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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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 지 불과 두 달 정도 밖에 되지않은 신작인데, 현재 추리 미스테리 장르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있다. 인터넷 서점에 소개된 이 책의 광고문구는 상당히 강렬하고 또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한국 미스테리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라는 찬사와 함께 스포 금지를 당부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충격적 반전이라는 광고 자체가 이미 스포일러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반전이 의식되어 읽는내내 신경이 쓰이고 집중에 방해가 될 수 밖에 없다. 반전 미스테리는 반전이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아예 모르고 읽는 것이 가장 좋다.



일단 이 작가는 필력이 나쁘지 않다. 문장의 구성이나 단어의 선택 등에서 안정감과 무게감이 느껴지며, 적당한 충격과 함께 호기심을 자아내는 각 챕터의 연결방식도 세련되게 구사한다. 정교하게 짜여진 사건과 경찰의 수사과정이 적절히 배치되어 몰입감을 높여주고, 사체의 부검이나 CCTV 분석 등 전문적인 수사과정에 대한 묘사도 어설프지않아, 작가가 충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글을 썼다고 느껴진다. 스토리가 계속해서 흥미롭게 이어지고 군더더기없이 비교적 짧게 끊어지는 문장들로 인해 가독성이 높아 페이지가 정말 빨리 넘어간다.


반전 미스테리의 역사는 이미 오래되었다. 특히 일본 추리소설들 중에서 놀라운 반전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들이 많다.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같은 유명한 작품도 생각나는데, 이런 작품들은 대부분 '식스 센스'나 '유주얼 서스펙트'같은 영화처럼 그야말로 반전에 올인을 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이 마지막 반전을 위한 정교한 밑그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반전에 이르러서야 독자들은 완성된 그림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마지막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강한 충격과 짜릿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런 정석적인 반전 미스테리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요란하게 광고했던 것처럼 마지막에 의외의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내용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줄 만큼의 파급력을 가지고있지는 않다. 물론 그 반전으로 인해 몇가지 의문점이 해소되는 부분도 있으나, 주인공을 제외한 주변인물들을 작위적이고 소모적으로 사용하면서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는 그들의 행위와 동기를 반전으로 퉁치는 듯한 느낌도 든다. 게다가 일본 추리물을 많이 접했던 사람들에겐 어디서 본 듯한 느낌과 함께 이 반전 트릭이 그다지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교사와 형사를 맡은 두 주인공의 캐릭터 구축력은 나무랄 데가 없다. 특히 시간이 따라 차츰 다양한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는 교사 김준후에 대한 묘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부분이었다. 기본 뼈대가 되는 스토리 자체가 충분히 흥미로운 요소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반전을 위해 주인공을 제외한 주요인물들의 묘사를 축소한 점은 많이 아쉽다.



제목에 홍학이 들어간 이유는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알게되는데, 막상 이 홍학에 집착하는 인물에 대한 서사가 빈약해서 감정이입이 힘들다보니 그냥 근사한 제목을 위해 끼워맞추기 식으로 상징성을 부여한 느낌이 있다. 네덜란드의 아루바 섬은 실제로는 중남미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해있는데, 소설에 언급된 것처럼 홍학과 함께 할 수 있는 플라멩고 비치가 유명한 모양이다.


