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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창훈이




괜찮다. 그런대로 버틸 만하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힘을 다해 노려하지 않아도 견딜 만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배를 깔고 엎드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발부터 바닥 저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섭고 두려웠다. 그냥 몸을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함께 늪으로 던져 버리고 싶어졌다.

몸이 점점 무거워졌다. 물을 잔뜩 머금은 솜뭉치처럼 뚝뚝 아래로 떨어져 갔다. 이마의 주름을 만들어 눈꺼풀을 당겨 보아도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가 돼 버렸다. 너무 피곤해서 잠을 자야 할 것 같은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잠이 깜박 들은 것 같다. 꿈속에서 피곤했다. 머리는 뭔가 계속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아무것도 날 건드리지 않는다면 한없이 떨어지다가 바닥을 두드려야 물기를 털고 올라올 수 잇을 것 같았다.




경찰서에서 온 전화




“김창훈이라고 아십니까? 어떤 관계죠?”

“초등학교 때 만난 선생님인데요. 안 지는 6년 정도 됐고요.”

“그럼 혹시 연락되는 가족이 있으신가요?”

“아버지 연락처는 모르고, 형은 지금 함께 사는 친구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요. 누구신데요?”

“경찰입니다. 여기 중계동인데 오시는 데 얼마나 걸리시나요?”

“한 시간 좀 넘게 걸리는데요. 무슨 일인가요?”

그 한 통의 전화부터 시작됐다. 여느 때처럼 그 녀석이 사고를 쳤으리라 여겼다. 얼른 경찰서로 가서 창훈이 녀석 한 대 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사고 치지 않기로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경찰에게 연락이나 오게 하고...... 그런데 경찰 목소리가 뭔가 이상했다.

“안 좋은 일입니다. 투신했어요. 한 시간이면 너무 오래 걸리네요. 주민번호나 주소 이런 거 아세요?”

“찾아봐야 해요. 얼른 찾아서 연락드릴게요. 그런데......죽었나요?”

“모릅니다. 빨리 연락 주세요.”

몸은 움직이는데 생각은 멈춰 있었다. 무엇을 찾는 데 한참이나 걸리던 내가 무의식적으로 창훈이 주소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 만에 경찰이 전화를 받았다. 빠르게 주소와 주민번호를 불러 주고 다시 한번 죽었는지를 물었다.

“김창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경찰서 형사 6팀에 가서 물어보세요.”

“혹시 왼쪽 팔에 어깨부터 팔목까지 문신이 있나요?”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문신이 있는지 확인시키는 소리가 들렸고, 피가 너무 많아서 잘 모르겠지만 있는 것 같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다. 전화를 끊었다. 병원에는 갔는지,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것 투성이였다. 확실한 것은 피 칠을 한 창훈이를 확인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머리의 회전이 멈췄다. 이를 닦다가 오늘의 날씨를 찾아보다가 시계를 보다가 작은방 책꽃이의 책 이름 보다가...... 계속 몸은 움직였다. 허공을 걷는 느낌이었다. 다리는 무거웠다가 거벼웠다가 했다. 자동차에 올라타서도 그 느낌은 계속됐다. 가속 페달을 밟는 발의 감각이 무더져 앞뒤 차와의 간격을 제대로 맞출 수 없었다.

가을이었다. 햇볕이 좋았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에서 보이는 산은 어느덧 단풍이 들어 있었다. 아니 어제도 단풍은 들어 있었다. 퇴근하면서 아이들과 단풍놀이 가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새삼 지금 단풍을 처음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상한 감정들은 그냥 흘려보냈다. 긴 터널 입구에 들어간 기억이 없는데 빠져나오고 있었다. 터널 밖에 과속 단속 카메라가 있었는데 속도계를 보았더니 140이 넘어가고 있었다. 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너무 빨리 왔다. 외곽순환도로를 빠져나와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창훈이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창훈이의 죽음




경찰서에는 고개 숙인 창훈이의 아버지가 앉아 있고, 앞에서 경찰이 컴퓨터로 사건 경위를 만들고 있었다.

“...... 고(故) 김창훈은 2008년 11월 12일 아침 10시 소주를 한 병 마시고, 911동 15층에 올라가 ‘은희야, 사랑한다’라고 소리를 지른 후 투신했습니다. 14층 아주머니가 혼을 내 주려고 나왔는데 고 김창훈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맞은편 아파트 1층에서 이 소리를 듣고 나온 주민도 이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고 김창훈이 평소에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까?”

내 귓가에 ‘고 김창훈’이라는 경찰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혹시나 했지만, ‘고 김창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니 준비 되지 않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창훈이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고, 얼마 전까지 아버지 안부를 묻는 전화를 했었다고 대답했다. 등 뒤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내가 나서서 창훈이는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고, 아버지가 잘 곳도 없이 거리를 떠도고 있는 아들에게 관심라라도 있었는지 따지고 싶었다. 아버지는 지방에서 여자랑 동거하며 가끔 올라와 용돈이나 조금 주고, 재혼한 엄마는 가끔 찾아와 술주정이나 하고, 형이 보증금을 빼서 오토바이를 사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월세 집에서 쫓겨나 잘 곳이 없고, 후배네 집 창문을 모두 부숴 갚을 돈 80만 원이 필요했고, 교통사고 났는데 재활 치료도 안 하고 있었고, 창훈이와 사귀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는 여자 친구 아버지가 있었고, 그동안에 일어났던 그런 사실들을 정말 알고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때 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봤다. 6년 전 아이들을 야구 방망이, 당구 큐대 등으로 때리던 서슬 퍼런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저분한 옷,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돼 버린 아버지를 보고 가슴이 따끔거렸다.

“선생님, 창훈이가 죽었다네요.”

그 말을 하며 다시 울기 시작하는 아버지를 보며 또 눈물이 흘렀다.

돈이 없어서 삼일장도 못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화장하기로 했다.

화장터에도 운구차가 아니라 병원 구급차를 타고 가야 했다.




창훈이와 만난 시간들




창훈이를 만났던 시간들이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기 이틀 전에 창훈이한테 전화가 왔다. 오늘 볼 수 있느냐고 했는데 안 된다고 했다. 왜 시간이 되지 않는다고 했을까. 다음 주에 만나서 맛있는 것 사 주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던 것만 기억난다.




일주일 전에 만났다. 무작정 고기를 먹자고 했다. 창훈이는 내가 먹는 것만 보고 거의 먹지 않았다.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꼭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바쁜 일 때문에 창훈이를 약속 장소까지 태워다 주고 바쁘게 집에 갔다.




한 달 전에도 만났다. 열아홉 살에 너무나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 지금까지 막살아 왔지만 이제는 제대로 살겠다고 했다. 그래서 직장도 찾고 있다고 말이다. 좋아 보였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를 만난 것 같았다. 그때까지 만났던 여자들과는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나이도 네 살 많다고 했다. 정말 축하한다고 했다.




1년 전에는 치킨 집에서 배달하다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연락이 왔다. 담배 연기 가득한 개인 병원의 병실에서 만난 창훈이는 아저씨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싹싹하고 귀엽다고 말이다. 병원에서 나가면 취직도 시켜 준다고 했다고 자랑했다. 자신은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정말 그 사람이 소년원까지 다녀온 창훈이를 취직시켜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한 기억이 났다.




2년 전쯤에는 내 미니홈피에 이런 글을 남겼다.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안 죽는다.

세상이 무너져도 절대 안 싸운다.

세상이 무너져도 절대 나쁜 짓 안 한다.

세상이 무너져도 절대 게을러지지 않는다.

세상이 무너져도 애들이랑 놀지 않는다.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일만 잘하자.

내가 만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말이야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난 살 집 있어 비록 작지만

고시원 하나 구했어

안에서 있는 동안 번 돈으로 고시원 잡고

지금 일하고 있으니까 미래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괜찮으니까 지금부터 돈 벌면서

잘 살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선생~




3년 전, 소년원에서 학교로 편지를 보내 왔다. 소년원에서 검정고시 준비도 하고 있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이다. 편지는 창훈이가 소년원에 있는 동안 계속 주고받았는데 창훈이가 다시 학교에 다녔으면 한다고 썼던 것 같다. 학교에 잘 다닐 수 있을지 자신도 없는데 말이다.

5년 전에 창훈이는 소년원에 갈 것을 걱정했다. 집을 가출한 창훈이에게 쉴 곳이 없으면 쉼터나 기숙형 대안학교라도 가자고 설득했다. ‘아동학대예방센터’에 상담을 가서 아버지의 구타와 방임을 확인받아 바로 입소를 시켰다. 자유롭지 못한 곳이라 탈출을 했다. 자신을 그곳에 넣은 나를 찾아서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센터 입소가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6년 전 초등학교 6학년인 창훈이를 처음 만났다. 정말 어이가 없는 아이였다. 등교 시간에 학교에 온 적은 한 번도 없고, 수업 중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 밖으로 나갔다. 지나가는 아무 아이에게나 돈을 내놓으라고 했고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선생님이 때려도 안 되고, 상담을 잘한다는 선생님이 이야기를 해 봐도 소용없었다.

그때 난 창훈이가 웃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나가는 창훈이에게 장난도 치고 말도 걸어 봤다.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됐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러 온 미술 치료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창훈이와 친구 한 명에게 미술 치료를 받게 해 줬다. 미술 치료 선생님은 창훈이의 몸과 마음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며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안녕, 창훈아




구급차가 사이렌 소리를 끄더니 멈춰 섰다. 화장터에 도착했다. 창훈이 친구들이 이미 와 있었다. 화장터에 온 아이들은 검은색만 맞춰 입고 왔지 다들 복장 불량이었다. 반짝이 검은 스타킹을 신은 아이, 소매 없고 배꼽이 보이는 망사로 된 윗도리를 입은 아이, 검은색 체육복을 입은 아이, 마스카라를 칠했는데 너무 울어서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화장터에 왔다. 울다가 웃다가 장난치다가 심각했다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그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도 먹지 못하고 왔을 텐데......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였다. 그러다 화장이 예정 시간보다 빨리 끝난다는 소식을 들어서 급하게 올라왔다. 화장도 빨리 끝날 만큼 창훈이가 그렇게 작았던가...... 창훈이는 흰 상자에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보며 아이 몇몇이 또 울기 시작했다 상자를 두 손으로 받아든 창훈이 형이 내게 왔다.

“아직도 따뜻해요. 우리 창훈이 아직도 이렇게 따뚯한데......”

그렇게 창훈이는 갔다. 내가 만난 아이들 중에 처음으로 책 한 권 권해 보지 못한 아이였다. 그 오랜 시간 만나면서 그냥 살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친구들을 참 좋아했던 창훈이는 지금쯤은 하늘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하나하나 안타까운 친구들 옆에 남아 눈물을 훔치고 있을까?




집에 돌아왔더니 휴대전화에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누구보다 속상하고 힘드실 텐데 싹 보내고 오세요. 오늘까지만 힘들어하시구용. ♥ 선생님이 제일 걱정된다. 진짜 쌤이 어떻게 했는데...... 그 미운 오빠 보내고 선생님 조금만 우시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

찬물에 얼굴을 담근 듯, 번쩍 정신이 들었다. 기운을 차려야 한다. 아직 만나야 할 아이들이 너무 많다.







to. 존경하는 고정원 선생님께!




