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성 스토리콜렉터 51
혼다 테쓰야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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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소설로는 독보적인 작품이 하나 있다. 아마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바로 그 작품 '살육에 이르는 병'... 예전에 멋모르고 읽다가 내장이 뒤틀리고 토가 쏠리는 경험을 했던... 이 작품도 그에 못지않은 잔인한 신체 손괴 묘사와 함께 배설물과 관련한 역겨움까지 더해져서 비위가 약하다면 끝까지 읽기가 괴로운 그런 류의 소설이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우리나라에서 소설로는 보기 드문 '19세미만 구독불가'라는 딱지가 붙어있기 때문에 성인인증을 하지않으면 절대 구매할 수가 없는 책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제한 규제같은 건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잔인한 장면이 전부 피의자의 진술에 의한 간접적인 묘사로 처리되어 있어서 충격의 강도를 많이 완화시키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 같다. 즉, 독자는 경찰이 기록한 진술서를 통해 당시 사건현장을 상상하게 되는 방식인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그대로 그 '짐승의 성'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엽기적 행각들은 상상하는 것 자체가 더 고역인 수준이다.



​이 작품은 후반부에 과연 실질적인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반전을 가미한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일본 특유의 사회파 추리물에 가까운 내용에 종국에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짓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작가는 미스테리보다는 우리가 믿기힘든 '인간성'의 또다른 면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자는 점에 촛점을 맞춘 것 같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악마같은 인간에게 오랜 기간 구속당하면서 서서히 본인도 그 악마성에 동화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이 소설의 내용만 놓고 본다면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등장인물의 심리와 행동에 근거가 빈약해서 설득력도 없고... 아무리 상상력이라고 해도 작가가 너무 막 나가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은 이 작품이 90년대말 일본 기타큐슈에서 일어난 일가족 감금 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있다는 점이다. 실제사건이 너무나 엽기적이고 잔혹하여 당시 일본 정부가 언론을 통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책을 다 읽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알게된 사실이다. 어이없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임을 알고나면 다소 미흡했던 내용의 개연성이 오히려 완벽한 설득력을 갖게된다.


작가의 필력은 일본의 스타급 추리작가 범주에서는 비교적 평범한 수준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추리물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대부분의 일본작가들이 질릴 정도로 과도하게 디테일한 서술을 구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이 작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위와 같은 서술도 사실 전화를 건 행동이나 나머지 부분 전부다 굳이 독자가 알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군더더기 묘사들이다.



이 부분 역시 빼버려도 전혀 문제없는 문장이다. 예의바른 성격임을 알려주려는 목적인지는 몰라도 이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게 아니라서 그냥 극의 흐름을 늘어지게 할 뿐이다. 일본작가들의 이런 집착에 가까운 디테일은 물론 장단점이 있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사건의 잔혹함과 긴박함에 비해 중간중간 도시락 먹는 장면을 포함해서 경찰들의 수사과정이 좀 태평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위처럼 마치 작가 자신의 독백처럼 느껴지는 구절들이 있다.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이면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만 묘사하면 되는데, 이렇게 등장인물의 생각인지 작가자신의 개인적 소감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문장으로 작가가 작품을 통해 하고싶은 말을 그냥 직접적으로 해버린다. 역시나 지나치게 디테일하고 지나치게 친절하다.


​비록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소설적 재미를 위해 작가가 상상력을 가미해 각색한 부분도 많고 교묘한 수위조절 및 교차편집을 통해 후반부의 서스펜스를 증폭시키는 테크닉은 꽤 인상적이다. 공포물은 상당히 좋아하는 편인데 다 읽고나서도 왠지 후련하지가 않고 찝찝한 뒷맛이 남는다는 점에서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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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키 파크
마틴 크루즈 스미스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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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작가와의 두번째 만남이다. 처음 만났던 작품은 '북극성'이라는 제목인데 약 30년전에 사서 읽었던 책이었고, 아마도 책표지에 해양 스릴러물이라 소개되어 있어서 구매욕구를 자극했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차갑고 묵직한 분위기와 마지막에 범인이 바다 속으로 깊이 가라앉는 장면이 지금도 인상깊게 남아있을 만큼 만족스럽게 읽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나중에야 알게됐지만 북극성은 아르카디 렌코가 등장하는 두번째 작품이었다. 어쩌다보니 순서가 바뀌어 시리즈 첫번째 작품을 30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 읽게 된 셈이다.