이 작품은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지만 강력한 흡인력으로 단숨에 읽게 만드는 페이지터너 또는 킬링타임용이라는 측면에서는 확실한 만족감을 주고 있다. 그렇지만 반전의 특성상 이 작품이 영화화될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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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살인귀 1~2 - 전2권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진환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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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당연히 길이가 길어서 분책을 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각각 독립된 작품이었고 2편은 1편의 성공에 힘입어 속편으로 나온 것이었다.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는 일본 추리소설계에서 '신본격 미스테리'라는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던 중요한 인물로 손꼽히는 거물급 스타작가인데, 특히 호러 장르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유혈이 낭자하는 그야말로 무자비한 슬래셔 호러 소설이다. '13일의 금요일'이나 '할로윈' 같은 공포영화를 영상이 아닌 글로 읽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편은 1990년에 2편은 3년뒤인 93년에 처음 발표되었는데, 그 후로 약 20년이 지난 2011년과 12년에 각각 개정판이 나왔고, 이번에 읽은 이 책들은 모두 이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었다. 약간 만화스러운 표지 디자인 역시 별도 제작하지 않고 일본 개정판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80년대 초에 등장하여 전세계적으로 슬래셔 무비의 열풍을 이끌었던 '13일의 금요일'시리즈는 80년대 말에 이미 8탄이 만들어졌을 정도였으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편의 경우는 막판에 의외의 범인이 밝혀지면서 반전과 함께 미스테리 성향이 어느정도 있었지만, 희대의 살인마 제이슨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2편부터는 오로지 사람을 어떻게하면 좀더 잔인하게 죽이는가 하는 방법론에 골몰하게 된다. 제이슨은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무적에 불사신 캐릭터가 되었고, 관객들은 그가 다양한 방법으로 죽이는 행위 자체가 영화를 보는 목적이 되어버렸다. '할로윈'시리즈 역시 흥미로운 스토리라인이 돋보였던 1편을 지나 2편부터는 마이클의 다양한 살육 퍼포먼스가 스토리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런 슬래셔 호러 영화들이 그동안 자연스럽게 쌓아올린 어떤 정형화된 설정과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인간계를 뛰어넘는 막강한 피지컬의 살인마가 펼치는 잔혹한 행위의 적나라한 묘사에 포커스를 두고, 한 사람씩 차례로 죽여나가다가 마지막에 남은 생존자와 최후의 대결을 펼치고 살인마의 부활을 암시하면서 후속편을 기약하는 그런 패턴... 정말 읽다보면 '13일의 금요일'시리즈의 또 다른 한 편을 책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영상이 아닌 글로 표현되니 잔혹함의 강도가 오히려 훨씬 더 쎄게 다가온다. 영화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하드고어한 묘사가 그야말로 인정사정없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일본 추리작가들의 필력은 거의 상향평준화 되어있기 때문에, 이 작가의 필력 역시 그리 특출나지는 않지만 반대로 부족함도 별로 보이지 않는 보편적인 수준이다. 다만 세대가 세대이니만큼 아무래도 좀 올드한 느낌이 드는 부분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특히 살인마를 묘사하는데 있어 그에겐 인간의 감정이 없다는 식의 너무 대놓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고수의 글답지않고 어떻게보면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나기도 한다.



사실 공포영화들이 대부분 B급영화라 불리듯이 이런 노골적인 슬래셔 장르를 소설 형식으로 옮기려고 할 때 고급스러운 느낌을 내기란 생각보다 쉽지않다. 애초에 품위와는 거리가 먼 원색적인 표현들이 난무할 수 밖에 없어서 자칫하면 삼류 저질 무협지 수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확실히 유치하다고 느껴질만한 부분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선을 유지하는 노련함이 있다. 그리고 '신본격'을 대표하는 작가답게 하나의 추리소설로도 손색이 없는 미스테리 요소를 서술트릭을 이용해 곳곳에 심어두고 있다. 특히 1편의 목차를 보면 왜 B와 A가 번갈아 나오는지 궁금증이 일어나는데 나중에 반전과 함께 그 이유가 드러난다.