안녕? 그 동아 잘지내고 있었어?

한동안 내 소식 못 들었지? 갑자기 편지와서 놀랬지? ㅋㅋ

나 지금 천안 교도소야.. 또 사고쳤지 모..

그냥 여기서 생활하는데 갑자기 선생님 생각이 나러라구~

그래서 이렇게 편지한다~ㅋㅋ

우리 고정원 쌤 잘지내고 있나? 안 본지 꽤 됐는데 말야?

나 안 보고싶어? ㅋㅋ 나 같은 개구쟁이는 흔치 않아서 수비게 잊혀지지 않을텐데? ㅋㅋㅋ

나는 쌤이 왜 이렇게 안 잊혀지는지 모르겠다? ㅋㅋ

샘이 나 한테 잘해줘서 그런가? ㅋㅋ

내가 쌤 집 주소도 모르고 해서 실례되는거 알면서도 학교로 보낸다~ ㅋㅋ 아직도 중원에서 근무하는거야? 오래하네~ ㅋㅋ

그리고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쌤 귀여운 딸은 잘지내? 싸이가서 사진 보니까 완전 귀엽더만!! ㅋㅋ

이름 알아었는데 까먹었다.. 미안.. ㅋㅋ 내가 원래 머리가 안 좋잖아~ ㅋㅋ 이해해주길~ ㅋㅋ

나 언제 나가는지 모르지? 나 이번에도 11월 26일 날 나가~ ㅋㅋ

잘하면 그전에 나갈수도 있어~ ㅋㅋ

언제 한번 시간나면 편지나 한통 써주라~ ㅋㅋ

직접 쓰기 귀찮으면 인터넷 서신도 있으니까 인터넷 서니 쓰던가~ ㅋㅋ

너무 명령조 인가? ㅋㅋ 기분 나빳다면 미안~ ㅋㅋ

여하튼 몸 건강히 잘지내고 나가면 한번 연락할게~ ㅋㅋ

그때까지 잘지내~ 그럼 안~뇽~!




2007. 5. 21일




p.s. 내가 글 재주가 없어 이렇게 밖에 못 쓴 점 이해해주길 바래~☆ ㅋㅋ




- 『교실 밖 아이들 책으로 만나다』(고정원 씀, 리더스가이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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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강제수용소에서 물은 언제나 부족한데다 변소는 언제나 오물 속에 잠겨 있었다. 게다가 설사병이 유행하고 사방이 진흙투성이였기 때문에, 통상적인 의미의 ‘청결’이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저 깨끗이 해보려는 시늉만 하는 데에도 비상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느 생존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몸을 정돈하고 씻고 깨끗이 하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그런 일이 불가능하게끔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몸을 씻을 물도, 장소도 시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_레빈스카 Lewinska

그러한 환경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재소자에게는 가장 끔찍스런 발견이었다.




숙소와 하수구, 진흙, 블록 뒤에 있는 똥 무더기들. 처음에 그 모든 것들의 참을 수 없는 불결함은 나를 얼떨떨하게 했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혼란이나 무질서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수용소 생활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철저히 계산된 고의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똥오줌 속에 빠져 죽게 하고, 진흙창과 배설물 속에서 죽어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기를 원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파괴해서 우리를 짐승 수준으로 타락시키기를 원했더 것이다. _레빈스카 Lewinska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난 수용자에게는 두 가지 반응만이 가능했다. 자포자기 하든가 저항하든가 양자택일을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많은 생존자들에게 있어서 저항의 의지가 탄생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한 그 순간, 나는 마치 미몽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 나는 내 밑바닥으로부터 나오는 ‘살아야 한다’는 명령을 들었다. 설사 내가 만일 아우슈비츠에서 죽는다고 해도 나는 ‘인간’으로서 죽을 것이며 끝까지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킬 것이다. 나는 결코 놈들이 원하는 대로 비천하고 더러운 짐승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난 후로는 무서운 투쟁이 밤낮으로 계속 되었다. _ 레빈스카 Lewinska




다른 생존자는 이야기한다.




그때 거기서 나는, 총살되지 않으려면,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견디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더 이상 나는 무관심에 빠져 허탈해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나는 외모를 사람답게 만다는 데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것은 좀 우습게 들릴는지 모르겠다. 내가 새로이 발견한 정신적 저항력과 내 몸에 걸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누더기와 무슨 관계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묘하게도 그것들은 관계가 있었다. 그때 이후로 수용소 생활이 끝날 때까지 나는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주위를 살폈다. 그 결과 어떤 여자든 세수를 할 기회가 있는데도 하지 않거나, 신발 끈 매는 것을 에너지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생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_바이스 Weiss




몸을 씻는다는 것은 건강상의 이유로 씻는 것과는 별개의 형식적 의미의 행동이라도, 수용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임을 알았다. 이를 중단한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죽는 것이었다.




4시 30분이면 커피-아무 영양가 없이 고약한 냄새만 나는 엷게 우려낸 향료-가 배급되었다. 우리는 흔히 두어 모금만 마시고 나머지로 세수를 하곤 했는데 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보잘것없는 커피조차 안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씻기를 그만 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덤을 향한 첫 걸음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씻는 데 실패한 사람은 곧 죽는다. 이것은 철칙이었다. 그것이 내부적 쇠약에 의한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는, 틀림없는 전조였다. _도나트 Donat




집단 강제수용소에 들어간 사람은 처음에는 절망감으로 인하여 자신의 외모에 대해 무관심해지지만, 점차로 씻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하러 세수를 한단 말인가? 그렇게 하면 내가 더 잘 살 수 있는가? 아니면 남을 좀 더 즐겁게 할 수 있는가? 씻어봤자 에너지와 열을 빼앗길 뿐,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러나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저 오물투성이의 더러운 대야 속, 저 탁한 물에나마 세수를 하는 건 남아 있는 생명력의 징조이며 도덕적 생존의 한 수단이라는 것을...... _레비 Le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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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상황 아래서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 의식을 기반으로 유지된다. 어느 하나도 조직 활동을 통하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다. 존재의 사회적 기반이 그 나름의 공통 의식을 갖게 하고, 외부 환경에 대처해 나가기 위해 나름의 규율을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정치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아우슈비츠의 두 생존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듯이, 이런 경우의 ‘정치적’이란 의미는 아주 초보적인, 인간성의 기본 수준을 의미한다.




무제한의 자기중심주의와 동료 재소자들의 희생 위에 자기의 삶을 구하는 파괴적인 욕망, 그것은 정치의식을 갖기에는 아직 미숙한 재소자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들은 자기들만 살아남겠다는 태도는 SS대원들이 재소자에게 가하는 압박만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능력이 없었다. 아우슈비츠에 입소하기 전에 거친 강제수용소에서 우리가 얻은 경험은, 모두 힘을 모아 집단적으로 대처해나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각성이었다. 나치와의 투쟁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정치의식을 갖는 일은 성공의 필수 조건이었다. 가시철조망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목표를 부여하고 그들로 하여금 견뎌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치적 연대 의식이었다. _크라우스 Kraus, 쿨카 Kulka




소용소의 재소자로서 어떤 일이건 집단적인 행동이 개별적인 노력보다 어떤 일이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 또 그들 사이의 연대 의식을 굳히면 굳힐수록 더 큰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마 그는 정치적으로 미숙한 사람이라고 단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미숙한 점을 드러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고립을 개인주의로 착작하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비극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조직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업가 출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냉소주의자들, 정치적으로 미숙한 비조직 노동자 출신들 등, 우리가 자유로웠던 시절의 소위 위대한 개인주의자라고 부르던 사람들은 모두 정신분열 증세를 나타냈다. 그들은 나치를 위한 무감각한 도구로 번해 갔다. 그들은 나치의 호의를 얻기 위해 아첨과 비굴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지만, 이런 노력은 그들의 입장을 한층 더 비열하고 힘겹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켄발트에서 오래 생존할 수가 없었다. _바인슈톡 Weinstock




......

......

......




죽음의 행진이 계속되던 수주일 동안 사람들이 서로 도왔던 것보다 더 이상 아름답고 또 더 이상 비참한 사실은 없을 것이다. 나치의 동부전선이 붕괴되자 연합군의 점령 직전에 놓이게 된 수용소들은 차례로 서쪽으로 이동되었다. 공포와 죄의식 때문에 거의 미치다시피 된 SS대원들에게 이끌려진 재소자의 행렬은, 살은 에는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겨울 새벽 속으로 끝없이 걸어갔다. 집단 강제수용소 내의 전 재소자들이 폴란드의 얼어붙은 황야를 가로질러 독일로 향하는 행진을 강요당했다. 이들은 종종 빵 한 조작도 먹지 못하고 맨발로 여러 주일 동안 걷기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뒤로 처지거나 행진을 멈추는 자는 그 자리에서 총살되었다. 그리고 밤중에는 수많은 재소자들이 잠든 채로 얼어 죽어갔다. 최후의 극한 상황은 생존자들을 인내의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따라서 만일 이런 상황에서 이기적인 생각이 조금이라도 작용했더라면, 지쳐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 동료 재소자에게 이끌려 행진을 계속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생존자들의 증언은 헌신적인 도움의 사례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짜내어 서로를 부축하며 행진해 갔던 것이다.




내 손은 모두 얼어붙었고 상처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느꼈다. 나는 완전히 허리를 굽혀 두 손을 허벅지 사이에 넣은 채 거의 기다시피 걸었다. 점점 졸음이 덮쳐왔다. 무릎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힘이 빠졌다. 드디어 나는 눈 속에 쓰러졌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제발 자게 내버려 둬......”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부인은 나를 더 거세게 흔들었다. 졸음 때문에 반쯤 감진 눈으로 보니 클라리였다. “클라리, 제발, 나를 그만 자게 내버려둬......” 하고 나는 애걸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팔을 잡아끌어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_바이스 Weiss




이런 조그만 사건들은 무수히 일어났다. 매우 간단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또 다른 도움은, 밤중에 서로 잠들지 않도록 깨우는 일이었다.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눈 속에서 잘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잠든다는 것은 곧 죽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들은 철야로 불침번을 서야 했다.




“일제!” 나는 그녀를 흔들었다. “제발 건드리지 말아 줘!” 그녀가 항의했다. “일제!” 나는 다시 소리쳤다. “일어나! 넌 지금 잠들려 하고 있어!” 그녀는 비로소 깨어났다. 나는 그녀의 얼굴과 빳빳해진 손을 문질렀다. 나는 수지와 리젤을 불렀다. 그들의 대답이 들렸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서로를 부르며 잠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잠들지 않는데 도움이 된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_클라인 Klein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사람을 힘으로 부축하며 걸어가는 일이었다. 어떤 소녀가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면 누군가가 잡아 일으켰다. 그녀는 겨우 의식을 회복하고 자기를 일으킨 사림이 아우슈비츠의 식당에서 같이 일한 여자인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나를 더 힘차게 자기 몸쪽으로 끌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내 몸무게 때문에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걷는 정도였다. 그 여자도 나와 똑같이 여위고 허약했던 것이다”_베란바움 Birenbaum 생존자들이 그들의 쓰러진 동료를 부축하여 같이 걷도록 할 때면, 도움을 준다는 자체가 체력의 한계에 달한다.