​이 작품은 마틴 크루즈 스미스를 단숨에 스타작가로 올려놓은 대표작이기도 하고 북극성을 통해 또 그만큼 실력이 좋은 작가임을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기대가 제법 컷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 책은 초반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영미권 범죄 스릴러 장르의 소설을 읽다보면 종종 이런 경험을 하게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책처럼 등장인물들에 대한 행동이나 심리묘사가 명확하게 와닿지가 않고,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이 들어서 독서에 집중이 되지않는 그런 현상이다. 특히 대화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들이 나오는데 각각의 대사가 도대체 누가 하는 말인지 분간이 안되는 상황들이 수시로 나와서 혼란스럽게 만들고, 또 높임말과 반말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어투들도 상황에 맞지않는 어색한 부분이 많아 캐릭터에 도무지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어서 흥미롭고 즐거워야 할 책읽기가 짜증스럽게 변해버린다. 이 모든게 바로 '번역' 때문이다.



​마틴 크루즈 스미스는 소위 말하는 '급'이 높은 작가다. 미국작가임에도 당시 자유로운 왕래가 거의 불가능했던 구 소련의 사법 시스템과 KGB를 포함한 여러 기관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베일에 가려진 공산국가를 주무대로 독창적인 스토리를 펼치면서 묵직한 스릴감과 함께 냉전시대를 관통하는 여러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들을 심도있게 녹여넣는 스타일을 구사한다. 중심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를 디테일하게 풀어가기 때문에 각 문장 속에 숨어있는 정보량이 많고 대화의 내용도 어려운 부분이 많아, 그만큼 제대로 번역하지 않으면 이해를 못해서 잔재미를 느낄 수가 없는 그런 유형의 작가이다.


이 작품은 박영인씨라는 분이 번역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얼마전에 읽었던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이라는 책도 이 분이 번역을 했고, 그 책도 번역에 문제가 좀 많다고 이미 리뷰를 한 바 있다. 이 작품 역시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어투 설정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캐릭터성이 죽어버리는 기본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번역가 스스로가 내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의 기계적인 직역 위주로 대충 떼워버린 듯한 부분이 너무 많이 보인다. 번역가도 이해를 못한 내용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를 하겠는가...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서도 지금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또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어떤 상황인지 명확하게 와닿지가 않아서 결국에는 난해하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는거다. 그와중에 또 여전히 눈가리고 아웅하는 듯한 불필요한 주석들은 역시나 트레이드마크처럼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나하나 지적하자면 셀 수도 없을 정도인데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비교적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부분의 번역만 봐도 이 책의 가독성이 얼마나 나쁜지 바로 알 수 있다. 당연히 탄약통은 탄창, 탄약통 껍데기는 그냥 탄피라고 해야 한다. 총기류에 있어서 탄약통 껍데기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번역가가 번역을 잘하기 위해서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첫째 조건은 외국어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어' 실력이라 생각한다. 뛰어난 번역가는 거의 소설가 수준의 문학적인 감성이 느껴질 정도로 한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이 책의 번역가는 문장의 구성이나 단어의 선택 등 여러 부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때, 좀 심하게 말하면 원작의 재미와 완성도를 거의 절반도 못 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를 비롯하여 사상과 인종에 관한 문제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어서, 모처럼 수준높은 범죄 스릴러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아쉽게도 번역때문에 다 망친 것 같아 살짝 화가 난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지뢰를 밟았다. 지금까지 영미권 장르소설 번역가 중에 믿고 거르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이제 한 명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제발 좋은 작품은 실력있는 번역가에게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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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7-06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탄약통 껍데기와 탄피!

절반도 못 살려낸 원작의 완성도!

이렇게 이야기해주시니 꼭 원작으로 시도해봐야겠구나 싶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실버북 2021-07-06 09:21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루 버니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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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딱 한 편을 읽고 작가의 스타일을 논하기에는 좀 성급할 수도 있다. 간혹 작품 소재나 주제에 따라 글쓰기에 변화를 주는 작가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작가는 워낙 개성이 강해서 다른 작품들도 거의 비슷한 패턴일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느꼈던 인상은 좀 '올드하다'라는 점이다. 주인공의 직업이 사립탐정이라는 것 자체에서 벌써 옛날 느낌이 물씬 풍기고 스토리의 진행도 느릿느릿하다. 아무래도 작가가 50년대 '레이먼드 챈들러'나 80년대 '제임스 엘로이'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이 작가는 배경이나 상황 등의 묘사에 있어서 별다른 수식어를 쓰지 않고 담백하게 처리하는 편이지만, 범죄 미스테리 장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중심이 되는 사건과 별 상관없는 시시콜콜한 일상의 장면들에 할애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상당히 지루하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한편의 영화보다 20부작 드라마 쪽에 훨씬 어울리는 긴 호흡의 진행이기 때문에 확실히 이 작가의 진가는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대사처리하는 방식이 상당히 수준이 높고 유머감각도 고급스럽다. 특히 각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유머는 작가의 고향이자 이 작품의 주 배경인 오클라호마 현지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꽤 눈에 띌 정도로 지역색이 느껴져서, 아마 오클라호마 토박이가 이 책을 읽는다면 많이 웃으면서 즐길 것 같다. 작가가 각 캐릭터의 특징이나 심리묘사까지 거의 모든 부분을 대화를 통해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각각의 대사를 음미하고 즐기지 못한다면 나머지는 거의 건질게 없다.


