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널리스트
존 카첸바크 지음, 나선숙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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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소설 10계명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이것은 '애거서 크리스티' 등이 한창 활약하던 시절의 오래전 얘기라, 지금처럼 다양하고 스피디한 작품들과는 별 상관없는 케케묵은 조항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10계명의 대부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 재미있는데, 그 중에서도 범인은 반드시 초반부에 나와야만 한다는 조항은 특별히 눈여겨볼 만 하다. 추리소설이 작가와 독자간의 페어플레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만큼, 막판에 난데없이 등장하는 범인이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프리 디버'나 '마이클 코넬리', 또는 '댄 브라운' 같은 최근 작가들의 작품도 각자 스타일은 달라도 이 부분 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물론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초반부터 범인을 손쉽게 예측하게 되는 역효과가 발생하면서, 작가들은 덕분에 반전에 반전을 꾀하는 등 점점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존 카첸바크'라는 작가는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한다. 2002년도에 발표되었으니, 10년전 작품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한 정신분석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작가가 무슨 꿍꿍이로 이런 스토리를 끌고가는건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영문도 모른채 누군가에게 갑자기 죽음을 강요받는다는 설정 자체는 흥미로운데, 주인공이 그 원인과 상대를 파헤쳐가는 과정에서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자꾸만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그런 느낌...

중반부 이후 펼쳐지는 주인공의 변신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이자 준비된 노림수에 해당한다. 노련한 분석가로서의 역습은 제목이 시사하는 모든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나이나 이전 삶을 고려하면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생뚱맞은 전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는 핵심 등장인물들이 주인공을 제외하면 고작 서너명(그 서너명조차도 존재감이 엑스트라 수준으로 미미하다)밖에 되지않는다는 점이 작가의 무리수를 뒷바침하고 있다. 이런 소수의 인물들로 나올 수 있는 변수가 거의 없다보니, 작가가 과연 어떤 식으로 마무리를 지을지 걱정마저 들 지경이었다.

결국 우려했던만큼 범인이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의 강도는 약했지만, 비교적 긴 분량임에도 독자의 시선을 계속 붙들어매는 작가의 뚝심있는 필력은 평범함을 넘어선다. 10계명의 조항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점도 호감을 준다. 아마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한 권 정도는 더 찾아 읽어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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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트 블랑슈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
제프리 디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뿔(웅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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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릴적 우연히 읽어보았던 한 권의 책은, 책표지나 심지어 정확한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세부적인 내용이 떠오를 만큼 그 느낌이 생생하다. 세명의 장님들이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으로 암살을 행하는 충격적인 도입부를 비롯하여 해변가, 섬, 아름다운 여인, 거대한 문어와의 사투, 그리고 불을 뿜는 용의 실체가 밝혀지기까지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액션씬들의 연속... 그 당시 '애거서 크리스티'나 'S.S. 반다인' 등의 추리물에 익숙해있던 내겐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책이 007시리즈의 첫번째 영화 '살인번호(Dr. NO)'의 원작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실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링컨 라임'시리즈로 이미 커다란 영역을 확보하고있는 제프리 디버가 난데없이 007을 들고왔다. 그가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와 어떤 인연이 있는 지는 잘 모르지만, 저작권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을터인데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제임스 본드를 택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카르트 블랑슈... 전권을 부여받은 백지위임장을 뜻하는 제목의 이 작품은 이안 플레밍의 원작보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영화의 분위기와 가깝다. 곳곳에서 그가 가진 007시리즈에 대한 특별한 애정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특히 '유어 아이즈 온리'와 같은 대사는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라 보아도 좋을 것 같은 재치가 엿보인다.

