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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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악마의 유혹은 달콤하다고 한다. 인간이 가진 결핍과 욕망의 향기를 맡고 내거는 제안이니 어찌 달콤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인간은 그 대가가 파멸인 것을 알면서도 쉽게 유혹에 넘어간다. 그런데 악마의 사랑을 담은 유혹은 어떨까? 미숫가루처럼 고소하고 카페모카처럼 달달한 악마와의 로맨스를 보고 나니 입에 침이 고인다.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는 악마와의 거래라는 주제로 한 로맨스 판타지다. 350: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제1회 K-스토리 공모전'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니만큼 얼마나 흡입력이 있을까,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됐다. 



폐가와 다를 바 없는 낡은 단독주택에서 하숙을 치며 살아가는 욕쟁이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손녀처럼 함께 해 온 소설의 주인공 서주. 어느날부터 집에 끔찍한 몰골로 고문을 당하는 세입자들이 돌아다니는데, 알고보니 할머니가 악마에게 남은 방을 임대해 준 것이라고 한다. 지옥이 공사 중인 동안 잠시 공간을 임대한 악마는 지옥에 온 죄수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중. 



음식을 남기면 저승가서 먹는다는 말이 그대로 구현된 듯 오물 같은 음식이 가득 담긴 양푼을 들고 꾸역 꾸역 밥을 먹는 사람, 자신의 혓바닥에 농사를 짓는 사람, 끊임 없이 눈밭을 먹는 사람 등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지옥의 풍경이 무척이나 다채롭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운데, 햇살 냄새가 나는 해사한 소년 같은 악마가 주인공 앞에 나타난다. 




마치 로맨스 소설 속 대형견을 닮은 남자주인공을 연상 시키는, 주인공을 졸졸 따라다니는 애교 많은 악마. 서주가 지칠 때마다 귀신 같이 알아내 몸과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달콤한 음료와 맛있는 음식을 차려내는 이 남자에게 서주는 서서히 마음을 연다. 언제나 자신 앞에서는 비통함과 억울함, 혐오스러운 모습만 보여줬던 인간이었는데,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소소하지만 뭔가를 나눈다는 것도 알려준 서주에게 악마 역시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악마도 서주도 헷갈린다. 개가 인간을 예뻐하는 것처럼 악마가 인간에게 잘해주는 건 본능이라 했던 악마. 서주는 사실 악마가 자신이 가진 결핍을 먹기 위해 옆에 있을 뿐이라 생각하게 된다.




"혹시 ... 내 고통도 달콤했어요?"

할머니로부터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불안감. 

할머니의 건강 문제. 서랍장에서 칼을 발견했을 때의 공포. 

그 모든 순간에 나를 향한 당신의 미소는 위로였을까, 

아니면 내 감정을 맛본 뒤의 감상이었을까.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p224




그녀가 가진 결핍. 서주는 항상 할머니와 그 집에서 버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산다. 돈이나 뜯어가는 웬수 같은 아들이지만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법적 보호자는 자신이 아닌 아들일 것이고, 자신은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 채 할머니 곁을 떠나야한다는 것을.



이 유사 가족이 빚어내는 이야기는 어둡지만 시종일관 유쾌하다. 유머를 잃지 않는 문체 때문에 진지하다가도 풋하고 터져 버린다. 그래서 묵직할 법도 한 이야기를 가벼운 스텝으로 단숨에 읽어나갈 수 있다.



역시 엄청난 경쟁률을 뚫은 이야기의 힘은 남다르다. 지옥을 떠올릴 때 드는 뻔한 상상을 완전히 새롭고 다채롭게 펼쳐낸 것은 물론, 할머니와 서주의 관계를 푸는 감동 서사와 악마와의 로맨스를 너무나 흥미롭고 개연성 있게 풀어내며 결말까지 독자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간다.



게다가 생생한 장면 묘사와 팔딱팔딱 뛰는 캐릭터들은 영상화를 기대하게 만든다. K-스토리 공모전이 어떤 공모전이었나 찾아보니 재작년부터 서점가를 휩쓸었던 베스트셀러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펴낸 출판사 팩토리나인에서 연 공모전이었다. 수상작은 Jtbc스튜디오와 쇼박스, 그리고 리디를 통해 영상화, 웹툰화가 이뤄질 예정이라니 역시 읽는 내내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 어쩜 당연했을지도.