이 책은 번역이 많이 아쉽다. 이렇게 대화 자체의 잔재미가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경우 각각의 어투와 뉘앙스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은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종류의 작품이 번역하기 가장 까다롭다는 건 알지만, 사립탐정인 남자주인공이 쓰는 말투만 보더라도 그다지 일관성도 없고 어떤 경우는 어울리지도 않아서 번역으로 인해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 살짝 줄어든 모습이다. 그리고 쓸데없이 많은 주석이 달려있다. 신경써서 꼼꼼하게 번역한 부분도 보이지만, 막상 대부분의 주석들은 굳이 따로 빼내어 부연설명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마치 번역가가 능력의 부족을 주석의 물량공세로 떼우면서 그래도 열심히 했으니 알아봐달라고 생색내는 느낌이랄까... 예전에 어떤 돌팔이 번역가가 본문 번역은 개판으로 해놓고, 별 쓰잘떼기없는 주석만 잔뜩 달아서 눈가리고 아웅하던 모습이 겹쳐보여 씁쓸해진다.

실력있는 번역가라면 이런식으로 너저분하게 주석을 달지 않는다. 차라리 오클라호마 특유의 지역정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부분만 깔끔하게 추려서 주석으로 활용하겠지... 이 책은 바로 그런 부분의 설명이 필요하니까...

어쨌든 이 작품은 많은 상을 받고 그에 걸맞는 수많은 찬사들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내스타일은 아닌걸로... 임팩트있는 사건도 없이 너무 밋밋하게만 흘러가니 읽는내내 답답하기만 했다. 미국 사람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번역된 책을 읽고 호평을 한 독자들은 과연 어떤 점이 좋았는지 궁금할 정도다. 아무리 취향은 다양하다지만... 다음에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굳이 찾아 읽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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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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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진이, 지니' 이후 약 2년만에 나온 신작... 그 누구보다 빨리 읽고싶어서 책이 나오기도 전에 예약구매로 주문을 했고, 받자마자 단숨에 다 읽었다.

 

이제는 정유정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어떤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공포에 가까운 특유의 서늘한 느낌과 긴장감...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정서 또한 잘 살아있는... '7년의 밤'이 워낙 임팩트가 강하고 쎄다보니, 작가의 스타일도 자의반 타의반 서서히 그런 쪽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 이후 다양한 소재로 확장 변주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훨씬 무르익고 노련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7년의 밤'과 같은 원초적 강렬함을 기대해왔던건 사실이다. 드디어 이번 신작으로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아직까지도 '7년의 밤'을 최고로 꼽고,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 다시한번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갈망이 어느 정도는 해소된 것 같다.

 

정유정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라 생각한다. 작품들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판타지가 가미되어 있고, '28'이나 '진이, 지니'같은 경우는 특히나 그러한 판타지적 요소가 굉장히 많이 들어간 작품들이다. '7년의 밤'에서도 수몰된 마을 같은 공간 설정은 마치 아틀란티스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고, 캐릭터나 트라우마 설정 역시 실제로 저토록 기구한 사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과한 느낌이다. 하지만 주인공 부부가 감정싸움할 때의 대화장면을 보면 놀랍도록 사실적이어서 실제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보여준다. 이렇듯 작가의 탄탄한 필력을 바탕으로 한 인물들간의 대화나 상황묘사들은 오히려 극사실주의에 가깝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음에도 별 위화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몰입하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작품 역시 동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공간인 오리들이 사는 늪지대와 그와 관련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설정 등이 나오면서 다소 판타지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부분이 작품 전반에 흐르고있는 잔인하고 무서운 기운을 어느 정도 억제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부러 잔혹동화같은 느낌을 줘서 참혹함의 강도를 약간 낮추려고 한 것은 아닐까 싶은...



