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2월에는 제주도에 가고 싶었다. 해안도로, 맛있는 음식, 오름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풍경.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제주도에서 이전과 같은 즐거움을 누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땅에 온통 그들의 피가 스며 있을 텐데. 해수욕장이 있는 월정리는 계엄령 당시 군부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사람들은 월정리에 끌려간다고 하면 거의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봤다고 한다. 온통 피로 얼룩졌던 땅덩어리. 사람이 사람을 절멸이란 이유로 무자비하게 쏘고 갈랐다. 총알 파편에 찢어진 살갗이, 정강이가, 뇌수가 구르고 흘러 들어가 돌 사이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제 가족을, 제 이름을 되찾지 못한 시체들이 대지에 흡수되어, 바닷물에 휩쓸려 이름 모를 곳에 흡수되어 버렸을 것이다. 피바다가 되었던 섬. 빨갱이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죄 없는 민간인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던 섬. 제주도 여행을 하는 이들 중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역사는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해줘야 한다.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역사로 하여금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군가는 자주 잊는 듯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겨울에 읽어 겨울에 끝을 내야만 하는 소설이다. 물처럼 흐르는 피아노나 바이올린 선율을 틀어놓고, 혹은 고요 속에서 책장을 넘겨야 한다. 그럼 주변은 폭설이 내린 제주도의 산골이 된다. 보일러 온도를 아무리 올려도 어디선가 부는 바람에 몸을 웅크리게 된다. 우듬지가 잘려나간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서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사이를 거닐다 주저앉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한 강 작가의 소설은 어딘가 읽기 힘겹다. 묘사 때문일까. 글을 읽다 보면 장면들이 그려진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특히나 글을 읽을 때마다 내동댕이쳐진 시체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 장면 속에 그들의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뿌옇게 페인트칠 되어 있었다. 그렇게 벌거벗겨진 살덩어리들이 광산에, 척박한 땅 위에 쌓여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토기가 밀려올 정도로 산처럼.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그래서 즐거운 날, 우울한 날에는 책을 펼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완독까지 약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내가 유난인 걸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읽지. 한강 작가의 책은 영혼을 시리게 한다.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도 그랬다. 한겨울에 책 표지를 어루만지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일 터다.

 

이 소설은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희생자의 가족들이 죽을 때까지 품고 살아야 했던 트라우마. 실제로 이 사건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 그들은 이 사건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함구된 전말이 끝내 사라질 뻔했다.

 

그후로 엄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이야기는커녕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소설은 주인공 경하와 그의 친구 인선의 이야기다. 아니, 그들의 이야기다. 경하는 인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인선의 어머니는 제주 4.3 사건의 유가족이자 피해자다. 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몰살당했다. 심부름을 다녀온 두 소녀는 가족들을 찾기 위해 눈이 내려 앉은 시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침묵하던 인선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후 과거의 트라우마 안에서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끝없이 재현하며 살았다. 조용한 여자가. 침잠하는 것 같던 여자가 실은 거대한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다는 것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 모습을 바로 앞에서, 눈 앞에서 지켜보던 인선은 어땠을까. 학살, 학대는 피해자들에게 끝내 해방을 주지 않는다. 가해자들의 사과와 노력이 없다면 더욱. 혼돈의 시기 속에서 권력자들의 욕심 때문에 애꿎은 소시민들이 빨갱이 척결을 목적으로 살해당했다. 그 보상은 누가 해주었는가. 그 뒤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사건은 시대의 혼돈 속에 휩쓸려 함몰되었다. 유해는 포탄과 함께 터지기도, 군대의 군화발에 다져지기도 하며 세상을 잃었을 것이다. 우리라도 기억해야 하며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읊을수록 그들이 선명해질 것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계속, 떠들어야 하는 것이다.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마음을 다해 감사드린다. -2021년 가을 초입에 한 강 드림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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