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보다 Vol. 1 얼음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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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보다 시리즈 ≪SF 보다≫ 가제본은 여섯 명의 작가를 만날 수 있지만 정식 출간된 ≪SF 보다≫에서는 배명훈, 심완선 작가의 글을 더 읽을 수 있다. 첫 번째 ≪SF 보다≫의 주제는 ‘얼음’이고 시리즈의 시작답게 라인업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1년에 두 번 출간 예정이라는데 하반기의 주제는 뭘까. 나는 구병모, 남유하, 연여름 작가의 글이 좋았는데 특히 연여름 작가의 『차가운 파수꾼』은 지하철에서 읽다가 울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하는 마음은 항상 날 감동시킨다.

제단 앞에 쓰러져 뒹구는 저 모습은, 비록 머리카락과 피가 서로 엉기어 얼굴을 가리긴 했으나 얼음새꽃이 분명하다. 이미 수차례 정과 망치에 맞은 머리를 미끄러운 빙판에 다시 한번 찧으니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흰 얼음 위로 퍼져 나간다. 나에게 손이 있다면, 마지막일 게 틀림없는, 그가 나를 향해 간절하게 뻗어 올리는 저 손을 마주 잡아줄 텐데. 그 모습 그대로 지상의 논리 바깥으로 떠밀려 나간 그의 뜬 눈을 감겨줄 텐데.
_구병모, 『채빙』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얼음이 녹고 살아남은 자들은 얼음 속에 갇힌 나라는 존재를 사한 또는 현명이라 부르며 원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런 나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는 얼음새꽃을 가져올 뿐이다. 나에게 소중한 존재인 그가 죽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도시의 경계에 있는 배반의 호수는 자살자들의 성지다. 죽은 뒤 다른 이들에게 먹히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몸을 던지는 곳이어서 배반의 호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가문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죽은 이를 먹는 법에 반하는 행위는 살인에 버금가는 중죄로 취급된다. 그렇지만 가문에서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호수를 둘러싼 철조망도 그들의 의지를 꺽지는 못한다. 누군가는 이런 유서를 남겼다. “인간은 다른 이의 살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며 생존해야 할 만큼 고귀한 존재가 아니다.”
_남유하, 『얼음을 씹다』

빙하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부족하다. 그래서 가족이 죽으면 먹는다. 이것은 지켜야 할 규칙이다. 내 딸이 죽었다. 나는 절대 내 딸을 먹지 않을 것이고 어머니가 먹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식인이라는 민감한 소재가 나오지만, 유리아의 행동이 너무 처절하고 결말 또한 안타까웠다.

“네가 오늘 하루를 무사히 지냈다면, 노이. 너는 벌써 그걸로 나를 도운 거야.”
지하를 다녀오면 동통에 시달리며 기진맥진하면서도 이모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아직 열세 살이던 노이에겐 이모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두려움 그 자체였기에, 그런 말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제발 대답해.”
목소리가 떨리는 건 추위 때문만이 아니다.
“나 그 정도는 알아도 되잖아.“
_연여름, 『차가운 파수꾼』

세상은 뜨거워졌고 자외선을 견디지 못하는 피부를 가진 노이는 아파트의 붕괴를 막아주는 ‘선샤인‘이라는 존재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그러나 선샤인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언젠가는 아파트가 무너질 것이다. 이모가 죽은 후 이제트를 만나지만 이제트는 곧 이곳을 떠날 것이다.