이안 플레밍의 007시리즈는 '영국'이라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영화에서도 이것을 중요하게 고수해 왔으며, (비록 95년 피어스 브로스넌과 BMW의 등장으로 그 정통성이 깨어지게 되었지만) 제임스 본드는 언제나 영국출신의 배우여야 하며 본드카 역시 영국산 애스턴 마틴이나 로터스사의 모델로 할 것 등을 원칙으로 여겨왔다. 본드걸과 본드카, 그리고 세계정복 수준의 배포 큰 스케일을 소유한 악당 등이 필수요소인 007시리즈는 적어도 서너곳 이상의 세계무대를 오가는 모험과 멋진 슈트, 비밀무기, 또는 젓지않고 흔든 마티니 한 잔 따위의 추가요소들이 거의 인장처럼 작용을 한다.

제프리 디버도 이러한 시리즈의 고유한 요소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이를 살짝 비틀거나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형시켜 적용하려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디버의 이 작품에는 옷과 술, 음식, 자동차 등 수많은 소품들의 메이커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벤틀리를 본드카로 채택한 것은 개인적인 취양인듯 하다. 디버가 미국작가임을 고려하면 영국이라는 배경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이 작품을 쓰기위해 그야말로 엄청난 자료조사가 이루어졌음을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작가의 시리즈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과는 별개로, 이 작품의 완성도는 살짝 아쉬움을 남긴다. 디버의 작품들을 비교적 많이 접해서인지 그가 구사하는 플롯과 패턴들에 익숙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남겨진 자들'에서도 보여졌던 반복되는 페이크씬은 여기서도 줄기차게 등장한다. 상대 무리들이 미행하던 본드를 교묘하게 따돌리는 장면이 나오면, 곧바로 다음씬에서 따돌렸던 사람이 본드가 아니고 이것을 미리 예측한 본드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속인 것이라는 식이다. 속고 속이는 예측불허의 두뇌게임임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이런 패턴이 너무나 계속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결국 이것은 주인공에게 위기상황이 와도 또 페이크겠지 하게되는 긴장감 상실을 가져오고 만다. 물론 이 작품은 이안 플레밍의 007이 아닌 제프리 디버의 007인 관계로 디버스럽다고 미화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근 그의 소설에서 빈번하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이러한 페이크씬들은 뻔히 다음 장면이 예측되다보니 식상한 느낌마저 안겨주는게 사실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까지 거쳐오면서 007시리즈의 색깔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숀 코네리나 로저 무어의 본드시절은 적어도 낭만이란 것이 있었는데...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면서, 그 시절의 여유와 유머감각은 사라지고 거친액션만 남은 지금은 한없이 옛 시절을 그립게 만든다.

<사족>
1. 그가 이 작품을 기획하면서 영화화를 심각하게 염두해 두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의 그의 인지도를 고려하면 영화제작사 측에서도 분명 긍정적인 검토를 하고 있거나 이미 했으리라 생각된다.

2.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프랑스의 협력자 '르네 마티스'와 미국 CIA의 '펠릭스 라이터'라는 캐릭터는 모두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데뷔작 '카지노 로얄'에도 나오는 인물이어서 흥미롭다. 이들이 이안 플레밍의 소설에도 등장했던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영화 '카지노 로얄'에 등장했던 르네 마티스와 펠릭스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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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존 르 카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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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 르 카레'는 오래전 '러시아 하우스'라는 책으로 첫인연을 맺었는데, 돌이켜보니 벌써 20년전 일이다. 1989년도에 발표된 책이 곧바로 다음해인 90년에 국내에 번역소개되었으니, 생소한 작가의 작품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물론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숀 코네리'와 '미쉘 파이퍼'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로 제작중이었고, 당연히 국내에도 개봉될 예정이라는 엄청난 프리미엄 때문이었다. 당시 '김영사'라는 출판사는 거물작가 '시드니 셀던'의 초히트작들과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공원' 등, 막강한 대박아이템들을 줄줄이 쏟아내며 발빠른 행보를 자랑했고, 그러한 분위기이다보니 작가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도 믿고 구매를 했던 것 같다.