형언할 수 없이 괴로운 행진이 한 시간쯤 지속된 뒤 벤지는 우리들에게 자기를 그냥 버려두고 가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를 버린다면 행렬의 뒤에 있는 SS대원들이 지쳐 쓰러진 그를 간단히 총살해 버릴 것이 뻔했다. 그 장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은데 어떻게 우리가 그를 내버려 두고 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체력의 밑바닥에 최후로 남은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를 부축하며,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그 밤길을 걸어갔다. _운스도르퍼 Unsdorfer




자신도 지쳐서 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도대체 어디서 남아 있는 힘이 있어서 이런 도움을 줄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생명의 탄력성에 관한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중 하나다. 부분적으로는 죽음의 행진을 계속한 재소자들이 어렴풋이나마 전쟁은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만 더 살기 위해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파악하면, 이런 상황 아래서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것은, 일찍이 형성된 강한 동료 의식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즉 자기 목숨이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유지될 수 있었던 수개월 또는 수 년 동안의 악몽 같은 집단 강제수용소 생황을 거치는 동안, 재소자들 사이에는 누가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서로 밀착되어 도와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것을 다시 갚아주는 것 따위는 대단한 일이 아니었고, 서로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 사이에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 이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 등의 표현을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단순한 수사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하찮은 도움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재소자들은 서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렇게 일어나는 무수한 작은 행동들이 모여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커다란 흐름으로 발전해 갔다. 예를 들면 나치의 집단 강제수용소에서 ‘아펠’이라고 불렀던 점호 시간을 위해, 재소자들은 새벽부터 눈이 오거나 비가 오가나 차렷 자세로 몇 시간씩 서 있어야 했다. 똑같은 일이 저녁에도 계속되었다. 저녁 점호는 최소한 두 시간씩은 걸렸고 때로는 서너 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심한 경우는 하룻밤 내내 점호를 받는 수도 있었다.

재소자들은 SS장교들이 열 사이로 지날 때 모자를 벗었다 썼다 하면서 끝날 때가지 똑바로 서 있어야 했다. 사소한 잘못도 혹심하게 다뤄졌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규칙 위반은 너무나 많았다. 재소자들은 지친 나머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비틀거리다가 쓰러져 바로 그 자리에서 죽어 갔다. 저 참혹한 겨울의 점호 시간은 실제로 유태인 말살 정책의 한 형태라고 부켄발트의 한 생존자는 말한다. “게다가 점호 시간에 쓰러져 죽어가는 것 외에 이 때문에 폐렴에 걸려 죽는 사람도 많았다.”_바인슈톡 Weinstock 점호 시간에 쓰러져 있는 것이 SS대원에게 드러나면 그 자리에서 심한 매질을 당하든지 아니면 바로 총살이었다. 그래서 재소자들 사이에 널리 사용된 방법은, 더 이상 자기 몸을 지탱할 수 없는 동료 재소자가 생기면 가까이 있는 재소자가 자기 몸을 받침대로 그를 받쳐주는 것이었다. 생존자들의 보고서 대부분에는 점호 시간에 이런 종류의 도움을 주고받은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몹시 지친 데다가 쇠약해진 몸을 더 이상 지탱할 힘도 없었기 때문에 점호 시간 동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 곁에 가까이 서 있던 동료 재소자들이 내가 쓰러질 것 같은 것을 알고 내 양쪽에 바짝 붙어 섰다. 그들이 나를 이런 식으로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 있을 수 있었다.” _찰렛 Szalet




오른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려보니까 감각이 없어진 페더바이스의 빳빳한 몸이 그의 앞뒤에 서 있는 재소자에게 떠받쳐져 있는 게 보였다. 뒷사람은 그의 허리띠 부분을 잡아당기고 있었고, 양쪽에 있는 사람은 자기 등으로 페더바이쓰의 가슴을 밀어붙이면서 그가 앞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그들은 SS대원들이 이것을 눈치 채지 못 할 만큰 저쪽으로 멀어져 갈 동안 계속해서 이런 자세로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_운스도르퍼 Unsdorfer




물론 재소자들 사이에 서로 돕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많은 인원들을 집합시켜 놓은 곳에서는 어느 정도 서로 돕는 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SS대원의 인원수로는 도저히 그 많은 재소자들을 모조리 감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줄을 지어 서 있는 재소자들 사이를 한 줄씩 흘낏 지나치며 검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일단 발각되면 생명이 위험했다. 그럼에도 도움을 주고받아야할 필요성은 너무도 절실했기 때문에 종종 아주 교묘한 방법을 취하곤 했다. 재소자들은 앓아누운 동료 재소자들이 점호 시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업고 점호하는 곳에 나왔다. 그리고는 SS대원의 감시를 피해 가며 번갈아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심하게 앓아누워 아무래도 며칠 동안은 도저히 움직이지 못하는 동료를 위해서는 그의 점호를 도와주는 것뿐만 아니라, ‘조직 활동’을 통해 얻은 여분의 음식을 갖다 주는 등 그가 건강을 되찾게 될 때까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재소자들은 앓고 있는 동료들을 이쪽 막사에서 저쪽 막사로 옮기기도 하고, 점호 시간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그의 몸을 떠받쳐 주기도 했다. 또 그가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고 제정신을 잃고 있을 때는 SS대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일은 결국 그날그날 “죽어야 할 자를 선발하는” SS대원의 잔인한 눈을 속이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티푸스에 걸린 어떤 재소자는 그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매일 캐나다로 몰래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 쌓인 거대한 옷더미 속에 숨어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비밀 휴식처에 가려면 앓거나 허약한 재소자를 모조리 가려내어 처형장으로 보내는 일만 전담하는 카포들 앞을 지나가야 했다. 그러므로 매일 두 사람의 재소자가 그 티푸스 환자를 카포들 가까이까지는 양쪽에서 부축하여 갔지만, 그들 앞을 통과할 때는 그 환자 스스로 걸어가야 했다. 이곳만 통과하면 그들은 다시 그를 부축하는 것이었다.

집단 강제수용소의 재소자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도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어떤 때는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많았다. 비르케나우의 어느 소녀의 경우가 그것이다. 그 소녀는 “감자 깎는 일을 하는 곳에 자기가 없는 것이 발각되면 심하게 채찍질을 당할 위험이 있었는데도 매일 저녁 아픈 사람들에게 커피를 갖다 주었다. 이런 일은 그 소녀가 처형당하기 하루 전날까지 계속되었다.” _스마글레브스카 Szmaglewska 또 어떤 경우에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형태가 집단적으로 일어났다. 어떤 집단의 재소자들이 다른 재소자 집단의 작업을 도와주는 일도 있었다. 창고에서 시멘트를 꺼내어 건설공사 현장까지 운반하는 작업조 사이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나는 그런 대로 이 일을 감당할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몇 군데 다른 수용소를 거쳐 오는 동안 몸이 쇠약해져서 힘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몇몇 젊은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자기 몫 이상의 작업을 해야 했다. 우리는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 데까지는 서로 돕자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우리는 몇몇 재소자들이 품고 있었던, 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주의 철학에 굴복할 수가 없었다. _바인슈톡 Weinstock




무슨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라도 집단적으로 서로 도왔던 것이다. 하나의 실레를 들어보자.




다섯 명의 부녀자들이 자갈을 가득 실은 궤도차를 밀면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되어 이 차가 궤도를 벗어나 모래 속에 처박혀 버렸다. 그 여자들로서는 이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작업 감독은 근처에 없었지만 온갖 노력을 해도 탈선한 궤도차는 모래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언제 그 잔인한 작업 감독이 다가올지 몰랐으므로 이 여자들은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은밀하게 한 사람씩 사고가 난 곳으로 모였다.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사방에서 탈선한 궤도차 쪽으로 모여들었다. 모래 위에서 작업하던 여자들, 자갈을 싣고 있던 여자들, 방금 자갈을 부리고 돌아오던 사람들 모두 힘을 합쳐 그 차를 궤도 위로 끌어올렸다. 어떤 사람들은 등으로 밀기도 하고 작업도구로 쓰던 삽으로 떠받치기도 했다. 그 궤도차는 간신히 모래 속에서 빠져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포감이 재소자들을 사로잡고 있었으므로 보통 때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그 차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좀 더 힘을 들여 밀어 올리다 보니 이제 한쪽 바퀴가 선로 위에 올라섰다. 작업을 감시하던 카포 한 사람이 멀리서 그쪽으로 쫓아왔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한쪽으로 몰리다 보니 작업장 군데군데에서 인원수가 모자라는 것을 눈치 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닿기 전에 이미 그 탈선한 궤도차는 선로 위에서 전혀 사고가 없었던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_스마글레브스키 Szmaglew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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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소자들의 체험기를 보면, 남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과 똑같이 기본적인 본능이라는 사실을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극한 상황 속에서의 삶이 가진 사회적 본능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생존자들 사이에 전혀 예기치 못했지만 무척 성행했던 활동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집단 강제수용소에서는 이런 본능들이 주로 선물을 주고받는 형태로 나타났다. 재소자들끼리 끊임없이 보잘 것 없는 조그만 물건들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이런 행동을 할 수 잇다는 사실은 자기들끼리 사기를 높이는 면에서도 대단히 큰 효과가 있었을 뿐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서 실질적으로 유용한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어느 날 저녁, 우리들은 밀기울로 만든 수프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따라 나는 이 수프를 대단히 맛있게 먹었다. 왜냐하면 장염 때문에 매일 나오는 애채수프를 마실 수 없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어떤 매춘부가 내 침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기 수프를 내게 내밀었다. “마슈린, 이 수프는 너도 먹을 수 있는 것 같구나. 여기 내 몫까지 더 먹어.”라고 하면서 자기 수프를 내 식기에 전부 따라 주고 가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그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지냈다. _마우렐 Maurel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보다 빈번했던 관계는 아무래도 친구나 자기 근방에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굶주린 사람들이 자기 것을 나눠주기 위해 그토록 열성이라는 사실은 놀랄 만했다. 우리가 작업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막사 안의 모든 침대 머리맡에 오렌지가 반쪽씩 놓여 있었다. 우리 친구 중 한 사람이 소포로 보내온 오렌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돌아오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미리 나눠넣고 기다렸던 것이다. _베르나르트 Bernarad




아우슈비츠의 지하조직 활동에 가담하고 있던 어느 재소자는 자기 생일날 시퍼런 사과 한 개와 “너무 오래 사용해서 한쪽 끝이 다 닳아 없어진 낡은 칫솔 한 개를 선물로 받았다.”_렝기엘 Lengyel 선물로 주는 물건이 구하기 어려운 것이고 또 그것이 명백하게 선물인 이상,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준다는 행위 자체에 ‘무언가 줄 수 있다’는 기쁨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간 반에서 일하는 일제가 정오에 올라왔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뒤로 돌아서서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당신한테 줄 선물”이라며 신이 나서 그것을 건네주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싱싱한 잎으로 싼, 빨갛게 잘 익은 나무딸기 한 개였다. _클라인 Klein




재소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을 우연히 구하기도 하고 ‘조직’하기도 했다. 음식물이 든 소포를 외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수용소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수용소에서는 물물교환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구했다. 다음의 예는 아우슈비츠의 어느 재소자가 SS대원 한 사람에게 궐련 한 갑을 주고 빵 한 덩어리를 얻은 뒤, 이것을 나눠주는 광경을 보여준다.