이 작품은 만약 소설이 아니라 영화로 먼저 나왔다면 틀림없이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함'이라는 문구과 함께 시작되었을 거다. 바로 2년전 한동안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고유정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첫머리에는 그런 문구가 없다. 작가 스스로 창작의 비중이 훨씬 크다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 책은 몇몇 인물들의 성별을 바꾸고 어린 시절 등의 전사를 추가하여 살을 붙였을 뿐, 고유정 사건을 그대로 재구성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인물관계와 범행수법이 놀랍도록 흡사하다. 게다가 초반 오른손에 붕대를 한 장면은 아예 대놓고 그녀를 암시하고있고, 특히 체포 당시에 화제가 되었던 얼굴 가리는 모습은 회상 장면의 러시아에서 첫만남 때 머리카락 사이로 잘 보이지않는 얼굴 시퀀스로 교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도 작가만의 조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 작가후기를 보면 약간 애매한 뉘앙스로 역시나 고유정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음을 일단은 시인하고 있다. 오히려 캐릭터와 스토리 등 거의 모든 부분이 작가만의 100% 창작물임을 더욱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굳이 그 사건을 오버랩시키지 말아줬으면 하는 작가의 바램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도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고유정 사건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내 기억력이 나빠서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가 창조한 여러 설정들이 독자적인 서사를 형성하고있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바이칼 호수 등 이국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잦은 플래시백과 교차편집 등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을 정도로 스피디한 진행을 하고있기 때문에 오롯이 작품 속으로 몰입하여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물들의 대화장면 역시 정유정 특유의 사실감은 여전하고, 적재적소의 적확한 단어 선택과 함께 중요한 부분은 직접적 대사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간접적으로 몰아서 처리하는 노련함이 이젠 정말 읽으면서도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오히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자꾸만 생각났다.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백야행을 가장 좋아하고 또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데, 이 책의 주인공 신유나의 이미지가 백야행의 유키호를 떠올리게 한다. 신유나는 자신의 생각을 손수 행동으로 옮기고 유키호는 그것을 대신 해줄 사람이 있다는 차이만 있을뿐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컨트롤한다는 측면과 눈처럼 차갑고 비정한 이미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등 비록 악인이지만 가슴 한켠에서는 이상한 연민이 살짝 느껴지게 만드는 독특한 캐릭터성이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조만간 백야행도 오랜만에 다시한번 읽고싶어진다.

 

대부분의 범죄관련 장르소설에서는 트라우마라는 장치가 들어간다. 범죄의 이유와 범인의 심리상태를 구체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또한 이 부분에서 작가의 역량이 가장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양날의 검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설프게 대충 상상으로 가져다 썼다간 큰일난다. 작가는 병리학이나 법의학적인 검증 등 철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확실한 믿음을 주든지, 아니면 이런 부분이 다소 미흡하다면 압도적인 필력으로 일말의 의혹도 여지를 주지않을만큼 뻔뻔하게 밀어붙여야만 한다. 정유정 작가는 아무래도 후자쪽이 아닐까...

 

이 작품의 경우에도 오리의 울음소리와 관련한 환각과 꿈, 다락방에서의 감금 등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설정이 등장한다. 이런 것들이 현재의 인격형성과 과연 어느 정도의 관련성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특히 작가가 고심해서 선택했음이 분명한 '오리'라는 소재는 뭔가 신비롭고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좀 생뚱맞기도 하다. 마치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겪었던 양들의 울음소리에 관한 트라우마 설정과 비슷하다. 후반부에 한니발 렉터가 이제는 양들이 울음을 그쳤느냐고 치유를 해주면서 마무리되었던... 인과관계나 맥락이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작가가 구축한 치밀한 서사와 압도적인 필력에 밀려서 왠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던... 정유정의 오리 역시 왜 하필 오리인가 하는 의문점은 생기지만 굳이 어떠한 상징이 숨어있는지 해석하려들거나 따지지 않아도 별 위화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이러한 트라우마 설정과 연관해서 '완전한 행복'이라는 제목을 지을 정도로 과연 주인공이 행복은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는 뺄셈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이유가 제대로 설명이 되는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작가가 '행복'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실화바탕의 소설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스포일러를 깔고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이미 그 사건에 대해 잘 알고있다고 해도 즐기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무시무시한 스릴과 공포감을 선사한다. 점점 더 원숙미가 더해지는 작가의 필력은 경이롭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물론 실화 바탕이 아닌 순수 창착물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마 작가의 다음 작품도 분명 예약구매를 또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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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1-06-16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히 훌륭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작품을 곱씹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허영이 가득하거나, 발췌로 내용을 채우거나, 통찰이 거의 결핍이다 싶은 요즘 책 리뷰들만 보다가, 핵심을 간결히 찌르는 밀도있는 리뷰에 감사합니다. 어지간해서 어디에 글 안남기는데 꼭 감상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실버북 2021-06-16 09:19   좋아요 0 | URL
아, 너무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리뷰가 된 것 같아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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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은 작년에 발표되었고 올해 국내에 바로 번역된 신작인데, 이번에도 제법 긴 제목이다. 국내에 출간된 이전 작품들을 고려해볼때, 출판사 측에서 이 작가만의 차별화된 홍보전략의 일종으로 계속해서 일관성이 느껴지도록 의도적으로 긴 제목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실제로 이 피터 스완슨이라는 작가가 미국 현지에서 어느 정도의 지명도와 판매량을 자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적어도 국내에서는 출판사를 잘 만난 덕분인지 장르소설 분야에서 나름 성공적으로 인지도를 쌓아가는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노진선씨가 번역을 맡고있는데 이것도 어떻게보면 이 작가의 행운이자 복이리라...