1990년 초판발행된 책이 나오자마자 샀던 걸로 기억하니까, 대학 다닐때였던 모양이다. 머리가 한참 총명할 때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부푼 기대감에 읽기 시작한 책은 이상하게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초반부를 읽고있음에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추상화를 보는듯 종잡을 수 없는 대사들과 상황의 지루함은, 제아무리 좋아하는 '숀 코네리'가 주연을 맡았다해도 도저히 극복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 책 '러시아 하우스'는 3분의 1도 읽지못한채 책장으로 들어간뒤, 언젠가 다시한번 읽어야지 하다가 이렇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이 봉인되었던 셈이다. 물론 영화도 보는 것을 포기했다.  



최근 '게리 올드만' 주연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개봉되었다. 영화감독 박찬욱씨도 르 카레의 소설들 중에서는 특별히 이 작품을 추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요즘 출판계는 고전과 최신작을 막론하고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작용을 하는 것 같다. 르 카레와의 그 끔찍한 첫만남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회를 통해 재회를 해볼까 생각했던 것도 다름아닌 영화때문이니...



하지만 '프레드릭 포사이드'하면 '자칼의 날'이듯, '존 르 카레'하면 역시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오직 이 한작품이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을 빼놓고 다른 작품을 먼저 읽는 것은 아무래도 순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책 역시 꽤 오래전에 사놓고도 차일피일하다 책장속에 잠자고 있던 차에, 뒤늦게나마 잘못된 인연을 바로잡는다는 묘한 기분과 함께 르 카레와 20년만의 재회를 시작했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60년을 전후하고 있는데, 1963년도에 책이 발표되었으니 작품 속의 시대상이 실제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라 보면 될 듯하다. 2차대전후 동서로 나뉜 독일과, 소련을 위시한 주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그리고 끝없는 냉전... 당시의 이런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준비되지 않으면 아무래도 이 작품을 제대로 즐기기는 힘들것 같다.

스파이... 도대체 스파이란 어떤 존재일까... 스파이소설의 대가라 칭송되는 르 카레가 펼쳐보이는 그들의 세계는 내 예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제임스 본드처럼 폼나는 마티니 한잔의 여유도 없었고, 스릴넘치는 자동차 추격전도 없었으며, 격렬한 액션과 총격전도 없었다. 그저 우리 일반 소시민과 다를바 없는 한낱 '인간'의 모습일 뿐이었다...

정부와 조직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스파이의 삶은 결코 드라마틱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를 속이고, 정보를 팔아먹고, 색출하고, 숨고, 도망다니는 재미없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국가와 이념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속에서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소모될 뿐인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착찹하고 복잡한 뒷맛을 안겨준다. 오늘날 이렇게 평화롭게 잘사는 독일이 왜 그때는 분단되어 서로를 죽이고 감시하는 상황까지 만들었던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왜 수많은 사람들이 히틀러 한명의 의지를 꺽지 못했을까...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인간들은 도대체 왜 전쟁을 하려했던가... 이 작품에는 이러한 근원적인 의문을 품게만드는 힘이 있다. 르 카레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책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20년전의 '러시아 하우스'가 왜 그렇게 지루하고 어려웠는지 이해를 하게되었다. 이 책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건지, 이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드는 르 카레만의 독특한 서술방식이 데자뷰처럼 다가왔다. 그래도 연륜이란걸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천천히 곱씹으며 읽을 정도의 인내심은 쌓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 속에 들어있는 내용의 정보량이 엄청나게 압축되어 있어서, 정신차리고 읽지않으면 금새 갈팡질팡 하게된다. 그렇지만 중반부로 넘어가면 흩어져있던 조각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잡으면서 비로소 후반부에 무서운 속도로 몰아치는 극적 긴장감을 만끽할 수가 있다. 책을 덮고나서야 앞부분의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자잘한 일상사와 장황한 대화들이 모두 철저하게 계산된 장치였다는 것을 알고 뒤늦게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라는 원제에서 'the Cold'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과연 한글제명처럼 '추운나라'라면 과연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지... 베를린장벽 너머의 동독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의 소련까지 아우르는 것인가... 혹시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버린 사람들의 '한없이 춥고 쓸쓸한 마음'은 아닐런지...

