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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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쪽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 장르인데, 최근에 개봉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서 원작소설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영화 덕분에 이 책도 뒤늦게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었고, 현재 국내에 6권짜리 전집 형식으로 전 시리즈가 모두 번역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대충 독자들의 평을 훑어보니 2~3권까지는 괜찮은데 그 이후는 지루하다는 의견이 많았고, 가장 핵심인 1권이 그 자체만으로 완결이 되는 형식이라 해서 그냥 1권만 구매했다. 하지만 이 1권의 분량만 해도 약 900페이지가 넘어가는 엄청난 대작이다.


제목 듄(Dune)의 사전적 의미는 '모래언덕'이다. 한자로 사구(沙丘)라고도 하는데, 데이빗 린치 감독의 1984년작 영화의 국내 제명이기도 하다. 어쨌든 작품의 주배경인 아라키스 행성이 거의 모래와 사막으로 이루어져있어 듄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지난번 요 네스뵈의 '킹덤' 리뷰 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작품의 번역을 맡으신 분은 김승욱씨이다. 이미 명작의 반열에 올라있는 유명 작품들은 특히나 번역이 중요한 변수인데, 역시나 김승욱씨 특유의 깊이와 무게감이 느껴지는 문장들이 원작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원작 자체가 워낙 관념적이고 사색적인 표현들이 많기 때문에 자칫하면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수월하게 읽힐 정도로 가독성이 좋다는 것은 오로지 번역자의 공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은 SF소설이지만 기발한 장비나 환상적인 시스템 등 미래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아이템들이 생각보다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막복, 방어막, 그리고 오니솝터 정도인데, 그런 외적이고 물리적인 면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 치중한 소설이다. 즉, 제국을 형성하는 가문과 종족들의 권력 암투가 주된 내용인 것이다. 그냥 배경을 우주가 아닌 중세시대로 바꾸어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예를 들자면 '왕좌의 게임'과 같은 중세 시대극의 우주 버전이라고나 할까...


작품의 가장 큰 핵심줄기가 주인공 폴의 정신적 각성이기 때문에, 작가는 그 과정을 설득력있게 묘사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중반부 폴과 제시카 두 모자가 도피 중에 사막 텐트 안에서 계속 대화와 사색만 하면서 내면적 성장을 이루어가는 장면이 그것인데, 진도는 안나가고 선문답 같은 뜬금없고 관념적인 대사들만 끝없이 이어져서 좀 지루한 느낌도 있지만 그만큼 작가가 무게를 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각성과 함께 권력을 쟁취하기위한 주변 인물들의 온갖 권모술수가 스파이 소설 못지않은 긴장감을 주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포인트다. 작가가 세심하게 설계한 방대한 세계관과 함께 배신과 복수, 정보와 역정보, 속임수 속의 또다른 속임수 등 시종일관 흥미로운 요소가 펼쳐지며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초반부 배신자로 나오는 유에 박사는 영화에서는 반전을 위해 늦게 밝혀지지만, 책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미리 독자에게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히치콕 때문에 유명해진 아주 고전적인 수법인데 작가가 이 방법을 쓰고있다. 즉, 독자는 배신자가 누군지 아는데 주인공은 모르고 있다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서스펜스인 것이다. 투피르에 관한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그가 제시카를 오해하고있다는 사실을 독자는 알지만, 그는 모르는 상황이 안타까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독자에게 미리 정보를 알려주면서 긴장감과 함께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게만드는 서술법을 구사하고있다.


이 작품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노래나 시 등 중간중간 너무나 관념적인 대사들이 다소 난해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정말 쉽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무수히 떠도는 세계관 어쩌고하는 그딴 사전지식 따위 전혀 모르고 읽어도 하등의 상관이 없다. 난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 황제가 '조용히해라, 꼬마' 하는 부분이 왜 그렇게 웃기던지... 길고 길었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결말 부분도 너무나 훌륭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딱 한가지 불편했던 점은 중간중간에 자꾸 영화 장면이나 배우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집중에 방해가 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읽을 경우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영화는 이 책의 약 3분의2 지점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폴이 제시카와 함께 사막에서 각성을 하고 프레멘과 합류하는 장면까지인데, 책을 다 읽고나니 영화가 정말 잘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원작의 무게감과 관념적인 부분까지 고스란히 담아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감독이 얼마나 원작을 사랑하고 존중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작을 거의 그대로 영상으로 옮긴 영화에서 바뀐 점이라면 생태학자 카인즈의 남녀 성별이 바뀌었고 하코넨의 조카가 원작에선 한 명이 더 있는데 영화에선 라반 한 명으로 몰아서 처리한 점 등이 있겠는데 나중에 2편에서 덩치 큰 라반과의 결투를 염두에 둔 설정이라 보여진다. 실제로 원작에선 라반보다 페이드 로타라는 또다른 조카의 비중이 훨씬 크다.