✦ 문학과지성사에서 가제본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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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아침의 나라
신원섭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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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아침의 나라』에 나오는 여러 인물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지만, 원하는 결과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각자의 이해관계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행동할 뿐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하나연은 제2의 오유라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나의 예상과 다른 선택을 한다.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고영희를 배려할 정도의 양심은 있는 사람이다.
고영희는 자신을 착취한 오유라와 그루밍 성범죄자 진상에게 큰 타격을 준다. 모두가 그를 약자라 생각했지만 말이다. 경제적 여유도 생겼으니 아이와 함께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다.
이진수는 무사히 가양시를 벗어났을 것이다. 5년 전 도미애와 이진수 사이에 있던 사건은 뭘까. 위기 순간 보인 아이의 환영도 궁금하다. 왠지 이진수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끝났지만, 결말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기에 등장인물 모두 잘 살 것 같다. 김주미와 오유라는 재기를 준비하고 도미애는 새로운 권력자의 뒤처리를 하며 이득을 취하겠지. 한 사장 또한 돈이 많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_P.71
SNS의 시대에 《가양일보》 같은 군소 지방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옳은 말을 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의 정의는 이미 희소가치를 잃은 지 오래였다.
트위터 계정만 있으면 누구든지 입바른 말을 쏟아 낼 수 있었다. 그 덕에 정의는 나날이 가벼워졌다. 현실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올바름이 온라인에서는 강물처럼 흘러넘쳤다.
누구나 옷을 갈아입듯 말을 바꿀 수 있었다. 아름다운 구호에는 팔로워가 따라붙었다. 바야흐로 모두가 쉽고 빠르게 정의로워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_P.103
하나연은 정치인이 되기보다 정치인의 절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복지단체 대표보다는 자문 변호사가 되어 따박따박 자문료나 받으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과한 욕심을 부리다 화를 입을까 두려웠고, 권력의 달콤함에 중독되어 추하게 늙어 갈까 봐 겁이 났다.
그런 점에서는 역시 돈이 최고다. 인간의 영혼은 세월에 의해 부패하지만, 돈은 시간을 양분 삼아 자라나니까.
_P.351
누구도 해칠 수 없는 자는 선한가?
모두에게 무해한 인간은 결코 선한 사람일 수 없다. 누구도 해하지 못하는 자가 선한 게 아니라, 해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자가 선한 것이다.
승자가 된 하나연의 미래에는 절대 선과 절대 악 사이의 무수한 갈림길이 존재했다. 그녀는 진정 정의로운 변호사가 될 수도, 제2의 오유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연은 생각했다. 오유라를 꺽고 한 사장을 굴복시킨 뒤에야 마침내 선택권이 주어진 셈이라고.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는데, 앞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던 하나연은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버렸다. 그녀가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세상은 끔찍하고, 사람들은 다 별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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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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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헌은 이사한 하숙집에서 자신을 피하지 않고 대화를 나눈 상대인 집주인의 오빠 매든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와의 미래를 공상한다. 그런 생각에 빠져 매든이 한쪽 다리를 절고 그에게 술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매든 또한 주디스가 착용한 장신구만 보고 그를 부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게 할 생각에 주디스의 금색 손목시계가 멈췄다는 걸 모른다. 주디스는 매든이 자신에게 친절했던 이유를 알게 되고 상심해 6개월간의 금주를 깨고 다시 술을 마신다.

빨강 머리 앤의 앤도 주디스처럼 공상을 즐기지만 왜 주디스의 공상은 앤처럼 귀엽고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까.

주디스는 외로움보다 엄청난 고통을 원할 정도로 누군가를 원한다. 그러나 그에겐 아무도 없다. 나는 주디스가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고 비웃는 걸 모른척할 만큼 외로웠던 거다.

_P.205
한 잔 마시면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술은 망각을 돕는 게 아니라 기억을 도왔고,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불쾌한 사실들을 이성적이고 아름답고 완벽한 패턴으로 재정리해 주었다. 알코올 중독자. 주디스는 위험하고 실망스러운 순간을 떨치려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술을 마시는 건 이 모든 시련을 좀 더 철학적으로 바라보고 더욱 꼼꼼히 따져 보기 위해서였다. 이성을 거절하는 각성제의 힘을 빌려서.
_P.266
“당신 일이라고요? 그럼 저는요. 매든 씨? 제가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당신이 절 대접하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어떤 기대감을 주고, 제가 온갖 생각을 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러고는 지금은 그냥 무시해 버렸고요. 전 겸손하게 당신을 쫓아다녔는데, 당신은 뻔뻔하게도 제게 사업상 구애를 한 거였군요. 제가 당신의 그 바보 같은 식당에 돈을 좀 투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요.“
_P.393
“당신에게는 남은 희망이 없어요, 모이라. 그럼 당신도 나처럼 되는 거예요. 대낮에 망상이나 하면서 그 꿈을 붙잡고 싶어 하는 거죠. 하지만 붙잡을 수 없어요. 그래서 술을 마셔요. 그 망상을 실현해 주는 힘을 얻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모이라, 그 인간이 실제로는 어떤 인간이건 간에, 그는 당신한테 상냥한 말을 건네는 왕자님이 돼요. 왕자님. 설령 그 왕자님이 늙고 못생기고 흔해 빠진 사람일지라도요. 그 남자가 가장 자랑할 만한 경력이 뉴욕 어느 호텔의 도어맨이라고 해도 상관없게 돼요. 이제 내 말이 실감이 돼요? 믿을 수 있겠어요?”
_P.412
그럼 이제, 난 어떻게 될까. 한 해 한 해 방구석에서 늙어갈까. 사람들이 날 구빈원으로 데려갈 때까지. 수녀들이 운영하는 집구석에 처박혀 우물우물 중얼대는, 사람들에게서 잊힌 노파. 주님, 이 도시에 홀로 남은 저는 어떻게 되나요? 제 옆에 남는 건 술뿐일까요? 술은 지긋지긋해요. 술은 쓸쓸해요. 술은 저를 무디게 했다가 결국 부끄럽게 만들어요. 저를 더 외롭게 하고 더 경멸받도록 만들어 버려요. 대체 왜 제게 이런 십자가를 주셨죠? 차라리 다른 걸 주세요. 엄청난 고통, 진짜 몹쓸 병, 어떤 것이든 주세요. 하지만 누군가가 함께하게…… 그 고통, 그 병을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제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어째서 그렇게 작은 감실 뒤에 조용히 숨어서 절 괴롭히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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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약국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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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만큼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 있을까. 소설은 허구가 섞이지만 에세이는 그렇지 않다. 마음에 드는 에세이를 만나면 작가에게 내적 친밀감이 생기는 만큼 그런 에세이를 만나기는 어렵다. 한동안 에세이를 읽지 않은 이유였는데 오랜만에 좋은 친구를 사귄 기분이다.

