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건 어디에나 있을 우리네 아픈 현대사의 비극적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일 뿐이다. - P169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불렀다. - P181
술이 불콰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연산홍이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 P197
또 그놈의 오죽하면 타령이었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 P102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 P27
"자신을 사랑해야 자존감을 키울 수 있다지만 저는 오히려 자존감은 주변 사람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자신의 힘으로는 역부족이거든요.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내가 나 자신을 잘났다고 생각해도 힘이 나지 않아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남이 그 사랑을 인정해 줄 때 자존감이생긴다고 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 P202
나의 취미에 이런저런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나는 약간 냉소적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드는 게 재미있어서 시작한 건데, 베이킹에 따라오는 얼토당토않은 딱지들이 거추장스러웠다. 직접 굽고 포장한 브라우니를 선물하면, 마치 ‘저에게도 여성적인 면이 있답니다. 그러니 잘 부탁드려요‘라고 상대에게 날 광고한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아니거든요. - 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