아뭏든 영화 듄 2편의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니까 정말 기대가 된다. 과연 마지막에 황제가 '조용히해라, 꼬마' 하는 부분이 나올지도 궁금하고... 아... 진짜 그 부분 제대로만 나와주면 대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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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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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이벤트로 작가의 친필 사인본을 준다고 했고, 선착순 500부 한정이었나 해서 기대도 안했는데 받고보니 사인본이었다. 생각보다 엄청 빨리 주문했나보다. 별것 아닐수도 있겠지만 한사람의 팬으로서 기분이 좋은건 어쩔수 없다.


요 네스뵈가 오랜만에 내놓은 스탠드얼론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또 믿는 작가이지만, 사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최근작 몇편은 아직도 구매를 하지 않았다. 갑자기 번역가가 바뀌어서 나왔던 '박쥐'를 읽었을 때 영 느낌이 별로여서 그 후로는 노진선씨 번역이 아니면 아무래도 구입을 좀 망설이게 된 것이 그 이유다. 그래도 항상 기본 이상은 하는 작가니까 기회되면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하고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마침 내가 선호하는 독립된 작품에다가 번역가도 믿음직한 분이라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구매했던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김승욱씨는 예전에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익숙해진 이름인데, 최근 핫해진 '듄' 시리즈도 이 분 번역이다. 장르소설 뿐만 아니라 여러 유명 인문학, 순수문학 등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고 깊이와 무게감이 느껴지는 스타일이어서 이제까지 이 분 번역으로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만족스러웠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본작 킹덤은 영문제목도 'The Kingdom'이고 작년 2020년에 발표된 최신작이다. 요 네스뵈는 1960년생이니까 우리나이로는 환갑이 되는 시점에 발표한 작품이 되겠다.


일단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느낌부터 먼저 말하자면, 한마디로 그냥 끝내준다!



요 네스뵈의 필력이야 범죄스릴러 장르에서는 당연히 최상급에 해당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놀랍게도 그 이상의 한차원 더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번역가의 내공과 스타일에 따른 미묘한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이제까지 익숙하게 알고있던 요 네스뵈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의 작품들에서는 범죄스릴러 장르라는 큰 틀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거의 모든 대사와 행동들이 마지막 결말을 향해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역할로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각각의 장면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순수문학에 가까운 훨씬 풍성한 디테일과 감정선을 담아내고 있다.


복잡미묘한 캐릭터의 심리를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각도로 보여주기 때문에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와 몰입도가 증가해서 그냥 저절로 감정이입이 된다. 문장 하나하나가 현란하면서도 또 너무 튀지는 않게 잘 억제된 노련한 기교가 느껴지고, 대사들 또한 군데군데 적절하게 수위조절된 유머와 함께 너무나 고급스럽다. 딱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고 절묘한 타이밍에 끊어주는 장면전환 또한 일품이다.


사건해결과 범인찾기에 몰두하는 스토리가 아니다보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글에서 전에 없던 여유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때로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로맨스 소설을 읽고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인물들간의 미묘하고 섬세한 심리묘사를 다층적으로 겹겹이 쌓아간다. 아니 이 양반이 어디 가서 고급문학수업 과정을 별도로 마스터했나 싶을 정도로 분명히 한 단계 레벨업이 된 글솜씨이고 정말 글 자체가 예술이다. 60대의 나이로 접어든 기념으로 스스로 각성이라도 한 것인지... 특히 로위가 섀넌에게 속에 품었던 말을 고백하는 장면 같은 묘사는 정말 기가 막힌다.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는 배경이 주로 오슬로와 베르겐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전부 생소한 지명들만 나와서 또 구글지도를 찾아봤다. 하지만 부달호수니 후켄이니 하는 지역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고, 노토덴이라는 도시만 겨우 나오는데 아마도 그쪽 근처가 주무대인 것 같다.



북유럽의 낯선 지역만큼이나 결코 흔하게 접할 수 없는 개성있는 인물들의 기이하면서도 운명적인 드라마가 계속해서 여운을 남긴다.