나는 그날 밤 부자였다. 수용소 안에서 배급되는 검은 빵이 아니라 독일군 장교들의 식탁 위에서나 볼 수 있는 흰 빵을 한 덩이 통째로 갖고 있는 오만한 부자였다. 나는 이걸 야간 작업반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게 즐거웠다. 특히 급식이 모자라서 도저히 굶주림을 이기기 어려웠을 때, 종종 자기 몫의 빵과 수프를 나에게 주곤 했던 내 친구 벤지에게 조금 큰 빵 조각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이 특별히 기쁜 일이었다. _운스도르퍼 Unsdor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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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나 나치의 어느 수용소에 가든지 재소자들이 납득하고 인정한 단 하나의 법이 있다. 이것은 ‘빵의 법률’이라고 불리는 법칙이다. 이 법은 수용소 안에서 도덕적 질서의 중심이며 기초였다. 작센하우젠의 어느 생존자는 이 법의 기원과 그 방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이 재소자들의 막사 안에서 그치지 않고 일어났다. 굶주림은 재소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그들을 어쩔 수 없이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다. 예전에 상당한 존경을 한 몸에 모았던 근엄한 신사들까지도 다른 사람이 잠들었을 때를 틈타 다음날 아침에 먹기 위해 침대 머리맡에 아껴 둔 빵 조작을 훔쳐 먹는 일이 생겼다. 낮이 되면 누구나 한결같이 도둑질을 저주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도둑질은 다시 반복되는 것이었다. 드디어 서로 모여 대화를 나누는 때에 이런 도둑질을 근절시킬 방안들이 논의되었다. 그런데 빵을 훔치는 자들 가운데는 자기가 저지르는 범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재소자들이 많았다. 그것은 그들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정신 이상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빵 한 조직이, 우리가 이토록 모진 고생을 참아가며 기다리는 해방의 날이 올 때까지 체력을 유지시키는 유일한 생명 보호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도둑질은 어떻든 없어져야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빵 도둑을 붙잡을 경우, 그가 다시는 도둑질을 해서 식욕을 채울 생각을 아예 잃을 만큼 혹심하게 처벌을 했다. _찰렛 Szalet




소련의 집단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난 어느 생존자도 똑같은 경우를 기술하고 있다.




재소자들 사이에서 빵 도둑은 슬프게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동료의 빵을 훔치는 일은 어떤 이유로 그런 짓을 하게 되었든지, 수용소 당국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 다음으로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취급됐다. 따라서 남의 빵을 훔치다가 붙잡힌 동료에게 가해지는 처벌은 그만큼 혹독했다. _노르크 Nork




아우슈비츠 재소자 막사에서 빵을 훔친 자들에게 가한 처벌은 실제로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




“그래, 어떻게 처벌했소? 다른 사람들이 그를 몹시 때렸습니까?”

“아니, 당연히 죽여 버렸지요. 그런 파려치한 녀석을 때려준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18번 구역의 법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빵을 훔치면 피해자가 도둑을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도둑맞은 사람이 힘도 없고 체력도 딸려 처형할 능력이 없을 경우는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기도 했다. 그것은 정의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는 몹시 거친 방법이기는 했지만, 음식물을 남에게서 빼앗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서는 공평한 방법기도 했다. _ 브로바 Vrba




이런 방법이 비록 거칠고 너무 심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빵의 법률로 이런 엄격한 강제는 필요했다. 이것은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생명이 걸려 있는 공동체를 보호하고 신뢰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귀중한 빵을 도둑맞았다는 것을 알고 나면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리기도 했다. 극한 상황에서 음식물을 이런 식으로 빼앗기는 것이 얼마나 개개인에게 심리적으로 타격을 주는 것인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도둑질은 우리 전체에게도 의심, 증오 등의 감정을 퍼뜨려 분위기를 해치는 것이었다. _셈프룬 Semprun




사회적 혼돈과 질서 사이의 차이, 즉 아무런 가치 기준도 없다는 자포자기와 이런 상황 아래서도 어느 정도 분별력 있는 선행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 사이의 차이는, 바로 빵의 법률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사실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도둑질이 주고받는 행위의 중요성을 저해하고, 따라서 전체적으로 재소자 사이에 암암리에 형성된 자발적 공동체를 허물어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켄발트의 어느 생존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빵을 훔칠 만큼 도덕적으로 타락한 재소자가 생겼다 하더라도, 그를 SS대원들에게는 물론 구역 감독에게도 보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처벌했던 것이다. 그가 죽을 만큼 매를 때리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화장터에 보내지기 꼭 알맞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 빵의 법률을 인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법은 실제로 수용소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도덕성을 유지시키고, 동시에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모두들 깨달았기 때문이다. _바인슈톡 Wein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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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가 나타남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 ‘이웃으로서의 도움’에 의지한다. 이러한 형태의 패턴은 수용소 세계 어디에서나 나타났다. 주고받는 행동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그러한 상호 교류의 강도는 다만 상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인간들이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때에는, 아무리 작은 호의라도 그들의 연약한 생명의 세계를 지진과도 같이 흔들어 놓는다. 그런 순간이 지닌 힘은 엄청난 것이며, 그렇게 이룩된 유대는 범죄나 명예 그리고 일상적인 의무에서 비롯된 것보다 훨씬 강하다. 이런 종류의 ‘베풀기’ 행동에 관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정심’ 같은 것은 거기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때로는 아무리 하찮은 것-한 순간의 눈초리, 한 마디 말, 한 가지 동작-이라도 쓰러져 가는 사람을 구해주기에 충분했다. 한 번은 동료 재소자에게 삶은 감자를 주었을 뿐인데, 그는 자기 목숨을 살려준 데 대하여 언제까지나 감사하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행진 중에 접질린 친구의 다리를 맞추어 주었다. 그는 무사히 살아남았는데, 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못하고 아마 쓰러진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거라고 우겼다. 수용소에서는 몇 조각의 빵을 얻는 것보다 친절한 한 마디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어려웠다. 재소자들은 힘이 닿는 데까지 서로 도왔지만 감정이 흐르는 것은 피했기 때문이다. 도움은 좋다. 하지만 동정을 금물이다. _도나트 Donat




동정이란 ‘고통을 함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의 세계에 상상력으로 동참하는 행동이며, 그와 똑같은 종류의. 같은 정도의 고통을 스스로 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맞는 행동이다. 동정을 통해서 우리는 한 사람의 상황과 다른 사람의 상황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 그리고 저절로 굴러 들어온 행운과 어쩔 수 없이 닥친 불행 사이의 거리가 우리의 상식적인 세계에 머무는 한, 동정은 도덕적 지상명령이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의 시련을 겪지 않은 우리들에게나 그렇지, 생존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집단 강제수용소의 사람들은 모두가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모두 침묵 속에서 슬픔을 참고 있었다. 누구나 타인의 눈물을 이해했지만, 동정하지는 않았다. 불행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재난에 동요하지도 않는 것이다.” _도나트 Donat

두 여인 사이의 대화를 들어보자.




“왜 울고 있어?”

나는 더 심하게 흐느껴 울었다.

“정말이지, 왜 울고 있는 거야? 우리는 모두 함께 있는데,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심하게 당하고 있는데 말이야.”

_파블로비츠 Pawlowicz







- 『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테렌스 데 프레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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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포항을 가득 메운 촛불들 사이, <반핵출정가>가 울려 퍼진다. 무대에 오른 노래패의 노래는 금세 부안 군민 모두가 함께 부루는 노래로 변한다. 그들의 노래는 군민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노래가 되며 아픔을 모아 분노를 만들어낸다.
부안 군민이 모두 인정하는 부안의 최고 노래패 ‘노랑고무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긴 함성이 따라붙는다. 노랑고무신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없다. 단지 부안 사람이 모두 입고 있는 노란 옷을 함께 맞춰 입을 뿐이다. 그 노란 옷에 담긴 의미 ‘핵 없는 세상’ 하나만으로도 부안은 이미 노랑고무신의 노래에 실어 보낼 함성을 장전하고 있다.
이정선(37) 회원은 “노래를 잘 불러서 무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노래가 10점, 개사점수 20점에 의상이 70점이다. 핵과 맞서 사우는 사람은 노래를 잘 부르건 못 부르건 모두 한식구다.”라고 말했다.
평균연령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높다. 회원 전부가 아줌마, 아저씨다. 노랑고무신이라는 공식 이름을 달고 활동에 들어간 것은 채 한 달을 넘지 않는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대 위에서 간혹 음정과 박자를 놓쳐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열성팬과 관객동원 능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안 군민 모두가 이들의 열성적인 팬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만들어지자마자 부안지역 읍·면을 돌며 순회공연에 나섰고, 활동 1주일 만에 팬클럽(?)이 생겼을 정도다.
노랑고무신이 전폭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는 단 하나, ‘군민의, 군민에 의한, 군민을 위한 부안의 노래패’이기 때문이다. 핵폐기장 부지 유치가 부안으로 확정되는 순간부터 부안은 한 덩어리고 싸우기 시작했고, 그 반핵투쟁은 해를 넘겨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긴 싸움의 순간순간 군민들은 투쟁의 마음을 힘차게 독려해줄 노래패를 필요로 했다. 작년(2003) 12월 18일 어쩌다 몇 명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고, 그것으로 노랑고무신은 창단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쳤다.
‘노랑고무신’에 담신 속뜻을 보면 그들의 존재이유는 아주 선명해진다. ‘노랑’은 모든 부안 사람들의 목소리인 반핵을 상징한다. ‘고무신’은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자는 의미이다.
“반핵투쟁은 부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것이다. 고무신처럼 서민적이다. 노래를 부르는 우리만이 노랑고무신이 아니다. 반핵을 위해 매일 발바닥에 땀이 나는 부안 사람 모두가 다 노랑고무신이다. 부안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반핵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게 강양수(39) 단장의 말이다.
아저씨 세 명에 아줌마 다섯 명, 노랑고무신의 주축은 집안살림을 책임지는 아줌마들이다. 날마다 변산, 진서, 하서면 등지로 공연을 나서는 일정 때문에 집안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식구들은 따뜻한 밥을 제대로 챙겨 먹는 날이 드물다. 그러나 가족 누구 하나 엄마이자 아내이고 며느리이고 한 그녀들의 빈 자리를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한다.
회원 이오순(46) 씨는 “핵폐기장 싸움이 시작되고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부안 사람은 거의 없다. 부안 사람 모두는 아픔을 알고, 그 아픔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안다. 우리는 부안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노랑고무신 회원들은 핵폐기장 싸움이 시작되기 전까지 얼굴조차 모르는 사이였다. 촛불을 들고 모인 부안수협 앞 민주광장에서 혹은 반핵대책위 사무실에서 반핵을 외치다가 만났다. 사는 지역도 하는 일도 다르다. 몇 명은 농사 짓고, 또 몇은 고기 잡고, 건축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정경미(37) 씨의 말처럼 “농사 짓는 것보다 핵폐기장 싸움이 더 중요”해서 만났고,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무대 위인 것을 알기 때문에 날마다 노래를 부란다. 생업을 포기할 만큼 절박한 반핵의 열정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것이다.
노랑고무신뿐만 아니라 부안 사람 모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서 반핵을 이야기한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동지가>를 배워 부르고 <불나비>를 목청껏 외치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이 할 일로 이미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김정(41) 씨는 “할머니들은 촛불시위에 나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담벼락에 반핵을 색칠하는 것으로 자기 자리를 지킨다. 부안의 반핵운동은 누가 시킨 게 아니다.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는다. 우리는 노래로 우리 자리를 찾았다.”고 말했다.
노랑고무신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자신들의 노래를 녹음해 음반을 해는 것이다. 노래실력을 뽐내거나 돈을 벌 생각은 아예 없다. 음반 속에 담긴 노래가 가두방송을 통해 부안 땅, 우리 땅 곳곳에 울리면 된다. 핵 없는 세상 그날을 기다리며 ‘노랑고무신’은 매일 ‘군민의, 군민에 의한, 군민을 위한 노래’를 부란다.
- 정상철, <전라도닷컴>, 2004년 2월 4일

