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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여행자들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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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추리 미스터리 분야에서 꾸준하게 상위권을 유지하고있어서 계속 눈에 띄었고, 한국소설이 이 정도라면 분명 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구매를 했는데, 막상 책을 받아보니 2013년에 처음 나왔던 꽤 오래된 작품이었다. 나온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책이 왜 갑자기 지금 역주행 하고있는걸까 하고 궁금해서 살펴보니 이 작품이 올해 CWA라는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대거상을 수상했다는 문구가 있어 의문이 풀려버렸다.



CWA는 The Crime Writers' Association 이라는 글자그대로 추리작가협회였다. 홈페이지를 보면 1953년에 설립되었고 전세계의 범죄스릴러 장르문학과 작가들을 홍보하고 지원하기위한 목적으로 운영된다고 소개되어 있다. 과연 어느 정도의 권위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주는 상 이름이 단검을 뜻하는 대거(Dagger)상이고, 올해 21년 대거상 목록을 보니 Crime Fiction in Translation Dagger... 즉, 번역판 범죄소설 부문에 윤고은의 'The Disaster Tourist'가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수상소식 덕분에 뒤늦게 이 책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처음 접하지만 작가 윤고은은 이미 등단한지 15년이 넘은 중견작가이며 여러 문학상 수상경력과 함께 고정팬들도 많이 확보하고있는 인기작가인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요한 소재는 '여행'이고, 주인공 역시 여행상품을 기획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있다. 이 책이 처음 발표되었던 2013년 즈음에는 우리나라에서 해외여행은 그야말로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읽었다면 훨씬 공감할 부분들이 많은 내용을 담고있는데, 요즘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아련한 추억으로 느껴진다는 점이 좀 서글프기도 하다. 특히 베트남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 그렇게 느껴질 것 같다. 나도 아는 곳인데... 나도 가봤는데... 하면서...


이 작품의 주요한 여행지가 바로 베트남의 '무이'라는 곳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아무래도 '무이네(Mui Ne)'가 정식 명칭인 것 같은데, 소설 속에서는 그냥 '무이'라고만 하고있고 또 작은 섬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는 판티엣이란 항구도시 끝자락에 있는 어촌마을인데 말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흰모래사막과 붉은모래사막 등 주요 배경소재들이 실제 무이네의 유명 관광명소들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현실 공간을 살짝 비튼 가상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재난여행'이라는 여행상품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당시 호황기를 등에 업고 별의별 기상천외한 여행상품들이 개발되었다고 해도 소설 속에서 묘사하는 재난여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가 없는 상품이다. 작품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이 재난여행이라는 설정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지다보니 전체적으로 약간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초반부 회사 조직 내의 갈등상황이나 그 이후 가이드를 통한 여행 등의 묘사는 분명 현실과 맞닿아있어 감정이입과 함께 몰입도가 높은 편이지만, 중반부 주인공 요나가 여행지에 낙오되면서부터 겪게되는 일련의 상황들은 현실과의 거리감이 점점 멀어지면서 그 이후부터는 급격하게 공감도가 떨어진다.


약 230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판형도 작은 편이어서 사실상 이 작품은 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소설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긴 호흡으로 디테일하고 치밀하게 서사를 쌓아가기보다는 오히려 단편소설처럼 설명을 생략한 상징과 은유가 많이 깔려있는 스타일이다.


마치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를 연상시키는 '폴'의 존재라든지 발음은 비슷한데 다른 의미로 쓰이는 '파울'은 결국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규정에 따라 고객들에게 매몰차게 환불을 거절하던 주인공이 나중에는 도리어 역지사지의 상황으로 몰리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나 관광객들을 위해 연기를 하는 현지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이라든지 여러가지 현실을 풍자하는 듯한 은유가 곳곳에서 느껴지기는 하는데, 궁극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도를 넘어선 상상력과 함께 인위적으로 재난을 만들려고 하던 사람들이 진짜 재난으로 허무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낱 무력한 존재일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주인공과 현지인의 다소 생뚱맞은 러브라인도 좀 그렇고... 역시나 모르겠다...



작가의 필력도 여성작가 특유의 감수성과 경력에서 오는 노련미는 보이지만, 문장의 깊이감이나 개성, 그리고 기교 등에서 특별히 뛰어나다는 느낌은 아니어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인상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내 생각과는 별개로 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평은 굉장히 좋은 편이다. 어쩌면 기발한 상상력과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가 어필이 된 것일 수도 있겠고, 내가 미처 캐치하지 못한 숨은 메시지를 읽어낸 것일 수도 있겠지... 뭐 각자의 느낌은 다 다른거니까...