살인이나 잔인한 폭력 시퀀스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정적인 장면들로 채워져있음에도, 시종일관 무섭고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폭풍전야같은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요 네스뵈의 작품에서 의미없이 쓰여지는 장면은 단 한군데도 없으며 결말을 위한 복선들이 지뢰밭 수준으로 깔려있음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이 작품 역시 단 한문장도 허투루 넘기지않도록 집중해서 읽으려 했는데, 사실 그렇게 애쓸 필요도 없이 그냥 읽다보면 저절로 초집중 모드가 된다. 주인공 로위가 애용하는 중요한 아이템으로 씹는 담배가 자주 나오는데 대화상대나 기분에 따라 이것을 아랫입술에 끼울 때가 있고 윗입술에 끼울 때가 있다. 이것도 분명 복선 중에 하나일 것이라 예상하고 끼우는 위치가 어떤 의미일까 하면서 읽는 중간에 분석해보기도 했다. 결국엔 별 의미없었고 혼자 오버해석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이런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도 집중해서 읽게만드는 힘이 있다.


처음에는 두꺼워서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지만, 읽다보면 점점 줄어드는 분량이 아까울 정도로 계속 더 읽고 싶어지는 책... 이 책은 그런 책이었다.


요 네스뵈의 모든 작품들 중에 단순히 범죄스릴러적인 재미면에서는 아직까지도 '레오파드'나 '레드브레스트'같은 작품을 좀 더 우선순위에 놓고싶지만, 문학적인 완성도를 따진다면 단연코 이 작품 '킹덤'이 1등이다.


김승욱씨의 묵직하면서도 수준높은 번역이 큰 부분을 차지했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이제는 대적할 상대가 없는 어나더레벨의 작가로 거듭난 것 같다.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작품을 읽게되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고, 다음 작품도 하루빨리 번역되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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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코를 위해 (스페셜 리커버 에디션)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모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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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읽었던 '소문'처럼 여고생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이 책들이 요즘 고등학생들에게 화제가 되고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동일한 출판사에서 최근에 재출간된 책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이 책은 소문보다 훨씬 더 오래된 무려 30년전인 1993년에 나왔던 옛날 작품이다. 국내에는 거의 20년이 지난 시점인 2012년에 처음 번역되었다가 절판되었는데, 최근 2017년에 작가가 출간된지 약 25년이 지난 이 책을 몇군데 수정한 후 일본에서 '신장판'이란 이름으로 개정판을 낸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작년인 2020년 이 신장판을 기준으로 재출간을 했고, 올해에는 스페셜 리커버 에디션이란 명목으로 표지를 또 새롭게 바꾸었다. 역시나 반전을 비롯하여 각종 광고문구가 요란하다.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는 1964년생으로 현재 50대 중반이다. 출판년도에 비해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않은 것으로 봐서 상당히 이른 나이에 작가로 데뷔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작가후기를 보니 역시나 20대 중반인 대학생때 이 작품을 썼다고 나온다. 본명은 야마다 준야(山田純也)이고 이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이름은 필명인데, 무슨무슨 '~타로' 로 끝나는 에도시대에나 유행했을 법한 고풍스런 이름에서도 옛날 정서를 좋아하는 듯한 작가의 취향이 살짝 엿보이는 부분이 있다. 


극중에서 1989년에 죽은 요리코는 17살의 고등학생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나와 비슷한 동년배에 해당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고등학생때를 떠올리며 되도록이면 그 시절의 느낌으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오래된 작품은 당시의 교통수단이나 통신수단,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수준 등, 아무래도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만 봐도 요즘 정서로는 말도 안되는 행위이고, 미필적 고의니 무책임한 결말이니 하면서 온갖 비판이 쏟아질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고전추리소설의 정서로 읽는다면 또 그럭저럭 용납되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실제 작가의 필명과 동일한 이름의 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1930년대를 풍미했던 엘러리 퀸이 이런 스타일로 유명했었다. 아마도 작가가 개인적으로 엘러리 퀸을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다. 작품 전반부에 사건의 개요를 알려주는 노리코 아빠의 수기가 나오고, 그 다음부터는 주인공 탐정이 등장하여 이 수기를 단서로 해서 사건의 비밀을 하나씩 역추적해나가는 구성이다. 즉, 초반에 작가가 독자들에게 퍼즐조각을 뿌리듯이 거의 모든 힌트를 알려주고, 이후에는 독자가 탐정과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전형적인 고전추리기법이다. 철저하게 주인공 탐정의 시점으로만 진행이 되기 때문에 탐정과 독자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며 마지막까지 페어플레이를 하게되는 것이다.