<사족>
1.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시리즈로 유명한 인문, 문학문야의 스타번역가 '김석희'씨가 번역을 맡고있어, 읽는 내내 든든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번역가가 달라서 살짝 고민이 된다.

2. 이 작품도 곧바로 영화화되었고, 영국의 명배우 '리처드 버튼'이 주연을 맡았다.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리처드 버튼'이야 워낙 잘 아는 배우라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얼굴을 오버랩시켜보기도 했다. 원작에서 묘사한 주인공에 비해 너무 잘 생긴게 흠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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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레레 1 블랙펜 클럽 22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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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존 그리샴', 또는 '토머스 해리스'의 신작들이 나오면, 득달같이 서점으로 달려가 설레는 마음으로 사서 읽곤 했더랬다. 활기찬 젊은 시절이었던만큼 소위 필이 꽂히는 작가를 만났을때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는 이런 기분을 즐기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한때 우상이었던 작가들은 작고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진 쇠락한 필력으로 실망감만 더해주고, 새롭게 접하는 작가들도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저그런 범작들만 쏟아내고 있으니, 특정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열혈팬의 마음도 그저 추억거리의 한자락이 되고만 것이다.

그러던차에 우연찮게 '늑대의 제국'이라는 작품을 접하면서, 그 참신하고 특이한 매력에 반해 한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는데... 다음으로 읽게된 '검은 선'이 그야말로 꺼져가던 팬심에 새롭고 강력한 불을 지핀 도화선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누구인가... 그것이 궁금하여 데뷔작 '황새'부터 '크림슨 리버', '돌의 집회'까지 국내에 출간된 책은 몽땅 사들여 읽기 시작했다. 심지어 '황새'는 번역의 차이점을 느껴보고자 오래전에 절판된 책을 기어이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중복구매하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중학생때 '애거서 크리스티'의 거의 전작품을 섭렵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추리, 스릴러소설들을 접해온 나에게 그랑제는 현재 유일하게 100% 신뢰하는 작가가 되었다. 거기에는 '늑대의 제국'과 '검은 선'의 번역을 맡은 '이세욱'씨의 역할도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최고의 작가에 최고의 번역가... 팬에게 더 이상의 축복은 없다.

'검은 선' 이후 정말 애타게 기다렸다. 혹시나 번역가가 바뀌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역시 지성이면 감천인 모양이다. 난생처음 예약구매라는 법석까지 떨어가며 드디어 따끈따끈한 신작을 받아들었다. 본작 '미세레레'는 2008년작이다. 시기적으로 2007년작인 '림보의 서약'이 먼저 나와야 순서가 맞는데, 아무래도 출판사의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오래 기다린만큼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려고 한 탓에, 첫페이지를 펼친지 거의 닷새만에 완독을 했다. 책을 덮고 한동안 묵직한 여운에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역시...'라는 말 밖에 안나온다. 소재의 독창성, 전체를 아우르는 구성, 절묘한 컷전환, 방대한 자료조사, 캐릭터, 디테일... 어느 하나 헛점이 없다. 가랑비에 옷젖듯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서서히 누적되던 서스펜스는 후반부에 가서 거의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정말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페이지를 넘겼을 정도다.

