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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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SF적 설정은 양념일 뿐이고 그 안에서 현재 사회 문제를 보여준다. 이 책에 나오는 해양 생명체들의 정확한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외계 생명체 문어나 말하는 대게나) 교육, 돌봄, 질병, 장애, 노동 같은 사회 문제를 언급하지만 결국은 사랑 이야기다. 난 그게 나쁘지 않았다.

_P.25
예고도 없이 휴강했다가 강의 평가 점수가 떨어져서 혹시 다음 학기에 잘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되기 시작해서 나는 더더욱 화가 났다. 소청심사를 청구해야 하나? 사유에 뭐라고 써야 하지? 문어 때문에 휴강했다고? 내가 먹은 것도 아닌데? 지하철은 연착되면 확인서 써 주던데 검은 정장 사람들도 연행 및 취조 확인서 같은 거 써 주나? 문어 때문에 연행됐다고?
『문어』

_P.84
그리고 나는 울었다. 비인간 생물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망쳐버려 살 수 없게 된 바다, 부서진 해저, 죽은 땅과 도망칠 곳 없이 좁아져버린 지구가 한없이 미안했다. 그러나 우는 것 외에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게』

_P.122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건물 안에 갑자기 나타나서 내 휴대전화를 요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인위적인 웃음과 여기저기 조금씩 틀린 표현들을 이어 붙인 장광설 속에서 단 한 번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멍청하고 작위적이고 여기저기 계속 조금씩 틀리면서 자기가 뭘 틀리는지 모르고 그저 상대방을 속이려고만 하는 저 몰골이 바로 사기꾼의 본모습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상어』

_P.208
나는 하늘에서 죽음을 담은 빛의 파편들이 꽃처럼, 비단처럼, 모든 색으로 빛나며 쏟아져 내리던 꿈을 떠올렸다. 그것이 미사일이 떨어지고 포탄이 쏟아질 때 바다 생물들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세상의 모습일 것이라고 나는 상상했다. 해파리성운을 생각했다. 죽음과 삶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 인간의 소멸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게는 진정 자유로운 삶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
비인간 생물종을 위해 인류가 멸종해야 한다 해도 남편만은 살아남기를 원한다. 가능하면 나도 같이 살아남으면 더 좋다. 나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해파리』

_P.225
절망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포기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포기하고, 자유를 갈구하거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도 포기한다. 그리고 절망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뭔가 지향성을 가지고 삶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갈구하는 사람들을 질투하여 스스로 나서서 탄압하기 시작한다.
(...)
사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렇게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너는 왜 나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아? 너는 왜 불행해지지 않아?' 그들은 사회 전반적인 절망과 불행의 원인이 독재자와 그를 비호하는 정권에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주변의 건강한 사람들을 불행하고 망가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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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유 자이언트 픽
김빵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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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방법으로 미안함을 전하고, 관계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으며, 생의 마지막을 다짐했을 때 꽉, 꽉, 꽉 안아줄 존재가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를 회복하고, 미지의 존재를 찾아 떠나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엔솔로지. 『투 유』라는 제목처럼 누군가에게 보내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_P.50
라떼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다른 것도 꺼냈다. 미역, 안약, 해바라기씨. 뒤이어 나온 것들은 도통 결이 맞지 않아서 나는 수렁에 빠졌다. 뭐야, 뭔데.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인데.
김빵, 『좀비 라떼』

_P.65
인간은 문제투성이지, 지호는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다만 자신의 문제에 대해 각박한 사람과 관대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지호는 각박했고 수빈은 관대했다. 벌써 오래전 얘기다.
_P.78
또 봐요, 가서도 보자, 자주 올게, 바다 보러 갈게요, 하는 말이 늘 끝인사로 따라붙었지만 정말로 다시 본 것은 손에 꼽았다. 못 볼 걸 알면서도 보자고 말했고 안 올 걸 알면서도 언제든 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았다. 만나지 않으면서도 이어진 시간들. 기다리지 않으면서도 기다린다고 믿는 시간들.
김화진, 『시간과 자리』

_P.143
나는 망설이다가 양산을 내려놓고 하나를 어설프게 안았다. 그러자 하나는 이 정도로 안아달라는 듯 온 힘을 다해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꽉 안으면 터질 것 같아 어설프게 끌어 안자 하나가 꽉, 꽉, 꽉 힘을 주었다. 그래서 나도 꽉, 꽉, 꽉 힘을 줬다.
김청귤, 『지구의 마지막 빙하에 작별인사를』

_P.160
해마가 죽고 난 뒤 해마에게 가야 할 질문들은 목적지를 잃었다. 강윤의 마음 밑바닥에는 질문의 무덤이 생겼다. 질문은 계속 태어났지만, 답을 듣지 못하는 바람에 방치되었다. 시체는 계속해서 쌓여가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워버려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_P.184
”우리의 마음은 생각보다 더 대단해. 충격은 흡수되어 전부 녹아 없어질 거야. 불행이 뱀처럼 달려들어도 우리의 늪 같은 마음은 그 뱀을 잠기게 만들어. 회복할 수 있어.“
구소현, 『투 유』