좀 억지스러운 설정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어차피 내용 자체가 말도 안되는 '전설의 고향' 수준이라, 메인요리인 피칠갑에 약간의 양념이 가해진 정도라 보면 될 것 같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이러한 서술트릭이 아마도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스타일이자 특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사람들이 추리소설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겠지만, 이렇게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벌써 오래전부터 나왔다는 사실이 좀 부럽다. 우리나라도 성인들이 즐길 수 있는 과감한 표현과 아이디어가 거침없이 들어간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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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성 스토리콜렉터 51
혼다 테쓰야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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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소설로는 독보적인 작품이 하나 있다. 아마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바로 그 작품 '살육에 이르는 병'... 예전에 멋모르고 읽다가 내장이 뒤틀리고 토가 쏠리는 경험을 했던... 이 작품도 그에 못지않은 잔인한 신체 손괴 묘사와 함께 배설물과 관련한 역겨움까지 더해져서 비위가 약하다면 끝까지 읽기가 괴로운 그런 류의 소설이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우리나라에서 소설로는 보기 드문 '19세미만 구독불가'라는 딱지가 붙어있기 때문에 성인인증을 하지않으면 절대 구매할 수가 없는 책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제한 규제같은 건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잔인한 장면이 전부 피의자의 진술에 의한 간접적인 묘사로 처리되어 있어서 충격의 강도를 많이 완화시키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 같다. 즉, 독자는 경찰이 기록한 진술서를 통해 당시 사건현장을 상상하게 되는 방식인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그대로 그 '짐승의 성'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엽기적 행각들은 상상하는 것 자체가 더 고역인 수준이다.



​이 작품은 후반부에 과연 실질적인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반전을 가미한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일본 특유의 사회파 추리물에 가까운 내용에 종국에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짓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작가는 미스테리보다는 우리가 믿기힘든 '인간성'의 또다른 면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자는 점에 촛점을 맞춘 것 같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악마같은 인간에게 오랜 기간 구속당하면서 서서히 본인도 그 악마성에 동화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이 소설의 내용만 놓고 본다면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등장인물의 심리와 행동에 근거가 빈약해서 설득력도 없고... 아무리 상상력이라고 해도 작가가 너무 막 나가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은 이 작품이 90년대말 일본 기타큐슈에서 일어난 일가족 감금 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있다는 점이다. 실제사건이 너무나 엽기적이고 잔혹하여 당시 일본 정부가 언론을 통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책을 다 읽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알게된 사실이다. 어이없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임을 알고나면 다소 미흡했던 내용의 개연성이 오히려 완벽한 설득력을 갖게된다.


작가의 필력은 일본의 스타급 추리작가 범주에서는 비교적 평범한 수준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추리물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대부분의 일본작가들이 질릴 정도로 과도하게 디테일한 서술을 구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이 작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위와 같은 서술도 사실 전화를 건 행동이나 나머지 부분 전부다 굳이 독자가 알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군더더기 묘사들이다.



이 부분 역시 빼버려도 전혀 문제없는 문장이다. 예의바른 성격임을 알려주려는 목적인지는 몰라도 이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게 아니라서 그냥 극의 흐름을 늘어지게 할 뿐이다. 일본작가들의 이런 집착에 가까운 디테일은 물론 장단점이 있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사건의 잔혹함과 긴박함에 비해 중간중간 도시락 먹는 장면을 포함해서 경찰들의 수사과정이 좀 태평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위처럼 마치 작가 자신의 독백처럼 느껴지는 구절들이 있다.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이면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만 묘사하면 되는데, 이렇게 등장인물의 생각인지 작가자신의 개인적 소감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문장으로 작가가 작품을 통해 하고싶은 말을 그냥 직접적으로 해버린다. 역시나 지나치게 디테일하고 지나치게 친절하다.


