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
S. K. 바넷 지음, 김효정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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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출판사가 '인플루엔셜'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신생업체인데, 최근에 상당히 참신하면서도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예고편같은 경우에도 최근에는 기존의 하이라이트 영상편집 방식에서 벗어나 무삭제 예고편이라 해서 일부 구간을 편집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쓰기도 하는데, 이 출판사도 그러한 무삭제 예고편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초반 약 1/3 정도에 해당하는 분량만 떼내어 티저북이라는 이름으로 별도 제작해서 신청자들에게 무료배포하는 형식으로 작품 홍보를 하는 식이다. 일단 초중반부까지만 읽어보고 뒷부분이 궁금하다면 본책을 사보라는 그런 전략...



실제로 네이버에서 이 책의 리뷰를 검색하면 티저북에 대한 글들이 많다. 어차피 요즘 포털사이트의 리뷰들이야 거의 대부분 홍보 아니면 광고인데, 이 책의 경우는 정식 출판이 되기도 전에 티저북으로 아예 미리 홍보를 한 셈이다. 출판사의 이런 새로운 홍보전략이 과연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꽤 성공적인 마케팅이라 봐야겠다.


작가 'S.K.바넷'은 1954년생으로 현재 60대 중반이고 소개란에도 나와있듯이 필명인데, 찾아보니 본명이 '제임스 시겔'이다. 제임스 시겔은 예전에 '탈선'이란 작품을 썼던 작가다. 원제가 '디레일드(Derailed)'인데... 2003년도에 발표되었던 소설이고 우리나라에는 2006년에 번역소개되었다. 2005년에는 클라이브 오웬과 제니퍼 애니스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이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영화의 각본에도 직접 참여했었다.



당시에 영화와 책을 모두 다 봤기때문에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기억나는데, 일단 이 작가는 스토리를 정말 재미있게 끌고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작품도 다른건 몰라도 재미면에서는 충분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런데 굳이 왜 필명을 썼을까 하는 의문은 들었다. 이미 알려진 작가가 갑자기 필명을 쓰는 경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주로 기존의 스타일을 벗어난 시도를 하고싶을 때 많이들 쓴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J.K.롤링'도 범죄 스릴러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임스 시겔은 2000년대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몇권의 책을 발표했지만, 앞서 언급한 디레일드 한 작품 이외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주지사나 대통령 선거운동 등 주로 정치 관련 일에 몸담아오다가 실로 오랜만에 다시 소설가로 컴백한 작품이 바로 이 '세이프'인데, 작가로서 이미 잊혀져간 이름은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책을 읽어보니 예전 '탈선'때와 비교하면 글쓰는 스타일이 좀 달라졌다. 비교적 단순하고 쉬운 글쓰기로 스토리와 반전에 승부를 거는 스타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작품은 문장들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어지러울 정도로 기교가 많이 들어가 있다. 이런 것도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등장인물의 현재 생각과 과거 기억들이 별다른 구분없이 뒤섞이며 서술되는 형식이라 평범한 장면도 뭔가 감각적인 느낌을 주는 듯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예를들어 여기 '사진을 갖고 있어요'라는 말은 이 장면에서 긴장감을 폭발시키는 중요한 대사인데, 이런 식으로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계속 환청처럼 맴도는 듯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식의 대사와 생각이 뒤섞이는 현란하고 감각적인 서술법을 적극 활용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커버하는 것은 확실히 영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술방식의 기교에만 너무 신경을 쓴 탓인지 스릴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빌런'에 대한 캐릭터 구축이 부실해서 절대악을 대면한다는 당위성과 공포감도 부족하고 감정이입이 힘들다보니 후반부의 긴장감은 아무래도 좀 반감되는 느낌이다.


사실 문장의 문학적인 감성이나 기술(記述)적인 테크닉, 그리고 서사를 쌓아가는 방법적인 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본다면, 작가의 필력이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확실히 자신의 작품으로 영화 각본까지 참여해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 작품도 마치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컴퓨터 해킹으로 중요한 단서를 손쉽게 풀어간다든지 중간중간 뿌려놓은 떡밥들을 막판에 회수하는 방식 등 후반부는 거의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의 공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도 이미 영화사에서 판권을 샀다고 하니까...


