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가가 가까워질수록 알 만한 얼굴들이 보였다. 나는 발길을 돌려 집 쪽으로 향했다. 읍내에서 집까지는 12, 13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었다. 자동차들이 내 옆을 쌩쌩 지나갔다. 슬며시 뒤를 돌아봤다. 엄마 차가 보일까 싶어서였다. 나는 일부러 빙 돌아 대로가 아닌 농로로 걸었다. 최대한 집에 늦게 도착하고 싶었다. 아니, 집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캄캄해지기 전에 들어가야 했다. 어둠이 내리면 속수무책이 될 터였다.
나는 반대 골목으로 돌아 느티나무 밑 평상에 갔다. 어른들은 모두 들어가셨는지 아무도 없었다. 평상에 누워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언제 모기에 뜯긴 건지 정강이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여름의 어둠은 서서히 세상으로 내려왔다. 해는 이미 넘어갔다. 나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집으로 걸었다.
이불을 깔고 누워 선풍기 방향을 바닥으로 고정했다. 온종일 걸었더니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멀리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은 아늑한 공간이었지만 이대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지옥이었다. 그러나 집 밖의 세상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며칠 동안 내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연락해 올 사람도, 할 사람도 없었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나만 도태되고 있다는 생각에 외롭고 쓸쓸했다.
고속버스가 읍내 터미널로 들어섰다. 저 멀리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들어오는 버스마다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내 안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이 올라오더니 왈칵 두 눈으로 쏟아졌다.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발견한 엄마가 달려왔다. 엄마는 한쪽 팔로 내 목을 감아 품에 가두었다. "내 새끼…… 나 살아 있는 한은 내가 네 눈이여." 내 머리 위로 쏟아진 엄마의 목소리는 뜨겁고 단호했다. 순간 바람 맞은 들불처럼 길길이 날뛰던 내 안의 소란과 불안, 분노, 두려움, 억울함, 부끄러움, 정체 모를 우울감이 마치 연줄 끊기듯 툭 날아가는 듯했다.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소스 없는 허연 짜장면이 박혀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더없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고개를 들자 주차장 지붕을 박차고 오르는 새가 보였다. 처음 보는 새였다. 새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엄마 품에 안긴 채로 이름 모를 새를 오래오래 올려다보았다.
나는 열다섯 살 때 발병한 병으로 서서히 실명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고등학교를 도시의 특수학교로 오게 되었다. 집과는 70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한참 안경 렌즈를 바꿔가며 검사판을 가리키던 안경사 아저씨가 뜬금없이 내게 교실 칠판은 잘 보이는지, 밤길을 잘 다니는지 물었다. 나는 요사이 내게 나타난 증상을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검사를 중단했다. 안경을 맞춰주는 대신 서울 안과의 약도를 적어 주었다. "내가 서울 안과에 예약을 해줄 테니까 빨리 검사를 받아보거라. 꼭 부모님 모시고 가고."
안경을 맞추고 싶으니 돈을 넉넉히 달라고 했다. 엄마는 이왕이면 좋은 것으로 하라며 돈을 쥐여줬다. 안과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동서울터미널에 내려 안경사 아저씨가 적어 준 약도대로 따라갔다. 접수처에 이름을 대고 기본 검사를 받았다. 눈꺼풀을 뒤집어 랜턴을 비춰보던 간호사 선생님이 심각한 얼굴로 보호자가 같이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겁먹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간호사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대다 검사를 계속 진행했다. 15분 간격으로 안약을 네 번 넣고 검사실로 들어가 안구 사진을 찍고 이마에 전선을 연결하고 알 수 없는 검사들을 한참 했다. 마침내 내 이름이 호명되고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의사 선생님도 자꾸 보호자를 찾았다. 뭔가 내 눈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다. "다음에 어머니 모시고 오너라."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찼다. 그러나 알아야 했다. "저는요, 충청도 시골에서 왔어요. 농사철이라 엄마는 엄청 바빠요. 다음번에 엄마 데리고 올 테니까 오늘은 그냥 저한테 얘기해 주세요." 의사 선생님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내 뒤에 서 있던 간호사 선생님에게 눈짓했다. 여러 장의 티슈가 내게 건네졌다. 왜 이걸 주는 거지? 나는 그걸 받지 않은 채로 멀뚱하게 서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얘야, 너는 머지않은 미래에 시력을 모두 잃게 될 거란다. 벌써 진행이 많이 된 상태야. 다음에 부모님을 모시고 오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마." 정신이 멍한 채로 그 얘기를 들었다. 머릿속이 공갈빵처럼 텅 빈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오니까 비로소 눈물이 쏟아졌다. 