내가 상상한 악마는 최우식! 귀여운 악마야, 얼른 드라마로 만나자!!


※ 컬처블룸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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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세부터 시작하는 두뇌 발달 놀이 - 0~36개월 아기랑 엄마랑 생애 첫 놀이 100
김가희 지음 / 그린페이퍼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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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세가 두뇌발달의 골든타임이란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이 말 때문에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비생산적인 느낌이 들 때 나는 꽤나 큰 자책에 빠져 들었다. 더 많은 자극, 더 많은 경험을 아이에게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발달에 좋다는 장난감이나 교구 등 이것 저것 사들였고, 아이는 너무 많은 선택지 속에서 더욱 산만해져갔다.



<0세부터 시작하는 두뇌 발달 놀이>는 교사 출신 인플루언서인 김가희, 일명 단아맘이 실제 아이를 키우며 실행했던 엄마표 놀이들을 무려 100가지나 담았다. 내 아이와 같이 저자의 예쁜 딸 단아도 코로나 시기에 태어나 그 흔한 문화센터도 못가고 바깥 놀이에 제약이 걸린 아이였다. 부지런한 엄마는 아이의 뇌발달이 급속도로 이뤄지는 시기, 아이에게 적절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엄마표 놀이들을 고안해냈다.




책은 5가지 큰 카테고리로 나눠지는데, 오감으로 느끼며 할 수 있는 '감각 발달 놀이', 소근육 사용을 촉진해서 두뇌 발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두뇌 발달 놀이',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도움을 줄 '정서 함양 놀이', 사계절의 아름다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오감 발달 계절 놀이', 아이의 상상력을 키워줄 '창의력 발달 놀이'가 그것이다.



아이의 신체 발달 정도에 따라 놀이는 6개월부터와 돌 이후부터로 나뉘어진다. 6개월 전후의 놀이는 여러 감각 기관이 발달하는 시기에 맞춰 색을 활용한 시각 발달 놀이, 다양한 소리를 활용한 청각 발달 놀이, 감촉이 다른 물건들을 사용한 촉감 놀이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책에서 사용한 놀이 재료들은 지퍼백, 박스, 면봉, 빨대, 테이프 등등 집에 있는 실용품부터 폼폼이나 물감 등 가까운 문구점에서 구하기 쉬운 것들이라 시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다른 놀이책들은 그때 그때 놀이를 보며 준비물을 익혀야하는데 이 책은 책 초반부터 이 책에 나오는 놀이를 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준비물 리스트를 알려주고 있어 언제든 놀이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세심한 구성이 참 좋았다.




일전에 구입한 오감 놀이 책은 일러스트로 그려져 있어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 아이는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 책의 주인공 단아가 직접 놀이를 즐기는 과정이 사진으로 생생하게 담겨 있어 이해를 도왔다. 특히 청경채 도장을 가지고 노는 단아의 야무진 손. 이 정도 발달이면 내 아이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데 엄청 도움이 되었다.



책에 나온 빨대 꽂기 보드는 이런 교구가 소근육 발달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거금을 들여 해외 직구로 교구를 사들였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제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니. 게다가 6개월 때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놀이가 많지 않았는데 이 책에 놀이들을 보니 너무 많은 것을 놓친 것 같아서 서글퍼졌다. 이 책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다만 똥손 엄마는 모양이 사진 속과 달라 조금 좌절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책 보고 따라한 게 너무 졸작이라 사진도 못찍... 모양이 안예쁘니 아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후문.) 



많은 장난감보다 이 시기 아이에게 필요한 건 엄마와 보내는 진한 상호작용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엄마표 놀이를 하며 쌓인 엄마와의 애착과 정서적 유대는 아이의 성장에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게다가 꼼지락 꼼지락 혼자 몰두하는 시간은 알게 모르게 아이의 집중력과 사고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에 바쁘면서도 무료했던 육아가 '오늘은 아이와 어떤 놀이를 해볼까'하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바뀌는 힘을 준 책이었다. 