한가지 첨언하자면 이 작품은 추리 범죄 스릴러가 아니다.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왜 Crime Fiction 부문의 상을 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뭏든 이것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엉뚱하게도 추리 장르로 분류되고 있는 상황이 좀 황당하기도 하다. 전에 리뷰했던 조예은 작가의 '칵테일, 러브, 좀비'도 사실 스릴러 장르에 해당되는 작품이 아니었듯이... 인터넷 서점에서 이런거는 빨리 수정 좀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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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쇼-트 2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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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월에 첫 출간되어 1년반이 지난 지금까지 국내 장르소설 분야에서 꾸준하게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며 인기몰이를 계속하고있는 작품이다. 언제부턴가 인터넷 서점을 방문할 때마다 이 책이 줄곧 눈에 띄길래 결국 궁금증을 못이기고 최근 구매목록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배송박스를 뜯고 실물을 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단편소설집이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해서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작고, 얇고, 허접한 제본 상태일 줄이야... 크기가 일반 핸드폰 사이즈보다 살짝 큰 정도이다. 세로로 길쭉한 기이한 판형에, 활자와 여백의 비율도 미적감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정말 소장하고싶은 생각이 1도 들지않는 이 책의 정가는 1만원... 아마도 그냥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가볍게 읽다가, 다 읽고나면 미련없이 버려버리는 문고본이나 포켓판의 컨셉으로 제작한 듯 하다. 그렇다면 그 컨셉에 걸맞게 책값도 5~6천원 정도였어야 딱 적당한 수준이 아닌가... 요즘 책값 정말 터무니없이 비싼 것 같다.



이 책은 약 160페이지 정도에 한 작품당 약 40페이지 내외의 분량으로 총 4편의 단편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예은 작가는 생소한 이름이라 찾아보니 1993년생으로 이제 20대 후반이다. 미대 출신으로 금속공예를 전공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작가로 전향한 케이스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첫번째 단편인 '초대'에서 금속공예에 관한 장면이 잠깐 나오기도 한다.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경험부족이라 아직 미숙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무색하게도 이 책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필력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문장에서 젊은 작가다운 사유와 재기발랄함이 깊게 묻어나온다. 작가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런 단편이라는 형식 안에서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감각적인 표현들이 어우러져 매력있게 발산되어있는 느낌이다.


​특히 두번째 단편인 '습지의 사랑'은 창의적이면서도 기발한 상상력과 함께 그것을 사회문제와 엮어서 은유적으로 처리하는 노련함까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이 책이 인기있고 잘 팔리는 이유를 확실히 납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라면 역시 마지막을 장식하는 네번째 단편인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이다. 타임슬립이나 타임루프는 그동안 너무나 많이 다뤘던 식상한 소재이지만, 단편이라는 짧은 형식에 맞추어 간결하고 스피디하게 엮어가는 솜씨가 놀라웠다. 정말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책값은 충분히 뽑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기승전결의 구조에서 자유로운 단편의 특성이 작가와 잘 맞는다고나 할까... 물론 떡밥만 이리저리 던져놓고 별다른 통찰없이 흐지부지 마무리지었다 해도, 단편이라는 형식이 거대한 그늘막이 되어서 작가의 약점을 덮어주는 느낌도 있다. 호흡이 긴 장편소설이라면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는 장점이 더 많이 보이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점점 침체되어가는 서점가에서 이런 젊은 작가들이 새롭게 활약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그래서 흐뭇한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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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21-12-03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궁금했는데 실버북 님 리뷰 보고 읽기로 했어요! 리뷰 고맙습니다 :)

실버북 2021-12-03 09: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을 통해 의미있는 시간 되시길 바랄게요~
 
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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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진이, 지니' 이후 약 2년만에 나온 신작... 그 누구보다 빨리 읽고싶어서 책이 나오기도 전에 예약구매로 주문을 했고, 받자마자 단숨에 다 읽었다.

 

이제는 정유정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어떤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공포에 가까운 특유의 서늘한 느낌과 긴장감...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정서 또한 잘 살아있는... '7년의 밤'이 워낙 임팩트가 강하고 쎄다보니, 작가의 스타일도 자의반 타의반 서서히 그런 쪽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 이후 다양한 소재로 확장 변주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훨씬 무르익고 노련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7년의 밤'과 같은 원초적 강렬함을 기대해왔던건 사실이다. 드디어 이번 신작으로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아직까지도 '7년의 밤'을 최고로 꼽고,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 다시한번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갈망이 어느 정도는 해소된 것 같다.