간호사 선생님이 왜 여러 장의 티슈를 뽑아서 내게 건네려 했는지를 그제야 알았다. 나는 티슈도 손수건도 갖지 않은 빈손이었다.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무슨 정신으로 수납하고 고속버스에 올랐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멍하니 차창 밖을 보았다.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회색의 도시가 등 뒤로 멀어졌다. 작은 마을들도 숱하게 지나갔다. 푸른 들판과 희끄무레한 비닐하우스들이 순식간에 뒤로 흘러갔다. 나는 밀려오는 무언가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비가 시작됐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정신없이 터미널 양철 지붕을 때려댔다. 나는 멍하니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비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삼켰다. 비가 내 눈물자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 가장 뜨거운 물줄기가 내 턱 끝에 매달렸다. 입을 벌리면 신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집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엔 아까부터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엄마한테 이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몸이 몽땅 녹아 물처럼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희야. 왜? 너 울었어?" 뜨락에 벗어 둔 신을 대강 꿰어 신고 엄마가 내게로 달려왔다. 참으려 했는데 막상 엄마 앞에 서자 참아지지 않았다. "엄마!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목구멍에서 참았던 두려움과 공포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엄마 품에서 목 놓아 울었다. "미친년.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와서." 내 말을 들은 엄마의 반응이었다. 엄마는 믿지 않았다. 다음 날 엄마는 당장 나를 데리고 내가 갔던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 선생님께 직접 결과를 듣고 나서도 엄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엄마가 이끄는 대로 다른 병원도 두 군데나 더 갔다. 진단은 같았다. 나는 감히 엄마를 쳐다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엄마는 내 옆에 앉지 않고 뒷좌석에 앉았다. 나는 엄마가 소리 없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엄마의 슬픔이 마음 아파서 나 또한 소리 죽여 울었다.
나를 데리고 병원 순례를 하는 중에도 엄마의 농사일은 계속되었다. 엄마는 내게 더 이상 밭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실컷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과 놀러 나가라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찾아 고추밭으로 나갔다. 하늘은 맑은데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빗소리가 들렸다. 나는 밭고랑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엄마의 곡소리를 듣다가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밭에서 돌아온 엄마도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나도 눈가가 붉게 익어 있었다. 우리는 짐짓 우스갯소리를 하고 억지웃음을 짜냈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위해 속없는 척 연기를 했다.
나는 이 소설들을 주로 점자 단말기로 썼다. 내 책상 위에는 점자판과 음성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 스마트폰이 있다. 소리를 들으며 타자를 친다. 그리고 손으로 점자를 더듬어 읽으며 퇴고를 거친다. 내 모든 원고는 그런 과정으로 완성됐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내 이야기다. 작가의 말을 에세이 형식으로 써보았다. 나는 여러 형식을 자유롭게 오가며 독자들과 격의 없이 만나길 원한다.
나는 현실 파악이 빠르다. 그렇기에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 역시 빨랐다. 중학생이 되자 내 미래가 훤히 예상됐다.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적어 내라 하면 ‘경리’라고 썼다. 그게 현실적인 타협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는 미래를 조금도 꿈꾸지 못했다.
어머니의 교육관은 확고했다. 무조건 취직 잘되는 기술을 배우라는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글 쓰는 삶을 어찌 상상해 봤겠는가? 나는 친척 언니들처럼 읍내 상고를 졸업해 농협이나 인근 물류 창고에 경리로 취직하는 미래를 의심해 본 적 없었다. 그런 내게 시각장애 선고는 확고했던 운명이 몽땅 어그러지는 변수였다. 그 무렵 내가 가장 암담하게 느꼈던 것은 평생 캄캄한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보다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방인처럼 겉돌기 시작했다. 시력은 급격하게 떨어져 맨 앞자리에 앉아도 칠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학업에 대한 열정도 시들해졌다. 시야가 극도로 좁아져 책을 읽을 때도 자를 대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음 문장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줄로 건너뛰기 십상이었다.