​비록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소설적 재미를 위해 작가가 상상력을 가미해 각색한 부분도 많고 교묘한 수위조절 및 교차편집을 통해 후반부의 서스펜스를 증폭시키는 테크닉은 꽤 인상적이다. 공포물은 상당히 좋아하는 편인데 다 읽고나서도 왠지 후련하지가 않고 찝찝한 뒷맛이 남는다는 점에서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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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키 파크
마틴 크루즈 스미스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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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작가와의 두번째 만남이다. 처음 만났던 작품은 '북극성'이라는 제목인데 약 30년전에 사서 읽었던 책이었고, 아마도 책표지에 해양 스릴러물이라 소개되어 있어서 구매욕구를 자극했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차갑고 묵직한 분위기와 마지막에 범인이 바다 속으로 깊이 가라앉는 장면이 지금도 인상깊게 남아있을 만큼 만족스럽게 읽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나중에야 알게됐지만 북극성은 아르카디 렌코가 등장하는 두번째 작품이었다. 어쩌다보니 순서가 바뀌어 시리즈 첫번째 작품을 30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 읽게 된 셈이다.



​이 작품은 마틴 크루즈 스미스를 단숨에 스타작가로 올려놓은 대표작이기도 하고 북극성을 통해 또 그만큼 실력이 좋은 작가임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기대가 제법 컷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 책은 초반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영미권 범죄 스릴러 장르의 소설을 읽다보면 종종 이런 경험을 하게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책처럼 등장인물들에 대한 행동이나 심리묘사가 명확하게 와닿지가 않고,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이 들어서 독서에 집중이 되지않는 그런 현상이다. 특히 대화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들이 나오는데 각각의 대사가 도대체 누가 하는 말인지 분간이 안되는 상황들이 수시로 나와서 혼란스럽게 만들고, 또 높임말과 반말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어투들도 상황에 맞지않는 어색한 부분이 많아 캐릭터에 도무지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어서 흥미롭고 즐거워야 할 책읽기가 짜증스럽게 변해버린다. 이 모든게 바로 '번역' 때문이다.



​마틴 크루즈 스미스는 소위 말하는 '급'이 높은 작가다. 미국작가임에도 당시 자유로운 왕래가 거의 불가능했던 구 소련의 사법 시스템과 KGB를 포함한 여러 기관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베일에 가려진 공산국가를 주무대로 독창적인 스토리를 펼치면서 묵직한 스릴감과 함께 냉전시대를 관통하는 여러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들을 심도있게 녹여넣는 스타일을 구사한다. 중심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를 디테일하게 풀어가기 때문에 각 문장 속에 숨어있는 정보량이 많고 대화의 내용도 어려운 부분이 많아, 그만큼 제대로 번역하지 않으면 이해를 못해서 잔재미를 느낄 수가 없는 그런 유형의 작가이다.


이 작품은 박영인씨라는 분이 번역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얼마전에 읽었던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이라는 책도 이 분이 번역을 했고, 그 책도 번역에 문제가 좀 많다고 이미 리뷰를 한 바 있다. 이 작품 역시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어투 설정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캐릭터성이 죽어버리는 기본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번역가 스스로가 내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의 기계적인 직역 위주로 대충 떼워버린 듯한 부분이 너무 많이 보인다. 번역가도 이해를 못한 내용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는가...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서도 지금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또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어떤 상황인지 명확하게 와닿지가 않아서 결국에는 난해하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는거다. 그와중에 또 여전히 눈가리고 아웅하는 듯한 불필요한 주석들은 역시나 트레이드마크처럼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나하나 지적하자면 셀 수도 없을 정도인데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비교적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부분의 번역만 봐도 이 책의 가독성이 얼마나 나쁜지 바로 알 수 있다. 당연히 탄약통은 탄창, 탄약통 껍데기는 그냥 탄피라고 해야 한다. 총기류에 있어서 탄약통 껍데기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번역가가 번역을 잘하기 위해서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첫째 조건은 외국어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어' 실력이라 생각한다. 뛰어난 번역가는 거의 소설가 수준의 문학적인 감성이 느껴질 정도로 한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이 책의 번역가는 문장의 구성이나 단어의 선택 등 여러 부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때, 좀 심하게 말하면 원작의 재미와 완성도를 거의 절반도 못 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를 비롯하여 사상과 인종에 관한 문제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어서, 모처럼 수준높은 범죄 스릴러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아쉽게도 번역때문에 다 망친 것 같아 살짝 화가 난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지뢰를 밟았다. 지금까지 영미권 장르소설 번역가 중에 믿고 거르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이제 한 명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제발 좋은 작품은 실력있는 번역가에게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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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7-06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탄약통 껍데기와 탄피!