'유괴'라는 어쩌면 너무나 식상한 소재임에도 새롭고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는 역시나 나쁘지 않다. 나중에 영화로 나온다고해도 킬링타임용에 걸맞는 재미는 충분히 보장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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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아웃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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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작으로 출간된지 무려 25년이 지난 옛날 작품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국내에서 재출간되었다. 요즘 우리나라 출판계에서는 철지난 일본소설 찾아내서 재출간하는게 유행인가보다. 전에 리뷰했던 '소문'이나 '요리코를 위해'도 모두 2~30년전 작품들이었다.


난 이 작품을 이미 오래전에 알고있었기 때문에 책을 구매한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이번 재출간 소식으로 드디어 그동안 책장에서 잠자고있던 2000년판 구판을 꺼내어 읽게되었다. 이 작품이 95년 당시 일본에서 워낙 대히트를 기록한 베스트셀러여서 5년 뒤인 2000년에 오다 유지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개봉을 했고 그 때 영화 개봉에 발맞춰서 책도 출간이 되었던 거다. 영화는 못봤지만 '일본판 다이 하드'라는 광고문구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작품은 영화 '다이 하드'의 플롯을 그대로 따라간다. 다이 하드는 1편이 1988년에, 2편은 90년에 나왔던 영화다. 중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어떤 지점을 장악하고 인질들이 발생하며 우연히 홀로 고립된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며 싸워나간다는 플롯인데, 이 책의 내용도 장소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흡사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다이 하드 시리즈가 특별한 점은 악당들과 주인공의 독특한 캐릭터 묘사에 있다. 특히 주인공에게 밀리지않을 정도로 냉철하고 똑똑한 악당 캐릭터는 이후 수많은 액션영화들의 기준이 되었을 정도로 정말 혁신적이었다. 이 책은 초반부 테러의 장소가 되는 배경설명과 주인공 무리들의 캐릭터 빌드업, 그리고 테러리스트들의 범죄진행을 교차편집 형식으로 보여준다든지, 주인공과 대등한 머리싸움을 할 정도로 똑똑한 악당들의 묘사와 테러를 막기위해 혼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죽도록 개고생하는 주인공 등, 다이 하드가 새롭게 만들어낸 액션스릴러의 공식들을 대놓고 활용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흥미로운 서브캐릭터와 반전을 위한 요소들이 추가되어 내용을 좀더 풍성하게 만들고있긴 하지만, 이 작가가 다이 하드라는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거기에 93년에 나왔던 '클리프행어'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75년작 '아이거북벽'에서 참고한 듯한 흔적도 보이는데, 아뭏든 다이 하드라는 기본 뼈대에 여러 산악 액션영화들을 버무려서 그럴듯한 일본식 산악 액션스릴러로 재창조한 작품이 바로 이 '화이트아웃'이다.



작가의 필력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데, 다른 장점들이 부족한 부분을 많이 커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문장에서 고급스러운 테크닉과 여유가 보이지않고, 투박하고 단순한 표현들과 설명하기에 급급한 듯한 묘사 등 노련함이 부족하다. 특히 내가 일본작가들의 글에서 가장 싫어하는 '지나친 디테일'이 많이 보인다. 대사와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데 혹시나 독자들이 모를까봐 지금 이 인물의 마음상태가 어떤지 또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일일이 자세하게 설명해주려하는 일본 특유의 고질적인 강박증같은 거다. 그래서 중반부에는 남녀 주인공들의 지나친 심리묘사와 인물들의 독백인지 작가의 독백인지 분간이 안가는 시시콜콜한 부연설명때문에 진도가 늘어져서 좀 짜증나기도 한다.



하지만 충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한 댐과 발전소 시설의 구조라든지 주변 산들과 날씨 등 전체적인 배경묘사가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그려져서 글을 읽고 있음에도 영상으로 보는 듯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점은 아주 훌륭하다. 생소한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이런 액션스릴러에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내용전개에 필요한 부분 이외의 군더더기 장면들이 별로 없어서 비교적 스피디하게 진행되며 쓸데없는 감정과잉과 신파같은 요소도 없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처리는 마치 '쇼생크 탈출'의 엔딩이 연상될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방법으로 마무리한 점도 정말 좋다. 아마 우리나라였으면 틀림없이 울고불고 눈물 짜내는 씬으로 처리했을텐데...