※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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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제인 오스틴 지음, 송은주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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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할지도 모를 새로운 도전을 앞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 타인을 통해 확인하려 한다. 그리고 때때로는 믿고 의지하는 사람의 진심 어린 염려가 독이 되곤 한다. 염려는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고, 나아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염려가 얼마나 깊은 애정에서 비롯되었든 간에,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는 것보다 타인의 말에 휘둘려 내린 결정은 후회를 동반하기 십상이다. 



제인 오스틴의 <설득>은 자신의 마음보다 남의 말에 설득 당해 첫사랑을 놓치고 만 한 여자의 이야기다. 현명하고 지성미 넘치는 이 책의 여주인공 앤은 스물일곱의 혼기를 놓친 아가씨다. 이른 나이에 찾아온 사랑을 놓친 이후 그녀를 뒤흔들 다른 사랑은 찾아오지 않았고, 이제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앤의 아버지 월터 경과 언니 엘리자베스는 화려한 외모와 준남작의 지위에 어울리는 품위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빚더미에 빠지고, 결국 켈로치 홀을 임대해주고 바스로 이사갈 계획을 세운다. 오랜 바다 생활 끝에 잠시 켈로치에 정착하러 온 크로프트 제독 부부가 켈로치 홀의 세입자가 되고, 시집간 동생 메리를 돕기 위해 켈로치와 가까운 어퍼크로스에 잠시 머물게 된 앤은 한때 자신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크로프트 부인의 남동생 프레더릭 웬트워스와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불안에 빠진다.



열 아홉에 찾아왔던 운명 같은 사랑, 그는 지적이고 활기 넘치는 매력적인 젊은이었지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앤이 가장 의지하는 벗이자 대모 같은 존재인 레이디 러셀은 준남작 집안의 앤에게는 너무 모자란 상대라 판단해 그들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아버지와 언니 모두 같은 입장이었다. 지금에서야 모두가 설득해달라 요청하는 '설득 전문가' 앤이지만, 당시 너무 어렸던 앤은 주변에 설득 당해 프레더릭에게 이별을 고한다. 



자신이 버린 남자가 이제 모든 성공을 거머쥐고 켈로치로 돌아왔다. 결혼할 진지한 상대를 찾기 위해. 그리고 이 남자, 얄궂게도 메리의 시누이들과 교류하며 어퍼크로스로 거의 출근도장을 찍고 있다.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의 재회는 숨이 막힐 만큼 아찔했다. 갖은 핑계로 대면을 피하고 있던 앤은 오히려 더 남자답고 멋있어진 프레더릭을 보며 8년의 세월동안 늙고 시들어버린 자신을 마주한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슴 졸이며 지켜봤지만 마치 예전 일을 잊은 듯, 아니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볼 뻔했다'는 잔인한 반응에 앤의 고통은 더욱 깊어져 간다. 메리의 시누이들과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는 앤. 그러다가 문득 프레더릭이 건네는 작은 배려에 기쁨과 후회 같은 복잡한 감정에 빠져든다. 프레더릭 역시 나날이 자신이 사랑했던 시절의 총기를 되찾아가는, 아름다운 앤의 모습에 다시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기쁨과 슬픔이 오가는 복잡한 앤의 감정선을 너무나 섬세하게 잘 표현해서 프레더릭에게 한마디도 못 건네는 앤에게 답답함을 느꼈다가, 다시 미모에 물이 오른 앤에 빠진 남자들을 보며 통쾌했다가, 보는 내내 앤의 최측근이 되어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기승전결혼으로 끝나는 뻔한 결론이라해도, 그 과정은 손에 책을 놓지 못할 정도로 흥미롭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사랑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고백하기 일보직전의 남녀는 다른 사람과 맺어졌다는 오해를 하게 되고, 내달리던 감정을 멈춘다. 하지만 끝내 누군가의 도움으로 오해를 풀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로맨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전형적인 플롯인데도, 여전히 새롭고 푹 빠져들게 만드는 건 탁월한 감정 묘사와 관계 설정, 그리고 앞서나간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인 오스틴은 대표작 <오만과 편견> 뿐만 아니라 <설득>에서도 당대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부조리한 현실을 꼬집는다. 아무리 막대한 부와 지위를 가진 집안이라도 여성인 자녀들은 아무것도 상속 받지 못하기에 안정된 삶을 위한 결혼이 필수였던, 그래서 사교계에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 온갖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리젠시 시대. <설득>에서 제인 오스틴은 서로를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크로프트 제독 부부를 내세워 이상적인 부부상도 보여주고 있다. 아마 현명하고 지혜로운 앤과 재기 넘치는 프레더릭도 이들 부부처럼 서로를 각자의 삶에 찾아온 가장 최고의 파트너로 치켜세우며 살아가겠지. 