절반도 못 살려낸 원작의 완성도!

이렇게 이야기해주시니 꼭 원작으로 시도해봐야겠구나 싶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실버북 2021-07-06 09:21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루 버니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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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딱 한 편을 읽고 작가의 스타일을 논하기에는 좀 성급할 수도 있다. 간혹 작품 소재나 주제에 따라 글쓰기에 변화를 주는 작가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작가는 워낙 개성이 강해서 다른 작품들도 거의 비슷한 패턴일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느꼈던 인상은 좀 '올드하다'라는 점이다. 주인공의 직업이 사립탐정이라는 것 자체에서 벌써 옛날 느낌이 물씬 풍기고 스토리의 진행도 느릿느릿하다. 아무래도 작가가 50년대 '레이먼드 챈들러'나 80년대 '제임스 엘로이'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이 작가는 배경이나 상황 등의 묘사에 있어서 별다른 수식어를 쓰지 않고 담백하게 처리하는 편이지만, 범죄 미스테리 장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중심이 되는 사건과 별 상관없는 시시콜콜한 일상의 장면들에 할애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상당히 지루하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한편의 영화보다 20부작 드라마 쪽에 훨씬 어울리는 긴 호흡의 진행이기 때문에 확실히 이 작가의 진가는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대사처리하는 방식이 상당히 수준이 높고 유머감각도 고급스럽다. 특히 각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유머는 작가의 고향이자 이 작품의 주 배경인 오클라호마 현지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꽤 눈에 띌 정도로 지역색이 느껴져서, 아마 오클라호마 토박이가 이 책을 읽는다면 많이 웃으면서 즐길 것 같다. 작가가 각 캐릭터의 특징이나 심리묘사까지 거의 모든 부분을 대화를 통해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각각의 대사를 음미하고 즐기지 못한다면 나머지는 거의 건질게 없다.


이 책은 번역이 많이 아쉽다. 이렇게 대화 자체의 잔재미가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경우 각각의 어투와 뉘앙스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은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종류의 작품이 번역하기 가장 까다롭다는 건 알지만, 사립탐정인 남자주인공이 쓰는 말투만 보더라도 그다지 일관성도 없고 어떤 경우는 어울리지도 않아서 번역으로 인해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 살짝 줄어든 모습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많은 주석이 달려있다. 신경써서 꼼꼼하게 번역한 부분도 보이지만, 막상 대부분의 주석들은 굳이 따로 빼내어 부연설명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마치 번역가가 능력의 부족을 주석의 물량공세로 떼우면서 그래도 열심히 했으니 알아봐달라고 생색내는 느낌이랄까... 예전에 어떤 돌팔이 번역가가 본문 번역은 개판으로 해놓고, 별 쓰잘떼기없는 주석만 잔뜩 달아서 눈가리고 아웅하던 모습이 겹쳐보여 씁쓸해진다.

실력있는 번역가라면 이런식으로 너저분하게 주석을 달지 않는다. 차라리 오클라호마 특유의 지역정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부분만 깔끔하게 추려서 주석으로 활용하겠지... 이 책은 바로 그런 부분의 설명이 필요하니까...

어쨌든 이 작품은 많은 상을 받고 그에 걸맞는 수많은 찬사들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내스타일은 아닌걸로... 임팩트있는 사건도 없이 너무 밋밋하게만 흘러가니 읽는내내 답답하기만 했다. 미국 사람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번역된 책을 읽고 호평을 한 독자들은 과연 어떤 점이 좋았는지 궁금할 정도다. 아무리 취향은 다양하다지만... 다음에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굳이 찾아 읽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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