작품에 등장하는 오쿠토와댐은 아무래도 작가가 만들어낸 설정인 것 같다. 실제로 검색이 되지않는 명칭인데 주변지역과 산이름을 참고하면 아마도 예전에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나가노와 후지산 사이에 있는 미나미알프스 지역의 험준한 산악지대가 주요 배경무대인 것 같다.



이 책은 초반부 악당들이 댐을 장악하고 여주인공이 인질로 잡히는 부분부터 대충 스토리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해서, 이거 계속 읽어야하나 하고 잠시 망설이게 되는 부분도 있는데, 중반 이후 고정관념을 벗어난 반전 형식의 전개와 함께 휘몰아치는 마지막 클라이막스 액션 시퀀스 등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요소들이 확실하게 읽는 재미를 주고있다.


비록 헐리우드 영화의 설정을 빌려오긴 했지만, 이런 다양한 소재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일본작가들이 많다는 것은 확실히 부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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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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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추리 미스터리 분야에서 꾸준하게 상위권을 유지하고있어서 계속 눈에 띄었고, 한국소설이 이 정도라면 분명 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구매를 했는데, 막상 책을 받아보니 2013년에 처음 나왔던 꽤 오래된 작품이었다. 나온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책이 왜 갑자기 지금 역주행 하고있는걸까 하고 궁금해서 살펴보니 이 작품이 올해 CWA라는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대거상을 수상했다는 문구가 있어 의문이 풀려버렸다.



CWA는 The Crime Writers' Association 이라는 글자그대로 추리작가협회였다. 홈페이지를 보면 1953년에 설립되었고 전세계의 범죄스릴러 장르문학과 작가들을 홍보하고 지원하기위한 목적으로 운영된다고 소개되어 있다. 과연 어느 정도의 권위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주는 상 이름이 단검을 뜻하는 대거(Dagger)상이고, 올해 21년 대거상 목록을 보니 Crime Fiction in Translation Dagger... 즉, 번역판 범죄소설 부문에 윤고은의 'The Disaster Tourist'가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수상소식 덕분에 뒤늦게 이 책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처음 접하지만 작가 윤고은은 이미 등단한지 15년이 넘은 중견작가이며 여러 문학상 수상경력과 함께 고정팬들도 많이 확보하고있는 인기작가인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요한 소재는 '여행'이고, 주인공 역시 여행상품을 기획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있다. 이 책이 처음 발표되었던 2013년 즈음에는 우리나라에서 해외여행은 그야말로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읽었다면 훨씬 공감할 부분들이 많은 내용을 담고있는데, 요즘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아련한 추억으로 느껴진다는 점이 좀 서글프기도 하다. 특히 베트남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 그렇게 느껴질 것 같다. 나도 아는 곳인데... 나도 가봤는데... 하면서...


이 작품의 주요한 여행지가 바로 베트남의 '무이'라는 곳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아무래도 '무이네(Mui Ne)'가 정식 명칭인 것 같은데, 소설 속에서는 그냥 '무이'라고만 하고있고 또 작은 섬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는 판티엣이란 항구도시 끝자락에 있는 어촌마을인데 말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흰모래사막과 붉은모래사막 등 주요 배경소재들이 실제 무이네의 유명 관광명소들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현실 공간을 살짝 비튼 가상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재난여행'이라는 여행상품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당시 호황기를 등에 업고 별의별 기상천외한 여행상품들이 개발되었다고 해도 소설 속에서 묘사하는 재난여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가 없는 상품이다. 작품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이 재난여행이라는 설정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지다보니 전체적으로 약간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초반부 회사 조직 내의 갈등상황이나 그 이후 가이드를 통한 여행 등의 묘사는 분명 현실과 맞닿아있어 감정이입과 함께 몰입도가 높은 편이지만, 중반부 주인공 요나가 여행지에 낙오되면서부터 겪게되는 일련의 상황들은 현실과의 거리감이 점점 멀어지면서 그 이후부터는 급격하게 공감도가 떨어진다.


약 230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판형도 작은 편이어서 사실상 이 작품은 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소설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긴 호흡으로 디테일하고 치밀하게 서사를 쌓아가기보다는 오히려 단편소설처럼 설명을 생략한 상징과 은유가 많이 깔려있는 스타일이다.


