고, 작가가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초법적 존재들, 초법적 운명 공동체들.. (중략)..이 사회에 강고하게, 혹은 헐겁더라도 분명하게 장벽으로 존재했던 상식, 규범, 법규.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모든 것을 홀로그램인 양 관통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걸 지금 매일 목격하고 있다. 저들에게는 저들의 도덕률이 있다. 나머지 다수의 세계가 비난하고 경악해도, 자기들끼리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주고받고 납득되는, 되니까 되는, 어떤 도덕, 어떤 상식, 어떤 자연율이 저들에게는 따로 있다."

작은 일기, 112-113면, 황정은

2.

 

세면대 밸브에서 물 새는 걸 발견했다. (중략) 오후 열시 삼십사분 계엄

 

작은 일기, 8-9, 황정은

 

그 날의 작가의 일기를 읽으며 같은 날 내 일기를 찾아봤다. 123일 두 줄, 124일 한 줄.

한 것, 본 것이 일기에 쓰는 전부인데 그마저도 없다. 공중파 TV를 통해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를 처음부터 봤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보게 됐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보는 내내 황망함과 더불어 내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일어날 변화들이 한 단계씩 높아지는 음계처럼 신호음을 높여가며 주마등으로 지나갔다. 있을 수 있는 경우의 수들이 A, B, C, D로 증폭되어 머릿속으로 퍼져갔다. 그것은 이미 체감되는 공포였다.

 

3.

 

이 책을 처음 받아 탁자 위에 놓을 때, 책의 낱장들이 펄럭인 짧은 순간 스친 페이지에 이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손상되었습니다.” 오래전부터, 해왔던 생각. 나는 손상 됐고, 그 이전으로 돌아 갈 수 없다. 하지만 그걸 느낌과 동시에, 그걸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다. 부끄러웠다.

 

손상이라는 단어는 손상 되지 않은 상태를 전제하는데, ‘손상이라는 단어를 들여다볼수록 생각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인간은 태생부터 손상된 존재.... 손상은 존재의 양식. 이어지고 이어지다, 돌연 멈추게 된다.

 

2009, 2014, 2022. 특정한 방식으로 다르게 손상됐다고 느끼기 시작된 것은 저 해들과 관련 있다. 사람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변해간다. 손상시키고, 손상된다. 손상된 기억만을 간직하려는 관성이 나의 악이다.

 

저 해들에 일어난 사건들이 나를 손상시켰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역사에는 얼마나 경악할 말한 참극이 많았나. 하지만 지나간 참극들이 당면한 비극의 극악함과 참혹함을 경감시키지 않는다.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을 실시간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것. 인간의 어떤 면을 봐버린 것. 나도 인간이라는 것. 2024123. 어떤 문장을 쓰려는 나는 여전히 망설인다.

 

작가는 탄핵 집회에 참여해 생수를 나눠 준 자영업자의 울음을 기록하며 그와 내가 같은 날()에 베였다라고 241219일 일기에 썼다.

 

나는 손상되었습니다.” 작가의 이 문장에 위로받았다. 이렇게 고백해준,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4.

 

사람들의 악함을 마음에 들여 되짚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게도 그 싹이 무성하게 있으니 말이다. (중략) 그보다는 사람이, 사람들이 어쩌다 혹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 멍청하게. 그중에 악이 있다.”

 

작은 일기, 64-64, 황정은

 

불법 계엄을 일으킨 사람과 그 배우자,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공식적 사과를 하지 않고 그를 비호한 정당, 그들을 통해 알게 된 여러 조직들과 그들의 오랜 행적들. 언론에 자세히 보도되는 그 행태들을 지켜보며 나는 속으로 외치곤 했다. ‘저 악마들!’ 그리곤 상념에 빠져 들었다. ‘악마들이라고? 나이브하긴. 저들의 행태를 악을 빼놓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 그냥 범법자? 세계가 법에 의해 굴러가는 기계라는 거야? ....악은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야, 악을 천상에서 끌어내려. 인간 세계의 악행을 악이라고 부르면 왜 안 되는데?.. 왜 하필 악마야? 종교인이야? 유치하긴.. 악은.... 그냥 악한들? 그럼 화가 안 풀리는데!.. !!!