부안에 새로운 시위문화가 등장했다. 이름하여 ‘집단난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페트병, 플라스틱통, 깡통, 냄비, 쟁반 등 소리가 날 만한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아스팔트 바닥을 마구 두드려 소음을 내며 투쟁하는 방식인데, 최고 대접을 받는 악기는 양철통이다. 무덥고 습한 여름날 열과 성의를 다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난타를 하고 있는 이들을 옆에서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소리가 소리를 내고, 소리가 소리를 먹어, 빠르고 독특한 가락으로 변해 신명나게 쳐대는 이들을 무아지경으로 빠지게 하는데.....
잃어버린 우리의 소리를 재연하듯이 페트병이나 막대기를 두 손으로 잡고 다듬이질하듯 가락과 강약을 조절해가며 두드려대는 사람, 젓가락 장단에, 풍물가락, 빨랫방망이 두드리듯 냄비뚜껑을 앞뒤로 뒤집으면서 쳐대는 사람, 그저 마구 바닥을 두드리는 사람 등 가지각색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낸다. 그런데 묘하게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끄러운 소음이 멋들어지고 구성진 가락으로 변하여 거대한 타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어떤 사람이 먼 곳에서 이 소리를 듣고 북을 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 걸 보면 정말 소리란 함께 섞여야 제맛이 나고, 드는 것보다 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단난타는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다. 군청 행정을 마비시키거나, 연행자 석방을 위한 경찰서 투쟁 등 길고 긴 투쟁을 시작할 때 등장한다. 즉 소음을 통해 상대방의 뇌신경을 건드려 짜증나게 하면서도 자신들은 지치지 않는, 행위예술을 통한 시위방식인 것이다. 지난(2003) 8월 15일 전북 경찰청 앞 투쟁에서 처음 시작되어 빠른 속도로 인기를 끌면서 특히 여성 참가자들한테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잇다.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사람들이 내다 버린 것들을 활용한다는 것이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고 특별한 연수가 필요없다.
특히 남의 말을 듣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주체로서 등장하며, 복잡한 체계와 질서 없이 단순한 동작을 통해 서로서로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하여도 지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난타를 통해 속에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는 것이다. 이 난타공연에는 나이 든 여성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을 보고 특히 곁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쌓인 ‘한풀이’를 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부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경박한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안에서 등장한 특이한 투쟁형태, 집단난타는 축제의 한 프로그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집단적 분노를 집단의 소리로 표출하는 저항행위였습니다. 그녀들의 악기는 징이나 장구가 아니라 양철통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짤막하게 자른 수도관으로 양철통을 쉴 새 없이 쳐댔습니다. ‘무대뽀’로 쳐대는 것이 아니라 대형 스피커와 확성기로 울려퍼지는 민중가요의 장단에 맞추어 음악적 가락을 강렬하게 배치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트로트 가락에 젓가락 장단을 맞추는 듯 보이면서도, 그것과는 또 다른 종의 것이니 사람들은 이를 ‘난타공연’이라 불렀습니다. 오히려 한국 여성들의 전통미를 속도감 있게 다스리는 다듬이질을 닮았습니다.
2003년 10월 12일 부안예술회관 앞에서는 하루 종일 대규모 집단난타가 벌어졌습니다. 300명 가량 되는 아줌마부대와 ‘아저씨’ 몇 명이 끼어 있었고, 함께하는 군민들도 수백 명 되었습니다. 이날의 난타공연은 전라북도에서 개최되는 전국체전 경기 중 시범경기인 바둑대회가 부안 군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안예술회관에서 강행되는 것에 대한 잡단 저지 활동, 바꿔 말하면 난타시위였습니다. 부안군에 배정된 요트와 트라이애슬론 두 종목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갔지만 바둑은 실내경기여서 보호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대로 강행하자, “초상집에서 웬 축제냐”며 난타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아줌마 난타부대는 예술회관 정면에 인접한 깨밭과 고구마밭 사이에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난타공연을 하며 1,000여 명의 전경부대가 지키고 있는 바둑대회장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녀들 앞에 설치한 ‘새 쫓는 기계’ 16대도 연달아 폭발음을 내었고, 전경들에게 젓갈탄도 발사하였습니다. 난타와 젓갈 냄새가 포성과 화약냄새를 대신한 것입니다.
난타, 누가 이것을 공연이라 쳐주겠습니까. 견디기 힘든 소음이 광폭하게 들리는데 말입니다. 사실 수백 개의 철판이 찢어지는 소음을 직접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청각공해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 장소에 직접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소리에 소리를 무는 공연으로 협화음을 이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난타는 그 대상이 되는 자에게는 엄청난 소음공해인 동시에 그 주체에게는 강렬한 저항력을 보여주는 공연행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그녀들의 얼굴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녀들의 난타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들의 얼굴을 보아야 했습니다. 난타공연장에 있다는 것은, 곧 난타의 소음을 행위예술적 저항으로 승화시키는 그녀들의 집단적 얼굴성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질긴 저항과 난타의 고행,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성, 그녀들은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늘로 치켜세우지도 아니합니다. 그녀들은 바로 앞의 부조리한 상황을, 분노에 차 있으되 고도의 동적 평형상태를 유지하며 응시합니다. 응시는 난타의 한 행동이며, 난타는 응시의 음운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의 다양성과 일관성을 획득하며 저항적 리토르넬로를 생산하는 표현의 얼굴성이며, 난타공연이 행위예술인 까닭입니다.
그녀들은 문화예술행위가 특권화된 고급형식으로만 창출되는 게 아니라 저항적 삶에서 창출되는 것임을 체험했습니다. 불과 한두 달 새 동질화된 감정구조로 혈육화된 시선들을 함께 잇는 난타공연은, 늘 구경꾼이기만 하던, 그것도 지역축제 때나 겨우 구경할 수 있는, 순전히 텔레비전의 낯선 타자로만 존재하던 그녀들 스스로가 얼마든지 뛰어난 문화예술 행위자가 될 수 있음을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도 전복의 전위예술가로 말입니다. 지휘자도 없는 집단 난타공연은, 잃어버린 해방의 문화소를 되찾는 몸의 운동이자 소리의 파장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녀들의 저항은 민주주의를 유린한 군수에 대한 정치적 저항에서, 삶과 표현과 소통의 새로운 문화를 갈구하는 문화적 투쟁으로 이미 확장된 것입니다.

......

‘반핵·민주’라는 거창한 간판과는 달리 미리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뛰어든 것이 아니어서 매일 매일 어떤 내용으로 채울지 동분서주, 혼비백산했다. 20여 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핵에너지 문제’ 같은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스며들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서울상경투쟁을 처음부터 끝가지 아이들이 준비하고 이뤄지면서 그 자체로 ‘반핵’과 ‘민주’를 체험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강조했지만 생각보다 아이들은 지독히도 수동적이고 타율에 젖어 있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힘들어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었다. 나 또한 비슷한 모양으로 그 시절을 지나왔겠지 하면서도 이런 모습에 많이 놀랐다. ‘의미 있는’ 동아리 활동을 시도하다 ‘차라리 신나게 놀아보기’를 선택한 것도 이런 연유다.
아이들에게 가장 좋았던 것이 무어냐고 물으니 학교의 벽을 넘어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된 점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지금 서로에게 미쳐 있다. 학교 담장 안, 교실 안, 짝꿍의 좁은 세계를 벗어난 만남을 갖게 된 것은, 이번 작은 불꽃학교가 아이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인 한 친구는 원래 별로 말이 없고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이번 불꽃학교의 경험으로 자기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좋아했다. 계기를 물으니 “여기선 서로 경쟁하지 않아도 되잖아요.”라고 답했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 학교의 모습, 우리 교육이 어떤 ‘인간’을 만들어내는 곳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소맷자락을 잡고 “차라리 가지 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작은 불꽃 만남이 계속 되길 바란다. 무슨 의미 있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숨통을 트는 공간으로라도 계속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이번에 짧은 기간이지만 집중적으로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청소년 인권’에 대해 갖고 있던 나의 생각이 관념적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고백하자면, 인권활동가라고 자처하던 나는 아이들을 의식화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접근했던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내게 어림없다는 것을 대번에 보여줬다. 그리고 아이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사랑’이 먼저임을,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다.

.....