마치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를 연상시키는 '폴'의 존재라든지 발음은 비슷한데 다른 의미로 쓰이는 '파울'은 결국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규정에 따라 고객들에게 매몰차게 환불을 거절하던 주인공이 나중에는 도리어 역지사지의 상황으로 몰리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나 관광객들을 위해 연기를 하는 현지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이라든지 여러가지 현실을 풍자하는 듯한 은유가 곳곳에서 느껴지기는 하는데, 궁극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도를 넘어선 상상력과 함께 인위적으로 재난을 만들려고 하던 사람들이 진짜 재난으로 허무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낱 무력한 존재일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주인공과 현지인의 다소 생뚱맞은 러브라인도 좀 그렇고... 역시나 모르겠다...



작가의 필력도 여성작가 특유의 감수성과 경력에서 오는 노련미는 보이지만, 문장의 깊이감이나 개성, 그리고 기교 등에서 특별히 뛰어나다는 느낌은 아니어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인상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내 생각과는 별개로 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평은 굉장히 좋은 편이다. 어쩌면 기발한 상상력과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가 어필이 된 것일 수도 있겠고, 내가 미처 캐치하지 못한 숨은 메시지를 읽어낸 것일 수도 있겠지... 뭐 각자의 느낌은 다 다른거니까...


한가지 첨언하자면 이 작품은 추리 범죄 스릴러가 아니다.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왜 Crime Fiction 부문의 상을 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뭏든 이것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엉뚱하게도 추리 장르로 분류되고 있는 상황이 좀 황당하기도 하다. 전에 리뷰했던 조예은 작가의 '칵테일, 러브, 좀비'도 사실 스릴러 장르에 해당되는 작품이 아니었듯이... 인터넷 서점에서 이런거는 빨리 수정 좀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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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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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쪽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 장르인데, 최근에 개봉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서 원작소설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영화 덕분에 이 책도 뒤늦게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었고, 현재 국내에 6권짜리 전집 형식으로 전 시리즈가 모두 번역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대충 독자들의 평을 훑어보니 2~3권까지는 괜찮은데 그 이후는 지루하다는 의견이 많았고, 가장 핵심인 1권이 그 자체만으로 완결이 되는 형식이라 해서 그냥 1권만 구매했다. 하지만 이 1권의 분량만 해도 약 900페이지가 넘어가는 엄청난 대작이다.


제목 듄(Dune)의 사전적 의미는 '모래언덕'이다. 한자로 사구(沙丘)라고도 하는데, 데이빗 린치 감독의 1984년작 영화의 국내 제명이기도 하다. 어쨌든 작품의 주배경인 아라키스 행성이 거의 모래와 사막으로 이루어져있어 듄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지난번 요 네스뵈의 '킹덤' 리뷰 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작품의 번역을 맡으신 분은 김승욱씨이다. 이미 명작의 반열에 올라있는 유명 작품들은 특히나 번역이 중요한 변수인데, 역시나 김승욱씨 특유의 깊이와 무게감이 느껴지는 문장들이 원작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원작 자체가 워낙 관념적이고 사색적인 표현들이 많기 때문에 자칫하면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수월하게 읽힐 정도로 가독성이 좋다는 것은 오로지 번역자의 공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은 SF소설이지만 기발한 장비나 환상적인 시스템 등 미래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아이템들이 생각보다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막복, 방어막, 그리고 오니솝터 정도인데, 그런 외적이고 물리적인 면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 치중한 소설이다. 즉, 제국을 형성하는 가문과 종족들의 권력 암투가 주된 내용인 것이다. 그냥 배경을 우주가 아닌 중세시대로 바꾸어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예를 들자면 '왕좌의 게임'과 같은 중세 시대극의 우주 버전이라고나 할까...