이 작품 역시 그가 항상 동일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이제는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등장인물들의 시점 전환 방식 서술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지루함을 보완하고 가독성을 높여주는 한편, 독자의 시야와 정보를 제한시켜서 서스펜스를 만드는 동시에, 작가가 가진 내공의 부족함도 슬쩍 감출 수 있는 아주 영리한 방법이다.

솔직히 필력이 뛰어난 작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문장에서 프로 작가다운 문학적인 감성이 별로 안느껴지고, 문장의 테크닉, 즉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문장력이 별로다. 필력이 좋은 프로 작가의 글에는 아마추어들이 결코 흉내내기 힘든 오랜 기간 글을 쓰면서 체화된 수준높은 문장의 기교가 있기 마련인데, 이 작가의 글은 비교적 단순하고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난다. 그리고 스토리를 펼쳐나가는데 있어 강약과 완급조절이 제대로 잡혀있지않아 중간중간 늘어지는 부분과 과감하게 생략해도 될 군더더기 표현들도 제법 눈에 띈다. 이런 것들은 프로 글쟁이로서의 노련미가 부족하다는 증거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전문성'인데, 예를들어 정신질환이 있는 캐릭터를 설정했으면 그 병에 관한 철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한 상황묘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미흡해서 디테일에 아쉬움을 보인다. 유년기의 트라우마도 마찬가지다. 상상력으로 대충 그럴싸한 트라우마 설정을 갖다붙인다해서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심리상태가 설득력있게 와닿는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범죄소설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경찰이나 변호사 등, 관련 사법기관들의 시스템이나 절차 등에 대해서도 그다지 지식이 풍부하다는 느낌이 없고, 다른 소설이나 드라마, 또는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들을 막연하게 대충 흉내내서 구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형사나 경찰들의 행동을 보면, 실제 미국의 경찰들이 정말로 저런 대응을 할까 싶을 정도로 대화도 어설프고 생색내는 정도의 용도로 몇번 등장했다가 별다른 역할도 없이 사라진다.


이 작가가 소설가를 꿈꾸면서 정말 많은 책들을 읽었고, 또 영화도 많이 봤겠구나 하는 점은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특정 책이나 영화를 언급하는 부분이 꽤 나오니까... 따라서 이 작가의 글쓰는 방식은 자신이 읽거나 보았던 수많은 고전 추리소설과 영화들을 밑천삼아 모티브를 얻어서 새로운 이야기로 재창조하는 스타일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탄생시킨 새로운 스토리가 매우 기발하고 예측불가한 진행으로 시종일관 흥미로움을 자아내면서 분명 읽는 재미를 준다는 것이고, 이것이 몇가지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작품을 다시 찾게되는 중요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뉴트로 스릴러라 해야할까... 마치 히치콕의 고전 스타일에 현대적인 최신 감각이 더해진 느낌이다. 그러한 매력이 극한으로 발휘된 작품이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후에 단점들을 보완하여 계속 발전하기를 기대했지만 후속작들은 오히려 임펙트가 떨어지며 단점들이 더 많이 노출되는 느낌이다. 이번 작품은 특히나 설정상의 구멍이 너무 많다.

미처 검수가 안된 맞춤법의 오류가 두세군데 보이기는 하지만, 노진선씨의 번역은 여전히 깔끔하고 좋다. 앞서 말했듯 문장들에 문학적 기교가 별로 없어서 다른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쉽고 편하게 번역했을것 같긴 하지만...

경험과 지식의 부족을 상상력만으로 메우는 것은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칠수 밖에 없다. 다음에 이 작가의 작품을 또 읽을 지는 모르겠지만, 작가로서 좀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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