시력이 떨어지는 속도만큼 마음속에 울분이 가파르게 차올랐다. 나는 공책에 칠판 판서를 베껴 쓰는 대신 세상을 저주하는 말을 써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한국 근대문학 소설집을 빌려 읽게 되었다. 황순원과 김동인과 김유정의 소설에 빠졌다. 어느새 나는 저주의 말 대신 콩트를 쓰기 시작했다.
시력이 점점 사라지며 책을 읽는 속도도 떨어지고 금세 눈이 피로해졌다. 하지만 읽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책 속만이 유일한 도피처였고 나를 자유롭게 했으며 위안이 되었다. 눈이 보일 때 최대한 많은 책을 읽고 싶었다.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을 때 기억 속 서랍을 열어 꺼내 보며 캄캄한 현실을 견디겠다고 결심했다.
불행의 수위가 있다면 나는 애송이였다. 장애인 학교에는 참담하다 못해 믿기 힘든 사연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 해서 모두가 절망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았다. 나는 장애인 학교를 다니면서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공책에 A의 아버지를 비난하는 내용을 내갈겼다. 이렇게라도 울분을 내뱉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사실 A의 아버지는 화풀이 대상이었다. 나는 비참한 현실과 변하지 않을 미래를 향해 울분을 터뜨리고 싶었던 것 같다. 멀어가는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였다. 그것들은 내 공책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언젠가 이 새카만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고 말 거라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내 의지는 장애인 학교 졸업과 함께 사라졌다. 그때 쓴 데스노트도 잃어버렸다.
스무 살, 안마사 생활을 시작하며 다시 책을 찾았다. 이제는 시력이 소멸된 눈 대신 소리로 듣는 방식으로 책을 읽었다. 내 하루는 고되고 지루했다. 10대 시절 책 속으로 도피했듯 다시 소설을 듣고 음미했다. 독서는 자유롭지 못한 나를 아주 먼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한글 점자를 익히고 점자 단말기를 중고로 구매했다. 점자 단말기는 음성 지원과 점자 출력이 모두 가능해서 컴퓨터로 쓰는 것보다 편리했다. 글을 기록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나는 무엇이든 쓰고 싶었다.
때마침 장애 인식 개선 문화제를 알게 됐다. 나는 전년도 대상을 받은 수필을 찾아 읽어보고 이 정도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오만에 빠져 순식간에 원고를 썼다. 그리고 문체부장관상을 탔다. 성과가 있자 글쓰기가 더 재밌어졌다. 수필을 써서 여러 공모전에 응모를 했다. 시간만 있으면 나는 무언가를 써댔다. 케케묵어 삭아 없어진 줄 알았던 꿈이 되살아났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이었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0여 년을 가슴에만 품고 있던 이야기가 기다렸다는 듯 손끝으로 밀려 나왔다. 원고를 수시로 듣고 손끝으로 더듬으며 고쳤다. 그렇게 퇴고한 소설을 공모전에 냈다. 은근한 기대를 갖고 발표를 기다렸다. 결론은 모두 낙방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은 첫 수필 당선으로 끝나버렸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내 주변에는 나와 공감하며 문학을 이야기할 이가 전무했다. 화르르 타올랐던 꿈이 풀썩 스러졌다. 나는 다시 책 속으로 도피했다. 다양한 글을 자유롭게 읽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자고 나를 설득하고 현실에 순응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서른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성실한 태도와 절제된 생활 습관으로 삶은 안정됐고 일상은 평온했다. 그런데 나는 때때로 허무함을 느꼈다.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점자 단말기를 꺼내 노트북 앞에 앉았다. 자판 위에 손을 올리고 한 줄이라도 써보려 애를 썼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단어와 이야기들이 유영했지만 무언가를 써보려 하면 거짓말처럼 손이 굳어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병에 걸린 것 같았다.
2022년 11월, 복지관에서 비대면 산문 교실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봤다. 나는 강한 끌림을 느꼈고 반드시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스승 박현경을 만났다. 그녀는 신춘문예 소설로 등단해 현재는 동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오랜 시간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를 해왔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글쓰기 강의는 처음이라 했다.
