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할 필요 없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오랜 양식과 전통을 바꾸는 데 있어서도 자발적이고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모호한 상실 속에서 의미를 찾는 데 영향을 미친다. 세상을 논리적으로 공평하고 정의로운 장소로 바라보면 모호한 상실을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자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일 것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에 맞춰 깔끔하게 떨어지는 등식 너머의 것들과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하고,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왜 나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일이 우리 행동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건 안다.

사람들은 세상이 ‘항상’ 정의로워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무작위로 겪는 상실을 장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이다.

상실에 직면하거나 다른 충격적인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필요한 건 흔한 반응이다.

자기 자신을 탓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는 사람은 종종 그들의 불행을 불운 탓으로 돌린다. 이는 모호한 상실에서도 자신을 탓하는 것보다 더 기능적인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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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사건/함경도 개척

함경도가 완전히 한민족의 땅으로 귀속된 것은 세종 때다. 최윤덕과 김종서는 4군과 6진을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설치했는데, 6진이 관할하던 지역이 오늘날 두만강 이남의 함경도다. 세종이 함경도를 점유가 아닌 영토로 만들 수 있었던 비법은 군사력이 아닌 사민 정책 때문이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에서 농민들을 강제로, 지속적으로 함경도에 이주시켜 조선 백성이 살아가는 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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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을 극복하는 마지막이자 가장 어려운 단계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모호한 상실의 경우, 슬픔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므로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이 사실 다른 보통의 상실보다 훨씬 더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모호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견뎌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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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명문장/오래 걸리는 것은 상관이 없다.

"(...) 밤은 만물 중에 가장 늦게 열리는 것이오. 심지어 자라기가 무척 어렵지만 일단 자라면 쉽게 커지며, 잎이 몹시 늦게 피지만 일단 피면 쉽게 무성해지고, 꽃도 늦게 피지만 쉽게 활짝 피며, 열매도 몹시 늦게 열리지만 열렸다 하묜 거두기 쉽다오. 밤이라는 물건도 기울면 차고 겸손하면 이익이 생기는 이치를 가지고 있소"
윤 공은 나와 같은 해 과거에 급제했는데, 그때 나이가 서른 남짓이었다.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벼슬 한 자리를 얻었기에 사람들이 모두 늦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공은 부지런히 벼슬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예전 임금께 인정을 받아 하루에 아홉 번 승진해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마치 손대지 않았는데 무성하게 자란 나무와 같았다. 처음 벼슬에 오르기는 어려웠지만 나중에 성취를 이루기는 쉬웠으니, 늦게 꽃을 피우고 늦게 열매를 맺는 밤나무와 같은 점이 있다. 나는 이치로 설명하고자 한다.
(…) 느린 것은 반드시 빨라지고 멈춘 것은 반드시 먼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백문보, <동문선> 중

백문보(1303년~1374년)가 과거에 합격한 동기 윤택을 위해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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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수용하는 데 가장 성공한 가족들은 타협하려는 의지를 서로 받아들인다. 불분명한 상실 문제에 대해 각자가 선호하는 해결책을 완고하게 고집하기보다는,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듣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들은 서로가 아니라 문제를 공격하기로 다짐한다.

우리는 완벽한 해결책이 없는 현재 상황 속에서 가능한 한 최선의 답을 만들어내는 노력을 감수해야 하며,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변화에 대한 수정 과정은 절대로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복합적인 상실은 절망적이고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서 변화의 힘마저 앗아 가지는 않는다.

그리스어로 ‘위기’는 ‘터닝 포인트’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두 단어는 모호한 상실을 안고 있다. 불확실한 상실로 인해 힘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가는 극도로 좌절하게 되고, 그 후에는 갑작스럽게 혹은 천천히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부재한 가족 구성원의 상태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다.

모호한 상실은 우리를 무능하게 만든다. 그런 감정은 우리의 주인 의식을 잠식하고 세상이 공정하고 질서 있고 살 만한 곳이라는 믿음을 파괴한다. 하지만 우리가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려면, 때로는 우리가 속한 세계가 모호성이 적은 때라고 할지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불확실한 상실을 접하게 되고 이에 대처하려면 완전한 해결에 대한 욕망을 먼저 누그러뜨려야 한다. 이것이 역설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관리’란 내면의 것(지각, 감정, 감정, 기억)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외부적인 것(다른 사람, 상황, 환경)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완전하게 부재하거나 존재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내부 변화는 종종 외부 장악과 연결된다.

해결되지 않은 슬픔을 다루는 심리상담사로서, 나는 사람들에게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올바른’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은 피한다. 내가 문제에 대처하는 좋은 전략으로 여기는 요소들이 가족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가족 대화는 현재와 미래의 모호한 상실에 대처하는 유용한 방법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가족 대화를 그들의 삶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나가기를 권장한다. 부모들이 나이가 들고 건강 상태가 바뀌면서, 누가 돌보고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또 규칙이 바뀌어야 하는지, 그리고 가족 기념일과 축하 모임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등 예외 없이 일어나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재구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데, 특히 모호한 상실이 가중된 스트레스 상황에서 중요하다.

예전에 보았던 러시아 영화가 떠오른다. 한 나이 든 여자가 전신이 마비된 채 병상에 누워 있는데, 그녀의 유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하나가 큰 종소리를 내는 끈에 묶여 있다. 이 환자는 비록 육체적으로 무능력하지만, 가족 전체의 운명을 손가락 하나로 지배하고 있다. 가족들은 그녀가 울리는 종소리의 포로였다. 가족들이 가족 내 만성 질환자와 함께 살려면 환자와 가족 ‘모두’ 영성과 통제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장기적인 모호함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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