 

정유정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라 생각한다. 작품들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판타지가 가미되어 있고, '28'이나 '진이, 지니'같은 경우는 특히나 그러한 판타지적 요소가 굉장히 많이 들어간 작품들이다. '7년의 밤'에서도 수몰된 마을 같은 공간 설정은 마치 아틀란티스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고, 캐릭터나 트라우마 설정 역시 실제로 저토록 기구한 사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과한 느낌이다. 하지만 주인공 부부가 감정싸움할 때의 대화장면을 보면 놀랍도록 사실적이어서 실제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보여준다. 이렇듯 작가의 탄탄한 필력을 바탕으로 한 인물들간의 대화나 상황묘사들은 오히려 극사실주의에 가깝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음에도 별 위화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몰입하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작품 역시 동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공간인 오리들이 사는 늪지대와 그와 관련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설정 등이 나오면서 다소 판타지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부분이 작품 전반에 흐르고있는 잔인하고 무서운 기운을 어느 정도 억제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부러 잔혹동화같은 느낌을 줘서 참혹함의 강도를 약간 낮추려고 한 것은 아닐까 싶은...



이 작품은 만약 소설이 아니라 영화로 먼저 나왔다면 틀림없이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함'이라는 문구과 함께 시작되었을 거다. 바로 2년전 한동안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고유정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첫머리에는 그런 문구가 없다. 작가 스스로 창작의 비중이 훨씬 크다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 책은 몇몇 인물들의 성별을 바꾸고 어린 시절 등의 전사를 추가하여 살을 붙였을 뿐, 고유정 사건을 그대로 재구성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인물관계와 범행수법이 놀랍도록 흡사하다. 게다가 초반 오른손에 붕대를 한 장면은 아예 대놓고 그녀를 암시하고있고, 특히 체포 당시에 화제가 되었던 얼굴 가리는 모습은 회상 장면의 러시아에서 첫만남 때 머리카락 사이로 잘 보이지않는 얼굴 시퀀스로 교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도 작가만의 조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 작가후기를 보면 약간 애매한 뉘앙스로 역시나 고유정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음을 일단은 시인하고 있다. 오히려 캐릭터와 스토리 등 거의 모든 부분이 작가만의 100% 창작물임을 더욱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굳이 그 사건을 오버랩시키지 말아줬으면 하는 작가의 바램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도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고유정 사건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내 기억력이 나빠서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가 창조한 여러 설정들이 독자적인 서사를 형성하고있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바이칼 호수 등 이국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잦은 플래시백과 교차편집 등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을 정도로 스피디한 진행을 하고있기 때문에 오롯이 작품 속으로 몰입하여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인물들의 대화장면 역시 정유정 특유의 사실감은 여전하고, 적재적소의 적확한 단어 선택과 함께 중요한 부분은 직접적 대사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간접적으로 몰아서 처리하는 노련함이 이젠 정말 읽으면서도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오히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자꾸만 생각났다.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백야행을 가장 좋아하고 또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데, 이 책의 주인공 신유나의 이미지가 백야행의 유키호를 떠올리게 한다. 신유나는 자신의 생각을 손수 행동으로 옮기고 유키호는 그것을 대신 해줄 사람이 있다는 차이만 있을뿐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컨트롤한다는 측면과 눈처럼 차갑고 비정한 이미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등 비록 악인이지만 가슴 한켠에서는 이상한 연민이 살짝 느껴지게 만드는 독특한 캐릭터성이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조만간 백야행도 오랜만에 다시한번 읽고싶어진다.

 

대부분의 범죄관련 장르소설에서는 트라우마라는 장치가 들어간다. 범죄의 이유와 범인의 심리상태를 구체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또한 이 부분에서 작가의 역량이 가장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양날의 검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설프게 대충 상상으로 가져다 썼다간 큰일난다. 작가는 병리학이나 법의학적인 검증 등 철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확실한 믿음을 주든지, 아니면 이런 부분이 다소 미흡하다면 압도적인 필력으로 일말의 의혹도 여지를 주지않을만큼 뻔뻔하게 밀어붙여야만 한다. 정유정 작가는 아무래도 후자쪽이 아닐까...

 