_P.262
-왜 그랬어?
-뭐가?
-그 시체, 왜 발로 찼냐고. 다른 시체에는 손도 안 대던데.
-그야, 세영이 네가 그 시체를 무서워하니까.
그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여자에게는 이 모든 말이 진실이었다. 세상에게는 그것이 거짓일지 몰라도, 호프의 신체 반응은 두려울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불안할 정도로 빠르던 박동은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갔다.
(...)
진실을 속이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속여버린 게 그의 사랑이다.
명소정, 『이방인의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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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
디샤 필리야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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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억압되어 살던 여자들이 반항하는 발칙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만국 공통인 걸까. 엄마에 대한 딸의 일방적인 짝사랑, 딸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닐 때 애써 외면하는 엄마, 딸이기에 자신을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는 엄마의 이기심 심지어 남아 선호마저 너무나 낯익은 것들이라 책을 읽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_P.22
어느 게 더 웃기는지 모르겠다. 율라가 내 마흔 먹은 몸뚱이가 그 긴 세월 남자와 섹스를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세월 동안 함께한 그 모든 일 뒤에도 우리 둘 다 아직 처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율라』

_P.110
“엄마는 나한테 하느님 이야기는 한마디도 할 수 없어요. 절대로. 엄마가 가장 추하니까. 엄마하고 닐리 목사가. 가장 추해.” 가슴이 들썩거리고 있었고 원하는 것과는 달리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걱정하지 마, 엄마, 내가 조금이라도 엄마처럼 되고 싶어할까봐. 맹세하는데, 내 인생은 절대 엄마 인생하고 같지 않을 거야. 아름다울 거니까, 부스러기가 아닐 거니까.”
『복숭아 코블러』

_P.230
딸은 어린 시절 여름방학 때 가끔 자신에게 자기 진짜 이름을 소곤거리곤 했다. 그저 그 이름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몇 달이 지나가버리는 걸 막으려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엄마를 따라 그녀를 절대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늘 “딸” 이라고 불렀다, 마치 그녀가 오직 어머니와의 관계, 집에서 하는 일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듯이.
『에디 레버트가 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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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 문학동네 청소년 68
문이소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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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난에 과거로 온 미래인에게 버섯 재배를 알려주고, 안 나가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알파고 곱하기 챗지피티보다 십억 경배 뛰어난 인공지능 팬과 교감하고, 외계인이 친구의 의미를 깨닫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행복한 기억으로 죽음을 맞길 바라고, 누더기 여사의 새끼 고양이가 살길 바라는 마음. 이렇게 착하고 다정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이다.

_P.86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연인도 그 누구도 이렇게까지 날 이해한 사람은 없었어요. 내 그림을 진지하게 봐 준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요.”
- 나 역시. 나를 만들어 낸 세계 최고 두뇌들도 내 번민을 이해하지 못했소.
”그건 경배 씨가 이해해요. 누구나 같은 질문으로 존재를 탐구하진 않잖아요.“
『젤리의 경배』

_P.173
난 그렇게 작은 고양이 새끼를 본 적이 없었어. 숨도 쉬지 않기에 곧 가는구나 싶었는데, 누더기 여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핥더라. 미요, 막내가 울자 누더기 여사도 울었어. 나도 울고 싶었는데 난 눈물이 없잖아. 그래서 노래를 불렀어, 봄에 고양이들이 부르는 다정한 청혼의 노래.
『봉지 기사와 대걸레 마녀의 황홀한 우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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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지는 마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3
김멜라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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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연애 프로그램의 홍수에도 관심 없던 내가 남의 연애를 응원하게 되다니. 결혼이 연애의 결실은 아니지만 김멜라 작가와 온점이 무사히 60살이 되길 바란다. 『저녁놀』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을 『멜라지는 마음』를 읽으면서 온전히 또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_P.62
“아이스크림이 좋다고 하나 먹고 두 개 먹고 세 개 먹으면 배탈 나잖아. 내가 너무 좋다고 하면 탈이 날 수도 있어. 어쩌면 귀신이 보고 있다가 우리 사이를 질투해서 갈라놓을지도 몰라. 그래도 계속 좋다고 표현해야 할까?”
“응, 계속해.”
온점은 간단하고 명쾌하게 대답한다. 말하고 꺼내놓는 태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단 걸 나는 온점에게 배운다.
_P.140
너는 모르지. 네가 네 손에 달린 드라이버와 나사와 조이개로 나를 풀고 해체하고 솔질한 다음 다시 조립했다는 걸.
_P.253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온점이 내게 묻는다. 오랜 시간 나는 아무 일도 없다며 내 흔들리는 어금니를 숨겼다. 하지만 이제는 온점 앞에서 입을 벌린다. 안 그러면 그것들이 내 안에 쌓여 이불 무덤에 묻히게 될 테니까.
_P.302
“신은 나에게 멜르기 좋은 사람을 주셨어. 그러니 소설을 못 써도 괜찮아. 소설을 쓰든 안 쓰든 나는 행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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