확실히 고전적인 스타일을 추구한 작품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내용이 어떤 정형화된 틀 안에서 인위적으로 짜여져있는 느낌이다. 범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범행수법은 무엇이었나에 모든 촛점이 집중된 방식이고, 탐정이 만나고다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용의자에 해당되기 때문에 독자들이 수수께끼를 풀기위한 단서를 주는 용도 이상으로는 등장하지도 않고,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행동들이 단순히 기능적으로만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예전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에서는 실컷 뜸을 들일대로 들이다가 마지막에 포와로 탐정이 굳이 모든 용의자들을 전부 불러모아서 앉혀놓고, 또 굳이 사건의 전모를 장황하게 설명한 후, 그제서야 범인을 지목하곤 했었다. 그에 비하면 이 작품은 생각보다 탐정이 진범을 밝혀내는 타이밍이 좀 빠르다(사실 장편이라기엔 중편에 가까울 정도로 분량이 짧은 점도 한몫하고있다). 예전에 나왔던 고전들보다는 확실히 군더더기없고 스피디한 진행이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퍼즐풀기에만 급급해서 여유가 없는 아쉬움이 있다. 좋은 아이디어를 노련하게 포장하는 관록이나 노련미는 확실히 부족하다.



예를들어 이런 '담배연기로 직조된 장막'이나 '찰나의 노스텔지어' 또는 '속마음을 상형문자화하는 듯한 동작'같은 문장들은 작가가 글이 밋밋하게 보이지않도록 문학적 표현을 넣으려고 애쓴 부분들이다. 그런데 군데군데 나오는 이런 표현들이 오히려 좀 과한 느낌이다. 억지로 쥐어짜낸 듯한... 마치 앳된 여고생이 성인처럼 보이려고 너무 진한 화장을 한 느낌이랄까...


이 작품은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분명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조금씩 보이지만, 불과 약관의 나이에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대부분 눈감아주고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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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쇼-트 2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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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월에 첫 출간되어 1년반이 지난 지금까지 국내 장르소설 분야에서 꾸준하게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며 인기몰이를 계속하고있는 작품이다. 언제부턴가 인터넷 서점을 방문할 때마다 이 책이 줄곧 눈에 띄길래 결국 궁금증을 못이기고 최근 구매목록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배송박스를 뜯고 실물을 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단편소설집이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해서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작고, 얇고, 허접한 제본 상태일 줄이야... 크기가 일반 핸드폰 사이즈보다 살짝 큰 정도이다. 세로로 길쭉한 기이한 판형에, 활자와 여백의 비율도 미적감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정말 소장하고싶은 생각이 1도 들지않는 이 책의 정가는 1만원... 아마도 그냥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가볍게 읽다가, 다 읽고나면 미련없이 버려버리는 문고본이나 포켓판의 컨셉으로 제작한 듯 하다. 그렇다면 그 컨셉에 걸맞게 책값도 5~6천원 정도였어야 딱 적당한 수준이 아닌가... 요즘 책값 정말 터무니없이 비싼 것 같다.



이 책은 약 160페이지 정도에 한 작품당 약 40페이지 내외의 분량으로 총 4편의 단편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예은 작가는 생소한 이름이라 찾아보니 1993년생으로 이제 20대 후반이다. 미대 출신으로 금속공예를 전공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작가로 전향한 케이스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첫번째 단편인 '초대'에서 금속공예에 관한 장면이 잠깐 나오기도 한다.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경험부족이라 아직 미숙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무색하게도 이 책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필력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문장에서 젊은 작가다운 사유와 재기발랄함이 깊게 묻어나온다. 작가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런 단편이라는 형식 안에서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감각적인 표현들이 어우러져 매력있게 발산되어있는 느낌이다.