나는 부안투쟁을 보면서 여러 번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예상 외로 주민들의 대규모화된 지속적 투쟁에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그 주민투쟁 동력을 자신들의 입맞에 맞게 코드화하는 대책위 지도부의 정치적 행보와 배제의 논리에 놀랐습니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배제당하고 소외당하고 투쟁의 자기전망성/자기결정성이 박탈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어쨌거나 투쟁은 함께하면서 분열주의적 언행들을 극도로 자제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네 번째는 부안에서 뭔 일을 하려면 대책위 지도부의 ‘눈치’를 봐야 하거나 ‘교감’을 해야 한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이걸 사람들은 ‘허락’의 의미로 이해하고 반감을 가졌습니다. 다섯 번째는 그럼에도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으며 함께 투쟁하는 군민들의 원성이 자자해도 끄떡하지 않는 지도부의 태도에 놀랐습니다.
- 고길섶, <반핵부안>, 2004년 7월 5일

2004년 10월 4일 상경투쟁 때, 앞에 있는 지도부는 “참여정부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시위행렬 끄트머리에 선 주민들은 자진해서 “노무현을 박살내자!”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지도부와 주민대중의 차이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민대중의 감정구조는 끊임없이 지도부의 개량화된 정치전략으로 종속되었는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현행 투쟁 이후 부안사회의 정치구도 및 문화정서를 부조리한 방식으로 장악해나가겠다는 욕심의 표현과도 연동되었습니다. 그 욕심은 끊임없이 투쟁의 승리를 좌절시켰습니다. 이는 코뮌놀이로 징후되는 주민들의 해방적 투쟁상황과 이중권력적 쟁취를 해체시키며 권력적 욕망으로 미끄러지는 분열증적 장애물이었습니다.
대책위에 대한 비판이,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거나, 분파를 형성하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지도부의 역량 부족을 탓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역량이 부족하면 힘을 실어주면 될 일입니다. 문제는 그 부족함을 메워나가는 태도입니다. 역량이 부족하면, 통 크게 수용하고 껴안으면 함께 채워나가야 하는데, 어리석게도 지도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큰 줄기를 틀어나가면서, 설명하려고만 했지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며 자신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뱉어냈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쓴소리를 하면 경계하고 배척했습니다.
부안사회는 대책위 지도부 사람들과 친밀하게 코드화된 사람들 및 이들과 결속된 ‘형님문화’ 패밀리에 의해 주도되고 있습니다. 이 몇몇 사람들 편으로 고개 숙여 들어가지 않으면 철저히 배제하고 심지어는 적대시하는 습성에 절어 있습니다. 이는 자기네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안고 가려 하는 낡은 운동관입니다. 그나마 이 낡은 운동관마저 민중적 실천에 근거하지 않을뿐더러 합리적 공론장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형님문화적 사고 코드와 개인적 욕심들로 뒤섞이면서, 배제와 적대의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주류 형님문화의 우산 속으로 결속되지 않은 채, 이들과 다른 생각으로 부안에서 뭔가 해보려는 사람들은 배제되고 도태당하기 십상입니다.
반핵투쟁 이전 오랫동안 보수주의 세력에 눌려 약자로서 소외되었던 대책위 지도부(농민회 계열)는, 반핵투쟁을 통해 급성장하여 부안사회의 주도권을 휘어잡게 되었지만, 이전에 체화된 방어적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상황이 달라졌고 부안항쟁이 대규모 주민대중투쟁임에도 타성을 혁신해내지 못했습니다. 대책위를 비판하면 내용의 타당성 여부는 묻지 않고 정치적 경쟁세력(민주당)의 지도부 흔들기 음모로 간주하거나 비판행위 자체를 불온시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늘에서 민주노동당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반핵진영 내 깊이 형성된 반목정서는 내버려둔 채, 군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감대 없이, 반핵투쟁의 성과를 정치적 이해관계난 개인적 욕심에 따라 일부가 배타적으로 챙기는 행보를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004년 봄 대책위에 비판적이던 사람들 중심으로 ‘부안주민자치참여연대’를 발족할 때 대책위 지도부가 방해활동을 했던 일, 대안신문으로 창간한 <부안독립신문>을 일종의 기관지로 전락시킨 일 등 아픈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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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박쥐, 방랑자, 도둑의 눈에 황혼은 아침식사 시간이다.

비는 관광객에게는 저주이나, 농부에게는 희소식이다.

현지인의 눈에 관광객은 그림처럼 보일 뿐이다.

카리브 해 섬의 인디언들 눈에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붉은 우단 망토를 입은 콜럼버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앵무새였다.







목욕하기 싫어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엄마들은 “안 씻으니 꼭 인디언 같네.” 또는 “너한테 흑인 냄새가 나.”라고 말한다. 그것도 인디언이나 흑인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들에서 말이다. 그러나 신대륙 정복사가들은 인디언들이 자주 목욕하는 것을 보고 정복자들이 놀라 혼미한 상태에 빠졌다고 기록했다. 처음에는 인디언들이, 좀 더 후에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캐나다에서 칠레에 이르는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도 위생 습관을 전해 주었다.







체사레 롬브로조(Cesare Lombroso)는 인종차별을 범죄학의 문제로 둔갑시켰다. 이탈리아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유대인인 그는 원시 미개인의 위험성을 증명하기 위해, 반세기 후에 히틀러가 유대인 배척운동을 정당화할 때 사용한 것과 대단히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범죄자는 범죄자로 태어나고, 그들의 생김새는 몽골 인종의 후손인 아메리칸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흑인과 똑같다는 것이 롬브로소의 주장이다. 살인범은 광대뼈가 넓고 머리카락은 검은 곱슬머리이고 수염이 적으며 송곳니가 크다. 또 도둑놈은 코가 납작하고, 강간범은 입술과 눈꺼풀이 두툼하다. 범죄자는 미개인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여자들은 얼굴을 붉히곤 했지만, 롬브로조는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여자들까지도 범죄자의 용모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혁명가에 대해서도 “나는 균형 잡힌 얼굴을 지닌 무정부주의자를 본 적이 없다”면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견해를 나타냈다.







1997년, 관용차 한 대가 상파울루 대로를 규정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출고한지 얼마 안 된 그 비싼 차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교차로에서 경찰 한 명이 차를 세웠다. 경찰은 그들을 차에서 내리게 한 뒤, 한 시간 가량 손을 위로 든 채 뒤돌아서 있게 하고, 어디에서 그 차를 훔쳤느냐고 연신 추궁했다.

세 명 모두 흑인이었다. 그중의 한 명인 에지발두 브리투(Edivaldo Brito)는 상파울루 주정부의 법무장관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법무부 직원들이었다. 브리투에게 이 사건은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같은 일을 다섯 번이나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을 제지했던 경찰도 흑인이었다.







인디언은 바로 이래서 열등하다 (16~17세기 정복자들의 생각)

- 카리브 해 제도의 인디언들이 자살하는가?

나태라고, 일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 몸 전체가 얼굴인 것처럼 벗은 몸으로 활보하는가?

야만인은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 소유권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공유하며, 부에 대한 욕심이 없는가?

인간보다는 원숭이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주 몸을 씻는가?

마호메트 종파의 이교도에 가깝기 때문인데, 종교재판소의 불구덩이에서 활활 타오를 것이다.

- 꿈을 믿고, 그 소리에 복종하는가?

사탄의 영향이거나 단순히 우둔하기 때문이다.

- 동성애가 자유로운가? 처녀는 순결을 전혀 중요하지 않는가?

난교(亂交)의 습성이 있고, 지옥문 바로 코앞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절대로 어린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두는가?

벌을 줄 능력도 가르칠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 먹어야 할 시간에 먹지 않고, 배고플 때 먹는가?

본능을 통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 자연을 숭배하고, 자연을 어머니로 여기며, 자연은 신성하다고 믿는가?

종교를 가질 능력도 없거니와, 우상만을 숭배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일이 없는 사람들은 평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배고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먹는 것을 두려워한다.

운전자는 걷는 것을 두려워하고, 보행자는 차에 치일까 봐 두려워한다.

민주주의는 기억을 두려워하고, 언어는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민간인은 군인을 두려워하고, 군인은 무기가 바닥날까 봐 두려워하며, 무기는 전쟁이 부족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제는 공포의 시대다.

남성의 폭력에 대한 여성의 공포,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 도둑에 대한 공포, 경찰에 대한 공포

자물쇠 없는 문, 시계 없는 시간, 텔레비전 없는 아이, 수면제 없는 밤, 각성제 없는 낮에 대한 공포

군중에 대한 공포, 고독에 대한 공포, 지난 날에 대한 공포, 앞날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삶에 대한 공포







라틴아메리카 군부는 1959년 쿠바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방향을 전환했다. 전통 임무인 국경 수비에서 게릴라의 국가 전복 음모나 무수한 게릴라 양성소 같은 내부의 적을 소탕하는 것으로 담당 임무가 바뀌었다. 자유세계와 민주주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명분에 힘입은 군인들은 거의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말살해 버렸다. 1962년에서 1966년까지 불과 4년 사이에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아홉 차례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고, 이후 군인들은 국가안보라는 교리를 맹신하며 시민정부를 무너뜨리고 양민을 학살했다. 세월은 흘렀고, 문민질서는 회복되었다. 적은 여전히 내부에 있지만, 더 이상 과거의 그 적은 아니다. 군부는 이제 일반 범죄자들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공공안녕을 외치는 히스테리가 국가안보라는 명분을 밀어내고 있다. 군인들은 자신들을 단순한 경찰의 지위로 깎아내리는 것을 털끝만큼도 달가워하지 않지만 현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

약 30년 전까지만 하더라고 기성 권력기구의 적(敵)은 밝은 분홍색에서 강렬한 빨강색까지 다채로웠다. 변두리 칼잡이와 좀도둑 사건은 사건․사고면을 읽는 독자들이나 잔인함을 탐독하는 사람들, 범죄 전문가들만의 관심을 끌 뿐이었다. 이젠 상황이 바뀌어 이른바 일반범죄가 보편적 강박관념이 되어 버렸다. 범죄도 민주화되어 누구라고 손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모든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는다. 범죄는 철권통치와 사형제도를 부르짖는 정치인과 언론인에게 강력한 자극의 원천이 되고, 영외(營外)에서 거두는 성공에 목을 매는 일부 군 장교들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를 제공한다. 일부 라틴아메리카 장군들은 정치 캠페인에서 민주주의를 혼란과 불안으로 동일시하는 이 집단적 공포를 대단히 그럴싸한 구실로 활용하여 한몫 단단히 챙겼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독재 권력을 행사하거나 독재의 전면에서 주역으로 활약했지만, 이후엔 국민들의 놀랄 만한 반향을 등에 업고 슬그머니 민주주의 투쟁에 끼어들었다.







1997년 4월, 브라질리아를 방문 중이던 인디언 지도자 갈디노 헤수스 도스 산토스(Galdino Jesús Dos Santos)는 버스 정류장에서 자고 있다가 산 채로 타 죽었다. 좋은 집안 출신의 십대 다섯 명이 술을 마시고 야단법석을 떨다가 그에게 알코올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들은 이렇게 변명했다. “거지인 줄 알았어요.” 1년 후 브라질 법원은 살인 의도가 명백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을 가벼운 금고형에 처했다. 연방직할지 법원의 기록관은 이렇게 말했다. 소년들은 가지고 있던 알코올의 반밖에 사용하지 않았고, 바로 그 점이 “살인이 아니라 즐기려는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걸인들을 불태워 죽이는 것은 브라질 상류층 자제들이 심심찮게 즐기는 스포츠지만, 그런 기사는 대체로 신문에 실리지 않는다.







1997년, 미국의 죄수는 총 180만 명이었는데 10년 전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 수치는 가택에 연금된 사람, 가석방이나 보호감찰 대상인 사람들까지 합하면 세 배나 폭증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전개했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이 최악의 상황에 달했을 때의 수감자보다도 흑인은 다섯 배가 많고, 전체 수감자는 덴마크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투자가들의 구미를 당기게 한 것은 이렇게 엄청난 고객 리스트였는데, 바로 이는 감옥이 민영화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개인이 운영하는 감옥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식사는 형편없고 학대가 다반사로 이뤄진다지만, 그것은 사설 감옥이 국영 감옥에 비해 싸지도 않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주는 증거다. 비용을 절감해도 이익은 과도하게 늘어난다.