게다가 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너무나 뿌듯했다. 아버지, 언니, 레이디 러셀에게 휘둘리며 주도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왔던 앤은 사랑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며 주체적인 인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기준에서는 여전히 수동적인 여성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당대에는 대단한 성취였을 것 같다.



앤과 프레더릭의 메인 러브스토리 외에도 주변 인물들의 전개 역시 다채롭게 펼쳐져 어떤 결말을 맺을지(심지어 켈로치 홀 상속을 둘러싼 빌런들의 뜨악할 반전도 나온다!) 궁금증에 책을 놓을 수 없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되는 강력한 페이지터너. 




​특히 W클래식x첫사랑 컬렉션은 윌북에서 앞서 내놓은 걸클래식 1, 2처럼 그 책에 어울리는 적절한 색상을 제대로 뽑아내어 소장욕구를 불렀다. 첫사랑을 테마로 한 이번 컬렉션은 제인 오스틴을 대표하는 핑크부터, 차가운 뉴욕의 상류층의 이야기 <순수의 시대> 블루, 희망을 상징하는 그린라이트가 나오는 <위대한 게츠비> 그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엘로우로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윌북의 컬렉션은 판형도 딱 한 손에 잡히는 최적의 그립감에 디자인도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워 이미 소장 중인데 이 컬렉션도 조만간 책장에 꽂을 수 있길.  



첫사랑과의 재회가 다시 잘되는 기적같은 설렘을 경험하고 싶다면 제인 오스틴의 <설득>에 빠져보길 권한다.



※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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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역사 - 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
존 캐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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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에서 단테의 <신곡>을 함께 읽은 적이 있다. 숱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단테가 창조한 세계- 지옥, 연옥, 천국. 이 위대한 서사시를 죽기 전에 당연히 읽어봐야하지 않나 싶어 호기롭게 책을 샀다. 하지만 내가 기독교를 믿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이해력이 미천해서인지 책은 너무나 지루했다. 게다가 단테라는 사람의 사적인 복수가 잔뜩 담겨 있어서 도대체 이게 무슨 문학적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임을 위한 강제 독서가 아니였다면 이미 초반에 책을 덮었을 것 같은, 나에게 고전이란 무엇인가하는 의문만 남긴 책이었다.



옥스포드 대학교 명예교수인 존 캐리가 쓴 <시의 역사>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 불리는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문학적 경계를 넘나드는 시를 보여주는 현대 시인들까지 방대한 시의 역사를 한 권에 담았다. 시가 가진 의미와 시인에 얽힌 뒷이야기를 읽다보면 꽤 두꺼운 이 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각 챕터가 대부분 5~10페이지 내외로 짧아서 늘어지지 않게 딱 적절한 선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문학 전공이 아니어도, 해당 시를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내게는 형식부터 낯설고 잘 읽히지 않는 서사시들- '길가메시 서사시', '일리아드', '오딧세이아', '변신이야기' 등등을 설명해준 초반 부분이 흥미롭고 재밌었다. 전쟁, 모험, 신화가 버무려진 대서사시의 스토리들은 스케일이 크고 환상적이었다. 여기에 저자는 자신의 감상과 비평가들의 평가를 적절하게 가미하는데, 단테의 '신곡'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너무나 공감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들을 통틀어 단테 알리기에리만큼 현대 독자에게 호소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찾기 어렵다. 단테의 시가 속속들이 중세 신학에 젖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워낙 그의 믿음이 우리의 반감을 유발하기 일쑤라서 그렇기도 하다. 단테는 인간으로서의 매력도 없었다. 복수심이 강하고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p45)