​특히 두번째 단편인 '습지의 사랑'은 창의적이면서도 기발한 상상력과 함께 그것을 사회문제와 엮어서 은유적으로 처리하는 노련함까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이 책이 인기있고 잘 팔리는 이유를 확실히 납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라면 역시 마지막을 장식하는 네번째 단편인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이다. 타임슬립이나 타임루프는 그동안 너무나 많이 다뤘던 식상한 소재이지만, 단편이라는 짧은 형식에 맞추어 간결하고 스피디하게 엮어가는 솜씨가 놀라웠다. 정말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책값은 충분히 뽑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기승전결의 구조에서 자유로운 단편의 특성이 작가와 잘 맞는다고나 할까... 물론 떡밥만 이리저리 던져놓고 별다른 통찰없이 흐지부지 마무리지었다 해도, 단편이라는 형식이 거대한 그늘막이 되어서 작가의 약점을 덮어주는 느낌도 있다. 호흡이 긴 장편소설이라면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는 장점이 더 많이 보이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점점 침체되어가는 서점가에서 이런 젊은 작가들이 새롭게 활약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그래서 흐뭇한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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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21-12-03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궁금했는데 실버북 님 리뷰 보고 읽기로 했어요! 리뷰 고맙습니다 :)

실버북 2021-12-03 09: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을 통해 의미있는 시간 되시길 바랄게요~
 
소문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권일영 옮김 / 모모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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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딸이 고등학생인데 최근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소설이라고 한다. 불과 한달 전에 출간된 책이라 당연히 최신작이겠거니 생각했으나, 알고보니 일본에서는 무려 20년 전인 2001년에 발표되었던 작품이고, 국내에는 2009년에 한번 번역되었다가 절판되었던 것을 올해 재출간한 것이었다. 추리소설 쪽은 늘 관심을 두는 분야라서 베스트셀러는 웬만하면 다 아는데, 이 제목은 처음 들어봤을 정도이니 당시에는 그다지 화제작이 아니었을거라 짐작한다. 이 작품이 현재 일본에서도 다시 역주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주목받는 상황이 좀 의아하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읽다보면 그냥 요즘 나온 책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작품의 소재와 배경이 올드하다거나 구닥다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유명한 아이폰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해가 2007년이다. 이 책이 쓰여진 2001년은 아직 2G 폴더폰에 인터넷은 윈도우 98을 쓰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고생들은 요즘 사람들의 SNS활동과 전혀 다를바없이 단순 통화기능 이상의 용도로 휴대폰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마치 스마트폰의 시대가 올 것을 미리 예측하고 아예 미래를 배경으로 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시대를 앞서간 소재와 통통 튀는 대사들이 인상적이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일본의 추리작가들은 거의 상향평준화되어 있기때문에, 국내에 번역소개될 정도의 작품이라면 아무리 생소한 이름의 작가라 하더라도 어지간하면 평타 이상 치는 정도의 완성도는 보장한다고 봐도 된다. 이 작가 역시 처음 접하지만 대단히 안정적이고 높은 수준의 필력을 보여준다. 특히 일본작가 특유의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는 개인적으로 질려하는 부분인데, 이 작가의 경우에는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조율되어 있는 점이 좋았다. 물론 중반부 경찰의 수사과정이나 부서간 신경전 등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는 늘어지는 부분을 좀 걷어내고 스피디한 진행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인물들간의 대사들이 각 캐릭터의 성격을 나타내는 역할과 함께 잘 짜여져있고, 군데군데 튀지않는 유머도 적당히 배치되어 빈틈없고 노련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의 가장 강력한 세일즈포인트는 역시나 '반전'이다. 마지막 한 문장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거나 일본 역사상 최고의 반전이라는 소개란의 떠들석한 광고는 책을 읽기도 전에 흥분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게 궁금하던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확실히 어떨떨해지기는 한다. 그냥 평범했던 추리소설이 마지막 반전 하나로 좀 더 특별하게 변한 것은 분명한데, 그 반전으로 인해 정말 광고처럼 모든 것이 뒤바뀌는 정도는 결코 아니다. 작가가 보너스 개념으로 슬쩍 끼워넣은 장치라고나 할까... 마치 영화가 끝난 뒤 나오는 쿠키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지 그 쿠키영상이 본편보다 더 강렬해서 쿠키만 기억나는 케이스라 할 수도 있겠다. 어떻게보면 없어도 그만인 반전이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소문'이란 매개체를 통해 젊은 세대들을 이용했던 기성 세대가 확대 재생산된 소문으로 인해 도리어 몰락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되고있어서 나름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책에 묘사되어있는 20년 전 일본 여고생들의 모습은 요즘 우리나라 여고생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급변하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부모와 자식세대가 소통이 잘 안되는 웃픈 상황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먹는 악순환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착찹한 상황 등, 이 책은 일본 추리물답게 그 시대의 사회상을 통해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겉으로는 마냥 삐딱할 것만 같은 학생들이 실상은 크고작은 마음의 상처와 어른들이 미처 파악하기 힘든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않고 보여준다. 덕분에 미운오리새끼같은 딸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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