『밤의 약국』은 작가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돋보인다. 지금은 이전한 역에서 살던 꿩이 어디로 갔을지 걱정하고, 여러 날 보이지 않는 할머니가 다시 나타났을 때 안도하는 마음. 이 외에도 곳곳에서 작가의 다정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미완성 추리소설 『토끼 인형 살인 사건』을 언젠가 만나게 되기를.

_P.96
밤에 약국에 있으면 세상이 무슨 색인지 알게 된다. 그러니까 세계는 사실 검푸른색이거나 짙은 남보라색이고 낮의 온갖 다채로운 빛깔은 그 어둠을 덮기 위한 위장에 불과하다는 생각?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던 존재들이 밤이 되면 여기저기서 나타났고, 환한 대낮을 걷듯 거리를 활보했다. 언젠가 내 소설 『무한의 책』에서 난 편의점이 밤이라는 바다를 밝히는 등대라고 썼지만, 오래전엔(왜냐하면 그땐 지금처럼 편의점이 많지 많지 않았으니까) 약국이 그 등대였다.
_P.122
인간은 살아야 하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고통스러운 삶을 스스로 끝낼 권리를 달라고 투쟁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말기암이나 치료 불가능한 파킨슨병 등을 앓던 그들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했다. 평온하게 죽는 것. 독극물을 마시거나 목에 줄을 매거나 어딘가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죽음을 조용히 맞이하는 것.
_P.155
만약 진정한 작별 인사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삼천 배쯤은 가벼워질 거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이루지 못한 인사들은 점점 더 쌓여만 간다.
그리고 어느 날, 난 발밑을 보고 알았어.
내가 밟고 선 땅이 바로 그 인사들의 무게라는 것을.
그 무게가 나를 지탱해주고 나는 거기에 기대어 심연같은 지상을 날아오르며 건너가는 거지. 무거워질수록 자꾸만 가벼워지며.
_P.236
특히나 “잘 말린 호프”, 이 다섯 음절을 나는 될수록 여러 번 더 발음해본다.
잘 말린 호프, 잘 말린 호프. 이게 나에겐 자꾸 희망을 잘 말리라는 것처럼 들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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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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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열석에서 불에 타 죽는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범인에게 이멀레이션 맨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세 번째 시신에서 발견된 워싱턴 포라는 단어는 유능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현재는 정직 상태인 경찰의 이름이다. 워싱턴 포는 수사 능력이 뛰어나지만 경찰들 사이에도 적이 많다. 그는 살인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수사에 합류해 살인자를 찾는다. 포의 수사를 따라가며 나는 범인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러나 이 소설은 누가 범인인가보다 살인의 이유가 중요하다. 살인의 이유는 충격적이지만 이 또한 내가 예상했던 것이다. 작년에 넷플릭스에서 『발할라 살인』을 봤는데 이 책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속 시원한 사이다 결말은 나오지 않지만,(이 부분도 현대의 수사물답게 현실적이다. 그는 경찰이지 히어로가 아니니까.) 나비효과가 일어났기를. 그래서 피해자들이 조금은 위안을 얻었기를.

영국에서 워싱턴 포 시리즈가 계속해서 나오는 만큼 책의 두께가 두꺼워도 잘 읽히는 추리소설이다. 내가 퍼핏 쇼와 비슷한 드라마를 먼저 봐서 너무 빨리 사건에 다가갔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더 재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P.36
이멀레이션 맨은 피해자의 가슴에 두 단어를 새겨 넣었다.
“워싱턴 포.”
P.389
포는 처음부터 이 장대한 계획의 일부분이었을까?
P.439
“넌 항상 어디든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고 주장했지. 그럼 묻겠는데, 너한테 증거를 주면 그게 확실히 알려지게 할 거야? 우리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거냐고, 포? 내 친구들한테 최소한 그 정도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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