너무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어김없이 또 저 악마들’, 하게 된다.

 

 

5.

 

<작은 일기>에서 작가는 가끔 쓰고 있는 원고의 진행 상황을 기록한다. <창작과 비평> 2025 봄에 실린 작가의 단편이 떠올랐다. 작가가 이 단편을 쓰고 있을 때가 이즈음이겠구나, 혼자 짐작해보고 다시 읽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달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영상들, 그러다 보이는 것에도 들리는 것에도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안심하게 만드는 영상들. 쉽게 잠의 배음이 되는 소리들


246-247, 문제없는, 하루, <창작과 비평 2025, 황정은

 

전쟁과 폭우와 폭설로 바깥은 아수라장인데, 이미지와 소리의 멀티버스 터널 속에 잠들어 가는 사람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재난의 굉음들. 하지만 바깥은 없다. 그 터널 속이 전부이다. 잠들면 안 된다. 공기를 밀어내며 다가오는 어떤 것을 직시하며 경적을 울리는 존재들이 이 단편에는 있다. 

 

터널에 들어선 차들이 실린더 속 피스톤처럼 공기를 밀어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262, 문제없는, 하루, <창작과 비평 2025>, 황정은


 

6.


스탠드 불도 켜지 않은 깜깜한 방 안에 친구와 나란히 천장을 향해 바로 누워 이야기를 나눈다. 친구는 친구의 이야기를, 나는 내 이야기를. 밤이 깊어 잠이 저 가까운 곳에 웅크리고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본다. 끊길 듯, 이어지는 이야기들, 아니 독백들. 잠의 숨결 아래 체면에 걸린 듯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이야기를 한다. 서로의 얘기에 답해야 한다는 어떤 의식도 없이. 단속적으로, 그러나 무언가를 내려놓고, 잠결에 내쉬는 날숨 같은 저 깊은 곳 파편들.

 

그러다 먼 후일, 친구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서야 친구에게 답하고 싶어진다. 친구는 옆에 없는데. 그가 마치 듣는 것처럼 속으로 말하게 된다. 뒤 늦은 대화가 이어진다.

 

황정은 작가의 <작은 일기>를 읽으며 오래 전 그 방안에 누워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나는 그때 그랬어. 그때 그랬어작가와의 대화도 그렇게 문득 문득 이어져 계속될 것이다.

 

후일 이 작은 일기를 다시 읽으면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작가의 일기를 읽으며, 지금처럼 그 날짜의 내 일기를 다시 들춰볼 것이다. 어떤 기억은 공유된다. 기록된 기억들은 더 멀리 날아서 더 많은 기억들과 조우한다.

 

하나의 사건이 각자에게 전혀 다른 해석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윤석열을 지지했던 이들도 <작은 일기>를 써서 출판했으면 한다. 후대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역사를 재구성할 권리가 있으니까.

 

(후대까지 갈 것 없이 '000, again'을 외쳤던 이들. 그들의 일기가 나도 궁금하다. 그들은 어떤 신념, 어떤 마음을 가졌던 걸까. 무엇이었을까, 그들을 움직인 것은. 서부 지법 폭동을 일으켰던 그 결기로 큰 일기라도 좋으니 출판할 용기를 내길 바란다.)

 

12.3 내란의 아카이빙이 이렇게 시작됐다. 작가는 사적 기록을 공적 기억으로 연결한다. 당신의 기억과 독자의 기억이 만나 대화의 장이 열린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다독일 수 있는 존재들이다. 무수히 퍼져나갈 이 대화의 씨줄과 날줄이 교직해 12.3 내란을 살았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 분노와 저항, 슬픔과 안도로 수놓인 역사가 짜여 질 것이다.

 

나는 손상되었습니다.” 작가가 말한다. 내가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증명해 가고 있다. 우리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25710일 새벽 그가 재구속 됐다. 잘된 일이다.