게다가 저자는 신곡 속에 등장하는 여성- 단테의 첫사랑이자 뮤즈인 베아트리체가 천국의 안내자로 등장한다-은 명예롭게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온전한 여성성을 박탈 당한 존재라 꼬집고, 여성 육체에 대한 혐오도 깃들여있다고 지적한다. <신곡>이 너무 싫었던게 이해가 됐다.



그런데 왜 '신곡'이 여전히 위대한 고전에 꼽히는 걸까? 그건 아마도 그가 창조한 사후 세계가 너무나 창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저자는 후대의 예술가들이 <신곡>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고 말한다. 낭만주의와 라파엘전파, 20세기 초 T.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 등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들- 셰익스피어, 말로, 시드니의 시들은 사실 이들의 시를 처음 접했는데 여전히 낭만적이고 너무 아름다워서 놀랐다. 


하지만 위대한 시로 칭송받는 시들을 저자는 덮어놓고 찬양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비평을 하는데, 또 이게 이 책의 굉장한 재미 포인트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시와 희곡이 '추상명사들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 진짜 행동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자극을 받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시각화해 떠올릴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적한다. 말은 아름답지만 사실 구체적인 시각화가 안된다는 것, 책 속에 시들을 읽으며 느꼈던 묘한 부분에 정곡을 찌르고 있어 놀랐다.



책은 대체로 영미 시를 다루고 있지만 중국과 일본의 시도 언급한다. 서양의 자연시보다 초점이 더 선명하고, 사랑보다 우정을, 열정보다 고요, 성찰, 자기분석을 표현하는 중국시. 반면 보다 감정을 담아 관능적인 표현한 일본시. 이런 시들은 아서 웨일리와 에즈라 파운드를 통해 영미에 전해졌는데 그들의 시에도 영향을 미쳐 이미지즘이란 사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한 권에 알차게 담아낸 '시의 역사'는 평소에 시를 거의 접하지 않는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책 속에 수록된 시들이 가진 은유적인 표현이 너무나 독창적이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기괴해서 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주었다. (게다가 책의 기획과 구성이 좋아서 소소의 책 출판사에서 나오는 역사 교양서가 이와 같다면 모두 모으고 싶다는 뽐뿌도....)



시에 문외한이라도 전혀 접근하기 어렵지 않은, 그렇지만 읽고 난 후 앎의 세계가 확장되는 역사 교양서였다.



 ※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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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받고 있다는 착각 - 온라인 검열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질리안 요크 지음, 방진이 옮김 / 책세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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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등장은 혁명이었다. 세계 각국에 사는 사람들을 단숨에 연결 시킨 인터넷은 앉은 자리에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게다가 평범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론장이 활성화되며 권력층에서는 여론의 눈치를 보기도 한다. 어느 시대보다 빠르게 정보의 평등을 이뤄낸 것도 인터넷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플랫폼이 또 다른 권력이 되고 있다.



<보호받고 있다는 착각>은 실리콘밸리의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어떻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지를 폭로한 책이다.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 질리안 요크는 실제 '아랍의 봄' 시위에서 인권 운동가들을 도우며 소셜 미디어의 검열과 치열하게 싸워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소셜 미디어 정책팀의 직원들과 오랫동안 소통하며 알게 된, 거대 플랫폼의 검열 시스템의 문제를 마치 내부고발자의 시선으로 자세하게 까밝힌다.