이 작품의 경우에도 오리의 울음소리와 관련한 환각과 꿈, 다락방에서의 감금 등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설정이 등장한다. 이런 것들이 현재의 인격형성과 과연 어느 정도의 관련성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특히 작가가 고심해서 선택했음이 분명한 '오리'라는 소재는 뭔가 신비롭고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좀 생뚱맞기도 하다. 마치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겪었던 양들의 울음소리에 관한 트라우마 설정과 비슷하다. 후반부에 한니발 렉터가 이제는 양들이 울음을 그쳤느냐고 치유를 해주면서 마무리되었던... 인과관계나 맥락이 정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작가가 구축한 치밀한 서사와 압도적인 필력에 밀려서 왠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던... 정유정의 오리 역시 왜 하필 오리인가 하는 의문점은 생기지만 굳이 어떠한 상징이 숨어있는지 해석하려들거나 따지지 않아도 별 위화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이러한 트라우마 설정과 연관해서 '완전한 행복'이라는 제목을 지을 정도로 과연 주인공이 행복은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는 뺄셈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이유가 제대로 설명이 되는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작가가 '행복'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실화바탕의 소설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스포일러를 깔고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이미 그 사건에 대해 잘 알고있다고 해도 즐기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무시무시한 스릴과 공포감을 선사한다. 점점 더 원숙미가 더해지는 작가의 필력은 경이롭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물론 실화 바탕이 아닌 순수 창착물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마 작가의 다음 작품도 분명 예약구매를 또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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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1-06-16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히 훌륭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작품을 곱씹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허영이 가득하거나, 발췌로 내용을 채우거나, 통찰이 거의 결핍이다 싶은 요즘 책 리뷰들만 보다가, 핵심을 간결히 찌르는 밀도있는 리뷰에 감사합니다. 어지간해서 어디에 글 안남기는데 꼭 감상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실버북 2021-06-16 09:19   좋아요 0 | URL
아, 너무 과찬이십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리뷰가 된 것 같아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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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몇번이나 작가의 프로필을 재확인했다. 정말 여성작가가 쓴 글이 맞는지...

영화든 소설이든 디테일이라는게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나는 예전에 검도를 수련했기 때문에, 액션사극에서 배우들이 칼자루를 쥐는 모습만 봐도 엉터리인지 아닌지 즉각 알아본다. 감독과 배우, 또는 작가가 사소한 부분까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넘긴다고 해도 경험자와 전문가는 알아본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법정스릴러라면 변호사와 검사간의 법정공방이 얼마나 사실적인지는 현직 종사자들만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디테일은 이런 것들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다.

이 작품에는 스쿠버다이빙이 꽤 비중있는 소재로 등장한다. 나는 젊은 시절 스쿠버다이빙을 정말 오랜시간 경험했고,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다. 작가가 어설프게 얼버무렸다간 딱 걸리는 장면인 것이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거슬리는 부분을 찾기가 힘들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실제로 다이빙을 체험해봤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다. 여성작가가 쓴 글인지를 재차 확인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놀랍다. 남성적인 힘과 여성의 섬세함이 모두 녹아있는 담대한 필력, 독창적인 소재와 캐릭터, 그리고 드라마틱한 대사와 디테일까지... 그 와중에 각 캐릭터의 설득력있는 트라우마 구축도 꼼꼼하게 챙겨넣었다. 액자구성에 플래시백 등, 다소 복잡한 구성을 취하고 있어 초반부는 집중이 힘들어도, 중반부가 넘어가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흡인력으로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장르소설 분야에서 국내 작가들의 활약이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한다. 반가운 일이다. 이 작품에 대한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작가들... 살아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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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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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정명 작가는 전작 '바람의 화원'에서 보여준 예상외의 높은 필력과 내공에 무척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따라서 본작은 자연스레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대했는데, 막상 작품을 다 읽고나니 전작들의 성공을 바탕으로 작가가 부담없이 그동안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도입해본 하나의 실험작같은 느낌이 들었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외국인인 것과 배경이 가상의 세계라는 사실 역시 어느정도 이를 뒷바침해준다.

시종일관 흐린 안개 속을 걷는 듯한 전체적인 분위기는 몽환적이면서도 독특하다. 단순한 범죄추리물이라고 하기엔 의도적으로 고급스럽고 난해한 포장을 해놓아서 생각보다 그리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어떻게보면 '제임스 엘로이'의 스타일을 벤치마킹한 것 같기도 하다.

자의든 타의든 '바람의 화원'은 '다빈치코드'로 불어닥친 이른바 팩션스릴러 열풍에 시기적으로 분명 재미를 보았던 부분이 있다. 본작 역시 어떻게보면 신선해 보이지만, 기본골격은 '살인자들의 섬(셔터 아일랜드)'과 같은 굵직한 작품들에서 이미 시도되고 유행했던 플롯이란 점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결국 이 작가가 겉으로는 대단히 독창적이고 참신한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트렌드에 민감하고 오히려 그에 편승하려는 의도가 강해보인다. 

물론 모방도 제2의 창작이요, 원작을 뛰어넘는 아류작도 분명 존재한다. 상업소설을 쓰는 작가가 트렌드를 따르는 것이 흠이 될 리는 없다. 하지만 겉멋들린 기교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해 이제는 흔해져버린 플롯에 느와르적인 분위기만 잔뜩 입혀 스타일리쉬한 느낌이 나도록 눈속임한 아류작이라 혹평한다고 해도, 별다른 반박거리는 찾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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