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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이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차의 기관사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갈래길 한쪽에 다섯 명의 인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한 명의 인부가 공사 중일 때 당신은 어느 쪽으로 기차를 몰까? 아마 각 사람의 목숨 값을 동일하다 가정하고 재빨리 계산해 한 명이 희생당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이런 판단은 제레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한 ‘공리주의’자에 가깝다. 만약 한 명의 인부가 자기 아들이기 때문에 다섯 명의 인부를 희생하자는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또는 그 한 명이 훌륭하거나 애틋한 사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상황을 바꿔서 내 앞에 덩치 큰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을 철로로 밀어서 기차를 막을 수 있다고 해보자. 똑같이 한 사람이 희생당하기 때문에 목숨 값은 똑같지만 뭔가 꺼림직하다. 그런데 확신은 없지만 이 덩치 큰 사람이 기차를 고장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자. 마음이 가벼워진다. 게다가 내가 직접 밀지 않고 단추 하나로 해결 할 수 있다면 더더욱 내 마음은 가벼워진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꺼림직하다. 왜 그럴까? 칸트는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했기 때문이라 한다. 남편을 자신의 현금 지급 도구로 생각할 때, 아내를 성욕 해결 도구로 생각 할 때, 타인이 나의 특정 목적을 위해 제작된 도구로 여길 때 우린 급격히 기분이 나빠진다. 여기에서 우린 덩치 큰 사람을 철로 막는 ‘바리케이트’라는 ‘도구’로만 여기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는건 아닐까?
하버드 대학교 정치철학 교수였던 존 롤스(1921~2002)는 여기에 ‘무지의 장막’을 쳐보자고 제안한다. 당신은 덩치 큰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다섯명의 인부가 될 수도 있고, 승객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이 덩치 큰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 공리주의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범위를 좀 더 넓혀 당신이 가난하며, 운동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며, 머리도 안좋고, 용모가 추하고, 뚱뚱하며 심지어 장애인이고, 소수 인종에, 형제 중 막내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다. 미국의 경우 상위 1%인 300만명의 재산이 나머지 하위 90%인 2억7천만명의 재산을 합친것 보다 더 많고, 당신이 가난하게 태어날 확률은 그만큼 압도적이다. (비 올 확률이 90%면 우리는 당연히 우산을 준비한다.) ‘무지의 장막’이 벗겨지고 난 후에도 각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게 ‘차등원칙’에 입각한 사회 정치적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출생이라는 임의적 요소에 의해 사회적 부가 결정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우리가 “정의”를 고민하는 이유는 “정의”로운 사회여야지 공동체가 안정되고, 안정된 공동체여야지 기득권의 재산을 보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기득권층은 어차피 가진게 없기 때문에 외국에 의해 식민지가 되어도 잃을게 없다. 이런 경우 '민족주의' 외에는 특별히 피기득권층의 협조를 얻을 방법도 없다. 대한민국에 1㎡ 땅도 없는 우리에게 군대를 가라 하고, 정작 지킬게 많은 대통령, 총리, 여당 대표와 그들의 자식들은 군대를 안간다. 미국이 베트남에 파병 했을때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했을때 누구의 자식이 군대를 갔느냐에 따라 정치인들의 행동은 여실히 달라졌다.
논어 계씨 편 ‘불환과이환불균 불환빈이환불안(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 백성이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백성이 평등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고, 백성의 가난을 걱정하지 말고, 백성이 불안한 것을 걱정해라.’라는 대목이 떠오른다. 유럽이나 중국이 200년 안팎에서 왕조가 끝나는 것에 비해 조선, 고려, 고구려, 백제, 신라가 500년 이상을 유지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이 정신을 비교적 충실히 지켰기 때문이다. 출생률 저하를 걱정하지 말고, 부모의 재력에 의해 자식들의 삶이 결정되는 불평등을 걱정하고, 대기업 회장님들과 권력자들의 가난을 걱정하지 말고, 내외부의 적을 이용해 백성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사회를 고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