 


#가제본서평단 # 도서제공 #작은일기 #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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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다이어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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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게 된 후기에서, <바그너의 경우>에 두 개의 추신과 하나의 후기를 덧붙인 니체에 대해 제프 다이어는 자기 파괴적인 충동, 영원회귀라는 폐쇄적인 순환에서 벗어나려는 충동의 형식적인 표현이라고 원주를 달아놓았다. 묘하게 설득당하며 웃을 수밖에. 그렇지 어떤 강박, 충동으로서의 글쓰기.

 

이어서 제프 다이어는 10년 전 <가디언>지에 본인이 쓴 문장을 인용한다. “글쓰기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된 날, 너무도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 든 나머지 그것을 완벽한 행복과 구별할 수 없게 될 날을 늦추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가 니체의 글쓰기 속에 내장된 강박을 알아챈 비밀이 이렇게 고백된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을 위해 아껴둔 그의 계획을 읽고 또 웃는다. 그 계획과 관련해 그가 <지속의 순간들>에 기록한 글에 나도 우선 만족한다. “그가 있는 이곳은 그가 언젠가 도착했을 그 어디만큼 좋았다. 일단 그런 결론에 이르고 나면, 필요한 베개는 오직 단단한 땅 그 자체뿐이다.”

 

존 버거가 각본과 주연을 맡은 영화 <나를 집까지 데려자줘>(1993)에는 극중 버거가 누구의 소유도 아닌 땅에 묻히고 싶다고 말하는 놀라운 순간이 있다.” 나도 작가가 인용한 이 문장에 멈칫했다. 체리스가 발견한 죽은 사람이 누운 콜로라도의 사막은 그런 땅이었을까.

 

어제 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며 도어즈의 <The End>를 들었다. 반복듣기로 들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직전에 마트 키오스크 계산대 위에서 가져온 맥주를 무르고, 오렌지 주스 1.8L만 계산하고 가져온 나를 칭찬했다. <The End>를 배음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오렌지 주스를 맥주처럼 마셔대는 나를 칭찬, 아니 애도했다. 도어즈의 다른 음악을 듣고 싶었지만, 참았다. “음악의 신 디오니소스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니까. 편의점 주류 냉장고 앞으로 데려갈 갈 확률이 아주 높으니까.

 

황혼이 슬그머니 밤으로 깊어지는어둠의 순간들을 포착해내기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제프 다이어는 이 책에 그 순간들을 담아낸다. 이 책에 목차가 없는 것이 납득된다. 기우는 석양빛을 어떻게 일별할 수 있을까. 20대 중반 짐 모리슨의 사라짐은 황혼이 단지 시간의 레일에 따라 다가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여하간 흥미로운 주제이고, 흥미로운 독서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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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살아봐’ 누군가의 덤덤한 말. 직접 부딪혀 봐야 (아마도 취약할수록) 알아지는 것들이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알아지는 것들 중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 자체를 뒤집는 것들이 있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마이너스 일 수 있다는 것, 하나 빼기 하나가 열이 될 수 있다는 것. 세계가 부조리하다는 것. 필연과 우연(어쩌면 지독한 필연)이 복잡하게 얽힌 인생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불명확하고, 매사에 아귀가 딱딱 맞게 돌아가는 것이 실상 드물다. ‘더 살아봐’의 ‘더’가 시간이나 나이의 축적이 아니라, 경험의 쌓임과 그 사이사이에 얹어진 쓰디쓴, 종래에는 달짝지근해질 지혜의 넓이라는 걸, 알게 되는 때가 온다.

이 책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속 보스 카라마와 그의 탄자니아 동료들은 이 진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사람은 매순간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세계는 불확실하고, 부조리하다는 것. 고정되지 않은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부조리한 세계를 함께 살아가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들은 알고 있다. 신념으로 굳게 간직하고, 실천으로 통제하고 관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냥’ 아는 것처럼 보인다. ‘허당미’ 농후한, 그들의 장난기 가득한 혹은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말과 행동에, 매사에 ‘그냥’이라고 말할 것 같은 그들의 힘 빼기에, 나는 그들의 앎과 삶의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 문화인류학 교수 오가와 사야카는 홍콩의 청킹맨션을 거점으로 살아가는 탄자니아인 들의 삶을 현장 연구하여 그들이 수행하는 공존의 형태를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에 담았다. 저자는 에필로그에 연구 과정을 되돌아보며 “카라마와 그의 동료들에게 매력이 있다는 사실만은 전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고 겸손하게 쓴다.