작품의 가장 큰 핵심줄기가 주인공 폴의 정신적 각성이기 때문에, 작가는 그 과정을 설득력있게 묘사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중반부 폴과 제시카 두 모자가 도피 중에 사막 텐트 안에서 계속 대화와 사색만 하면서 내면적 성장을 이루어가는 장면이 그것인데, 진도는 안나가고 선문답 같은 뜬금없고 관념적인 대사들만 끝없이 이어져서 좀 지루한 느낌도 있지만 그만큼 작가가 무게를 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각성과 함께 권력을 쟁취하기위한 주변 인물들의 온갖 권모술수가 스파이 소설 못지않은 긴장감을 주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포인트다. 작가가 세심하게 설계한 방대한 세계관과 함께 배신과 복수, 정보와 역정보, 속임수 속의 또다른 속임수 등 시종일관 흥미로운 요소가 펼쳐지며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초반부 배신자로 나오는 유에 박사는 영화에서는 반전을 위해 늦게 밝혀지지만, 책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미리 독자에게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히치콕 때문에 유명해진 아주 고전적인 수법인데 작가가 이 방법을 쓰고있다. 즉, 독자는 배신자가 누군지 아는데 주인공은 모르고 있다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서스펜스인 것이다. 투피르에 관한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그가 제시카를 오해하고있다는 사실을 독자는 알지만, 그는 모르는 상황이 안타까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독자에게 미리 정보를 알려주면서 긴장감과 함께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게만드는 서술법을 구사하고있다.


이 작품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노래나 시 등 중간중간 너무나 관념적인 대사들이 다소 난해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정말 쉽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무수히 떠도는 세계관 어쩌고하는 그딴 사전지식 따위 전혀 모르고 읽어도 하등의 상관이 없다. 난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 황제가 '조용히해라, 꼬마' 하는 부분이 왜 그렇게 웃기던지... 길고 길었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결말 부분도 너무나 훌륭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딱 한가지 불편했던 점은 중간중간에 자꾸 영화 장면이나 배우들의 얼굴이 떠올라서 집중에 방해가 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읽을 경우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영화는 이 책의 약 3분의2 지점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폴이 제시카와 함께 사막에서 각성을 하고 프레멘과 합류하는 장면까지인데, 책을 다 읽고나니 영화가 정말 잘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원작의 무게감과 관념적인 부분까지 고스란히 담아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감독이 얼마나 원작을 사랑하고 존중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작을 거의 그대로 영상으로 옮긴 영화에서 바뀐 점이라면 생태학자 카인즈의 남녀 성별이 바뀌었고 하코넨의 조카가 원작에선 한 명이 더 있는데 영화에선 라반 한 명으로 몰아서 처리한 점 등이 있겠는데 나중에 2편에서 덩치 큰 라반과의 결투를 염두에 둔 설정이라 보여진다. 실제로 원작에선 라반보다 페이드 로타라는 또다른 조카의 비중이 훨씬 크다.


아뭏든 영화 듄 2편의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니까 정말 기대가 된다. 과연 마지막에 황제가 '조용히해라, 꼬마' 하는 부분이 나올지도 궁금하고... 아... 진짜 그 부분 제대로만 나와주면 대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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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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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이벤트로 작가의 친필 사인본을 준다고 했고, 선착순 500부 한정이었나 해서 기대도 안했는데 받고보니 사인본이었다. 생각보다 엄청 빨리 주문했나보다. 별것 아닐수도 있겠지만 한사람의 팬으로서 기분이 좋은건 어쩔수 없다.


요 네스뵈가 오랜만에 내놓은 스탠드얼론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또 믿는 작가이지만, 사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최근작 몇편은 아직도 구매를 하지 않았다. 갑자기 번역가가 바뀌어서 나왔던 '박쥐'를 읽었을 때 영 느낌이 별로여서 그 후로는 노진선씨 번역이 아니면 아무래도 구입을 좀 망설이게 된 것이 그 이유다. 그래도 항상 기본 이상은 하는 작가니까 기회되면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하고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이 마침 내가 선호하는 독립된 작품에다가 번역가도 믿음직한 분이라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구매했던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김승욱씨는 예전에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익숙해진 이름인데, 최근 핫해진 '듄' 시리즈도 이 분 번역이다. 장르소설 뿐만 아니라 여러 유명 인문학, 순수문학 등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고 깊이와 무게감이 느껴지는 스타일이어서 이제까지 이 분 번역으로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만족스러웠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본작 킹덤은 영문제목도 'The Kingdom'이고 작년 2020년에 발표된 최신작이다. 요 네스뵈는 1960년생이니까 우리나이로는 환갑이 되는 시점에 발표한 작품이 되겠다.