17세기경, 영국의 간수들은 죄수를 보내달라고 판사들에게 뇌물을 제공하곤 했다. 석방시간이 다가오면 죄수들은 빚에 몰려 생을 마칠 때까지 간수들을 위해 노동을 하거나 구걸을 하곤 했다. 20세기 말 현재 CCA(Corrections Corporation of America)라는 미국의 한 사설 교도소 회사는 뉴욕 증시 상위 5위 내에 랭크돼 있다. 이 회사는 캔터키프라이드치킨(KFC)에서 나온 자금으로 1982년 설립되었는데, 치킨 팔듯이 감옥을 팔아댈 것이라고 광고했다. 1997년말, 이 회사의 주가는 무려 70배나 뛰어올랐고,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푸에르토리코에도 감옥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내수시장이 사업의 기반이었다. 미국의 죄수는 나날이 늘어만 가고 감옥은 언제나 빈 방이 없는 호텔이다. 1992년에는 100여 개가 넘는 회사가 감옥을 디자인하고 건설하고 경영했다.

1996년, 이렇듯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사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월드리서치그룹(World Research Group)의 후원으로 전문가 회의가 열렸다. 회의 개최 알림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체포하고 구형하는 일이 늘어나면 수익도 늘어난다. 그 수익은 범죄 수익이다.” 사실 미국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범죄는 줄어들었지만, 시장은 더욱 많은 죄수를 공급하고 있다. 수감자 수는 범죄 건수가 늘어날 때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로 감옥에 가기 때문이다. 범죄 통계 때문에 한창 잘나가는 사업을 망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이 방면의 경영 간부인 다이안 매클루어(Diane McClure)는 1997년 10월, “우리의 시장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범죄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입니다.”라는 희소식을 전하며 주주들을 안심시켰다.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의 백정 가운데 하나인 알프레도 아스티스(Alfredo Astiz) 대위는 진실을 발설한 죄로 파면되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은 모두 해군에서 배웠다면서, 직업적 박식함을 자랑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정치인이나 기자들을 없애는 데는 기술적으로 가장 제대로 준비된 사람”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와 또 몇 명의 아르헨티나 군 간부들은 에스파냐, 이탈리아, 프랑스, 스웨덴 사람들을 암살한 혐의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재판에 회부되었거나 기소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이 수천 명의 자국민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지난 일은 잊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취지의 법에 따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여러 형태의 불처벌법 역시 같은 기계에서 찍어 낸 듯 닮은꼴이다. 라틴아메리카 민주주의는 외채 상환과 범죄 망각이라는 선고를 받고 소생했다. 마치 민선 정부가 군부의 노력에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군부의 공포정치는 유리한 해외투자 환경을 조성했고, 이어 뻔뻔스럽게도 나라를 헐값에 팔아먹을 수 있는 길을 잘 닦아 놓았다. 국가 주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노동권을 유린하고, 공익사업이 와해된 것은 바로 민주주의 체제하에서였다. 모든 것이 비교적 수월하게 이행되거나 파괴되었다. 1980년대에 민권을 회복한 사회는 최상의 기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고, 거짓과 공포에서 살아남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며, 너무도 낙담하고 쇠약해져서 창조적 활력을 필요로 했다. 창조적 활력은 민주주의가 약속한 것이긴 하지만, 줄 수도 없었고 줄 방법도 몰랐다.

국민의 투표로 당선된 정부는 정의를 보복과 동일시하고, 기억을 무질서와 혼동했으며, 국가 테러리즘을 자행한 자들의 이마 위해 성수를 부었다. 민주주의의 안정과 국민화합이라는 이름 아래에 정의를 추방하고 과거를 묻어 버리며 기억상실을 찬양하는 불처벌 법안들을 공포했다. 그중 어떤 법은 세계 역사상 가장 잔인무도했던 여러 선례를 훨씬 더 능가하기도 했다. 1987년에 공포된 아르헨티나의 지당한 복종법은 10년이 지나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자 폐기되었다. 지당한 복종법은 어떻게든 사면해 주려는 열망을 담고 있기 때문에 명령을 따랐을 뿐인 군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명령을 내린 사람이 상사든 대위든 장군이든 신이든 명령에 따르지 않을 군인은 없으므로 형벌의 책임은 신(神)들의 나라에나 부려지곤 했다. 히틀러가 자신의 정신착란증을 충족시키기 위해 1940년에 완성시킨 독일 군법은 당연히도 훨씬 신중했다. 예를 들면, 제47항에서는 “상관의 명령이 일반 범죄나 군범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행동의 책임 소재가 부하 군인에게 있다고 규정한다.

그 외의 라틴아메리카 여러 법은 지당한 복종법만큼 격하지는 않았지만, 군부의 오만함에 국민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또한 그 법들은 국민의 공포를 이용하여 대학살은 정의가 닿지 않는 곳에 모셔두고, 최근세사가 남긴 모든 쓰레기는 양탄자 밑에 숨기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폭력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융단폭력 식 홍보를 접한 뒤에 대부분의 우루과이 국민들은 1989년의 선거에서 불처벌을 지지했다. 공포가 승리했고, 무엇보다도 공포가 법의 원천이 되었다. 라틴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공포는 때로 물밑에 가라앉아 있고, 때로는 눈앞에 보이기도 하는데, 권력을 살지게 하고 정당화한다. 그리고 권력을 민주주주의 선거의 리듬에 맞춰 들어서고 나가는 정부보다 더 깊은 뿌리와 더 끈질긴 구조를 지니고 있다.







세기말의 높은 하늘, 미국은 지구상에서 자동차가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일 뿐 아니라, 무기도 가장 많이 몰려 있다. 6, 6, 6. 보통 시민이 지출하는 6달러당 1달러는 자동차에 들어간다. 살아가는 여섯 시간마다 한 시간을 차 안에 있거나 차 값을 지출하기 위해 일한다. 알자리 여섯 개당 한 자리는 직간접적으로 자동차와 관련되어 있고, 또 다른 한 자리를 폭력이나 폭력 연계 산업과 관련되어 있다. 자동차와 무기가 더 많은 사람을 살해하면 할수록, 자연이 더 많이 황폐해지면 질수록 국민총생산(GNP)은 늘어난다.

의지할 곳 없는 마음을 위한 부적인가 아니면 범죄를 부추기는 것인가? 자동차 판매량은 무기 판매량에 비례하는데, 무기 판매의 일부를 구성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동차사고는 화기, 총포에 의한 사망률을 누르고 젊은층의 사망 원인 1위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 중에 전사하거나 부상한 미국인보다 더 많은 미국인이 교통사고로 매년 목숨을 읽거나 다친다. 그리고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누구든지 자동소총을 구입해서 동네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요리해 버릴 수도 있다. 운전면허증이 그 용도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수표로 지불을 하거나 수표를 현금으로 찾을 때, 어떤 수속을 하거나 계약서에 서명을 할 때도 쓰인다. 운전면허증이 주민등록증을 대신한다. 다시 말해, 자동차가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 준다.







현대화, 자동차화. 당신의 자유를 훔친 후 나중에 당신에게 되팔고, 당신의 다리를 자른 후 나중에 자동차나 운동기구를 사라고 강요하는 문명의 저의를 고발하는 소리는 엔진의 굉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자동차가 지배하는 도시의 악몽이 세상에서 유일하고도 가능한 삶의 모델로 강요된다. 라틴아메리카 도시들은 800만 대의 자동차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로스앤젤레스와 비슷해지기를 꿈꾼다. 창조 대신에 똑같이 찍어 내는 훈련에 돌입한 지 500년이 된 우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그 현기증 나는 상황의 기괴한 복사본이 되길 갈망한다. 운명이 모방자로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무엇을 모방할 것인가를 선택할 때 조금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낭비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조용하게 살 수도 없고, 조용함을 살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나는 법을 잊어버린 암탉의 날개처럼 걷는 법을 잊어버린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쓰레기를 먹으며 마치 음식이라도 되는 양 돈을 내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마치 공기라도 되는 양 10원 한 장 내지 않고 똥을 먹을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텔레비전 채널 두 개를 놓고 하나를 택할 자유 외에는 아무런 자유도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기계와 함께 열정적이고 극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항상 다수지만 항상 외로운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1983년, 독일 작가 권터 발라프(Günter Wallraff)가 주유소들 중 한 군데에서 일한 적이 있다. 함부르크에 있는 한 맥도날드 매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회사가 맥도날드라는 이름으로 어떤 일을 자행하는지는 순진할 만큼 알지 못했다. 그는 끓는 기름방울을 맞아 가면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일했다. 해동된 햄버거는 10분 동안만 먹을 만하다. 10분이 지나면 악취를 풍기기 때문에 그전에 지체 없이 철판에 던져야 한다. 감자튀김, 채소, 고기, 생선, 닭고기 등의 모든 음식 맛이 똑같다. 그것은 화학 산업이 지시하는 대로 만들어 낸 인공의 맛이다. 게다가 고기에 포함된 지방 함량이 25%나 된다는 사실, 그것도 색소를 첨가했다는 사실을 숨기는 데 온힘을 다한다. 이 불량식품은 세기말에 가장 성공을 거둔 음식이다.







전문가들은 물건을 외로움을 달래는 마술사의 주문으로 바꿀 줄 안다. 물건은 인간의 속성을 지녔다. 쓰다듬고, 같이 있어 주고, 이해해 주고, 도와준다. 향수는 당신에게 키스해 주고, 자동차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 친구다. 소비문화는 고독을 시장에서 가장 수지맞는 품목으로 만들었다. 가슴에 뚫린 구멍은 그 구멍을 물건으로 가득 채우거나 가득 채우는 꿈을 꾸는 것으로 메워진다. 그리고 물건은 껴안을 수 있는 것만이 아니다. 물건은 신분상승의 상징이 될 수도 있고, 계급사회의 세관을 통과하기 위한 허가증이 될 수도 있으며, 출입 금지된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흔하지 않을수록 더 좋다. 물건이 당신을 택하고, 군중의 익명성에서 당신을 구한다. 광고는 판매하는 물건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아주 드물게는 예외도 있지만 말이다. 정보 제공이야말로 제일 하찮은 일이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절망을 보상하고 환상을 심는 일이다. 당신은 이 면도용 로션을 사면서 어떤 사람으로 바뀌고 싶습니까?







세계가 커다란 TV 화면으로 변하려 한다. TV 속 물건은 바라보는 것이지 만질 수는 없다. 판매되기를 기다리는 상품은 공공의 공간을 침략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남의 장소였던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은 이제 상업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모든 쇼윈도의 쇼윈도라 할 수 있는 쇼핑센터나 쇼핑몰은 자신의 위압적 존재를 억지로 주입한다. 군중은 소비의 미사가 열리는 이 대사원에 순례자가 되어 참석한다.







지구의 주인들은 지구가 마치 일회용인 것처럼 사용한다. 태어나자마자 바닥나는, 잠깐 사용하고 버리는 물건, 텔레비전에서 기관총처럼 쏟아내는 영상들, 잠시도 쉴 틈 없이 광고가 토해 내는 유행과 우상들. 그러나 우리가 어느 다른 별로 이사해 살 것인가? 신께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지구를 사유화하기로 결심하시고, 몇몇 기업에게 지구를 팔아넘기셨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가? 소비사회는 바보 사냥을 위한 함정이다. 칼자루를 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지만,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자연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적게, 아주 조금 소비하거나 혹은 전혀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회의 불의는 시정해야 하는 잘못이나 극복해야 할 단점이 아니라 절대 불가결한 필수품이다. 지구 크기의 쇼핑센터를 먹여 살릴 만한 자연은 없다.