넘치게 통했다. 게으르고, 놀랄 만큼 적당주의자고,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덜 된 인간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카라마와 늘 사건사고 속에 있는 그의 동료들에 나는 빠져들었다. (아마 이건 내가 그들 못지않게 덜 된 인간이라 더 그들에게 친화력을...) ‘모른 척’의 배려, ‘겸사겸사’의 도움, ‘가볍고 단속적인’ 연결을 지속시키는 공존의 지혜를 그들은 삶으로 일군다.

그리고 이 책으로 통한 것이 또 있으니, 인류학과 ‘오가와 사야카’라는 저자의 발견이다. 나는 왜 인류학의 연구 대상을 원시나 고대 사회로 제한해 생각해왔을까.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인간의 삶 역시 인류학의 연구 대상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현실을 한발 물러나 바라보게 한다. 인류학자의 눈에는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보편타당한 경제 모델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보자면 자본주의 또한 한시적인 경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 키드로 나고 자란 우리는 자본주의적인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와 교환 방식을 자연화한다. 이전에는 화폐로 거래되지 않았던 것들의 거래 또한 자연화한다. 물과 친절이 거래된다. 그 영역은 확대된다. 몸도, 마음도, 태도도, 그리고 삶도 자본주의 방식으로 교정된다. 이런 변화는 당연한 걸까. 우리는 돈으로 거래 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품목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거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일어나는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오가와 사야카는 청킹 맨션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한다. 청킹 맨션의 탄자니아인들은 자본주의와 정보기술 시스템 안팎에서 새로운 공존 시스템을 만들어 간다. 그 커먼즈는 난민, 저소득 국가에서 온 이민자, 불법 체류자, 불법 노동자, 이동 중인 교역인 등 거주 안정성이 미약한 그들의 불안정한 지위와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그들의 커먼즈는 그들만의 예외적 상황에서 발현된 특수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삶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소속감이 휘발되어가는 작금의 현실에서 비정주성의 감각과 그 적응 방식의 혼재는 이미 보편적다. 때문에 그들의 커먼즈를 작동시키는 아이디어와 정서는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영감과 이정표가 되어준다.

청킹 맨션의 보스와 그 동료들은 부조리한 세상사와 부침 많은 인간사, 그 결과인 삶의 유동성을 ‘알고 있다’. 아마도 더 살아봐서 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유동성과 불확실성에 부응하며 상호부조 할 수 있는 삶의 기술들을 만들어간다.

한 사례로 이들의 플랫폼인 탄자니아 홍콩 조합을 들여다보자. 우선 조합의 맴버쉽은 본인이 탈퇴하지 않는 이상 어디에 있든 유지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서로 돕는 인간을 구별, 평가하는 기준을 명확화하기와 상호 부조의 기준, 준칙을 명확화하기”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헌도와 신용도로 자격과 혜택을 등급화하거나,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다. 무임승차자를 탈락시키지 않는다. 기여도에 따라 권력과 권위가 발생하거나, 누군가가 부채감과 부담을 갖지 않도록 한다. 거래와 분배 과정에서 위계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이렇게 카라마와 그의 동료들은 특정한 누군가에게 쏠릴 수 있는 믿음과 기대를, 그리고 권위와 권력을 평등하게 나누어 갖는다. 이들의 조합은 개방성과 자율성을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수평적 네트워크이다.

명문화된 명확한 의무와 책임을 대신해 이들의 열린 공동체를 이끄는 것은 “겸사겸사”와 “적당히”와 “무리하지 않는다.”의 논리다.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 믿음은 “각기 다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가능성에서 주고받기의 기회를 발견해 내는 ‘지혜’에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은 상대를 불문하고 도울 수 있을 때 겸사겸사, 적당히, 무리하지 않고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돕는다. 누군가를 본인의 한계 안에서 도움으로써, “분명히 누군가가 도와준다.”라는 자신들의 믿음조차 겸사겸사 무리하지 않고 증명한다. 이 우발적인 도움의 만다라는 자력으로 순환하며 국경을 초월한 연계 플레이로 작동한다.