수업이 끝난 뒤 나는 마음이 울렁거려 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을 빼놓고 집 안을 서성이다가 가구에 정강이를 찧고 벽에 이마를 부딪쳤다. 요동치는 가슴을 꾹 눌렀다. 내 안에서 무언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작은 틈새는 점점 벌어져 단단히 세워두었던 감정의 둑을 무너뜨리고 밖으로 솟구쳐 나왔다. 그날 선생님의 눈물은 내 안에 들끓던 글쓰기의 열망을 깨운 것이다. 나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글을 읽어주고 감정을 교류할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멈출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끝도 없이 생각났다. 자판 위에서 손가락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통제되지 않았다.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원고가 쌓여 있었다. 피드백받은 원고도 수정해서 다시 평가를 받고 싶었다. 갈증이 났다. 꺼내놓지 못하는 원고들 때문에 애가 탔다. 이대로 선생님과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수업이 종강하고도 몇 달을, 써놓은 원고를 끌어안고 끙끙 앓았다. 수차례 스마트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나는 타인에게 부탁을 하거나 폐를 끼치는 행위를 극도로 경계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뻔뻔해지고 싶었다. 무작정 매달려 보기로 했다. 용기를 내서 박현경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은 나를 몹시 반가워했다. 당신도 간혹 내 생각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떼쓰듯 내 원고 좀 봐달라고 애원했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나만을 위한 글쓰기 지도가 시작됐다. 원고지 20매 분량의 원고를 가지고 수십 번 메일을 주고받으며 퇴고 과정을 교육받았다. 선생님은 지치지 않았다.
완성된 원고를 수필 공모전에 출품했다. 그 원고로 나는 큰 상을 받았다. 그때까지 선생님과 직접 대면한 일은 없었다. 우리는 전화와 이메일로만 소통했다.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내 시상식 날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솟구치는 오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감사했다. 글쓰기를 가르쳐 줘서도, 상을 받은 감동 때문만도 아니었다. 내 감정을 공감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선생님은 나를 달래며 앞으로도 많은 글을 써서 보여달라고 했다.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 약속하셨다. 선생님과의 대면 이후 나는 매일같이 울고 그 눈물이 마를 새 없이 원고를 썼다. 선생님은 가슴이 텅 빌 때까지 고여 있는 이야기들을 몽땅 쏟아내라 격려했다. 그래야 새로운 글도 쓸 수 있다 조언하셨다.
선생님은 선배 작가로서 출간까지의 고된 과정을 세밀히 일러주셨다. 세상에 글 잘 쓰는 청년들은 넘쳐나고 너에게는 출판사와 독자들의 눈에 띌 만한 장점은 당장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분명 네 원고에 깃든 힘을 알아볼 편집자가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투고를 해보자. 나는 선생님을 믿었다. 출간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선생님께 내 모든 감정을 공감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출판사에 투고 메일을 보내면서도 계속 원고를 썼다. 이제는 선생님께 내 소설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처음으로 타인에게 꿈을 고백했다. 힐난 대신 응원이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얼마든지 쓰렴. 그리고 내게 보여다오." 선생님은 내 소설 때문에 밤을 지새웠다. 더 전문적으로 피드백을 주지 못해 안타깝다 하셨다. 그 무렵 스물여덟 번째 투고한 출판사에서 산문집을 출간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선생님은 나보다 더 기뻐하셨다. 틈틈이 쓴 단편소설로 공모전에 도전했다. 모두 낙방이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거나 글을 그만 쓰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선생님께 보여드리고자 글을 썼다면 지금은 내가 글을 쓰는 일이 좋아서 멈출 수가 없다.
소설을 쓴다. 장래 희망이 경리였던 소녀는 눈이 먼 안마사가 되었고 지금은 글을 쓰며 살아간다. 세월 속 묵었던 이야기들을 하나둘 풀어내며 해방감을 느낀다. 오래전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빠르게 내달릴 때처럼 싱그러운 바람이 환희가 되어 가슴에 들어찬다. 스승의 말대로 내 안의 모든 상념을 내던지고 나니 다른 시야가 열렸다. 차별에 길들여져 핍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이들,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정신까지 병들어가는 내 주변 이웃들, 분하고 억울한 삶을 인지조차 못 하는 내 장애인 동료들. 내 두 눈에 사람들의 인생이 들어왔다. 그들의 한스러운 감정이 내게 흘러들었다. 나는 어느새 그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리라! 그리하여 덧없고 허망한 인생 따위가 아니라 의미 있는 생이었음을 대변하겠다. 앞으로 계속 소설을 써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나는 캄캄한 눈으로 세상 가장 어두운 곳의 이야기를 밝은 세상에 내놓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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