'크림슨 리버'와 '늑대의 제국'에서 선보였던 두 주인공의 교차진행 방식은 그랑제의 장기라 할 만한데, 본작 '미세레레'에서는 보다 자유롭고 세련된 형태로 변주되어 있다. 초중반부 칠레의 정치역사와 아르메니아, 카메룬 내전 등, 다양하고 심도있는 내용들이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장황하게 펼쳐질 때는 살짝 늘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역시 노련하고 교묘한 번역이 적절하게 보완을 해주고 있다. 이세욱의 전매특허이기도 한 낯선 순우리말과 한자어들이 본작에서는 거의 맥시멈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제까지 추리, 스릴러라는 장르소설을 읽으며 '문학적'이라고 느낀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거의 유일한데, 이번에 이 '미세레레'를 새롭게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원숙미를 풍기는 그랑제의 디테일한 표현력이 이세욱의 세공을 거쳐 미려한 문장으로 거듭나는 모습이다.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의 한 구절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멀리, 아주 멀리 지평선이 보였다. 그 선이 너무나 뚜렷하고 단단해서, 하늘과 땅이라는 두 개의 부싯돌이 맞붙어서 불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클래식음악이라면 그런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이 작품에서 주제로 택하고있는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세레레'라는 음악은 이번에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15분이 채 안되는 짧은 곡이라, 책을 읽는 중간중간 한번씩 감상하기도 했다.

아... 이제 또 다음 작품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사족>
1. 책의 말미에 있는 '저자와의 만남'은 무척 흥미롭다. 특히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이세욱 번역가의 남다른 노력은 감동스러울 정도이며, 앞으로도 그랑제의 차기작들을 계속 전담할 것이 예상되어 든든하고 감사하다.

2. 영화화된 '크림슨 리버'와 '늑대의 제국'은 모두 '장 르노'가 주연을 맡은바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도 나이와 외모로 보아 혹시 그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저자의 얘기를 들으니 그건 아닌듯... 

3. 정확한 발음이 '미세레레'인지 '미제레레'인지 알 길이 없는 알레그리의 이 곡은 '킹스 컬리지 합창단(King's College Choir)'의 1963년판이 유서깊은 명반으로 알려져있으며, 그랑제도 이 음반을 들으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탈리스 스콜라스(Tallis Scholars)'의 1980년판이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명반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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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스 오브 디셉션 롤스 오브 Rules of 시리즈 1
크리스토퍼 라이히 지음, 이정윤 옮김 / 프리뷰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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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듣는 생소한 작가가 2008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화려한 성과와 추천사들로 도배가 되어있다. 스타작가들의 평범한 신작보다 신인들의 그야말로 흙속의 진주같은 작품들을 발견할 때의 기분이 훨씬 짜릿한 만큼, 상당한 기대감을 안고 읽어나갔다.

주인공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에게 영문도 모른체 쫓기며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다는 설정은, 그동안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다루었던 너무나 익숙한 플롯이다. 추격을 피하면서 차츰 드러나는 적의 정체와 충격적인 음모,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들과 총격전 등의 스릴넘치는 액션이야말로 이러한 플롯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묘미가 아니겠는가. 문제는 작가가 이렇게 익숙한 플롯을 택한 만큼, 예상을 뛰어넘는 그 무엇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초반의 그럴듯한 전개와 달리 갈수록 내러티브가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인공 일행은 위협을 피해 줄곧 고생을 하며 도망다니고 또 어딘가를 찾아다니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지 도무지 공감하기가 힘이 들 정도로 상황에 몰입이 안된다. 극중의 인물들은 생사를 넘나들며, 국가간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그냥 강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인 것이다.

작가가 전체적인 틀을 짜는 방법이나, 캐릭터 구축력, 대사, 디테일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함량미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복잡한 복선이나 구성과는 상관없이 극의 흐름 만큼은 분명하게 감정이입과 전달이 되어야만 한다. 거기에 장면장면의 세심한 연결과 배치, 그리고 적절한 완급과 강약조절 등으로 독자들의 호흡을 쥐락펴락할 때 진정한 프로작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같은 시대에 세계적인 화제작이라면 거의 실시간으로 정보를 접할 수가 있다. 실제 작품의 수준을 고려하면 이렇게 과도한 추천사는 사실 납득하기가 어렵다. 과장광고라면 분명 자제되어야만 할 것이다.

<사족> 유려하지 못하고 맥을 끊는 듯한 딱딱한 번역 역시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덕분에 3부작 형식으로 속편들이 출시될 예정이라고 하지만, 전혀 관심두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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