보스 카라마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야. 유형이 다른 이런저런 동료가 있는 거야.” 이런저런, 동료.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자본주의의 배제 논리와 불능을, 자본주의가 누락시키고 있는 것들을, 이 시스템 안에서 분투하는 인간의 다채로움을, 인간의 복잡함을, 그들의 도약과 좌절을, 그들의 웃음과 눈물을. 그래서 서로 도와야 한다는 걸 보스와 동료들은 안다. 아주 작더라도 하나 더하기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그 경우의 수를 계급과 국적을 넘어 확장시키는 것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라는 것을 청킹맨션의 탄자니아인들은 알고 있다.

오가와 사야카는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청킹맨션 탄자니아 인들이 구축하고 있는 공유 시스템을 최근 확산되고 있는 공유 경제 아이디어와 비교해 분석한다. 공유 경제 모델의 아이디어와 시스템 모형, 그리고 작동원리에서 유사한 점과 상이한 점을 도출해내는 저자의 분석이 무척 흥미롭다. 특히 청킹 맨션의 커먼즈와 자본주의 내의 공식적인 공유경제가 다르게 접근하는 신용 이슈가 인상적이다. (신용에 관한 관점이 둘 사이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그 차이는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의 상이함에서 비롯된다.)

홍콩 탄자니아인 들이 구축한 커먼즈를 분석하면서 저자는 커먼즈와 공유 경제 담론의 이슈들을 인용하고 설명한다. 저자의 분석들을 통해 커먼즈, 공유, 연결, 특이점, 기본 소득, 기술 등 다양한 쟁점들을 확인할 수 있는 점 또한 이 책의 미덕이다. 그럼 이 책은 읽기 어려운가? 전혀 그렇지 않다. 유수의 학예상을 수상한 인류학 명저임에도, 이 책은 무척이나 명랑하고 그만큼 아주 재미있다. (한디디 작가는 무지막지하게 재미있다고 표현했는데, 실로 그렇다. 여기에 더해 지금은 적당한 표현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데, 낯설고 매우 묘한 매력이 있다. 보스 카라마와 저자 사야카. 예사롭지 않은 두 인물의 매력이 결합한 화학 반응이리라. ) 홍콩 탄자니아 인들이 직조하는 삶의 역동성을 옮긴 생생한 묘사 자체도 이 책의 미덕이다.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내 사고의 빈곤함을 여실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파산, 회생불능이라는 섬뜩한 말이 떠도는 금융 자본주의 한복판에 사는 나로서는 청킹맨션의 탄자니아 인들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여러 생각을 할 수 수밖에 없었다. 신용과 신뢰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혼용해 사용하는 문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결과 우리 안에서 변형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신용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삶의 기회를 부여하거나 박탈하는 시스템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청킹 맨션의 보스와 동료들, 그리고 저자는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들은 말한다. ‘세상의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누군가는 반드시 도와준다.’고 말한다. 이 아이러니 사이에, 이 아이러니 사이에 놓인 긴장을 건너는 그들의 사뿐한 행보에 그들의 지혜가 놓여있다. 이들은 상대를 믿지 않아도, 상대가 못 가진 것을 내가 가졌을 때, 상대를 돕는다. 평가 경제 시스템을 거부하며, 설렁설렁 헐렁하게 나의 잉여분을 나눈다. 득과 실을 따지지 않는다. 나눔은 단순하다.

제도에 기대지 않고, 상호간의 우발적인 도움으로 유지되는 공존의 네트워크. 읽을수록, 들여다볼수록, 곱씹을수록 수상쩍고, 매력 있다. 그야말로 힙하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 개성이 강한 것”이란 사전적 의미에 따른다면 청킹맨션의 보스와 그의 동료들이야말로 힙하다, 의도한 것이 아니어서 더욱. 이들은 누구도 믿지 않으면서, 누구도 배재하지 않는 열린 커뮤니티를 비공식적으로 이어간다. 제도 밖의 그들은 제도 밖의 안전망을 구축한다. 이국에서의 한시적인 삶이라는 타인들의 일방적인 시선과는 무관하게, 그들은 이 안전망을 토대로 지금 여기에서 삶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그들 방식대로 누리고 즐긴다.