소셜 미디어의 등장은 우리에게 표현의 자유를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 같았다. 거대 언론이 취급조차 하지 않을 사연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주목받고, 정치권과 행정부를 움직이게 만든 사례를 우리는 숱하게 접했다. 특히 튀니지를 비롯해 중동 국가들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 '아랍의 봄'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었기에,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셜 미디어의 강력한 힘을, 그리고 그 힘은 선한 영향력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도 아랍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에 페이스북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고, 자신들의 비전처럼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저자는 수 많은 인권 탄압의 현장에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했던 인권 운동가나 평범한 시민들이 하루 아침에 게시물이 삭제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게다가 페이스북은 모든 것이 통제되고 있는 독재 국가에서 인권 운동가들이 별명으로 가입한 사실로 계정을 삭제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 같이 '취약한 사용자 집단을 더 배려하지 않는' 이유는 페이스북이 '그런 집단과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페이스북의 책임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저자는 페이스북은 오직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경쟁사를 인수해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하는 것이 페이스북의 실질적인 비전이라는 것. 만약 마크 주커버그가 자신이 말한대로 더 선한 영향력을 확산하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공정하고 평등한 콘텐츠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투자'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것은 페이스북은 이스라엘과 같은 갈등 상황에 놓인 국가와 협정을 맺으며 노골적으로 친 이스라엘, 반 팔레스타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트위터의 경우 사우디 왕가에서 일부 지분을 보유하면서 영향력을 드러낸다. 권력과 결탁한 소셜 미디어는 낮은 곳에서 올라오는 목소리에는 자신들의 애매하고 허술한 규정을 내밀며 검열하고, 정치권이나 권력층의 목소리는 더 자주 노출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시민의 발언이 정치인의 발언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질 때, 인권운동가가 정부 내지는 거대 기업 또는 서로 협력하는 그 두 행위자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할 때, 오프라인에서 탄압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온라인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중략) 새로운 검열 방식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언제나 그 사회의 소외된 공동체다. (p82)"



반면 ISIS와 같은 명백한 테러집단의 극단주의적인 메시지는 모호한 기준 때문에 즉각적으로 검열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게다가 검열시스템이 인공지능과 같은 기계로 대체될 수록 오히려 극단주의 메시지가 공유되고, 인권탄압의 현장을 고발하는 목소리는 삭제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저자는 플랫폼 기업의 검열 기준이 백인 남성 엘리트층의 가치관과 맞닿아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나체를 성적인 것과 연결 시키는 문화를 그대로 반영한 소셜 미디어의 규정은, 여성의 유두 노출은 무조건 음란한 것으로 간주해 삭제한다. 이 때문에 모유수유하는 여성의 유두가 노출됐다는 이유로 삭제 당했던 어이 없는 케이스가 실제로 발생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나체, 동성애 등의 표현의 자유는 국내 정서상으로도 검열의 가이드라인에서 즉각 삭제 조치가 될 것 같은 부분이다. 올리는 사람들의 의도가 언제나 좋은 의도가 아닐 수도 있고, 이런 부분들을 일관성 있게 통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게다가 어떤 콘텐츠에는 보호받아야할 특정 집단도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 폭력적이고 성적인 콘텐츠는 노출되지 않아야하거나,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당하지 않게 막아줄 필요도 있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이 다소 급진적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저자가 이어 주장하고 있는,  원하는 사람들끼리는 공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하는 방법은 타당한 것 같다.



저자 역시도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려면 반대적인 부분에서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젊은 트랜스젠더가 안전하게 익명성을 유지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범죄자도 안전하게 익명성을 유지하도록 보장한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검열을 하는 당국도 부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열은 더 나아지려 했던 역사를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게 만든다. 



우리 나라 역시 이제는 조중동과 같은 언론 매체보다 포털의 힘이 더 강력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포털을 통해 뉴스를 접하다보니 포털의 게이트키핑이 여론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다. 만약 포털이 친정부적 입장을 취한다면, 정부를 비판하는 뉴스는 우리의 눈에 띄기 어렵다. 실제로 그런 일들은 숱하게 벌어지고 있다. 포털과 특정 세력의 공조를 의심하는 시선도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표현의 자유가 공평하지 않은 시스템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동안 나는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 확증편향을 만들어 사람들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다는 역기능만 생각했지, 검열을 통해 특정 세력에게 유리한 판을 짜고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런 증거들로 가득하다. 새로운 현실에 눈 뜨게 만들어 줄, 놀라운 사실들이 담긴 책이다.


 

※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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