일단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느낌부터 먼저 말하자면, 한마디로 그냥 끝내준다!



요 네스뵈의 필력이야 범죄스릴러 장르에서는 당연히 최상급에 해당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놀랍게도 그 이상의 한차원 더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번역가의 내공과 스타일에 따른 미묘한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이제까지 익숙하게 알고있던 요 네스뵈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의 작품들에서는 범죄스릴러 장르라는 큰 틀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거의 모든 대사와 행동들이 마지막 결말을 향해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역할로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각각의 장면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순수문학에 가까운 훨씬 풍성한 디테일과 감정선을 담아내고 있다.


복잡미묘한 캐릭터의 심리를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각도로 보여주기 때문에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와 몰입도가 증가해서 그냥 저절로 감정이입이 된다. 문장 하나하나가 현란하면서도 또 너무 튀지는 않게 잘 억제된 노련한 기교가 느껴지고, 대사들 또한 군데군데 적절하게 수위조절된 유머와 함께 너무나 고급스럽다. 딱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고 절묘한 타이밍에 끊어주는 장면전환 또한 일품이다.


사건해결과 범인찾기에 몰두하는 스토리가 아니다보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글에서 전에 없던 여유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때로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로맨스 소설을 읽고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인물들간의 미묘하고 섬세한 심리묘사를 다층적으로 겹겹이 쌓아간다. 아니 이 양반이 어디 가서 고급문학수업 과정을 별도로 마스터했나 싶을 정도로 분명히 한 단계 레벨업이 된 글솜씨이고 정말 글 자체가 예술이다. 60대의 나이로 접어든 기념으로 스스로 각성이라도 한 것인지... 특히 로위가 섀넌에게 속에 품었던 말을 고백하는 장면 같은 묘사는 정말 기가 막힌다.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는 배경이 주로 오슬로와 베르겐이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전부 생소한 지명들만 나와서 또 구글지도를 찾아봤다. 하지만 부달호수니 후켄이니 하는 지역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고, 노토덴이라는 도시만 겨우 나오는데 아마도 그쪽 근처가 주무대인 것 같다.



북유럽의 낯선 지역만큼이나 결코 흔하게 접할 수 없는 개성있는 인물들의 기이하면서도 운명적인 드라마가 계속해서 여운을 남긴다.


살인이나 잔인한 폭력 시퀀스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정적인 장면들로 채워져있음에도, 시종일관 무섭고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폭풍전야같은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요 네스뵈의 작품에서 의미없이 쓰여지는 장면은 단 한군데도 없으며 결말을 위한 복선들이 지뢰밭 수준으로 깔려있음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이 작품 역시 단 한문장도 허투루 넘기지않도록 집중해서 읽으려 했는데, 사실 그렇게 애쓸 필요도 없이 그냥 읽다보면 저절로 초집중 모드가 된다. 주인공 로위가 애용하는 중요한 아이템으로 씹는 담배가 자주 나오는데 대화상대나 기분에 따라 이것을 아랫입술에 끼울 때가 있고 윗입술에 끼울 때가 있다. 이것도 분명 복선 중에 하나일 것이라 예상하고 끼우는 위치가 어떤 의미일까 하면서 읽는 중간에 분석해보기도 했다. 결국엔 별 의미없었고 혼자 오버해석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이런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도 집중해서 읽게만드는 힘이 있다.


처음에는 두꺼워서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지만, 읽다보면 점점 줄어드는 분량이 아까울 정도로 계속 더 읽고 싶어지는 책... 이 책은 그런 책이었다.


요 네스뵈의 모든 작품들 중에 단순히 범죄스릴러적인 재미면에서는 아직까지도 '레오파드'나 '레드브레스트'같은 작품을 좀 더 우선순위에 놓고싶지만, 문학적인 완성도를 따진다면 단연코 이 작품 '킹덤'이 1등이다.


김승욱씨의 묵직하면서도 수준높은 번역이 큰 부분을 차지했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이제는 대적할 상대가 없는 어나더레벨의 작가로 거듭난 것 같다.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작품을 읽게되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고, 다음 작품도 하루빨리 번역되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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