도시의 담벼락에 적혀 있는 것

- 나는 밤이 너무도 좋아. 그래서 낮에는 밤 위에 차양을 칠거야.

- 그래, 매미는 일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개미는 노래할 수 없어.

- 우리 할머니가 마약은 안 된다고 하셨어. 그리곤 돌아가셨지.

- 인생은 저절로 치유되는 병이야.

- 이 공장은 새들을 연기로 내뿜네.

- 우리 아버지는 정치가라도 된 것처럼 거짓말을 하셔.

- 행동은 이제 그만! 우린 소망을 원해!

- 희망은 가장 마지막으로 읽어버린 것.

- 세상에 오기 위해 아무도 우리에게 길을 물어 본 적 없지만, 이 세상에 살기 위해 우리에게 길을 물어봐 주었으면 해.

- 다른 나라가 있을 거야. 어딘가에.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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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수 없다면 적응하라”
- 『10년 후, 한국』 (공병호, 해냄, 2004년)


공병호의 글은 아주 쉽습니다.
미국에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국제적으로 명성 있는 신자유주의자 석학들의 클럽에 가입할 정도로 학식이 높으며, 국내 굴지의 전경련 부설 연구소 소장까지 역임한 화려한 경력에 상관없이 그의 글을 아주 대중적입니다. 어렵고 복잡한 얘기도 대중의 눈높이에서 아주 쉽고 간결하게 풀어가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그의 책을 접하게 되고, 그래서 쉽게 그의 얘기에 고개를 끄떡입니다.

공병호의 글은 현실의 핵심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신자유주의가 무엇이며,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 만큼 명쾌하고 자신감 있게 지적한 사람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는 전공인 경제분야만이 아니라 정치, 교육, 문화, 외교, 노사관계, 세대갈등 등 한국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인용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 문제점을 명쾌하게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당당하게 강조합니다.
“살아남고 싶다면 이제 현실을 직시하라”

공병호의 글은 아주 비타협적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더욱 진취적으로 상황을 타개해나가야 하는데, 대중의 원시본능을 자극하면서 감성적인 대중선동을 일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사회에 아직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는 이런 시대착오적이며, 한국사회를 침몰로 몰아가는 소위 ‘진보진영’과는 일고의 타협도 없다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소수의 선각자들이 이론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럼 그가 지적하는 한국사회의 문제들에 한 가지를 들어봅시다.

현대적 의미로 좋은 시절이란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일까? 돈을 벌기 위한 인간의 욕망이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곳을 향해 분출되는 그런 시기가 아닐까. 시장에서 기회를 읽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며 사업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가 좋은 시절에 해당할 것이다. 그들이 감수한 위험의 대가로 여러 사람들이 혜택을 나누어 갖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그런 사회는 침체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
반대로, 좋지 못한 시절이란 어떤 때일까? 행동한 적도 없고, 행동하고 있지도 않으며, 다만 입으로 선해(善行)하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시절이 그런 때일 것이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어려움을 감내할 만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축적한 부를 확대재생산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사람들은 '욕먹어가면서 누구 좋으라고 사업을 하나'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은 더욱 늘어날지 모른다. 생산적인 활동 대신 투기 열풍이라 부를 만한 일들이 반복, 순환될 것이며 돈을 안전한 곳에 넣어둘지는 몰라도 사업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안정 지향적인 성향은 사업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직업 선택에도 나타나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의대나 한의대를 최우선으로 친다. 나는 가끔 공급 과잉 때문에 한 집 건너 개인병원이나 한의원이 즐비한 동네는 상상하곤 한다. 정년이 보장되는 교사나 공무원도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직업이다. 고시와 자격증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우리 사회가 안정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는 의미다.
안정이란, 부를 나누어 갖는 게임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아무리 많은 변호사가 있다 해도 그들이 새로운 부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그들은 존재하는 부를 나누어 갖는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이 위험을 피해 안정을 취하는 쪽으로 간다면 그 사회는 정체를 벗어날 수 없고, 나는 향후 10여 년 간 이런 추세가 계속 되리라고 본다.

정말 너무 분명하고 날카롭지 않습니까?
사회가 끝임 없이 부를 창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모두들 현실에 안주하면서 부를 나누어 가질 생각만 하니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기업가정신’을 활성화해서 사회의 창조적 동력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한국사회가 무엇이 문제인지 그가 적어놓은 소제목을 살펴봅시다.
‘주력산업이 흔들린다’ ‘떠나는 기업들, 사라지는 일자리’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들’ ‘약진하는 진보진영’ ‘제대로 된 시대정신이 없다’ ‘위험한 민중주의의 유혹’ ‘약진하는 노동조합’ ‘한국의 교육, 희망은 있는가’ ‘악화되는 재정적자’ ‘대미 외교, 감정만으로는 안 된다’ ‘시대를 거스르는 민족주의’ ‘해외로 빠져나가는 돈’ ‘세계화, 결코 피해갈 수 없다’ ‘한국 경제를 뒤흔드는 차이나 쇼크’ ‘길어가는 세대간 갈등’
어떻습니까? 한국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너무 선명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한때 ‘한강의 기적’이니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니 하면서 칭송받던 한국사회의 현실이 왜 이 지경이 되어버렸을까요? 그 근본문제가 무엇인지 들어봅시다.

이성의 힘이 부족하고 감성에 의지하는 사람일수록 원시 본능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문명화된 나라라 하더라도 역사의 어느 기간은 사회주의화를 실험할 때가 있다. 바로 원시 본능이 집단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때이다. 시장경제와 관련된 지적 인프라가 척박한 이 땅에서 우리는 원시 본능의 화려한 부활을 목격하고 있다.

사람 살아가는 곳이 생각처럼 우아할 수는 없다. 그곳에는 번잡함과 혼란스러움, 불평등과 비열함 등 온갖 종류의 악행들이 널려 있다.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세상은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더럽기만 하지도 않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을 벗어나 완벽한 세계를 꿈꾼다.
그 같은 동경은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상상의 세계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하다. 그것은 대개 단번에 모든 것을 일소하는 '싹쓸이'의 모습을 띠기 때문이다. 점진적인 개량이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보다는, 추상적인 이상향을 향해 조급하게 달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결코 시장경제와 함께 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채택했기 때문에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체제에 감사하기보다는 상대적인 불평등에 불만을 터뜨리기 쉽다. 원하는 조건이 만족되지 못하면 그 원인인 제도는 타도의 대상이 된다.
부란 천부적인 권리가 아니라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체제 변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비롯해 보통 사람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고민하고, 문제 해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기 때문에 실용을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반면 사회주의는 명분과 함께한다. 실용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직접 행동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다.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행동보다는 토론이나 담론을 즐기는 편이다.
......
주자학은 여전히 한국인의 의식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실천보다 말이 무성하고,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현상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쿠바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났지만, 그보다 훨씬 발전된 교조주의와 명분주의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북한을 봐도 알 수 있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일상에는 집단주의적 색채가 곳곳에 배어 있다. 타인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이성에 바탕을 두고 다른 의견을 비판하기보다는 폭력적 언어로 타인을 비방하는 일이 예사롭지 않게 일어난다. 때로는 집단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 특정인을 ‘왕따’시키는 경우도 발생한다.
......
그렇다면 왜 개인주의가 중요한가?
시정경제는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삶의 방식이 자리 잡지 않는다면, 집단적 의사결정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집단적 의사결정의 피해에 이미 충분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이란 쉽지 않다.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갖추는 젊은 시절에 심취했던 사상과 세계관을 버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공공연하게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하거나 찬양하지는 않지만 그들 중 다수는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는 등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 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언론에 전해지는 발언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에 대한 비판이나 대안 제시, 사용하는 용어들을 보면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누구나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데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좌파 지식인들은 몰락한 사회주의를 보면서도 진솔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론 사회주의가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기만 한다면 멋진 세상이 펼쳐지리라고 여전히 믿는 것일까.

성장이 정체되고 세계화가 급속해지면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정의로운 분배를 실천할 수 있는 조직화된 권력에 대한 욕구도 점점 커질 것이다. 그것은 정치 지형도 변모시킬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좀더 분배 위주의 정책을 펼 수밖에 없고 성장 동인은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축소지향형 악순환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심리에는 ‘이웃이 잘살기 때문에 내가 못산다’는 생각이 깔리게 된다. 그러니 ‘있는 자에게 빼앗아 없는 자에게 나눠준다’는 생각은 언제든 제도화할 수 있다.

이쯤 되면 한국사회가 위기에 처해있는 핵심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러면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삶의 자세가 필요할까요?

나는 세계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지 정확하게 그려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의 문을 열어둔 세계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다만 어느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국지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지던 경쟁은 점점 더 세계적인 규모로 확장되고 있다.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세계 어느 곳에 내일 당장이라도 유력한 경쟁자가 등장할 수 있다.
끊임없이 학습하고, 적응하고, 혁신하는 것을 삶의 방식으로 채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내가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지구의 또 다른 곳에서 누구든지 그런 삶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무 급변한다고 불평하고 저주해도 그것은 한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 있을 뿐, 변화를 되돌려놓을 수는 없다. 함께 모여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고함도 치면 동지애를 굳히거나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자본과 세계시장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
이런 저런 이유로 보호되었던 거의 전 영역이 개방에 노출될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변화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인다. 경쟁이란 개방과 경쟁 속에서만 곷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 필요한 변화를 추진한다. 반면 우둔한 사람들은 애써 눈을 감아버린다. 그리고 믿고 싶은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이 어떻게 믿듣지 세상의 흚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바꿀 수 없다면 적응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삶의 철학을 얻었습니다.
“바꿀 수 없다면 적응해야 한다.”
현실을 똑바로 보고 끝임 없이 현실에 적응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입니다.
지금 일자리가 있는 분들은 그 일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현실에 적응하십시오. 기능도 끝임 없이 향상시키고, 시장의 변화에 따라 회사의 성과와 자신의 성과를 끝임 없이 일치시키고, 변화되는 작업조직에 끝임 없이 적응하십시오. 현실을 바꿀 수 없으면서 대중을 현혹하는 노동조합이나 정치인들에게 현혹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헬스도 하고, 보약도 먹으면서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자기관리를 제대로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과로사니 근골격계니 하는 것은 모두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를 노동조합에서 부풀려서 그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설혹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더라도 그런 현실에 한탄이나 하면서 주저앉아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거리의 노숙자처럼 삶을 포기하는 무능력자가 되지 말고, 자기 사업을 벌이거나 다른 직종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전하는 삶의 자세를 보인다면 위기는 기회가 됩니다.
이런 삶의 자세로 살아간다면 당신은 만 명 중의 빛나는 한 명이 될 것입니다.
그게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빛나는 삶의 자세입니다.
다시 한 번 삶의 철학을 가슴에 새겨두십시오.
“변화시킬 수 없다면, 철두철미하게 적응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성공한 ‘만 명 중의 한 명’을 뺀 나머지 ‘만 명 중의 구천구백구십구 명’은 가슴에 새로운 철학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적응할 수 없다면, 철두철미하게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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