청킹맨션 탄자니아 인들은 효율성과 편의성을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우위에 두지 않는다. 이들은 신뢰를 등급화하지 않는다. 숨통이 트인다. 의무와 권리, 신뢰와 불신, 베풂과 갚기, 선의와 악의, 투입과 산출. 무수한 이항대립으로 꽉 조여진 사고가 느슨하게 헐거워지는 느낌. 책이 선사한 이 느낌 자체가 신선하고 소중하다. 자산 크기와 신용 평가로 성원권을 정교하게 등급화 하는 사회에서 청킹 맨션들의 사람들, 그 만남과 관계, 타자에 대한 태도는 그 자체로 영감이 된다. 이 영감은 새로운 삶에 대한 상상력으로 확장된다. 이 상상력은 “가리봉 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를 함께 읽는 우리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왜 안 되겠는가? 어쩌면 이미 누군가가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미 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혹시 한디디 작가?

추천사를 쓴 한디디 작가의 말대로 청킹맨션의 카라마와 동료들이 실천하는 커먼즈는 삶을 여행하기 위한 자유의 기반이 된다. 삶을 여행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청킹맨션의 탄자니아 인들은 알고 있다. 그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건 우리의 몫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상상하는데 이 책은 더 없이 좋은 안내서이다.

이 책처럼 자본주의 안에서, 혹은 그 가장자리에서, 혹은 그 틈새에서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자본주의에서 조금은 빗겨나간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이 책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는 반갑고 고맙다. 이 책은 뭔가를 소생시킨다. 북돋는다. 뭐든 하고 싶어 하게 책이다. 정말이지 수상쩍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수상쩍은 책이다. 나도 수상쩍고 싶다. 맘껏 수상쩍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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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
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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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인이 아시아에서 즐기거나 큰돈을 갖고 있거나 평온하게 살아가면 수상쩍은 일을 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해. 그래서 나는 사야카에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가르쳐준 거야. 우리는 성실하게 일하기 위해 홍콩에 온 게 아니야 새로운 인생을 찾아서 홍콩에 왔어.”

카라마,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254면

이 책 덕분에 30년을 미루고 미룬 영화 <중경삼림>을 봤다. 중경삼림은 청킹맨션(중경빌딩)과 그 주변의 빌딜 숲이라는 의미. 책을 받고 청킹맨션에 대해 알아보니, 홍콩의 근현대사가 그야말로 압축된 장소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쉴 새 없이 오가는 혼종의 장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어떤 얼굴들을 찾고 있다. 카라마는 2000년대에 초엽에 홍콩에 왔으니,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 그는 아직 탄자니아에 있었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서’ 그가 홍콩에 도착한 것은 조금 후이다. 그가 곧 머물게 될 장소를 내가 2025년에 먼저, 아니 나중에, 보고 있다.

영화 속 중경삼림은 고이기를 거부하며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공간이다. 아래의 사야카의 분석 속 표현처럼 영화 속에는 ‘만만치 않은 타자’들이 수없이 스쳐간다. 빠르게 스쳐가는 조명의 빛살들처럼 명멸하는 ‘미지의 가능성’에서 우발적인 응답들을 발견해 내고, 이 응답들로 점멸하는 네온 불빛 같은 커먼즈를 구축한 청킹맨션의 보스와 그의 동료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더더더 ^^

“신기하게도 이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어떤 ‘융통성’ 같은 것이 관찰된다. 이 ‘융통성’은 이들이 구축한 시스템에 의해, 이들이 타자와 살아가는 가운데 길러온 지혜에 의해 저절로 재귀적으로 창출되고 있는 것이다.”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256면

“그들의 상호 부조는 동포에 대한 지원을 자연스러운 행위로 간주하는 사회 규범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이 가진 미지의 가능성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포함한 자신의 기회를 발견해내려는 ‘만만치 않은 타자’의 우발적인 응답에 달려 있다.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2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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